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 (10)
콰지지지지지직!
그대로 천마를 쟁기 삼아서 땅을 갈아엎어 버리는 릴리스.
일전에 봤던, 날개를 세 개나 뽑은 릴리스가 거기에 있었다.
근데...
“...피부가 멀쩡하네?”
그땐 푸르죽죽했던데다가, 동공까지도 검게 물들어있던 릴리스였는데 지금은 날개가 세 짝이 된 거 외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방금의, 내 눈으론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천마의 얼굴을 발로 찍어버린 릴리스의 옷이 죄다 터져나가서 이것저것 죄다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릴리스의 몸 위로 흔히들 비키니 갑옷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옷이 달라붙었다.
오른팔에는, 내 아티펙트인 용발톱과 비슷한 형상의 거대한 건틀렛까지.
“저건... 뭐여.”
저건 처음 보는 건데.
“릴리스가 진짜로 싸우기 위한 복장이라고 해야 하려나, 뭐 비슷한 거야.”
릴리스를 꺼내든 이상, 일단 비밀을 지키고 자시고 할 건 다 때려치운 셈이라 그냥 유스티티아도 냅다 나온 모양이었다.
“그보다, 한조? 살짝 뒤로 와볼래?”
유스티티아의 말에 뒤로 살짝 물러나자, 그 뒤에 왜 유스티티아가 나보고 물러나라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호재로군! 릴리스!”
호아란의 부적 세례에도 잔상처가 나는 걸로 그쳤던 천마가 쌍코피를 흘린 채로 벌떡 일어나더니 광소하고 있었다.
그런 천마와 함께, 그 뒤로 보이는 괴물딱지도 처웃어 재끼고 있고.
그때마다 쩌적쩌적, 주변이 지진이라도 난 듯 죄다 박살 나고 있었다.
단지, 그렇게 개박살나는 와중에 내가 딱 물러난 곳 이후로는 넘어오지 않고 있었고.
이유는...
“으응, 여전히 기운 차네에, 천마느은.”
세계수의 뿌리들이, 땅을 지탱하는 것이 보였다.
멀리까지 뻗쳐보낸 세계수의 뿌리는, 사실상 세계수의 입장에선 ‘잔뿌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딱, 내가 물러난 걸음 만큼까지의 범위는 중앙에 위치한 세계수, 아리아드의 ‘본뿌리’가 뻗어져 있는 범위였다.
그런 뿌리들이, 갈라지는 땅들을 붙잡고, 충격들을 뿌리로 대신해서 받아내는 걸로 버텨내는 것이 보였다.
더욱이 릴리스한테 바통 터치한 호아란이 그런 아리아드를 보조해서, 재차 결계를 펼치는 것도 보였고.
즉석에서, 호아란이 아리아드의 뿌리를 매개로 삼아서 펼치는 결계들이 릴리스랑 천마의 주위를 덮어간다.
덕분에 날아드는 파편이고, 뭐고 전부 결계에 가로막혀서 이쪽으론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호아란, 괜찮은 거에요?”
“으음, 면목 없구나, 한조야.”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는 호아란을 보고서 카르미나를 불렀다.
“여에게 맡겨만 주거라!”
사령술사지만, 사실상 카르미나의 세상에선 사제랑 같은 느낌이기도 했던 카르미나는 사령술 말고도 회복술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 카르미나가 곧장 호아란에게 달라붙어서 회복술을 펼치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살짝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던 호아란의 얼굴에 빠르게 핏기가 도는 것도 보였다.
“카르미나, 호아란은?”
그래도 걱정되어서 내가 묻자, 카르미나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노라! 단순한 내상이니, 이 정도면 하루면 나을 것이다.”
피를 토해서 걱정했는데 전치 하루였나보다.
아니지, 호아란 수준의 강자가 몇 분이 채 안 되는 격돌만으로, 그마저도 직접적인 공격은 하나도 받지 않은 상태로 전치 하루의 부상을 입은 것이라고 하는 게 낫나...
“부탁할게, 카르미나.”
“음! 하지만, 여는 저쪽이 더 걱정이구나! 이러다가 싹 다 엎어지겠노라.”
카르미나의 말에 살짝 눈을 돌리고 있었던 광경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아하! 아하하하하! 즐겁구나, 릴리스! 너도 그렇지 않나!”
“지랄하지 마, 이 미친년아!”
호아란이 펼친 결계 안에서, 온갖 것을 죄다 때려 부수고 있는 천마랑 릴리스.
흡사 자연 재해나 다름없는 폭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날리는 주먹질에 별의 별게 다 터져나가고 있었으니까.
띠리리링~
“어...”
갑자기 울린 알림에 뒷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보니까 긴급 알림 문자가 와있었다.
딱, 내가 있는 지역에서 돌발성 지진이 일었다는 알림이었다.
“......지진 아닌데.”
릴리스랑 천마가 서로 드잡이하는 중인 건데.
진도는 별로 안 됐지만, 두 사람이 서로 치고받는 게 진도 단위로 따져야 하는 충격량이 발생한다는 게 얼탱이가 없었다.
“...그나저나, 유스티티아는 지금 뭐해?”
아까부터 하늘에 대고 손가락을 휘젓고 있는 유스티티아가 보여서 묻자, 그런 내 말에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이 주위로 결계를 치고 있거든.”
누가 보면 큰일이니까, 하고 태평하게 말하는 유스티티아를 보다가, 천마를 다시 땅에 내리꽂더니, 그대로 밟아서 지진을 일으키는 릴리스를 봤다.
존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릴리스 파이팅!”
열심히 릴리스를 응원했다.
두 시간에 걸친 괴물 대전은, 결국 릴리스가 천마를 상대로 1승을 더 거머쥐는 것으로 끝났다.
“전보다 더 격차가 벌어져 버렸군, 릴리스.”
“입 다물어, 이 미친년아.”
“다음 대련의 기약을 잡아준다면 다물어주마.”
“이 개또라이년, 진짜...”
옷들이 죄다 찢겨나가서 너덜너덜해진, 사실상 알몸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릴리스에게 질질 끌려온 천마가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고, 그런 천마의 말에 골통이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는 릴리스가 보였다.
"그보다, 이거 어쩔건데."
릴리스의 말에 천마가 주변을 보다가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확실히, 이번 건 이 몸이 과하긴 했군.”
과한 수준인가 이게...
호아란과 아리아드가 막아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 정도로는 절대 안 끝났을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인건 여기가 한참 이것저것 세우고 있던 곳이랑 상당히 멀찍하게 떨어진 장소라는 것 정도였다.
땅이 존나게 흔들려댔으니까 이따 가서 피해가 없나 확인해보기야 해야겠지만.
어쨌든, 대체 어떻게 나오나 싶었는데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배상하마, 무엇이 좋지?”
“그냥 제발 이 지랄 좀 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주기?”
“불가능한 일이니, 거절하마.”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가 다시 말했다.
“그럼, 다른 거. 여기가 이 지랄 난 거의 배상이랑 호아란한테 사과하는 거. 그리고...”
슬쩍 나를 본 릴리스가 말했다.
“다시는 저 새끼한테 눈독 들이지 않는 거까지.”
“흠.”
그런 릴리스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천마가 말했다.
“앞의 둘은 하마. 이번에 제자들이 얻기로 된 땅의 일부와 배상금을 내지. 호아란에 대한 사과 또한 하겠다. 이번에는 확실히 이 몸이 잘못했다.”
천마의 말에 슬쩍 호아란을 보자, 쓴웃음을 짓는 호아란이 보였다.
어째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한 모양새였다.
하기사, 천마한테 상당히 시달렸었다고 말했던 호아란이었으니까 그럴만도 했다.
그때,
“단지, 마지막 건은 거절한다.”
꿈틀, 그런 천마의 대답에 릴리스의 이마 위로 핏줄이 곤두서는 것이 보였다.
릴리스만이 아니라, 호아란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런 둘에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마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껏 정체되어있던 네가 이렇게 갑자기 강해진 이유야 뻔하지 않나? 흡정귀로 태어난 몸으로, 이제껏 흡정을 하지 않아서 제대로 된 성장을 하지 못했던 릴리스, 네가 고작 이 정도의 시간으로 이 몸의 발작을 멈출 수준까지 성장한 이유는... 아마 저 아이가 이유겠지.”
발작?
꼭 무슨 지병이라도 있어서 지랄했던 거처럼 말하는 천마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한숨을 내쉰 릴리스가 말했다.
“...서큐버스라고 부르지? 흡정귀니 뭐니 하지 말고.”
“부정하지는 않는구나, 릴리스.”
“부정하면, 믿어주게?”
“그럴 리가.”
재차 한숨을 내쉰 릴리스가, 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번 말할게, 다신 저 새끼한테 눈독 들이지 마. 천마.”
“거절한다.”
“...저 새끼를 그렇게 제자로 삼고 싶은 거야?”
“아니다.”
“뭐?”
릴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왜 싫다는 건데, 하는 표정.
"...말해 보거라, 한조를 제자로 삼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거절한 것이냐?"
어째 복잡해보이는 표정의 호아란이 그렇게 묻자 히쭉 웃은 천마가 나를 바라봤다.
오싹, 하고 등골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흡사, 거대한 맹수에게 노려봐지는 기분...
아니지.
그게 아니었다.
저건...
그런 눈이 아니었다.
슬쩍, 하고 그런 내 앞으로 나와서 천마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가려주는 호아란.
그것만이 아니라, 화악하고 꼬리들까지 부풀어서 완전히 막아주자 조금 나아졌다.
그런 호아란을 보고서 크큭, 하고 웃은 천마가 말했다.
“흡정귀는, 처음으로 흡정한 대상이 가진 재능이 뛰어날수록 더욱 강하게 성장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릴리스. 네가 그만큼 성장한 건 전부 저 아이가 그만큼 뛰어나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아니.
그냥 많이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
서큐버스의 식사, 그러니까 흡정의 양을 따져봤을 때 다른 서큐버스에 비해서 대식가인 릴리스였다.
내가 알아보기로는 성장기인 서큐버스는 하루에 다섯 정도의 남자를 흡정한다는데, 내가 릴리스의 보지에 매일 같이 퍼붓는 정액의 양만해도 다섯 명분은 가뿐히 넘겼으니까.
더욱이 그걸 전부 소화해내는 릴리스는, 성장기가 시작한지 이제 몇 개월째가 되도록 아직도 계속 성장중이었다.
과연, 서큐버스의 몸으로 태어난 초월종... 서큐버스의 상위 개체답다고 해야 하나.
천마만큼 너덜너덜해져서, 아직도 비키니 아머차림인 릴리스라 훤히 드러난 저 가슴도 전보다 1.2배 가까이 커져서 이제 호아란과 맞먹는 수준이고, 저게 아직도 계속 성장중이란 거였다.
아무튼 릴리스가 천마가 말한 대로 빠르게 성장한 이유는 내가 이유라기보단, 릴리스가 흡정한 대상인 내가 잘났다기보단 릴리스가 워낙 잘 먹고 잘 크는 우량아라서 그런 거였다.
내가 릴리스를 잘 먹이고 있는 것도 이유긴 하지만, 내 재능은 아주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근데...
“더욱이, 호아란의 제자인 줄 알았더니 단순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군. 더불어서 유스티티아와 아리아드... 그리고 저 여자도... 이제보니 전부 같은 냄새를 풀풀 흘리고 있지 않는가.”
"읏..."
그런 천마의 말에 움찔하는 릴리스랑 호아란.
"확실히 여의 몸에서 영웅의 냄새가 잔뜩 나긴 하구나."
"그야 아직 안에 잔뜩 남아있으니까."
"파라오... 그리고 유스티티아도...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우리 한조가아, 잔뜩 뿌려줬으니까아."
"아리아드도 제발..."
킁킁, 하고 자신의 체취를 맡더니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는 카르미나랑 그런 카르미나의 말에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유스티티아.
그리고 그 둘의 말에 난색을 표하던 카루라가 아리아드의 막타에 침몰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릴리스한테 목덜미를 붙잡혀있던 천마가 깔깔거리면서 말했다.
"혹시나 했더니, 반응을 보니 정말이었나보군. 하기사, 그러니 이 몸이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겠지. 음, 과연. 릴리스만이 아니라, 호아란, 유스티티아, 그리고 그에 못지 않아 보이는 저 여자까지도, 전부 저 아이랑 그런 사이일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시끄러워, 그래서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간단하지 않나? 릴리스. 내가 어째서, 그토록 많은 제자들을 거둬들이고, 기르며, 가르쳤는지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뭐, 설마하니 이 몸으로 직접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마는. 과연, 이런 기분이었나."
그렇게 말하며 배를 쓰다듬는 천마.
“...무슨 뜻이야, 그거.”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이는 릴리스가 그런 천마에게 묻자, 히쭉 웃은 천마가 대답했다.
“이 몸이, 저 아이의 아이를 원하는 것 같구나. 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