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3)
의아스러운 것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세계 정부를... 아니, 세계 정부야 그렇다치고 자신들의 손으로 지켜낸 이 세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아내들이었다.
이유야 저마다 달라도, 저만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녀들이 막아내지 않으려고 들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내가 본 환상 속에서 모습을 비추지 않은 이유가...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도 생각되질 않았다.
릴리스랑 천마가 한 판 붙었을 때,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호아란과 유스티티아가 펼친 결계 너머로도, 국지적인 지진으로 계측될 정도의 전투.
사람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무력을 초월해서, 마음만 먹으면 홀로 세계를 상대로도 싸워서 붙어볼 만한 초월자들의 싸움을.
포효만으로 바다를 갈라버리던 거대괴수가 존나 좀 빡세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아내들이 모두 나서서 레이드를 뛰면 죽이지 못할 정도의 괴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세상이 그 꼬라지가 되는 와중에도 아내들의 모습이, 그 멸망 직전의 세상에서 비추지 않았는가.
그야, 그건 조금 전에 내 눈에 비쳐 보인 그것들이 전부 헛것이기 때문이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라고 여기면, 전부 이해가 되는, 그뿐인 이야기였다.
근데...
구역질이 계속해서 치밀어올랐다.
계속해서 부정하려고 했지만, 만약의 가정이 계속해서 떠올라서.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녀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신물이 올라왔다.
그러니, 묻기로 했다.
호흡을 골라서, 어떻게든 계속해서 들끓어 오르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 유스티티아.”
“으응? 왜애. 배 아플 때 먹는 약이라도 만들어줄까?”
릴리스도 믿지 않는 걸 유스티티아가 믿을 리가 없었는데도, 내가 한 거짓말에 어울려서 그렇게 말해주는 유스티티아에게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그것보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내가 아는 거라면야.”
어깨를 으쓱이는 유스티티아에게 물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인데... 갑자기 세상이 쫄딱 망해버리려고 한다면... 그런다면 어쩔 거야?”
우선 확인부터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라도, 사실 이 세상이 망하던 말던 딱히 상관없다고 대답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런 내 물음에 푸르른 유스티티아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 세상이란 건, 당연히 이 세상을 말하는 거지?”
“응, 뭐. 그렇지. 아무튼... 예를 들어서, 사흉이 다 합쳐진 것 같은 괴물이 날뛰고, 그 와중에 초대규모의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나서 온갖 지랄이 날 때에. 유스티티아는 어쩔 거야?”
“...흐응. 글쎄에.”
아주 잠깐, 고민하던 유스티티아가 입을 열었다.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우선 그 괴물부터 잡고서... 나머지도 해결하겠지? 디멘션 크래쉬야 막을 수 없겠지만, 끝나고 난 이후는 어떻게든 대비 할 수 있을 거니까.”
그래.
아무리 귀찮음의 화신인 유스티티아라도, 이 세상이 무너지는 걸 두고 보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스티티아보다도 더 이 세상을 아끼는 호아란이나, 릴리스.
애당초 그런 재앙을 막기 위해 그녀들을 비롯한 스물둘의 영웅을 찾아가 예지한 것을 알려줬던 아리아드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세상이 그 꼬라지가 나는 와중에도 없었던 그녀들의 모습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는 헛것이라고 판단을 내릴려다가ㅡ 멈칫하고서.
다시 그런 유스티티아에게 말했다.
“...그러지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그런 경우가 있을까?”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어봤다.
그리고 그런 내 물음에 유스티티아가 대답했다.
“응, 그런 경우라면... 지금은 몇 가지 안 되겠네.”
몇 가지나 있구나.
싸늘하게 식으려 드는 감정을 추슬렀다.
환상이라고, 헛것이라고 치부하려고 들었던 것들에 현실감이란 색채가 덧칠될수록 치밀어오르려는 구역질을 삼켰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예를 들면?”
“그만한 일이 터진 거니까... 재수없게 이미 꼼짝도 못할 만큼 중상을 입었다거나, 한조에게 버림받아서 정액을 못받고 드래곤 하트에 마나가 비쩍 말라버렸다거나의 경우가 있겠네.”
중상은 모를까, 후자라면 그럴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유스티티아.”
“응, 농담이야. 농담. 한조가 그럴 일은 없다는 건 아니까... 그 전자도, 솔직히 말이 안되는 일이고... 그 다음, 남은건...”
유스티티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한조의 아이를 가졌을 때, 겠네.”
......
“아이가 왜?”
쩌적, 하고.
유스티티아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벌어지면서 십자를 그리려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보기 드물게, 감정을 드러냈다가ㅡ 다시 가라앉힌 유스티티아가 입을 열었다.
“그야, 힘을 쓰면... 뱃속의 아이가 위험할 테니까.”
한순간이었지만 유스티티아가 드물게 감정을, 분노를 드러냈던 이유를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위험하다고?”
“응, 초월자라든지, 신격을 지닌 신이라든지 해도, 그 힘이 핏줄을 통해서 이어지는 건 아니거든. 어디까지나, 만약에, 한조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기더라도... 평범한 태아. 한조와 내 아이라면, 하프 드래곤이겠네. 어쨌든, 설령 반은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만한 힘을 몸에 두르면, 아무리 보호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게 될 거야.”
드래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필멸자에 불과한 생물이니까, 하고 덧붙이듯 말하는 유스티티아의 말에 그녀를 바라봤다.
어... 하지만, 그럼 유스티티아는?
내가 알기로는, 유스티티아는 ‘핏줄’을 유난히 진하게 타고 태어난, 태어나자마자 반신에 이르렀던 존재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야. 그쪽의 힘을 유전을 통해서 받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니까... 아니면, 그런 핏줄을 타고났으니까 뱃속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받아서, 태어날 때부터 신격을 지니게 된다든지의 경우도 있으니까.”
흔한 이야기잖아? 하고 유스티티아가 키득거렸다.
“저 사람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대단하고 훌륭하신 분이니까 자식도 분명 그런 사람일 거라고, 그렇게 될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결정짓는 경우. 내 경우에는 정말로 우연히 핏줄로부터 이어받 힘과, 그 기대감으로 생긴 신성... 두 가지 경우였다고 보면 돼.”
그렇게 말하는 유스티티아의 얼굴이 조금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이 경우도 아주 드물어. 그야, 아무리 핏줄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래서 뱃속에서부터 신앙을 받았다고 해도. 배 속의 아이가 그만한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니까. 출발선이 다르다 보니까 좀 더 쉽게 신격을 얻고, 신의 반열로 올라갈 수 있을 뿐이지, 설령 신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대부분은 태어나자마자 신이거나, 반신이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될 거야.”
그러니까, 하고.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증조 할아버지도,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위명도 없는... 이 세상에서는 평범한, 어머니가 조금 유명할 뿐인 드래곤 중 하나일 뿐인 내 아이에겐 그런 경우는 해당하지 않을 거야.”
내 자식이 유스티티아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칠 일은 없어졌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유스티티아의 말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조가 궁금한 건 그쪽이 아니지? 뭐, 아무튼 그런 상황에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게 분명해. 임신 중에는 본신으로도 돌아갈 수도 없을 테고... 지금의 몸으론 내가 쓸 수 있는 힘은 아무리 많아 봐야 본신의 절반쯤인걸. 한조가 말한 조건의 괴물을 상대하는 일도, 그런 재앙을 막아내는 일도. 나는 몰라도 아이에겐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 될 테니까 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렇구나.
차라리 부정해주길 바랐던, 내가 봤던 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말해줬으면 했던 것이, 유스티티아에게 부정당했다.
비단, 이 얘기가 유스티티아만의 일이 아닐 거다.
다른 아내들도 비슷하게, 내 아이를 임신했을 경우에는, 그런 상황에서 뭔가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같을 거라고 이해했다.
내가 본 것이, 일어날 수 있는 미래라는 것을 알게 되어버렸다.
어째서 내가 본 환상에서, 그녀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움켜쥐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가만히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지 내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아내들에게 말했다.
“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숨기고 있을 일이 아니라서 결국 내가 본 것들을 전부 말했다.
거대괴수라든지, 디멘션 크래쉬라든지, 죽어나자빠져있던 스물둘의 영웅들이라던지를 보게 된 얘기를.
전부 다.
그런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아내들이, 릴리스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놓고 속이 안 좋아진 거라고 구라를 쳐?”
릴리스가 나를 째려보는 시선이 아팠지만, 할 말이 없었다.
“릴리스, 한조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거라. 쉽사리 믿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지 않으냐? 나무라기보다는... 한조가 본 그것들이 대체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짐작이 가는 거라면, 아리아드의 예지 능력이겠네.”
“으응, 뭐어. 이중에선 그런 능력을 지녔던 건 나뿐이니까아, 그럴 지도오.”
“확실히 그것 밖에는 한조가 겪은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겠구나. 환상을 보게 된 거라고 하기엔, 주변에 어떤 주술이나 마법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더욱이 한조는 그런 계통의 능력이 잘 통하지 않는 몸이니 말이니라.”
순식간에,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린 아내들.
하지만, 나도 그쪽은 생각했지만 이점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게 전부 맞다고, 쟤가 본 게 정말로 예지라고 쳐. 아리아드도 신성이 아직 남아있을 적에나 겨우 봤던 예지를, 이 바보 녀석이 대체 어떻게 본 건데?”
릴리스의 말처럼, 어째서 내가 그런 예지를 볼 수 있었느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