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6)
작은 소란 끝에, 릴리스의 꼬리에 잠시나마 상실됐던 내 시력이 돌아왔을 때는 알몸이었던 암무트에게 옷이 입혀져 있었다.
카르미나의 사복 중 하나였는데... 아내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인 카르미나의 옷이라 그런지 끽해봐야 소녀에 불과한 외형을 가진 암무트가 입기엔 다소 컸다.
근데 기본적으로 외모가 받쳐주니까 무슨 인형에게 옷을 입혀둔 것처럼 잘 어울렸다.
프릴이랑 리본으로 된 같은 장식이 잔뜩 달린... 고스 로리인지 뭔지하는 느낌의 옷이라 그런지 더더욱.
근데, 여기서 암무트에게 잘 어울린다던지 예쁘다던지했다간 다시 눈을 후려맞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저 녀석한테 갔어야 할 신성을 도중에 가로채서 복구했다는 권능이란 게... 알몸으로 남의 남자를 유혹하는 권능이라도 되는 거야?”
유혹이라니.
워낙에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서 시선 처리를 잘못했을 뿐이지 딱히 암무트에게 유혹되거나 한 적은 없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암무트가 귀엽긴 해도 누굴 유혹할만한 몸인 것도 아니고.
특정 성향인 사람에겐 인기야 많겠다만.
“......”
빤히 나를 쳐다보는 암무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밖으로 나와있다고 한들, 나랑 암무트는 영혼으로 연결된 사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추 알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살짝 뾰루퉁해진 얼굴로 암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취한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 옷을 입지 않는 몸으로 변한다는 것을 깜빡했을 뿐이니.”
그런 암무트의 말에 나를 쳐다보는 아내들이 보였다.
왜 저러나 싶었다가, 이내 깨닫고서 말했다.
“사실이야.”
내가 읽기로는 조금 전의 암무트의 말엔 거짓은 없었다.
그런 내 말에 여전히 의혹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릴리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꼬리가 휙휙 움직이는 걸 보니까 화가 난 건 덜 풀린 모양이지만.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고.”
“...한조에게 가야했던 신성으로 복구했다는 권능이란 것은, 그래서 어떤 것이느냐?”
릴리스의 말을 받으며, 암무트에게 묻는 호아란.
그런 호아란의 물음에 암무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온전히 복구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거라. 내 권능은, 본래 이런 것보다도 더욱 대단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말하며 이쪽으로 작은 엉덩이를 들이밀더니 꼬리를 흔드는 암무트.
진짜 뭐지.
매혹의 권능이라던지 뭐 그런 건가.
확실히 만져보고 싶은 꼬리기는 한데.
근데 치마 밑으로 뻗은 꼬리를 그렇게 흔들면 팬티 보이니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 싶었다.
팬티가 보이는 거야 아무래도 좋은데 그럼 또 내가 야단맞잖아.
“...그런 게 아니다! 자, 제대로 보거라!”
또 내 속마음을 읽어낸 암무트가 살짝 들춰진 치마 자락을 추스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빼액 소리 질렀다.
아무튼, 그런 암무트의 말에 제대로 봤더니, 꼬리의 끝이 조금 이상했다.
잘 보니까 꼬리가 아니라 뱀이었다.
아니, 꼬리기는 한데 뱀으로도 보였다.
본래 암무트의 꼬리랑 마찬가지인 색의, 흰 뱀으로.
“...으응?”
근데 다시 잘 보면 역시 뱀이 아니라 그냥 꼬리였다.
“...역시 주인의 정신 방벽은 생각 이상으로 단단하구나. 아무리 신성이 담기지 않았다고 한들, 설령 온전한 힘을 갖춘 것이 아니라고 한들. 엄연히 신의 권능이었던 것인데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니.”
살짝 질린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는 암무트.
그런 암무트에게 내가 물었다.
“그래서 이게 뭔데?”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권능 중의 하나이다. 내가 원래는... 시련을 내리는 자였음을 주인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를, 그녀의 기억을 그녀에게서 받아서 봤었으니까.
지금은 죽음으로 심판하는 자도 뭣도 아닌 그냥 작은 고양이, 아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암무트였지만 한때 그녀는 시련을 내리는 자란 이름으로 불리던 신이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들에게 시련을 내리고, 그 시련을 이겨낸 영웅들에게 그 위업에 걸맞은 힘을 내리는 신.
그런 신이었던 자가.
다른 신에게 패배하고, 죽음으로 심판하는 자란 이름의... 신이 부리는 짐승 중 하나로 영락했다가 끝내, 전부 잃어버렸던 자가 말했다.
“자고로 시련이란, 두려움과 공포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주인이 보았던, 주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처럼. 따라서,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마지 않는 모습을 취할 수 있었노라. 아니, 그런 모습을 취하도록 강제됐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사람들은 시련을 두려워했고, 그 시련을 내리는 자로 여기는 나를 두려워했으니. 나는 언제나 두려워마지 않는 존재여야만 했다. 때로는 죽음을 내리는 사신으로, 또 때로는 흉폭한 맹수들이 뒤섞인 모습으로... 수많은 세월동안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었노라.”
그렇게 말하는 암무트의 모습과 여러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능력이라 그런지, 그쪽 계통으론 내성이 강한 내게 있어선 희뿌옇게 덧칠 된 느낌만 들 뿐, 조금 집중하면 암무트의 본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사티나 에일레야, 홍련이 그런 암무트를 보며 움찔거리는 걸 봤을 때 저쪽은 제대로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음.
아무튼간에.
“간단히 설명해봐.”
설명이 너무 길었다.
그런 내 말에 한숨을 폭 내쉰 암무트가 말했다.
“...내가 복구한 권능은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을 취하고, 그 공포가 크면 클수록 더욱 강해지게 되는 권능이다. 상대가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변하고, 강해지지.”
뭔가 좀 애매한데.
암무트의 능력이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공포와 두려움은, 다르게 보자면 경외다. 내가 가진 권능으로, 앞으로 주인을 보는 자들에게 주인이 경외로운 존재로 보이도록 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이란 경외 받고, 그 경외로 하여금 신앙을 받는 자. 앞으로 주인에게 필요할 법한 능력을 우선해서 복구했노라.”
주인은 여러모로 위엄이 부족한 자이니 말이다.
굳이 덧붙이지도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 암무트의 말과, 그런 암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ㅡ 홍련과 사티, 아리아드를 제외한 아내들을 보고서 살짝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아무튼, 듣다보니까 좀 쓸모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거, 나도 쓸 수 있다고 했었지?”
“나는 주인에게 속해있는 존재이니, 내가 가진 권능 역시 주인이 사용할 수 있... 읏?!”
확인해보니까, 정말로 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써봤더니, 그런 나를 보다가 움찔하며 꼬리를 쭈뼛 세우는 암무트.
공포니 두려움이니는 모르겠고, 암무트가 말한대로 경외받는 쪽으로 사용해봤는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스윽,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는 암무트가 보였다.
근데, 암무트가 내 속마음을 읽듯이 나 역시 암무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아무 소용도 없었다.
“효과가 꽤 좋나 보네.”
만 년 동안 처녀였던 암무트가 나를 보기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까.
“그런 거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주인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효과가 더욱 강해졌을 뿐이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라!”
그렇다는 모양이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내게 종속된 자인 암무트에게 있어선, 되다만 권능조차도 진짜 권능처럼 다가오는 모양.
암무트의, 나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중에선,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자신의 권능을 쉽사리 사용해버린 나에 대한 경외도 있긴 했다만.
아무튼.
확인차, 아내들에게도 물어봤다.
“어때?”
“...평소랑 똑같은데 뭐가 어때야?”
“본녀가 보기에도 별로 변한 건 없어 보이는구나.”
“응, 내 눈에도 그렇네.”
“여도 마찬가지니라!”
“으응, 한조는 여전히 한조인거얼?”
이하가, 최소 반신격이나 그에 준하는 힘을 지닌 아내들의 의견이었고.
“...펴, 평소보다 조금 더 잘생긴 것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그, 근육도 조금 더 도드라진 것처럼 보이고...”
이하가, 초인에 이른 카루라의 의견이었다.
그 밑의, 사티나 에일레야, 홍련의 반응은 엇비슷했다.
나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거나, 쭈뼛거리면서 얼굴을 붉히거나, 허벅지를 꼼지락거리며 나를 보거나.
아무튼, 그런 쪽의 반응을 보였으니까.
사티랑 에일레야, 홍련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평소보다 훨씬 늠름해 보인다거나, 남자다워보였다는 모양이었다.
톡 까놓고 평소보다 잘생겨 보인다는 느낌.
나보다 격이 높은 아내들에겐 별다른 효과가 없어도 격이 비슷한 카루라를 포함해서, 그 밑으로는 효과가 있다고 보면 되려나.
“근데, 경외 쪽은 딱히 외형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러진 않나 보네.”
“그야, 그쪽은 보다 이상적인 상대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딱히 주인의 외형에 변화가 없다는 건...”
“아.”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졌다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아내들을 상대로 능력을 써봤자 기껏 해봐야 뽀샤시나 보정이 조금 들어간 정도로 효과가 드는 이유도 그래서인 모양이고.
그럼...
“...사실 능력이 안 통한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내 모습 그대로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일 수도 있겠네?”
격이 높은 탓에 안 통했던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이상형이라서 그런 거라는 가설을 펼치자, 얼굴을 찌푸린 릴리스가 그런 내 뺨을 붙잡았다.
“...다시 말해볼래?”
개소리하면 내 뺨을 그대로 잡아당기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릴리스의 붉은 눈에 내가 말했다.
“농담이야...”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내 뺨을 놓아준 릴리스가 말했다.
“뭐, 아무튼... 암무트에 대한 건 이제 됐고. 너, 예지나 다시 한 번 써봐.”
“...응?”
“어쨌든간에, 너한테 신성이 있다는 것도 확실해졌고 네가 본 게 예지인 것도 맞다고 증명된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봐봐야지. 네가 본 예지는, 우리가 네 예지를 듣기 전...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미래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그 미래를 알게 된 지금, 예지로 보는 미래도 달라진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번 봐보라고.”
나보고 그 끔찍한 꼴을 다시 보라고?
“...빨리 안 써?”
근데 지금은 릴리스가 더 무서웠다.
찾아오지 않은 미래보단, 당장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릴리스의 꼬리 쪽이 더 무섭다.
아무튼, 써보라고 하니까, 써보겠는데...
“...잘 안 되는데.”
애초부터 느닷없이 봤던 예지였어서 그런지 직접 보려고 하니까 잘 안됐다.
그리고, 그런 내게 아리아드가 말했다.
“조금 멀리이 내다보는 느낌으로 하는 편이 좀 더 쉬울 거야아. 뿌리를 뻗쳐서, 흙을 더듬어가며 나아가는 느끼임? 그런 느낌으로 신성을 움직여볼래애? 자, 내가 도와줄 테니까아.”
나무쪽의 느낌은 인간인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아무튼 아리아드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서 멀리 내다보는 느낌으로... 신성을 움직여봤다.
그리고...
작디 작은 내 신성이, 이번에도 내 의지에 응답했다.
“웁...!”
그렇게, 내 눈에 또다시 비쳐보인, 끔찍한 종말의 광경에 구역질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거대괴수가 미쳐 날뛰고, 세상이 수많은 세상과 겹쳐지며 종말에 치달아가고 있는 와중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처음 봤던 것과는 확실히 조금 달라진 종말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많았던 이전의 예지랑 달리, 이번에는 산 자랑 죽은 자가 반반인 느낌이었으니까.
여전히 세상이 수많은 세상과 겹쳐지고, 몬스터들이 날뛰며, 도시가 불타오르는... 씹창난 상태란 건 변함없었지만...
그래도 변화는 있었다.
또...
이전의 예지에는 보지 못했던 이들이, 이번 예지에선 보였다.
안타깝게도, 아내들의 모습이 이번 예지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년놈들이 이번에 본 예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거대괴수의 간식이라도 된냥, 촉수들에 꿰인 채로 꿈틀거리고 있던... 거대괴수랑 비교하면 한입에 먹힐 간식 크기였던, 중간에 박힌 안면이 익숙한 촉수 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굴 밑으로 거대괴수한테 뜯겨 먹혀버린 백발의 씹년이었다.
이전의 예지에선 보지 못했던 그 두년놈이 새로 본 예지에서 나왔단 것부터가, 그 씹새들이 내가 본 미래에 관련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무튼, 연달아서 미래를 들춰봐서 그런지 안 그래도 작디 작았던 신성이 거의 다 소모된 것이 느껴졌다.
몸 안에 기가 죄다 빨려나간 듯한 탈력감과 두통, 피로감에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가 본 예지를 아내들에게 말해줬다.
다시 봤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하지 않은 미래에도 릴리스를 비롯해서, 호아란이나 유스티티아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으로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이제 어쩔 거야?”
너무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내가 먼저 묻자, 뭐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 릴리스가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피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은 짙은 살기를 흘리며 릴리스가 말을 이었다.
“일단 그 두 새끼부터 찾아서 족쳐야지.”
“잡아서 족치는 거구나.”
“그게 가장 빠르니까.”
확실하기도 하고.
그렇게, 잡초가 자랐으니 뽑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릴리스의 모습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전에. 너 나랑 뭐 좀 같이하자.”
그런 릴리스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