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카르미나 나르메르의 소원
카 나브나 라 메투 와프 우세스 나프타.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신들의 대적자, 마침내 이겨낼 영광의 승리자.
길고 긴 그 이름은, 한때 카르미나가 신들과 대적하는... 왕들과 영웅들을 이끌던 당시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되면서 받은 이름들이었다.
계속되는 신들과의 싸움.
계속되는 죽음 속에서도, 그들은 승리하기를 바랬고, 결국에는 카르미나는 자신이 부여받았던 이름대로, 그 이름이 의미하던, 모두가 갈망하던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신들과의 전쟁 속에서, 승리를 기원하며 붙여진 그 이름대로 끝끝내 아흔아홉 마리의, 영락한 신들을... 짐승들을 죽이고 ‘비탄을 노래하는 죽음의 짐승’마저도 베어 죽였다.
결국, 모두의 소망을 담아 부여받은 이름대로 신들과의 대적 끝에 승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의 영광은 없었다.
신들을 참살하고, 마침내 쟁취한 자유를 누리며 번영하는 미래는.
신이 죽어가면서 세상에 흩뿌린 저주와 악신이었다고 한들, 세상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었던 신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멸망에 덮쳐져 전부 헛된 것들이 되어버렸으니.
그렇게, 더욱 많은 이들이 죽었다.
세상의 절반.
모든 남자들이 신이 흩뿌리고 간 저주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남겨진 이들은 더 이상의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미래를 그리고자, 삶을 이어나고자 일으켰던 전쟁의 끝은 모든 것의 종말만을 남기고 말았다.
자신을 포함한... 살아남은 자들은 끝끝내 무너질, 멸망이 예정된 세상과 함께 예정된 멸망을 기다릴 뿐인 존재가 되었으니.
절망스러웠지만, 절망할 순 없었다.
자신은 파라오였다.
신민들을 이끌고, 보듬고, 또 살아가게 해야하는 존재였다.
단 하나의 신민이라도 살아있는 한은 자신은 파라오였고, 파라오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멸망을 유예시켰다.
신을 죽이고, 품었던 조각을 매개로 천상에 올랐고, 자신의 대부분과 많은 자들의 도움을... 암무트의 도움을 받아서 비어있던 신좌에 올랐다.
현인신이자, 멸망을 유예하기 위한 번제.
신민들의 마지막까지... 최소한, 그때까지만이라도 세상의 멸망을 유예하고자 했다.
만약에, 그때... 그 존재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마지막 신민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소멸했을 것이다.
거대한 존재.
세상을, 그 손에 움켜쥐고서 통째로 옮겨버렸던 그 거대한 존재는, 이젠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모든 용들의 아버지.
신들을 잡아먹는 포식자.
신들의 신이라 불리우는, 자신들이 많은 희생 끝에 죽일 수 있었던 ‘비탄을 노래하는 죽음의 짐승’조차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세상을 다스리는 신, 대신격들마저 잡아먹는 자.
‘포악한 영원히 탐식하는 자’
이름조차도 무시무시한 그 신에 의해서 이 세상에 오게 된 이후, 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이제껏 바라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못했던 것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아직 아주 어릴 적에는, 손이 귀한 데다가 아버지의, 파라오의 적장녀로 태어난 만큼 걸음마를 뗄 적부터 후계자로서, 다음 파라오로서의 교육을 받기 바빴기에 그럴 겨를이 없었고.
신들과 대적할 적에는 애당초 그럴 상황이 아니었으며.
마침내 신들을 모두 죽이고 난 뒤에는, 세상의 남자란 남자란 모두 죽어 멸망을 기다리게 되는 신세가 됐었기에 불가능했던...
어떻게, 이런 세상에 오게 됐을 무렵에도ㅡ 멸망의 유예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쳐버린 자신은 바라는 것조차도 사치였던 것을.
사랑이란 것을 누리고, 여인으로서의 행복도 누릴 수 있게 됐다.
꼼지락거리며, 옆에 누워있는 남자의... 한조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가 남아있는 온기를 느끼며 좀 더 그런 한조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듯했다.
그 온기를 더욱 느끼고자, 뺨을 비볐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자고 있는 한조의 얼굴, 사랑하게 된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은 파라오가 아니였다.
그러니, 더 이상 길고 긴 이름...
카 나브나 라 메투 와프 우세스 나프타라는 이름은 필요치 않았다.
남은 건, 그저 여자인... 카르미나 나르메르란 이름의 여자뿐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누워서, 그런 남자의 잠든 얼굴을 보며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여자.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남자, 한조의 곁에는 여자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점 정도일까.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고로 뛰어난 자에겐, 그 곁에 많은 이성이 꼬이는 법이었으니.
영웅 정도의 수컷에게 이끌리는 암컷들이야 많은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하나같이... 영웅이 내어주는 사랑을 나눠야 할 존재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꽤나 큰 문제였다.
애초부터 독차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조차도 먼저 영웅과 정을 나눈 카루라와 나눌 작정이지었만, 웬걸 그래도 더 많이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제일로 사랑받는 자가 되고 싶은 것은, 사랑을 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일 것이다.
질투는 하지 않는다.
애당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능력이 있는 자가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혼자였더라면 지나치도록 왕성한 영웅의 정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웅이 첩실을 들이도록 꾀를 부렸을 지경이었다.
애당초 영웅과 사랑을 양분하기로 작정했었던 카루라랑 힘을 합친다고 했더라고 해도, 얼마 버티진 못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에 자신도 카루라도 아이를 갖게 될 적을 대비해서 더 많은 여자를 안으라고 종용했을지도 몰랐다.
성욕을 해소할 길이 없게 막아둔다면, 그 눈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감정 역시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둘 순 없으니, 차라리 제어할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 영웅의 하렘에 들이는 것이 편했다.
나눠야만 하는 것과,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많은 차이였다.
모든 것을 잃게 될 바엔, 그것을 나누는 것이 옳다.
그러니, 독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한, 질투하는 여자는 사랑받기 힘들었다.
더욱이 그 역할은 이미 있었다.
릴리스 아슈타로테.
영웅과 가장 처음으로 만난 여자이자, 영웅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었던 모양이었지만 아마 영웅이 가장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자.
질투는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녀가 아닌 존재의 ‘질투’는 도리어 영웅의 총애에서 멀어질 뿐일 것이다.
처음에는, 상냥한 영웅인만큼 질투를 하는 것을 귀엽게 봐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용인되는 존재하는 단, 한 명일 것이다.
다른 역할, 마치 영웅의 어머니처럼 보듬어주며, 또 때로는 꾸중을 할 수 있는 역할을 맡을 이도 이미 있었다.
호아란.
한때는 릴리스와 마찬가지로, 영웅의 어미였다가 이제와선 영웅의 여인이 된 그녀의 역할은 확고했다.
적어도 영웅은 그녀의 가르침이나 조언만큼은 언제나 지키려고 노력했으니까.
때때로 잊어버리거나 실수를 하곤 하지만, 영웅의 행동의 모든 근간은 그녀가 알려준 것을 따랐다.
또, 언제나 영웅이 요구하는 것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 앞서 두 역할과는 또 다른 역할 역시 존재했다.
유스티티아.
앞선 둘과 마찬가지로, 다른 의미로 결코 없어선 안 될 존재로서 영웅의 곁에 있는 그녀와 역할을 다투기엔 서로 간의 메리트가 전혀 없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영웅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은 사랑과, 그의 아이를 낳는 것... 또... 그의 하렘을 지키는 것.
그런 만큼, 자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영웅의 총애를 얻고자 노력했다.
철저하게, 그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췄다.
맨 처음, 영웅의 취향을 물었을 때 호아란에게 들었던 대로, 영웅은 귀여운 것을 좋아했다.
그 귀엽다는 것이 어린아이를 좋아한다는 말인 줄 알았건만, 딱히 그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멸망하기 전, 한창 남성 역시 번성했을 당시엔 어린 여성만을 좋아하는 편력을 지닌 자도 있었기에, 아직 어렸을 적엔 그러한 자들에게 청혼받아본 적도 있었던 몸이기에 시도해봤던 일은, 기겁하면서 안색이 새파래진 영웅의 얼굴을 보고서 그만두기로 했다.
최근에 와서는 그때만큼은 꺼리거나 하지는 않게 된 모양이니, 나중에 다시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있긴 했다.
어릴 적, 자신에게 여성으로서의 몸가짐을 가르쳐주던 유모에게 듣기론 자고로 같은 여성을 안는 것은, 남자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법이라고 들었다.
이런 저런 변화를 주어가며 계속해서 흥미를 끌어야만 총애를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퍼지는 일이었지만, 혹시나 자신의 몸에 영웅이 질리게 된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시도해볼 생각은 있었다.
그 몸으론 영웅의 것을 받아들이기도 힘겨울뿐더러, 다소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때도 나중에 가서는 기분 좋았던 것도 같았으니 나쁜 생각은 아니리라.
어쨌든...
그렇기에, 자신은 계속해서 총애받고자 노력했다.
영웅을 위해서, 살짝 어리숙하게 행동하고, 살짝 손이 많이 가는 개구쟁이처럼 굴었다.
또 한편으로는 영웅이 가진, 아주 살짝 짓궂은 성격에 어울려주기도 했다.
이 또한 익숙해지니, 영웅이 젖을 깨물거나하는 것도 기분 좋아졌으니 오히려 좋았다.
이러다간 유모에게 들었던, 남편에게 얻어맞으면서 기뻐하는 여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영웅이 짓궂긴 하나 그런 성향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영웅에게 있어서 자신이 바라던 역할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임과 동시에, 여동생이며, 아이라는 느낌의 역할을.
자고로, 어리숙하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는 귀여운 법이었다.
그런 이미지를 얻고자, 포기한 부분도 꽤나 많이 생겨버렸지만.
그 대신으로 얻은 부분도 많으니 딱 적당한 교환이었다고 칠 수 있으리라.
적어도, 다른 세 명과는 다른 부분에서 자신의 역할이 생긴 것은 확실했으니.
새롭게 영웅의 하렘에 들이게 된 아리아드나, 사티와 에일레야.
또 어찌될지는 몰라도 영웅의 성격상 그냥 가만히 두지는 않을 세실리아라는 이름의... 인어라는 종족의 여인, 그 밖에도 이런저런 여인들이 계속해서 영웅의 곁에 늘어날 것은 틀림없었다.
나중에가선, 자신이 노력 끝에 얻어낸 이 역할도 훗날에 들어올 새로운... 영웅과 사랑을 나눠야할 여인을 위해 내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영웅의 총애를 얻고 싶지만, 동시에 하렘의 화합 역시 중요했다.
경쟁자이긴 하나, 동시에 결국에는 영웅의 핏줄을 이어갈 아이들을 낳아줄 여자들이기도 했다.
다소간의 양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괜찮았다.
그때 가서는 자신의 역할은 그것만이 아니게 될 자신이 있었다.
몇 년 뒤의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고민은 역시 하나였다.
“어서 아이를 갖고 싶구나.”
하루 빨리라도,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
여자로서, 카르미나는 단지 그것만을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