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종족 전용 남창이 되었다 (486)화 (486/523)

인과 (4)

“응, 얼마든지.”

그렇게 말한 릴리스가 팔짱을 풀고서 내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때, 내 품에 있던 아리아드가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한조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데에.”

“응.”

내가 릴리스를 보자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뺨을 꼬집었던 손을 놓아주는 릴리스. 그런 릴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고 있던 아리아드를 보자 아리아드가 나를 내려다보다가, 꾸물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리아드?”

왜 그러나 싶어서 그런 아리아드를 부르자, 그제야 꾸물쩍이는 걸 멈춘 아리아드가 입을 열었다.

“그... 지금, 여기에 넘어온... 나무, 있지이?”

뭘 말하는지 알았다.

거대한 나무줄기.

아발론이라는, 아마 이 세상에서도 가장 거대한 결계이자 건물이기도 한 것을 꿰뚫어버린, 그 미치광이가 부리던 나무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나무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그 광인이 살아있을 적에, 그가 그 세상에서 모시던 신.

신목이자, 세계수라고 불리던... 세상의 절반을 뒤덮은 거대한 나무의 일부.

아마, 디멘션 크래쉬로 그 광인은 망해버린 자신의 차원과 충돌시킨 것이리라.

그렇게... 그 차원에서 불타 죽어버린, 한 때 세상의 절반을 뒤덮었던 신목이었던 것을 자신의 신성으로 휘두르며 부리는...

“...응?”

뭔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라 순간 멈칫했을 때.

그런 나에게 아리아드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 나무우, 어머니이... 인 거 같은 데에.”

장모님이셨어?

생각해보니 아리아드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게 있어선 장모님이신 세계수가 맞았다.

당장 내가 본 기억에서도 그런 내용들이 있었지 않았나.

장모님이 자신의 뿌리와 줄기가 닿지 않는 곳에까지 보살피기 위해서, 제 신성의 절반을 떼어다가 만든 영.

나무의 영은, 당연하게도 정령이었다.

즉, 아리아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그 나무가 낳은 씨앗...

그 씨앗이 발아해서 태어난 세계수가, 지금은 아리아드의 본신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수고, 또 그 세계수가 새로 낳은 씨앗이 발아한게 우리 마당에 심어둔 세계수였다.

“...모를 리가 없겠지?”

“그렇겠지.”

그 미쳐버린 귀쟁이가 이 세상으로 넘어온 아리아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리아드의 존재는 꽤 비밀리에 감춰진 것이었지만.

드리아데스의 식물원이라던지는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어있던 시설이었다.

주변에 뭣도 없어서, 굳이 식물원 하나 보러가자고 거기까지 가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시피하긴 했지만.

거기에 애당초 스물둘의 의원 중 하나였던, 이런저런 비밀에 다가갈 수 있었던 귀네비아도 저쪽에 붙어있던 끄나풀이었던 걸 감안하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내버려둔 이유는, 아마... 그놈이 저지르려는 짓을 아리아드가 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세상이 다시 한번 불타는 꼬라지를, 복수를 위해서 세계수가 낳은 딸에게, 아리아드에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어쩌면 몇 번이나, 남아있던 신성을 쥐어짜내서 이 세상의 멸망을 막아내던 아리아드의 행보 역시 전부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광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자신과 전혀 연이 없는 이들마저 지키기 위해서, 제 스스로의 신성을 깎아내리고, 한낱 정령과 한낱 나무가 될지언정, 그렇게 희생하는 아리아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웃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증오했을까.

그건,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리아드의 본신이 있는 위치가 이미 노출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복수를 위해서, 그래서 내버려뒀다고 해도, 그게 언제까지고 계속될지도 모를 일.

애당초 세계수를 모시며 수천년을, 환생을 거듭하던 숲지기 출신의 미치광이였다.

아리아드가 세계수의 주위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것도 알고 있을 테니...

즉, 적어도 무슨 짓을 저지를 작정이라면 그런 아리아드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놈들이 뛰쳐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샤오.”

“흠... 어쩔 수 없지. 아리아드의 수호는 이 몸이 맡으마.”

전력의 분산은 불가피했다.

우리 집에서 최대 전력 중 하나인 샤오가, 아리아드의 본신이나 마찬가지인 드리아데스의 식물원에 있는 세계수를 지키기로 했다.

아리아드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 때,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던 대정령이 약할 리가 없잖는가.

자신의 영역에서라면, 시간마저 늘어뜨리고 비트는 것이 지금도 가능한 존재가 아리아드였다.

하지만 성격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사실.

그를 위해서, 혹시나 아리아드를 노리고 올지도 모를 적들을 대비하기 위해서 샤오가 드리아데스의 식물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또...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집을 지킬 사람도 필요로 했다.

아리아드말고도 우리에게 지켜야할 것은 많았으니까.

전력 외의 판정을 받아서, 집에 남아 있을 카루라와 사티, 에일레야, 그리고 홍련을 제외하고서...

내 자식인 루카와 릴리아나의 아이들.

지옥에서 구출해온 엘프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 터전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이웃들이었다.

“...응, 여기는 내가 맡는 게 좋겠네.”

그렇기에 유스티티아가 집, 정확히는 나와 연을 맺은 모두를 남아서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릴리스와 호아란, 그리고 카르미나는 나와 함께, 미쳐버린 귀쟁이를 조지기로 했다.

또...

“...아직도 느껴져?”

“으응. 많이... 아주 많이 약해지시긴 했지마안, 확실해애. 살아계셔. ...일부뿐이지만.”

아리아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닌, 아리아드의 말이었다.

애당초, 떼어져나온 신성에서부터 태어난 대정령이었다. 그런 아리아드가 살아있다고 했다.

놈이 일으킨 디멘션 크래쉬.

그 디멘션 크래쉬로 연결된 차원은, 이미 멸망해버린 차원... 본래 아리아드가 살아있던 차원이었다.

그 차원에서 넘어온 나무줄기는, 장모님의 불타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줄기고.

...그 나무줄기에는 여전히 신성이, 장모님의 영이 남아 있었다.

넘어온 것이 세상의 절반을 뒤덮었던 장모님이었던 만큼, 딱 나무줄기만큼의 일부.

그것도 전부 불타버리면서 힘을 잃어 버리고... 그래서 귀쟁이에게 휘둘리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사위사랑은 장모님의 몫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는 말도 있잖는가.

구할 수 있다면, 구하는 게 당연했다.

“...미안해애. 한조오. 내가,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부담을 주게해서어.”

“도움을 주지 못하다니. 이거 안보여?”

아리아드에게 받은 여러 씨앗들이 든 주머니와 세계수의 열매, 그리고 줄기랑 잎.

충분히 어디든 쓸모가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야, 뭐.

아리아드가 직접 도와주는 것보단 못하기야 하겠지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건 아니란 거였다.

남은 건...

“카루라.”

내가 부르자, 루카를 품에 안고 있던 카루라가 다가왔다.

“...잘자네.”

색, 색하고 조금 전에 카루라에게 잔뜩 모유를 빨아 마시고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든 딸을 보니까, 의욕이 마구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유스티티아랑 같이, 여기서 모두를 지켜줘.”

“...알았다. 내ㅡ”

“목숨은 걸지 말고. 위험하면 도망쳐. 반드시, 꼭. 내가 지키러 갈테니까.”

그때처럼.

내 말에 굳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루라.

그런 카루라의 뺨을 어루만지며.

“사티는, 만약을 위해서 주민들을 대피할 수 있게 연락망을 만들어주고. 에일레야는 웨어울프들에게 사주 경계를 강화시켜달라고 해줘. 홍련은 테레사한테...”

주의하고, 또 주의해서 이런저런 것을 부탁하고 있을 때였다.

ㅡ쿠오오오오.

저 멀리서, 드래곤들이 날아왔다.

유스티티아의 호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드래곤들이...

강력한 결계가 쳐져서, 공간전이문으로는 갈 수 없는 중앙을 향해 날아가기 위한 탈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그럼, 다녀올게.”

날개를 펼쳤다.

드래곤 위에 올라탄 채로, 중앙으로 향하던 와중에 밑을 바라봤다.

“난장판이네.”

도시가 타오르고 있다.

어떻게든 제정신인 자들이 막아보려고 했지만, 광인이 뿌린 독은... 이런 쪽에 면역이 없는 종족들을 포함한 이들에게 지나치게 주효했다.

확실한 건 미래가 바뀌었다는 거였다.

온갖 곳에서 디멘션 크래쉬가 일어나서, 모두가 공평하게 좆망하는 미래가 아니라... 아마도 놈이 차선책으로 준비하고 있던, 혼란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지만.

어느 쪽이 더 재앙이었는지는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다.

그건, 진짜 항거할 수 없는 대재앙인 반면 이쪽은 힘들긴 해도 어떻게든 대처하려하는 이들이 보였으니.

하지만, 증오의 독이 뿌려진 지금.

멀쩡한 쪽과 멀쩡하지 않은 쪽, 어느 쪽이 소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멀쩡한 쪽이 소수였다.

이쪽은, 하나같이 전부 그 독에 저항할 수 있던 강자이긴 해도...

한때 이웃이었던,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날뛰는 이들을 마냥 어떻게 해치고 그럴 순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그냥 둘 다 같이 사이좋게 공멸할 지경이었다.

그건 안되지.

“릴리스.”

“슬슬 올 거야.”

그렇게 말하는 릴리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정말로 그녀들이 몰려왔다.

“여왕님.”

“저희들 왔어요~”

“어머머, 한조님도 오랜만이네요.”

“어쩜, 더욱 맛... 아니, 늠름해지셨다아.”

“여왕님을 임신시킨, 강한 수컷... 서큐버스조차 임신시키고자하면 임신시켜버리는 남자의 정액은 대체ㅡ”

“야이, 미친년들아. 지금 그럴 상황 아니거든?!”

서큐버스 오망성의 음담패설에 릴리스가 일갈하자, 오망성들은 꺄르르륵거리며 웃었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여왕님.”

“걱정마세요. 시키신 일은, 하고 있으니까요.”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거에요?”

“그럼 좀, 슬플 거 같은데.”

“아, 근데 이번 일은 좀 빡센데, 대가로 한조님의 정액 한 방울만...”

빠직, 하고 릴리스가 이를 갈고는 말했다.

“됐으니까, 너희들도 빨리 가서 애들 도와.”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날개를 펼치는 오망성들.

활짝, 하고.

예전에, 릴리스가 진심으로 빡쳐서 3단 변신했을 때처럼 세 개에 걸쳐진 피막의 날개들이 펼쳐졌다.

릴리스 이전에는, 그녀들의 세상에서 모두가 여왕이라고 불렸던, 서큐버스 퀸이라고 칭해지던 고위 서큐버스들이, 그 힘을 과시했다.

우웅, 우우우웅...

신성.

그래, 신성이다.

릴리스가 서큐버스들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 릴리스에게 직접 명령받고, 또 그 릴리스를 양육하고, 키운... 과거의 서큐버스 퀸들, 오망성들은 어떤 존재일까.

릴리스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인 그녀들은, 당연하게도 릴리스에게 향하는 신성의 일부 역시, 조금씩 받아온 존재들이었다.

신을 모시는, 대사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

하지만.

정말로 대사제는 아니다.

그녀들은 서큐버스니까.

맞다.

정신 공격에는 정신 공격이다.

그리고, 우리 릴리스는 그런 정신 공격의 프로페셔널들.

매혹부터 음몽, 환상, 그 밖에도 온갖 정신계의 마법들의 달인들.

수십만이 훌쩍 넘는 서큐버스들의 여왕이었다.

“가서, 날뛰는 애들 전부 재워서 좋은 꿈이나 꾸게 해줘. 일, 다 끝낼 때까지.”

“좋은 남자가 보이면, 겸사겸사 한 입만 빨아먹어도 되죠?”

“...그건 알아서 하고. 사고만 치지말고.”

“네에~ 자, 다들 오랜만에 잔뜩 포식할 시간이란다♡”

“책임은 여왕님이 지신다고 했으니.”

“모두 마음껏, 즐기자구♡”

그렇게 말하며, 오망성들이 저마다 수만명씩의 서큐버스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쟤네한테 맡겼으니, 일단 당분간은 어떻게든 될 거야.”

“괜찮은 거 맞지?”

어떻게 일 다 끝내고 왔더니, 부랄이 텅 빌 때까지 쪽 빨린 미라들이 곳곳에서 발굴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릴리스를 쳐다보자, 릴리스가 그런 내 시선을 스리슬쩍 피했다.

“...괜찮은 거 맞지?”

“...평소에 자중을 많이 시켜놨으니까, 조금 과하게 날뛸지는 몰라도... 괜찮을... 거야.”

...서둘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은거 같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