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1)
이제 벌써 스무 번이 넘게 된 천마와의 대련.
시작한다던지, 신호라던지는 필요 없었다.
가능하면 실전에 가깝게 해달라는 내 부탁에, 천마가 응했고 대개 실전이란 건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란 의미였다.
후웅, 뻗어져 나오는 천마의 주먹을 스치듯이 피했다.
피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예리하게 날이 선 칼에 베인 듯, 찢겨져나가는 뺨에서 핏물이 튀고, 반으로 갈라지는 살 사이로 이빨이 드러났지만.
어쨌든 피한 건 피한 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주먹으로 내 시선을 가린 사이에, 내 복부를 올려 차오는 천마의 무릎차기가 정통으로 복부에 꽂혔고, 나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ㅡ그런 미래를 봤다.
자각하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아무튼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능력.
솔직히 사용하는데 신성을 필요로 하는 데다가, 애당초 신격을 지녔던 아리아드의 권능을 근원으로 둔 능력이다 보니까 권능이라고 해도 될, 미래 예지였다.
물론, 원본 그대로의 미래 예지는 아니었다.
이전에 봤던ㅡ 세상이 좆창나는 아포칼립스를 보는 수준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짧은, 바로 있을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바꿨으니까.
신성의 소모도 그쪽이 훨씬 줄어드는 데다가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보다는 이쪽이 당장의 대련이나, 전투 쪽으론 훨씬 유용했으니까 그렇게 했다.
한순간, 시간으로 치면 고작해봐야 1초, 2초 남짓의 미래를 먼저 보는 거더라도, 아무튼 미래를 먼저 보는 거다.
초단위에서 결판이 나고는 하는, 초인간의 싸움에서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우위를 가질 수 있는지는 초인에 입문한지 몇 개월도 안 된 나도 잘 아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천마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서, 잡아챘다.
빠지지직, 하고 그 충격으로 천마의 주먹을 받아챈 용 발톱이 아작이 났지만.
단지 그뿐.
팔이 아작나진 않았다.
근데.
미래가 변했다.
아니, 변하고 있었다.
오른쪽 눈, 미래 예지를 실시간으로 진행 중인, 미래시를 통해서 천마의 몸이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이 보였다.
초인의 영역에서, 1초, 2초의 앞을 내다보는 미래 예지는 확실히 강력한 힘이다.
동일한 수준의 상대를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일대일을 상정하는 대인전에서는 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힘.
근데, 그 초인의 범주를 넘어선 초월자의 영역에선 미래 예지는 고작 조금 ‘빨리’ 보는 정도에 불과한 능력이었다.
반사신경, 경험, 직감... 그 모든 것을 쌓아올린, 승천의 직전에 둔 초월자에게 있어선.
“흠.”
아주 살짝, 자신의 주먹을 막아낸 나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며 감탄하는 정도의 묘기에 불과했다.
무수하게 나뉘어지는 미래의 영역에서, 천마는 내가 붙잡은 손으로 그대로 밀어붙여서 내 턱을 날려버리거나, 아니면 비틀어 엎어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힘으로 짖뭉개버리거나.
온갖 방법으로 나를 쓰러뜨려 버리는 미래로ㅡ 그 미래를 강제해버릴 만큼의 힘이 있었다.
한순간의 앞을 내다보는 나랑, 그 한순간을 몸에 익힌 영겁에 가까운 많은 무리로 헤집어서, 그대로 강제해버리는 천마.
그리고 그 강제력에 한없이 무력하게 짖눌릴 수 밖에 없는, 미래를 좀 내다볼 줄 아는 묘기를 가진 일개의 인간.
초인이란 강자조차도 초월자 앞에선 평등하게 허접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미래를 내다본다고 한들, 내 몸이 그 미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억지로라도 이뤄버릴 만큼 상대와의 역량이 차이가 나는 법이니까.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은 언뜻 보기엔 무적이나 다름없어 보이지만, 닥쳐올 미래를, 그걸 이겨낼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능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관조할 뿐인 능력.
그저 내다보고,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능력이다.
그건ㅡ 내가 강해지지 않는 이상은, 내가 변하지 않는 이상은 내가 보았던, 앞으로 찾아올 미래 역시 막지 못한다는 말과 동일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서라도 그 미래를 비틀어버린다.
쁘직...
미래를 내다보는 오른쪽 눈과 달리, 사물의, 인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카루라에게서 얻은 신조의 눈.
천통안을 통해서 무수하게 나뉘는 미래 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봤다.
이 역시 확실시되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천마란 존재를 다시 한번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니까.
천마는, 모든 무공을 익힌 괴물이다.
앞으로 태어나는 무수한 무공조차도, 반드시 익혀버리는 존재인, 기신이고.
그러한 천마이기에, 천마의 모든 행동은 합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상대를 쳐부수고, 승리하고 마는... 무적자로 향하는 구도자이자 수도자인 존재.
그런 존재이기에, 천마의 미래를 한 번 더 내다볼 수 있었다.
아니, 예측하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들여다본 천마라면, 내가 아는 천마라면 어떻게 할지 한 번 더 머릿속으로 검토하는 것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힘에서 나보다 앞서는 천마가, 이미 행하고자 한 것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이미 하기로 한 것을 구태여 바꿀 이유가 없었으니까.
무수하게 겹쳐 보이던, 무수하게 많았던 내 미래는, 내 능력을 알고 있는 천마의 단순한 페이크에 불과했다.
그러니, 현실을 마주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막아냈다고 한들.
그대로 나를 뚫어부술 작정으로 찔러 들어오는 천마의 무릎이 보였다.
처음 봤던 미래, 그대로.
바꿀 필요가 없기에 바꾸지 않은 미래를 그대로 강요해오는 천마가 보였다.
피하는 건 무리.
피해봤자 이 거리에서 천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당초, 그러면 기껏해야 고정해버린, 현재로 이루어진, 내가 내다본 미래마저 바뀌어버린다.
오만.
아니, 그럴 자신이 있기에 내게 패배를 강제하려 드는 천마는, 내가 다른 방법을 써서 위기를 극복하려들면, 또 다른 방법으로 끝내 이기려 들게 분명했다.
무적자.
그를 염원하는 자들의 소망으로 만들어진 기신은, 언제나 승리하려드는 자니까.
그러니, 정면에서.
아작이 났다고는 해도, 아작난 건 그저 용 발톱에 불과하고ㅡ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몇 동강 부러지긴 했어도 움직이기는 하는 오른손을 비틀었다.
그런 들, 겨우 붙들어잡고 있는 천마의 주먹은, 웨어울프에 오니의 능력으로 강화된 내 완력으로도 꿈쩍하진 않았지만.
내 안에 있는 기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힘의 반발.
무력으로 나를 짓누르려 하는 천마의 힘으로 하여금, 태산처럼 무거운 천마의 주먹에 들이붓는 힘의 반발로, 한층 회전을 거듭한 기를 그대로 왼쪽으로 옮겼다.
힘의 이전.
본래는 단전이란 하나의 기관을 사용해서 옮겨야할, 그래서 내 수준으로는 기를 옮기는 데만 한세월이 걸릴 것을, 이미 뽑혀져 있던 아홉 개의 꼬리의 도움까지 받아서 단번에 왼쪽으로, 천마의 무릎이 들이닥치고 있는 쪽으로 옮겼다.
뿌득, 뿌드드득.
악문 이빨이 바스라지고, 단숨에 증폭된 막대한 기가 옮겨지면서 기혈이 용솟음치며 돌출되는 것이 느껴졌다.
터지고, 찢기고, 그러나 재생한다.
그렇게 옮겨낸, 기가 왼쪽에서 발했다.
힘의 돌출.
그동안 천마에게 배운 무투술 중 하나인, 태극.
상대의 힘을 이용해서, 힘을 증폭시키고, 또 그 힘으로 되받아치는 무리를 지닌 무공을 실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체, 견고, 강화, 강력, 강고,
내가 알고 있는 온갖 내구성 강화계의 주술들이 이미 몸 내부에 새겨놓은 회로를 따라서 발현한다.
내가 머리가 썩 좋질 않아서, 그래서 호아란에게 사사받아서, 그녀가 알고 있는 무수한 주술들을 익힐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익히지 않았다.
어차피, 나 대신에 주술을 써줄 호아가 있었으니까 전적으로 주술은 호아에게 맡기고.
그 대신에, 내 두 팔과 두 다리를 일종의 주구로 만들었다.
제 아무리 팔다리가 찢겨나가고, 새로 재생한다고 한들 그 혈관으로 하여금 만들어낸 회로까지도 도로 복구될 만큼, 나 스스로에게 새긴 영구한 상흔.
하나하나 새길 때마다 존나게 아팠지만, 효과는 쩔어줬다.
남아도는 무지막지한 기로 하여금, 효율이라곤 상정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부은 기로 강화된 강화 주술이, 내 왼팔을 견고한 성채로 만들었다.
제 아무리 강기를 두른 칼이라고 한들, 내 팔의 살갗을 찢을지언정 뼈마저 가르진 못할 정도로 두터운 성채로.
근데...
파지지지직...!
“푸헉!”
왜 결과는 똑같지.
분명히 흘렸는데, 천마의 무릎을 흘려보내던 왼손이 용 발톱째로 뭉개지며 복부에 들이닥친 충격에 울컥하고 올라오는 피를 토해버렸다.
미래 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까지 썼는데...
근데도 뚫렸다.
물론, 아주 효과가 없던 건 아니었다.
피를 토했지만, 내가 봤던 미래랑 달리 우웩이 아니라 웁하는 정도였으니까.
전부 흘리진 못했지만, 천마의 공격을 어느 정도 흘리긴 했다.
근데 그뿐이었을 뿐이었다.
양쪽 용 발톱은 너덜너덜해졌고, 천마의 무릎이 꽂혀들어간 천호의 갑주 한가운데가 움푹 우그러졌다.
찢어지고, 부숴지진 않았지만 찌그러진 천호의 갑주에 찔린 내장이 조각조각이 나버린 것이 느껴졌다.
나름 열심히 하는 복근운동 덕에 조각난 정도로 끝났지 아니였으면 배에 구멍이 뚫릴 뻔 했다.
주술로 강화한 보람이 있는지 왼팔은 존나 멀쩡했지만.
애당초 충격이 팔을 관통해서 몸에 꽂혔으니 강화하지 않았어도 부러지고 말았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