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오해의 덫 (3/5)

3. 오해의 덫

리카르도와 에일린이 캐서린과 루드비히의 약혼 소식에 각각 다른 생각을 품게 될 때쯤, 캐서린도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하나둘 구체적으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 우선이겠지.’

약혼식이야 스왈렛 공작의 뒤통수를 치는 형식으로 유야무야 끝이 났지만, 루드비히를 스왈렛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이는 건 가주인 그의 허락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넌 스왈렛.

자신의 친부이긴 했지만, 가족이라고 느껴질 만큼 친밀하지 못한 공작의 얼굴을 떠올린 캐서린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에 잠겼다. 로넌 스왈렛은 공작가를 위해 태어나 길러진 사람처럼 오롯이 스왈렛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뿐이리라.

스왈렛에 광영을 가져오는 것.

캐서린은 리카르도 에넨체 대신 사생아인 루드비히를 선택한 것이 스왈렛에 유리하리라는 합리적인 논점을 펼쳐 내야만 했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아가씨와 위그노아 경을 찾으세요.”

암녹색 벨벳 소파에 파묻힌 듯 앉아 있던 캐서린은 벨리나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까지?”

이제는 경이라는 호칭 대신 그의 이름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기껏해야 두 밤 정도 몸을 섞었을 뿐인데―물론 횟수는 그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이런 게 몸정이라는 걸까.

“네. 위그노아 경은 이미 공작님의 집무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벨리나의 대답에 캐서린은 고운 아미를 찌푸린 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없이 루드비히와 스왈렛 공작을 대면시키는 것은 조금 위험했다.

‘아버지가 괜히 루드비히에게 화풀이를 하실지도 몰라.’

루드비히는 미래에는 황실 기사단장 자리를 꿰찰 만큼 무예가 출중한 기사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만만한 그녀의 호위 기사일 뿐이었으니까. 입술을 꼭 깨문 캐서린은 벨리나의 안내를 따라 황급히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오거라.”

빠르게 집무실 앞에 당도한 캐서린이 문을 두드리자 로넌 스왈렛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캐서린은 각오를 다지듯 심호흡을 한 뒤 너도밤나무로 두껍게 짜인 문을 열었다. 짜다

“부르셨나요, 아버지.”

캐서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서류를 보고 있던 로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엄격하게 느껴질 정도로 곧은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온 로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짜악―!

순간적으로 눈을 감은 캐서린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한 뺨을 예상했으나 얼얼하긴커녕 보송보송한 제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경!”

그녀는 자신의 시야를 전부 가리는 너른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가 제 대신 공작에게 얻어맞은 것이다. 캐서린은 그의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제자리에 붙박인 듯 박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일개 호위 기사 주제에 스왈렛 내부 일에 끼어들다니 건방진 놈이로군.”

있는 힘껏 후려친 탓에 욱신거리는 손목을 감싸 안은 로넌이 인상을 찌푸렸다.

“송구합니다.”

얻어맞은 사람이 사과하는 상황이 모순적이었다. 캐서린은 우아하게 뻗은 루드비히의 어깨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앞으로 나섰다.

“위그노아 경에게 화풀이하지 마세요.”

“하나뿐인 스왈렛의 딸을 사생아 따위에게 팔아치우게 생겼는데 분할 이유가 없다?”

캐서린은 로넌의 말에 건조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식을 물건 취급하는 그의 태도에 반발심조차 들지 않는다.

‘아버지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니까.’

“제가 리카르도 대신 루드비히를 선택한 이유부터 들어 주시죠.”

로넌은 자신이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음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태연한 캐서린의 모습에 의아해 눈살을 찌푸렸다. 엊그제 아침에 본 제 딸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캐서린은 놀란 로넌의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리카르도에게는 이미 깊은 관계의 연인이 있어요, 아버지.”

“남자가 정부 한두 명 둘 수도 있는 거다.”

불퉁한 로넌의 대답은 이미 캐서린이 예상한 종류의 것이었다. 해서,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에일린 반델이에요.”

“……뭐?”

캐서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로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에일린 반델, 그녀는 현 황제가 정식적으로 황실에 들이지도 못한 코르티잔을 임신시켜 낳은 사생아였다.

“그저 남매처럼 사이가 좋은 것을 네가 오해하는 것이겠지.”

로넌은 캐서린이 죽기 전, 에일린과 리카르도의 사이를 의심할 때도 비슷한 말을 하며 캐서린의 주장을 무시했었다.

“오해가 아니라면요? 에일린은 사생아지만 황제의 사랑을 받는 딸입니다. 제 위치를 위협하는 정부가 될 확률이 커요.”

위협을 넘어서 목숨을 노릴 것이다. 캐서린은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는 순간 덜덜 떨려 오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태연한 태도와 달리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루드비히가 손을 뒤로 뻗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캐서린은 그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아니, 이미 위협하고 있어요. 벨리나, 밀드레드를 데려와.”

“네, 아가씨.”

캐서린의 명령에 벨리나는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을 빠져나가 빠르게 밀드레드를 데려왔다. 이틀 동안 물 한 방울 얻어 마시지 못한 밀드레드의 몰골은 참담했다. 그녀는 캐서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가씨!”

엉엉 울던 밀드레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밀드레드를 지하감옥에 가둔 캐서린은 틈이 나는 대로 그녀를 찾아가 밀드레드에게 주인이 누구인지 톡톡히 각인시켜 주었다.

‘단기간에 이뤄 낸 성과치곤 괜찮네.’

다른 대귀족들과 달리 아랫것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살아온 캐서린이 죽음을 겪고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매가 답이라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밀드레드의 바뀐 태도에 만족하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밀드레드, 내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해 주길 바라.”

“네, 네!”

캐서린의 말에 밀드레드가 과할 정도로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에일린의 사주를 받고 내 약혼식 드레스를 마담 니드페에게 의뢰한 것이 맞니?”

“……네, 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죽을죄를 지었어요.”

밀드레드는 캐서린이 또다시 채찍이라도 들까 두려워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사과에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인 캐서린이 다시금 질문했다.

“에일린이 정확히 네게 어떤 짓을 시킨 건지 말해 주렴.”

“캐서린 아가씨보다 자신에게 잘 어울릴 만한 드레스를 약혼식 의상으로 준비해 달라고 하셨어요. 마담 니드페에게 도안도 직접 그려 주셨고요.”

밀드레드의 설명에도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인 로넌은 쯧, 혀를 찼다.

“잠시 네게 질투라도 난 모양이지. 여자들이 늘 그렇지 않느냐? 별것도 아닌 일로 서로를 헐뜯고 힐난하고.”

캐서린은 로넌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로넌이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루드비히가 제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인지 겁이 나지 않았다. 캐서린은 별것도 아닌 일로 쉽게 손을 드는 로넌이 할 말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짧게 혀를 찼다.

‘아버지도 딱히 스왈렛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인물은 아니구나.’

그는 늘 가문을 번영시킬 궁리를 했지만 시야가 편협하고 사고가 낡아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제 아버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속으로 삼킨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스왈렛과 에넨체의 약혼식을 망치려는 의도였다는 걸 생각하세요, 아버지.”

캐서린의 지적에 로넌은 그제야 에일린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옳았으니까. 단순한 여인의 투기라고 넘기기엔 에일린은 선을 넘었다.

“에일린 반델이 스왈렛 공작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죠.”

에일린은 갖은 아양을 떨어 아버지인 황제의 애정을 얻어 낸 딸이었지만, 황실에 입적하지도 못한 자식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서 깊은 자신의 가문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로넌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개 사생아 주제에!!! 내 이번 일을 폐하께 고하겠다.”

“리카르도를 원하는 데다 스왈렛을 무시하는 그녀가 황제 폐하께 어떤 말들을 흘렸겠어요. 폐하가 에일린 반델을 꽤 아낀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캐서린은 흥분해 숨을 씨근거리는 로넌을 향해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지적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공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다는 듯한 태도구나.”

“네. 저는 리카르도를 선택하는 건 절대로 스왈렛에게 유리하지 않으리라 판단했어요.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루드비히 경은 황제와 에넨체 대공의 인정을 받는 훌륭한 기사예요. 저를 도와 스왈렛 공작가를 이끌 만한 인재인 데다…….”

캐서린은 아직도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루드비히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스왈렛이 돕는다면 에넨체 대공가를 삼키는 것 또한 노려봄 직한 사람이죠.”

로넌은 캐서린의 야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가 아는 캐서린답지 않은 말이었으니까.

“……정말 네가 혼자서 한 생각이 맞는 거냐?”

캐서린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어떤 경험은 사람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고 생각하면서.

***

‘생각보다 아버지를 쉽게 설득했어.’

눈앞에 펼쳐 놓은 체크리스트를 훑은 캐서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종이의 여백을 매만졌다.

‘이제 남은 건…… 리카르도와 에일린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뿐이네.’

캐서린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지른 후안무치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종이를 쥔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루드비히를 이용해 에넨체 대공가를 삼키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캐서린은 그들을 나락 끝까지 떠밀어 버리고 싶었으니까.

“밀드레드.”

“네, 아가씨.”

캐서린의 명령에 곧잘 입을 삐죽이던 시절은 죄 잊어버렸는지, 밀드레드는 그녀의 부름에 말 잘 듣는 개처럼 허겁지겁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근 시일 내에 에넨체 대공가를 방문해야겠어. 편지를 보내 주렴.”

“네! 지금 보내고 오겠습니다!”

뻣뻣하기로 유명했던 그녀의 목이 저토록 고분고분해질 것이라 누가 감히 예상했을까. 재빨리 방을 빠져나가는 밀드레드의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벨리나가 동그랗게 입을 말았다.

“아가씨, 도대체 밀드레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그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줬을 뿐이야.”

밀드레드는 노예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가문인 벤지에는 스왈렛의 기수 가문 중 하나였다. 벤지에의 사람들은 스왈렛의 주인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했고, 그 대가로 스왈렛의 보호를 받는다.

‘에일린이 밀드레드에게 억만금을 가져다준다 해도 그 종속관계에서는 벗어날 수 없지.’

심지어 에일린 반델은 캐서린 스왈렛에 비하면 부유하지조차 못했다. 벨벳 소파에서 일어난 캐서린은 뚜왈렛 룸에 준비된 화려한 드레스들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었지.’

캐서린은 자신의 몸을 흘깃하며 노골적으로 달아오르던 리카르도의 더러운 눈빛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늘 소녀처럼 입고 다니는 에일린을 좋아하기에 청순하고 귀여운 드레스가 취향인 줄 알았는데, 정작 리카르도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노출이 상당했던 캐서린의 드레스였다.

‘예전의 나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디자인이지만…….’

뚜왈렛 룸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 놓기는 했지만, 캐서린은 본디 수수하고 정숙한 옷차림을 즐겨 입는 사람이었다. 원체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터라 걸친 옷까지 요란해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검은 새틴 드레스를 집어 든 채 거울 앞으로 나섰다.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드레스가 백지장에 튄 잉크처럼 눈에 띈다. 구불구불 길게 흘러내리는 그녀의 붉은 머리와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찢어 볼까.”

약혼식에서 입었던 붉은 드레스와 달리 새틴 드레스는 목을 덮는 디자인이었다. 리카르도의 시선을 끌려면 조금 더 과감한 편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캐서린은 가위를 집어 든 채 드레스의 밑단을 들어 올렸다.

지익. 직.

“아.”

시원하게 드레스의 옆 라인을 가르던 가위의 뾰족한 날이 캐서린의 손가락 끝을 푹 찌르고 말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감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 허공에 손을 툭툭 털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캐서린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기척도 없이 언제 들어온 걸까. 그녀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휙 돌아간 몸이 단단한 품에 안겼다.

“다치셨으면 치료를 하셔야죠.”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적당히 붉은 입술 사이로 쏙 들어간 제 하얀 손가락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다시 한번 생각하건대, 그는 한없이 정중한 표정과 달리 행동은 무척 막무가내인 남자였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루드비히의 과한 대처에 캐서린은 뻘쭘하게 발가락을 오므렸다. 간단히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침실에서 나온 터라 그녀는 침의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피가 이렇게나 납니다.”

‘이렇게나’라니. 겨우 피 몇 방울이었다. 캐서린은 종종 북부의 영지전에 불려 나가던 루드비히의 부상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 배에는 커다란 칼자국이 생겨도 무감했던 사람이 겨우 손가락 끝이 가위에 찔렸다고 이 난리인가, 싶어서.

“……고마워요.”

‘기사라서 그런가. 주머니에서 붕대가 다 나오네.’

캐서린은 제 손가락에 두껍게 둘려진 붕대를 발견하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의 솜씨가 스왈렛의 주치의보다 낫네요.”

명백히 비꼬는 말이었다. 루드비히는 다른 손가락을 세 개쯤 합쳐 놓은 크기가 되어 버린 그녀의 검지를 짧게 흘깃한 다음 민망한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이 워낙 가느셔서 그런 겁니다.”

그의 되도 않는 변명에 피식 웃은 캐서린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잘 왔어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캐서린의 말에 루드비히는 로넌 스왈렛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렸다. 언뜻 캐서린과 닮은 듯한 외양이지만, 그와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경을 받아 주실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경의 명성이 뛰어난 점이 한몫했던 것 같아요.”

루드비히는 사생아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눈여겨볼 만큼 뛰어난 기사였다. 거듭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온 영웅이기까지 한 루드비히였으니 로넌 스왈렛도 그를 함부로 괄시할 수 없었으리라.

“아버지가 경을 스왈렛 공작가에 받아 주기만 한다면, 저는 조금이라도 빨리 경을 공작위에 올려 주고 싶어요.”

스왈렛의 권력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에넨체를 노리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캐서린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로넌 스왈렛은 이즘부터 큰 지병을 앓아 활발한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과거에는 방계의 후계자에게 공작가의 책무를 대부분 맡겼지만, 내가 루드비히와 결혼하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캐서린의 속셈을 모르는 루드비히는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다 말문을 열었다.

“제가 로넌 스왈렛 공작을 죽여 주길 바라십니까?”

“……네?”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거침없는 말에 당황해 입술만 달싹였다.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 가족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지만 당장 죽여 없앨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를 위해 죽여 주겠다니.’

마치 캐서린을 위해 저지르지 못할 일은 없다는 듯한 기색이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이 없는 사람처럼 단정한 얼굴의 루드비히를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그렇게나 공작위를 빨리 손에 쥐고 싶어 하는지 몰랐네요.”

“당신이 그걸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루드비히의 말은 캐서린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 정확했으나 그녀는 그가 자신을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멀뚱멀뚱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루드비히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무슨 용건이 있나요? 뚜왈렛 룸에 다 찾아오고.”

“보고 싶어서.”

“음?”

루드비히의 나지막한 대답에 캐서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커다란 그녀의 눈이 움직일 때마다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그는 그녀의 속눈썹 위에 고이는 찬란한 햇볕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아!”

잠시 고민하는 눈치던 캐서린이 손뼉을 치며 루드비히와 눈을 마주한다. 제 나름의 용기를 낸 그는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갑작스레 약혼 상대를 경으로 바꿨으니, 경 말대로 사랑에 눈이 먼 척이라도 해야 되겠네요.”

루드비히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지만, 캐서린은 고개를 주억거리느라 그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는 생각에 옅은 미소를 띤 그녀는 루드비히의 붕대가 감긴 손가락으로 자신이 직접 수선한 드레스를 가리켰다.

“이 드레스, 어때요? 에넨체 대공가를 방문할 때 입고 갈 생각인데.”

“에넨체 대공가는 왜 방문하시는 겁니까?”

“리카르도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안 예쁩니다. 전혀.”

캐서린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루드비히의 뒤늦은 대답에 의아한 눈을 치켜떴다. 얌전한 루드비히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게 의외였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반문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그는 먼저 방을 나서 버렸다.

***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치졸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리키며 아름답지 않다고 우겨 봤자 본연의 아름다움이 꺾이는 것은 아닐진대. 게다가 드레스의 주인이 캐서린이었다. 그녀는 무엇을 걸치든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었고, 아무것도 입지 않을 때조차 눈이 멀 것처럼 눈부셨다.

‘분명 아름다우시겠지.’

루드비히는 새까만 새틴 드레스를 걸친 캐서린의 모습을 상상하다 이를 부득 갈았다. 리카르도의 더러운 시선이 그녀의 흰 여체에 닿을 생각을 하니 제 배다른 형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어졌으니까.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자신만 보고 싶었다. 그 누구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불쑥 찾아든 생각에 루드비히는 스스로의 옹졸함에 놀라 창가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젠장.”

그는 값비싼 대리석이 반죽처럼 으스러지고 나서야 깜짝 놀라 창가에서 손을 뗐다. 가루가 되어 파스스 흩날리는 난간을 내려다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단정하지 못한 어투에 기물 파손까지.

‘당장에라도 다른 남자로 약혼 상대를 갈아치우겠다 하셔도 할 말이 없겠군.’

루드비히는 꿈결 같았던 요 며칠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더는 실수할 수 없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일생일대의 기회였으니까.

루드비히는 캐서린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만큼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그에게는 망막에 각인된 듯 선연한 추억이었다.

“더러운 사생아 새끼.”

칵, 퉤!

리카르도를 위시한 무리가 어린 루드비히를 상대로 무자비한 구타를 할 무렵이었다. 타고나길 뛰어난 기사였지만, 검을 제대로 다루기도 전인 데다 리카르도는 루드비히를 상대할 때에는 꼭 제 추종자 서너 명을 거느리고 왔었다.

“에넨체에 네 자리는 없어, 네 주제를 알라고!!!”

검의 자질을 인정받아 에넨체 대공이 선심 쓰듯 그에게 종기사 자리를 내준 날이었다. 허드렛일이나 도맡아 하는 일꾼으로 부려먹겠다는 심보와 다름이 없었는데도 리카르도는 루드비히에게 ‘에넨체’의 자리가 주어진 게 불만이었던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온 리카르도의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루드비히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그의 폭행을 인내했다.

“안 되겠어. 이 새끼 손뼈라도 부숴 버리자.”

리카르도는 아프지 않을 리 없을 텐데도 굴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루드비히가 불만이었다. 자신보다 북부에 어울리는 체형을 타고 태어난 그가 죽도록 싫었다. 그가 자신보다 인정받는 기사가 되는 것 또한 참을 수 없었다.

“돌을 가져와.”

리카르도의 명령에 소년 기사들은 양옆에서 루드비히의 팔다리를 찍어 눌렀다. 진흙탕에 처박히고 나서야 루드비히는 고개를 번쩍 들어 제 배다른 형을 노려보았다.

“왜. 이제 와서 내가 무섭나 보지?”

루드비히가 두려워하는 것은 리카르도가 아니었다. 검을 들 수조차 없는 몸이 되어 무용해지는 것. 쓸모라곤 하나도 없는, 리카르도 같은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휘익!

리카르도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돌을 든 손을 크게 휘둘렀다. 루드비히의 손을 정확히 노리는 몸짓이었다. 깔끔했던 정복이 넝마가 되고,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아도 무심한 눈으로 일관하던 소년의 눈이 그제야 크게 뜨였다.

“악!”

그러나 뒤를 이어 들려온 비명은 루드비히의 것이 아니었다. 질끈 눈을 감았던 루드비히는 옆으로 고꾸라져 끙끙 앓는 리카르도를 돌아보았다.

“공자, 지금 한심하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요?”

결 좋은 붉은 머리칼을 깔끔하게 위로 묶은 소녀는 새초롬히 눈을 치켜뜨며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리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무리를 지어 한 사람을 괴롭히다니. 무가로서 명망이 드높은 에넨체의 성이 아까운 짓이군요.”

아이치곤 또박또박한 캐서린의 목소리는 어안이 벙벙한 루드비히의 귓속에 박혀 들었다. 그보다도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어찌나 고고한지, 그녀보다 배는 큰 소년 기사들도 한순간에 기가 죽어 리카르도의 곁에서 물러났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밀어뜨리다니!”

넘어진 리카르도만이 악에 받쳐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사내아이가 버럭 화를 내면 겁을 집어먹을 만도 했지만, 캐서린은 그가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공자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길래 말려 준 것뿐이에요. 구태여 대공 전하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친히 알려 드릴까요?”

캐서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공의 이름에 리카르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캐서린은 대련을 핑계로 마구 팰 수도 없었는데다 무려 스왈렛의 딸이었다. 에넨체의 방계에 불과한 소년 기사들은 진즉 뒤로 물러난 후인지라 리카르도는 별수 없이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괜찮나요?”

캐서린은 엎어진 자세 그대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루드비히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도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담담했던 소년은 그제야 얼굴을 붉혔다.

하얗고, 눈부시고, 깨끗하다 못해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소녀에 비해 진흙탕을 구른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으니까.

“네, 괜찮습니다.”

루드비히의 대답에도 캐서린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흙이 잔뜩 묻은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섬섬옥수에 먼지가 붙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캐서린의 접촉에 얼어붙은 그는 감히 소녀의 손길을 피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벌써 종기사로 임명되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루드비히의 푸른 눈을 마주한 캐서린이 느릿느릿 눈을 꿈뻑였다.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 그녀의 얼굴이 귀여워 그는 저도 모르게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대단하네요. 경이 지켜 줄 레이디는 든든하겠어요.”

캐서린은 대공과 리카르도를 제외하면 루드비히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준 귀족이었다. 그녀의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지만. 루드비히는 그 순간 다짐했다.

자신이 모실 레이디는 캐서린 스왈렛뿐이라고.

그렇게 그는 캐서린의 기사가 되었다. 그녀의 곁에 서진 못하겠지만, 어느 순간에든 그녀를 지키겠다는 각오로.

그런 캐서린과 리카르도의 약혼이 정해졌다는 소식에 그가 얼마나 애태웠던가.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리카르도는 쓰레기에 비유해도 모자랄 인간말종이었다.

‘그러니 에일린 반델과의 관계를 눈치채신 거겠지.’

캐서린은 무심했으나 아둔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리카르도는 스왈렛과 에넨체의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에도 에일린과의 만남을 멈추지 않을 만큼 도덕성이라고는 개나 준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가 만나는 여자가 에일린뿐이던가. 그는 여성을 자신의 성욕을 풀 도구 그 이상으로 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사창가에서 시비가 붙은 그가 혹여나 에넨체에 불명예를 가져올까 이리저리 불려 다닌 사람이 루드비히 본인인지라, 그는 제 배다른 형제의 지독하게 비뚤어진 성욕을 잘 알고 있었다.

리카르도와 관계를 맺다 맞아 죽은 코르티잔까지 있었으니, 루드비히는 어떻게 해서든 캐서린과 리카르도의 결혼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사생아에 불과한 자신이 대공의 미움을 산다면 기사 작위까지 박탈당해 평생을 비루하게 살아야 할 테지만, 그 정도는 그녀를 위해 포기할 수 있었다.

루드비히는 캐서린을 사랑했다. 그가 그녀에게 이 마음을 감히 사랑으로 포장할 수만 있다면.

‘리카르도와의 약혼을 접으신 건 다행이지만, 그 대신 나를 고르실 줄이야…….’

기대도, 아니,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루드비히는 캐서린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그녀를 원했지만, 단 한 번도 그녀와 자신의 미래를 꿈꿔 본 적이 없었다. 죽어도 닿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긴장되어 벌벌 떨리는 손발 끝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캐서린과의 약혼식 전날 밤을 떠올린 그는 화끈한 뺨을 가리기 위해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마디가 두드러진 흰 손을 제외한 모든 신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훅 치솟는 바지 밑단을 가리기 위해 복도에 바짝 붙었다.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제가, 당신을 약탈한 이 밤을.”

그에게는 망막에 각인된 듯 선명한 밤이었다. 눈을 감아도, 감지 않아도 호수 위 잔상처럼 선연히 떠올랐다. 그 밤을 캐서린과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마음과 세상 모두에게 공고히 알리고 싶은 모순된 욕구가 동시에 고개를 바짝 세웠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가지고 싶다. 뼈째로 씹어 삼켜도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갈망이었다.

루드비히는 캐서린이 절대로 알지 못할 제 깊은 소유욕에 꿀꺽 침을 삼켰다. 캐서린은 자신만의 목적으로 그를 선택한 듯싶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

대공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캐서린은 해거름이 지는 저녁에 에넨체를 방문했다. 새하얀 백조가 우아하게 인각된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모습에 에넨체의 사용인들이 예의도 잊고 턱을 벌렸다. 몸의 곡선이 여실히 드러나는 새까만 새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달콤한 죽음을 선사해 줄 천사 같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마차 앞에서 대기 중인 리카르도를 발견하고 싱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은 무슨. 대공저에는 무슨 일이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날카로운 리카르도의 물음에 캐서린은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날 보러 왔다고?”

그런 그녀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리카르도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냉담하기만 했던 약혼식 날과 달리 캐서린의 태도는 온화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루드비히와 관련된 일로 대공저를 방문했으리라 예상하고 바짝 털을 세웠던 리카르도는 흠, 헛기침을 한 뒤 아직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에스코트하겠소.”

“고마워요.”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리카르도를 지나친 그녀가 에넨체 대공저가 자신의 집인 것처럼 자연스레 그를 앞서나갔다.

“…….”

리카르도는 제 앞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 캐서린의 뒷모습에 가느스름히 눈을 떴다. 평소 달라붙는 드레스는 죽어도 입지 않더니, 루드비히와 약혼한 이후로 그녀의 취향이 완전히 뒤바뀐 모양이었다. 버드나무처럼 낭창한 캐서린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리카르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루드비히에게 빼앗기기에는 아까운 여자야.’

캐서린을 가진 적도 없었건만, 리카르도는 루드비히에게 제 여자를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모욕감에 빠져들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상냥하게 웃고 있는 캐서린을 별채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조용한 별채가 나으니까.”

리카르도는 괜한 변명을 덧붙이며 복도를 청소하는 하녀 한 명이 전부인 고즈넉한 건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구나.’

사람이 없는 별채에 발을 디디면서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공비로 산 세월이 칠 년인지라, 별채조차 익숙했으니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리카르도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 우스울 뿐.

대공저의 서쪽에 위치한 별채는 별다른 쓰임새가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이었으니, 대공저를 찾은 손님을 별채로 안내하는 법은 없었다.

‘리카르도가 사람들을 피하는 이유라면 뻔하지.’

캐서린은 리카르도를 향하려는 경멸의 시선을 숨기기 위해 애써 눈을 내리깔았다. 촘촘히 속눈썹이 내려앉은 그녀의 우아한 눈매를 흘긋한 리카르도가 비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너무 부끄러워 마시오.”

캐서린이 제 목적을 눈치채고 부끄럼을 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입 닥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캐서린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안내하는 대로 금박 장식이 화려한 소파 위에 앉았다. 권하지도 않았는데 냉큼 그녀의 옆자리에 착석한 리카르도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이오?”

“……사과를, 하고 싶어서요.”

캐서린은 그의 손길을 피한 다음,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흡족한 듯, 리카르도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무슨 사과?”

“어쨌든 내 멋대로 약혼 상대를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당신이 당황했을 거라 생각해요.”

캐서린의 말에 그는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며 입을 열었다.

“당황한 건 사실이지. 사과해 줘서 고맙소.”

잘 교육받은 신사처럼 자상한 목소리였다. 꿀이 녹아 물든 것처럼 화사한 리카르도의 금발이 그가 상체를 기울이는 각도에 따라 부스스 흩어졌다.

“오늘도 당신은 정말 아름답군.”

캐서린의 귀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서 리카르도는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웃으니 더 아름다운 것 같소. 평소에도 이렇게 웃고 있으면 얼마나 보기 좋겠소. 자고로 여자는 상냥해야 하는 법이지.”

그는 입만 열면 고리타분한 말이 튀어나와 주둥이를 꿰매 주고 싶은 인간이었다. 캐서린은 부들부들 떨려 오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며 굳어 가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맞아요. 당신은 상냥한 여자를 좋아하더군요. 제가 당신과의 약혼을 파기한 이유이기도 하죠. 전 절대 에일린 반델처럼 상냥한 여자는 될 수 없을 테니까.”

싱긋 웃으며 농담처럼 내뱉는 캐서린의 가시 돋친 말에 리카르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뭐라고?”

“리카르도, 당신은 에일린 반델을 사랑하잖아요.”

하녀가 내온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캐서린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약혼 상대를 바꿀 수밖에 없었어요.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삼고 싶진 않았으니까.”

“헛소리를 하는군.”

당황했던 것도 잠시, 리카르도는 캐서린이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질투도 정도껏 해야지.”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군요.”

“에일린은 스무 살의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일 뿐이오.”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뻔뻔한 부정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지난 칠 년간, 수없이 겪었으니까.

“증거가 있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증거 따위가 있을 리 없소!”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리카르도와 에일린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관계를 숨기는 데 도가 튼 인간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자신이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리카르도조차 흠칫할 만큼, 캐서린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신도, 에일린도 부정하지 못할 증거가 있으니 내 말 그만 끊어요.”

리카르도의 반박을 일축하는 캐서린의 냉정한 말에 리카르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캐서린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과 에일린의 관계를 대공 전하께 고하지 않는 이유는, 리카르도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왜?”

캐서린이 자신을 협박하리라고 생각했던 리카르도는 뜻밖의 말에 주춤하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입장에서 리카르도와 에일린의 관계를 눈감아 줄 이유가 하등 없었으니까.

“글쎄요. 왜일까요?”

리카르도의 물음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캐서린은 소파에 얹어 놓았던 손을 움직여 그의 손등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별것 아닌 접촉이었지만, 캐서린이 먼저 손을 내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리카르도의 몸이 바짝 굳었다.

“잘 생각해 봐요, 리카르도.”

그녀는 싱긋 웃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미리 찢어 놓은 드레스 밑단이 벌어지며 탐스러운 허벅지가 드러났다. 리카르도는 시각적인 자극에 한없이 약한 남자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을 울렸다. 캐서린은 부러 듣지 못한 체, 그가 갑자기 왜 긴장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리카르도?”

“당신 옷이 찢어진 것 같소.”

“어머.”

값비싼 새틴 드레스를 가위로 난도질을 한 장본인이었으면서 캐서린은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녀는 드러난 다리가 부끄럽다는 듯 양손으로 허벅지를 가렸지만, 작은 두 손은 드러난 신체를 가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혹시 갈아입을 드레스를 구해 줄 수 있을까요?”

“흠. 하녀를 불러 주겠소.”

캐서린의 물음에 리카르도가 테이블 위 종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그가 종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아 매혹적인 눈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뇨, 이런 단정치 못한 모양새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게 부끄러워서요.”

“허. 내게는 보여 주지 않았소?”

캐서린의 변명에 리카르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지만, 그녀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손등을 무의식인 양 매만졌다.

“당신은 리카르도잖아요. 한때는 약혼이 예정되어 있던 친밀한 관계의 사람인데.”

“매몰차게 나를 밀어낼 때는 언제고…….”

“저도 질투라는 걸 한답니다.”

캐서린의 애교 섞인 말에 리카르도는 비죽 웃었다. 그녀가 평소와 매우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을 의심해 볼 만도 했건만, 그는 그저 들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기다려 보시오. 옷을 구해 올 테니.”

“고마워요.”

병신.

캐서린은 시정잡배나 쓸 법한 욕설을 속으로 지껄이며 헐레벌떡 응접실을 벗어나는 리카르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가 멍청하고 아랫도리에 조종당하는 부류의 남자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다.

‘밀드레드를 시켜 에일린에게 말을 잘 흘려 놨으니, 분명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겠지.’

캐서린은 느긋하게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늘 그녀가 리카르도를 만나기 위해 에넨체를 방문할 계획이라는 것을 에일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리카르도는 영상구로 서로의 일상까지 공유하는 친오누이 같은 사이예요. 그러니 오해는 말아 줘요.”

아내인 캐서린보다 자신이 리카르도와 더 친밀한 사이임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에일린은 리카르도의 집무실 풍경이 비치는 아티팩트를 슬쩍 보여 주곤 했었다. 그들이 내연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진위를 밝히기 위해 찾아갔을 때, 에일린은 되레 캐서린에게 화를 냈었다.

“머릿속에 든 게 그런 것밖에 없으니 천박하게 우리 사이를 오해하는 거죠! 리카르도와 나는 순수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구요!”

‘벌거벗은 채로 한 침대에 누워 있었으면서, 참 순수하기도 하지.’

과거를 회상한 캐서린은 나직한 헛웃음을 흘리며 마법에 감응하는 아티팩트 반지를 매만졌다. 웅웅 울리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이 공간에 캐서린의 반지를 제외한 또 다른 아티팩트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계속 지켜보렴.’

리카르도가 어떤 수준의 남자인지, 이제는 에일린이 깨달을 차례였다.

“자, 여기. 옷을 가져왔소.”

“고마워요.”

“그대에겐 조금 작을 것 같지만 한번 입어 보시오. 내가 마땅한 옷을 찾지 못해서…….”

리카르도는 멋쩍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저 혼자 쓰는 별채임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룸을 찾는 데 한참이나 걸린 것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네. 입어 볼게요.”

캐서린은 고맙다는 듯 생긋 웃은 다음 리카르도가 건넨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옷장 한 번 제 손으로 열어 본 적 없이 곱게 컸을 리카르도가 캐서린을 위해 들고 온 드레스는 무려 에일린의 것이었다. 그는 캐서린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듯싶었지만, 캐서린은 하얀 쉬폰 드레스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드레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넨체 대공에게는 딸이 없으니, 내게 빌려줄 만한 드레스는 에일린의 것뿐이겠지.’

얼마나 대공저를 자주 드나들면 에일린의 옷이 이곳에 다 있는 걸까.

기가 막혔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되레 잘되었다 싶었다. 자신의 옷을 캐서린에게 입혀 주는 리카르도의 모습을 목격한다면 에일린은 무슨 얼굴을 할까.

“아, 마침 파티션이 있네요.”

캐서린은 응접실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파티션을 가리켰다. 드레스룸까지 걸어가기 귀찮았는데 잘되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는 당황한 리카르도를 보지 못한 체 파티션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서 갈아입을 생각이오?”

“네. 훔쳐보시면 안 돼요.”

자신을 놀리는 듯한 캐서린의 쾌활한 목소리에 리카르도는 웃음을 터뜨렸다. 캐서린 스왈렛이 저토록 유쾌한 여자였던가.

‘그동안 내가 너무 캐서린에 대해 무지했었군.’

스왈렛과 에넨체의 약혼은 이미 오래전에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리카르도에게 캐서린은 늘 손안에 들어온 여자였다. 이미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혼자만의 철칙에 따라, 그는 늘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저런 여자를 놓치다니.’

에일린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리카르도는 반투명한 파티션 너머로 비치는 캐서린의 실루엣을 훔쳐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여성스러운 곡선이 신이 빚은 조각처럼 매끄러웠다.

사락, 사라락.

캐서린은 리카르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제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부드러운 새틴 드레스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파티션 너머의 그녀가 완전한 나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리카르도는 불쑥 고개를 치켜든 제 아랫도리를 매만졌다.

캐서린의 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숙여 리카르도가 가져온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상체를 숙인 탓에 봉긋한 엉덩이가 파티션을 뚫고 나올 것처럼 솟아오른다. 깨물면 즙이라도 흐를 것처럼 탐스러운 그림자에 리카르도는 산책 나온 개처럼 숨을 헉헉거리다 바지춤에 손을 얹었다.

‘그냥 지금 안아 버리면 루드비히에게 빼앗길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그가 그런 개망나니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할 즈음.

“리카르도.”

거의 옷을 다 입은 캐서린이 수줍게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오.”

“뒷부분의 단추가 안 잠기는데, 혹시 도와줄 수 있나요?”

캐서린이 나긋한 목소리로 하는 부탁에 리카르도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이오.”

파티션을 쓰러뜨릴 것처럼 급박하게 들어온 리카르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턱을 쩍 벌렸다. 상아로 빚은 듯 우아하게 빛나는 피부, 고운 목선과 동그란 어깨, 물방울이 또르르 타고 흐를 것만 같이 움푹 파인 등의 선을 목격한 그의 하체가 터질 것처럼 발딱 선다.

그런 리카르도의 음욕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지만, 캐서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았다.

“단추만 잠가 주면 돼요. 가슴 부분이 조금 작아서, 혼자서는 잠글 수가 없네요.”

리카르도는 한눈에 봐도 에일린의 것보다 두 배는 큰 것 같은 그녀의 가슴을 끌어안고 싶었다. 결국 제 욕정을 참지 못한 그는 단추를 채우다 말고 캐서린의 몸을 빙글 돌려 벽으로 밀어붙였다.

“……캐서린.”

루드비히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지 못하진 않았지만, 캐서린은 부러 놀란 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큰 눈을 얌전히 깜빡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리카르도가 느끼할 정도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루드비히와의 약혼을 취소하시오. 아버지는 내가 설득할 테니, 그대는 스왈렛 공작만 설득하면 되오.”

“네?”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말에 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을 주먹 안으로 숨겨 넣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묻는 캐서린을 향해 리카르도는 절박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오. 당신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미어지는군.”

“리카르도, 이러지 말아요.”

캐서린은 리카르도가 무대에 오른 연극 배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비웃음을 참았다. 그녀가 입술을 꼭 깨무는 행동을 안타까움으로 해석한 리카르도가 절절한 목소리로 울먹이듯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오. 내가 착각했던 것 같소. 내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에일린 반델이 아니라 당신이오.”

“……그 말은 에일린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쾌감으로 덜덜 떨려 오는 캐서린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감격이라도 했다고 생각한 건지, 리카르도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순한 호기심과 연민이었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여자는 당신이오. 그걸 지금 당신을 보고 깨달았소.”

도대체 뭘 보고 깨달았다는 걸까. 자신의 매끈한 등?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 되어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미 혼자만의 감정에 홀딱 빠진 리카르도는 그녀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울먹였다.

“캐서린, 나와 일생을 함께해 주시오.”

“진심인가요?”

“진심이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재 한 줌의 가치도 없는 진심이었다. 캐서린은 무감한 시선으로 잘 빚은 도자기 인형 같은 리카르도의 예쁜 얼굴을 흘깃하다 입술을 움직였다.

“에일린 반델을 사랑하지 않는다구요.”

“그래.”

리카르도의 단호한 대답에 캐서린은 에일린이 사용하는 영상 아티팩트가 부디 음성까지 함께 들을 수 있는 최상품이기를 바랐다. 그녀를 설득하고 싶은 욕구에 정신이 나간 듯한 리카르도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당신은 그딴 여자와는 달라. 에일린은 미성숙한 어린아이일 뿐이오. 그대는…… 무르익은 과실과 같지. 지금 당장 그대를 삼키고 싶어 미칠 것 같소.”

리카르도가 벽에 기댄 캐서린을 향해 얼굴을 숙였다. 캐서린은 와락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듯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안 돼요.”

“어째서?”

캐서린의 거부에 리카르도는 하늘이라도 무너졌다는 듯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에일린을 버리겠다고 내 지금 약조하지 않았소?”

마치 자신이 에일린 대신 그녀를 선택한 것이 특혜라도 된다는 마냥.

캐서린은 리카르도의 뻔뻔함에 혀를 차고 싶었지만,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요.”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단순히 리카르도가 에일린을 버리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말만 이러는 게 분명하고.’

리카르도는 순간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달콤한 말이라도 입에 담을 수 있는 부류의 남자였다.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결실이 더 아름다운 법이잖아요.”

캐서린이 느긋하게 덧붙인 말에 리카르도는 울먹이면서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쾅!

파스슥.

에일린이 바닥에 집어 던진 영상구가 깨지며 산산조각 났다.

“꺄아악!”

아무 죄도 없는 하녀의 발목에 튄 파편 덕에 바닥으로 피가 낭자했지만, 에일린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하녀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미친놈!”

성욕이 대단한 데다 엉덩이까지 가벼운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쉽게 캐서린의 유혹에 넘어갈 줄은 몰랐다.

“사창가 드나드는 것도 전부 넘어가 줬더니, 이 빌어먹을 리카르도 에넨체!”

영상구로도 캐서린이 노골적으로 수작을 부리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넘어간다는 말인가. 에일린은 어이가 없어 부들부들 떨려 오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영상구와 달리 단단한 원목인지라 손끝이 저렸지만, 그녀는 제 고통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내게 대공비의 자리를 약조했으면서!’

에일린 반델, 그녀는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권력과 그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한 작위를 원했다.

그녀는 반델 제국 황제의 딸이었지만, 황녀의 지위는 얻지 못한 사생아였다. 반델이라는 성도 황제가 그녀의 체면을 위해 대외적으로 붙여 준 성일 뿐, 진정한 황가의 성인 ‘반데리온’은 이어받지 못한.

‘그래서 그 망나니 대공자를 선택한 건데!’

그녀가 리카르도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배다른 오라버니인 황자를 유혹할 수는 없었고, 황가 다음으로 권력이 공고한 가문이 에넨체 대공가였으니까. 리카르도는 그런 에넨체의 대공 자리가 약속된 후계자였다.

‘그래, 내가 어리석게도 루드비히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

루드비히 위그노아는 사생아에 불과했지만 검술 실력 하나로 황제가 벌써 눈독을 들이고 있을 만큼 대단한 기사였다. 무가인 에넨체에서 검술은 퍽 중요하게 여겨지는 능력치였다.

헌칠한 키, 단정하지만 수려한 외모, 왜소한 리카르도와 달리 떡 벌어진 어깨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소유한 남자를 여지껏 왜 없는 사람으로 여겼던 걸까.

‘결국 그 남자도 사생아이기 때문이지, 뭐.’

개인이 잘나면 뭐하는가. 결국 혈통이 가장 중요한 나라가 반델 제국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이 루드비히를 선택하면, 리카르도의 대공 자리가 위험할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리카르도는 작위도 그 무엇도 없는 난봉꾼이 될 뿐이었다.

‘그런 남자는 줘도 안 가져.’

게다가 그런 주제에, 캐서린에게 넘어가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다니!

‘이제 어떻게 하지?’

에일린은 입술을 꾹 깨물며 제 앞의 장애물을 없애 버릴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루드비히 위그노아를 죽여 없애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는 암살자 대여섯 명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내였으니까. 리카르도를 없앤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스왈렛의 권력을 등에 업은 루드비히가 자연스레 대공위를 차지하게 될 테니까.

‘루드비히든 리카르도든, 대공위에 오른 남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날 선택하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에일린은 깨질 듯 아파 오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침대에 엎어졌다. 사생아인 그녀에게 주어진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갖은 아양을 떨어 얻어 낸 황제의 한 줌 부성애가 전부였다.

“아.”

그녀는 권력을 물려주지 못한 제 아비가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을 상기하곤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캐서린과 리카르도의 밀회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아티팩트가 형형한 푸른 빛을 발하며 재생되었다. 한 번 깨진 영상구를 이어붙인 탓에 군데군데 찢어지긴 했지만, 야릇한 광경을 연출하는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식별 가능했다.

루드비히는 캐서린의 매끈한 등을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는 리카르도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배다른 형제의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고개를 치켜든다.

“이딴 걸 제게 왜 보여 주는 겁니까.”

루드비히의 냉랭한 목소리에 에일린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어 눌렀다.

“……경도 진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에일린은 캐서린의 배반에 놀랐을 루드비히가 무척 걱정된다는 양 가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캐서린 스왈렛이 도덕과 정절이라곤 손톱만큼도 모르는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결혼하실 수는 없잖아요.”

에일린의 말에 루드비히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황제의 명으로 막 입궁한 참이었다. 황실 기사단장 자리를 맡으라는 지긋지긋한 회유를 또 할 줄 알았는데, 그를 맞이한 건 황제가 아닌 에일린 반델이었다.

황성에 살지도 않는 그녀가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뻔했다.

‘내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거군.’

루드비히는 에일린의 조막만 한 얼굴 위로 피상적으로 떠오른 가증스러운 표정에 잘생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든, 당신이 상관할 일은 아닙니다.”

“경은 제국의 영웅과 같은 기사예요. 비록 황녀의 이름은 얻지 못했지만, 황실의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서 경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구경만 할 수는 없어요.”

마치 캐서린이 악마라도 된다는 듯한 어투였다. 루드비히는 발끈해 에일린의 입이라도 틀어막고 싶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는 이유가 자신에 대한 불쾌감이 아닌 캐서린을 향한 분노라고 판단한 에일린은 붉어진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말을 이었다.

“경, 저는 경을 돕고 싶어요. 우리는 비슷하게 불운한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잖아요. 그 누구보다 가문과 제국을 사랑하고 위하지만,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죠.”

“사생아라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는군요.”

딱딱한 루드비히의 말에도 에일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되는 영상구를 집어 들었다.

“캐서린 스왈렛은 에넨체 대공가를 농락하고 있어요. 두 형제를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다니, 정말 끔찍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리카르도와 그녀의 약혼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의 만남을 이어 간 당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루드비히는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에일린을 직시한 채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잘못에도 순서가 있다면, 당신과 리카르도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오해가 있나 보네요. 리카르도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에넨체 대공저에서 리카르도와 뒹굴며 앙앙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수십 번이었다. 루드비히는 그녀의 부정에 기가 막혔지만, 그녀의 속셈을 파악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경, 설사 리카르도와 제가 그런 관계였다고 해도 캐서린이 당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루드비히는 더는 에일린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뚜한 얼굴로 대답도 없이 앉아 있는 그의 태도를 제멋대로 해석한 에일린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딱히 충격을 받지도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제 생각대로 캐서린과 당신은 사랑으로 결혼하는 사이가 아니었나 보네요.”

예상했다는 듯 짧게 혀를 찬 에일린은 에넨체 대공가의 비리가 적힌 서류를 꺼내 들었다.

“당신, 대공 작위를 노리고 캐서린 스왈렛과의 약혼을 받아들인 거죠?”

그녀는 두툼한 서류봉투를 가느다란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럴 필요 없도록 내가 도와줄게요.”

종이뭉치가 무기라도 된다는 듯 의기양양한 에일린의 태도에 루드비히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에넨체 대공의 약점. 대공을 확실히 경의 편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을 만한 약점에 대한 증거예요.”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귀족들의 약점을 늘 틀어쥐고 있는 편이었다. 그에게 눈물로 읍소해 얻어 낸 에넨체 대공의 약점을 루드비히의 눈앞에 살랑살랑 흔들며 에일린은 기대하듯 눈을 반짝였다.

‘리카르도 이 개자식, 감히 나를 배신해?’

에일린은 사랑은 믿지 않았지만 그의 성욕을 믿었다. 리카르도의 비뚤어진 취향을 받아 줄 만한 여자는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로 상황파악이 안 되는 남자는 나도 필요 없어.’

그녀의 뒤통수를 때린 남자를 거두느니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인 루드비히를 가지는 게 나았다. 혈통은 눈에 차지 않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그는 흠결 없이 완벽한 남자이긴 했으니까.

‘게다가 캐서린 스왈렛이 선택했다고 하니 더 탐이 난단 말이지.’

에일린은 캐서린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혈통, 대공비의 직위 그리고 남자까지. 빼앗을 수만 있다면 전부 빼앗고 싶을 정도로.

‘나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도 받지 못한 데다 사람들의 괄시를 받고 컸는데, 캐서린은 그렇지 않았잖아. 내가 캐서린의 소유를 탐내 하는 건 당연해.’

에일린은 자신의 못난 시기심을 합리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루드비히도 리카르도의 소유를 가지고 싶겠지.’

에일린은 루드비히가 캐서린의 손을 잡은 이유에 리카르도를 향한 시기심도 단단히 한몫하리라 예상했다. 그저 같은 사생아라는 이유로 루드비히가 자신과 동종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환히 웃었다.

“경도 이것저것 계산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날 찾아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후후 웃으며 서류를 챙겨 안은 에일린은 대답이 없는 루드비히를 두고 빠르게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캐서린은 화가 난듯한 루드비히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얼음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듯 차갑고 무심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늘 무감했음에도 오늘따라 유독 감정이 서려 보였다.

“경, 무슨 일 있어요?”

“루드비히.”

걱정 어린 캐서린의 물음을 루드비히가 짧게 정정한다. 말도 없이 오밤중에 자신의 침실을 찾은 그의 무례를 지적할 틈도 없이, 캐서린은 어안이 벙벙해 입을 벌렸다.

“루드비히?”

“이름으로 불러 주시기로 약조하셨습니다.”

그건 남들 앞에서 다정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나. 반박하고 싶었지만, 잔뜩 굳은 루드비히의 얼굴에서 어딘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그녀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래요, 루드비히.”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침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루드비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요?”

아직 잠에 들 만큼 깊은 밤은 아니었지만, 캐서린은 이미 잠옷 차림이었다. 그녀의 붉은 캐미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는 한숨을 푹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의 한숨과 함께 퍼지는 진한 위스키 향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취했어요?”

“네.”

취한 사람치곤 멀쩡한 얼굴로 루드비히가 냉큼 대답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는 캐서린을 달랑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루드비히!”

그가 취기에 실수를 한다고 판단한 캐서린은 그를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거대한 바위처럼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베개 솜처럼 부드러운 캐서린을 인형처럼 꼭 끌어안은 루드비히는 그녀의 머리칼에 고개를 묻고 크게 호흡했다.

“하아.”

뒷목에 닿는 더운 숨에 솜털이 삐쭉 선다. 딱히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지는 않았지만, 포옹 한 번에 잔뜩 발기한 그의 남성이 캐서린의 등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루드비히, 당신 지금 취했어요.”

“네, 압니다.”

“왜 이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그녀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던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만큼은 그대로 삼켜 버렸다. 캐서린은 바위에 짓눌린 듯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애써 몸을 돌려 루드비히와 눈을 마주했다. 바다를 얼린 듯 시린 벽안이 오늘따라 유독 촉촉하게 젖어 있다.

“무슨 걱정할 만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루드비히와 캐서린은 연인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었지만 캐서린은 그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랐다. 괜찮은 계약 상대인 것을 떠나서 그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캐서린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루드비히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는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 사이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네, 결혼하면요?”

그녀가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즐기듯 눈을 감았던 루드비히가 캐서린이 되묻는 말에 몸을 움찔했다. 쪽.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흐트러진 캐서린의 옆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이십니까?”

“음. 정부나 애인을 둘 거냐고 물어보는 거죠?”

“네.”

캐서린은 루드비히의 물음이 당혹스러웠지만 입을 다물고 곰곰이 고민을 시작했다. 그들의 결혼은 엄연히 계약이었으니 이런 사소한 조항들이 꽤나 중요했으니까.

‘만나고 싶은 여자라도 생길까 봐 걱정인 모양이네.’

루드비히는 매우 잘생긴 미남자였고, 젊은 데다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을 앞둔 상태였으니 미래가 걱정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이해해 보려던 캐서린은 문득 그의 옆을 차지할 얼굴 없는 여자를 떠올리고 예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리카르도와 에일린의 불륜과 달리, 루드비히는 정상참작이 가능한 조건을 요구할 뿐이었다. 그가 애인을 만들 수 있다면 그녀도 애인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흐응.”

죄 없는 머리카락만 베베 꼬며 대답을 망설이던 캐서린은 불쑥 고개를 치켜든 오기에 덜컥 입을 열었다.

“뭐, 당장 계획은 없지만 그러지 않을까요? 나도 젊고, 당신도 젊으니까.”

오답.

이유는 모르겠지만 캐서린의 대답이 오답인 모양이었다. 잘생긴 눈썹을 매섭게 치켜세운 루드비히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거칠게 제 아래로 밀어 넣었다.

“루드비히?”

자연스레 제 위에 올라탄 그를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본 캐서린은 어느새 풀어 헤쳐진 제 어깨끈을 붙들었다. 그럼에도 삐져나온 풍성한 흰 가슴이 우유 거품처럼 탐스러운 자태를 자랑했다. 루드비히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가,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이라도 뚝뚝 흘리고 싶어졌다.

“저로는 만족이 안 되십니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루드비히만으로는 만족이 되질 않느냐니. 만족이 되다 못해 늘 과할 정도였는데.

“…….”

당황으로 입술만 달싹이는 캐서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한숨과 함께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와중에도 그녀가 아프지 않게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지라 캐서린은 몸에 압박감을 느낄 틈도 없이 재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애인을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루드비히가 애인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뜻이었어요.”

캐서린 나름대로는 최선의 대답이자 배려였다. 루드비히를 이용해 에넨체 대공가를 삼키겠다는 건 온전히 그녀의 욕심이었으니까. 그러나 캐서린의 배려가 달갑지 않다는 듯, 루드비히는 대답 없이 휙 등을 돌렸다.

“루드비히, 정말 괜찮다니까요. 걱정 말―”

“제 걱정은 그딴 게 아닙니다.”

캐서린의 말을 단박에 끊어낸 루드비히가 순간적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늘 정중했던 그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를 더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붉은 눈시울이었다.

‘잘못 본 거겠지?’

캐서린은 자신이 착각을 했나 싶어 크게 눈을 끔뻑였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 앞으로 나섰지만, 그녀가 문가에 닿기도 전에 루드비히는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잘못 봤겠지.”

죽기 전에도, 회귀 후에도 그는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킨 호위 기사였지만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무정하리만치 감정을 잘 제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의 간결하고 짧은 대화 속에서 도무지 그가 눈물을 보일 만한 지점은 찾을 수 없었다.

‘애인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너무 좋아서 우는 건가.’

무심히 단정 지은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금 침대 위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눈에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흰색의 종이인지라 새하얀 이불 위에서 보이지 않을 법도 했건만,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허리를 숙인 캐서린은 주먹 안에 들어갈 만큼 작게 뭉쳐진 종이를 펼쳐 냈다.

“……에넨체 대공가의 비리에 대한 문서잖아.”

에일린이 에넨체 대공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다는 증거로 루드비히에게 내보인 서류의 일부분이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종이일 것이라 추측한 캐서린은 제목만으로 문서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대공비였던 시절, 선대 대공이 벌인 횡령 사건이 터진 적이 있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캐서린은 루드비히가 이 극비 문서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었나 가늠하다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에일린.”

에일린 반델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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