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2)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우르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거대한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발론’의 매개인 탑이.
탑을 관통한 나무줄기가 끝내, 이 세계를 유지중이던 일축을 무너뜨리며, 다시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꽈지지직...!
그렇게, 탑을 무너뜨린 나무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것도.
“......”
걸음을 멈췄다.
존나 뭔가 심상치 않은 짓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베르그라오그르랑, 라우라, 그리고 그 귀쟁이만 남았던가.”
남은 놈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셋.
솔직히 중과부적이다.
하물며, 지금처럼 너덜너덜해진 몸이라면 더더욱.
더욱이 놈들 중 한놈은, 무려 아리아드의 차원에서... 주신이라고도 할 수 있던 장모님을 움직이고 부려먹고 있는 놈이었다.
내가 보기엔, 이미 죽은 나무의 줄기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한때는 세상의 절반을 덮었다던 거대한 나무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저만한 것을 움직이는 것만 해도 꽤 강한 놈인 건 틀림없었다.
“셋...”
그리고, 임신 중인 몸으로 여기까지 와서 잔뜩 지치고... 끝내 잠든 아내들.
아마, 깨어나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걸릴 거였다.
깨우려면 깨울 수야 있겠지만, 역시 그건 좀 그랬다.
잠깐 생각했다가, 이내 결정했다.
“호아야.”
ㅡ싫어.
그냥 불렀을 뿐인데도, 바로 거절이 돌아왔다.
맹렬한 거부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호아야.”
재차 부르자, 포옹하고 내 앞에서 작은 여우 소녀가 튀어나왔다.
“호아!”
ㅡ싫다고 했잖아!
빼액, 하고 귀가... 아니, 귀는 아니지만 아무튼 심상이 흔들릴 만큼 기운차게 외치는 호아를 보고서 그런 호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호아아.”
ㅡ싫다고, 했는데...
하지만, 결국 호아는 내 의지를 거스르지 못했다.
잠든 릴리스와 호아란, 그리고 카르미나의 주위로 결계를 펼쳤다.
“여긴 너한테 맡길게, 딸.”
실제로 내 딸은 아니었지만, 딸같이 생각하는 호아에게 그렇게 말하고서, 보들보들한 호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준 뒤에 손을 떨어뜨렸다.
“엄마들 깨면, 아빠 먼저 출발했다고 전해주고.”
품에서, 너덜너덜해지는 와중에도 잘 챙겨두고 있던... 정체불명의 보옥을 확인하고서, 아리아드에게 받았던 세계수의 잎들을 꺼내다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질겅질겅 잎들을 씹었다.
알싸한 향과 함께, 몸이 좀 낫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낫고 있는 거리라, 별로 티는 안나지만.
뭐, 이게 어딘가 싶었다.
걸음을 돌렸다.
“자, 가볼까.”
마무리를 지으러.
호아에게 릴리스와 호아란, 카르미나를 맡긴 채 이 사단을 낸 씹새끼를 조지러 향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나왔네.”
양산을 든 채로,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백발의 흡혈귀가 보였다.
“...너를 이렇게 볼 줄은 몰랐는걸.”
짙은 피비린내가 나는 건 여전한, 좆같은 년이.
“반갑다, 씹년아. 여전히 존나 생리하는 냄새가 나는구나 너.”
빠직, 하고 씹년의 이마에 핏줄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내 말에 개빡친 것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빙그르르, 양산을 돌리며 말했다.
“...어머나, 뭐야? 혼자 온 거니? 릴리스나, 호아란은? 그리고, 그 시꺼먼 애도.”
카르미나가 어디가 시꺼멓다는 거야.
이 씨발년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있었으면 냅다 튈려고 했는데 혼자 있으니까 해볼만 해보이디?”
후후, 하고 씹년이 애써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어머, 여전히 개짖는 소리는 일품이네. 그렇게 내 멍멍이가 되고 싶었니?”
우우우우우우웅.
핏빛처럼 붉은, 신성이 씹년의 등 뒤로 피어올랐다.
“하지만, 미안한걸. 아쉽지만, 내 강아지가 되기엔... 지금은 너무 볼품없는 꼴이라.”
그래, 그렇겠지.
크락수스랑 바로 조금 전에 존나 박터지고 싸우고 오던 길이라서, 아직 천호의 갑주도 덜 복구됐고, 용 발톱도 마찬가지였다.
너덜너덜한 한조 그 자체긴 했다.
그래서, 하나만 물어보기로 했다.
“너는 혼자 왔냐.”
“지금 그런 게 중요하니? 어차피 곧, 내게 피를 빨려 죽을 텐데.”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혼자 온 게 분명했다.
그럼 됐다.
최악의 상황은 놈들이 한 번에 셋이나 튀어나와서 날 다구리를 놓는 거였는데.
베르그라오그르는 그 성격상 이미 튄 지 오래인건지, 아니면 어디 짱박혀있는 건지 나오지 않은 모양이고...
쿠우우우, 쿠우우우웅...!
아까부터 뭘하는지 저기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나무줄기를 보아하니, 그 귀쟁이도 올 여유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이리저리 밀려서, 라우라가 여기까지 나선 모양.
그러니까, 조금만 더 말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내가, 너랑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어머나, 이제와서 아부해봤자ㅡ”
“향수 좀 작작 뿌려 씹년아. 보지에서 피냄새 존나 풀풀 나는 년이. 어차피 가려지지도 않는데.”
그때 이 말을 못 해준 게 가끔 꿈에서 나올 만큼 빡이 쳤는데 이제야 해주네.
쁘직, 하고.
씹년이 몸에서 썩은 피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 콤플렉스였는지 이제는 핏줄이 터지도록 개빡친 것이 보였다.
『이, 이 씨발놈이...!』
우수수 떨어지는 핏빛창들을 보여, 중지를 날려준 내가 땅을 박찼다.
콰지지지지지직!
도약한 내 주위로 수십, 수백의 주문진들이 새겨졌다.
끼아아아아아아악ㅡ!
망혼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손들이 튀어나왔다.
흡혈귀로서의 혈마법과 자신이 죽인 자를 ‘인형’으로 만들어서 부리는 권능을 지닌, 지 성격답게 좆같은 능력의 소유자인 씹년의 권능이.
ㅡ죽여줘.
ㅡ제발. 저 괴물을 죽여줘.
ㅡ복수해줘.
ㅡ내 피를 돌려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들.
강제로 생명을 빼앗긴 자들의 원혼이, 그 손으로 나를 부여잡으며 애원했다.
[죽어라. 너 또한.]
[우리를 죽인 것처럼.]
[무너지리라. 사라지리라.]
[내 아이들. 내 소중한 아이들.]
[네가 빼앗았어.]
[돌려줘.]
[어째서 우리만이 죽어야 하지? 우리는 당하기만 했어야 했나. 그저 참아야만 했나.]
환청이, 내가 죽인 자들의, 들은 적도 없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고든다.
손톱이.
파고든다.
지끈, 지끈.
머리가 울렸다.
시끄러웠다.
『아하하, 펄쩍 뛰더니 그대로 붙잡혀서는. 마지막은 웃게 해주는구나?』
우우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창이 보였다.
수많은 망자들의 손에 붙잡혀서, 들린 나를 관통하기 위한.
핏물로 만들어진 창이.
그리고 쏘아졌다.
『좀 닥쳐봐.』
알겠으니까.
지금 족치려고 하고 있잖아.
그리고, 씨발 새끼들아.
너흰 뒤져도 싼 새끼들이었으면서 찡얼거리지 좀 마라.
『자라나라.』
콰아아아아앙ㅡ!
자라난, 거대한 왼팔로 나를 묶은 망자들의 손을, 이미 죽은 자들의, 인형들의 손을 뿌리쳤다.
『ㅡ암무트.』
그리고, 그 왼팔은 그대로 거대한 괴물로 변했다.
작은 고양이가 아니라.
수많은 맹수들이, 수많은 괴물들이 뒤섞인 ‘공포’의 상징으로서.
마주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죽음’의 상징으로서.
『뭐ㅡ』
난입한, 또 다른 초월자.
정확히는 내 신성을 뚝 떼어다가 가져가버린, 죽음으로 심판하는 ‘신수’의 발톱이 씹년에게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앙!
내 왼팔째로 뜯겨져나간 암무트가,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던 씹년을 바닥에 내리꽂고서, 그대로 발로 짓밟았다.
으지지지직!
그 순간에, 치솟은 핏줄기들이, 그런 암무트의 몸을 관통했다.
콰직, 콰지지직!
무너지고, 바스라진다.
결국, 세계수의 열매에서 돋아난 나무줄기를 매체로 해서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바스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물어라, 암무트.』
완전히 바스라지기 전에, 암무트가 그 씹년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한층 더 피를 싸대며 날뛰는 년에게 내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넌 좀 뒤져 씹년아,』
촤르르르륵...!
반쯤 부서진 용 발톱 위로, 비늘이 돋아났다.
우드드드득...!
그 위로, 다시 무수한 독침들이 자라났다.
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뒤섞인, 그 무엇도 아닌 오른팔이 암무트의 입을 찢으며, 너덜너덜해진 채로 벗어나려는 백발의 씹년의 머리에 내리찍혔다.
『키메라 펀치.』
“카, 그, 하...”
내 발목을 부여잡은, 손가락들이 보였다.
팔목부터 끊어진 채로도, 끝내 놓지 않는 손가락들이.
뭉개진 얼굴과 함께, 피거품을 토하고 있는 백발의 흡혈귀도.
ㅡ죽여!
ㅡ드디어!
ㅡ죽여줘!
ㅡ죽어, 죽어, 죽어!
그런 씹년의 주위로 몰려드는 망혼들이 보였다.
마침내 이뤄진 복수에, 자신들의 한을, 저주를 퍼붓는 것이 보였다.
“사, 려...”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다꽂은 키메라 펀치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애원하는 년이 보였다.
“머, 머든... 하테, 니, 까...”
“뭐든지.”
내 말에, 씹년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희망.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깃들었다.
“그, 애, 머, 든... 버, 버리라고 하면... 버리고... 하, 할트라면, 할트, 게요. 그어니, 까...”
살려줘.
발음이 줄줄 샜지만, 경우가 다르지만 비슷한 소리를 내던 아내들을 보아왔던지라 뭐라고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벌리라면 벌리고, 핥으라면 핥을 테니까 목숨만 살려달라고 구걸하고 있었다.
근데.
“내가 말했지.”
꽈지직, 하고 발로 짓밟아서, 씹년의 가슴을 뭉갰다.
“크, 프흡...!”
브스스스, 하고 재가 되어서... 끊어진... 가슴 밑으로가 소멸되어간다.
“니 보지에서 피냄새 난다니까.”
앞으로도 쓸 일이 창창한데, 그딴 데 박을 일은 없었다.
남의 피나 빨아대던 년의 입에, 내 것을 물릴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그러다가 병 걸리는 거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씹년은 아직 쓸모가 있었다.
『암무트.』
상반신만 남은, 희망의 빛을 잃고서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지는 씹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먹어라.』
ㅡ나의 주인이여. 이미 말했지만...
『알아. 그러니까 먹으라고.』
ㅡ...알았다.
쩌어어억, 하고.
짐승이 아가리를 벌렸다.
죽음으로 심판하는 자의 아가리가, 빛이 꺼져가는 씹년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으지지직...!
채, 소멸하기 전에.
사그라들기 전에, 그 생명을 취했다.
ㅡ오오오오오오...!
ㅡ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ㅡ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그리고, 죽은 자들의 망혼이 울부짖으면서, 기뻐하는 소리를 내뱉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값은 치르고 가야지.”
대신 복수해줬으니까.
울긋, 불긋.
피부 위로, 핏줄이 도드라진다.
생명에 관여하는, 생육의 권능.
그런 권능을 지닌 내게 있어서, 상극이나 다름없는 ‘권능’이 나에게 반발하려 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생명은 오롯하게 나의 것이었지만.
또한 죽음이, 내 곁에 있었다.
『깃들어라, 암무트.』
망혼들이, 잃어버린 내 왼팔에 달라붙었다.
『저들이 너의 새로운 권세이니, 네가 다루어라.』
새 팔이 돋아났다.
새로운 영역이 열렸다.
생육, 그리고 죽음.
두 권능이, 하나로 뭉개지고 합쳐졌다.
생멸의 권능.
반쪽짜리 두 개의 권능이 합쳐져서, 새로운 반쪽짜리 권능으로 다시 태어났다.
반신이, 아무리 반신을 집어삼켜도 그 격이 껑충 뛰는 일은 없다.
오히려 잡탕찌개가 되어, 이상한 거나 될 따름이지.
하지만, 당장은 강해지는 건 맞았다.
지금도, 당장은 쓸 팔이 새로 돋아났지 않았나.
그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남은 건, 이제 둘.
베르그라오그르랑, 귀쟁이놈.
지금은 둘이 덤벼도 해볼만 했다.
ㅡ우리를 풀어줘...!
ㅡ어째서, 어째서, 다시...!
존나게 늘어난 환청에 귀를 막으면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