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2)
기분이 뭔가 뭔가였지만 그래도 아무 탈 없이 평화로운 게 제일인 법이었다.
날 때부터 인생이 이리저리 꼬여서 파란만장한 고아원 생활을 해서 그런지 스릴 만점의 모험 같은 삶보다는 굵고 길게 가고 싶은 소망을 가진 평범한 소시민이 나였으니까.
아내들과 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
우리 가족들이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서 돈도 꾸준히 모으고, 또 격을 올리기 위해 수련도 하고 하는 거고.
그리고, 그때였다.
꾸르르르릉...!
땅이 흔들거렸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까 처음엔 그냥 지진이라고만 생각했다.
원래 이 동네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거야 알고 있었고.
근데 그게 아니란 걸 곧 알 수 있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웅하고.
뒤늦게, 옆에 놓여있던 내 스마트폰이 존나게 진동했으니까.
사정상 내 스마트폰은 디스펜서로써, 강한 좆으로써 이런저런 고객님을 관리하는 용의... 지금은 사티에게 맡겨둔 것과 한창 팝핀 댄스를 추며 진동해대는, 내 개인 스마트폰, 이렇게 둘로 나뉘어서 존재했다.
참고로, 그 내 개인 스마트폰에 있는 연락처라곤 아내들의 것이랑 세계 정부측의 몇몇 연락처가 전부였다.
지금 내 아내들은 내 분신들을 하나씩 끼고서 이곳저곳 관광을 즐기고 있는 와중이었고... 당연히 어디서 연락올 일이 없는 스마트폰이 이렇게 진동할 일도 없었다.
뭔가 존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재수없게 집 밖에 나와서 놀고 있을 때, 마침 딱 평화로운 게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더욱이 요 며칠 동안 홍련의 일로 벌은 받았지만 그거 외엔 별일 없었던 중에 이러니까 더더욱 그랬다.
손을 뻗어서, 스마트폰을 들어서 진동의 원인을 살펴봤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워... 이번엔 좀 큰데?”
디멘션 크래쉬였다.
어째 느낌이 싸했던 것과는 달리,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장소에서 일어난, 자연재해.
근데, 심상치가 않았다.
무려 서른 곳이 넘는 장소에 동시다발적으로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나고 있다는 문자였으니까.
“이게 얼마 만이야.”
마지막 디멘션 크래쉬는 카르미나가 이 세상에 넘어오게 된 계기가 된 디멘션 크래쉬 이후로, 두 번이 더 일어나고 말았었다.
그것도 딱히 별다른 것 없이 이런저런 잡스러운 몬스터와 난민이 조금 발생한 수준의 소규모 디멘션 크래쉬였다.
그런데, 이번 건 그 규모가 컸다.
더욱이 서른 곳이 넘는 곳에, 동시에 일어나는 디멘션 크래쉬라니.
2년 전이면 모를까, 이 정도의 규모로 동시에 다발적으로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난 일은 거의 없었던 지라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요 최근에 드물었던 거지 없던 사례인 건 아니었다.
2년 전... 아니 이제는 거의 3년이 되가는, 내가 마침 딱 넘어와서 평생 직장으로 삼을 예정이었던 직장에서 짤리고 집에서 멍하니 전쟁이 일어나니 마니하는 소식을 듣고 있던 시절에는.
동시에 백여 곳이 넘는 장소에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났었다.
그 정도 규모의 디멘션 크래쉬가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고, 당초에는 갑자기 늘어나 버린 땅이나 이리저리 겹쳐진 건물들, 심지어 사람과 사람이 겹쳐져서 뒈져버리는 그런 일들도 허다했다.
존나 재수없게도 차원과 차원 사이의 좌표가 딱하고 겹쳐서.
그대로 퓨전하고 사망하는 사고가 그 당시엔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물론,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몬스터라던지, 건물이 퓨전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눈앞에서 넘어온 몬스터한테 한끼 식사가 되는 불우한 사건은 그보다 더 흔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 것은 양반이었다.
이번 것도 대부분 사람이 없는 장소에 일어난 디멘션 크래쉬고...
그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날 징조인 차원간 진동을 미리 파악하고 알리는 경보 시스템이 갖춰진 거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이런 사태 때 피난할 장소가 곳곳에 마련되어있었으니까.
애당초 우리 동네에 일어난 디멘션 크래쉬가 아니라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이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에일레야같이, 몇몇 헌터들에겐 호재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한 일.
매일 일어나는 별의별 사건이나 교통사고 따위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져버린, 그런 일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뒤통수가 아프지.
저릿저릿하고, 왠지 모를 두통이 느껴졌다.
분신을 너무 써서 느끼는 두통이라기엔, 좀 많이 아팠다.
머릴 너무 써서 지끈거리기다보단, 안쪽에서부터 쿡쿡 찌르는 느낌으로 아프기도 했고.
역시 조금은 더 휴식을 취할 걸 그랬나 싶었을 때.
그것들이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하지만, 어디까지나 실제로 흘러간 시간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봐버린 시간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지나쳐 가버린, 불현듯 그 모든 걸 직접 목도한 것처럼 뇌리에 새겨진 환영.
“으웁...!”
“호아?!”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갑자기 자기 뒤통수에 대고서 헛구역질을 한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호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런 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했다.
덜덜덜...
그러기엔 손이 너무 많이 떨렸지만.
“호아...?”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래도, 괜찮냐고 묻는 호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전혀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지만.
찰싹, 하고 호아의 작은 손이 내 뺨을 두드렸다.
그런 호아의, 호아란을 닮은 금빛 눈동자에 비친 내 꼴을 보니까 호아를 안심시키려고 했던 것이 욕심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색이 아주 시퍼레져서, 나도 심심하면 가끔 때려잡고 있는 좀비랑 비슷하게 푸르죽죽한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이 꼴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엔 아무리 구라를 잘 쳐도 무리였다.
“호아아.”
찰싹, 찰싹하고. 그런 내 뺨을 계속 두드리는 호아.
그런 호아를 보니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심시켜주려고 했던 호아에게 되려 위로받고 있었을 때...
아내들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호아의 뒤통수에 대고 토를 할 수도 없어서 어떻게든 헛구역질로 끝내긴 했지만, 참은 건 구역질뿐이었다.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애써 집중해서 분신을 유지하고 있던 것까지 어떻게 할 순 없었다.
당연히, 아내들 곁에 있던 분신들은 전부 다 사라진 상태였다.
1인 1한조 분신들이 죄다 사라졌으니까 아내들이 곧장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찾아온 거야 당연한 일이었고.
“...무슨 일이야?”
한창 아앙, 하는 내 분신에게서 아이스크림을 받아먹다가 느닷없이 사라져버린 덕에, 뺨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채 빡쳐서 돌아왔던 릴리스가 창백해진 내 안색을 보고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릴리스의 물음에 내가 말했다.
“아니, 그게... 갑자기 속이 안 좋아져서... 미안.”
“속이 안 좋다고? 네가?”
홍련 덕에 오니의 종족 능력, 어지간한 병에는 걸리지도 않는 튼튼한 육체를 얻게 된 내가 속이 안 좋다고 말해봤자, 거짓말일 게 뻔한 헛소리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뭐라 말하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니까.
한순간...
실제로도 눈 한 번 깜빡할만한 순간에 보았던 광경들은, 수많은 죽음이었다.
도시가 불타올랐다.
사람이 죽어나갔다.
몬스터들이 죽은 자들을 뜯어먹고.
죽은 자들이 몬스터가 되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제껏 본 적도 없는...
아니, 존재했다면 진작에 세상을 좆망시켜버렸을 것만 같은.
거대한 괴수가 그런 세상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비규환인 세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라도 할 작정이라는 듯.
거대괴수의 몸에 돋아난, 셀 수도 없이 많은 촉수가 휘저어질 때마다 산 자들이고 죽은 자들이고 가릴 거 없이 모조리 쓸려나갔다.
거대괴수가 포효하며, 내뿜는 숨결이 바다를 갈랐고 갈라진 바다는 그대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온몸에 어지러이 괴기한 흉터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새겨진, 그 사이로 수없이 솟아난 눈들에선 붉은 피가 쏟아져서, 그렇게 떨구어진 핏물에 대지가 썩어 문드러졌다.
문제는, 미쳐 날뛰는 거대괴수만이 아니었다.
그 괴수가 모든 것을 때려부술 작정으로 날뛰는 와중에, 세상은 수많은 세상과 계속해서 겹쳐지고 있었다.
시체들 위로 느닷없이 숲이 치솟았고, 다시 그 위로 흉물이나 다름없는 건물들이 올라섰다.
온갖 난리통에, 미쳐날뛰는 거대괴수에게서도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런 와중에 겹쳐져버린 세상에 낑겨버린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몸의 절반이 건물에 파묻힌 채로 겹쳐진 이가 찾아온 괴물에게 산 채로 뜯겨 먹혔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짧았다.
세상을 모조리 지워 없애려 드는 듯한 거대괴수가 금방 그렇게 겹쳐져서 치솟아버린 것들도 때려 부쉈으니까.
과거, 최대 규모의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났을 때 일어났던 참사의 반복.
거대괴수만 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대형 재해급 몬스터였던 사흉들과, 그만한 수준의 괴물들이 세상 곳곳에 자기네들의 영역을 만들어서 날뛰고.
많은 세상들이 겹쳐지며, 이제껏 쌓아올렸던 모든 차원의 세상들이 이룩해온 문명이, 그 재해에 무너져 내려갈 때.
그 와중에 자기들끼리 서로 전쟁을 부르짖었던 때의 반복이었다.
아니.
그때랑도 달랐다.
그때는 어떻게든 억눌렀던 것이, 이번에는 억눌러지지 않았기에 더욱 심각해진 참사였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세상이, 모두가 좆망했다고 여겼을 때.
알려지기 전부터 그러지 않게 만들었던... 그땐 있었지만 내가 봐버린, 그 끔찍한 종말의 광경에서 없는 이들이 있었다.
“...뭔데 갑자기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내가 본 재앙 속에서, 이미 한 번 그런 좆망 직전의 세상을 구했던 이들.
스물둘의 영웅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릴리스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호아란이랑 유스티티아도.
여긴 없지만,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스물둘의 영웅 중 하나인 천마도 그 재앙 속에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스물둘의 영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몇 알고 있는 얼굴들은 있었다.
황제라는 이름의, 이전 세상에선 정말로 세계의 3분의 1을 통일해버린 황제 출신의 스물둘의 영웅 중 하나가 허리가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나자빠져 있었다.
황제의 직속 부하이자, 또 그의 후궁들로도 유명한 백여명이 넘는... 하나같이 초인에 이르렀다고 알려진 여자들도 그런 황제랑 같이 뒈져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천마에 비해서 덜 유명한 거지... 무림인 출신의 스물둘의 영웅들인 검선이라든지, 맹주라든지 하던 양반들도 비참한 꼴로 죽어 있었다.
그들이 만든 세력들이었던 무림맹이라든지, 선협 어쩌고 하는 세력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죄다 죽어있었고.
그 주위에도 있는,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해 보이는 장비를 갖추고 있는 이들을 보니까 저 중에서 내가 몰라봤을 뿐이지, 스물둘의 영웅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부 의미없는 가정일 뿐이었다.
다 죽었으니까.
내가 본 세상은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은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