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2)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거창이 그대로 바알의 몸을 뭉개버렸다.
콰르르르르릉...!
바알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두를 짓눌러서 뭉개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땅에 꽂힌 세계수의 나뭇가지는, 창이 되어버린 나뭇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콰직, 콰지직...!
더욱 무겁게, 더욱 단단하게 자라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게 아닌 것을 안다.
쩌적, 쩌저저적...!
바알을 깔아뭉갠 세계수의 나뭇가지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으니.
들썩이며, 자신을 깔아뭉갠 나뭇가지를 들고 일어나려는 바알이 보였다.
바알, 놈의 권능은 오우거답다면 오우거다운 권능이었다.
힘의 유지.
심플하지만, 그렇기에 강력한 권능이기도 했다.
반신에 이른 오우거가 가진 괴력.
그 괴력이, 소모되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되는 권능이니.
또, 온몸이 뭉개져서, 다져진 공처럼 변했어도 ‘살아있게’ 하는 것도 바알의 권능의 힘일 것이 분명했다.
생명, 그 자체도 힘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유지한 것일 테니.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바알 역시 자신의 생명을 이었을 것이다.
빌딩만한 거창에 내리찍혀도, 살아남았다.
오히려, 분노에 찬...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 거창을,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늦었다.
어느덧, 날아간 릴리스가 거대한 나무창 뒤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 쌍의 날개.
예전에 봤던, 세 쌍의 날개에서 한 쌍이 더 늘어나 버린 날개가, 펼쳐졌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릴리스의 주먹에, 신성이 깃들었다.
서큐버스들의 신앙을 받는, 서큐버스들의 여신.
애초부터,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차원의 독생자, 초월종인 릴리스의 권능이, 그 주먹에 깃들었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말라붙는다.
순식간에, 자라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세계수의 나뭇가지의 생명력이 사그라들었다.
‘폭식’
가장 서큐버스답게 태어난, 포식자로서 태어난, 디멘션 이터.
초월종의 권능이, 주변의 모든 생명력을, 대기의 마나를 빨아마셨다.
그리고, 그건 나뭇가지에 밑에 깔려있던 바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쿠웅...!
몸이 말라붙는다.
릴리스에게 흡수당하는 생명력에, 신성 그 자체에 힘을 잃고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날개들의 주인.
‘여제’가 선언한다.
『뒈져.』
여제의 주먹이 내리 찍혔다.
바싹하게 말라붙은, 세계수의 나뭇가지 위로.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ㅡ!!
강대한 힘에, 바스라지는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보였다.
우르르르르르르...!
그 힘을 직접 전달받은 대지가, 굉음을 토하며 흔들린다.
쿠웅,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무너지고, 또 무너져내리는 대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걸로, 진짜 끝이었다.
주먹질로, 지진을 일으킨 릴리스의 일격에 제대로 꽂힌 바알은, 바스라진 나뭇가지들의 파편 사이에서 누워있었다.
설령 신성을 품은, 반신이라고 해도 지금의 바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온몸이 뭉개져서 죽어버린 바알이었으니.
일말의 생명력도, 신성도 남지 않고서.
말 그대로, 뭉개져서 죽어버렸다.
“...더 강해졌구나.”
호아란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음.
확실히 더 강해졌다.
그건 분명했다.
애당초, 릴리스는 자신의 힘을 ‘억눌러왔다’
스스로도 자신의 힘을, 권능을, 본능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그랬다.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켜버리는, 서큐버스지만, 동시에 서큐버스를 초월한 초월종이기에.
끝내 자신의 손으로 세상 그 자체를 먹어치울까 두려워, 몇 중으로 스스로를 봉인하고 억눌러왔던 것이 릴리스였다.
근데, 더는 아니었다.
릴리스가 가진 불완전함은, 릴리스가 아직 서큐버스로서 불완전했기에 그랬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제와서 힘을 다루는 것을 깨달았는지는 몰라도.
바알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릴리스의 힘은, 우리쪽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릴리스가 원하는 것만을 빨아들였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기에, 억눌렀던 힘을 완전히 제어하게 된 것이다.
그 증거일까.
땅으로 내려오는 릴리스를 바라봤다.
과도하게 흡수하는 마나로 인해, 푸르게 변하던 피부도 지금은 여느때와 다름없었다.
뿔이야 다소 크고 아름다워지긴 했는데.
날개들도 한 쌍 더 늘어버렸고.
“...뭘 봐?”
날개들을 접으며, 릴리스가 말했다.
“아니, 그냥.”
내 말에 싱겁기는, 하고 중얼거린 릴리스가 뚜벅뚜벅 걸어서, 자신이 육편으로 만들어버린... 거대한 크레이터처럼 움푹 패여버린 대지에 눌러붙어버린 바알이었던 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얘가, 그 바알 맞지?”
놈들 중에서, 신성을 품은 오우거는 바알 뿐이여서 그런 릴리스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스의 진심 펀치에 맞은 바알의 모습을 보니, 온갖 헛짓거리를 하다가 릴리스한테 얻어맞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앞으론 적당히 깝치자.
릴리스를 진짜 화나게 했다가는 뼈도 못추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보다, 릴리스, 호아란, 카르미나. 몸은 좀 어때?”
나야 혼자지만, 내 아내들은 나랑은 달랐다.
혼자가 아니다.
그런 내 말에 모두가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느니라.”
“여도 마찬가지이니라.”
“흥, 겨우 이 정도가 뭐 어쨌다고.”
흡혈귀 수백 마리가 모여서 펼친 결계를, 수 초 만에 해제하고 황금의 전사들에게 신성을 담아 강화해서, 날아드는 공격들을 요격하거나, 적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또 일격에 반신급에 이른 바알을 날려버린 릴리스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은 거 맞지? 무리하거나 하는 건...”
내가 말을 마저 잇기 전에, 호아란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고서... 그대로 자신의 배에 가져다댔다.
“자, 직접 느껴보거라. 한조야.”
두근두근두근...
호아란의 뱃속에 깃들어있는 생명들.
내 아이들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우리 아이들은, 무척이나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호아란의 말대로, 셋 다 무사한 것 같았다.
...걱정이 있다면, 이런 꼴을 본 게 태교에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 같다는 정도?
“아앗, 치사하노라! 여도, 여의 아이들도 무사한지 확인해주거라!”
그렇게 말하며 내 남은 손을 붙잡고, 자신의 배에 가져다대는 카르미나.
두근두근...
이쪽도, 무척이나 건강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호아란과 내 아이들, 그리고 카르미나와의 내 아이들.
다섯 모두, 무척이나 건강한 게 느껴져서 안심이었다.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릴리스가 보였다.
“릴리스도.”
“...흥.”
코웃음치면서도, 내게 다가온 릴리스.
그런 릴리스에 자리를 비켜준 호아란과 카르미나를 보며, 이번에는 릴리스의... 배에 손을 얹었다.
두근, 두근...
“...응, 릴리스도, 아이도 건강하네.”
다행이었다.
“넌 걱정이 과해서 탈이야. 우리가, 뭐. 아무 대비도 안 하고 따라왔을까봐?”
“그거야, 뭐...”
그렇게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건 당연한 법이었다.
“...그보다, 너야말로 몸은 좀 어때?”
“나?”
“...이번에 봐서 알았는데, 너 여태 우리한테 구라쳤지?”
...언젠가 들킬 줄은 알았지만, 좀 너무 빨리 들켜버렸다.
“고작 저런 놈 하나도 한 번에 못 처리하면서, 혼자 갔다 오려고 했어?”
그 말대로였다.
...나 혼자였더라면, 어땠을까.
일단, 결계를 뚫는답시고 한 번 힘을 쏟아부었어야 했을 거다.
또, 날아드는 바알의 공격들을 맞아가면서 다가가야 했을 거고.
상당한 숫자의 트롤들이랑 뒤섞인 채 한참을 드잡이하고서, 그래서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 신성의 대부분을 소모한 뒤에나... 거진 녹초가 되어서야 잡았겠지.
아니, 어쩌면 잡히는 건 바알이 아니라 내 쪽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 걱정은 그만하고, 너나 잘해.”
“...넹.”
할 말이 없네.
“...크흠, 그, 그보다. 한조야. 신성은 어떻느냐?”
보다 못한 호아란이 구박받던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
“그건, 괜찮아요.”
이번에 다소 신성을 소모했지만, 괜찮았다.
생장과 생육.
비슷한 타입의 능력이기도 하고, 애당초 매체로 사용한 세계수의 나뭇가지는 아리아드의 것이었다.
나와 상성이 아주 좋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다지 많은 신성을 소모한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테레사가 잘해주고 있는 모양이라서요.”
빠르게 차오르는 신성이, 내게 바쳐지는 신앙이 느껴졌다.
홍련에게, 테레사한테 전해달라는 전언이 제대로 받아진 모양이었다.
신도들을 모아서, 내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게 주효한 모양.
세상이 난리가 난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 내가 움직였다는 내용을 알린 덕분인지, 안그래도 투철했던 신앙심이 더욱 강하게 내게 전해져왔다.
그것들이 전부 신성으로 변환되어서, 차곡차곡 쌓이는 와중이고.
덕분에, 이쪽은 큰 문제 없었다.
“...그럼, 문제는 용들이로구나.”
카르미나의 말대로였다.
“저희는... 괘, 괜찮습니다.”
후우, 후우하고 호흡을 고르는 드래곤들.
여기까지 전력으로 날아온 것도 모자라서, 대뜸 날아든 공격에 마법들을 쏟아붓고, 숨결을 토해서 일거에 흡혈귀들을 소거했던 드래곤들이었지만.
곧바로 신성이 깃든 공격을 막기 위해서 전력으로 숨결을 몇 분이나 뿜어냈던 터라 드래곤들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유스티티아 덕에 드래곤에 대한 걸 많이 알게 됐는데, 지금 드래곤들의 비늘에 윤기가 싹 가신 것을 보니 장난 아니게 지친 모양이었다.
“괜찮기는, 정말로 괜찮으면 인간 모습으로 변해봐.”
“그, 건...”
드래곤의 모습으론 비늘의 윤기가 싹 가신 정도밖엔 몰라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면 시꺼멓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이며 안색이 창백해진거며 다 보일 테니까 망설이는 드래곤들이 보였다.
“...여기서 조금 쉬다가 따라와. 우리는 먼저 들어갈 테니.”
“하지만... 티아클레오시여. 저희들은 공주님께ㅡ”
뭐라고 항변하려던 드래곤의 말을 자르며, 릴리스가 말했다.
“하지만이고 자시고, 지금 너희는 짐밖에 안 되잖아.”
아니.
릴리스.
팩트라도 그렇게 때려버리면...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엄청 고생했던 드래곤들인데.
“...알았습니다. 여제시여.”
시무룩해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드래곤들을 보니까 좀 미안했다.
그러다가...
우우웅, 하고 한 드래곤이...
나랑 자주 돌아다니던 붉은 드래곤이 여인의 모습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예상대로, 안색도 좋지 않고 눈 밑이 시꺼멓게 다크서클이 끼얹어진... 붉은 머리의 미녀가 다가오자 릴리스가 팔짱을 꼈다.
“...뭐야?”
릴리스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움찔한 드래곤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서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을.”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구슬이었다.
“...이건?”
“모든 드래곤들의 아버지, 저희들의 신앙을 받으시는 분. 용신께서 공주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저희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이 생기게 된다면 전하라 말씀하시며.”
용신이라면.
유스티티아의 증조 할아버지인데.
그 사람이... 유스티티아의 ‘연인’에게 전하라고 한 구슬을 내가 멀뚱히 쳐다봤다.
아니, 그 양반은 유스티티아가 여기서 뭘하고 지낼 줄 어떻게 알고 이걸 냅다 맡긴 거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드래곤이 말을 이었다.
“...그분께선 미래를 보십니다.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먼 미래를. 아마... 티아클레오, 당신께서 공주님의 반려가 되시는 것 역시 보았겠지요.”
용신, 그러니까 유스티티아의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카르미나나 나에 대한 테레사의 광신 이상의 것이라서 여기서 에이, 아무리 신이라도 그 정도까진 좀 하고 말했다간 저들이 남은 힘을 쥐어짜내서라도 내게 숨결을 갈길 게 분명했으니, 잠자코 구슬을 받아쥐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길 기도하며... 힘이 돌아오면 곧장 따라가겠나이다.”
“...응, 뭐.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서, 구슬을 바라봤다.
생긴 건, 예전에 유스티티아가 아리아드에게 건네줬던 보옥... 이란 물건의 짝퉁이란 거랑 비슷한데, 정작 구슬에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성도, 그 흔한 마나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해보이는 구슬.
“......”
근데, 꽈악하고 힘을 줘서 움켜쥐어봐도.
꿈쩍도 하질 않는 구슬을 보니까,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었지만, 아무튼 내게 준 거라니까 품에 잘 챙겨뒀다.
뭐든, 누가 주면 일단 받고 보는 주의기도 하고.
“한조.”
“영웅이여.”
“응, 그럼 가자.”
드래곤 버스는 더 이상 못타니까, 좀 더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