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8)
“크, 으... 어, 어째서지?”
“어째서라. 무어가 어째서냐는 건지 모르겠군.”
“우릴, 배신한 이유, 말이다. 검선...!”
“아, 그거.”
비틀어서 끄집어낸 검이, 맹주의 심장을 갈랐다.
“크풉...!”
쩌적, 하고 심장이 찔린 후, 세로로 갈라져버린 맹주의 상체가 흙바닥에 엎어졌다.
그런, 맹주의 머리를 짓밟으며 검선이 말했다.
“애당초, 거지 따위랑 이 몸이 같은 반열에 든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 아무리 기습이었다고 한들, 내 검을 피하지도 못하는 너와 내가 같은 ‘스물둘의 영웅’이라니.”
스물둘의 영웅.
또는 시작의 영웅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반신... 초월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실력이 똑같은 건 아니었다.
눈앞의, 거지 출신의 맹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위로는 두 수, 아니 세 수 밑의 존재.
그와 언제나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이 불쾌했다.
그 사실을 말하자, 얼굴을 찡그린 맹주가 말했다.
“고작... 그딴 명예...”
이미 이룬 것이 대부분인, 하물며 검선같은 존재가 배신하기엔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그런 맹주를 보며, 검선이 말했다.
“아니, 아니지. 고작 그딴 명예만으로 배신할 리가 없잖나, 이 친구야.”
허허, 하고.
검선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선심을 베풀 듯이 말했다.
“여자 때문이라네.”
“...무슨...?”
“자네의 세상에는 그런 말은 없었나? 최고의 남자라면, 자고로 최고의 여자들을 품에 안아야 한다는 말. 영웅은 호색하다는 말, 말일세.”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검으로, 선인의 경지에 이른.
초월자가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원색적인 이야기에 황망하게, 맹주는 검선을 올려다봤다.
빛을 잃어가는 두 눈으로, 검선을 바라봤다.
“최고의 여자. 저들이, 내게 주겠다고 했지. 여제와 천호, 망아의 용, 천마... 같잖게도, 여인인 주제에 나와 같은 '스물둘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여자들을, 내가 깔아뭉갤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네. 기대되는군. 내 세상에선, 인간밖에는 없어서, 다른 종족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 아, 물론 안아보지 못한 것은 아닐세. 검선을 거부할 여자는 없었으니. 하지만, 알잖는가? 저급한 이들이 아무리 가랑이를 벌려봤자, 만족할 수 없지. 하지만, 각 종족의... 내로라는 이들조차도 인정한 최고의 여인들의 몸은 다르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검선을, 맹주는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정신이 아니다.
대체 언제부터 그랬는가.
알 수가 없었지만, 흐리멍텅한 검선의 눈빛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지를 붙잡힌...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란 걸.
“이, 이 친구야... 정...신... 차, 려...”
“흐음.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빙그르르, 검선이 검을 들었다.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다네.”
그리고, 사선으로... 한 때는 동료였던 이를 베어 넘겼다.
휘백색의 검강에 깃든 아름다운 선이, 맹주의 목을 갈라 넘겼다.
스악, 하고 썰려나간 맹주의, 한때는 친우라고 불리었던 이의 목을 발로 차서 무참히 죽어나간 무림맹의 무사들 사이로 던져넣은 검선이 빙그르 몸을 돌려서, 바닥에 엎어져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많이도 죽었군. 몇이나 죽었지?”
“열둘이옵니다, 부군.”
초절정, 초인에 이른 여인들을 부인으로 삼아 모두 백 명.
검선이라고 불리는, 스물둘의 영웅의 어떤 의미에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여인들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열둘이라. 싸게 먹혔군.”
맹주를 따라나선, 천인대.
반수가 초인, 나머지 반수 역시 일류 말입에 이른 무사대였다.
맹주, 그 개인은 분명 자신보다도 세수는 못미치는 무인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수하는 상당한숫자였다.
그 모두를 죽이는데 고작 열둘이라면 싸게 먹힌 셈이라고 계산을 마치고서, 검선은 눈앞에 나선 여인을 바라봤다.
어깨에 깊게 스친 상처가 보였다.
“다쳤군.”
“...죄송합니다.”
여인의 턱을 집어올린 검선이, 여인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이내 말했다.
“아니, 괜찮다. 얼굴은 멀쩡하니.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걸 허락해주마. 가자꾸나, 아무리 그래도, 한때는 친우였던 이를 베어넘기니... 흥분되서 참기 힘들군. 장소가 여의치 않은 건 아쉽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이것도 운치라 보면 되려나. 적당히 어디서 여운을 즐기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피로 물든 도포를 펄럭거리며 나아가는 검선을, 여인들이 따라나섰다.
“......”
붉게, 두 눈들을 빛내며.
그 뒤에, 몸을 일으킨... 죽었다고 알려진 열둘이 뒤를 따라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검선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열둘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백인을 채운 자신들의 부인을, 끝까지 검선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마.
그, 혹은 그녀는 특이한 초월자였다.
적어도, 앙그라의 기억을 흡수한 내가 보기엔 그랬다.
가끔씩 회동을 가질 때마다, 카마는 언제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종족도, 성별도 다른 모습으로 회동을 찾아온 카마는, 이렇다할 말을 꺼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 분‘과 단독으로 대화를 나누었을 뿐.
그렇기에, 진짜 모습도 카마가 지닌 권능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의했다.
아니, 주의했다고 생각했다.
『흠, 베진 못했군. 가죽 하나 차이인가. 그 사슬, 이제 보니 기물이었군. 나중에 내가 챙기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검을 회수하는 검선을 바라봤다.
미청년.
솔직히, 존나 아니꼽게도 잘생긴 놈이었다.
하물며, 스물둘의 영웅 중 하나라고 불리던 이였기도 하고, 존나 잘난 놈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는 길에 초월자 하나와 마주쳐서, 그때 같이 왔다는 맹주와 그 수하들인 무림맹 무사들의 모두가 죽고... 가까스로 이겼노라고 다가왔던 검선이 냅다 검을 휘둘러서 내 목을 날려버리려고 할 줄은.
예지를 통해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목이 처날아가버렸으리라.
하지만, 어찌보면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야 이 새끼.
내가 봤던 미래에서 거대 괴수로 진화해서 미쳐 날뛰던 나한테 반으로 갈라져 죽었던 ’미래‘를 갖고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세상이 그 꼬라지가 났으니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뒈진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여기서 검선을 마주쳤을 때는 많이 찜찜했는데.
애당초 처음부터 저쪽의 편이었다면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한조야...! 괜찮느냐?!”
휘익, 하고 휘둘러지는 검들을 부적으로 튕겨내고는 이내 날린 부적으로 상대의 몸통을 날려버리고는 외치는 호아란의 말에, 검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간당간당하게 달라붙어 있는 목을 더듬었다.
“야...! 그 새끼한테 덤비지 말고... 윽...! 이 년들이, 진짜...!”
마찬가지로, 달려드는 여자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서 쳐부수고 있는 뇌수와 피가 흩뿌려지며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동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릴리스에게 계속해서 달려들어서 검을 휘둘렀다.
“이, 씨발년들이...?!”
물론, 그렇게 달려들던 이들의 대부분 역시 금새 머리가 날아가서 바닥에 널부러졌지만.
“영웅이여, 조금만 기다려보거라...! 가거라, 여의 전사들이여!”
갑작스런 기습에도, 무사히 소환시킨 넷의 황금의 전사들을 부리며 길을 열려는 카르미나도 보였다.
써거걱, 하고 순식간에 소환진에서 튀어나와서 창을 내질러... 카르미나에게 달려들던 여인의 목을 꿰뚫어버리는 황금의 전사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무난히, 적들이 되어버린 이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셋... 그 중 호아란과 카르미나도 이미 상처를 입은 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상을 당했다고 다가왔던 검선의 여인들.
그렇게 알려진, 부인대.
검선이 데리고 다니는 백명의 초인들로 이루어진 '부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나섰던 호아란과 카르미나에게, 대뜸 칼이 휘둘러졌기 때문이었다.
내 시야에 닿지 않았던, 나 역시 검선에게 기습을 당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기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그것도, 알려졌던 것과 달리 초인이 아닌, 권능이 깃든... 신성이 깃든 검으로.
호아란과 카르미나, 둘 다 어깨와 손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맞다.
검선은, 그냥 검선이다.
내가 아는 스물둘의 영웅.
천마와 맹주, 그리고 황제랑 흑연이라고 불리는... 무인 출신의 초월자들 중 하나.
그 중에서도, 천마... 샤오 다음가는 '무인'으로 알려진 자.
그리고, 그런 검선의 부인대라고 알려졌던 백 명의 여인들.
초인들로만 알려져 있던 이들이, 휘두르는 검들에 신성을 깃들여서 공격해오고 있었다.
붉게, 두 눈들을 빛내면서.
그래.
저년들이 바로 '카마'였다.
카마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꿈틀, 꿈틀...
릴리스가, 머리를 처부숴버린 여자의 몸속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벌레가 보였다.
작은 벌레.
그렇게만 보였지만, 무려 신성을 품고 있는 벌레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것이...
머리가 터져나가서 죽어버린 사체를 야금야금 그러모으고, 살점들을 엉기고 설키며 모으더니... 조잡하게 만든 머리를 사체에 이어붙이고 다시금 그 안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
머리를 잃었던 여자가, 대충 조잡하게 붙여놓은 얼굴을 달고서 몸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그리고는 검기에, 신성을 품은 채로 다시금 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씨발.
머리만 갈아치우면 쌩쌩해지는 것도 아닐진데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