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 예속 (2)
30분쯤 지났을까, 멍한 얼굴로, 하지만 이전과 달리 제대로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천장을 보고만 있던 천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
그런 내 말에 아무 반응도 안 하는 천마였지만, 나는 봤다.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아주 미세하게나마 천마의 눈썹이 꿈틀했다는 걸.
하지만 그대로 무시할 생각이었는지 몸을 일으킨 천마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발목에 걸쳐져 있던 팬티를 흘긋 쳐다봤다가, 이내 그냥 그걸 도로 입는 것이 보였다.
스으윽, 하고 팬티를 입는 천마를ㅡ 이번에도 자신이 뻗어버렸단 사실을 없던 셈 치려는 듯한 천마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큰소리 뻥뻥 쳐놓고서... 또 정신을 잃어보니 어때요?”
그제서야, 천마가 흘긋하고 나를 보고는 말했다.
“...이 몸은 그런 적 없다.”
또 그러네.
하지만 그런 천마를 위해서 이번에는 준비해둔 것이 있었다.
품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천마의 눈앞에 내밀었다.
“......?”
의아하며, 그런 나를 보던 천마에게... 촬영했던 것을 보여줬다.
‘자, 천마. 찍히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남한테 보여주기 상당히 민망한 꼴로 널브러진 천마의 모습이 촬영된 것이, 그런 내 스마트폰에서 재생됐다.
그리고.
후욱, 하고 뻗쳐나오는 천마의 수도를 뒤로 껑충 뛰어서 피했다.
이미 발동 중이었던 미래시를 통해서, 천마가 대뜸 내 스마트폰을 박살을 낼 거란 미래를 봤기 때문에 가능한 회피였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공격을 피하자.
천마가 나를 노려보고는 말했다.
“...지워라.”
싸늘하디 싸늘한, 당장 내 목을 수도로 쳐 날릴지, 아니면 주먹으로 머리를 터트릴지 고민하는 듯한 살기를 내뿜으며 말하는 천마의 말에 내가 말했다.
“그럼 인정하시라니까요. 마구 가버리느라 촬영하는 줄도 모르고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
꿈틀, 눈썹을 들썩인 천마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은 그런 적이 없다.”
“그럼 저도 안 지워요. 찍히기 싫으면 싫다고 말씀하라고 말했었잖아요? 증거도 있는데, 다시 보여드려요?”
“......이놈.”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천마였지만, 조금 전까지 내 자지로 잔뜩 가버린 나머지 정신줄을 놓고 있었던 천마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별로 무섭지 않았다.
“뭐,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요. 이걸로 천마한테 뭘 할 생각도 없고요. 지금 당장 인정만 해도, 지워줄 수 있다고요?”
“......”
빤히, 나를 노려보는 천마.
그런 천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고 있자, 이내 한숨을 내쉰 천마가 말했다.
“...영상을 지워준다면, 뭐든 한가지 들어주마.”
어...
“...뭐든이요?”
확인차 물었더니, 스윽하고 제 몸을 가리는 천마가 보였다.
“...아니, 정정하지. 이 몸의 몸을 탐하는 걸 제외한 것을 뭐든 들어주마. 지금은 무, 아니... 그럴 시간이 없으니. 대신... 그래, 입으로는... 괜찮다.”
아니.
딱히 그럴 생각은 없는데.
조금 전까진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차피 천마가 깨는 걸 기다리고 있느라 이제 곧 있으면 있는 의무방어전이 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천마 펠라치오야 조금 아쉽긴 해도, 어차피 이따 아내들과 순서 정하기를 하는 걸 촬영하면서 이것저것 받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마에게 물었다.
“그럼, 다음 회차... 마지막 차례를 했다치는 걸로 한다는 건 어때요?”
천마에게 코가 꿰여서 3회차까지 연장 계약하기로 했고, 이번이 그 두 번째였다.
앞으로 한 번 더, 2주 뒤에 있을 3회차가 남았는데.
그래서 물었더니, 꿈틀, 하고 눈썹을 들썩인 천마로부터... 이제까지랑은 비교도 안 될 살기가 흘러나왔다.
“...흐응.”
나지막이, 그런 소리를 내며 나를 보던 천마가 나를 덮쳐왔다.
미래시를 통해서 천마가 나를 덮친다는 것을 봤는데.
그 미래의 천마와, 현재의 천마의 모습이 겹쳐지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일었지만, 곧 이유를 알았다.
“그 눈에만 너무 의존하면 이런 식의 공격은 피할 수 없겠지.”
꾸욱, 하고.
두 다리로 내 다리를 누르고, 양손으로 내 팔목을 붙잡은 채로 올라탄 천마가 이유를 말해줬으니까.
“고작 조금 앞의 미래를 본다고 한들, 결국 네 놈이 그 미래를 인지하는 시간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그만이니.”
내가 미래를 예지하는, 그 한순간.
내 인지가 예지를 보고, 그것을 알게 되는 그 한순간보다 빠르게 움직였기에 내가 본 ‘미래’의 천마와 나를 덮친다는 ‘현재’의 천마의 모습이 겹쳐버렸다.
이론은 이해했다.
이해는 했는데...
“...그게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요?”
“많지는 않겠지. 허나, 네 놈 앞에는 있지.”
그야, 그 말 그대로의 방식으로 덮쳐져 버렸으니까 내 눈앞에 있기는 한데.
진짜 너무하네.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아, 알았어요. 지우면 되잖아요. 지워드릴 테니까 그만 비켜요.”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
팬티만 입은 천마가 내 위에 올라탄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우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영상을 지운다고 하면, 말로 할 때 그럴 것이지 하고 이죽거리며 일어나줄거라고 생각했던 천마가 이러니까 왜 그러나 싶었을 때, 그렇게 나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으마.”
어쩐지 망설이는 듯한, 천마의 검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내비쳤다.
“...이 몸의 가슴이 작아서 그런 건가?”
“넹?”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한, 이 몸의 말에... 굳이 그런 걸 부탁한 이유를, 이 몸을 안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어...
갑자기?
그거야 반쯤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였는데.
어차피 기신인 천마가, 순순히 그러마하고 들어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근데,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천마의 말이 이어졌다.
“매화 녀석이 말했다. 성장한 이 몸을... 사내라면 결코 거부할 리가 없다고. 지난번에 본 제자 중, 사내아이들이 이 몸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을 보면, 매화의 말대로 이 몸의 미색이 썩 나쁘진 않다는 뜻이겠지.”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지만.
딱히 부정할 순 없었다.
지금도, 내 위에 올라탄 천마의 새하얀, 잡티 하나 없는 피부도 그렇고, 길어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내버려 둬서, 치렁거리며 흘러내린 것 역시 그런 천마랑 아주 잘 어울렸다.
마치, 장인이 만들어낸 인형처럼 아름다운 미소녀가 천마였으니까.
기신으로써, 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만큼 급격하게 성장하고서, 딱 거기서 도로 멈춰버린 천마라서.
미녀라기보단, 미소녀에 그쳤지만.
그래서 지금도 천마가 말한 대로, 성장 도중에 멈췄는지 아니면 그게 한계였던 건지는 몰라도, 가슴도 성장을 멈춰버리긴 했지만.
아마 성장이 멈추지 않았으면 더 커졌을지도 몰랐을 천마의 가슴을 보자니,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한 천마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뿌득, 하고 내 손목을 붙잡은 천마의 손아귀에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꾸미기 위해 옷을 입었다. 사내들이 좋아한다는 속옷도 입었다. 이 몸 역시, 누군가와 통정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매화 녀석의 도움을 받았지. 너는... 이 몸을 안는 것을 꺼려했었으니, 그걸 억지를 부려서 안게 만들었으니 그 정도의 기쁨은 누리게 해줘도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었다. 허나, 너는 그런 이 몸을 보지 않았다.”
아니...
봤었는데.
천마도 꾸미고 다니는구나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천마의 눈에는 딱히 그렇게 보이진 않았나보다.
아니면, 본인이 기대했던 반응을, 내가 하지 않았다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마의 말이 이어졌다.
“...이 몸을 안을 적에도, 딱히 기뻐 보이지도 않았지. 이 몸을 속이고, 이상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역시 필요로 해서 했던 행위에 불과했었지. 정을 통한 사이라면... 응당, 호의를 품는다고 들었거늘. 네 놈은 시종일관, 이 몸이 아니라 이 몸에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더욱 관심이 많았었다. 이 몸을 안기 전이나, 그 후에나 이 몸을 대하는 태도는 변함없었지.”
그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갑작스레 들이닥친 천마랑 하게 됐었으니, 그땐 디스펜서로서 할 거나 하자는 마음 가짐이긴 했다.
천마를 어디까지나, 나를 구입한 손님으로 여기고, 대했다.
맡은 바엔, 계약대로는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뿐이긴 했다.
“그래서, 분했다.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은... 아니구나, 릴리스에게 처음으로 패배했을 적에도 느껴봤으니. 하지만, ‘패배’해서 느낀 분함과는 다른 분함이니, 처음이라고 해도 좋겠군. 그래서... 다음에는 네 놈이, 이 몸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고...”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의 천마를 올려다봤다.
흔들거리는 눈동자엔, 여전히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천마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혹스러워서, 천마랑 마찬가지로 흔들거리는 눈을 하고 있는 내가.
차마 말하기를 수치스러워하는 듯, 아니... 부끄러운 듯,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는 천마를 올려다보고 있는 내가.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던 끝에 천마가 말했다.
“...네가, 새로 들인 여자... 홍련이란 이름의 오니도 그렇고. 네가 사랑한다고, 매일 밤마다 속삭이는 대부분의 여자들도 그렇고... 심지어, 가장 작은 아이도 그렇고. 전부 이 몸보다 더 컸었지. 역시... 이 몸의 가슴이 작아서, 그래서, 이 몸을 안는 것이 네 놈은 기쁘지 않은 것이냐? 즐겁지 않으니... 그렇기에 이 몸을 안는 것이 싫은 것이냐?”
누굴 가슴으로만 사람을 사랑하고 말고 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천마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아뇨, 뭐. 천마 가슴도 예쁘다곤 생각해요.”
작지만, 전과 달리 나올 건 제대로 나온 가슴이고.
젖꼭지도 연분홍색의, 무척이나 예뻤다.
조금 작긴 했지만, 유륜도 좁은 편이라서 어울리기도 하고.
그런 내 말에, 순간 멈칫했던 천마가, 나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왜지?”
“그러는 천마야말로, 왜요? 어차피 저랑 해서... 아이만 생기면 됐던거 아니였어요?”
어차피 ‘아이’를 원할 뿐인 천마가, 굳이 그런 걸 신경 쓸 이유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물었는데.
그 말에, 그대로 멈춰서, 나를 내려다보는 천마가 보였다.
“...천마?”
그런 천마를 부르자, 한숨을 내뱉는 것처럼 천마가 말했다.
“...모른다. 모르겠다. 어째서, 이 몸이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처음에는... 처음에는 그 말대로였다. 내 몸이, 네 아이를 원했다. 너와 살을 섞고, 네 정을 받아들여, 아이를 낳기를... 그것이 이 몸이 나에게 요구하는 ‘의무’였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니.”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이 몸도... 나도, 모르겠다. 네가... 이 몸을 대할 때와, 다른 여자들을 대할 때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서글픈 기분이 들어서 당혹스럽다. 네가... 밤마다, 다른 여자를 안는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홀로 있는 것이 외롭다. 네가... 홍련이란 아이를, 그 여자를 들였을 때는.”
꾸욱, 하고 입술을 깨문 천마가 말했다.
“어째서, 저 아이는 네게서, 나에겐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나에겐 단 한 번도 속삭여주지 않았던 말을 하는지... 신경 쓰였다.”
그렇게 말하는 천마의 모습이.
어째선지, 그 나이대의 소녀로만 보였다.
“...이 몸이, 그 아이보다 먼저 안겼었지. 그런데... 그 아이는 되고, 나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아무리 봐도... 가슴말곤 없지 않느냐.”
“......”
천마가, 홍련이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졌던 것이 떠올랐다.
유난히, 홍련을 자주 언급하면서 짜증을 부리기도 했던 것도.
대체 왜 그러나 싶었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듣고서도, 그 이유를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저기, 천마. 혹시, 저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