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 예속 (7)
그런 말이 있다.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는 용서받는 쪽이 더 쉽다고.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이쪽이 더 쉬워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등골이 저릿저릿한 이 기분.
천마가 깨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간, 안 그래도 단단히 화가 났을 아내들... 릴리스의 분노가 더 심해질 거란 판단하에 일단 정신줄을 놓아버린 천마를 홀로 두고서 나섰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문 앞에 오니까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긴장감으로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아니라, 실제로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기운들에 의해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게 무거웠다.
자랑은 아니지만, 몸 하나는 튼튼해서 이젠 신성이 섞이지 않는다면야 릴리스나 천마의 진심 펀치도 맞고서 즉사할 정도는 아니게 된 내 몸이었는데.
내리눌러지는 기운에 그대로 짓눌려서 으깨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문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실제로 내가 천마와 떨어지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느껴지고 있던 기세만해도 안쪽에서 그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아내들이 얼마나 빡쳤는지는 짐작이 갔다.
최근에, 아내들을, 릴리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던... 홍련 때와 비교해서도 이번이 더 빡쳤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만하다고 내심 생각했다.
홍련이 하렘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되어가는... 이제 겨우 우리 집 분위기에 적응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천마가 끼어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니 달가울 리가 없다는 것도.
안 그래도 릴리스가 천마랑 이런저런 일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으니.
게다가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천마랑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어디까지나 디스펜서로서 손님을 대하듯이 할 뿐이니까 믿어달라고 해서 허락받았던 거였는데.
아내들의 입장에선 알려주지 않았으니 모를ㅡ 천마에게 코가 꿰인 사실을 비밀로 하고서 어디까지나 천마에게서 얻을게 많으니까 그러니까 안는 것이라고 설득한 결과가 천마랑 나 사이에 계속된 ‘계약’이었는데.
그걸 깬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롯하게 내 책임이었으니 말이다.
갖고 싶어서, 가졌다.
안고 싶어서, 안았다.
그리고 이제와서 그 선택을, 물릴 생각도 없었다.
나를 사랑하게 된 천마를, 나 역시 사랑하게 됐으니까.
그러니...
“후우.”
각오를 다지고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냅다 미끄러지듯이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안으로 들어선 내가, 곧장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미안...!”
오는 동안, 압박감에 몸이 찌뿌러지는 듯한 기세를 받으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내가 이번에 해야할 일은 하나뿐이란 걸 깨달았다.
무조건적인 사과와 무조건적인 수용.
이번은 존나 내 잘못뿐이니까, 무슨 벌을 받던지 전부 받아들이기로 하고서 용서를 빌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묵.
단지, 침묵할 뿐인 아내들의 시선이 납작하게 엎드린 내 뒤통수에 꽂히는 것만이 느껴졌다.
그러한 시선에도, 나는 뭐라 말을 더하지 않고서 더욱 납작하게 엎드릴 뿐이었다.
그 결과, 침묵은 더욱 길어졌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압박감이, 바로 코앞에서 그러한 압박감을 보내오는 존재가 있어서일까 더더욱 무게를 더해가서.
아주 그냥 나를 짓눌러서 터트릴 기세여서 그럴까.
뿌득, 뿌드드득.
실제로도 그 압박감에 내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쯤.
근육이 무게에 눌려서 뒤틀리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통증보다는, 만약의 가정이... 머릿속에 스친 끔찍한 가정이 더욱 괴로웠다.
정말로, 진짜 만에 하나지만 이번 일로 정이 죄다 떨어져서.
그래서 집에서 나가겠다고 하거나 그러면 어쩌지.
친정... 릴리스의 경우에는 그 오망성인지 뭔지하는 서큐버스들한테 돌아가겠다고 하거나, 호아란은 여우의 숲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거나 하는 식으로.
저마다 나를 두고 떠나가 버리면 어쩌지.
생각해보니 존나 큰일이었다.
아내들이 가출해버리면, 여태껏 아내들의 도움 덕에 이런저런 곳을 왔다갔다했던 내가, 반대로 나를 두고 떠나가버린 아내들을 쫓아가서 붙잡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이동의 자유는, 온전하게 세계 정부의 관리 아래에 있고, 나는 이제껏 그런 세계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나 있는 아내들 덕분에 거기서 자유로웠던 거지.
아내들이 없는 나는, 그냥 강한조였다.
요새 좀 유명해진 디스펜서일 뿐, 내가 세계 정부에 뭐라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반면 아내들이 세계 정부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나는 꼼짝도 못하고서 이 좁아 터진 반도에 갇힌 채 오매불망 아내들이 화가 풀려서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처지였다.
나야 공간 전이문이나 간단한 텔레포트도 쓸 줄 몰랐으니까.
물론, 그대로 나를 떠나간 아내들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정액이 필요하단 이유로 내게 묶여있다시피한 유스티티아만이 아니라, 아내들이 결코 나를 버리거나 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여유가 많이 생기다시피한 덕에 많이 제공하게 된 드레싱의 주 재료... 그것만해도 유스티티아는 최소 한 달은 내 곁에서 떠날 수 있었고,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은 릴리스도 버티자고 한다면 꽤 길게 버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이 없는 아내들은 더더욱 오래 내 곁에 떠나 있을 수 있을 거고.
...하지만, 돌아온다는 보장이, 확신이 있다고 한들.
애당초 며칠이라도 내 곁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
유스티티아의 말대로, 내가 정말로 욕심이 많다 싶었다.
용서를 빌기 위해서,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구하고 무슨 벌을 받던지 수용하겠다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그런 주제에, 아내들이 나를 떠나가있겠다고 한 것만은 절대로 들어주기 싫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여자를.
내가 사랑하는 그녀들을 내 곁에 두고서, 결코 떨어지지 않고 싶어하는 내가 있었다.
상처를 주고, 신뢰에 금이 가게 한 주체가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뻔뻔하고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그러지만, 역시 그러고 싶었다.
...만약, 정말로 한동안 친정에 가있겠다는 식의 얘기가 나오면 울어서라도 붙잡아보자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일단...”
길었던 침묵을 깬 목소리는 호아란의 것이었다.
“...바닥이 차니, 한조를 안으로 들이고서... 그 다음부터 얘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릴리스.”
그리고, 그 말에 내 몸을 짓누르던 기운이 조금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흥.”
코웃음치며, 휙하고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가는 릴리스의 기척과 함께, 호아란이 그런 내게 말했다.
“자, 일단 안으로 들어오거라 한조야.”
점점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서, 점점 커져만 갔던 식탁... 원형으로 빙 둘러서 앉을 수 있는 원탁의 앞에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옆구리가 시리다.
원래라면 내 옆자리 앉으려고 아내들끼리 다투고는 했는데, 일이 일이다 보니까 내 좌우가 텅 비어있었다.
반대로 내 맞은편에 우르르 몰려앉은 아내들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어깨를 으쓱한 유스티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리가 잘못 알고서 오해했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유스티티아가 말하는 오해란 게 대체 뭘 말하는 건지 알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티로스의 종족 특성, 죽지 않는 한 계속 발기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능력의 구조가 그렇다는 거지, 엄밀히 말하자면 생명력, 기, 그 밖에 여러 가지의 ‘힘’을 정력으로 전환하는 능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내 사정횟수가 갑자기 줄어들거나 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정하는데 썼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꿀벌 펀치를 갈기던 뭘 하든 간에 힘을 소모하는 걸로도 줄어들 수 있었다.
아내들이 실시간으로 내 사정횟수를 체크하는 반지에 걸린 마법은, 그런 내가 보유한 힘 자체를 통째로 체크하는 마법이지, 실질적으로 정말로 감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스티티아가 말하는 ‘오해’의 발생 소지가 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다만, 이번엔 오해가 아닐 뿐이었다.
천마 보지에 존나게 싸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까.
“그럼, 이번엔 여가 묻겠노라. 그래서, 영웅은 그 천마라는 여자를 어쩌고 싶은 게냐?”
카르미나의 물음에, 이미 정한 사실로 답했다.
“...아내로 들이고 싶어.”
“뭐, 그럴 줄 알았노라. 영웅의 호색함은 우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음이니. 다만, 영웅도 알고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동의해야 하느니라.”
“응, 알고 있어.”
“음, 그럼 여가 따로 할 말은 없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질문은 끝났노라고, 말하듯이 다른 아내들을 보는 카르미나.
그런 시선을 받은, 아내들 중 몇몇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티랑, 에일레야, 카루라, 그리고 홍련이었다.
그런 넷을 보고서, 한숨을 내쉰 호아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엔 본녀가 묻겠느니라. 한조는... 천마를 사랑하게 된 것이냐?”
“네.”
뿌득, 하고.
릴리스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끝까지 말했다.
“그렇게 됐어요. 미안해요.”
“...미안할 것이 무어가 있겠느냐.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정을 통하고... 그러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섭리나 마찬가지이거늘.”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호아란의 표정을 보니까 이번 일로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추욱, 처진 귀나, 꼬리들만 봐도 알 수 있기야 했지만.
“...본녀도 더 묻고 싶은 것은 없구나.”
호아란도 그렇게 말하자, 남은 건 이제 릴리스랑 아리아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