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보이는 것을 보지 않은 채, 들리는 것을 듣지 않은 채, 느껴지는 것을 느끼지 않는 채.
멍하니 걷다 보니, 끝에 다다랐다.
나무 줄기의 시작점.
그 끝에 있는 놈이 보였다.
아니, 이제 놈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왔군.』
나무에 반신이 집어 삼켜진 채로, 놈이 말했다.
아니 삼켜졌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동화됐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쩌적, 쩌저적...
이 순간에도, 놈의 몸에 뿌리를 내려가는 나무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설령 이제와서 내가 죽는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미 씨앗은 뿌려졌으니.』
그 씨앗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증오다.
뿌리깊게 내린 불신과 증오의 씨앗.
‘아발론’은 무너졌다.
아마, 저 멀리는 이미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일 거다.
별안간, 통하던 말이 다시 통하지 않게 됐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된 와중에, 대화조차 할 수 없게 됐다.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2년전.
아니, 이제는 3년전의... 한창 서로가 서로를 막 ‘인식’했을 때.
그때와 같이.
하지만, 그때는 ‘묶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이 설령 힘이라는, 다소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이었다고 한들.
하나로 묶이는 것이 가능했다.
‘몰랐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몰랐다.
몰랐기에 두려워했고, 몰랐기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을 쓰기로 했다.
폭력.
힘.
자신 외의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것이, 더 강한 힘으로 억압되고, 짓눌려져서 만들어진 이 세상은... 그렇기에 불완전했다.
그것이 다시 한 번 쪼개졌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아는 상태로.
아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불통보다 더한 의미를 낳는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이웃이라고 여기고, 함께 지냈던 이의 이빨이 언제든 자신의 목을 가볍게 으스러뜨리고.
약하다고, 부질없다고 여기던 이의 손에 ‘무기’가 쥐어지는 순간, 그 연약하기 그지없던 이가 한순간에 자신을 구멍이 잔뜩 뚫린 송장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안다.
저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음을 안다.
저들이 서로가 서로를 언제든 이 세상에서 지워없앨 수 있음을 안다.
저들은 또 언젠가, 이러한 일이 다시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해버렸다.
이제는 저들 모두가 안다.
경험하기 전에, 경험하기 직전에 막아졌기에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안다.
그것은 몰랐을 때보다 더 큰 두려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불화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분노가 분노를 낳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모든 것을 좀먹을, 그런 씨앗이 모두에게 심어졌음을 나도, 저놈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뭐.』
그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일단.
구한다.
구하고, 그 나중은 나중에.
나보다 더 머리가 좋은 놈들이 해결할 문제였다.
그러니.
『와라, 나를 죽여봐라. 네 증오 역시, 나는 긍정하니. 이 세상은 이제 올바른 질서로 다시 서리라. 더 강한 자가 살아남으리라.』
촤아아아아악!
내 몸에서 뿌리들이 치솟았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놈이었다.
『너에게, 어머니의 딸의 뿌리가 닿았음을 이제는 안다. 아리아드. 생명을 사랑하는 자. 그저 사랑만을 아는 자.』
내 몸을 파고들며, 뿌리를 내리는 것을 잡아 뜯었다.
『더러운 위선자. 끝내, 세상이 불탈 지경이 되어서까지, 그저 사랑만 하며 도망친 자. 이 외떨어진 곳에서조차도 과거의 뉘우침을 모르는 자.』
걸음을 옮겼다.
콰직, 콰직.
내 몸을 막아서는 뿌리들이, 순식간에 자라나고, 또 죽어갔다.
『다시 한번, 세상이 불탈 때. 그녀는 그제야 후회하리라.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렇게 두지 않으려고 내가 여기에 왔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망혼이 울부짖었다.
『암무트, 합체.』
암무트랑은 처음이지만, 괜찮았다.
우득, 우득, 우드드드득...!
왼팔이 거대하게 부풀며 죽음의 형상을 갖춰갔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날개가 돋아나고, 온몸이 비늘로 덮었으며, 가시가 돋아났다.
『키메라 펀치.』
투콰아아아아아앙!
내리찍은, 흉수의 팔이 놈이 뻗은 손과 함께 움직인 나무줄기에 가로막혔다.
『어머니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합당한, 자식의... 나의 분노와 함께.』
『니 애미가 아니라 내 장모님이야.』
씹새끼가 어디서 호적 메이트로 들어오려고 개수작인지 모르겠다.
놈은 숲지기.
잘 쳐줘도 자식처럼 키운 존재에 불과했지, 진짜 자식인 아리아드랑 동열에 설 순 없는 놈이었다.
하물며, 이 씹새가.
제멋대로 세상을 불태우니 지랄하는 새끼가 그럴 자격은 없었다.
『그 눈,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콰지지직!
두 눈에서 무언가가 돋아났다.
이미 몇초전에, 무엇이 돋아났는지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내 몸에서 돋아났던 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뽑았다.
망설이지 않고서, 두 눈을 뽑고... 새로 만들었다.
쩌어억, 쩌어어억...
몸에 돋아난 ‘눈’들이 느껴졌다.
피어나고, 자라난 새 눈들.
거대괴수가 됐던 내가 어째서 온몸에 그렇게 주렁주렁 눈깔을 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좀 편했다.
수십 개에 이르는 눈들이, ‘예지’한다.
저마다 다른 미래를 본다.
그 눈들에도, 일제히 뿌리들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더 많은 눈들이 새롭게 눈을 뜨고서, 미래를 바라봤다.
ㅡ죽어.
ㅡ우리를 죽였으니.
ㅡ우리를 가뒀으니.
ㅡ주인이여.
ㅡ너 또한 죽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않느냐.
ㅡ안된다.
소리가 들렸다.
웅성웅성.
환청이.
그래서 듣지 않았다.
모든 ‘미래’를 본다.
‘저 놈’을 족칠 수 있는 미래를.
ㅡ그건, 안된다. 주인이여.
뻗을 수 있기에 뻗었다.
가능성을, 움켜쥐었다.
화르르르르륵...!
몸이 타올랐다.
신성을 연료로 삼아서, 부족한 것은, 생명 그 자체를 불살라서 타올랐다.
더 이상 놈이 피워 올리는 뿌리는, 이미 내 몸에서 피어오를 수 없었다.
그러기 전에, 불타 사라졌으니.
더 이상 놈은 나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내가 놈보다 더 거대해졌으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점점 거대해져갔다.
미래를, 움켜쥐고서.
내가 닿을 수 있는, 내가 본 미래를 걸었다.
주시하는 것은, 본다는 것은, 마땅히 그것으로 향할 수 있음을 뜻하므로.
나는, 언젠가 내가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ㅡ
[그건 안된단다. 아가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지 않으려 했던 환청 사이로, 또렷하게.
[그러면, 많은 아가들이 슬퍼하게 되잖니. 응, 응, 그러니 그러면 안된단다.]
무언가가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 삼켜지지 말렴.]
뭐에 삼켜지지 말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네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나니? 아가야.]
내 이름이라니.
그거야...
『나는 생명과 죽음이다.』
[아니, 아니란다. 그건 네 ‘이름’이 아니지.]
[그 누구도, 너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단다.]
[그 누구도, 너를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을 거란다.]
[너를 사랑하는, 모두가. 그렇게 여길 거야.]
[그러니 아가야, ‘네 이름’을 기억하렴.]
내가 생명과 죽음일지언데, 대체 또 무엇을 기억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기가 싫었다.
단지, 눈앞에 있는 것에게 마땅한 죽음을 내려야할 뿐임을 기억했다.
그것이 나의 업임을 이해했다.
그러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저것은 무수한 ‘생’이 태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저것은, 내가 보기에 무척이나 꺼림찍한 나의 대적자였다.
그러니 마땅히 ‘죽여야’함이 옳았다.
그러니, 아까부터 되도않는 것을 기억하라는 목소리를 무시하기로 했다.
[아가야...]
『ㅡ나는.』
그리고, 한걸음을 앞에 뒀을 때.
내 어깨를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연장자의 말은 들어야지.]
보다, 더욱 거대한 것이 나를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내 영역이다. 애송아.]
그것은 거대한 용이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용.
그것이, 아주 지그시.
내 어깨를, 그의 몸에 비하면 작디 작은 손톱으로 누르고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더 이상 내가 향하지 못하게.
그리고, 그 옆에... 자그만 초록빛이 보였다.
[아가야.]
저 목소리.
환청으로 여겼던 것이, 나를 불렀다.
[이름을 기억하렴. 너의 이름. 네가 불리던 이름. 너는, 고작 ‘생명과 죽음’따위로 불리지 않았단다.]
‘생명과 죽음’ 따위라니.
위대한 그 이름을 따위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ㅡ
[따위지. 고작 그뿐이다. 그 둘은 필멸하는 존재에게만 존중받고 두려움을 받는 것이니.]
용이,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은 이름이지. 네가 그 이름을 받으면, 너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겠지. 같이 설 수 없게 될거야. 내가 그랬거든. 오랜 시간이 걸려서, 다시 만났지만. 지난한 일이지.]
무슨 소리야 대체.
[그러니, 돌아가라.]
[아가야, 네 이름을 기억하려무나.]
[너는...]
[아가는...]
뭔가, 따듯한 것이 느껴졌다.
[참고로, 네가 ‘먹은’ 것은, 내가 ‘먹은’ 걸로 치기로 했다. 이전에 대신 준 대가 대신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손해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사랑하는, 내 증손녀의 서이니.
그게 대체ㅡ
ㅡ주인이여...!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저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나는...
[가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남의 영역을 넘보지 말고. 좀 더... 너 다운 걸로 하라고. 그 세상은, 그래도 되는 세상이니까.]
[딸은 부탁한단다. 그리고... 응, 미안해. 나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대신하게 해서.]
뭐라고 들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닿을 수 있었던 것에서, 다시 멀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서서히 기억들이 부상했다.
잊혀지려고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잊으면 안됐던 것들이 떠올랐다.
내 아이들.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
그리고.
내 이름.
생명과 죽음이라는, 어디 중2병에 걸린 녀석이나 떠올릴 법한 이름이 아니라.
솔직히 좀 아니꼽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이름인 ‘강한조’가 기어이 났다.
그리고.
눈을 떴다.
“...주, 인이여?”
“...암무트?”
내가 부르자, 뚝, 뚝하고 눈물을 흘리는 암무트가 보였다.
“일어, 났군...! 돌아왔구나. 주인이여.”
돌아오다니,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삭신이 존나 쑤셨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말했다.
“일단, 좀 비켜줄래.”
무거워서 죽을 거 같다고 말하긴 미안하니까 말은 안했지만, 나랑 암무트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읏...!”
얼굴이 새빨개지는 암무트.
무겁다고 한 내 생각을 읽고서, 화가 단단히 난게 분명했다.
근데...
아니었다.
“미, 안하다. 주인이여. 지금은, 좀... 무리다. 일어나기... 그, 곤란하다.”
대체, 왜냐고 물으려다가.
이제 보니까, 암무트의 얼굴 밑으로...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의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었다.
대신 보이는 것은,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와... 적당히 나올만큼 나온 젖가슴.
그리고, 그 위로 앙증맞게 자리잡은 젖꼭지였다.
보이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밑으로도, 배꼽이라던지, 가느다란 허리라던지, 골반이라던지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연결된 것이, 꼭 영혼과 영혼 사이의 연결만이 아닌 것도 알 수 있었다.
그야...
보였으니까.
물리적으로 연결된게, 훤히 보였으니까.
가느다랗게, 선혈을 흘리고 있는... 암무트가 만년만에 잃어버린 것의 증거도 눈에 들어왔고.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을 되돌릴 방법은... 이런 것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
“아니.”
“그, 금방 일어날 테니, 조금 기다려, 라...”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팍을 부여잡고서 몸을 일으키려는 암무트.
쯔꺼어억...♡
개, 존나.
만년만에 뚫려서 그런지 엄청나게 조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어떻게 된 나머지 긴급 구조를 위해서... 내 신성에 관련된 일, 그러니까 이걸로 구조를 시도한 모양인데.
카르미나때도 그렇고, 어떻게 둘이 서로 같은 방식으로 이러는건가 싶었다.
하지만, 덕분에 살은 것 같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존나, 만년이나 지켜온 걸, 아무리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한들 빼앗아놓고서 뭐라고 하면 개씹새끼가 되잖아.
주종간이고 뭐고, 존나 씹새끼가 따로없었다.
근데 이러면ㅡ
콰아아아앙!
『이, 이 바보 멍청이 새끼 어디있...』
『한조야, 괜찮느...』
『영웅이여...?』
썩어버린 나무줄기를 때려부수며 밀고 들어온 릴리스와, 호아란, 그리고 카르미나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자, 잠깐만. 이건...”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더욱 당황한... 얼굴이 시뻘게진 암무트가 허둥지둥해하기 시작했다.
“그, 오해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어서...”
잠깐 거기서 그런 말을 하면 뭔가 좀 이상하잖아.
그보다,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려고 하면...
“읏...”
그대로, 얼굴을 구기며 주저앉는 암무트.
쯔푸우욱, 하고.
기껏 어떻게 빠져나왔던게 도로 들어가고, 그 순간에 꽈악하고 조여오는 느낌에 이미 온몸에 힘이라곤 없던 내 것이, 평소처럼 열심히 일했다.
맞다.
사정이 있어서, 나와 연결됐던 암무트에게, 사정해버렸다.
ㅡ조졌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울컥울컥울컥울컥...♡
존나 손가락 까딱할 힘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할 건 제대로 하는 내 물건이 열심히 씨앗을 쏟아붓는 와중에.
“후으으읏...?!”
만년만에, 처음으로 들이부어진 정액에 본능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꾸욱하고 내 위에 올라탄 채로 움찔움찔거리는 암무트.
"이, 이 새끼가..."
"한조야..."
"영웅이여... 그리고, 암무트... 둘이..."
아무래도 난 이제 좆된 거 같지만, 기분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