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1)
크락수스, 놈은 카마랑은 정반대의 타입이었다.
종족도, 가지고 있는 권능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카마와 달리 녀석은 놈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인신공양이라는, 개좆같은 방식으로든 아니면 본래 차원에서부터 한가락을 했던, 방식은 저마다 달랐어도 일단은 하나같이 반신... 초월자의 격을 갖춘 녀석들 사이에서 유명할 이유는 하나였다.
놈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강한 만큼, 그의 권능 또한 알려져 있었다.
애당초 강할 수 밖에 없었다.
본래 세상에선, 보복과 복수의 신으로 여겨졌던 이.
애당초 보복과 복수의 ‘화신’으로 태어난, 처음부터 신이었던 존재.
선천신이 바로 크락수스였으니.
하지만, 더 이상 크락수스를 신이라고 부르기엔 그럴 것이다.
본래, 신... 그중에서도, 선천적으로 애당초 신으로 태어난 신의 경우에는 자신이 태어난 차원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차원이 몰락하게 되면, 몰락하고.
번영한다면, 같이 번영한다.
그렇다면, 이미 망해버린 차원의 세상에서.
하물며 그 세상의 ‘일부’만이 넘겨져서, 외딴 차원에 떨어져 버린 신은 어떤 꼴을 겪게 될까.
자신을 믿는 신도도, 자그마한 상징도, 그 무엇도 남지 않은 신은?
답은 여러 가지였다.
잊혀져 소멸하거나, 혹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되거나, 아니면 운 좋게 새로운 신도를, 영역을 얻어서 다른 권역을 지닌 신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하는 식으로, 신 역시 변화하기 마련이었다.
크락수스는, 그 중에서도... 안 좋은 쪽으로 변화한 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신의 모습으로.
역병신, 혹은 재앙신이라고도 부르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크락수스의 권능은 강했다.
비틀려버린, 보복과 복수의 신의 권능은 상대가 지닌 ‘업’이 많을수록 그 힘이 강해지는 특징을, 권능을 지니고 있었으니.
내가 보기엔, 그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들이었지만.
수많은 세월 동안 아내들이 쌓아온 업은 많았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그리고 재앙신은 대개 나쁜 쪽으로만 자기 좋을 대로 하는 존재였다.
『으, 크윽...!』
이제껏, 단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던 릴리스가 힘에서 밀려 나갔다.
『릴리스...! 하나에, 하나에, 하나에, 하나를 세 번 엮어 고하노니...』
수인을 맺으며, 주언까지 읊어서 펼친 호아란의 주술들로도, 크락수스의 한순간조차도 묶지 못했다.
『퍼부어라!』
쏟아지는, 황금빛 전사들의 창과 화살에도 놈은 끄떡도 하질 않았다.
크락수스의 권능.
등가의 권능은, 그만큼 강력했다.
상대의 업이 강할수록, 더욱 강해진다.
그것이 선한 일로 쌓인 업이든, 악한 일로 쌓인 업이든 관여치 않고서 그러했다.
그냥 지 좋을 대로만 해석해서, 지 좋을 대로 강해지는 권능.
섭리를 비튼, 불합리의 일선에 선, 초월자에서도 한단계 윗 격을 지닌 ‘신’이 크락수스였다.
하지만, 결국 몰락한 신이다.
결국 영락해서, 잊혀지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재앙신’으로나마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허락되어 남아있는 놈이었다.
무적처럼만 보이지만, 무적이 아니다.
그건, 내가 봐서 알고 있었다.
『으, 그그긋...!』
릴리스가, 자신의 왼팔을 오른 팔로 부여잡고서, 자신과 힘을 겨루고 있었다.
호아란의 주술이 허공을 수놓으며, 내게 보이지 않는 크락수스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카르미나가 부리는 전사들이, 애꿎은 땅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맞다.
전부 환상이다.
환각에 불과했다.
무적처럼 보이지만, 단지 ‘무적’을 가장한, 강력한 환술.
그것이 몰락해버린, 보복과 복수의 신의 권능의 실체였다.
그리고, 그 환각 속에서 나는 멀쩡히, ‘진짜’ 크락수스가 보였다.
정신계쪽으론 기본적으로 거의 면역 수준으로 강하게 태어나버리는, 나와 같은 초월종인 릴리스조차도, 자신의 업에 집어삼켜져서, 크락수스의 권능에 사로잡혔지만.
나는 아니었다.
자신들의 업에 짓눌려서 ‘환각’을 보는 그녀들과 달리.
그래서 스스로를 공격하려는 것을, 스스로가 막아내고, 허공에 주술을 펼치고, 화살과 창을 쏘아보내는 그녀들과 달리.
나는 머리가 좀 지끈거리고, 환청이랑 환각이 좀 보여도 멀쩡히 움직일 수 있었다.
멀쩡히 진짜 크락수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식적의 내가 사람을 좀 패고 다니긴 했어도, 죽이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
내게 쌓인 업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고, 덕분에 ‘업’을 통해 환영을 보여주는, 몰락한 나머지 그 정도의 권능만 지니게 된 신, 크락수스의 힘은 반만 통했다.
『너도 참 재수가 없다, 그치.』
나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분명 알아서들 환각에서 벗어났을 아내들이라고 한들... 환각에서 깨어나기 전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거나 할 수는 있었으리라.
하지만, 놈은 그러지 못했다.
놈의 권능이 반쯤 통하지 않는 내가 그러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았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놈에게 반쯤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고집을 덜 부렸을 때, 내가 혼자서 쳐들어가려고 했던 이유도 놈의 권능 때문이기도 했고.
결국, 이렇게 됐지만.
결국, 이 녀석만큼은 내가 잡아야하는 놈이었다.
『들어와, 씨발 새끼야.』
『ㅡㅡㅡㅡㅡㅡ!』
덤벼드는 놈에게 드래고닉 펀치를 갈겼다.
치고, 패고, 찢었다.
나 역시, 그의 권능에 치이고, 패이고, 찢겨졌다.
몰락하고, 영락해서.
그래서 ‘환각’을 보여주는 게 전부가 된 놈의 권능이었지만.
본래 놈이 가지고 있던 ‘등가’의 권능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놈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나 역시 상처를 입었다.
놈이 치이고, 패이고, 찢겨지는 만큼 나 역시 치이고, 패이고, 찢겨졌다.
쩌적, 쩌저저적...!
천호의 갑주들이 이번에도 역시 너덜너덜해졌다.
파샤의 성물을 집어삼키면서, 성물로서도 무기로서도 천호의 갑주보다 한 단계 나아간 용 발톱도 그 뒤를 이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천호의 갑주가 없으면, 몸으로 떼우면 그만이었다.
쩌저적...!
놈의 가슴을 가르자, 내 가슴팍이 갈라졌다.
내 주먹이 으스러지고, 터지자, 놈의 얼굴이 으스러지고 터졌다.
‘등가’는, 여전히 ‘등가’로서 놈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내 쪽은 내가 팬 만큼, 추가로 지불된다는 좆같은 상황이긴 했지만.
뭐 어쨌는가.
결국, 놈도 상처를 입고, 다친다는 게 중요했다.
내 공격이 놈에게 통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놈의 힘이, 내가 가하는 공격마다 소모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자라나라.』
반쯤만 동화되서, 편리하게도 내 마음대로 모양을 바꿀 수 있게 된 왼팔이 용 발톱을 대신해서, 칼날이 되어 놈의 몸을 갈랐다.
촤아아악!
내 몸도 같이 갈라졌지만, 그건 대충 비늘로 내 살점을 꿰뚫고, 뼈와 뼈를 잇고, 붙이는 걸로 떼웠다.
재생은 하지 않는다.
애당초, 재생이 되지 않으니.
임시방편으로, 당장 몸을 움직일 수만 있게 떼우고, 또 떼웠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태우고, 놈의 몸에 파고들어간 내 뼈를, 폭발시키고.
독침을 쏘아대고, 부수고, 찼다.
결국은, 놈이 무릎 꿇었고 서있는 건 나였다.
치직, 치지지직...
불길에 타오르는 것처럼, 내 몸 위로 번져가는 화상과 함께 타오르는 놈을 내려다봤다.
줄고, 줄어서.
이제, 내 반도 오지 않게 된 놈을 내려다봤다.
『ㅡㅡㅡㅡㅡㅡ너 역시 나와 똑같으리라.』
그럴지도 몰랐다.
내가 보는, 크락수스의 모습은 흡사... 미쳐 날뛰던, 거대괴수로 변한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많이 작아졌지만.
처음에는, 거대괴수로 변한 내 미니어처...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
비슷했다.
슬퍼하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괴로워하고, 그저 모든 것을 거절하는, 그것만을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촉수가, 내 팔을 잠식해 들어왔다.
『너 역시 증오하지 않았느냐. 너 역시 괴로웠지 않았느냐. 너 역시 슬퍼하지 않았느냐. 타고난 업에, 부여된 업에, 그 모든 것에 분노하지 않았느냐.』
미래의 가능성에서, 내가 저런 크락수스와 비슷한 것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선.
크락수스의 말대로일지도 몰랐다.
『자, 나에게 맡겨라. 네 복수를 내가 이룰진저. 너 역시 구원받으리라.』
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라고.
『남이 해주는 구원, 좆도 관심 없으니 너나 많이 해라.』
심장이 움켜쥐어진 채,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판에 어디서 개수작이야.
『가서 앙그라랑 아포피스한테 안부 전해주고.』
뿌드드드드드득!
『오오오, 오오오오오오ㅡ!』
뽑혀 나오는 심장.
아니, 정확히는 놈의 신성이 담겨진 핵에 촉수들이 달라붙었다.
내게 돌려달라고, 다시 내놓으라고 달라붙었지만.
애당초 돌려줄 생각이면 빼앗지도 않았다.
내가 박는 것도 잘하지만, 뽑는 것도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그대로 돌려서, 달라붙는 촉수들을 비틀어 찢으며 마저 뜯어냈다.
그것이, 크락수스의 최후였다.
“...꼴이 말이 아닌 걸.”
아내들이 크락수스에게 당하고서, 눈알이 돌아가서 앞뒤 안 가리고 들이대다 보니까 지나치게 많이 다쳤다.
뒤를 돌아보자 풀썩, 하고 쓰러지는 릴리스와 호아란, 카르미나가 보였다.
다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흙바닥에 그녀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까 눈앞이 시뻘개졌다.
근데, 분노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핏물이 내 눈알에 들어와서 그런 거였다.
대충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흡.”
스르르르륵.
상처를, 비늘로 덮었다.
찢어지고, 비늘과 독침으로 강제로 이곳저곳 엉기고 섥히게 이어붙인 신체를 덮었다.
그 위로, 또 천호의 갑주에 신성을 돌려 복구하는 걸로 또 한 번 덮었다.
이걸로, 티는 나지 않으리라.
전부 회복하는 건 몰라도, 아주 잠깐이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게까진 회복할 테고.
그러니.
나만 아픈 척하지 않으면 됐다.
[내 아이. 내 아이들을 돌려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단 거지? 태어난 것이 죄란 말인가. 우리는 태어난 것조차 죄였단 말인가? 그 조차도 너희가 만들어낸 생명이었거늘?]
[동포들이 죽었다. 몬스터라는 이유로. 무엇이 몬스터냐, 무엇이 괴물이란 말이냐. 그들도 똑같았다. 너희와 똑같았다.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나만 들리지 않는 척하면 됐다.
[죽어라, 죽어!]
[그리하여 너 또한, 우리처럼.]
[사라지리라. 잊혀지리라.]
[파멸하리라.]
나만 보이지 않는 척하면 됐다.
그러면 그만인 일이었다.
빠지지지직!
움켜쥔 핵을 터트리고서, 제풀에 지쳐서 잠들어버린 아내들을 깨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