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역, 그리고 금기 (9)
“......”
추가로 알게 된, 그러니까 정보 추출을 당한 끝에 죽어버린 엘프들에 대한 정보들이 적혀져 있던 서류를 읽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에 마지막.
그들이 끝내, 정보 추출 작업을 당하기 직전까지의 회유 시도부터 시작해서, 고문으로 정보를 얻기 위해 심문했던 기록.
그 밖에도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 담겨있는 서류를, 끝내 전부 읽은 다음에... 내려놓고서, 내가 서류를 전부 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두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진짜라고?”
“그래. 전부 진짜야.”
딱딱하게 굳어있는 릴리스의 표정이 보였다.
이미, 나보다 먼저 릴리스를 비롯한 모두가 이 서류를 읽어봤을 거였다.
그러니까...
다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던 거고.
“...이딴 게, 현실이라고.”
그들과 이번에 구조한 아이들에 대한 공통점이 있었다.
아버지가 같다는 공통점이.
그러니까, 죽어버린 엘프들과 이번에 구조한 아이들은 다 같은 애비를 둔 혈연... 남매 지간이란 소리였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구조한 아이들과 달리, 그 엘프들은 하나같이 억지로 주입된 듯한, 조작된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구조한 아이들도 일부는 그러한 기억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이 역시 이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단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억이 서로 좀 달랐을 뿐이지.
경계 안에서 구한 엘프들 중 일부 아이들을, 동생들을 보살피고 길러야 한다는 기억을 하고 있던 것과 달리, 붙잡힌 끝에... 결국 죽음을 맞이한 엘프들이 가졌던 기억은 ‘어머니’를 빼앗은 모두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온갖 고문과 심문, 회유 끝에도 끝내 자신들의 배후나, 그 밖에 다른 것들을 말하지 않은 엘프들이었지만.
어째서 이런 짓을 벌였냐는 질문엔 하나 같이 극도로 증오를 품은 채로, 그런 말을 남긴 것이다.
‘너희가 어머니를 빼앗아갔다.’
‘그녀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어준 그녀를 이용만 했을 뿐인, 더러운 족속들아.’
‘마치 나무에 붙은 기생충과도 같은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다. 어머니를 빼앗아간 너희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다.’
하나같이, ‘빼앗긴 어머니’를 부르짖으며, 세계 정부에서 파견된 고문관과, 회유하러 나온 자, 하다못해, 마지막의... 최후의 순간까지 증오를 담아 외쳤다는 말들을, 냉정하게 기록해낸 것들을 하나하나를 전부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붙잡은 엘프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 모든 엘프가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될까?
모두가 ‘어머니’를 빼앗겨서,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세상을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날뛰었다는 것이?
그딴 게 말이 되나.
애비는 몰라도 애미들은 다 다른 걸로 알고 있는데.
세계 정부에서도, 그렇기에 확신하고 있었다.
범인은, 그들 모두의 ‘아버지’인 누군가다, 라고.
나 역시,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꾸물거리는 촉수 괴물을 뒤집어쓰고 날뛰었던 귀쟁이... 아니, 엘프들 역시 우리가 구조한 엘프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이었을 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억지로 기계장치에 처박아서 성장시키고... 또, 대충 쓰다 버리는 목적으로 거짓된 기억을 주입한 채로 테러를 일으키도록, 거짓된 복수심에 제 몸을 불사하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둔 것이다.
세상 모두를 증오하는, 복수심에 산 채로 붙잡혀서 온갖 고문이며, 회유에도 전혀 입을 열지 않았을 테고, 그 결과 그런 식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거다.
뿌드득, 이를 악물었다.
그런 아이들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동정할 가치도 없는 귀쟁이들이라고 매도했다.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로, 그 아이들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에는.
애시당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
“한조야.”
꾹, 하고 움켜쥔 내 손 위로 호아란의 손이 올라왔다. 그대로, 감싸 쥐듯이 내 손을 쥔 호아란이 말했다.
“너무 과하게 분노하면, 심계가 뒤틀리게 되느니라. 조금은 진정하려무나.”
“...네. 죄송해요.”
호아란의 말대로였다.
호흡을 골라서, 조금은 진정시켰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무것도 건진 건 없는 거야?”
중요한 건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짓거리를 한 씹새끼를 붙잡아서...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참기로 했다.
“응, 일단... 이번에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건 아니야.”
유스티티아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유스티티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원경의 거울에 한 건물이 비쳐 보였다.
“...여긴?”
“이번에 구한 아이들의, 어떤 의미에서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겠네.”
“고향이라고?”
저 건물이 대체 뭐길래.
“한조, 엘프에 대한 거... 알고 있는 대로 말해볼래?”
갑자기 뭘 그런 걸 묻나 싶었지만, 아는 대로 말했다.
“...일단, 다들 미의 종족이라고 불릴 만큼 미형인 종족이지. 기초 능력도... 인간에 비해서 높고, 수명도 천년에 가깝게 살아가는 종족정도?”
“응, 그 말대로야. 그리고, 그래서일까. 엘프들은 대부분 아이를 잘 갖지 못하는 편이거든. 엘프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장생족들은 대개 그렇지만. 오래 사는 만큼, 강한 만큼 후손을 남길 이유가 적어진다는 거겠지.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말이지, 하고 유스티티아가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아이가 갖고 싶은 엘프들을 위한 시설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저곳이야. 사랑의 결실을, 아이를 원하는 엘프 부부, 혹은 지금 당장은 아니여도, 나중을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해두는 장소라고 보면 되려나. 최근 엘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 중 하나거든. 이대로라면 엘프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져서... 상대적으로 엘프들의 권익이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장생하지만, 아이는 적게 낳는 종족.
그리고, 마냥 숫자만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숫자 역시 상당히 따지는 세계 정부.
그래서.
“그래서, 엘프들 사이에선... 저런 시설을 만들어서라도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도록 권장하고 있단 얘기야. 지금이나, 혹은 나중에라도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는 엘프들의 정자나, 난자같은 걸 모아두고... 또 시험관으로라도 아이를 만드는 식으로 숫자를 늘린다는 속셈이라고 보면 되려나.”
...이해는 했다.
일종의 정자은행 같은 거라고 보면 되는 거잖아.
아니, 아니지.
내가 살았던 세상에도 있었던, 불임 부부를 위한 시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는데.
유스티티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 구한 엘프 아이들의, 생물학적인 어머니인 엘프들의 일부는, 저 시설에 등록되어 있는 엘프들인 걸로 보이거든.”
어...
“...그 말은?”
“자세한 건 알아봐야겠지만. 아마도, 확실히 그쪽이랑 연관은 있지 않을까 싶은 걸.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전부 같았지만 어머니쪽은 전부 다 달랐잖아?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한조같은 난봉꾼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딱히 그 아이들의 ‘어머니’인 사람들은 그쪽이랑은 아무런 상관은 없어 보였거든.”
즉.
저 시설에서... 아마, 나중의... 아이를 위해서 보관해두었을 난자를 어딘가로 빼돌려서 그 아이들이 태어났다는 건가.
아니, 시설에서 빼돌린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용만 당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그만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 가능한 녀석들이라면, 저런 시설에서 몰래 필요한 걸 가져오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을 테니까.
그 씹새끼들과 한통속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떨지는 몰랐지만.
더 이상 모른다고, 알아보지도 않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일단, 우리들은... 나랑 호아란, 그리고 유스티티아. 이렇게 셋이서 이 시설을 만들자고 주장했던 녀석이랑 만나보러 갈 거야.”
내 물음에,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릴리스가 그렇게 말했다.
“...주장한 녀석이라면?”
“저런 시설을, 개인이 만들자고해서 만들고... 종족 전체에게 ‘권장’하는 행위가 가능할 것 같아? 당연히, 배후가 있다는 거지. 종족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선 하나뿐이잖아?”
스물둘의 의원 중 하나이자, 엘프들을 대표하는 의원.
하이엘프, 귀네비어.
언젠가, 숫자에서 밀려난 엘프들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면서, 저 시설에 대한 것을 주장하고, 또 밀어붙였다는 사람.
당연하게도, 저 시설의 사실상 책임자이자 관리자이며, 주인이기도 한 사람을, 셋이서 '공식'으로 만나기로 했다는 모양이었다.
“...만나서 어쩔 건데?”
“어쩌긴. 흑인지, 아니면 백인지 확인해야지.”
만약에, 하고 릴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 결과가 흑이라고 하면, 배신자의 말로가 뭔지도... 알려주고.”
릴리스가 입꼬리를 비틀어서 미소 지었다.
무척이나 짙은... 피비린내가 나는 미소를.
적들을, 용서하지 않고 가차없이 배제했던, 스물둘의 영웅의 필두.
‘여제’가 거기에 있었다.
세상을 지켜낸 영웅이었지만, 그렇기에 학살자가 된 초월자가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을 잘 꾸려나가라고, 힘만 센 멍청이들인 우리가 아닌... 조금이라도 똑똑한 너희들이 앞으로 잘해나가라고 맡긴 거지, 이 꼬라지로 만들라고 한 건 아니니까. 내가 직접 세운 아이는 아니더라도, 세운 이들 중 하나니까, 그 책임을 져야겠지.”
아무튼, 하고 호아란이 그런 릴리스의 말을 받아서 마저 말했다.
“그러니... 연관이 있든, 아니든간에 그쪽에서도 분명 움직임을 보일 것이니라.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구나.”
다음은, 다시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한조랑... 응, 카르미나가 그쪽에 가서 확인 좀 해줄 수 있을까?”
대충 이해했다.
끈을 자르려고 하든, 아니면 자신들이 벌인 짓을 숨기려고 하든 간에 저 시설에서도 그쪽의 끄나풀이 올 것이 분명하니...
어느 쪽이든간에, 그럴 시간을 주지 않도록 양쪽 모두를 동시에 덮친다는 모양이었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나를 보며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응, 그러면 한조랑 카르미나... 이리로 와서, 이것 좀 마셔볼래?”
“응... 아니, 잠깐만. 이건 또 뭔데?”
자연스럽게 유스티티아가 건네준 물약을 마시려다가 말고 묻자, 그런 나를 보며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그야, 저 시설은 엘프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주구에 있거든. 엘프만의 자치권을 인정받는 곳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특구라고 보면 될 거야. 아무튼, 엘프 외에 다른 종족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 되려나.”
“...그래서?”
“그러니까,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한조랑 카르미나는, 오늘 하루 동안 엘프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렇구나.
이해했다.
“...종족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였어?”
“쉬운 건 아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라서.”
아니, 뭐.
나도 웨어허니비로 변한 적도 있으니까... 종족이 바뀌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란 건 알고는 있는데...
“...일단 알겠어. 이걸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뭐, 됐다.
까짓거, 엘프 해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