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 (12)
물론, 다 같이 천마의 얼마만인지 모를 초경을 축하해주며 팥밥을 지어 먹는 훈훈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훈훈하기보단, 존나 서릿바람이 부는 것처럼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 잠자코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쾌활한 카르미나의 웃음소리였다.
“아하하! 과연, 여의 영웅이로구나!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여인의 마음을 빼앗아버리다니! 역시 여가 선택한 남자답노라!”
“파, 파라오...!”
그런 카르미나를 보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카루라가 보였다.
카루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온 카르미나가 말을 이었다.
“다들 얼굴부터 피거라! 그리 찡그리고 있으니 보기 좋지 않구나! 본래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에겐 무릇 많은 사내가 끌리고, 반대로 강인하고 훌륭한 사내에겐 그보다 더 많은 여인들이 끌리는 법이다! 세상의 섭리가 그러한 법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잘난 사내를 남편으로 둔 여인이라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노라!”
대충 내가 잘나서 생긴 일이라는 카르미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려는데 옆에서 째릿하고 노려보는 릴리스 덕에 으쓱하려던 어깨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었다.
하아, 하고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가 카르미나에게 말했다.
“...카르미나, 너는 기분 안 나빠? 갑자기 튀어나온 년이 이런 말을 하는데?”
그 말에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 카르미나가 가슴을 쭉 앞으로 폈다.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구나,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그것이 사람이겠느냐! 여도 사람이노라!”
기분, 나쁘구나.
아니, 그야 카르미나도 천마가 내뱉은 말에 얼굴이 굳어졌었으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인 이상,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당장, 평소에는 화기애애한 편인 아내들도 매일 같이하는 순서 정하기에서는 서로 양보하는 일 없이 최선을 다해서 겨루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는 가운데에도 첫 번째인지 아닌지로도 그렇게 경쟁하는 사이인데 질투라는 감정을 못 느낄 리도 없었다.
애초에 그랬더라면 이전에 인어, 세실리아의 일로 내가 그토록 설설 기어야할 일도 없었을 거다.
솔직히 그게 싫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닌게 질투해준다는 것이 꽤 기분 좋기도 했다.
옆구리야 좀 아파지지만 그거랑 별개로 사랑받고 있다는 실감이 드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다.
여럿에게 사랑받고 있는 나랑 달리, 아내들은 어디까지나 내 사랑을 서로 나누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한 명이 더 늘어난다는 것에 일희일비할 건 내가 아니라 아내들이었다.
“그럼ㅡ”
카르미나의 말에 릴리스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카르미나가 말을 이었다.
“릴리스, 일전에 여가 말하였지. 여라고 해서, 영웅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도 지금은 한낱 여인일 뿐이니 말이다. 여가 그렇듯이, 모두도 그럴 것이 분명하겠지. 오직 나만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오롯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없으니 말이노라.”
하지만, 하고 카르미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잊은 것이 있지 않느냐? 가장 중요한 것을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거라니?”
“그야, 이번 걸 결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니 하는 말이노라!”
카르미나의 말에,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하렘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영웅이니라. 더욱 사랑받고 싶다. 지금 받는 것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노라. 하지만, 이를 결정하는 것은 영웅이지 우리가 아니니라. 안 그러느냐? 그러니 다들 조금은 진정들 하거라.”
이어지는 카르미나의 말에 그제야 서릿바람 같은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어디까지나 분위기만 그렇다는 거지, 다들 표정이 영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영웅이여. 여가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느냐?”
“어... 나한테?”
“아니, 천마라는 여인에게 묻고 싶구나.”
천마한테?
대체 무슨 말을 묻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고맙구나하고 미소 지은 카르미나가 천마에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천마라고 불리는 여인이여. 여가 하나만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괜찮겠느냐?”
“음, 재밌는 걸 보여줬으니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 너는 이름이 뭐지?”
“카르미나라고 부르거라.”
“그래, 카르미나. 이 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
“그대가 한 말에 의문점이 있기 때문이노라. 그대의 몸이, 영웅을 보고서 그렇게 됐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혹여나 다른 이유에서, 그대의 몸이 이제껏 멈춰있던 성장을 이루게 됐을지도 모르지 않더냐. 최소한의, 그것만큼은 우리도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알려주거라.”
그런 카르미나의 말에 천마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흠.”
고개를 모로 꺾는 천마.
한쪽 눈썹만 움찔거리는 게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증명할 수 있다.”
증명할 수 있다고?
정말로 천마가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런 천마의 말에 카르미나가 물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지 알려줄 수 있느냐?”
“그야 저 아이를 보면 하복부가 뜨거워지고 고간이 습...”
“그만.”
듣던 내가 다 어지러워질 지경이어서 그런 천마의 말을 끊었다.
생긴 건 영락없는 꼬맹이인 천마가 그런 소리를 내뱉는 것이 그림적으로 영 아니기도 했고.
“일단, 뒷정리부터 하는 건 어때요? 이어서 하는 건 일단 다 끝나고... 일단 돌아가서 하는 걸로 하고.”
그런 내 말에 한숨을 푹 내쉰 릴리스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말했다.
“...그래, 그러는 편이 낫겠네.”
“확실히 이런 대화를 나눌 장소로는 좀 그렇긴 하겠구나.”
“둘이서 마구 날뛰어서 엉망이 되어버렸으니까.”
내 말에 일단 동의하는 아내들을 보고서, 천마에게도 말했다.
“그쪽도, 그대로 있으면 좀 그럴 테니까 가서 옷부터 입고 다시 말해요.”
“딱히 이 몸은 이대로도 상관은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야 그러도록 하지.”
“...무슨 말이 그래? 쟤가 너한테 뭐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야, 이 몸의 아이의 아비가 될 자지 않나. 이 정도의 말은 들어줘야겠지.”
쁘직, 하고 릴리스의 혈압이 치솟아오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 기분이었다.
“이 년이 진짜ㅡ”
당장이라도 다시 천마의 목덜미를 잡아올릴 것 같은 릴리스.
하지만...
“그만. 그만하라고 했어, 릴리스.”
“하지만, 쟤가 자꾸...”
“릴리스.”
재차 이름을 부르며, 쳐다보자 꾸우욱 입술을 깨무는 릴리스.
그런 릴리스가 이내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서 성큼성큼 혼자서만 가버리는 것이 보였다.
은근히 여리고, 은근히 잘 상처받는 성격의 릴리스였다.
아마 지금도 잔뜩 삐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릴리스를 달래는 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천하의 그 릴리스도, 제 남자한텐 약해지는 법이구나. 이거 참, 웃기는 일이군.”
떠나가는 릴리스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천마를 보고서 말했다.
“천마도 그 이상으로 제멋대로 굴면, 대화고 뭐고도 없는 줄 아세요.”
“호오?”
내 말에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천마가 보였다.
솔직히 지금의 나는 천마가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어야할 정도로 존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당장, 저 천마가 기분 나쁘며 주먹을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죽어버릴 자신이 차고 넘쳐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꾸만 내 아내들을 자극해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이, 갖고 싶다면서요. 그럼 내 말 들어요. 제가 거부하면 그쪽도 곤란하지 않아요?”
그러니, 천마가 내게서 원하는 걸 쥐고서 말했다.
“흐음.”
아무리 천마라고 한들, 날 어떻게 하는 게 쉽진 않을 거다.
당장 릴리스한테도 두들겨 맞는 천마니까.
적어도 강제로 날 어떻게 해꼬지할 순 없는 천마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 협조를 구하는 길 뿐이었다.
그 사실을 천마 역시 알고 있는지, 그렇게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도록 하지.”
“그럼 가서 릴리스한테도 사과하시고요.”
“그러지.”
천마가 그렇게 말하고선 몸을 일으키고는 릴리스를 쫓아가는 것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호아란이랑 유스티티아, 미안한데 여기 뒷정리좀 부탁해도 될까?”
“...알겠느니라.”
“응, 뭐. 괜찮지만. 그보다 릴리스는 저대로 둬도 되겠어?”
그거야ㅡ
“...이따가 열심히 사죄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긴, 보지에 자지를 푹푹 박아대면서 한 번만 봐달라고 하면, 봐줄 수 밖엔 없겠네. 릴리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이젠 한조가 없으면 안되는 몸이니까.”
아니,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할 거 까진 없잖아.
“유스티티아, 그쯤하거라.”
“알겠어, 호아란. 농담이야 농담. 한조. 딱히, 뭐라고 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분명 신경쓰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유스티티아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입장이기도 했고.
그저, 이미 훌쩍 가버린 릴리스가 지나간 자리만 보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강의 뒷정리를 하고서 다 같이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깨질 않는 환자인 천매화는 따로 챙겨두고, 릴리스랑 맞붙느라 알몸이나 다를 바 없어진 천마 역시 사티의 사복 중의 하나를 빌려서 입혀놨다.
천마가 사티보다 조금 더 커서, 천마의 꼴이 꼭 언니에게서 옷을 물려입은 꼬맹이 같은 꼴이 됐지만, 천마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조금 큰 걸 빼면 그럭저럭 어울리니까 그러려니하기로 했다.
그보다...
천마가 릴리스에게 뭐라고 사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꽁해있는 릴리스와 그런 릴리스랑 반대로 존나 태평하게 앉아있는 천마.
이걸 어쩌나 싶었을 때, 사티가 찾아왔다.
“그, 차, 차를 가져왔습니닷...!”
달달달, 하고.
나한테 천마에 대한 걸 듣게 된 사티가 손을 떨면서 찻잔을 천마에게 건네줬다.
“고맙군.”
“아, 아뇨. 그, 그런 황송한...”
“황송하기는 무슨. 사티, 그럴 필요 없어.”
“아, 넷...”
“좀스럽구나, 릴리스.”
“뭐?”
“이 몸에게 불만이 있다고 저보다 약한 아이를 압박하고 있잖는가.”
“내가 언제...”
또 으르렁대는 릴리스랑 천마를 보고서 말했다.
“둘 다 그만.”
“...흥.”
“이번에는 딱히 이 몸의 잘못은 아닌 것 같다만.”
“천마는 10분간 입 좀 닫아주실래요?”
“...그러지.”
꿈틀, 하고 검미를 움직이는 천마.
아무래도 이번 건 천마도 좀 기분이 상한 듯 싶었는데, 그보다 나는 릴리스의 기분이 더 중요했다.
내게 있어서 천마야 어디까지나 들이닥쳐서 깽판을 치는 중인 입장이고, 릴리스는 내가 사랑하는 아내였다.
누굴 편들어야하는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옆에 있는 릴리스의 손을 슬쩍 잡아주고서는 입을 열었다.
“일단, 정리하자면 천마는 제 아이를 원하는 거 맞죠? 딱히, 제 자식 중의 하나를 제자로 들인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낳은 아이로.”
“......”
뚱하니 나를 쳐다만 보는 천마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대답할 때는 입 열어도 돼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 천마가 대답했다.
“그래, 맞다.”
이쪽도 성격이 장난 아니네...
그래도 뭐, 할 건 해야지.
“...일단, 하나만 묻겠는데. 저한테 한눈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내 말에 눈썹을 들썩인 천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상한 질문이로군. 굳이 필요한 질문인가?”
“필요하니까 대답이나 해요.”
내게 있어선 많이 중요한 일이었다.
“......”
한참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천마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군. 너를 보면 욕정이 동하긴 하나, 어디까지나 이 몸이 네 아이를 원해서 그럴 뿐, 딱히 감정적으론 좋고 싫고 할 것은 없다.”
비교적 마음에 드는 편이긴 하다만, 하고 말하는 천마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사티?”
“네, 넷?”
“예약자 명단 좀 줄래?”
“네? 아... 아, 알겠습니다.”
사티가 꺼내준 예약자 명단을 살펴봤다.
일주일에 스무 명씩만 받는 예약자건만, 다다음달까지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스무 명만 받기로 하기로 해서 그런 거지, 여기서 한 명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는 거였다.
스무 명이 스물 한 명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남은 건...
“다음 예약까지 기다리시면 다다음달부터고, 아니라면 예약이 당겨지는 만큼 추가금이 들 예정인데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상대가 천마란 게 좀 많이 특별하지만, 어디까지나 디스펜서로서의 ‘나’를 구매하러 오신 손님으로서 대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