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종족 전용 남창이 되었다 (358)화 (358/523)

기신 (9)

“오랜만이군, 호아란.”

“...그래, 정말로 오랜만이구나, 천마.”

천마의 말에 모습을 드러낸 호아란이 보기 드물게 얼굴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한가지,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올 때까지 숨을 수 있었던 것인지 묻고 싶구나. 사방에 부적을 뿌려두었는데.”

나도 궁금했다.

당장 호아란이 사방에 뿌려둔 결계도 그렇고, 그것만이 아니라 아리아드가 뻗쳐보낸 세계수의 뿌리들도 그렇고, 카르미나가 그 뿌리에 연동시켜놓은 황금의 전사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천마같은 괴물딱지가 여기로 넘어온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당장 나만해도, 본질을 꿰뚫어보는...

카루라를 통해 얻게 된, 신조의 눈.

천통안을 통해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갑자기 꼬맹이가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예 천마가 내 앞에 내려오기 전까지도 전혀 몰랐고.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인 천마가 말했다.

“이번에 심심풀이 삼아 만든 무공 덕분이지. 일전에 호아란, 네가 나를 피하기 전에 썼던 주술을 흉내내본 것인데 제법 쓸만하더군.”

천마가 말하는 주술이 뭘 말하는 건지 알겠다.

기척은 물론이거니와 냄새, 심지어 존재감 그 자체를 영으로 만들어버리는 주술이었다.

실제로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옆에서 자지를 빨던, 보지에 박아대던 눈치채지 못하는 주술이었다.

실제로 그걸 써서 한밤중에 몰래 내 자지를 빨아댔던 장본인인 호아란이 그런 천마의 말에 살짝 움찔하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나도 그때 일이 떠올랐는데 호아란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무공으로, 본녀의 주술을 흉내냈단 말이냐?”

“우문이군. 흉내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결국 기를 다루어 행하는 일일 뿐이니.”

마법도, 주술도, 무공도, 결국 맥을 달리하는 능력이 아니다.

마나, 기, 내공.

서로 달리 부를 뿐, 결국 같은 힘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자면 천마의 말이 맞긴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천마의 말은, 벼락이든 정전기든 아니면 전선에 꽂아 쓰는 전기든, 결국 같은 거니 쓰지 못할 것도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말이야 쉽지, 그딴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어찌됐건, 호아란. 다시 한 번 말하마. 이 아이를 이 몸에게 넘기거라. 주술따위보단 무공을 익히는 쪽이 이 아이에겐 더 잘 맞을 것 같으...”

촤라라락, 하고 호아란의 소매에서 부적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ㅡ지랄하지말거라, 천마!”

오랜만에 제대로 빡친 호아란이 일갈했다.

그런 호아란의 반응에 좋다는 듯이 화색이 된 천마가 말했다.

“아주 좋군! 이 몸이 이기면 저 아이를 데려가마, 호아란!”

푸확, 천마에게서 솟구치는 기에 기가 질렸다.

억누르고 있었던 것을 풀었는지, 마구 뻗대면서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기에, 이쪽이 짓눌려서 뭉개질 것 같았다.

인간의 모습을 한 폭풍이, 바로 옆에서 몰아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팔 하나가 덜렁거리는 거 빼곤 멀쩡한 나랑 달리, 바로 옆에서 기절 중인 천매화가 덕분에 안색이 시퍼래지고 있다는 거였다.

이쪽도 기가 눌려서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는데, 이미 의식을 잃고 기절 중인 천매화가 바로 옆에서 쏟아지는 천마의 기에 억눌려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이와중에 호아란이랑 천마가 한판 붙으면, 정말로 숨이 넘어갈 게 분명했다.

“호아란! 일단 멈춰봐요!”

그런 내 외침에, 그제서야 내 옆에서 뻗어있던 천매화를 기억해냈는지 기세를 줄이는 호아란.

“...흠, 깜빡했군.”

아주 개또라이년은 아니었는지, 천마도 보라돌이가 된 천매화를 보고는 기세를 줄이기 시작했다.

지금이었다.

촤르르륵!

“음?”

내 몸을 두르는 천호의 갑주를 보고서 천마가 주먹을 휘둘렀다.

유스티티아가 새로 뽑아주고선, 사실상 처음으로 써본 아티펙트의 성능 테스트치고는 너무 빡센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마누라, 유스티티아를 믿고서 달렸다.

콰지지직!

천마의 주먹이 천호의 갑주에 꽂히자, 수십 겹으로 펼쳐지는 방호 마법이 일순간에 개박살이 났다.

그냥 가볍게 휘두른 주먹으로만 보였는데도 그랬다.

더욱이, 그렇게 방호 마법을 깨부수며 꽂힌 주먹에 쩌저적, 갑주에 금이 가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역시 유스티티아였다.

비록 천호의 갑주에 새겨놓은 방호 마법이 개박살나고, 갑주에도 금이 갔지만 내 옆구리가 박살나는 일은 없었다.

갈빗대가 몇 개 부러졌는지, 안쪽에서부터 찔리는 듯한 찌르르한 느낌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맨몸으로 맞았으면 내 몸이 한과 조로 나뉘었을 테니 이 정도면 부상의 축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로 천매화를 들쳐업고서 등 뒤로 날개를 뽑아서 탈출했다.

오싹, 하고 등 뒤로 뻗쳐나오는 천마의 기운.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믿는 마누라는 유스티티아만이 아니었다.

“본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천마!”

나랑 천매화가 천마의 옆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호아란이 천마에게 부적들을 들이부었으니까.

번쩍번쩍, 조금 전까지만해도 나랑 천매화가 있던... 천마가 있던 자리에서 부적들에서 쏟아부어지는 주술들이 마구 터져나왔다.

불꽃과 얼음, 번개들이 마구 튀어대는 것이 너무 진심인게 아닌가 살짝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데, 나랑 달리 호아란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퐁, 퐁, 퐁...!

부적들을 쏟아붓는 가운데, 소매 틈에서 부적들과 같이 튀어나온 인형들이 공중제비를 돌더니, 이윽고 호아란이 되었다.

정확히는, 호아란의 모습을 본 딴 분신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분신들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수인을 맺었다.

꼬리 하나도 아니고, 셋씩 달린 분신들이 열 체가 동시에 맺은 수인과 함께, 꼬리 하나나 둘 달린 분신들은 호아란과 함께 부적들을 쏟아부었다.

이윽고, 부적들이 쏟아부어 지는 가운데, 결계가 펼쳐졌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 실력이 별로 늘지는 않았군, 호아란.”

성큼성큼, 쏟아부어진 부적들에 옷이 찢어지고, 몸에도 이런저런 상처가 난 천마가 걸어서 펼쳐진 결계 앞까지 나왔다.

“그게 아니면, 고작 이런 걸로 이 몸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호아란.”

꾸욱, 주먹을 움켜쥐는 천마의 모습과 함께 호아란이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느니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음?”

천마의 바닥에, 무수하게 쏟아부어 졌던 부적들의 파편이 빛을 뿜었다.

“주박의 술, ‘영겁’...!”

파편들이 서로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기다란 끈들이 되었다.

한때, 릴리스조차도 꼼짝 못 하게 묶었던 주술.

더욱이, 그때에 비하면 몇 배나 되는 부적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진 끈들이, 한순간에 천마의 몸을 꽁꽁 에워쌌다.

“어...”

좀 많이 남사스러운 모습으로.

아니, 저게 포박하는데 확실히 효과적인 포박이긴 한데.

제자인 천매화랑 달리, 많이 꼬맹이인 천마라서 좀 덜 남사스러워 보인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흠, 이건 확실히 조금 질기긴 하군.”

근데, 기껏 묶어놓은 끈들이 천마가 힘을 주기 시작하자 쁘지직거리며 끊어지려고 했다.

생각해보니까 그때 릴리스도 저거에 묶여서 꼼짝도 못했던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묶인 탓에 힘을 쓰면 내가 다칠까봐 제대로 못 벗어났던 거였다.

정작 천마는 그런 사정 따윈 없으니, 마음껏 힘을 써가면서 주박을 풀려고 드는 거고.

“미안하지만, 그걸 풀게 둘 생각도 없느니라.”

쫘아악, 하고 좁혀진 결계가 매듭이 끊어지려 들던 천마의 몸을 재차 에워쌌다.

더욱이, 결계를 유지하느라 수인을 맺고 있던 호아란의 분신들이 그대로 천마에게 달려들었다.

길다랗게 난 손톱을 천마에게 찔러넣는 열 체의 분신들을 보니까 아무리 천마라도 꼼짝도 못하고 찔릴 거라고 생각했다.

“호아란, 너 치고는 많이 과격한 수법이구나.”

재밌군, 하고 히쭉 웃는 천마의 등 뒤로, 끔찍한 형상이 떠올랐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천통안.

호아란에게 주술을 배워서 뚫렸던 심문의 능력이 여지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능력.

즉, 제 육감이 열리게 되는 능력이라면, 천통안은 ‘보는 것’ 한정으로는 심문의 훨씬 윗줄에 있는 능력이었다.

심문을 열고 나서 호아란이 내게 자신의 본질.

수백 년 묵은 여우 요괴로서의 본질인, 거대한 여우를 보여줬던 것처럼.

그러한 본질을, 딱히 상대가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봐버리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숨기려고 하든, 그렇지 않든 그냥 봐버린다.

그러한 능력이기에.

그리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것이, 눈앞에 있는... 가슴이 살짝 많이 부족할 뿐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로밖에는 안 보이는 천마의 본질이리라.

무수한 해골들이 뒤엉켜 있는 거대한 거인.

수많은 사람이, 그 죽음으로 만들어낸 ‘기신’의 본질.

지옥에서 올라온, 해골로 이루어진, 마귀같은 형상을 띤 기의 덩어리가 두 팔을 벌렸다.

“천마신공.”

천마에게 달려들었던 호아란의 분신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흔적조차, 식신의 본형인 인형이 가루조차 남지 않고 흩어져서 사라졌다.

“만마강림.”

그 뒤에는 결계가, 천마를 뒤엉켜 묶고 있던 매듭들이 일제히 끊겨졌다.

자신은 고작 이딴 걸로 묶을 수 없다는 듯이, 지상에 내린 마귀가 흉소를 짓는다.

그리고.

“천마신공.”

그 마귀 밑에서 히쭉 웃은 소녀가 발을 내딛으려 했다.

제아무리 식신에게 데미지를 돌렸다고 한들, 꼬리 셋 이상 달린 분신들이 열 체나 가까이 일거에 사라진 충격으로 가느다란 피를 입 밖으로 흘리는 호아란에게로.

“천마군림ㅡ”

안 되겠다 이거.

호아란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쳤고 상대가 나빴다.

만약, 이 일대를 정화하고 술식을 짜내고 뒈질 뻔했던 나를 재조립하기 위해서 꼬리 다섯이 달린 분신들을 소모하지 않았더라면.

그 분신들을 복구했을 시일이 있었더라면.

여기가 호아란의 영역인 여우의 숲이었다면.

적어도 호아란이 천마가 느닷없이 들이닥칠 거라는 걸 하루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럼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거다.

그게 아니라, 나나 천매화에게 향하는, 저 어마무시한 괴물딱지가 내뿜는 기를 그냥 곧이곧대로 받게 내버려 뒀더라도 이렇게 쉽게 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물며,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죄다 때려부술 작정인 천마랑 달리 이 땅에 호아란이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지 않았어도 결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가정이었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정해져 있었다.

“릴리스ㅡ!”

내 외침과 함께, 발을 내딛기 직전의 천마의 얼굴에 릴리스의 발이 들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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