기신 (6)
천매화가 있는 장소로 향하자, 에일레야랑 사티가 열심히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째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둘.
진짜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 내가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던 모양이라 내가 들어오자마자 화악하고 표정이 풀어지는 것이 고생이 많았다 싶었다.
둘은 이따 밤에 잔뜩 칭찬해주기로 하고서, 눈앞에 있는 흑발의 여인을 바라봤다.
전에 봤던 천마의 제자라는 놈이 입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검은 도포에 천이란 글자가 떡하니 박혀있는 차림에, 펑퍼짐한 옷인데도 불구하고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가스...
아니, 흉부를 가진 여인이었다.
인간치고는 발육이 대단한 이유는 역시 내공 때문일까.
마법사들도 그렇더만.
애초에 마법사는 심장, 그러니까 가슴쪽에 서클을 만드니까 가슴이 커진다고 쳐도, 무림인들은 단전을 만드니까 그렇게 따지면 천매화는 가슴이 아니라 엉덩이가 커야하는 것이 더 말이 되긴 했다.
어...
근데 엉덩이도 크네.
진짜로 관련 있나?
아니지, 그럼 선천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종족인 사티로스로 태어난 사티가 상대적으로 빈유인게 말이 안되니까 그냥 타고나는 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거다.
아무튼, 잘 타고난 천매화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일어나서는 주먹을 손바닥에 대더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저게 포권인가 뭔가하는 그건가.
처음 봤다.
아니, TV로는 몇 번 봤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무림인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좀 폐쇄적이라고 해야 하나, 끼리끼리 논다고 해야 하나.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종족만 봐서는 같은 인간이어도 별로 끼워 주거나 하지 않는 족속들이라 그랬다.
뭐, 딱히 무림인이라고 그런 건 아니고 마법사나 마녀, 주술사...
그 밖에도 초능력자라든지 뭐라든지하는, 인간이면서도 다른 평범한 인간과 달리 초상적인 능력을 타고나거나, 이를 익힌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인간이랑 또 지들끼리 선을 나누는 느낌이었다.
모든 종족이 평등하다는 기치를 걸고 있는 세계 정부였지만, 실지로는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새끼는 아무도 없고, 대놓고 차별할 순 없으니 가진 능력대로 차별하는 거라고 보면 됐다.
같은 종족이어도, 지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면 선을 가른다는 거지.
일부 음모론자들은 일부러 세계 정부에서 이를 유도하는 거란 주장도 하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가장 많은 인구수, 사실상 따지고 보면 세계 정부의 구성원의 7할가량인 인간들이 단합하면 여러모로 다루기 곤란하니까 흩어놓으려고 한다나.
타고난 신체 능력이라든지 초상능력은 다른 이종족에 비하면 많이 달려도, 수많은 세상에서 인간이 주종족, 혹은 패권종족인 경우도 아주 많았다.
그들이 그런 위상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숫자가 많다는 것만으론 해결이 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번식력은 모든 종족들을 통틀어본다면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인간이 가장 많은 숫자를 지닌 이유는, 인간이 패권 종족 혹은 주종족인 경우에는 다른 이종족들은 극단적으로 억압하거나 죽여놨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았던 세상처럼, 아주 인간만이 살고 있는 세상도 종종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부분은 내가 살았던 세상처럼 아예 인간만이 살았던 세상이 아니라, 과거에는 다른 종족도 섞여 살았던 세상이 많았던 것을 보면 어쩌면 그 좆간질이 인간의 특징이라고 봐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좆간질이 특징이라고 할만한데 맞나 싶긴 한데.
아무튼, 그것이 가능하게 한 가장 큰 무기, 과학을 비롯한 이런저런 무기들은 죄다 압류당한 시점에선, 말 그대로 타고난 능력으로만 따져야되게 된 시점에서의 인간은 좆밥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세계 정부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되고, 냉병기를 비롯한 몇몇 것들을 제외하곤 죄다 압수당한 시점에서 맨몸으론 인간이 다른 종족에 비해 나은 건 숫자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그렇다 보니 상당히 그럴듯한 음모론이었지만 그게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딱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그렇게 좆밥이 된 인간들이었지만 그런 인간 중에서도 이종족과 대항이 가능한 몇 안되는 인간들 중 하나가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무공을 익힌 저들, 무림인들이었다.
천마의 존재와 현시점에서도 몇 안 되게 남아있는 인류의 이빨이란 점에서 자부심이 상당한 것이 무림인들인데... 이렇게 먼저 인사하려는 걸 보면 처음 봤던 그 새끼보단 싹수가 좋은 듯싶어 보여서 호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놓고 이쪽에서 시비를 걸 생각으로 온 거라 호감이든 가슴이 크던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천마의 제자, 천매화.
릴리스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아직 스물도 안 된 나이로 절정급에 이른 무인이라고 들었다.
초인에 범주에 드는 초절정이란 벽을 깨지 못한, 바로 그 전단계의 무인.
여기까지만 보면, 천마의 제자치곤 애매하지 않나 싶은데.
나도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천마의 수제자는 딱히 당장 강하고 약하고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강한 것보다는 얼마나 재능충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하나.
눈앞의 천매화는, 그런 점에서 천마의 수제자라고 불릴만한 천재였다.
천마의 눈에 띄어서 제자가 된 지 불과 반 년만에 절정급에 이르렀는데, 그전까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모양이었다는 모양이더라고.
나처럼 기프트나 환골탈태(물리)같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재능만으로 그렇게 올라왔으니까 대단한 인물이긴 했다.
그러니까,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겠지.
그래서, 천매화가 내게 하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에일레야와 사티에게 말했다.
“둘 다 고생했어, 가서 좀 쉬고 있어.”
“어, 어?”
천매화의 인사를 쌩까고서 챙겨주자 사티가 슬쩍 천매화의 눈치를 봤지만, 사티랑 달리 에일레야는 뭔가 있나보구나하고 눈치를 챘는지 슬쩍 사티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할게요. 자, 가자. 사티.”
“아, 네에...”
둘이 물러나고서 슬쩍 쳐다보자, 아직도 포권을 취한 채로 굳어있는 천매화가 보였다.
인사하던 중에 끊겨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천매화의 눈동자가 좀 많이 따가웠지만, 그래도 열심히 쌩까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서, 내가 봤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질 것 같은 각도로 몸을 틀어서 자세를 잡은 채로 말했다.
“귀찮은 인사는 생략하고 우선 자리에 앉지 그러나? 내가 좀 바쁜 사람이라서.”
거만하게, 굳이 따지자면 전에 그 천 뭐시기만큼 꼴받게 껄렁거리며 말하자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천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걸 참네.
그 천뭐시기하던 놈이였으면 바로 발작하면서 들이박았을 텐데, 인내심이 생각보다 강한 듯싶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미 사전에 쪼잔하면서도 사람 신경을 살살 긁는 방법을 잔뜩 생각해두고 온 참이었다.
“하여간, 무공인지 뭔지 배운 새끼들 아니랄까봐 티를 못 내서 안달이라니까.”
“......”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까지도 허리춤에 칼이나 차고 껄렁대는 협잡배들...”
대놓고 투덜투덜거리면서 호아란에게 들은, 무틀딱...
아니, 무림인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욕을 연속으로 가했는데, 이쪽을 뚱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천매화가 보였다.
이것도 참아?
독하다 독해.
그래도 이건 못 참을걸.
“그보다, 자리에 앉았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자기소개 안 하나?”
앞에서 하지 말라 해놓고 뒤에 와서 딴소리하기.
내가 이전 세상에서 한참 일하고 다녔을 때, 딱 부장이 이런 타입의 상사였다.
진짜 좆같아서 하루하루 참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기껏 얻은 직장에서 잘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애써 참았지.
근데 취직한지 1년이 채 안되서 세상이 그 꼬라지가 날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맨들거리던 대머리를 존나 후려쳐보기라도 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한이었다.
존나 야무지게 때릴 자신 있었는데.
아무튼, 고아원장의 개터진 인성질에 단련된 인내심으로도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게 앞뒤가 다른 언행인데...
“실례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한조님. 이번에 세계 정부로부터 임무를 받아 파견된 천매화라고 합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으나 부디 아무쪼록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스윽, 하고 고개를 숙이고선 그렇게 말하는 천매화.
조금 전에 내가 말했던 것 때문인지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오자 직감했다.
“......”
가슴이 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천매화란 인간, 생각 이상으로 대인배였다.
“으흠.”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해주고 천매화를 바라봤다.
당황하지 말자.
이제 시작이었고, 아직 깔 거리는 수두룩했다.
“그나저나, 내가 천마님의 제자랑은 인연이 있긴 하는가 보군. 저번에도 한 명 본적이 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알고는 있는 천 뭐시기를 꺼내 들었다.
일단 같은 천씨를 돌려쓰는 사이기도 하고, 천매화도 누군지는 알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내가 그놈을 뚜까패서 털어버렸던 걸 말해주면서 신경을 박박 긁어댈 생각이었는데, 고개를 끄덕인 천매화가 먼저 선수를 쳐서 말했다.
“무 사형 말씀이시로군요. 그때의 일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제가 스승님께 천의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게도 은인이신 분이신데 인사가 너무 늦었으니 이리 대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 그, 그래?”
그 새끼 진짜 허접하던데, 하고 말하기도 전에 덕분에 출세했다고 감사하다는 소리를 들어버리자 살짝 당황했다.
그 새끼.
주변 사람이랑 별로 친하게 지내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었나 보다.
그럴 것 같긴 했는데, 그렇다고 같은 천마의 제자인데도 줘패줘서 감사한다고 인사를 받을 정도로 개차반인 새끼일 줄은 몰랐는데.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내 덕분에 천마님의 눈에 들었다니, 거 정말로 내 덕분이로구만... 혹시 뭐 보답이라도 해주는 건 없나? 예를 들어서...”
스윽, 하고 천매화를 훑어봤다.
정확히는 훑어보는 척하고서 살짝 그 옆을 보긴 했지만.
연기긴 했지만, 근처에서 전부 보고 있을 아내들이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순 없었다.
양심에 찔린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순수하게 후환이 두려워서 못하는 거였다.
아내, 특히 릴리스의 손 한정으론 가냘프기 짝이없는 내 옆구리랑 여리여리한 발등을 위해서라도 인간 평균에 비하면 발육이 참 좋은 천매화의 가슴이라든지 엉덩이라든지를 보지 않도록 조심했다.
아무튼, 이번에도 그 좆같았던 대머리 과장의 성추행을 따라했는데...
“과연, 이해했습니다.”
그런 나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천매화.
뭐지.
뭘 이해했다는 거지.
설마하니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다는 걸 들켰나 생각했는데.
툭, 하고 눈앞에서 천매화가 걸치고 있던 도포 자락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