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불태우는 자
차원과 차원의 사이.
그 경계를 고정하고, 영역화하는 차원 결계는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기존의, 마법이나 주술, 혹은 도술이나 요술이라고 불리는.
그야 이 차원 결계는 저마다의 세상에서 존재해오던 체계를 집약시켜 만든, 새로운 이론에 한없이 가까운 ‘마법’이었으니 말이다.
세상에 퍼져있는 힘.
‘마나’라고 불리는 것을 재단하는 여러 방식의 수단을 뒤섞어 만들어낸... 이름 모를 천재들이 확립시킨 이론으로 만들어진 이 결계 마법은 설령 저 가증스러운 스물둘의 영웅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 차원 결계가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이상 결코 찾지 못하는 장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차원의 세상이 있음을, 그 세상과 겹쳐지는 디멘션 크래쉬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한 무수한 차원을, 세계를, 그 사이를 도려내서, 고착화하고 거점화하는 차원 결계는 그 무수한 세상의 차원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좌표를 정확하게 알지 않는 이상은, 단언컨대 찾을 수 없는 완전무결한 은닉처였다.
아주 사소한 ‘오차’조차도 무수하게 존재해하는 차원과 그 경계의 앞에서는, 터무니없이 커다란 ‘오차’가 되고 말아버리니.
대체 이런 것을 그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설령 아무리 여러 차원의 세상이 존재함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가 있음을 알고 또 그걸 고정화시키고 영역화하는 것으로.
그저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고, 그저 단순히 숨을 수 있을 뿐인 외딴 장소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인 방법을 써내려간 것일까.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차원 결계는 말 그대로 외떨어진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인 마법이었다.
틀어박히고, 숨는 것이 전부인 마법.
대체 누가, 아니 어떤 집단이...
그만한 마법 지식과 주술 지식, 그리고 요술과 도술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천재’들을 모아, 이러한 마법을 만들어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연히 그 이론이 적혀져 있던 책을 얻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 다룰 수 있게 된 차원 결계 덕에 세계 곳곳에 만들어낸 거점들은 무척이나 쓸모가 많았다.
설령 곳곳에 어느 가엾은 자의 축복받은 눈을 통째로 뽑아내서 만들어낸... ‘천리안’을 복제한 눈을 둔 세계 정부라고 할지라도, 차원의 너머... 그 경계에 있는 자신의 은닉처를 찾아낼 수는 없었을 테니.
...물론, 더는 완전하다고는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야, 이전의 ‘나’는 그러한 은닉처인 차원 결계 내에서 죽어버린 모양이었으니.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알 수 없으니, 완벽하고 무결하다곤 더이상 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변에는 적어도 그러한 차원 결계를 보는 것은커녕, 열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뚜벅, 뚜벅.
그러니 혼자여야만할, 적막해야할 뿐인 공간에, 울려퍼지는 이 구두 소리는, ‘문’을 통해서 넘어온 자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보아하니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네요?”
뒤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입들을 열었다.
“...경비가 이전보다 약해졌다. 주둔하고 있던 무력 집단... 세계 정부가 자랑하는 ‘힘’ 중 넷이 빠지고 그 대신에 사설의... 하청이나받는 헌터들이 경비를 서더군.”
그렇게, 하청을 받게 된 집단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은빛 갈기단.
웨어울프를 주축으로 한, B랭크의... 아니, 최근에는 신규로 가입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력과 대체 그리 크지도 않았던 규모의 클랜으로 어찌 구했는지 모를 술사들 덕에 A, 혹은 S랭크 헌터 클랜으로 책정받을 예정이란 곳이었다.
“흐응... 경비가 약해지면 좋은 거 아니에요? 냉큼 가서,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그놈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개체를 회수해오면 되잖아요? 보아하니 초인 수준도 안되던 것 같던데?”
목이 잘려나간 이후로,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 그런 걸까.
한층 더 멍청해진 소리를 내뱉는 백발의 흡혈귀, 라우라의 말에 베르그라오그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담긴 멸시까지는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떨어진 것은 아닌 모양인지, 라우라가 말했다.
“...뭐에요, 지금 그거? 똑바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기분이 좀 나빠질 것 같은데?”
빙그르르, 양산을 돌리며 말하는 라우라의 말에 재차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베르그라오그르가 말했다.
“....저들은 나의, 위대한 대계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만. 그러나 멍청하지는 않지. 갑작스레 저렇게 경비를 축소한 이유가 있을 터.”
라우라의 말대로, 이전에 비하면 경비가 무척이나 약해진 것은 맞았다.
지금이라면, 이전과 달리...
저기 있는 모두를 죽여버리고서, 무지한 자들로부터 핍박받고 있었을 ‘나’를 구출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기껏해봐야 초인의 영역에 들은, 몇 안되는 전력은 수많은 ‘나’로부터 바쳐지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를 앞둔 ‘나’를 막아낼 수는 없을 테니.
허나.
저들, 은빛 갈기단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더 이상 이전의 그 약소한 클랜이 아니라, 세계 정부로가 뒤집어 쓴 가면이리라.
그만한 인원, 그만한 힘을 집약시킬 수 있는 단체는 그뿐이니까.
이전보다 훨씬 무방비해진 경계 역시, 자신을 노리고 저들이 파둔 함정이리라.
제아무리 저기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한들, 지금의 자신이, 무적이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보다도, 더욱 많은 모체로부터 태어난 ‘나’로 이루어졌던 이전의 자신은 이미 죽어 없어졌다.
당장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흡혈귀조차도 어쩌지 못할 만큼 약해진 이상...
이전보다 구하기 어려워진 모체의 수급으로 인해 ‘나’의 탄생이 더뎌진 지금, 뻔히 보이는 함정에 파고들 수는 없었다.
“흐응, 한 번 죽었더니 조심성이 너무 많아진 거 아니에요? 뭣하면... 제가 대신 꺼내와줄까요?”
“...됐다.”
이 뇌수가 썩어버린 멍청한 흡혈귀가,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그렇게 된다면 대체 얼마나 콧대가 높아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시간은 많으니, 기다리면 그뿐이지.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지, 저들이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니.”
지금도 저 안에서 있는 ‘나’가 느껴졌다.
무지한 자들로부터 모진 구박과, 학대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죽이려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마, 자신을 사로잡거나... 죽이기 위함일 것이다.
저기에 있는 ‘나’ 역시 ‘나’.
더욱 커다랗고, 더욱 번성한 ‘나’에게 이끌림을 저들 또한 알아 챘을 테니.
그러니 기다린다.
세계 정부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디 강했다.
한층 ‘완전함’에 가까워진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저들의 저력이라면 ‘나’를 완전히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라.
수많은 세상이 합쳐졌고.
수많은 세상에서 군림하던 강자들이 굴복했으며.
또 그 수많은 세상에서 태어난 재능있는 자들이, 모든 것의 위로 올라선 그들의 아래에 있었다.
강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삼 천여 개가 있는 세계 정부의 ‘힘’
저들에겐 무려, 300만에 이르는 ‘초인’들이 있었다.
하나의 세상으론, 결코 이룰 수 없었을 어마무시한 ‘힘’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세상에선 ‘영웅’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을 이들로 구성된, 강력한 ‘힘’.
저들 하나하나는 ‘나’를 죽일 수 없을지언정, 그들 모두의 창끝이 향한다면.
설령 ‘완전함’에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그런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지닌 저들의 창끝이 향한다면.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렇기에 저들은 약했다.
강하기에 군림하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무력을 독점하기에 터무니없이 강했지만.
그들이 굽어 살피며 다스리려하는 땅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수많은 세상이 합쳐져버린 이 세상을 통치하는 유일한 정부라는 ‘강함’은 그 거대한 덩치에 흩뿌려져서 ‘약함’을 낳았다.
“어리석은 자들이지. 자격이 없는 자들은, 다만 이용하면 그만인 것을. 그들은 그걸로 족한 존재들인데.”
재능이 있는 자.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자.
하늘로부터, 마땅히 사람의 위에 서는 것을 허락받은 자.
천성의, ‘강함’을 지닌 자들.
날 때부터 군림하는 것이 당연한 무수한 자들이 있으나, 저들은 그들과... 한낱 땅을 파며, 흙으로 손을 더럽히는 것 밖에는 재주가 없는... 버러지같고, 홀로는 아무것도 하지도 못할 이들과 동일하다고 여겼다.
평등.
그러한 이름으로.
천년을 살아가며, 천년을 배우고, 천년을 쌓아올리는 존재와.
고작 수십 년을 채 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릴 뿐인 존재를 ‘같다’고 여겼다.
같을 리가 없는 것을.
아무리 바둥거려도, 제아무리 아우성치고, 소리지르고, 윽박지르며 같다고 말하라고 한들 같아질 리가 없는 것을.
같다고.
같은 ‘생명’이라고.
그 천성에 맞게, 그저 지배받고, 그저 착취당해야 마땅한 존재들을 살리려들었다.
그러니, 저들은 강하지만 약했다.
평생토록 무언가를 익히고, 남기려고 하더라도.
태어나기를, 천재로 태어난 이들의 족적에 파묻히고 말 뿐인, 그저 그뿐인 존재들을 위해서 그 강대한 힘을 모을 수가 없는 족속이니.
“차라리, 그렇다면 나의 대계를 따르는 것이 좋을 터인데... 어리석은 자들이다. 자격이 없는 자들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이 어찌나 낭비인지 알면서도...”
병든 자.
늙은 자.
힘이 약한 자.
장애를 타고 태어난 자.
그러한, 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은, 차라리 그럴 바엔 보다 쓸모가 있는 곳에 사용하는 것이 옳을 텐데.
그들이 그러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자신들이 가장 그 수혜를 받아서, 재능을 받고, 천성을 받고, 타고나기를 군림하는 자들로 태어나놓고서.
마땅히, 모두를 굴복시키고, 군림하며, 이끌어야한다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들이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진보하여, 완전하고 무결한 존재로 승천할 수 있을 길을.
자신들의 알량한 이기심으로,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자들.
이미 가진 자들이기에, 가지지 못한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낳은 ‘세계 정부’이기에, 그들은 나의 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천만, 수억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그보다 많은 자들이 완전해질 수 있는 길을 어째서 거부하는가.”
이 세상은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세상이었다.
수많은 종족이 모여서, 그 피로써 모두가 한층 더 나아갈 수 있는 세상.
엘프의 피를 이어받는 것으로 엘프보다도 더욱 많은 수명을 가질 수 있다.
오니의 피를 섞는 것으로 병들지 않을 수가 있었다.
웨어울프의 피로, 상처를 입지 않는 몸을 가질 수 있었다.
나아가서는 지고한 드래곤의 뛰어난 지혜마저도 가질 수 있었다.
더더욱 나아가서는, 모두가 자신처럼 완전해질 수 있는, 진리를 향하는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섞고, 섞여서.
모두가 완전해진다면.
이 세상은 보다 나아질 수 있는데.
그러한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연구한... 모체로부터 ‘힘’을 이어받고, 나아가서 그 힘을 ‘전할 수 있는’ 생명체를, ‘나’를 만들었는데.
“...그딴 허무맹랑한 소리는 그만하고. 어쨌든 당장 할 일이 없다는 거죠? 그럼 따라와요. 그뿐께서... 당신을 찾으시니까요.”
....그러한 세상이라면.
태생이 흡혈귀라는, 다른 누군가가 없으면 살아가지도 못하는 불완전하고, 그저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저런 존재 따위가.
감히 자신에게 뭐라할 수 있는 세상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저 암컷이기에, 그저 자식을 낳을 모체로써의 쓸모만이 있을 뿐인 저런 존재에게 이러라 저래라할 소리를 들을 이유도.
저 흡혈귀가 말하는 ‘그 분’에게조차, 고개를 숙일 이유도 없었으리라.
“...그래, 가지.”
허나, 어쩔 수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리석어, 다만 자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정부’보다는 저 여자나, 그 뒤로 있는 자의 힘이 필요했으니.
“그럼 빨리 문이나 열어요.”
“......”
언젠가, 저 여자를 반드시 ‘나’를 낳을 뿐인 모체로 만드리라 다짐하고서, 차원과 차원.
그 경계 사이를 잇는 ‘문’을 열었다.
무지하고 몰이해해서,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자신을 존중할 줄도 모르는 저치들을, 언젠가 모두 무릎 꿇으리라 생각하면서.
『드디어 왔군. 베르그라오그르, 라우라.』
‘문’을 열어서 도착한 곳.
그곳에는 이미 먼저 자리에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모두 열 두 자리.
그 중 세 빈자리가 보였다.
하나는 자신, 베르그라오그르의 자리였고 또 하나는 옆에 있는 흡혈귀의 자리였다.
다른 하나, 영혼의 반쪽이니 뭐니하는 것을 데려오겠다며 밖으로 나섰다가, 소식이 끊겨버린...
백만의 죽은 자들을 일으켜세울 수 있던, 반신에 이른 사령술사, 이모텝의 자리가 비어있었지만.
솔직히 그자의 빈 자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그가 가져갔던... 스물둘의 영웅들을 대비해서, 그들이 가진 ‘신성’을 억누를 수 있는 유물 중 하나를 잃게 된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한때, 신을 굴복시키고 종으로 부릴 수 있게 했다는, 어떤 차원의 태곳적부터 존재해왔던 유물을 잃어서ㅡ 그로 인해 대업에 있어 가장 방해가 될 스물둘의 영웅 중 하나인, ‘여제’를 억누를 수단이 사라져버렸으니.
서큐버스 퀸이라는, 희귀하디 희귀한 초월종을 모체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지게 되어버린 격이라서, 더더욱 안타까웠다.
허나...
『베르그라오그르, 준비는 어떻게 됐지?』
‘그 분’
지혜로도, 힘으로도, 결코 ‘나’에 비해서 보잘것없는 이들을 모았지만.
저 강대하디 강대한 적, ‘세계 정부’로부터는 정면에선 으깨질 뿐인 족속들만 겨우 모아놓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 외차원의 결계에서 숨어지내는 자들의 군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의 말에 베르그라오그르가 입을 열었다.
“...차원을 열어젖히고, 이 세상과 강제로 겹치게 하는 마법은 문제가 없다. 이미 죽어, 무너져버린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그를 열어젖힌 매개로써 ‘나’를 희생시킬 준비 또한 되었으니.”
차원 결계.
차원과 차원의 틈 사이를 영역화하는, 마법은.
그렇기에 무척이나 불안정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무너져서 영영 차원 사이의 미아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마법.
허나, 그렇기에...
자연적으로도ㅡ 수많은 차원과 뒤섞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인공적으로 디멘션 크래쉬를 일으킬 수도 있는 마법이었다.
동시에, 여러 차원 결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본래도 흔들리고 있는 이 세상의 차원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었으니.
이미, 실험도 성공했다.
이백 여개가 넘는 차원 결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서른 곳이 넘었던 장소에 인공적으로 디멘션 크래쉬를 일으켰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를 더욱 늘려야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실험으로 희생된 ‘내’가 이미 만이 넘었으니. 계획을 위해서라도... 그 열 배의 ‘나’를 낳아줄 모체가 필요로 하다. 너무 약한 모체로부터 태어난 ‘나’는 그만한 일을 할 수 없으니... 최소한 인간, 그 이상의 힘과 크기를 지닌 모체가.”
『그런가.』
나의 말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 분’이 보였다.
여기에 모여있는, 어줍잖은 ‘반신’들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에 가까운 자.
아니, 어쩌면 그 ‘완전한 자’보다 더욱 진보한 자.
『시간이 없으니, 나의 아이들을 제공하마. 그들을 모체로 삼아,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하라.』
자신의 세상에 존재하던 신을.
세상의 절반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불태우고, 잡아 먹어버린, 미쳐버린 하이 엘프.
끝내 무너져가던 세상에서, 제 아이들을 범하고, 태어난 제 자식들 다시 잡아먹는 것으로 쌓은 공포와 경외로 이 세상으로 넘어와버린 괴물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던 괴물이, ‘그 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증스러운 우리 어머니. 나무여. 다시 그대가, 그대의 딸이 보살피던 세상이 불타는 것을 보소서.』
나의 증오로, 다시 한 번 불살라 타오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