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름다운 세상
원작의 여주인공 아리엘은 긴 하늘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아리엘은 눈물이 많았다. 그리고 그 눈물로 보호본능을 일으켜서 정복한 이들이 황궁 안의 두 사람과 메인 남주 황태자였다.
유진은 그중 가장 먼저 아리엘에게 반한 서브 남주였다. 가장 먼저 등장했던 만큼 그는 아리엘과 가장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친분 때문에 그는 황태자의 계략에 빠져 죽는다.
나는 이 안타까운 서브 남주 유진과 가장 먼저 접촉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유진이, 우리 르페르샤 황녀 언니에게 가장 편협하고, 가장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언니의 악행에 관한 소문이 너무 파다해서이지만.’
그래도 언니와 직접적으로 일이 있던 것은 아니니, 작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급격한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진 드 볼턴. 그는 자유 기사였다. ‘자유 기사’란 가장 위대한 기사의 혈족인 맥나한 가문에 인정받은 기사를 말한다. 그 자체로 아주 강하고 존경받는 기사라는 것을 뜻했다. 유진은 그 자유 기사 중에서도 가장 강한 기사였다.
하지만 그는 제국 출신이었고, 제국 출신의 자유 기사에게는 한 가지 규제가 있었다. 평생 대륙 전역에서 제국 황실의 지원-가족에 대한 지원이라거나-을 받는 대신, 1년 이상 황녀궁 소속 기사로 복직해야 한다는 것.
지금 유진은 그 1년 의무 복직 기간에 있는 자유 기사였다. 그것도 황녀궁에 배속된. 비록 지금 자체적으로 휴식 중이지만 말이다. 즉, 내게는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원작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르페르샤 언니 특유의 싸늘한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리엘에게 빠져든 이유이기도 했다. 르페르샤 언니의 정반대 스타일인 아리엘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아리엘에게 반하기 전, 그가 좇는 목표를 알고 있었다. 훗날 황태자에게 이용당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의 목적을. 그걸 채워 준다면, 어쩌면 유진은 미련 없이 궁을 떠나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지도 모른다.
똑똑, 똑, 똑똑!
“계세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참을 걸어 도착한 이곳은 유진 드 볼턴 경의 개인실이었다.
‘소문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니까, 아무래도 소문과 다른 모습에도 가장 크게 영향 받겠지?’
그러한 계산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약간의 호감을 심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사소한 편견을 부수는 것만으로도 인상은 좋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목표를 달성하게 도와주는 것으로는 친분을 형성할 수 있게 될 지도 몰랐다.
친분이라니! 그러면 정말 좋겠다. 핡.
덜컥.
생각하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눈앞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헙!”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태어나서 처음 본 미남이 그곳에 서 있었다. 마네킹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 미남이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아.
남자는 날 보고 멈칫하더니, 이어 되게 영혼 없는 인사를 건넸다. 의아함과 귀찮음이 뒤섞인 그 반응에도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맙소사.’
하. 은발에 은회안이라더니. 그걸 그렇게 칭송했던 원작은 표현력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은빛은 더없이 찬란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화 물감으로 그린 것처럼 고상하고도 또렷한 선을 가진 남자는, 몹시도 고급스러운 생김새였다. 일견 금욕적으로 보였지만, 선홍색의 얇고 모양 좋은 입술이 그에게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카, 카사노바라고 했었지?’
나는 그 오글거리던 단어를 새삼 떠올리며, 그 단어를 겸허히 납득했다. 그리고 일단 그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볼턴 경.”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떨떠름하게 날 보는 그에게 나는 곱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보길 잘했다. 보길 잘했어. 미남은 옳구나!’
나는 못 볼 것을 본 듯 흠칫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양 소매를 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두 손을 쥐기에는 내게 양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환상적인 얼굴을 파들 구기며 질색했다.
“이, 왜 이러십니까?”
“고마워서 그러지요.”
“……예?”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미남이여.
좋아. 결정했다. 나 이 세 달 간은 덕질에 뼈를 묻으리라.
계획이되 이젠 계획이 아니게 되었다. 진심으로 나는 덕질에 열의를 불태우게 된 것이다. 유진은 알까? 그가 미모로 내 인생에 일종의 동기 부여를 했다는 것을. 미인이란,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다. 히히.
“아니, 대체 뭐가 말입니까?”
의아함, 그리고 짜증. 그런 표정조차 예술인 인간이라니. 절로 눈가가 아련해지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그저, 경이 이렇게 있어 주어서요.”
“예?”
진심이니 미친 사람 보듯 보지 말아 주세요, 미남이여.
그러나 좋은 인상을 위하여 나는 농담인 척 슬쩍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니에요. 경, 그보다 혹시, 오늘 시간이 되시나요?”
휙 바뀌는 주제에 고상한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았던 손을 자연스럽게 놓으며 말을 이었다.
“동행해 줬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아무래도 호위해 주시는 분이 계셨으면 해서요.”
오늘의 용건은 그것이었다. 나는 그와 대화하고, 되도록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작정이었다. 적어도 내가 그에게 비치는 호의가 편안하게 받아들여질 만큼은. 궁은 넓고, 구경하기 좋은 공간도 많을 테니 그런 곳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은 추억에 내가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닌가.
내 말에 유진이 조금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굳이 시간을 물으실 것 없이, 제게 명하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다소 냉랭한 말투였다. 거참, 명색이 호위 기사인데 시종일관 싫은 티를 대놓고 낸다.
‘하지만 그는 칭호를 받은 자유 기사니까.’
은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은 자유 기사. 그의 실력은 알려지기로는 소드 마스터로, 황족에게 이렇게 대해도 죽지 않을 만한 지위의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실력이 알려진 것 이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구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싫어하는 황녀에게 자연스럽게 내쳐지기 위함이라는 이유.
“물론 경에게 명령을 할 수도 있겠죠.”
나는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경. 경은 저를 싫어하잖아요.”
최대한 상냥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순간 그가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다.
“제가 명령을 하면 불쾌할 테니까.”
아, 예쁘다.
여유로워 보이던 그의 입가가 눈에 띄게 허물어져 있었다.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진심으로.”
시린 은빛 머리카락이 햇빛에 고상하게 빛났다. 흐뭇하게 그것을 감상하며, 작은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하니 이것은 명이 아니라 부탁이랍니다. 혹시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경?”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은회색 눈동자에 가득하던 무료함이 가시고 가벼운 혼란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깊어진 눈매, 날카롭고 냉랭한 민낯, 거기다 곧아진 자세로 드러난 우아한 자태까지.
츄릅.
꺅, 침 흐를 뻔했네. 나는 가까스로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가자, 간다고 해! 당신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는 거에 약한 거 다 안단 말이야! 산책하면서 친분 좀 쌓읍시다, 미남이여!
“……하.”
나를 가만히 보던 그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속내를 들킨 것처럼 혼자 찔려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그가 잠시 후 뭔가 작정한 투로 말했다.
“그 부탁도 제게 불쾌한 일이 된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혼자 다니는 수밖에요.”
그 정도로 싫은가?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때 유진이 말했다.
“저 말고 다른 호위 기사도 있습니다만?”
“전 경이 좋으니까요.”
지금은 특히나, 경의 외모가 말이에요! 과연 원작에서 극찬한 미모답네요.
“경이 아니면 안 돼요.”
살짝 시무룩하게 나간 내 말에 유진이 멈칫했다. 그의 고상한 선을 그리는 눈길이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나를 가늠하듯 보더니 이윽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전하, 방금 제가 전하를 싫어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내 멍한 답에 그가 조금 쏘는 듯 유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제가 아니면 안 된다니. 심지어 좋으시다니요. 그것 참.”
은회색 눈동자가 슬며시 휘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심장을 부여잡을 뻔했다.
“가슴 아픈 고백이로군요.”
솔직히 말해서 그는 내가 모욕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묘하게 은밀해지는 얼굴을 보니 모욕감은 무슨, 유혹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카사노바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가? 나는 그저 웃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고백에 저는 참으로 약한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겠군요.”
한 차례 느릿하게 감았다가 뜬 눈 어디에도 조금 전의 미묘한 비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냉한 은회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을 뿐. 나는 잠시라도 그 예쁜 색을 놓칠세라 그 눈을 똑바로 눈에 담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날 관찰하던 그가 슬쩍 비틀어 올린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아름다우신 황녀 전하.”
야호! 역시. 직설적인 말에 약하다니까!
흥분이 되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웃으며 답했다.
“고맙습니다, 경. 그럼 식사부터 하고, 2시간 뒤에 여기서 봐요.”
아무래도 가고 싶은 곳을 정해 와야 할 것 같은 눈치여서, 나는 그에게 조금 후에 보자고 했다.
리니랑 아린에게 물어봐야지. 아니다, 편안한 분위기라면 엠마가 더 잘 알지도!
그는 잠시 당혹스러운 기색을 비치다가 답했다.
“고맙……. 허, 아닙니다, 전하. 제가 가겠습니다.”
“무려 부탁을 들어줬는데, 제가 와야죠. 이따가 봐요.”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한 뒤, 더욱 표정이 요상해진 그를 두고 몸을 돌렸다. 그는 조금 전 내가 잡았던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조금 늦게 배웅 인사를 건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 * *
백금빛 머리칼이 나붓거리며 멀어졌다. 그것을 속 모를 눈빛으로 응시하던 유진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휙 몸을 돌렸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영 정이 가지 않는 황녀였다. 태생이 자유분방한 그와는 잘 맞지 않는 유형이었다.
‘아이릭 공작과 겨뤄 봐야 한다는 것만 아니라면 머물지 않았을 것인데.’
제국이 준다는 수많은 혜택들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오로지 그의 경지를 높여 줄 상대를 찾아 온 것일 뿐. 그 와중에 상사가 잔혹하고 차가운 르페르샤 황녀였으니, 그는 참으로 황궁이 답답했다. 얼른 그녀에게 잘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단 말이지.’
얼음조각이 날릴 것 같던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긴 백금발은 바람에 살랑이고, 작고 마른 얼굴은 알 수 없는 호의로 부드럽게 빛났다. 휘영청 휘어지던 눈매가 그렇게 고울 줄은 몰랐다. 황녀는 확실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직설적인 화법은 대체.’
은회색 눈썹이 우아하게 살짝 일그러졌다. 붉은 입술을 가르고 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싫어하잖아요, 라니.”
그러니까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의 눈이 옅은 흥미로 빛났다.
“무슨 이유로 저러는 건지는 몰라도, 장단은 한번 맞춰 주지.”
냉소적이지만 나직하게 웃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 * *
나는 사실 길치였다. 동네의 길도 간판이 바뀌면 못 알아보는 심각한 길치 말이다. 엠마는 내게 말로 두어 번 설명을 하다가 멈췄다. 그리고 리니에게 종이를 가져오게 해서, 그 위에 약도를 그려 주었다.
“고마워, 엠마.”
배시시 웃으며 그녀에게 말하자 엠마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전하, 리니와 함께 가시는 것이.”
“맞아요, 전하. 저는 길눈이 아주 밝거든요.”
“리니.”
안타까워하며 리니가 외치자 가만히 지켜보던 아린이 주의를 주었다. 잠시 웃고서, 고개를 저었다.
“볼턴 경과 가기로 했어.”
“네?”
“예?”
엠마가 멈칫했고, 리니와 아린이 외마디 비명을 냈다.
“볼턴 경이시라면. 그, 자유 기사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세 사람이 더욱 걱정이 어린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 무례한!”
“리니.”
리니가 속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끙끙거리다가 한숨을 포옥 쉬었다. 나는 그 모양이 우스워서 가만히 구경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좋아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그러니 좋은 시간이 될 거야.”
좋게 말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례한 유진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마저 좋아하고 있었고. 황태자에 비교하면 어떤 성격이든 좋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약도도 있으니 길 잃을 염려도 없지.”
“전하…….”
엠마의 매우 의심스러운 시선에 나는 조금 상처받았다. 힝. 날 못 믿는구나?
“그리고 설마 볼턴 경이 길치는 아닐 테니까.”
엠마는 단번에 안심했다. 리니가 말도 못 하고 입꼬리를 내리려고 애를 썼다. 아린이 한숨을 쉬었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요즘 양이 너무 줄었다고 슬슬 주방장이 걱정을 한다고 하는 리니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럼, 다녀올게!”
엠마가 알려 준 곳은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탁 트여 있고, 자잘한 들꽃들과 풍치 좋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공간……이라고 했다.
“그렇대요.”
약도를 보여 주며 유진에게 말하자, 그는 말없이 약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 약도. 그러니까, 시녀장이 그려 준 거라는 거군요.”
“네. 알아보기 쉽죠?”
그가 이상한 얼굴로 내게 답했다.
“예, 그런데. 여길 저와 함께 가고자 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딘가 당황한 듯도 하고 경계심이 한 꺼풀 씌워진 듯도 한 말투였다. 묘한 말투에 갸웃하며 나는 말을 골랐다.
“아까 말했듯이.”
“제가 좋아서라는, 그 둘러대는 말씀 말고 말입니다. 진짜 이유요.”
“그게 진짜 이유인데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말하자, 그가 말문이 막힌 기색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 뭐 바라는 것 전혀 없는 호감이니까요. 남녀 간의 감정도 아니고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전하.”
말 참 편하게 하네. 이런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겪어 보니 더 재밌었다. 토라진 고양이 같아.
“여기 있잖아요.”
나는 내가 그를 재밌어 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답했다.
“하아…….”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정중하게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아까는 따갑던 정오의 햇빛이 꽤 약해져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너무 강렬하지는 않은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유진을 뒤따르면서 처음으로 보는 황궁의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판타지 세상도 똑같았다. 풀도, 나무도, 꽃도. 저마다의 여림과 강인함을 고루 품고 각자의 자리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어느새 멈춘 것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는지 흔들림 없이 직시하는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늑대잖아.”
“예?”
“아니에요.”
순간 그가 고상한 털빛을 가진 늑대 같아서 툭 말이 나가고 말았다.
역시 닮았어.
여상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강렬하고, 어딘가 경계 어렸던 그의 시선이 내 입가에 잠시간 머물렀다.
신기하겠지. 이해한다, 이해해!
“와. 엠마가 정말 좋은 곳을 추천해 줬네요.”
드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며 그를 이끌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아늑한 느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늑하다라……. 그렇군요.”
마지못한 투로 돌아오는 답에 싱굿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탁 트인 곳인데 아늑한 느낌이라 신기해요. 보물섬 같네요.”
“보물섬이요?”
“감추어져 있는 외딴 섬 말이에요. 막상 들어가 보면 보배로운 것이 가득한 거. 딱 그렇지 않아요?”
엠마가 추천해 준 곳은 나무들의 가지들이 묘하게 아늑한 느낌을 자아내며 엉겨 있는 공간이었다. 분명히 나무가 빽빽하지도 않고 탁 트인 공간인데 아늑했다. 그를 끌던 손을 놓고 보슬보슬한 잔디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이쪽을 보고만 있는 유진에게 손짓했다.
“와서 앉아요.”
“정말, 뭐 하자는 건지.”
“뭐라고요?”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공간이 크지도 않아서 다 들렸다. 내가 짐짓 못 들은 척 묻자 그가 복잡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이윽고 그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멀뚱히 보고만 있자 그가 또 이상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잠깐 일어나십시오. 그 위에 그냥 앉으면 더러워지지 않습니까.”
“이미 앉았는데요.”
“바로 털면 괜찮을 겁니다, 전하.”
굳이 전하를 강조해서 부르는 모양이, 꼭 체통을 지키라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과장되게 우아한 몸짓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즉시 나를 가볍게 잡아 올린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가 앉았던 자리에 펼쳤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보고 있던 내게 되게 영혼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제 앉으십시오.”
“…….”
손수건과 그를 번갈아보다가, 나는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경악했다.
이런 식이었어? 이렇게 사람 홀리고 다녀서 그런 오글거리는 카사노바 같은 명칭이 붙은 거야?
“세상에.”
“왜 그러십니까?”
“근데 또 시큰둥해, 하, 세상에.”
“……예?”
자기가 뭘 들었는지 의심하는 표정에 나는 파하하 웃으며 말했다.
“전 역시 볼턴 경이 참 좋아요.”
그리고 빤히 보는 그에게 ‘진짠데.’라고 말하며 그의 손수건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숙녀가 된 기분이에요.”
“이미 숙녀이실 텐데요.”
무려 황녀 전하이시니, 하는 비꼬는 말만 없었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나는 아까 보는 조금 편해진 그를 가볍게 흘기며 말했다.
“인상적인 대접을 받아서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비꼬지 마세요.”
“인상적인 대접이라.”
미묘한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럼 그런 대접도 받으셨으니, 이제 저도 궁금한 것의 답을 얻을 수 있겠군요.”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제 손수건을 줄까요?”
순간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터진 웃음을 갈무리하는 모양새로 헛기침을 했다.
“손수건은, 흠, 없어도 됩니다. 저는 숙녀가 아니니까요.”
이윽고 내 옆에 우아하게 앉으며 답하는 말에는 경계심이 조금 옅어져 있었다. 가만히 웃으며 그를 보다가 편한 자세를 잡았을 때 그에게 말했다.
“제가 이번에 궁에서 사람들을 많이 내보냈거든요.”
내 뜬금없는 행동에 대한 가벼운 해명이었다. 실은 며칠 전 황녀에 대해 도가 넘는 말을 하는 이들에 대해 엠마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그녀가 허락을 구할 때 기꺼이 수락했다.
“그러셨습니까?”
“네, 다들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가라고 했어요.”
사실 나는 나가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아하.”
시큰둥한 응대였지만, 나는 그의 은회색 눈에 미약하게 도는 흥미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저도 나가겠다고 하면 보내주십니까?”
“물론이죠.”
나는 당신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아요. 내 답에 그가 한쪽 눈썹을 참 우아하게도 꿈틀거렸다. 몹시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흠, 설마 그 말을 해 주러 오셨다는 의미이십니까?”
“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많이 아쉬울 거라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제가, 좋으니까요?”
“네.”
“저는 전하가 싫은데요.”
어린애들의 문답 같은 대화였지만 확실히 그의 흥미는 자극한 것 같았다. 놀리는 듯한 말에 내가 답했다.
“알아요.”
조금은 나직하게.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서.
“나는 날 싫어하는 당신도 좋거든요.”
그가 우리 르페르샤 언니를 싫어하는 것은 그와 언니의 성격이 안 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어딘가에 매이지 않는 성격을 좋아했었다.
“이제 와서 이걸 말하는 건, 그냥 보내 주기 아쉬워서 그런 거고요.”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별건 아니에요, 경. 사람들을 많이 내보내고 나니 문득 생각이 나서.”
별다른 감정 없는 은회색 눈동자에서 경계심이 드러나지 않게 한 꺼풀 벗겨져 있었다. 유진 드 볼턴은 현재 황녀궁 소속 자유 기사이지만, 자체적으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강한 자유 기사라는 위치는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고. 원래대로라면 그는 아리엘을 위해서, 원작이 시작되고 황녀 언니가 아리엘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 그걸 저지하기 위해 복귀할 것이다.
“제가 복귀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기분을 읽기 어려운 어조로 그가 물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고,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경은 이 궁에 왜 왔죠?”
이상하게 건너뛰는 질문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착실하게 답해왔다.
“제국에는 강자가 많으니까요.”
어느 정도 에둘러 한 답이었다. 그가 만나고자 한 강자는 아이릭 공작 카인이다. 황태자는 원작에서 그와 카인의 성격 차이를 이용해서 그들 사이에 골이 깊게 만들었다. 아리엘을 이용하기도 했다. 거짓 공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둘을 싸움 붙였다.
“강자라. 그렇군요.”
승자는 없었다. 하나는 목숨을 걸고 지켜 온 명예와 팔을 잃었고, 다른 하나는 목숨을 잃었다.
“강자를 만나서 뭘 하실 건데요?”
“겨루는 거죠.”
“한쪽이 죽을 때까지?”
“이건 개싸움이 아닙니다만.”
개싸움이라.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
“복귀를 바라지 않아요. 그냥, 어디에 매이지 않은 상태의 당신을 한 번은 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나는 뒤늦게 아까의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해 줬다.
“볼 때마다 늘 답답해 보였거든요. 볼턴 경은.”
“자세히도 보셨군요.”
가만히 듣던 유진이 실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악의 없는 편안한 모습이라 나도 그냥 웃고 말았다.
“경이 만족할 만한 강자를 하루빨리 만나시길 바라요.”
그렇게 말하며 난 깔고 앉았던 손수건을 조심히 집어 들었다.
“빨아서 돌려줄게요.”
“…….”
순간 묘한 침묵이 돌았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던 유진이 돌연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아니, 전하가 빨아서, 아하핫!”
“그럼 그냥 주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크흠, 흠.”
겨우 웃음을 가라앉힌 유진이 아까와 달리 유쾌한 미소를 그리며 손을 내밀었다. 장난기가 깃든 정중한 손짓이었다.
어우, 저런 미남이 이러니까 심장이 가만히 있질 못하네!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돌아오는 길 내내 행복한 스킨십에 폭 빠져 헤롱거렸다.
그렇게 약 사흘 동안, 나는 그와 첫 동행과 비슷한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책에서는 보지 못한 나그네 길의 경험담들은 의외로 아주 재밌었다.
“아, 맞다, 볼턴 경.”
나는 많이 편해진 김에 용건을 꺼내기로 다짐했다.
이만하면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것 같아서.
“전에 말했던 강자 말인데요.”
“아, 네. 전하.”
손수건을 매번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서 돌려주는 정성에 또 웃음을 터뜨린 그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이릭 공작에 대해 들어봤어요?”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 가늠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다시 풀어진 태도로 답했다.
“이명을 들어 봤죠. 그림자 기사라고 하더군요.”
그것만 들어 봤겠나.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말이 있어서 온 것이면서.
잘 알지는 못하는 척하는 그를 보며 나는 설명했다.
“그 사람, 황족이나 황족이 인정한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에 주로 머무르거든요. 스스로 나오지 않는 이상 쉽게 보기 어려운 분이죠. 어때요?”
“뭐가 말입니까?”
모른 척 되묻는 유진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우, 귀여워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이 인간은 얼굴이 휘황찬란하다.
“겨뤄 보는 거요. 그분 정도면 볼턴 경이 황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만한…….”
말이 이어질수록 눈이 더 반짝인다.
“그런 훌륭한 상대가 아닌가 해서.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당연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픕, 하고 웃음이 터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답이 경쾌했다. 그도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이었다.
“아하하, 좋아요. 그럼 갈까요?”
“감사한 말씀이군요.”
유진이 냉큼 손을 내밀었다. 나는 또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함께 출발하기 전, 나는 언니의 네 번째 기억을 찾게 되었다.
“아, 날짜를 헷갈렸어!”
계산해 보니 오늘이 사흘째였다. 으, 그 얼굴에 홀려 있었다. 침착하게 잘 대응한 거 같았는데 침착은 무슨! 아주 확실하게 홀려 있었다.
“나오는 피가 또 늘었어.”
손에 묻은 피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쉬며 물 묻힌 수건으로 닦아 냈다. 아무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다행히 유진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2시간이 남아 있었다. 공작에게 바로 가려다가 체력이 약한 나 때문에 여유를 둔 것이다. 손을 닦아 내고 갈 준비를 하면서 되찾은 기억을 가만히 반추했다.
네 살의 기억은 역시나 조용했다. 멍하니 창밖의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언니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어린 언니는 워낙에 말이 없어서, 단편적으로 들어오는 기억 네 번 동안 나는 언니의 소리를 별로 듣지 못했다.
“너무 아쉽다.”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몸을 묻었다. 준비도 마쳤으니 가기 전까지 조금만 자야겠다. 겨우 늦지 않게 깬 뒤 급하게 궁을 나섰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유진을 만났다.
“유진? 여긴 궁 주변이잖아요.”
“서 있기 심심해서 걸어 본 겁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 웃기는 변명을 끝까지 들어준 뒤 그의 얼굴을 보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러시구나.”
“윽.”
확실히 생각보다 빠르게 친해졌다. 아직 공작을 소개해 주지도 않았는데. 잠시 민망한 얼굴을 하던 유진은 나를 가만히 보면서 점차 입꼬리를 내렸다.
아, 아마 창백할 텐데.
“전하.”
심각해진 얼굴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말했다.
“체력이 너무 약해서 그래요.”
내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이내 “아, 그러십니까.” 하며 비웃듯이 웃었다. 매끄럽게 웃는 모양이 안 믿는 느낌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웃는 모양 자체가 너무나 눈부셨던 것이다. 나는 감격에 겨워 비틀거렸다.
“전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이, 이 파괴적인 미남 같으니!
나는 조금 슬픈 심정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괜찮으니, 가요.”
“…….”
살짝 나를 못마땅하게 보던 그가 혀를 한 번 차고 내 옆에 섰다. 부축해 오는 손은 차가운 편이었지만 엄청 설렜다. 나는 카인에게 가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카인 드 아이릭 공작. 그는 유진, 헤레이스와 함께 세 명의 서브 남주에 드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외모는 유진 급이 된다는 말이었다.
“……행복하다.”
“예?”
어라, 왜 갑자기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들까?
나를 의아하게 보는 유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에요. 어서 가요.”
유진은 잠시 동안 아주 묘한 눈초리로 나를 보다가 이내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그 시각 황실 의원 록스는 황녀가 걸린 병의 진행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사실 그 스스로 조용히 알아보고 다니려던 차에 황제가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황녀의 병을 확인한 뒤 별다른 말없이 명을 내렸다.
그가 하려던 것을 적극적으로 협력해 이어 가라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엄선된 이들과 협력할 것을 의미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트로얀의 열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정말 없단 말인가?”
트로얀의 열매. 그것은 전설 속 만병통치약으로, 그가 유일하게 찾아낸 희망이었다. 사실 희망이라기엔 너무 허무맹랑했지만 말이다. 아직 그는 라파엘리스와 마나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것에 매달리는 중이었다.
“글쎄요. 아, 그라면 어쩌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라니. 뭔가 알고 있다면 어서 말씀해 보시게!”
그래도 이곳은 황궁의 의궁. 제국에서 가장 저명한 의원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리플리. 어서.”
황제는 그 의궁에서 가장 저명한 자들을 추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중 입이 무거운 자들을 다시 추려서 록스와 함께 일을 진행하라고 했다. 그리 말하는 황제의 얼굴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것을 애써 기억에서 지우며 록스가 후배를 닦달했다.
“어찌 이리 머뭇거리는 겐가!”
하지만 엄선한 입 무겁고 저명한 의사들도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연구하는 척이나 하다가 적당히 빠지라는 조언이나 해 주었던 것이다. 록스는 분노했다. 그래서 혼자 발 벗고 나서서 그나마 실마리를 찾아온 것이 이곳, 약초 마니아 후배의 앞이었다.
하지만 어째 후배 녀석은 찝찝한 얼굴로 말을 끌기만 했다. 록스는 그 촉새 같은 얼굴이 몹시 얄미웠지만, 약초에 대해서라면 이 녀석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실마리를 쥔 것처럼 굴면서 줄 듯 말 듯 하고 있으니.
“허, 그것 참.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그 얼음 같은 황녀님이.”
“어허, 이 사람! 말조심하시게!”
시큰둥한 어조로 말하는 상대에게 록스가 벌컥 화를 냈다.
“그 상냥하신 분께 어찌……!”
사람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록스는 이제 믿지 않았다.
그날, 황녀는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녀는 감정 없는 오만한 인형이 아니라, 죽음을 통보한 상대에게 오히려 따스한 위로를 건넬 만큼 속이 깊은 분이었다.
‘참으로 훌륭하게 자라신 분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 하고는!
록스는 쌓인 답답함, 그리고 실마리를 향한 간절함이 뒤섞인 채 후배에게 말했다.
“자네는 모를 거야. 황녀 전하께서 스스로의 병을 통보받으셨을 때 어떠하셨는지를.”
“뭐, 어떠셨기에 그럽니까?”
시큰둥한 후배의 눈을 따갑게 직시하며 록스는 조금 과장 섞인 표현으로 말했다.
“친히 그 귀한 손길로 이 늙은이를 다독이시고는 허하게 웃으셨네. 그것이 전부였어. 그것이 전부였다는 말이네!”
르페르샤의 안도 가득했던 미소를 그때 스치듯이 본 록스는 그것을 저렇게 해석하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이보게, 리플리. 내 평생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험한 생을 산 이들밖에 보지 못했어. 한데 그분은 겨우 열아홉이시지. 그 속을 자네가, 아니 우리가 어찌 다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의연한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황녀를 가슴 아파하며.
“진정, 이 일이 그토록 무의미한 일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후배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리고 그제야 진지하게 응수하기 시작했다.
“제가 과했네요. 죄송합니다. 선배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요. 음, 조금은 이해했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이윽고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록스에게 상대는 기다리던 정보를 내주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아이릭 공작 각하 말입니다.”
“그, 일만 하신다는 그분 말인가?”
“예에, 이건 사실 저도 우연히 들은 것입니다만. 트로얀의 열매가 사실은 열매가 아니고 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신빙성이 있는 말인가?”
후배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증명되었을 리가 있나요. 하지만 출처가 그분입니다.”
“그분이라면, 아이릭 공작 각하 말인가?”
“네, 그러니까 일단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이기는 합니다만. 혹시 그거 아십니까? 그 트로얀의 열매라는 거, 지금까지 세상에 총 세 번 등장했는데 말이죠. 공통점이 있거든요.”
“공통점……?”
“첫째는 검은 머리의 인물이 주변에 있었다는 것.”
“음?”
“둘째는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좋은 향이 먼저 주변을 감싼다는 것.”
“……음유시인들이 꾸민 표현이 아닌가?”
“알아봤는데, 아닙니다. 온 지역에서 그 향기에 대해 말하고 있거든요. 아마 꽃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유래된 거지 싶습니다.”
후배 리플리는 잠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단서를 근거로 일단 부딪쳐 본 곳이 몇 곳 있는데, 그중 한 곳이 아이릭 공작가입니다. 가장 뭔가가 있을 법한 곳이기도 했고요.”
록스는 입을 벌리고 후배를 빤히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장황하고 그럴듯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리플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트로얀의 열매는 약초꾼들의 이상향 같은 거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알아본 걸 말하는 겁니다. 말하고 보니 별거 없네요.”
“아니네. 고마워. 그럼, 아이릭 공작각하를 찾아가 보라는 건가?”
“예, 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그분 음……. 마족의 후손이라는 위험한 소문도 도는 분이시거든요. 심기를 너무 건드려서 좋을 게 없어요.”
“고맙네. 고마워.”
뭘요, 하며 상대가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황녀님이 안타깝기도 하고. 도움이 된다면 기쁠 것 같네요.”
록스는 감사를 표한 뒤 발을 재빨리 놀려 즉시 공작에게로 향했다. 록스와 리플리는 알 수 없었다. 의궁이라고 해도 보안이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을. 리플리에게 상담을 하러 왔던 어린 의학도는 잘 들리지 않는 그들의 대화를 조금 엿들었다.
‘황녀? ……자신의 죽, 음? 열매는 또 뭐지?’
전부는 아니었지만 들은 단어들만 조합해도 그것은 묘한 소문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황녀가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더라.’
그리고 그 소문에는 언젠가 황제에게 가던 황녀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보았던 시녀의 은밀한 속삭임이 더해졌고. 그렇게 병에 걸렸다는 설과 스스로 음독을 하고 있다는 설 등 무수한 소문의 근원이 되고 만 것이다. 지극히 사실에 가까운 그 소문은 그렇게 황궁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카인은 은발의 유진과 대조적으로 흑발에 흑안을 가진 미남이었다.
‘어딘가 사연 있어 보이는 깊고 슬픈 눈이라고 했었지.’
뱀파이어를 연상케 하는 주제에 성품은 매우 올곧고 무뚝뚝하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유진과 달리 그는 일 중독자였다. 가장 만나기 쉽지만, 만나면 가장 어색한 유형의 인물. 그리고 한 가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트라우마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지만 약간의 위로 정도는 줄 수 있지.
진지해져야 하는데 자꾸만 흐뭇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난 며칠 다소 까칠하더라도 미남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저보다 더 기대하시는 것 같군요.”
옆에서 걷던 유진이 조금 비꼬는 느낌으로 말했다. 나는 음흉한 입꼬리를 정돈하며 자동반사적으로 답했다.
“요즘은 늘 즐거운걸요. 유진이 이렇게 옆에서 걸어 주는 데 당연히 즐겁죠.”
그의 얼굴을 영접한 이후로 내 인생은 빛을 하나 찾았으니까. 우후후.
“……아. 그러십니까?”
내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뜬 그가 슬쩍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가타부타 말없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한 반응에 나는 부연설명을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카사노바라던 별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이성적인 감정에 대해 상당히 가차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부담스럽게 할 수는 없지.
“아, 물론 뭔가 바라는 건 전혀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의 경이 정말 좋은 거니까요. 알죠?”
진심으로 그를 위해 그렇게 말하며 나는 두 손을 모아 잡았다. 그리고 몹시 뿌듯한 마음으로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덕질 대상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덕질이라니. 이건 그 대상이 아니라 덕질하는 덕후에게 축복인 일이었다. 유진의 얼굴이 말 그대로 기묘해졌다.
“아니, 그……. 심려치 마십시오, 전하.”
그가 어딘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그렇게 답했다. 어째 얄미움이 한 스푼 덜어진 것 같은 맹한 모습에 의아했지만 시간이 없었으므로 감사를 표하고 걸음을 옮겼다. 조금 늦게 그가 따라붙었다. 아이릭 공작 카인의 집무실은 황궁도서관 주변 흑탑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도 안 쓰는 탑인 줄 알았습니다.”
황궁 지리도 모르는 내가 약도 없이도 유진을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장소가 흑탑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는 한대요.”
“그렇군요.”
흑탑은 황족이나 황족의 허가증을 소지한 자만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자체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외부인에 가까운 유진은 알 수 없었을 정보. 원작에서는 황태자가 둘 사이를 이간질할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말이다.
카인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노크를 하기 전 나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음, 볼턴 경.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나중에, 혹시 제가 원할 때가 있으면 말이에요.”
느긋한 은회색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양심과 덕심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덕심이었다.
“한 번만 그, 제 소매를 먼저 잡아 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유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먼저, 말입니까?”
“네.”
“그것도, 소매를요?”
내가 궁을 떠날 때는 아마 늦가을에서 초겨울일 것이다. 그때 즈음이면 드레스에도 소매가 생기니까. 하지만 어쩐지 미심쩍은 느낌으로 가라앉는 그의 얼굴에 덜컥 겁이 났다.
큭, 시기상조였나?
하여 내가 됐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당신은…….”
문 앞에서 이러는 게 다소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답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경(의 얼굴)이 좋아서 드린 부탁이었답니다. 괴롭힐 생각은 없었어요.”
행여나 개미 눈물만큼 쌓였을 친근함이 싹 사라질까 봐 나는 재빨리 내 말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간도…….”
“예? 시간이요?”
시간이 1년밖에 없으니 마음이 앞서가지고.
……그러니 다음을 노리자.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음험한 속내를 감추며 내가 말했다.
“공작을 만나고 나면 아마도 경은 떠날 테니 조금 아쉬워서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하.”
도무지 모르겠군. 하고 아주 작게 혼잣말을 한 유진이 이번에는 꽤 진지한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봐왔다.
어머!
나는 입을 헤 벌리려던 것을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좋아, 다행히 추태는 피했다. 이윽고 그의 붉디붉은 입술이 열리며 가벼운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꺼이. 전하.”
“아…… 아! 오, 정말 고마워요!”
꺅! 정말 고마워요, 미남이여!
그는 무언가 불안감과 의구심이 어린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것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혼자 좋아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이윽고 나는 최대한 소리가 안 나도록 문고리를 돌렸다. 카인은 노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이상하다, 하며 문을 슬쩍 밀어보던 찰나. 집무실 안쪽에서 생각도 못했던 소리가 흘러나왔다.
“각하. 부디 귀를 기울여 주시지요. 트로얀의 열매가 꼭 필요합니다. 제발 도움을 베풀어주십시오.”
“……?”
“……?”
안쪽에서 누군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나는 냉큼 까치발을 들었다. 록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는 폐하의 윤허를 받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중요한 일입니다. 각하. 반드시 함구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황녀 전하께서는…… 라파엘리스에…….”
록스의 말을 듣자마자 유진이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았다. 거의 쏘아보는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이 뺨에 닿아 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쪽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아니, 내 병이 주위에 알려져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이걸 또 이렇게 면전에서 들을 줄이야. 대체 황녀궁의 의사가 왜 중앙궁 공작의 집무실에 있는 걸까?
‘지금 날 위해 뭔가 움직이는 것 같기는 한데…… 아니, 잠깐!’
헉.
그리고 어느 순간에 숨이 턱 막혔다. 라파엘리스 부분에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노의사의 너머로 또 하나의 남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미쳤다…….’
어쩜 좋아. 책상에 앉은 채 무뚝뚝한 얼굴로 의사를 보고 있는 카인을 보고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 버렸다. 그러니까 잘생기기는 유진 드 볼턴 경만큼 잘생겼는데 이쪽이 조금 더 내 취향에 직격이었던 것이다.
어우 이거 정말이지. 설레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한숨을 포옥 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여기가 천국이네. 좌 유진, 우 카인인가? 어유 나 왜 주책이니. 으항항항!’
미인이란 정말이지 보배로웠다. 어쩐지 볼턴 경의 시선이 더욱 강렬해진 것 같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내 주의를 끄는 것은 카인이었다. 넓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 너머로 칠흑 같은 흑발이 우아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장발이 만화보다 더 잘 어울리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깔끔하면서도 굵직한 선이라니.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이목구비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창백하고 어딘가 그늘져 있지만 우수에 젖은 눈빛에 의해 그것은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로 탈바꿈했다. 약간의 붉은 기가 도는 모양 좋은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는 위태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분위기와 아름다움에 넋을 놓아 버린 나는 이내 조금 슬퍼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 록스의 노구가 자꾸 카인을 가릴 듯 말 듯하며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날 고쳐 보겠다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비키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헛수고인 것도 말을 못 하고 있는데. 나는 절로 어색해지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때 이쪽을 한 번 스치듯이 본 카인이 록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트로얀의 열매라니. 전설의 열매를 왜 내게서 찾는 건가.”
나는 순간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침을 삼켰다. 그 목소리는, 동굴이었다.
와.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을 들었다 놓네. 미치겠다, 정말.
“……희망이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안타까운 일이나 나는 모르네. 그러니 다른 용건이 없다면 나가 보시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
이 무슨 모자람 없는 미남인가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순간 공작이 멈칫했고, 유진이 이를 갈았다. 신음소리가 컸던 걸까? 여전히 어딘가 몽롱한 상태로 나는 최대한 빠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덕심 가득한 눈빛만은 들킬 수 없었다. 그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유진이 내 가까이에서 속삭여온 것은.
“……?”
평소보다 어딘가 경직된 얼굴에 정중한 미소를 그린 유진이 조용히 문을 닫으며 아예 내 시야를 차단했다.
왜? 왜 못 보게 해? 설마, 내가 너무 변태 같았나!
이제는 급기야 울 정도가 되어서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러나 유진은 의사와 비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카인에게 비견될 만한 놀라운 생명체였으므로, 나는 이내 매우 평온한 마음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여 그를 보다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비볐다. 아련하게 흐려지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다음 순간, 나는 몸이 부드럽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안기라니. 세상에. 세상에!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으아.
가까이에 유진의 얼굴과 가슴이 있었다. 근데 그, 가슴이, 와.
“아…….”
단단했다……. 다행히도 유진은 놀람과 환희에 가득 차 얼굴이 달아오른 나를 보지 못했다. 그는 날 가뿐하게 안아 든 채로 정면만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편한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네, 말씀하세요.
“오는 길에 발목을 다치신 것을 제가 이제야 눈치챘습니다. 제 불찰이니, 조금 불편하셔도 제게 기대주십시오.”
네에…… 에?
아니, 뭔진 몰라도 그냥 다 맞아요.
나는 헤벌쭉 벌어지려는 입가를 바르르 떨며 애써 정돈했다. 그의 말대로 몸에서 힘을 조금 풀고 늘어뜨렸다. 그리고 얼굴을 그가 고개를 숙여도 잘 보이지 않도록 조금 숙였다. 혹시라도 음흉한 미소가 새어나와도 그가 보지 못하도록.
내가 말도 하지 못하고 코를 훌쩍이며 고개만 끄덕이자, 유진이 부드럽게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려는 건가?
하긴 카인에게 지금 다른 손님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래야 하기는 했다. 그나저나 승차감이 아주 탁월했다. 헤헤. 아, 너무 좋아!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영국신사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괜찮으시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니, 염려 마시길.”
“……?”
영문 모를 말에 내 발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정말 발목을 다쳤던 것일까? 나만 몰랐던 건가? 그러나 혼란스러울 정도로 그는 진지했다. 뭔 소린지 모르겠어서 눈을 굴리다가 무난하게 답을 하기로 했다.
“……고마워요.”
이 답이 맞는지 모르겠어서 말끝이 흐려졌지만 정답이었는지 그의 입꼬리가 잠시 미묘하게 살짝 올라갔다.
아, 너무나 예쁜 미소였다. 입을 비틀어 올리는 미소 아니면 속 모르게 빙긋 웃는 것만 보다가 그런 작은 미소를 보니 감탄이 흘러나왔다.
나는 감탄하며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내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활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놀란 듯한 그의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전 경이 정말 좋아요.”
유진과 카인의 초상화만 있으면 일주일도 그냥 보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휴. 원작 시작 시점이 되어 요양할 때가 점점 두렵지 않아지는걸. 이러다간 1년간 황궁에 머무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아니지, 그건 안 되지.
“그렇습니까.”
대꾸하는 그의 얼굴이 복잡 미묘했다. 아무래도 슬슬 무거운가 보다. 그럼 그렇지.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말했다.
“거의 다 왔으니, 혼자 갈 수 있겠어요.”
“……아직 거리가 남았으니, 조금 더 가서 내려드리겠습니다.”
이윽고 유진은 조금 복잡한 기색으로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하.”
“뭔가요?”
나는 다소곳하게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제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엇을 했기에요?”
의아하게 묻자 그가 잠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겨우 소매를 잡아 주는 게 소원이십니까?”
“네.”
무리일까 봐 눈치 보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힝. 안 되는 건가. 그의 표정이 더 미묘해졌다.
“달리 원하는 건 없으시다고요.”
“네, 경.”
있기는 했다.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 근데 그건 말할 것이 아니니까.
“지금은 전하의 기사이니…… 그것 외에도 원하는 걸 명령하실 수 있을 텐데요.”
“그것 외에 원하는 것이요?”
아하. 나는 여기서 그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유진은 여자에 대한 불신이 꽤 있는 편이었지. 내가 그의 소매만 잡은 것이 딱히 그걸 배려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잠시 그를 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 있기는 한데요.”
조금 머뭇거리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가 ‘역시나’ 하는 기색으로 잠시 침묵했다.
“말씀하십시오.”
“손잡는 거요.”
“예?”
순간 그의 묘하게 긴장감이 어려 있던 낯이 탁 풀려 버렸다. 이상해진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손잡기라니.”
겨우? 하는 심정과 혹시나 이 여자도! 하는 심정이 뒤섞여 복합적인 표정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경, 전 경을 좋아하지만, 정말로 남녀 사이의 감정이 아니에요. 혹시 그런 생각 때문에 부담스러웠다면 그러지 말아요. 저는 그러니까 친구……가 되고 싶은 거니까요.”
내 말에 유진이 미묘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렇, 군요.”
“네.”
그리고 한참 후,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던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 앞으로는 굳이 부탁하지 않으셔도 저는 전하를 지켜드릴 겁니다. 적어도 황궁에 있는 동안은요.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나는 멈칫했다. 복귀 선언? 아닌가. 아니, 그런 건 눈치상 아닌 것 같았다. 황궁에 있을 동안이라고 못을 박았으니까. 어쨌거나 고마운 말이었다.
“아. ……정말 고마워요, 볼턴 경!”
뭐라고 더 말하려던 유진은 하던 말을 안 끝내고 마쳤다. 그리고 시크하게 답했다.
“감사하실 일이 아니죠.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와. 정말.
별 생각 없이 웃은 것 같지만 붉은 입술의 미소가 눈까지 은근하게 사악 번지는 그의 얼굴은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을 선사했다. 저건 정말 카사노바가 되기 싫어도 주위에서 그렇게 만들 상이었다.
겨우 평온한 척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길. 그의 부드럽고도 정중한 말씨를 떠올리며 나는 내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했어, 심장아.
* * *
유진 드 볼턴은 사람의 호감을 얻는 데에 익숙하고 또 예민했다. 사실 호감을 얻는다는 건 따로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매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녀에 대해서만은 조금 달랐다. 그는 황녀가 왜인지 몰라도 진심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처음엔 의아했다. 그의 외모 때문이라기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황녀는 무심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런 의문을 품고서 그는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 시작했다.
“다들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가라고 했어요.”
“아하.”
그런데 시녀장이 알려 주었다는 공간에서 나눈 대화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황녀는 홀가분한 듯도 보였고, 기분 탓인가 쓸쓸한 듯도 보였다.
유진은 짐짓 삐딱하게 물어보았다.
“그럼 저도 나가겠다고 하면 보내 주십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나온 답에 조금 당황했다. 이어진 말은 더 당황스러웠다. 이건 그냥 복귀하지 말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애초 바랐던 대로 쫓겨나는 것 같기는 한데, 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 느낌.
아, 그래. 기분이 이상했던 것은 이토록 미련 없이 자유 기사를 놓아 주겠다고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흠, 설마 그 말을 해 주러 오셨다는 의미이십니까?”
“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많이 아쉬울 거라고요.”
아쉬움이 어린 것은 진짜였지만 그것은 미묘한 유혹이 어려 있다거나 하지 않은 말끔한 감정이었다. 사실 그래서 같이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하기도 했다. 하여 유진은 황녀에 대해 조금쯤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달리 꿍꿍이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로. 그러나 그런 태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날 싫어하는 당신도 좋거든요.”
황녀가.
“별건 아니에요, 경. 사람들을 많이 내보내고 나니, 문득 생각이 나서.”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부슬부슬 웃으며 말하는 나직한 말은 우아하고 또한 꾸밈이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예전의 르페르샤 황녀처럼 특별히 비인간적인 느낌이 아닌 이상에야 다들 유진을 육체적으로 원했다. 그래서 여전히 경계했는데.
‘원하는 게 소매 잡기라니.’
다들 안아 달라는 등 일단 몸에 손을 대길 바라는데, 겨우 그게 소원이라니. 사실 그때까지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떠봤더니 이제는 손 잡기란다. 그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때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경, 전 경을 좋아하지만 정말로 남녀 사이의 감정이 아니에요. 혹시 그런 생각 때문에 부담스러웠다면 그러지 말아요. 저는, 그러니까, 친구……가 되고 싶은 거니까요.”
방긋 웃는 얼굴이 고왔고, 또 맑았다. 다른 여자들과 다른 그녀의 대답이 진심인 걸 읽은 탓에 치솟던 경계심도 없었던 것처럼 사그라졌다. 그는 황녀가 변한 것인지, 그가 소문 때문에 그녀를 오해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는 정말 이상하다는 것. 그를 보고도 성적으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원하는 건 고작 저런 것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이토록 순수할 수 있는 거였나.
“그렇, 군요.”
“네.”
경계하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와 친구가 되어 본 적은 없었는데.’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 * *
의사는 한참을 혼자 안타까워하다가 무언가 정보가 있으면 지체 없이 알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카인은 나가는 그 뒤통수를 지그시 보다가 문이 닫히자 눈가를 문질렀다. 잠깐 사이에 꽤 피로해졌다.
‘라파엘리스라고 했나.’
울면서도 자세히도 말하고 간 의사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 함께 느껴져서 안타깝기도 했고. 다만 덕분에 몰라도 될 일을 알게 되어 버렸다.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일어났지.’
의원은 아마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대화를 황녀 본인이 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르페르샤 황녀라.”
소문과는 인상이 달랐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황녀는 얼음으로 빚어진 겨울 마녀의 환생이라는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 들어올 때는 밝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잠깐 봤는데도 그녀의 미소는 달빛을 연상케 했다.
그 은은한 밝음이 흐려진 것은 의사와의 대화를 들으면서부터였고.
“집중이 안 되는군.”
그는 이례적으로 서류를 일찌감치 정리했다. 친분이 없던 사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찾아온 비극 앞에 덤덤할 정도로 성정이 모질지는 못했다. 아까 낙심하고 간 것에 자신의 탓도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는 문득 조금 말랐으나 크고 길쭉한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은 객관적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자신의 눈에는 핏빛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아니다. 쓸데없는 생각.
그가 서류를 전부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오랜만에 듣는 노크 소리에 공작이 허리를 곧게 펴고 들어오는 이를 맞이했다.
“아. 귀가하십니까?”
“자네는?”
“직접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볼턴이라 불러 주십시오.”
노크는 대체 왜 한 걸까. 활짝 열어젖힌 집무실 문에 은발의 기사가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기척 없이 다가와 가볍게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카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소문대로 딱딱하시군요. 각하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용건은?”
무심한 얼굴로 물어 오는 카인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말투는 중년과 청년 사이 같지만 저 공작은 자신과 동년배였다. 둘은 서로가 구석구석이 다른 인간이라는 걸 금세 파악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유진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의사 말입니다.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세부 소속도요.”
저건 확인 차 묻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카인은 그냥 답해 주었다.
“황녀궁 소속 의원이네. 경도 황녀궁 소속이니 만날 수 있을 테지.”
“아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냥 보내신 겁니까?”
유진의 말에 카인이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그 찰나에 유진이 가볍게 감탄을 표했다. 지금껏 자신만큼 사람의 눈길을 끄는 외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그렇군. 경은 지금 주의를 주러 온 거로군?”
“말하자면 그렇지요.”
“의사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리고 나아가…….”
황제폐하께도 말이지.
삼킨 말을 알면서도 유진은 여상히 웃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은 제가 호위 일을 하고 있는지라. 주인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체적으로 휴가 중인 주제에 말은 매끄러웠다. 그 여유로운 모양을 물끄러미 보던 카인이 서류를 챙기던 것을 이어 가며 답했다.
“의미 없을 걸세. 조심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애초에 소문을 막으려 했다면 혼자 알고 죽었어야 했어. 황궁에 비밀이 어디 있나.”
“그건 또…….”
부정할 수 없군요.
차라리 혼자 연구할 것이지. 유진이 한숨을 쉬자 카인이 입을 열었다.
“탓할 일은 아니네. 그 의사는 폐하께서 허락하신 이들에게만 은밀하게 말을 했다고 했으니. 애초에 폐하께서 굳이 비밀로 할 생각이 없으셨던 거겠지.”
“그렇군요.”
유진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결정이 끼어 있다면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네. 그 의사가 조심했다면 말이야. 아까 같은 경우는 공교로웠네만.”
“그러기를 바라야 하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올 때와 달리 깔끔하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모양이 자못 유려했다.
여러모로 가벼운 남자라더니. 카인이 고개를 얕게 흔들었다. 은의 기사 볼턴 경에 대한 소문 또한 믿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능력 또한 알려진 바보다 상당히 높은 듯하고.
‘르페르샤 황녀를 질색한다는 소문 또한 완전히 헛소문이었군.’
카인은 또 불쑥 떠오르는 백금발의 황녀를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하지만 카인은 옮기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래, 조금의 도움 정도라면. 조심스럽게 한 손을 꾸욱 쥔 카인이 이윽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소문은 카인과 유진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퍼지고 있었다.
‘황녀 전하가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더라.’
이렇게 시작된 소문은 지금에 와서는 살이 더욱 붙어 있었다.
“자살기도를 하셨대.”
“요즘 두문불출하시는 이유가 다 그거였다는 거야.”
느릿한 속도로 퍼지는 소문을 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묘한 표정을 했다. 눈치 없는 누군가가 말했다.
“황궁의 평화를 위해 그러시는 건가?”
아무리 ‘그 황녀’라고 해도 말을 막 한다며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입막음을 당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방향으로 소문을 변질시켰다.
“나라에 본인이 있으면 독이 될 거라고 하셨대!”
“뭐! 죽여 주지 않으면 나라에 독을 풀겠다고!”
“그래서 황제폐하께 죽여 달라고 했다는 거야, 글쎄!”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주변 정리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어. 멀리 떠나서 혼자서, 하신다고……!”
소문이란 참으로 불길 같은 데가 있다. 흥미로운 기본 정보에 약간의 동정심과 악의가 더해지고, 또 그 소문이 바뀐 황녀에 대해 아주 조금 흐르던 소문과 만났다. 그리하여 소문의 불길은 괴상한 모양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주 은밀하고, 느릿하게.
* * *
카인을 보고, 유진에게 안겨서 돌아온 오늘은 최고의 날이었다. 표시해 둘 달력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나는 뒤늦게 배슬배슬 웃다가, 비틀비틀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저녁 늦게 깨어났다. 머리가 조금 멍했고 몸이 조금 무거웠다. 늦잠을 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아, 아린이구나.
아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많이 놀라 걱정이 어린 얼굴이었다.
“왜 그래, 아린?”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린이 내 목소리에 잠시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답했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셔서 봤더니 창백해지셔서는 식은땀을 흘리시고…….”
그래서 록스를 불러왔단다.
“하루를 꼬박 기절해 계셨습니다. 잠시만, 전하. 의사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어…… 응.”
어리둥절하게 그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아린과 록스가 함께 들어왔다. 나는 어제 카인 앞에서 훌쩍이다가 내가 온 줄도 몰랐던 록스를 떠올렸다.
“록스, 괜찮아?”
노인이 그렇게 우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상체를 일으키자 그가 아까 아린처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도 잠시, 그가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야 괜찮지요.”
“무리하지 말고.”
“……예, 전하.”
난 금방 나을 텐데 저 연세에 저렇게 뛰어다니다가 병들까 봐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하루를 꼬박 잤다고?”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벗어나려고 꺼낸 말에 분위기가 더 축 처져 버렸다.
뭐, 뭐지?
그때 록스가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실 경우 몸에 무리가 가십니다.”
매우 침중한 어조였다. 나는 그 말에 진지하게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을 데굴 굴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 설마 그 미남들을 연달아 본 충격…… 때문에?
“빈혈도 그런 증상의 하나입니다.”
내가 혼자서 밀려오는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모르는 동안에도 록스의 말은 심각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 어디를 가셨기에……. 아니, 아닙니다. 떠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물기 어린 록스의 말에 나는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졌다. 아린까지도 울먹이고 있었다.
악악. 이걸 뭐라고 설명해!
“어제 내가 너무 잘생긴 사람들을 보는 바람에…….”
결국 저 둘이 우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이실직고를 했다. 그러나 둘은 더 아련한 눈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안 믿는구나.
그때였다.
“사실입니다.”
문가에 기대선 채로 안쪽을 바라보며 유진이 말했다. 언제 온 거지? 반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자 그가 내게 찡긋 눈짓을 했다. ……뭐지?
“사실이라고 했습니까?”
록스가 의아하게 그를 보며 묻자 유진이 아주 느릿하게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문을 뒤늦게 노크했다.
“그 전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유진의 말에 냉큼 답했다. 뭔지는 몰라도 장단을 맞춰 보자! 하고.
훌쩍이던 아린이 그를 보고 입을 떡 벌리는 것이 보였다. 왜 넋을 잃지 않고 경계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반짝이는 몸짓으로 들어온 유진은 눈을 나른하게 내리깔고서 록스에게 말했다.
“어제 저와 함께 계셨으니까요.”
“…….”
“…….”
“…….”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록스의 표정이 매우 이상해졌다. 아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호하듯 나를 가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 저거 그러니까, 너무 잘생긴 사람을 봤다는 내 말을 사실이라고, 증명을……. 아까 그거 안심하라는 눈짓이었구나?
“큼. 프흠.”
내 신음소리에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돌아보는 셋의 시선에 나는 말도 못 하고 손만 절레절레 흔들고는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 그랬나. 알았네.”
록스가 무언가 납득한 표정으로, 그러나 아주 떨떠름하게 유진에게 대꾸했다. 나는 더 참기가 어려워졌다.
“으흐.”
“전하?”
아린의 불안한 목소리가 그나마 내 웃음기를 식혀 주었다. 가까스로 신색을 정돈한 나는 아직도 반짝반짝 펄을 뿌린 것처럼 폼을 잡고 있는 유진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 나 조금 쉬어도 될까? 그 정신적인 충격 부분은…….”
여전히 반짝반짝. 아니, 진짜 넋이 나가게 잘생겼는데 왜 이렇게 웃긴 거야! 황급히 시선을 내리며 어렵게 말을 맺었다.
“내가 어떻게든 조절할게.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쉬십시오.”
“쉬십시오, 전하.”
록스와 아린이 달래듯 말하고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유진에게 넌 안 가냐는 듯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럼, 저도 이만.”
유진은 어느새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살짝 미소 지은 뒤 정중한 인사를 하고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다들 방을 나간 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거의 흐느끼듯이 한참을 웃었다.
* * *
세 사람은 황녀의 방을 나온 뒤 멈춰 섰다. 유진이 눈을 내리깔고 황녀 방 안쪽에서 들리는 흐느낌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나란히 궁의 복도를 걷던 세 사람은 딱딱하게 대화를 나눴다.
“볼턴 경, 복귀하신 겁니까?”
아린이 묻자 유진이 답했다.
“아직입니다.”
“그렇군요.”
단순한 대꾸였지만 알 만하다는 말투였다. 많은 사람들이 볼턴 경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다지만 적어도 그것은 엠마와 록스, 아린과 리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어제 전하와 함께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겁니까?”
록스의 물음에 유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바로 그것 때문에 눈치가 보이는데도 궁에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린이 못마땅한 눈빛을 감추며 먼저 자리를 뜨자, 그제야 약제실에서 록스에게 입을 열었다. 경고, 그리고 도움의 말을.
* * *
“힝……. 이게 뭐람.”
벌써부터 요양을 하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이틀은 더 쉬시라는 간곡한 록스의 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먹고 자고 편안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괜찮은데…….”
“괜찮으시다고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음. 환청인가?
“병문안을 왔습니다만.”
설마하며 눈을 굴려 문가를 보았다.
“볼턴 경?”
미친. 정말로 유진이었다. 휙 고개를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역시 지금은 저녁이었다.
그러니까,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 내 방 문가에 남신이 서 있…… 오모나.
그러나 나의 흥분은 중간에 푸시식 식고 말았다. 말없이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찮았던 것이다.
왜 저러는 거지?
잔뜩 굳은 얼굴로 유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안색이 또.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어?”
나는 우리 언니의 몸이 상상이상으로 섬세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아야 했다. 일단은 그를 멈춰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잠깐! 잠깐만요!”
“…….”
고맙게도 그가 멈춰 주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황급히 어제 록스가 처방해 준 기력 보충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미 다녀왔고, 그에게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있어요. 경이 마음 쓰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마음 쓸 만한 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전하.”
유진은 어느새 나가려던 상태에서 몸을 돌려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살짝 정신이 딴 데로 향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그의 전신이 시야에 들어왔고, 완벽한 비율과 환상적인 미모가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네요…….”
존재 자체만으로도! 흑, 완벽해. 내 인생에 이런 낙이 올 줄은.
내가 멍하니 그의 외모를 찬양하고 있는 동안 유진은 말이 없었다. 그저 뭔가 고민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 나는 뒤늦게 그 시선을 느끼고 말을 돌렸다.
“그보다 경, 병문안을 왔다고요?”
그제야 유진이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불편하십니까?”
대체 무슨 말이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뇨, 그보단 폐가 아닌가 했죠.”
“폐라……. 그건 제가 떠날 사람이기 때문이겠지요?”
“그야, 네에. 그렇죠.”
나는 조금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얼른 카인과의 볼일을 마치고 이 무서운 원작 배경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쉽긴 하지만. 그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천천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렇군요.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전하.”
“아니에요. 조심해서 가세요.”
살짝 과하게 웃으며 건넨 인사에 그가 또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더욱 혼란스러운 낯을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보중하시길.”
잘 가요, 미남이여!
* * *
황녀궁의 막내 시녀 리니는 오늘도 힘차게 주방으로 향했다.
“테오 아저씨, 저 왔어요!”
“리니 왔니?”
푸근한 인상의 주방장 테오가 껄껄 웃으며 리니를 반겼다. 시녀 중 드물게 어린 나이의 리니는 이 살벌한 황녀궁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아저씨, 황녀 전하의 식사는요?”
활기찬 리니의 말에 테오의 흐뭇한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저기 있단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리렴. 그런데 아린은 어디 가고 자꾸 네가 가는 거니?”
그는 말하면서도 못마땅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기색을 알아챈 리니가 입을 조금 삐죽였다.
“왜요? 제가 실수할까 봐서요?”
“실수가 실수로 끝난다면야 이러지 않지. 전하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인 줄 아느냐?”
리니를 달래는 어조로 테오가 목소리를 낮췄다.
“알죠. 아는데…….”
테오가 말하는 바가 뭔지 안다. 리니도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 소문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대번에 치운다더라 하는 소문들. 다른 곳도 아니고 황녀궁에 속한 궁인들이 지레 겁먹고 몸을 사릴 만큼 소문들은 잔혹했다.
“실수하면 큰일이 날 게야.”
르페르샤 황녀는 황궁의 독사, 두려운 악녀였다. 하지만. 리니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하지만 아저씨, 저 이미 실수했는걸요?”
“뭐, 뭐어?”
“그게…….”
리니는 그간 자신이 한 몇 개의 실수를 하나하나 읊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오는 사색이 되었다. 테오는 재빨리 리니를 살폈다. 멀쩡했다.
“귀신인가?”
“아이 참, 아저씨!”
의아함과 염려가 반반 섞인 테오의 얼굴에 웃던 리니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괜찮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누가?”
“황녀 전하께서요.”
“……왜?”
“뭐가 왜예요?”
“……어?”
“어쨌든 제 생각에는 소문이 좀 과장된 거 같아요.”
리니가 예전에 관찰한 결과, 르페르샤 황녀는 아랫사람들에게 잔혹하다기보다는 무심한 주인이었다. 가까이만 가도 서늘한 느낌이 드는, 그런 멀고 먼 황족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황녀궁에 소문과 같은 피바람이 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궁인들이 알아서 몸을 사린 덕도 있겠지만.
“과장?”
“네.”
리니는 잠시 흐린 얼굴로 최근 르페르샤 황녀를 직접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최근 겨우 일에 익숙해졌을 때 한 번 르페르샤 황녀의 시중을 들러 갔던 적이 있었다.
‘실수 정말 많이 했는데.’
황녀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애초에 리니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황녀가 미쳤다는 소문까지 돌자 다들 전담을 맡기를 꺼려서 리니가 가게 됐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과연 황녀 전하가 모르셨을까? 그런 생각을 아린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리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네가 본 대로 믿으면 될 거야. 리니, 그분은 외로운 분이시란다. 그러니 나와 함께 잘 모시자. 알았지?’
사실 아린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리니는 그랬을 것이다. 리니는 르페르샤 황녀를 좋아하니까. 이렇게 모든 식사를 맡아서 챙길 정도로 말이다. 생각에 잠긴 리니의 모습에 테오가 불안하게 물었다.
“리니, 왜 그러니?”
“아니에요. 뭐, 그냥 걱정 마시라고요. ……사실 다정하시거든요.”
리니가 조그맣게 덧붙인 말은 귀가 어두운 테오에게 닿지 않았다.
“뭐라구?”
조금 쑥스러워진 리니가 짐짓 큰 소리로 외쳤다.
“어쨌든! 이 일은 제가 담당할 거예요! 아린 언니한테도 말했는걸요? 그러니까 빨리 식사 준비 끝내 줘요, 아저씨!”
발을 구르며 하는 말에 테오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조리를 이어갔다. 리니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근데 오늘도 양이 참 적네요.”
“그렇지. 영문을 모르겠다만. 나야 고생을 덜었지, 뭐냐. 세세하게 신경을 쓰기는 해야 하지만 말이다.”
“흐음.”
리니가 찝찝한 눈으로 잔뜩 신경 쓴 소량의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르페르샤 황녀는 이 음식들도 다 비우지 못할 때가 있었다.
‘예쁘고 다정한 분이라 조금 드시나?’
그럴 리가. 미간에 힘을 빡 주고 뚱하게 고민하던 리니는 다 되었다는 테오의 말에 얼굴을 폈다.
“빨리, 빨리요!”
“아이고, 원. 옛다. 끌고 가!”
완성된 식사가 옮겨진 트레이를 끌며 리니는 자기도 모르게 헤실헤실 웃었다. 직접 본 르페르샤 황녀는 상냥했다. 리니는 가족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황궁에 들어온 아이였다. 그런데 황녀의 따스한 눈빛을 마주하면 어쩐지 먼저 간 언니가 떠올랐다.
황녀는 뭔가 달랐다. 천사같이 아름다운데 리니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마치 가족을 보듯 따스했다. 궁의 어디에서도 그런, 그런 격의 없는 다정함은 보지 못했는데. 리니를 나름대로 예뻐하는 궁인들도 가족같이 따스하지는 않았었다.
막상 앞에 서면 괜히 떨리고 어려워서 실수 연발이었지만, 그 실수를 할 때마다 상냥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서.
“나는 황녀님이 좋단 말이에요.”
아까 테오에게 다 못 한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리니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실수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리니의 하루는 또 힘차게 시작되었다.
* * *
리니가 씩씩하게 내 식사 시중을 들고 돌아갔다. 나는 한숨어린 미소를 지었다.
“씩씩한 시녀군요.”
“그렇죠?”
그리고 또 유진을 맞이했다. 정말 놀랍게도, 유진은 그 후 이틀간 계속 황녀궁에 발 도장을 찍었다. 늘 내가 만나러 가기만 했었기 때문에 기분이 되게 이상했다. 록스가 추가로 처방해 준 진정제와 기력보충제를 삼킬 시간이면 정확하게 유진이 도착한다.
유진은 확실히 직설적인 화법에 약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직설적으로 “저는 볼턴 경이 참 좋아요!” 따위의 유아틱한 대사를 최대한 유치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던지고 있었다. 물론 전부 진심이었다. 바탕이 덕심이라는 것이 조금 달랐을 뿐. 나의 진심이 닿았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유진은 여전히 다정한 듯 까칠했다. 친근한 모습이었다. 내가 좋다고 하면 “짝사랑을 하기엔 너무 희망 없는 상대가 아닐까요?”라든가, “하기야 제가, 꽤나 괜찮은 사람이기는 합니다.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전하.” 따위의…….
‘히히, 잘생긴 사람은 얼굴값을 한다더니. 이게 그 말인가?’
다소 얄미운 말들을 진심 같은 농담으로 늘어놓고는 하는 것이다. 덕분에 이틀간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벌써 요양 기간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늘도 그는 내가 약을 삼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하. 며칠 살펴보니 궁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성격의 질문이었다. 목소리도 좀 나직해서 나는 속도 없이 흐뭇해지고 말았다. 아주 설레게 하는 목소리였으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질문한 건가?
하지만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게 다니던 사람들도 편안해 보이더군요.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수가 많이 줄었지만요.”
“아, 그런가요?”
정말 그랬다면 다행이었다. 사실 몇 명과 각별하게 가까워지면서 나는 마음을 조금 바꾼 차였다. 어쩌면 악녀란 소문도 내 주위부터 조금씩 바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함께 사는 사람들과는 잘 지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상냥하게 대하고, 리니와 아린, 엠마에게 하듯 사람들을 대했다.
솔직히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주방장과 몇몇 사람들을 시작으로 내 눈에도 전체적인 변화가 슬슬 보이던 참이었다. 생각보다 남아 있는 궁인들의 인식 개선은 수월했다. 하긴 원작에서도 르페르샤 언니는 아랫사람들에게 무작위로 패악을 떠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늘 고고했었다. 과거가 깨끗한 축에 속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거리감이 좁혀지고, 내가 아프다는 게 알음알음 퍼지자, 결과적으로 폭발적인 속도로 인식이 개선되었던 것 아닐까?
어쨌거나 타인의 눈에도 변화가 눈에 보인다니 새삼 뿌듯해졌다.
“그거 정말 기쁘네요.”
생긋 웃으며 답하자 갑자기 유진이 나를 깊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어머.
매끄러운 은발은 단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각에 잠겨 허공을 유영하던 신비로운 눈동자에 내가 한가득 담기자 마치 내가 그의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
“예?”
속삭이듯 흘러나온 얼빠진 말에 그가 의아한 듯 눈썹 한쪽을 올렸다. 그에 헉, 하고 말을 멈추고는 한숨 어린 미소를 그렸다. 위험했다. 그래도 진정제의 효과 덕인지 기절하지는 않았다.
잠시 내 얼굴을 맴돌던 그의 시선이 내 눈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말했다.
“여기가 변한 건 아무래도 궁의 주인이 달라지셨기 때문이겠지요?”
“음, 그렇겠죠……?”
달라지기는 했지. 황녀가 황녀가 아니게 되었으니.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네, 경.”
“복귀 신청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유 기사가 황궁에 속하는 경우에 원칙적으로 그 기사에게는 상당한 자율권이 부여된다. 임시로 고용되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진 드 볼턴, 그는 소드 마스터였다. 누가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을까. 그런 그는 지금 자체적으로 휴가 중이었다. 일을 하라고 직접 명하면 따라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상태란 말이다.
“왜 복귀를…….”
그런데 왜 사서 고생을 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마음이 동해서요.”
동했대. 순간 당황했지만 진정하고 물었다.
“마음, 마음이 왜, 아니, 세상에…….”
“안 됩니까?”
“그…….”
그렇다고 하면 단단히 화가 날 것 같은 기색이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를 보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제게는 고마운 일이죠.”
아, 세상에.
밝아지는 미남의 얼굴은 보배로웠다. 하지만 나는 속이 썩어 들어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어갈 말을 찾았다.
“하지만, 경. 저에게 매이면 경의 시간이 부족해질 텐데요?”
아무래도 수련도 할 시간이 부족해질 거고, 그런 말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하자 다시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차피 기간제이고, 일 년 정도는 괜찮습니다.”
단호한 말에 어물어물 말을 멈췄다. 생각해 본다고 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으으, 그럴 수는 없는데. 나는 급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 나는 3개월 후 어떻게든 궁을 떠날 생각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아서 원작에 휘둘리는 건 아닐까?
아니다. 내가 떠날 때 차라리 내 호위 기사로서 유람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엠마와 함께 데리고 가면 어떨까? 아아. 그제야 모든 것이 명쾌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뒤늦게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복귀, 받아들일게요.”
유진의 얼굴은 조금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고마워요, 볼턴 경. 조금 전엔 그, 꼭 지켜 준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라서 제가 당황했나 봐요.”
내가 쑥스러워하며 말하자 그가 허탈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했다.
“콜록.”
다시 나를 본 그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응……?
“……!”
나는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내 입을 이불로 가렸다. 악악! 하필 이때!
감동적인 순간에 피를 묻힐 수는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군. 밀려 들어오는 기억을 느끼며 나는 슬픈 마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경,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요.”
“아니, 의사를 부르는 것이.”
“아뇨!”
여기서 록스를 부르면, 또 심한 정신적 자극을 진지하게 언급하며 5일 요양을 선언할 수도 있다. 아, 제발!
“돌아가 주세요, 제발.”
“하지만, 전하. 지금 피를!”
유진이 드물게도 소리를 높였다.
“불러도 별 의미가 없는 걸요!”
“의미가 없다니요.”
“그냥 이러다 마는 거예요.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그러니 못 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피 토할 때마다 주변에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내 애원이 먹힌 걸까? 다행히 말없이 나를 보던 그는 그대로 휙 몸을 돌린 뒤 말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어, 어쩐지 목소리가 무서운데.
“아무것도.”
오늘의 기억은 조금 다른 것 같아서 황급히 답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괜찮으니 조심해서 가세요, 경.”
“……예, 전하.”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방을 나갔다. 내일 또 봐요, 미남이여! 그리고 나는 밀려오는 기억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 * *
“이번에도 목소리를 못 들었어.”
엉엉. 성장하는 우리 아이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은데 그것도 못하고. 하지만 오늘의 기억은 늘 얼음인형 같던 언니가 풀밭을 뛰어 다니는 기억이었다. 아이다운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뜀박질을 하는 다섯 살짜리 르페르샤 언니를 보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장소는 알 수가 없었지만.”
황궁 같지는 않았다. 황궁은 어디를 가도 황궁 건물이 조금이라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 속 공간은 정말 드넓은 초원이었다.
“헤헤. 귀여웠어.”
뿌듯한 마음으로 나는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할 일들을 정리해 둔 표를 펼치고 이것저것 수정을 시작했다. 황궁을 떠날 때 유진처럼 그냥 데리고 가는 게 나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으음.”
카인은 아니었다. 그는 공작이고, 조금 불안하기는 해도 원작 남주인 황태자의 손에 죽을 위험은 적은 인물에 속했다. 하지만 원작대로 아리엘에게 반하는 건…….
“그건 너무 깊게 빠지지는 않게 도와주면 돼.”
아리엘에게 ‘그 말’을 처음 듣게만 하지 않으면 된다.
“별거 아닌 말인데, 처음 들어서 각인이 되다시피 했었으니까.”
물론 천진한 아리엘이 말해서 더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고 소중한 친구까지는 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고마운 일이고.”
아마 그것만 해 놓으면, 아리엘의 사랑스러운 다른 점들로 그녀에게 반할지언정, 그토록 절절한 짝사랑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황태자도 공작인 그를 그렇게까지 뭉개지 않을 테지.
“그럼 헤레이스?”
세 번째 서브 남주이자 또라이 벤츠였던 정보 길드장 헤레이스. 유진과는 아주 다른 의미로 자유분방한 이 인물은 아리엘의 눈물을 보고 싶다고 들이대다가 아리엘을 구하고 죽어 버렸다.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었는데.”
이 사람도 방법은 있었다. 카인처럼 아리엘에게 받을 자극을 조금 줄이는 식으로.
“그리고 그 사람도 아니야.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헤레이스는 그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인물. 흑막 다니엘.
피하고 싶으면서도 만나 보고 싶은 이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헤레이스는 그런 다니엘의 소중한 친구였다.
“조치를 취했는데도 3개월 후에 낌새가 불안하다 싶으면 다니엘에게 살짝 언급해 두면 안전할 거야.”
그럼 남은 것은 이비엔과 제인이다. 황태자를 사랑했지만 친구인 아리엘을 위해서 포기하고, 거기다 상단주가 된다는 꿈까지 포기하는 이비엔 영애. 그리고 아리엘 대신 독을 마시고 죽는 소녀 제인. 이비엔은 조금 애매하지만, 제인은…….
“제인은 구해 준 뒤에 생각해야지. 만약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 의사를 물어보는 거야.”
그래, 그러면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죽을까 봐 꼭 데리고 가야겠다 싶은 건 유진뿐이구나.
“내일은 요양도 끝나니까 유진이랑 카인이랑 친해지게 돕는 걸 시작해야지.”
나는 어쩐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황녀궁 정문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유진이 우뚝 멈춰 섰다.
“흐음.”
잠시 뒤를 돌아본 그는 지나가던 시종에게 시녀장을 불러 줄 것을 부탁했다. 간단히 확인할 것이 있었다.
“…….”
기다리는 동안 둘러본 궁은 확실히 전과 달랐다. 아까 황녀 앞에서 말한 것은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사실 처음 이곳에 배속된 뒤 일주일을 근무하고 자체휴가를 선택했었다.
‘숨이 막혔었지.’
소문처럼 피를 좋아하거나 그런 황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문만큼 끔찍했었다.
얼음으로 빚은 인형.
그런 황녀의 궁은 주인을 꼭 닮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걸음을 조심했다. 대화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맑은 봄날마저 그러했다. 그런 죽어 있는 궁에 머물고 싶지 않았었는데.
소소하게 대화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저쪽의 시녀들은 과연 자신들의 변화를 느끼고 있을까? 여전히 황녀에 대해서는 다소 어려워하는 분위기지만 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볼턴 경, 찾으셨나요?”
“아, 바쁠 텐데 불러 미안합니다, 부인.”
“아닙니다.”
상념을 멈춘 그는 어느새 당도한 시녀장 엠마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모든 사람에게 다소 되바라진 존대를 하는 그의 성향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엠마가 따로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궁의 뒤 정원으로 향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고요?”
엠마가 물었다. 늘 그렇듯 온화한 귀부인이었다.
“네. 황녀궁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말입니다. 뭔가 있다면, 이제 복귀하게 되었는데 미리 알아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그 질문은 사실 황녀의 상황에 대해 엠마가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변화가 언제부터 급격하게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엠마가 답했다.
“경께서 미리 염두에 두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엠마는 요동 없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있다 해도, 제가 입 밖에 꺼낼 일은 아니겠지요. 전하의 호위를 맡으셨을 테니 경께서 직접 느껴 보시면 충분할 겁니다.”
유진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신중하게 가늠해 보았다. 그는 황녀를 지키기로 했다. 목숨 바쳐 지킬 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그녀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울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록스에게도 도움을 주겠다고 자처한 것이었고.
지금 알고 싶은 것은 이 시녀장과 황녀에 대해 어느 정도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미리 염두에 두실 일은, 다시 말하지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병과 그 증상에 대하여. 엠마의 온화하지만 한 겹 막이 씌워진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유진은 고민했다.
“모쪼록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경.”
그리고 결정했다. 엠마는 말을 끝낸 뒤 먼저 천천히 걸어 안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유진은 붉은 입매를 은은하게 끌어 올렸다.
“그래, 임무에 충실해야겠지. 그렇고말고.”
그녀는 아마도 많은 것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더없이 충실한 시녀장이었다. 유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서 있다가 문득 든 생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갑자기 피를 쏟는 건 위험한데.’
의학 쪽으로는 잘 모르지만 무인은 본래 몸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좋은지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자들이었다. 잠깐 마력을 돋워 살펴본 황녀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피를 토하는 것이 심각한 병의 증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황녀에게서는 병자 특유의 음울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익숙해질 수 있는 고통이 아닐 텐데, 익숙해진 반응을 보였어.’
황녀의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문제일지도 모른다. 비단 그 라파엘리스라는 병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상태 확인이 필요해. 록스와의 일을 어서 시작해야겠군.’
복귀가 받아들여져서 다행이었다. 그는 환영한다며 활짝 웃던 황녀를 떠올렸다.
역시, 지키고 싶다.
잠시 후 그는 록스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생각했으면 바로 움직여야 하는 법.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건 또.”
도착한 약제실에서 유진은 입꼬리를 나른하게 올리며 즐거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근무 태만은 내 전용인 줄 알았는데? 동지가 여기 있었군.”
의사 록스의 약제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방금 나간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한참을 비워둔 것 같은 다소 서늘한 공간이었다.
“공작에게 간 건 아닐 테고, 의궁에 갔나?”
잠시 마음에 안 드는 듯한 눈길로 약제실을 훑던 유진은 이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졸졸 쫓아다니게 생겼군.”
약제실을 나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녀의 방 쪽을 잠시 바라본 뒤 한숨을 쉬며 의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록스와 그 후배인 리플리, 그리고 아이릭 공작 카인을 마주쳤다.
“딱 봐도 황녀 전하 문제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들 모여 있습니까?”
저만 빼놓고. 뒷말을 삼키며 유진이 매끄럽게 웃자, 록스가 허허롭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잖아도 경도 부르려고 했습니다.”
달래듯 하는 록스의 말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얼마 전 그의 잘못으로 황녀가 비참한 현실을 마주했다는 것을 알려 준 뒤로, 록스는 리플리와 카인을 끌어들이는 것 이상으로는 황녀의 병에 대해 더 아는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물론 록스의 후배 리플리도 별 불만 없이 함구 협박을 받아들였고.
“각하도 함께하십니까?”
유진이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와 묻자,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인이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고 있는 유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카인이 답했다.
“휴가를 썼네.”
“휴가…… 말입니까?”
그런 단어도 아느냐는 중의적인 물음이었으나 카인은 알아듣지 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 전부 미묘한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었다. 황녀에 대해서는 전에 한 번 본 것이 전부면서 카인은 황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찾아왔다.
유진은 그런 내막은 몰랐으나 하나는 눈치챘다. 아, 이 공작이 보이는 것보다 오지랖이 넓구나 하고. 달리 이유가 있든 없든 황녀는 카인과는 상관없는 타인이었으니까 말이다.
‘혹은 현 황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군.’
유진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여기 이 인원으로 지금부터 연구를 진행합니다.”
록스가 헛기침을 하고 서문을 열었다.
“두 가지 방향으로 살펴 봅니다. 완치, 그리고 완화. 아이릭 공작께서 완화에 대해 생각이 있으시다는 말씀을 해 주셨지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 진지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 모인 네 사람은 황명으로 함구령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카인은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도 조금 곁들여 설명할 수 있었다. 그의 트라우마와는 거리가 있는 범위 내에서.
“마력을 체내에서 움직인다라……. 신성력처럼 사용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것만으로도 세 사람은 탄성을 지르며 흥미로워했다. 유진 역시 놀라워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롭군요. 그리고 굉장히 일리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두 분이 저희보다 느끼는 게 많으시겠군요.”
록스의 말에 유진이 아주 의외라는 시선으로 카인을 일별한 뒤 그가 허락하자 입을 열었다.
“마나의 성질 문제죠. 아마도 공작각하께선 제 마나와의 혼합을 제안하고 싶으신 걸 겁니다.”
록스와 리플리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이어지는 유진의 말을 경청했다.
“제 마나가 빛 계열의 마나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그리고 아까 들었다시피 각하의 마나는 어둠 계열의 마나고요. 특별한 시너지를 낼 수 있지만 아주 보기 드문 조합입니다.”
두 계열의 마나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이었다. 반가운 의견이었다. 유진이 호의 어린 눈빛을 카인에게 보냈다. 아주 흥미롭고, 시도해 볼 만하며, 또한 희망이 충분한 방법이었다.
초저녁이었다. 슬슬 땅거미가 지는 시간, 등불 몇 개를 켜 둔 곳에서 그들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유진과 카인 사이가 나빠지지 않게 도와야지!’ 하는 누군가의 결심이 무의미하게도 유진과 카인의 분위기는 이미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 * *
내 미남들이 보이지 않아.
나는 시들어 가는 중이었다. 이틀째 유진이 보이지 않았다. 복귀한다더니? 물론 시들어 가는 중에도 인생은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어젯밤 리니는 아린과 함께 생강 쿠키를 구워 주었다.
“리니가 만들었다고?”
“예, 전하. 주방장님도 맛있다고 하셨어요. 사실 전하께 올리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몰래 가져왔, 아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리는 리니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린이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와하하, 웃다가 유진 금단증상도 해결할 겸 나도 가르쳐 달라고 둘을 졸랐다. 조금 곤란해 하던 둘은 내가 하루 종일 시무룩했던 것을 떠올렸는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오늘 아침. 고소한 쿠키 냄새 때문에 리니가 결국 주방장에게 검거되었다.
“저녁에 혼자 쿠키를 굽다니! 위험할 수 있었다, 리니! 왜 밤에 해서는. 낮에 하면 되지 않니!”
주방장 테오를 직접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잠시 방 밖으로 나와 궁을 배회하던 나는 울상이 된 리니를 발견하고 곧바로 자수했다.
“그, 미안해. 리니를 내가 억지로 끌고 가서……. 다음엔 낮에 하도록 할게, 주방장.”
아린은 이미 같이 서 있었다.
“억…….”
말없이 굳어 버린 주방장의 모습이란. 더불어 지켜보던 시녀들과 시종들, 기사 몇의 반응도 절경이었다. 턱 빠지겠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조금 우스운 광경이었다.
“괘, 괜찮, 어, 어어? 전하?”
주방장의 어리바리한 반응에 정말 고맙다는 제스처를 잔뜩 한 뒤 나는 그대로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그렇잖아도 슬슬 리니랑 엠마 말고도 예쁜 짓을 좀 할 생각이었는데 잘됐네.’
나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문을 닫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맞이하고 또 저녁시간을 맞이했다. 내 미남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카인에게 혼자 찾아가 보기는 좀 그렇단 말이야. 유진이랑 같이 친해지려고 했는데.
혼자 시무룩하게 툴툴대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던가. 다음 날 아침, 나는 휴가를 냈다는 카인과 복귀한 유진을 함께 볼 수 있었다.
* * *
“전하!”
날 보고 인사를 하자마자 유진은 나를 부축해야 했다. 두 미남이 한눈에 다 들어오자 나는 그대로 비틀거렸다. 황홀해서 현기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다가와서 정중하고도 딱딱하게 묻는 카인을 보며 나는 얼이 빠졌다.
“아, 아이릭 공작? 왜…… 여기에?”
“전하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다기에는 트로얀 열매를 거절하지 않았나? 덕분에 록스가 신화적인 걸 찾아서 헛고생을 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건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우리 분명, 초면인데.
“저, 마음은 고맙지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 대화한 적도 없는데요?
카인이 이렇게 넉살이 좋았던가? 굉장히 낯을 가리는 타입이었던 걸로 아는데 말이다. 그래서 굳이 유진과 함께 가려고 했던 것도 있었고. 그러나 낯을 가린다는 것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내가 말없이 그를 멍하니 보고 있자 그가 그 서글픈 느낌의 흑안을 슥 굴려 내 눈을 피했던 것이다.
그 모습은 절경이었다. 말하는 것도 잊고 그걸 보고 있자 유진이 정신 차리라는 듯 나를 살짝 끌어 카인에게서 조금 떨어뜨렸다.
“전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록스에게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묘한 의기양양함이 어려 있었다.
“그…… 래요.”
저희와 함께?
그제야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건 꼭 둘이 먼저 안면이 생긴 것 같은 뉘앙스가 아닌가. 그들을 따라가면서 나는 조금 심각하게 고민했다. 카인은 유진과 사이가 좋을 수도 없었고, 날 위해 이렇게 움직일 리도 없었다.
유진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은 황태자의 입김 외에 성격이 정반대였다는 이유도 있었으니까 그렇다. 지금은 음, 같은 목적으로 뭉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중요한 건 그거다.
왜? 왜 그들이 뭉쳤지? 날 위해? 카인이 왜.
“…….”
카인은 그 가문의 특성 때문에 황궁에서 반쯤은 병기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그는 황족에게 호의도, 거부감도 보인 적이 없었지만 친구가 되는 것은 참 어렵게 생각되었던 인물이었다. 그 관계성 때문에.
이거,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카인에게 물었다.
“공작, 휴가를 냈다고 했나요?”
“예, 전하.”
당신은 원작에서 아리엘을 위해서 처음으로 휴가를 썼다고 했었는데.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되게 낯선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런데 그가 내 시선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압니다.”
“네?”
내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유진도 힐끔 그를 보는데 그 시선에 딱히 악감정이 없다. 그것을 매의 눈으로 알아챈 내게 카인이 조금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휴가가 뭔지 저도 압니다, 전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웃어야 하는 건지, 위로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옆에서 끅끅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렇구나.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둘 사이는 내가 손볼 필요가 없게 잘 진행이 된 거야.
참 다행이었다. 그 순간에 나는 카인이 나를 돕는 것에 대한 의문보다도 그와 유진이 반목할 가능성이 줄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에 휩싸였다. 하여 나는 가만히 카인을 보다가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네.”
“푸하핫!”
음울한 카인의 답에 결국 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즐겁게 웃으며 카인에게 말했다.
“장난이에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그럼 안 할게요.”
“아닙니다.”
동굴 같은 목소리는 아주 시시각각으로 내 신경을 매혹적으로 공격했지만, 그 말 내용과 표정의 변화를 살피느라 나는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전하의 병 진행을 조금 늦출 방도를 찾았습니다.”
유진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물론 지금 내 몸에는 병의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에 늦춘다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놀람만은 아니었다. 유진은 나랑 어느 정도 친구 느낌이어서 그렇다고 쳐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작용이 없다시피 한 수준으로 약을 만들었습니다.”
정말이지 카인 당신은 왜?
“저, 공작.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제게 이렇게 도움을 주는 이유가 뭔가요?”
초면이라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언니의 기억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유진이 나와 카인을 유심히 보며 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걷기 시작했다.
“그날.”
조금 후 카인이 특유의 약간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날 전하께선, 절망하셨을지언정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셨습니다.”
“네?”
그날이라면 그때뿐이었다. 공작의 흑탑 집무실에서 잠깐 마주친 그날. 내가 그의 미모에 덕통 사고를 당했던 그날……? 음? 그날 그의 미모를 보고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었나요?”
“없으셨다면.”
카인이 잠시 멈춰 섰다. 그러자 유진이 굉장히 성가신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자기 뒤로 두었다. 카인은 검은 눈을 조금 우울하게 내리깔고서 내게 속삭였다.
“전하께서 지고한 자리에 앉으셔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 네, 네?”
너무 예상치 못한 말이라 잠시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생각이 돌아감과 동시에 외쳤다.
“절대 안 돼요!”
아이고, 르페르샤 언니, 우리 서브 남주가 날 죽이려고 해요!
저 말이 행여나 황태자 귀에 들어가면 난 그냥 죽는다. 미쳤어! 안 돼, 절대 안 돼! 날 보호하듯 서 있던 유진도, 웅웅거리며 목소리로 날 홀리던 카인도 내 외침에 멈칫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서 말했다.
“저는 자유롭게 사는 것이 꿈이에요.”
내 말에 카인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공작, 도움은 정말로 고맙지만.”
서, 설득해야 해!
나는 진지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유진의 뒤에서 살짝 빠져나와 홀로 서서 황제를 봤을 때처럼 올곧은 자세로 카인을 마주했다.
“진심으로, 저는 공작이 말하는 방향을 원치 않아요.”
카인의 새카만 눈동자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소문도 들으셨다면 아시겠죠. 저는 그런 자리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렇습니까?”
유진은 일단 우리 대화를 듣기로 결정한 눈치였다. 정중한 카인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어떤 마음이신지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전하. 하지만.”
납득을 한 거 같은데. 나는 희망을 가졌다가 ‘하지만’이란 소리에 긴장하며 더욱 자세를 곧게 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카인은 내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으나, 제 눈에는 황태자보다 더욱 그 자리에 어울리는 성품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
……네?
지, 지금 황태자라고 했어? 전하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
“다만, 전하께서 뜻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확실히 늦기도 했군요. 그러나 저는 전하께서…… 황태자를 견제하는 패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잠깐. 저 눈은……. 이런 게 원작에 있었나? 카인의 새카만 눈동자는 유순했으나 일말의 적의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황태자를 입에 올릴 때마다 선명해졌다. 나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도 알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하지만 전, 떠날 사람이에요.”
유진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리고 유진이 나를 다시 뒤로 끌어오는 동시에 카인이 속삭였다.
“……그 전까지만이라도.”
“그만하십시오.”
유진이 냉랭하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도는 분위기에 나는 시무룩해졌다. 뭐지, 난 그냥 궁금한 거 물었을 뿐인데 이야기가 이리로 흐르고, 둘 분위기가 이 모양이 되었다. 그 팽팽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카인이 눈을 감으며 나직하게 사과했기 때문이다.
“실언을 했습니다. 잊어 주십시오, 전하.”
“아니에요.”
내가 허둥지둥 말했다. 이만큼 말했으니 이해했겠지 싶기도 했고, 당장 둘 사이가 안 좋아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죠. 네?”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분위기는 조금 풀렸다. 비록 내 자리가 중앙에서 유진 옆으로 옮겨졌지만. 어쨌거나 하나는 확인했다. 카인은 황태자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 원작에서는 호불호를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짧은 대화 후 도착한 약제실에는 록스뿐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름은 리플리입니다. 약초 관련 전문가죠.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아? ……나도 잘 부탁해.”
공작이나 자유 기사는 황족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분이지만 그는 아니었기에 그에게는 머뭇거림 끝에 말을 놓았다. 리플리는 잿빛이 도는 갈색 머리에 초록 눈을 가진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조금 얍삽한 인상이었지만 씨익 웃는 얼굴은 꽤나 친화력이 있었다. 그날 나는 그들의 설명을 돌아가며 들었고, 내가 앞으로 먹게 될 약을 한 움큼 받아 왔다.
유진과 카인, 리플리와 록스가 마나로 숙성 어쩌고 했는데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다 아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기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 미친. 3일째! 오늘이었구나! 아주 번번이 다 까먹는데, 다음엔 제대로 기억하고 움직여야겠다. 어우.
“전하, 이런…….”
몸이 쿨럭이자 유진이 낭패 어린 표정으로 내게 깨끗한 천을 내밀었다. 내가 피를 토하는 것을 직접 본 것이 처음인 세 사람은 멍하니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괘, 괜찮아요.”
나는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정말이지 지금 타이밍만 아니면 기억을 두 팔 벌려 환영할 텐데 말이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 밀려오는 기억은 후에 제대로 살피기로 했다.
“전혀 신경 쓸 것 없으니 계속해요. 부탁이에요.”
얼른 이 어려운 약초 과정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 네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유진부터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더욱더 열심히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 내 아는 척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약을 들고 돌아갈 때 즈음, 리플리가 록스에게 하는 말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전부 다 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배. 황녀님은 어마어마하게 영리한 분이셨네요.”
제, 제발 그만둬.
“게다가 저 의연함이라니. 존경스러울 정도…….”
악악! 나는 숨을 들이켜며 걸음을 서둘렀다.
혼자가 되고 살핀 언니의 기억은 역시나 여섯 살의 기억이었다. 언니가 입을 열었다.
“엠마, 그게 뭐지?”
“선물입니다, 전하.”
헉. 드디어! 목소리를 들었다! 심지어 젊은 엠마의 목소리도 함께 들으니까, 그게 참 다정한 울림이 되고 있었다. 나는 혼자 꺅꺅 거리며 발광을 하다가 아주 희미하게 웃는, 그러나 그 이상으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어린 언니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천사. 천사를 보았다. 엉엉, 끌어안아 주고 싶어!
언니는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축하 편지도 온 것 같았다.
[무사히 다섯 살을 넘기신 황녀 전하께. 여섯 살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단테 바누스]
바누스. 그 단어를 보고 나는 쪼그려 앉아 언니와 선물을 번갈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누스는 언니의 외가다. 언니의 어머니인 리시안 바누스가 죽은 뒤 교류가 끊겼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릴 땐 교류가 있었나? 하지만 발그레한 언니의 뺨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상념들은 모조리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오구오구, 언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요!
선물은 눈처럼 새하얀 깃펜이었다. 언니는 그 깃펜으로 짙은 회색의 글씨를 쓰는 데에 열중했다. 여섯 살의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바보같이 눈을 감고 흐뭇하게 웃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밝아지는 것 같은데.”
저렇게 밝아져도 어느 날에는 변할 것이다. 그러니까 병에 대해 알게 된 날에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기억을 보게 된다면 가슴이 무척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동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내가 겪어 본 르페르샤 언니라면 감히 동정을 하느냐며 이를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녀를 더 열심히 좋아하기로 했다. 챙겨 줄 수 있게 된 다른 인물들과 달리 우리 언니는 더는 챙겨줄 수 있는 게 없어진 사람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내가 받았으니까.”
덕질 인생은 하면 할수록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전생의 뒤죽박죽 한 기억들만 보아도 내가 전생에서 이렇게 마음껏 덕질을 할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을 알 수 있었다.
“덤으로 받은 인생인데 운까지 좋았지.”
흠, 그나저나 카인이랑 유진의 사이가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뭔가 성격은 반대이지만 서로 존중하는 호의가 느껴졌다.
“그 정도면 내가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겠어.”
반가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카인 개인의 문제를 조금 건드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카인도 조금 친해진 뒤에. 좋았어!”
나는 의욕적으로 즐거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이 여섯 살 기억이었으니, 벌써 르페르샤 언니를 만난 지 18일이 지난 것이었다. 내가 가진 3개월 중 18일이라니, 시간 참 빨랐다. 21일, 즉 다음 기억을 찾으면 3주가 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그 전에 카인과 더 자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나한테 부담스러운 걸 기대하기는 건 있지만.’
그래도. 르페르샤 언니가 죽은 것처럼 아리엘과 황태자의 사랑에 휘말려 불행해지게 할 수는 없다. 하여 당초의 목적대로 마음을 다졌다.
날이 밝자 나는 유진에게 말했다.
“볼턴 경, 오랜만에 산책 갈까요?”
“그러시겠습니까?”
그가 슬쩍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에게 제안했다.
“도서관은 어때요?”
요즘 카인이 도서관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유진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확실히 부쩍 웃음이 많아졌고, 어딘가 부드러워졌다. 신뢰가 어렴풋이 담긴 느낌. 실은 요즘은 꼭 카인과 유진과 나 셋이 다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좋죠. 가는 김에 거기 못 박혀 있는 어떤 사람도 끌어내는 건 어떻습니까?”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역시 참 말이 잘 통한다니까.
“휴가라고 해서 자주 볼 수 있겠구나 했거든요. 볼턴 경이랑 대련도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세상에 도서관이라뇨. 일만 할 때랑 다를 게 없잖아요!”
내가 반쯤 장난조로 열변을 토하자, 유진이 엄숙하게 동의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가실까요.”
우리는 똑같은 미소를 그리며 외궁 도서관으로 출동했다.
가는 길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유진을 스치듯 구경하기도 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우연인 척 웃어주기도 했다.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유진이 이상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뭐예요?”
눈을 가늘게 하고 묻자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시인이시네요, 전하. 감성만은요.”
놀리는 어투였다. 나는 픽 웃으며 답했다.
“제가 좀 감정이 풍부하기는 하죠.”
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잔잔하게 걸려 있는 것이 보기 좋았다.
“경은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가 봐요?”
“글쎄요. 아름답다는 말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 하긴. 그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여성에 대한 불신증이 생긴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해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주었다. 그때 나를 보면서 유진이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전하는 뭐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 좋을 일은 흔치 않은데 말입니다.”
무언가 말을 삼킨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내가 답했다.
“경이랑 친구가 된 것 같아서요.”
그가 순간 멈춰 섰다.
“경?”
아, 나 오해했어? 복귀도 하고, 느낌상 우리 친구된 거 같았는데?
“왜 그래요?”
그의 반응에 조금 서운해져서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동요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잠시 후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느릿하게 내 시선을 피하며 묘한 어조로 내게 답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가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친구라. 그러네요.”
아주 편안한 눈길이 닿아 오자 나는 그냥 안심했다. 그래서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싫어도 이제는 친구예요.”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윽고 멀리 외궁 도서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했네요.”
“꽤 많이 걸었는데 지치진 않으셨습니까?”
“괜찮아요.”
우리 카인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걸요. ‘외궁 도서관’은 황족과 고위귀족만 찾는 내궁 도서관과 달랐다. 황궁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곳. 물론 출입증은 필요했지만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와 유진은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제가 이렇게 든든합니다, 경.”
“출입증 하나로 생색이 과하십니다, 전하.”
기분 탓인가 유진의 말이 어째 좀 더 거침이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장난스럽게 그를 흘기자 그가 빙긋 입술을 말아 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헉. 어우 저거 뭐야, 뭐냐고! 에잇, 이런 미남 같으니!
킁, 나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카인을 찾은 것은 도서관의 정말 한참 구석에서였다. 한낮의 강렬한 햇살은 도서관의 창문을 통과하며 한결 수줍은 은은함을 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하나로 묶여 한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 위로 잔잔한 햇살이 드리워지자 그는 그곳에서 홀로 붕 떠 있는 듯한 신비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간이의자에 앉아 고서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전하?”
유진이 속삭이는 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내가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리고 그대로 서서 잠시 카인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유진을 이끌고 도서관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하게 묻는 유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뭔가 방해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여서요. 생각해 보니까 원하는 것 하면서 휴가 보내는 건데 방해하면 안 되겠구나, 싶기도 하고.”
사실 카인이 너무 예뻐서 그걸 망가뜨리기가 싫었던 거지만. 유진이 묘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또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유진은 나와 있을 때 저렇게 편안한 웃음을 종종 터뜨리고는 했다. 나는 그걸 잠시 눈에 담고서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건 원작에서는 표현된 적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것은 몹시 아름답기도 했지만 나에게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리엘을 위해 준비되었던 조연의 길에서 유진이 벗어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고 속으로 쓰담쓰담을 해 준 뒤, 뭐 하냐는 듯한 유진의 눈초리에 아닌 척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느릿하게 유진과의 산책을 즐겼다. 우리는 꽤 눈에 띄는 조합이기는 했다. 때문에 가능하면 사람이 별로 없고 탁 트인 곳들을 골라 다녔다.
사실 원작에서 르페르샤 언니는 체력이 아주 많이 약했었는데, 아직 이 몸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적어도 3개월은 체력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아야 좋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상념에 젖어 있는데 우리 미남께서 나를 부르셨다.
“아무것도요.”
나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어느새 일상이 된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다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전하. 볼턴 경.”
어? 하고 돌아보자 대체 언제 나온 건지 아까 그 아련하던 분위기는 없어진 선명한 미남이 서 있었다. 카인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가 슬쩍 눈을 피했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가시기에.”
다 알고 있었구나? 열중해서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를 줄 알았는데.
“잘됐네요. 모처럼 휴가니까, 맑은 공기 좀 같이 쐬면 어떨까 하고 찾아갔던 거였어요. 방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나온 거예요.”
“방해, 아닙니다.”
딱딱하게 변했지만 낯가리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 사람 지금, 쑥스러워하는 거구나! 나는 순간 유진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를 포착했다. 그는 하여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말하자 카인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대로 우린 같이 산책을 했다. 나와 유진, 카인의 손수건을 넓게 겹쳐서 쪼그리고 앉았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물론 카인은 같이 앉기를 거부했다. 무례한 행동이라나?
하지만 나는 그가 우리에게서 눈을 잠시도 떼지 않는 것을 보고 만족했다. 그건 그가 호감이 생겼을 때 하는 반응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는 그런 카인을 음험하다며 싫어했던 유진이 지금은 카인을 재밌어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좋은 시간이었어요.”
카인을 도서관까지 다시 데려다준 뒤 유진과 돌아오면서 말했다.
“참 선한 분 같고요.”
“공작 각하 말입니까?”
“네.”
내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유진이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아무도 각하를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유진이 가볍게 웃었다.
“전하는 이상한 분입니다.”
나직한 말소리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얼핏 그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 * *
궁에 도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소문에 대한 악의적 해석이 또 다른 소문을 낳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황녀가 죽어 간다는 소문. 아니, 스스로 죽으려 한다는 소문. 황제가 결국 황녀를 내쳤다는 소문부터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까지.
하지만 그런 소문은 황녀궁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궁인들은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황녀는 어느새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었고, 괜찮은 주인이 되어 있었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대청소의 날을 맞은 오늘, 얌전하게 있겠다고 하고서 창가에 다소곳이 앉은 황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
하늘을 보며 고상하게 웃고 있는 르페르샤 황녀. 그녀의 중얼거림에 황녀궁의 궁인들이 입을 꾸욱 다물고 서로 눈짓을 했다. 그들은 슬금슬금 퍼지는 황녀에 대한 소문을 접하고 그게 주인의 귀에 들어가 그녀를 상처 입힐까 전전긍긍해 왔었다.
바람이 머리를 살짝 스치자 달빛이 고인 듯 빛나던 머리카락이 황녀의 볼을 가렸다. 황녀가 손으로 머리를 모아 한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렸다. 대강 땋고서 동여매지 않고 툭 놓아 버린 머리카락이 흐드러지게 흩뜨려졌다.
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은 황녀의 얼굴이 선연히 드러났다.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는 몽환적이었다. 먼 곳, 사라진 무언가를 그리듯이. 문득 맑은 음성이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야. 꿈결 같아.”
조용히 혼잣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 미남 둘을 마음껏 보고 추억을 만든 덕심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보기엔 어딘가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몇 주간 달라진 황녀에 의해 마음이 녹고, 거기에 불미스러운 소문까지 접한 궁인들의 입장에서는.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말갛게 빛났다. 그 말간 표정과 말들이 듣는 이들의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어쩜 좋아. 우리 황녀님.’
‘그래도 참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신 걸까.’
예전에 궁인들은 그들이 모시는 황녀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늘 꼿꼿하고 우아하게 찬기가 돌던 황녀가 변하고, 이렇게 아련한 분위기를 내는 것을 보니 마음이 괜히 먹먹해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한 번 걸러진 뒤 궁에 남은 이들은 약간의 부채감을 안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봐 온 사람들인데도 황녀의 억울한 소문들에 휩쓸렸다는 부채감 말이다. 이렇듯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황녀에게 마음을 열게 된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안타까운 눈으로 황녀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는 황녀가 소문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녀는 저토록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황녀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남기는 게 좋겠어.”
처음 보는 아름다운 미소와 부드러운 눈길이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상냥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였다.
함께 있던 시녀들은 그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과 분위기, 자신들의 안타까운 감정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조금 늦게 이해했다.
‘잠깐. 지금 무언가 남기시겠다고.’
벌써 몇몇 시녀들이 울컥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아린은 그들 사이에서 울음을 꾹 참고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일기를 써야겠어.”
다시 시선을 밤하늘로 돌리며 황녀가 아련하게 속삭였다. 결국 참지 못한 몇몇 시녀들이 엠마에게 우다다다 달려갔다. 그리고 훌쩍이며 외쳤다.
“황녀님께서…… 일기를, 흑, 뭘 남기고 싶으시다고…….”
“일기를 쓰신, 대요, 헝, 한 번도 그런 건, 안 하셨는데…… 으흐흑!”
늘 차분하던 엠마는 일단 시녀들을 다독였다. 표하지는 않았으나 엠마도 황궁에 도는 황녀에 대한 은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악의적인 요소들을 제하고 나면 소문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황녀 전하께서 죽어 가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황녀궁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황녀가 어딘가 아프다는 것을. 그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함구하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르는 바깥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흥미본위로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엠마는 훌쩍이는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분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셨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사실 높으신 분이 어떤 불행한 일을 겪는다고 해서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동요를 크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황녀가 근래 들어 자기 궁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리니를 어린 동생처럼 어여뻐하는 모습뿐이 아니었다. 모든 궁인들에게 살가운 데다 결정적으로 황녀에게서는 신분차로 인한 거리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르페르샤 황녀는 자신이 그들의 주인인 동시에 이제 겨우 19살이 된 소녀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어느새 그녀는 궁인들 사이에 특별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엠마와 리니, 아린처럼 가까운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런데…….
‘흔적을 남기시고 싶으시다는 건가.’
엠마가 결국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죽을 때 무엇이라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일기.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황녀는 사정이 특수하지 않은가.
‘보통은 타인에게 자신을 기억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소중한 황녀 전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외로운 세월을 살아온 분이었다.
‘그래서 일기나마 남기려는 것이겠지.’
시녀들이 전부 안정을 찾을 때까지도 엠마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를 몇 번 부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엠마는 얼마간 말을 고르다가,
“내 준비해 드릴 것이니 다들 돌아가 보세요.”
복잡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이라면 가장 좋은 것으로 해 드리리라. 그리 다짐하며.
* * *
황녀의 체력이 생각보다 약해서 유진과 카인 말고는 원작에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주 충분했다. 오늘 되찾은 언니의 7살 기억도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수습했고 말이다. 7살 언니는 공부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여, 역시 언니. 어쨌거나 근 몇 주간은 눈부신 날들이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
눈 보신이란 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었구나. 그것은 생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힘까지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둘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다른 인물들을 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거지. 히히.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야. 꿈결 같은.”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쯤 되니 나는 내가 큰 움직임을 자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황궁을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바깥을 이곳저곳 유람하는 것은 병이 낫기 전엔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게다가 시간이 많지 않고.’
순간순간이 아까웠다. 금세 꿈처럼 지나갈 시간들이니까. 원작이 시작되는 시기엔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말이다. 다 날 따라온다면 또 몰라. 그러니 최대한 기억이나 증거를 남겨 둬야 나중에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먼저 일기를 쓰기로 했다. 이 감동들을 한 땀 한 땀 남겨 두겠어. 두 미남들의 얼굴이 선사하는 질리지 않는 감동을! 그 수줍음과 그 능청스러움을!
물론 전부 한글로 쓸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기 쓸 거니까 적당히 남는 노트를 가져와 달라고 했더니 시녀들과 아린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대답은 해 주고 가지. 야속한 사람들.”
나는 떠난 그들을 보고 당황하다가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그들이 하다 만 청소를 몰래 했다. 그들은 어딜 갔다 왔는지 눈가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었어?”
놀라서 묻자 아린이 아닙니다, 하고 웅얼거렸다. 아니긴. 울었구만. 하지만 캐묻기는 뭣해서 그냥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알았어. 혹시 힘든 거 있으면 꼭 말해야 한다?”
“네, 전하.”
“예…….”
“네, 킁.”
최대한 다정하게 웃어 준 뒤 나는 구석에 있던 쿠션을 하나 들었다. 그리고 다시 창가로 가서 얌전히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쿠션은 엉덩이에 받치고.
그때 한 시녀가 내게 말했다.
“시녀장님이 노트를 구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나는 반색했다.
“그렇구나. 전해 주러 갔던 거야? 고마워라.”
“아, 아닙니다.”
음.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수줍음이군. 나는 감기에 걸려서 오지 못한 리니를 떠올리며 곱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최대한 예쁜 포즈로 앉아 그들을 보며 말했다.
“청소 방해 안 할 테니 어서 일들 해.”
그들은 나를 보며 우물쭈물하다가 슬쩍 웃는 둥 마는 둥 하며 청소를 다시 시작했다. 뭔가 나올 때와 상태가 다른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나갔을 때 해 놓은 나의 예쁜 짓을 상기하며 속으로 열심히 나를 칭찬했다. 아무도 안 해 주니까 나라도 해 줘야지 하고.
“고마워. 조심해서 돌아가렴.”
청소가 끝나고 미소로 그들을 배웅한 뒤 나는 말끔해진 방에서 심호흡을 했다.
“일기는 한글로 쓰는 게 좋겠지?”
일기장 제목은 ‘아름다운 세상’ 정도면 되겠다!
그날 밤은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숄을 찾아 어깨에 두르고 사람이 잘 찾지 않는 황궁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늦여름이었다. 그래도 황궁은 늘 선선했고 지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운치 있는 달밤이었다.
‘앞으로 종종 즐겨야겠는데?’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
조금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밖에도 나가 봐야 하는데.”
사실 수도에서 가장 큰 시장 거리에 가 보고 싶다고 채비를 하게 시켰었다. 궁의 바깥에도 만나고 싶은 인물들이 있었으니까. 유진과 카인도 만났으니 이제 슬슬 밖에 나가 봐야 했다. 이비엔 영애를 돕기 위해서라도. 할 일이 많은데……. 그런데 록스가 만류했다. 힝.
“…….”
저 동그란 달을 세게 꼬집어 주고 싶어졌다. 나는 속으로 록스를 향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록스는 내가 시장에 나가면 곳곳에 멍이 들고 반쯤 시체가 되어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사, 너무 과해!
그런데 그때였다. 부스럭.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작?”
“…….”
그가 나를 지그시 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참 말이 적은 사내였다. 그게 또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아! 저걸 무뚝뚝한 짐승남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지, 짐승이라기엔 그는 좀 더 섬세한 것 같으니.
카인은 여주인공 아리엘 랭턴을 황태자 다음으로 마주친 사람이었다. 일 중독자라 밖에 나올 일이 없었던 그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러 가는 길에 울고 있던 아리엘을 만난다.
아리엘은 손가락을 종이에 베였다며 울고 있었지. 그 장면 어이없어서 웃겼는데. 아무튼 늘 진지한 남자였다. 이제 보니 순박하기도 하고. 그런 그가 사실 진짜 뱀파이어의 혼혈이라는 사실은 그의 어두운 과거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항상 어딘가 우울해 보였고, 그 우울한 성정에 감정적이고 잘 웃고 순수한 아리엘은 빛과 같았다고…….
‘여기서 포인트는 뱀파이어 혼혈이라는 거지. 어우 낭만적이야.’
미남 귀한 줄 모르는 황태자 놈만 아니었다면 성실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갔을 텐데. 나는 속으로 황태자를 욕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멀거니 보고만 있던 그는 내가 다가가자 살짝 놀랐다. 그러더니 몇 걸음 내 쪽으로 마주 걸어와 입을 열었다.
“전하.”
하하. 부르기만 해 놓고 지그시 보기만 한다.
하지만 뭐 어떤가. 지독하게 말이 없는 남자긴 해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을. 나는 홀린 듯 그 짙고 어두운 눈동자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 버렸다. 이것은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뭐, 내가 먼저 말 걸어 주면 되지.
“좋은 밤이에요.”
미남과 달과 풀벌레 소리. 여기에 술만 있으면 완벽한데 말이다.
“…….”
잠시 말없는 시간이 흘렀다.
카인의 외모는 밤에 보니 더욱 완벽했다. 선선히 스치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먹물처럼 흐트러졌다.
아. 정말 곱기도 하지.
난 그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했다. 그리고 그리하여……. 미친 짓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말없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만 있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옷자락을 쥐고 끌어서 주변 평평한 바위 위에 앉혔다.
“공작.”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에게 굉장히 뜬금없는 말을 했다.
“공작은요, 어디서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됩니다. 알았죠?”
나 떠난 뒤에 혹시 황태자가 뭘 해도 지지 마요!
사실 그와는 유진에 비해 별로 대화를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분위기에 취해서 말해 본 것일 뿐.
‘걱정되네. 좀 다쳐도 멋있겠지만.’
팔이 아니라도 저 완벽한 미남이 다치고 상처 입어…… 음, 잠깐, 조금…… 조금 상처 입는 정도는 좀 좋은 것 같기도…….
‘꺅!’
아니, 아니, 위험하다. 나는 위험한 욕망을 가까스로 날려 버렸다. 공작은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가 있었다. 얕은 떨림이 까만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균열 없이 완벽하던 얼굴에 울 듯한 일그러짐이 살짝 어렸다.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얼굴이 그리 흔들리는 것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데 그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전하, 무슨 의미이신지?”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그냥요. 그냥……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건강히 계셔 주시길 바라요.”
부디 온전한 미남으로 남아 줘요.
가끔 이렇게 답답한 날 힐링 좀 하게! 지금 내 덕질의 길이 콱 막히게 생겼는데 당신들이라도 자꾸 얼굴을 보여 줘야지. 엉엉. 울적해지려는 기분에 입가의 미소가 흐려지려던 순간 가만히 듣던 카인이 또 입을 열었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홀로 성장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친구는 없었고요.”
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을 하는 카인이 아주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친구가 한 명 생겼습니다.”
카인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략한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라고 믿은 그 사람이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네 친구가 되어 줬으니 네 피와 살과 심장을 자신에게 달라고.”
무언가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그의 불행한 과거는 이 비유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친구에게 알았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가 사실은 아이를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카인이 물었다.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어떻냐고요? 어떻냐니, 음…….”
카인 표정이 다소 어두웠다. 그가 무엇에 대해 묻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되묻기엔 어려운 분위기였다.
고민하던 나는 그냥 무난하게 답하기로 했다.
“아이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순간 카인이 흠칫하며 나를 보았다. 생각도 못한 말을 들은 모습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그런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벗어나야죠. 피도, 살도, 심장도 더 빼앗기기 전에요. 애초에 주지 말았어야 해요. 진짜 친구는 그런 것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고요.”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저 이야기의 아이가 카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카인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정적을 깨며 카인이 말했다.
“전하.”
“네?”
“내일, 볼턴 경과 저, 두 사람이 동행하겠습니다.”
내 뜬금없는 대답에 복수라도 하듯 만만찮게 앞뒤 잘라먹은 말이었다.
“무슨…….”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 와중에도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해롱거리던 찰나. 그가 나를 부드럽게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
아? 저거 내 말대로 안 다치고 안 죽겠다는 말인가? 그게 다짐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카인은 진지했다. 혹시 내가 너무 무게 잡고 말했나? 어쩐지 고맙다고 말하면서 절을 해야 할 것 같은 묵직한 분위기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내일, 뜻대로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 깊은 눈매를 오묘하게 빛내며 나를 뚫어져라 보던 그는 이내 왔을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멀어졌다.
“…….”
으, 으음. 그래도 고맙네. 뜬금없는 말에 저렇게 진심으로 말해 주니 기분이 되게 좋았다. 좀 당황스럽긴 한데 그답다고 해야 할까.
“하…….”
사랑스럽다. 나는 감격해서 차오르는 눈물을 고개를 털어 수습하고는 황홀한 기분에 멍청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가볍게 달려서 궁으로 돌아갔다.
* * *
카인이 황녀궁 주변의 황궁 정원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유진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얼마 전 의원 록스와 약초전문가 리플리를 사이에 두고 네 사람은 황녀의 병의 진행을 늦출 방안을 파헤쳤다.
의외로 진행을 조금 늦추는 것 정도는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날 카인은 근 한 달 중 가장 많이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뿐인가. 능청스러운 자유 기사 볼턴 경과 의도치 않은 친분까지 쌓게 되었다.
‘친분…….’
그는 문득 그가 그나마 밝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그의 곁에 다가왔던 적금발의 황태자도. 충성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차게 되었던 그 모든 과정을. 그는 배척받는 힘을 쥐고 태어나 소중한 것을 그 힘으로 잃었다. 그리고 그 사실마저 이용당해야 했다.
그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만큼 그를 이용한 황태자도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의 용서는 황태자에게는 의미가 없을 테지만.
‘황녀는 황태자를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패를 가진 인물이었지.’
황태자가 가지지 못한 훌륭한 외가라는 패 말이다. 비록 리시안 바누스 때문에 은거하고 있는 가문이라고 해도. 그래서 그때 집무실에서 르페르샤를 본 순간 그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랐던 최상의 무기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저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열을 올리지는 않았을 텐데. 평소답지 않게 이 일에 열을 올린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마도 그것은 그 황녀의 마지막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황녀를 보았을 때의 상황은 너무나 공교로웠다. 또한 그때 본 황녀는…….
‘가여웠고, 잊고 싶었던 사람을 닮아서.’
그를 유일하게 배척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닮았다. 그 눈빛이. 그 연약함이. 유진이 이러한 이유를 들었다면 역시나 생긴 것 같지 않게 오지랖이 넓다고 놀렸을 테지만. 그러나 그 누가 쉬이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런 얼굴을.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충격을 능숙하게 삭혀 내던. 그것은 그 어느 날의 그를 닮아 있었고, 또 그 어느 날의 그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가까이에서 지켜본 황녀는 그에게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말주변이 없어 다 표현할 수는 없으나, 황녀는 정말 밝은 사람이었다. 햇살에서 태어난 사람이 달처럼 웃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중 황녀의 일과 관련하여 할 말이 있어 유진을 찾은 참이었다.
“…….”
돌아가는 길. 그는 요즘 들어 자꾸 떠오르는 르페르샤 황녀에 대해 또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저 멀리 거짓말처럼, 황녀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시간에 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소리에 본인이 더 놀라 버렸다. 깊은 밤이었다.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의 외침을 무시하고 그는 이미 황녀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황녀의 얼굴이 훤히 보일 때 즈음 그는 우뚝 서 버렸다.
황녀의 민낯은 서글펐다. 꾸밈없고 말간 얼굴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감추지 못한 괴로움과 슬픔이 엿보였다. 그것은 보는 이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깊은 것이어서.
아, 그래. 괜찮을 리가 없는데.
처음 만난 이후로 꽤 자주 보는 황녀는 객관적으로도 늘 밝았다. 다들 어려워하는 그를 서슴없이 대하기도 했고. 잘 웃었고, 듣던 대로 우아했지만 듣던 것과 달리 봄처럼 따스했다. 그래서 어느새 그는 황녀가 강하다고만 느꼈던 것이다.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지금은 괜찮다고.
‘그런데 이렇게 뒤에서는 홀로 아파했던 건가.’
상대할수록 까다로운 인간인 볼턴 경이 어째서 저 황녀에게는 그토록 신경 쓰는지, 카인은 이제야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인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
혼잣말인지 소리가 작았다.
“밖에 나가 봐야 하는데.”
그리고 떨리고 있었다.
‘밖에.’
그러고 보니 아까 시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들었다. 가고 싶다는 시장 거리는 블란쳇 거리. 그곳은 수도에서 가장 크고 다채로운 곳이었다. 황녀가 가기에는 너무 복잡한 곳이었다. 때문에 록스와 리플리는 반대했다. 카인도 같은 입장이었다.
‘볼턴 경은 아니었지만. 무슨 권리로 하고 싶다는 것을 막느냐고 했던가.
황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은 아직 아는 이가 적었다. 황녀궁 사람들은 뭔가 알아챘겠지만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 외에는 록스가 알렸던 몇몇이 다였다.
그것은 황녀를 지키는 동시에 위협하는 요소였다. 그녀의 상태를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그런데 하물며 시장이라니.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황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카인이 주먹을 꾸욱 쥐었다가 풀었다. 그는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결국 나서고 말았다.
‘위험하다고 말씀드리자.’
황녀의 마음은 아마도 시간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그것을 이리 보았음에도 공작은 그렇게 황녀를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좋은 밤이에요.”
그 말갛게 웃는 고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
“공작.”
황녀가 그를 불렀다.
“공작은요, 어디 가서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됩니다. 알았죠?”
알 수 없는 말이 조곤조곤 이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황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친 기억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누구도 카인이 다치거나 죽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그래 왔기에 이 상황은 그에게 몹시 생소한 것이었다. 이상하다. 황녀는 진심으로 그리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황녀의 애틋한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에. 그는 아까 하고자 했던 말을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어졌다.
“전하, 무슨 의미이신지?”
하여 그저 물어보았다. 황녀는 그다지 망설이지도 않고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그냥요. 그냥……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건강히 계셔 주시길 바라요.”
달빛이 흐려 보일 정도로 화사하던 그녀의 미소가 순간 울듯이 일그러졌다.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마음을 밝음으로 감추기에는 너무 쓸쓸한 시간이라서 황녀는 웃어도 슬퍼 보였다. 그래서였다. 어쩐지 지금의 그녀에게서 무슨 말이든 듣고 싶어졌다. 그가 오랫동안 품은 증오에 대해서.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배척받으며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품은 증오마저 마음 한편에서 떳떳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피해자임이 분명한데도.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사실은 끊어 낼 생각도 있었다. 그녀가 너무 지나치게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뱀파이어의 핏줄에게 그것은 쓸데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아이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순간 자신의 표정을 관리하는 것을 잊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황녀가 맑은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주지 말았어야 해요. 진짜 친구는 그런 것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고요.”
그것은 아주 의외였지만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것이 맞았다.
마음이 한 꺼풀, 두 꺼풀 풀리기 시작했다. 몇 겹이 풀리며 그녀의 작은 미소가, 또 몇 겹이 풀리며 그녀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미소는 따스했고, 따스한 눈빛은 서글펐다. 그 서글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전하.”
“네?”
“내일, 볼턴 경과 저, 두 사람이 동행하겠습니다.”
어쩌면 정이 들지도 모르겠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짧은 생을 살 르페르샤에게 정을 붙이는 건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알고 있는데, 끊어 내기에는 늦어 있었다. 카인의 인생에 그토록 따스하고 사심 없게 다가온 이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조차 그에게 죽지 말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죽기 전의 아픔이라도 없기를.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원하는 걸 하시기를.’
그러니 이렇게 혼자 괴로워 말고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더 많이 웃으시길.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황녀의 눈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 생이 이어지는 한, 저는 당신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 하시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우리가 치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지켜보겠노라고.
“……그럼.”
카인이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단단하게 쥐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죽기 전 최대한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생각인데, 나중 언젠가는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담담히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확신 어린 생각이.
‘아니. 문제없다.’
설사 그리 되더라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걸 아니까.
“내일, 뜻대로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카인은 르페르샤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록스와 리플리는 두 사람의 설득에 결국 파들파들 떨며 백기를 들었다.
* * *
우훗, 우훗, 우훗!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역시 슬픔 뒤엔 행복이 오는 것인가!
아침에 들려온 외출 허가 소식에 나는 활짝 웃으며 록스를 끌어안았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유진과 카인도 슬쩍 한 번씩 안아 보았다. 거의 닿을락 말락한 포옹이어서 다들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연한 거지. 설령 만질 수 있어도 소중한 원작 인물에게 손댈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란 여자, 대단한 의지의 화신. 흥분한 중에도 사심 채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네! 속으로 그런 말을 흥얼대며, 겉으로는 최대한 황녀답게 기쁨을 표하고자 나름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나 보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나를 지켜보던 유진이 비식 웃으며 물었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 같이 가는 건 두 사람인가요?”
“예.”
카인이 답했다. 나는 엠마에게 부탁했다.
“엠마, 평민 남성들이 입는 옷도 함께 준비해 주겠어?”
엠마가 은은하게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옷들을 대령했다. 사이즈까지 딱 맞춰서.
“엠마 최고! 자, 두 분 다 이걸로 갈아입으시고!”
“철저하십니다, 전하.”
옷을 받아 드는 유진이 묘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진이 습관적으로 물고 있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그의 알 수 없는 시선에 나는 그저 배시시 웃고 말았다. 유진은 다시 미묘한 기색을 없애며 말했다.
“실은 이게 다 아이릭 공작 각하 덕분이지요.”
“네?”
“어제 얼마나 간곡하게.”
“볼턴.”
내가 의아해서 갸웃거리자 카인이 유진을 나직하게 불렀다. 유진이 빙긋 웃으며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뭐지?
그러다 오늘따라 조금 기분이 들뜬 것 같아 보이는 카인을 가만히 보았다. 늘 낯을 가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흠.
“어……?”
그러다 내가 놀라자 유진이 의아한 기색으로 내 시선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오, 하고 입 모양으로 감탄을 흘렸다.
“아.”
아니, 그 무뚝뚝한 남자가 세상에……. 카인이 서툴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악, 귀여워!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벅차 왔다.
그리고…….
“헉!”
“전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한쪽에 서서 싱글벙글 웃고 있던 리니와 아린이 사색이 되어 달려와 날 부축했다. 리니, 아린. 언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전하…… 피, 피가!”
너무 좋아……. 나는 행복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미남은 사색이 된 얼굴도 색다르구나. 어우, 이건 뭐 출구가 없어! 흑백의 조화까지 완벽했다.
“이런, 록스! 빨리!”
결국 그런 생각을 끝으로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덕분에 외출은 이틀 미뤄지게 됐지만 상관없었다. 대신 나는 미뤄 두었던 카인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미소를 보니 그가 충분히 내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인은 유진 다음으로 쉽게 여주인공 아리엘을 사랑하게 되었던 서브 남주였다. 그가 아리엘을 사랑하게 된 장면은 매우 아리엘다우면서도 다소 카인이 안쓰러운 장면이었다.
“슬슬 그 포인트를 찌를 때가 온 거야.”
그가 아리엘에게 목숨까지는 걸지 않을 수 있는 포인트. 에헤헤. 착착 진행이 되니까 기쁘다. 헤픈 웃음을 흘리며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카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꼭두새벽부터 움직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이 피 토하는 날이니까. 그래도 꼭두새벽에 피를 토한 적은 없으니, 이 시간대가 가장 안전하지.’
게다가 새벽에는 카인이 규칙적으로 찾는 곳이 있었다. 업무 장소의 가까운 공터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다. 그도 유진과 같은 기사이니까. 그러고 보면 여주인공이 그와 마주쳤던 시간대도 이때였지.
어쨌거나 나는 오늘 나쁜 꿈을 꿔서 일찍 잠이 깬 황녀님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산책을 하다가 그를 우연히 마주칠 것이며, 둘만의 시간을 잠깐 가지는 것이다. 나는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그저께 밤에 걸쳤던 보드라운 숄을 어깨에 둘렀다.
이윽고 새벽의 촉촉한 공기가 나를 반겨 주었다. 그 상쾌하고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걷다가 보드라운 꽃잎들을 만져 보기도 하고, 그간 제대로 구경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구석구석 살펴보기도 했다.
‘역시 아침 운동은 좋은 거였어.’
산책에 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절로 배어 나오는 미소를 가까스로 자제했다. 이윽고 목적지인 공터가 보였다. 꽤 걸은 것 같아서 마침 쉴 공간이 필요하던 터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수풀을 헤치고 언뜻 보이는 공터로 다가가려던 순간 어디서 ‘잠깐!’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하지만 조금 미심쩍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카인 앞에 나타나기로 했다. 인기척이라도 내고 예의바르게 다가가려고 했건만. 빠르게 공터로 발을 디디자 때마침 공터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는 공작이 보였다.
“전하?”
공작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타이밍 맞춰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불렀다.
“공작?”
“여긴, 어떻게.”
그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혼자 오신 겁니까?”
“네. 그…… 공작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뭔가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나직하게 답했다.
“전혀, 아닙니다. 그보다 전하, 추워 보이십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새벽에 보니 묘하게 더 새카맣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눈동자에서 미약한 호감이 읽혀지니 더더욱.
“안 추워요.”
난 지금 설레서 열이 날 지경인 걸요. 목이 졸린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일부러 작게 말했더니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떡해, 뭔가 애잔해. 아름다워!
“……실례하겠습니다.”
“네?”
그 아름다운 생명체는 놀랍게도 다음 순간 내가 기절할 만한 행동을 했다. 아주 잠깐 만에 어디를 다녀온 그가 가져온 것은 모포였다. 부드러운 재질은 아니었지만 어깨에 두르자 몹시 따뜻했다. 나는 그제야 내 몸이 식었음을 깨달았다. 아이고, 훌쩍.
“고, 고마워요.”
그가 살짝 고개를 저은 뒤 자연스럽게 나를 공터 밖으로 이끌어 걷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동작에 나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내가 그와 함께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헉! 심쿵.
그를 올려다보자 묵묵히 있던 카인이 물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찌 주무시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헤헤, 뭔가 우울한 말투인데 상냥하다. 나는 가볍게 튀어 나가려는 흐뭇한 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악몽을 꾸었거든요. 일찍 일어났는데 잠이 다시 오지 않아서요.”
“악몽, 말입니까.”
“네, 뭐, 그런 날도 있는 거죠.”
이제 꽤 익숙해진 보드라운 미소를 걸치며 그에게 말했다.
“경은요? 거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아, 혹시 곤란하면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새벽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애쓰며 조곤조곤하게 묻자, 끊임없이 내 기색을 살피던 그가 말했다.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좋았어. 이 주제를 끌어내기 위해 이 새벽에 나온 것이기도 했다. 속으로 씨익 웃으며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련이요?”
“예.”
“이런. 제가 정말 방해가 되었네요. 정말 미안해요, 공작.”
일반적으로 남성 귀족이 수련을 한다고 하면 검을 갈고닦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맞춘 당연한 반응을 보여준 뒤 나는 그의 답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검이 아니라 마음을 수련한 것이니까요.”
여기까지의 대화는 놀랍게도 원작에서 아리엘과 그가 나눴던 대화와 상당 부분 흡사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아리엘은 답했었다. “마음이요?”라고.
“아, 마음…….”
그러나 그건 아리엘의 몫으로 남겨 두고, 나는 그냥 내 식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아리엘과 있었던 대화를 그대로 따라가게 되면 대화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황녀궁은 여기서 가까웠다. 킁.
“마음 수련이라.”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의 말을 곱씹듯 재차 중얼거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렇군요. 수련하면, 마음도 강해지던가요?”
내 물음에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하하. 분위기는 점점 잡혀 가는데 지금 내 상태는 아주 아슬아슬했다.
‘동굴 목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어. 꺅!’
그러나 여기서 망칠 수는 없는 일. 뱀파이어의 피가 섞여 제어가 안 되는 강한 마력을 타고난 카인. 그가 가진 아픔은 말 한마디로 나아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간의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마법의 말이 있었다. 그걸 가능하면 그에게 큰 위로가 되도록 건네야 했다.
“그렇군요.”
블랙홀 같은 그의 얼굴에서 어렵사리 눈을 떼며 나는 여상스럽게 답했다.
“하긴 본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정확히 가늠할까요. 제 질문이 어리석었어요.”
그리고 바로 이어 물었다.
“하지만 마음을 수련한다니. 공작이 무언가 마음이 어려운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마음 쓰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카인은 저렇게 말한 뒤 재빨리 덧붙였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맑은 새벽에 우울의 정점을 찍기 시작한 공작을 힐끔 본 뒤 다시 정면에 시선을 두며 나는 미소를 감추었다.
“캐묻고자 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그리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려고 했던 바로 그 대사를.
“만약 공작의 마음이 힘겨운 것이라면, 그렇다면 수련하지 말고 그냥 쉬어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했을 뿐이랍니다.”
‘힘든데 왜 수련을 하죠? 쉬어요, 카인!’
아리엘은 카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졸졸 따라다니다가 저렇게 말했다. 물론 마음을 수련한다는 건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힘들어서 수련한다는 말에 저렇게 답했을 뿐. 나는 저 말이 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었는지 원작으로 알고 있었다.
“…….”
공작이 말없이 느릿하게 걸음을 멈췄다. 나도 따라서 멈췄다. 많은 것을 담고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어둡고 슬퍼 보였다. 힝. 가슴이 찡했다.
그는 어린 시절 다루지 못하는 마력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상실이 익숙한 사람.
“쉬어요, 공작.”
나는 새삼 그에 대한 것을 상기하며 가만가만 그에게 말했다.
“사실 늘 말하고 싶었거든요. 당신에게.”
그러자 그의 눈꺼풀이 가까이에서 떨렸다.
“저에 대해 무엇을, 아시는 겁니까?”
“아무것도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이라고 말하려는 그를 올려다보며 내가 작게 눈웃음을 쳤다.
“그저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꼭 동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뿐이에요.”
당신 사정에 대해선 몰라. 근데 분위기를 읽었어. 대충 그런 말이었다. 꽤 오래 고민한 나만의 답이었다. 카인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울듯이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 희귀한 표정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좋아. 난, 홀리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 어린 손은 저렇게 비 맞은 강아지 같이 축 처져 있는 미남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나의 덕심을 외면하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그의 까만 머리를 가볍게 만지고 말았다.
쓰담쓰담.
힉!
“…….”
짙어져 가던 그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헉, 귀엽, 아니, 아니 아니! 이 나쁜 손!
나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움직여 몇 걸음 앞서 걸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면 충분해요.”
“……! 전하.”
“고마워요, 공작. 들어갈게요. 살펴 가요.”
그, 그래. 불쾌한 얼굴은 아니야. 나는 성공했어.
저 사람은 이제 아리엘에게 같은 말을 들어도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응하지는 않을 거야. 확신하며 나는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찾은 8번째 언니의 기억에서 언니는 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 * *
세간에 동경과 두려움, 두 상반된 감정들의 대상이 되는 남자는 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멍청했다. 그는 멀어지는 르페르샤 황녀를 잡지 못했다. 한쪽으로 묶어 늘어뜨린 긴 흑발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카인은 손을 들어 아까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자리로 손을 가까이했다. 차마 대지 못한 것은 닿았던 그 느낌이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는 입을 꾸욱 다물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잡을 새도 없이 멀어져 간 르페르샤 황녀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귓가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만약 공작의 마음이 힘겨운 것이라면, 그렇다면 수련하지 말고 그냥 쉬어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했을 뿐이랍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잔잔했으나 늘 그렇듯 다정하고 밝은 어조였다. 그러나 무언가 달랐다. 고요한 새벽에 들었기 때문일까. 카인은 어쩐지 무언가가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습관적으로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가 겪어 온 상실의 팔 할은 그의 마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적었다. 황제조차 다 알지 못하는데. 그녀가 알 리는 없었다. 그럴진대, 그녀는 다 아는 듯이, 그러나 전부 괜찮다는 듯이 곱게 미소 지었다.
“쉬어요, 공작.”
별것 아닌 그 말이 왜 이리 진하게 남는 건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들었기 때문인가.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녀의 잔영이 참으로 오래도 남아 있어서. 그는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카인을 보던 누군가는 서늘한 낯에 다소 유쾌하지 않은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악몽을 꾸셨다고…….”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하나 무려 소리 내어 중얼거렸는데도 카인은 듣지 못했다. 그런 카인을 보는 누군가의 눈이 불퉁해졌다.
“쯧, 혼이 나가셨군.”
정말 중요한 것도 놓치시고.
그는 유진이었다. 본래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잠이 적어진다. 더군다나 그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유진은 잠이 거의 없는 축에 속했다. 때문에 르페르샤 황녀의 방이 비는 것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는 호위 기사였지만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르페르샤가 카인이 있는 곳에 들어가려 했을 때는 무심코 ‘안 돼!’를 외쳤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 실수는 저기 있는 카인에 비하면 실수 축에도 들지 않았다.
“악몽을 꾸셨다고만 넘기기엔 전하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은신해 있던 나무 위에서 소리 없이 내려가며 유진이 말했다. 그제야 유진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카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켜보고 있었나?”
“그게 중요합니까?”
“…….”
퉁명스러운 대꾸에 카인이 침묵했다. 그래, 중요한 것은 황녀의 상태였다.
“각하, 전하를 그대로 그냥 보내다니요.”
“따르는 자가 있더군.”
“그야. 예, 지금쯤 만나셨을 겁니다. 궁의 기사들도 이제 조금 쓸 만해져서 말이죠.”
유진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카인과 달리 황녀의 궁 소속인 유진은 황녀가 자기 방에 있을 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주로 록스의 연구를 돕기는 하지만 그 외에 궁의 기사들을 굴리는 것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늦게까지 수련하고 있던 성실한 기사 하나를 다짜고짜 끌고서 황녀의 뒤를 따랐던 유진은 이제 혼자가 되어 카인과 마주했다. 유진이 습관적인 미소를 머금고 카인에게 말했다.
“대화에 취하셔서 자세히 보지 못하신 듯해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선 그저 그런 악몽을 꾸신 것이 아닐 겁니다.”
둘은 방금 본 황녀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유진은 황녀가 느릿하게 걸어 산책을 하던 것을 보았다. 피어오르던 작은 미소가 눈부셔서 차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인을 만난 뒤 정확히는 카인의 ‘마음 수련’이란 말을 들으면서 안색이 나빠졌다.
‘무언가 꾹 참는 것처럼.’
유진의 눈이 옅은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근래 궁에 은밀하게 도는 소문을 아십니까?”
“소문?”
“황녀 전하께서 죽음에 가까워지신다, 하더군요.”
“그게 무슨…….”
“그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이 소문을 들은 곳이 전하의 궁 주변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진의 짐작은 이러했다. 그가 들은 그 수군거림을 황녀도 들은 것이 아닐까. 유진의 말에 카인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저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꼭 동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뿐이에요.”
완벽한 흑색의 눈동자가 다시 얕게 떨리다가 차츰 잔잔함을 되찾았다. 그 말을 듣고 그는 황녀가 그에게서 상실의 감각을 읽어 낸 것임을 깨달았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는 황녀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그러한 행동은 다소 갑작스러웠다. 그 돌발성의 이유는 무엇일까.
“수련하면, 마음도 강해지던가요?”
그 후에, 그녀의 얼굴이 어땠더라. 그녀가 그의 앞에서 그렇게 답답해하고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날 카인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지켜 주리라 다짐했던 그 밤에도 그러한 표정은 하지 않았었는데.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에야. 게다가 갑자기 새벽에 산책을.
아.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구나.
유진의 짐작은 옳았다.
“전하는 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웃으시지만 말입니다.”
괜찮은 것처럼. 익숙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속에 쌓아 둘 줄만 아는 성품. 거기다 지금 이러한 돌발성까지. 하나하나 헤아려 볼수록 카인은 비극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소문이 어쩌면 소문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표하지는 않았으나 짓씹듯이 뱉는 유진의 말은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녀가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점점 한계에 몰리고 있다는 것.
“……안일했군.”
탄식하듯 뱉는 카인의 말에 유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둘의 심각해진 마음과 달리 르페르샤 황녀는 그 시각 상냥하게 황녀궁 기사의 혼을 빼 놓으며 룰루랄라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새벽에 혼자 나갔던 일로 한바탕 걱정 어린 말들을 듣고 나니 진이 빠졌다. 오는 길에 마중 나왔다는 기사는 순진하니 귀여웠는데. 그래도 리니만큼은 아니지만.
“황녀님, 평민 옷도 이렇게나 종류가 많아요.”
리니가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며 말했다. 천진한 모습이 귀여웠는지 엠마와 아린이 작게 웃었다. 어휴, 귀여운 것. 리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네. 좋아. 그중에 제일 예쁜 걸로 리니가 골라 주겠니?”
리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색감도 갈색과 회색 계통이 대부분이고 궁에서 보던 옷들과는 달리 아주 단순한 디자인들이었지만 그것이 리니의 즐거움을 해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전하께선 뭘 입어도 아름다우실 거예요.”
그래, 나도 알아! 우리 르페르샤 언니가 좀 예뻐야지. 히히. 뭘 좀 아는 리니에게 눈을 찡긋해 준 뒤 나는 엠마를 불렀다.
“엠마, 다 되었어?”
“예.”
그녀와 아린에게 지금 맡긴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비엔 영애’를 도와줄 도구였기 때문이다.
“한데 전하, 이리 하시는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부탁한 일을 다 끝낸 뒤에야 엠마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참 엠마다운 태도였다. 엠마를 거들던 아린도 궁금한 기색이었다. 옷 여러 벌을 꼼꼼하게 살피는 리니를 일별한 뒤 내가 편안한 어조로 그녀에게 답했다.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엠마와 아린이 정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가진 살롱들의 지분들이었다. 황녀의 재산을 슬쩍 물어보니 바로 나온 것들.
‘곧 휴지 조각이 될 것들이지.’
원작이 시작되고 나면 어차피 다 망할 살롱들이었다. 지금은 수도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이 있지만, 여주인공 아리엘이 ‘우연히’ 발견한 뒷골목의 살롱이 유명세를 얻고, 그 살롱이 무려 체인점까지 내기 시작하면서 망할 살롱들.
그 살롱들의 소유권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뭐 각 잡고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가장 좋은 건 현금이지. 금. 금!’
곧 내 손에 들어오게 될 많은 재산을 상상하니 행복해졌다.
‘게다가 재산이 있으면 이비엔 영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원래 이비엔 영애에게는 공작에게 한 것처럼 몇 마디 인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정도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공작을 만나고 돌아온 후 생각이 다른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어차피…….”
어차피 가까워지고 싶은 거라면 가장 매력적인 걸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비엔 영애는 자수성가형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힘내라는 격려를 해 줄 사람이 이미 있었다. 아리엘이라고. 하지만 물질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꿈을 포기했다.
황녀 언니의 휴지 조각이 될 재산도 제 값에 정리할 수 있고, 그 재산의 일부로 사람 마음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흐뭇한 상황이야.’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생각에서 벗어나 엠마와 리니, 아린을 보았다.
“……?”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셋의 표정이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왜들 그래?”
“아니, 아니에요!”
“아닙니다.”
극구 부정하는 리니와 엠마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코를 훌쩍이는 아린을 보았다. 조금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그들을 보다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날 외면하기에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평화로운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날이 밝았다.
록스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쥐어 준 진통제와 진정제와 기력보충제를 품에 넣는 것으로 나는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현기증이면 모를까 기절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방문을 열기 전에 진정제를 하나 먹었다. 생각해 보니 정신 건강에 해로운 미남들이 둘이나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하. 방문을 열자 문 양옆에 대기하고 있던 유진과 카인이 나를 반겼다.
“으음.”
각자 한 손씩 내미는 것으로.
“…….”
“…….”
갑자기 복도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내 뒤에 있던 리니가 ‘오…….’ 하고 어벙한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에스코트 신청을 받으니 미친 듯이 설레기는 하는데 어쩐지 난감했다.
어느 쪽을 잡지?
나는 잠시 두 손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어떤 말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속으로 그 말을 외치며 둘의 손 위에 내 손을 각각 하나씩 얹었다.
‘양손의 꽃!’
우후후. 나의 뿌듯한 미소에 전염되었는지, 내 대처에 순간 묘한 표정이 되었던 두 미남이 작게 웃었다.
둘 다 매우 단순한 스타일의 평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양쪽에서 웃는 그들의 모습은 그냥 화보였다. 나는 이번만큼은 설렘보다는 걱정에 휩싸여서 그들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리니를 불렀다.
“리니.”
“네, 전하!”
“아무리 봐도 로브를 써야 할 것 같지?”
“음……. 네에.”
리니가 어색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그렇지? 네 마음이 내 마음이야. 평민 옷을 입은 의미가 없어!
“로브 말입니까?”
“어째서…….”
두 미남이 똑같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읏, 그런 눈빛으로 보면! 나는 그 호감 어린 아름다운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비틀거렸다.
“전하, 괜찮으세요?”
“이런, 전하.”
“아직 회복이 덜 되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아니에요.”
걱정스러운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튀니까 두 사람은 로브를 쓰는 게 좋겠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이 정도는, 입니까.”
유진이 살짝 미소를 흐리며 중얼거렸다. 그를 의아하게 한 번 본 뒤 나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어서 가요.”
리니가 그들의 신장에 맞는 로브를 하나씩 쥐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도 로브를 둘러 주었다.
아, 맞다. 우리 황녀 언니도 여신이지.
기특하다고 리니를 쓰다듬어 주자 리니가 아쉬운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미안. 다음엔 너도 데려갈게.
드디어 기대하던 나의 첫 나들이가 이루어졌다.
* * *
여주 아리엘은 하늘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으로, 눈물이 많고 웃음도 많은 소녀였다. 귀족 영애 치고는 신기할 정도의 백치미와 순수함을 자랑하던 그녀는 그 성격으로 상대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데에 매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황태자 라빌로프, 유진, 카인이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 그렇게 황궁에서 한 차례 활약한 그녀는 시장으로 발을 뻗는다. 그리고 겨우 그 한 걸음으로 그녀는 무려 황실도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는 정보 길드장과 암살 길드장을 낚아 버렸다.
“겨우 한 번에…….”
“예?”
“아니에요.”
뿐인가. 그 후에는 그녀 대신 독을 먹고 죽게 될 충성스러운 시녀 제인도 얻었고, 후에 황궁에서 만나게 될 친구 이비엔 영애와의 접점도 생긴다. 정말 웃긴 것은 이 모든 인물들을 우연히, 그것도 이 시장에서 잡았다는 것.
‘아무리 가장 큰 시장이라고는 해도 그건 좀…….’
사실 이쯤 되면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진다.
‘원작의 작가님은 배경을 다채롭게 설정하는 것이 귀찮으셨던 게 분명해.’
사실 나는 르페르샤 언니가 그 작가 아니었을까 하는 신빙성 있는 추측을 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내 인생은 한결 편해졌다. 우리 작가님의 귀차니즘이 나를 살린 것이다. 이 체력으로 먼 곳까지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까.
“아!”
나는 탄성을 지르며 시장 거리 입구에 섰다. 이곳이 바로 내가 ‘노다지’라 일컫던 바로 그 황궁 앞 블란쳇 거리! ‘거리’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번화한 대시장. 걷다가 부딪힌 남자는 정보 길드장이요, 우연히 만난 서점 직원이 암살 길드장이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전하.”
“…….”
멈춰 선 내 양옆으로 두 남자가 섰다. 그들이 이루는 흑백의 대비는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었지만, 그 기럭지만으로도 나는 몹시 든든했다.
헤헤, 양손의 꽃.
나는 노다지의 앞에서 한없이 너그러워진 덕심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전하, 저희에게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아이보리색 후드를 두른 볼턴 경 쪽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그의 눈빛은 뭔가 안쓰러운 것을 보는 눈빛이라 좀 의아했지만.
“네, 그럴게요, 볼턴 경.”
나는 내색하지 않고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들를 곳은 공공기관이었다. 살롱들에 대한 내 소유권을 판다는 문서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다가가자, 카운터에서 졸고 있던 회계 담당자가 화들짝 놀랐다.
“전액 현금과 보석으로.”
가타부타 말없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서류를 확인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어린 두려움에 한숨을 삼키며 나는 말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줘.”
이런 일에서 상냥하면 안 되는데. 쳇.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에게 얻을 것이 있었다. 내 말에 약간 헷갈리는 눈으로 서류와 나를 번갈아보던 담당자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저, 본인……이십니까?”
“그래.”
나는 로브 소매 끝으로 살짝 황녀의 증명반지를 보여주며 답했다. 담당자의 멸치 같은 눈이 초속으로 깜박였다.
“접, 접수되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입은 그의 정신보다 더 순발력이 있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그가 의아하게 나를 보자 작은 소리로 물어보았다. 이것이다 얻을 것.
“혹, 검은 동굴이라는 곳을 아나?”
검은 동굴. 조연 중 제인이 불우한 사고를 당했던 곳이었다. 동생들과 뿔뿔이 흩어진 곳. 제인은 죽을 때까지 동생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내가 언급한 곳이 의외였는지, 회계 담당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더니, 내가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자 긴장하며 작은 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에게서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은 나는 불편한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그리고 밖에서 불만스럽게 기다리고 있던 두 미남에게 다가갔다.
“금방 끝났죠?”
“안에서 무슨 일은 없으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뇨?”
“……소문이라든가요.”
유진이 어쩐지 굳은 어조로 물었다.
“소문이요?”
음, 르페르샤 언니의 소문이 한두 개라야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그가 묵묵히 있다가 이내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별일 없으셨다면 되었습니다. 그럼, 가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구경을 시작했다. 왁자하고 다채로운 시장을 바쁘게 눈에 담았다. 여기가 다른 세상이라는 게 새삼 피부에 와 닿아서 한동안은 곳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렇게 얼마간 걸으며 둘러본 블란쳇 시장 거리는 생각보다 넓었다.
‘원작에서 그 다양한 인물을 수용할 만도 하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화려하고 대체로 깔끔한 상점들. 길도 잘 정리되어 있는 데다 표지판도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고 있는데 다른 쪽 검은 로브를 입은 카인이 낮은 소리로 물어 왔다.
“달리 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십니까?”
나는 그 동굴 목소리를 음미하며 멍하니 있다가, 전하? 하고 부르는 유진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네, 있어요. 그보다 전하 말고 리샤라고 불러 주세요. 두 분 다.”
“하오나.”
“원하신다면, 기꺼이.”
곤란해하는 카인과 달리 유진이 부드럽게 응수해 왔다. 나는 부탁드려요, 하며 카인 쪽을 올려다보았다. 이참에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면 더 좋겠지만 그것까진 기대도 안 한다. 잠시 움찔한 카인이 마지못한 기색으로 답해 왔다.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리샤.”
어흑.
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아서. 저 목소리로 리샤라고 부르니까 역시나 파괴력이 굉장했다.
“리샤, 가고 싶으신 곳은 어디신지?”
“하…….”
이어 유진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두 번째로 침몰했다. 미남들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로 가 한 떨기 덕후가 되었……. 삼천포로 빠지는 생각과 함께 비틀거리는 나를 두 사람이 재빨리 붙들어 주었다.
나는 이 순간 황제도 부럽지 않았다. 후후.
“리샤, 몸이 좋지 않으면 내일 다시 와도.”
“아, 아니, 에요. 경, 어서 가요. 저 ‘달빛 정원’에 가고 싶어요.”
유진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물리며 내가 말했다.
달빛 정원.
여주 아리엘이 시장에 나왔다가 술에 취해서 귀여운-내가 보기엔 속 보이는-주정을 부리고, 겨우 그 주정 하나로 정보 길드장과 암살 길드장을 제 사람으로 만들었던 장소였다.
‘크. 노다지의 핵심부지.’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데, 카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달빛 정원이라면. 주점이 아닙니까?”
“그렇죠. 그게, 저…….”
양팔에 꽃을 달고 그들의 체온을 느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꿈을 꾸듯이 답했다.
“술, 술을 먹어 보고 싶어서요.”
여주처럼 취하는 건 피할 것이지만 거기 술이 존맛이라는 정보를 원작에서 봤거든요. 원작의 맛있는 술이라니. 이건 꼭 먹어 봐야 했다. 더불어 그곳에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온다는 암살 길드장과 거기서 종종 점원인 척하며 사람들 이야기들을 엿듣는다는 정보 길드장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순 없겠지?’
한 번에 만난 건 여주인공이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람을 담아 허공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
“…….”
잠시 그런 나를 보다가 무언가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시작했다. 얼핏 보인 둘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어서 신경이 쓰였지만 이내 시야에 들어온 주점의 팻말을 보자 나는 금세 그들의 반응에서 관심을 거뒀다.
* * *
“처음 나와 보시는 것 같군.”
르페르샤가 듣지 못할 정도의 소리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눴다. 카인의 중얼거림에 유진이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이시죠.”
전에는 궁 밖을 싫어하여 안 나오시는 분인 줄 알았지만. 유진은 목소리와 달리 절대로 평온하지 않은 눈을 들어 앞서 걷고 있는 황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동안은 갑자기 아파져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실까 봐 나오지 못하신 걸 겁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갑자기 아플 때 곁에서 부축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을 이해한 카인이 착잡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술을 먹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리 말하는 모습이 무언가 달랐다.
그래. 제정신으로 털 수 없는 한스러움이 그 안에 그득할 것이었다. 홀로 삭인 아픔의 크기가 상당할 터이니. 허공을 어딘가 간절한 분위기로 응시하던 그 찰나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다시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카인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시는 일이 잦으니.”
엠마가 말하길 피를 토하는 양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거기다 그들 앞에서 기절하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으며, 갑자기 심장을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다가 그들을 보면 아닌 척 활짝 웃어 보이는 일은 빈번했다.
궁에서 궁인들의 수군거림을 들어 보면 황녀는 바깥 걸음을 즐기지 않는 성정이었다는데, 이제 보니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말이죠.”
유진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유진의 말에 카인이 고개를 들었다. 황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다가 멈춰 서서는 <달빛 정원>이라는 팻말을 입 모양으로 읽어 보고 있었다. 빠르게 걸은 반동으로 넘어갔는지 로브의 모자가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쓸쓸한 느낌을 주던 보랏빛 눈동자가 짙은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지켜보던 카인이 말했다.
“그 소문 어떻게 할 건가?”
황녀가 스스로 죽으려 한다고 하던, 입에 담기도 민망한 소문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잔인한 것인지.
“절대로 그 소문이 다시 전하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네.”
“그렇잖아도 밖으로 번지는 것은 막았습니다. 다만, 황궁은…….”
황궁에 소문을 퍼뜨리기는 쉽다. 그러나 막는 것은 어려웠다. 카인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아무래도…….”
“거기 두 분! 어서 와요.”
둘의 대화는 황녀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부르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정말이지 얼음인형, 악녀라 불리던 그 황녀가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맑은 모습이었다. 두 남자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묘하게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리샤, 모자가 넘어갔습니다.”
“앗, 볼턴 경.”
유진이 조금 짓궂게 웃으며 모자를 깊게 푸욱 씌워 주었다.
“그리고 말을 맞추는 것이 좋으니, 저도 이름으로 불러 주시지요.”
“이름, 이요?”
황녀가 놀란 얼굴로 유진을 보았다. 그러다 또 비틀. 역시. 혼자 나올 수 없는 몸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카인이 미간에 슬쩍 힘을 주며 서둘러 곁에 섰다.
이윽고 두 사람이 차례로 말했다.
“유진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유진 드 볼턴이 풀 네임이지요.”
“저는 카인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때 황녀가 또 비틀거렸다. 놀라 다가가니 작게 떨리는 눈에 희미한 물기가 비치고 있었다. 좀 더 쉬었어야 했다며 두 사람이 자책했다. 어두워지는 둘의 얼굴을 보며, 황녀는 언제나처럼 괜찮은 척 애틋하고도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럴, 게요. 흡, 유진. 카인.”
어딘가 감격한 것으로도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친근하게 이름을 나눈 것이 아닐까. 유진은 그제야 생각했다. 그와 카인은 르페르샤를 서서히 거리를 좁혀 가는 친우처럼 생각하는데. 르페르샤는 모르는 것 같다고.
‘당연한 게 아닌 것이다.’
르페르샤와 지내면 지낼수록 몰랐던 것들이 들어온다. 그냥 벗처럼 지내 줄 생각이었는데, 그 무엇도 그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르페르샤 황녀에게는 허락된 것이 없었다. 황위. 나가는 것. 그리고 신체의 자유. 조금 더 오래 사는 것.
‘그 무엇도 쉬이 꿈꿀 수도, 쥘 수도 없는.’
심지어 타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마저도 모르는.
‘동정하고 싶지 않은데…….’
황녀는 모르면서도,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꿈꾸면서도, 꿈꾸다 고꾸라졌으면서도, 그녀는 미소 지으며 오늘을 살아간다. 자꾸만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정돈하며 두 미남은 르페르샤를 조심스레 안으로 이끌었다.
* * *
주점 ‘달빛 정원’은 수도에서 세 번째로 유명한 곳이었다. 술이 맛있기로 유명하다지. 한 번 이곳을 찾은 사람은 다른 주점에는 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명소이기 때문에 안은 인산인해였다.
“아.”
“어이쿠, 미안합니다!”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두 남자가 다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빈자리를 찾는 동안 결국 한 번 사람에게 밀쳐지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맛나다는 달빛 정원의 맥주가 곧 내 입으로 들어올 것이므로.
“괜찮아요.”
그리고 자리에 앉기만 하면 어쩌면 오늘 점원으로 위장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정보 길드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아서 후드로 가려진 사이로 상냥하게 입술을 휘며 이름 모를 사람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본 것은 내 입가뿐이었겠지만, 내 목소리에 한 번, 그 얼핏 보인 입가의 미소에 한 번, 그 사람이 멈칫했다. 놀란 눈초리에 나는 장난스럽게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리려다 손을 내렸다. 순간 숨도 쉬지 못한 것 같던 사람이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 몸은 황녀라 얼굴을 드러낼 수는 없으니 후드 안에서 생긋 웃어 주었다.
“전, 아니 리샤!”
“유진?”
어딘가 급하게 나를 이끄는 유진의 손길에 저항 없이 이끌려 가는데 뒤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힐긋 보니 아까 그 사람이 발을 헛디뎌 넘어져 있었다. 얼굴이 발갛고 맹한 것이…….
헤헤. 역시. 우리 르페르샤 언니의 미모란! 목소리도 완벽하다니까? 유진이라는 한마디에 저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 히히.
이렇게 확인받으니 기분이 또 들뜬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겉으로는 걱정스럽게 그를 일별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조금은 우려하는 눈빛으로 살피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리샤, 제대로 살피지 못해 죄송합니다.”
자책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뭐야. 뭐가 문제예요! 설마 나 저 사람한테 살짝 스친 것 때문에? 진짜 스친 것뿐이고! 오히려 오랜만에 르페르샤 언니의 얼굴 덕질을 하였거늘.
미남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그게 나 때문이라니. 아무리 보아도 이 남자들은 착하고 은근히 고지식했다.
그, 그래서 섭남이었던 걸지도.
“진통제를 드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가끔 뜬금없는 말을 하기는 해도 말이다.
유진의 진지한 말에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정도로 뭘요. 괜찮아요. 그러니 이만 앉아요.”
“이 정도…….”
이번엔 카인인가! 나는 조금 진땀을 빼며 그들을 달랬다. 그리고 겨우 그들을 달래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왁자한 소리를 뚫고 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거짓말을 하는 건가? 황족이 죽다니?”
“아니, 이 사람이! 내가 분명히 들었대도? 아는 사람이 궁에서 일을 한단 말이네. 그런데!”
나는 그때 나란히 함께 앉은 유진의 은회색 눈동자와 카인의 묵빛 눈동자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글쎄, 그 악독한 황녀가 죽어간다지 뭔가? 사실이라면 이건 경사가 아닌가 말이야!”
그 순간 두 미남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 * *
그간 같이 지내면서 느낀 것인데, 두 미남은 내 병에 대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기분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색하고 민망한 거겠지. 그렇다고 병이 나을 거라든가 하는 걸 말할 수는 없으니.
그래서 나도 굳이 그들이 불편해하는 그 주제를 꺼내지 않고 지냈다. 병 같은 거 없는 것처럼 지냈다는 말이다.
‘사실 기분 안 좋은 모습도 좋기는 한데…….’
아무래도 웃는 얼굴이 더 보기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기 저 사람은 이들에게 굳이 그런 배려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언제 황궁 밖까지 소문이 번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태자를 지지하는 입장인 것인지 꽤 격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런 말이라니, 개념이 없네. 쯧쯧. 좀 기분은 저조해졌지만 그냥 그렇게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헛소리 말라고, 그런 말은 자네한테서 밖에 못 들어 봤단 말이야.”
“내 분명히 들었어. 황녀가 스스로 자진해 죽으려고 한다는 소리를!”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나? 황녀가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쯧쯧. 거 사람, 참. 그리 순진해서야.”
상대가 믿지 않자, 말하던 사람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답답하군. 이보게, 애니 알지? 내 전에 말했던.”
“어, 어. 알지.”
“그 애가 말해 준 거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의궁 사람에서 들은 거라고 했단 말이네.”
의궁이라는 말에 불신하던 사람의 얼굴이 미심쩍게 변했다. 의궁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사실인가 보군.”
“그렇다니까.”
그러자 믿지 않던 사람이 술을 마저 마시다가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모두에게 잘된 거 아닌가?”
그리 말하면서 그는 그냥 농담처럼 킬킬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저 자식이 우리 언니를 함부로 말했어!
“어차피 황녀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잔혹한 성정에 차갑기로 미움을 받잖은가.”
대화 소리가 컸다. 그래도 내가 직접 욕을 듣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참았다. 입술 안쪽만 질끈 깨물면서. 저렇게 다들 생각한다면 생각보다 악녀 소문은 암담한 수준인 것 같아서 고민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내 미남들을 보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
카인은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얼굴이 설핏 굳어져서는. 그러나 그 고요함이 어쩐지 살벌했다. 그에 잠시 눈치를 보다가 또 눈이 풀렸다. 화난 얼굴은 또 희귀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그가 가만히 앉아 있던 내 귀를 두 손으로 막으려고 했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아는 것처럼. 하지만 늦었다. 조롱 소리는 커다랗게 다 들렸으니까.
“잘됐군. 그런 여자 따위, 빨리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과한 언사에 놀라 그를 보고 있는데 어느새 내 맞은편에 있던 유진이 사라져 있었다. 곧이어 퍽 소리가 났다.
“아악!”
“이, 이게 무슨!”
주점이 난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무서운 분위기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을 꺼낸 사람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 기세가 자못 살벌했다. 이윽고 목이 졸린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외쳤다.
“이봐! 경비병을 불러!”
그리고 나란 인간은. 난리가 난 이 상황에서도 유진이 아름다워서 넋을 놓았다. 거의 즐겁게만 지냈는데, 어쩐지 오늘 저 모습은 평생 다신 못 볼 것 같은 야성미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 정신 차려야 해.’
나는 재빨리 고개를 털고서, 카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떼고 소리쳤다.
“유진, 잠깐만요!”
그 순간 유진의 살벌한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말없이 조용히 서 있다가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멱살이 잡혀 있던 남자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이윽고 그 남자가 어흐, 하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주점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달음박질치며 빠져나갔다. 어느새 주점 안에는 처음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서 유진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유진, 괜찮아요?”
“당신은…….”
“네. 말씀하세요.”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유진은 말을 잇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리샤.”
오히려 말한 것은 카인이었다.
“네, 카인.”
“리샤야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음? 저요?”
나는 눈을 깜박였다.
르페르샤 언니에 대한 심한 말을 듣고 느꼈던 충격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유진이 화를 내 줘서 그런가?’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보자. 시끄럽던 주점은 좀 조용해졌고, 내 주위엔 어느새 후드 모자가 넘어가 미모를 만천하게 드러낸 미남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무려 내 동행이었다. 우후후.
무슨 개소리를 하나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르페르샤 언니의 귀로 듣게 하고 싶지 않은 소리라서 한 마디도 기억에 남겨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 나는…….
나는 느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카인에게 말했다.
“당연히 괜찮죠.”
이렇게 화도 내 주는 천사들도 있는데.
사실 판타지 세상의 주점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낭만적인 느낌의 장소여서 나는 꽤나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주점의 약간 노란 빛이 도는 따스한 조명 아래에서, 제각기 눈이 멀 것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두 남자를 눈에 담았다.
아아. 장난스럽게 이마를 짚었다. 그랬더니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면서 유진이 나를 부축해 왔다. 어, 음, 장난인데.
그런데…… 어머.
좀 움직이셔서 그런가? 가까이에서 유진의 열기가 느껴졌다.
‘헉, 이거 너무 좋잖아!’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평소와 달리 거친 야수 같은 매력을 뿌리는 유진은 정말이지……. 하. 거기다 평소보다 더욱 깊어진 카인의 눈은 꼭 우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진심이에요. 전 괜찮아요. 이렇게 두 분이 저랑 있어 주시니까요.”
미남들이여……. 우리 이 주점 매일 올까요? 물론 오늘도 술은 한 잔 마시고 가고요!
“전 지금 행복한걸요.”
멍하니 말을 뱉자 순간 주점 안에 침묵이 흘렀다. 우리 외에 남아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과 점원 몇의 웅성임도 그 순간 뚝 멈췄다.
* * *
미묘한 분위기의 세 남녀를 바라보던 이들 중 점원 하나가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황금빛 곱슬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외양은 굉장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까 아무도 이 소년에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소년이 가진 능력 덕분이었다.
“르페르샤 황녀 그리고 볼턴, 거기다 아이릭 공작까지. 희한한 조합이네?”
소년, 아니, 사실은 다 큰 청년으로, 정보 길드의 길드장인 헤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옅은 막이 쳐져 있어 소년 밖으로 소리가 새지 않는 상태였다.
“소문이 사실이었잖아.”
게다가. 헤레이스의 녹안이 조금 눈부시다는 듯 가늘어졌다. 시선의 끝에는 그녀. 르페르샤 황녀가 있었다. 죽어 버리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은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히 웃고 있는 그 얼굴이라니. 비틀거리면서도 행복하다 말하는 고운 입술과 흥분한 볼턴 경을 세심히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까지.
“흠.”
곤란하네.
“저거, 울리고 싶어졌어.”
“헤레이스.”
그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던 막 안으로 누군가가 쑤욱 들어왔다. 청색의 수수한 로브를 푹 눌러쓴 장신의 사내였다.
“아가씨를 울리겠다니요.”
나긋나긋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살짝 드러난 턱과 입술뿐이었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술이 자못 자상해 보였다.
“너 말이야.”
헤레이스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굉장히 의아한 어조로 속삭였다.
“죽고 싶어? 분명히, 내 공간에 침범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경고 어린 말은 명백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저런.”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웃음기를 머금었다.
“친구에게 상냥해야죠, 헤레이스.”
“지랄.”
“다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누가 보면 당신이 사람 우는 걸 보고 좋아하는 변태인 줄 알 것 아닙니까.”
“그거 맞는데?”
포악한 기세로 남자를 밀어내던 헤레이스가 의아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남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 틈을 타 헤레이스가 천사 같은 얼굴을 갸웃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너나 잘해. 애인만 생기면 꼭 시체를 늘리는 인간 주제에.”
“아. 그건 오해인데.”
남자가 짐짓 슬픈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뭐가, 애인? 아니면 시체?”
“애인. 전 애인을 가져 본 적이 없는걸요.”
그는 꼭 형이 동생을 타이르듯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왜 의뢰 대상을 사랑하겠어요?”
“글쎄. 네가 미쳐서?”
헤레이스가 말을 뱉어 놓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배를 잡고 웃던 헤레이스 쪽을 향하던 남자의 얼굴이 어느 순간 살짝 돌아갔다. 모호한 시선이 주점의 중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에게 못 박혀 있었다.
“글쎄요.”
침묵하던 남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죽어 가는 자를 사랑할 이유가 있을까.”
로브 안의 입꼬리가 일순 그늘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그들이 있던 자리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기어코 맥주를 사서 셋이 마신 뒤 분위기를 조금 풀고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표정은 조금 풀렸지만 줄곧 말이 없던 유진이 멈춰 섰다.
“유진?”
내가 부르는 말에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달빛이 그의 은발 위로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자체 발광하는 미남이 붉은 입술을 열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사람을 홀리네.
“리샤. 아니, 르페르샤 황녀 전하.”
“…….”
“왜 화내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조금 몽롱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자제하며 답했다.
“화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에 한껏 짜증을 낼 때도 본 적이 없던 모습이었다. 생소한 광경에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왜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겁니까?”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의문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그럼 화를 내야 하나요?”
말리려는 기색으로 유진에게 몇 걸음 다가가던 카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 움직임마저 의아스러워서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유진의 표정은 정말 이상했다. 음, 아름답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조금 불안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일이잖아요.”
게다가 르페르샤 언니는 적어도 원작에서는 진짜 악녀였다. 나는 우리 언니를 몹시 좋아하지만, 그녀가 선인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비록 지금의 르페르샤 황녀는 원작의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듣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역시, 분노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니가 곁에 있다면 분노했겠지만 지금은 없잖아. 여기서 내가 분노하고 그러는 건 오히려 언니가 선택한 것들을 무시하는 게 될 수도 있는걸.’
언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신중해진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는 것? 그건 언제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나는 곧 떠날 사람이고. 그런 것이 기분 좋은 건 결코 아니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 정도는 살아가는 데에 기본 아닌가?
심지어 나는 지금 소문이 좋지 않았던 우리 르페르샤 언니의 몸에 들어와 있는데 일일이 반응하는 건 체력 낭비였다. 덕질에 소비하기에도 체력이 모자라건만!
“그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리고 그래 왔어요.”
그래, 소문을 없앨 수는 없다. 나는 애초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그나마 나아진다고 믿는 것은 새로운 소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악녀가 요즘 변했다더라 하는. 그 정도다. 소문에 대한 내 생각은.
소문은 얼마든지 악의적이 될 수 있고, 사람도 해칠 수 있으며, 한 번 생기면 없애기가 너무 어렵지만. 그렇지만 그만큼 변덕스럽게 방향이 바뀌는 것이므로.
카인은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그도 내 말을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보는 유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달빛 때문일까? 그러나 그마저 아름다운 남자다.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나는 문득 새어 나오는 미소를 천천히 머금으며 말했다.
“늘 그래 왔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진에게서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말은 조금 이상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답했다.
“하지만 전 정말로 괜찮은걸요.”
“당신은 괜찮은 게 아닙니다, 전하.”
“아니에요. 유진. 왜 납득하지 못하는 거죠?”
아니, 하루하루 나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 중 하나가 유진이었고.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걸까?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전하…….”
……혹시, 취했나? 조금 어눌해지는 그의 발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 나는 헉, 하고 신음을 삼켰다. 눈앞의 미남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취해서 감정이 격해지고 막, 그런 건가?
이, 이것도 희귀한 모습인데!
“전하, 왜, 약을 아끼십니까?”
응……? 또 앞뒤 없고 영문 모를 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의 말은 봇물 터지듯 이어지기 시작했다.
“진통제를 록스 그자가 왜 주었는데. 줄지를 않더군요.”
어, 그건……. 할 말이 없어서 눈을 살짝 굴렸다. 물론 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왜 그런 것에 익숙하십니까. 왜 음해를 음해로 여기지 못하십니까!”
“유진, 그…….”
“왜, 왜 스스로에게 그리 가혹하십니까?”
어……. 나는 눈을 깜박이기만 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유진, 술이 많이 약하구나. 실은 내가 딱 한 잔씩만 먹자고, 삼국지의 도원결의 같은 걸 떠올리면서 고집을 부렸었다. 둘 다 술 잘 먹는 거 원작으로 알고 있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아, 내가 나빴어! 그러지 말 것을. 술 깨면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기를 바라며 부드럽게 웃었다. 차마 미안해서 아주 밝게 웃기는 좀 그랬으니까. 하지만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유진은 나를 그저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더욱 인상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그래요!
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전하…….”
그가 고개를 들더니 무언가를 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곧 죽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웃으실 수 있는 겁니까?”
“볼턴.”
곁에서 카인이 조금 화난 목소리로 유진을 불렀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카인의 완벽한 목소리보다도 유진의 정갈하고도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기분이.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왜 당신 때문에 이런.”
나는 그 순간 그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멍하니 생각했다. 애초에 난 죽을 생각도 없을뿐더러. 아니, 왜 웃느냐니? 어째서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는 것일까 하고. 그리고 차마 르페르샤로서는 할 수 없을, 품위 따위는 집어던진 답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야 당신이 잘생겨서?’
휘이잉 하고 찬바람이 불었다.
엉엉, 잘생긴 건 정말 세상의 복이야. 유진, 당신은 취해도 얼굴이 착해요. 엉엉엉.
나는 속으로 발광하면서 그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다음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유진이었다.
* * *
황녀의 눈은 보라색이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는 그 색은 예전에는 사람 같지 않다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은…….”
유진은 그 색이 싫었다. 보라색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성을 상징함과 동시에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죽음 또한 상징하는 것이다.
감히 되도 않는 말을 뱉은 남자를 바닥에 떨군 뒤 유진은 차마 황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걱정 어린 손길에 돌아보고 싶은데, 도저히 그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묻고 싶었는데.’
그런 말을 들은 당신은 괜찮으냐고, 왜 이런 때마저 다른 이에게 그리 다정하게 구느냐고. 그러나 또 어김없이……. 황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웃어서.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말로 그저 행복한 얼굴로 그들과 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풀고자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도 했다. 한 잔씩 술을 마시자고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것까지. 그 마음이 배려라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어쩌면 이리도 한결같은지.’
그래서 괴로웠다.
“유진?”
그녀는 모를 것이다. 겨우 한 달 남짓. 온 진심을 다해 유진 자신이 좋다고 말해 오는 그녀의 순수한 호감이. 그러나 그에 대해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못하는 그 체념이. 무엇이든 덤덤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가.
“리샤. 아니, 르페르샤 황녀 전하.”
그 웃음이. 감춘 눈물이.
“왜 화내지 않으셨습니까?”
그저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졌던 것이다.
“화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아니다. 유진은 황녀의 답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런……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왜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겁니까?”
“그럼 화를 내야 하나요?”
달빛 아래, 황녀는 바스러질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게, 무슨…….”
“특별하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것은 모호하면서도 몹시도 연약한 목소리였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리고 그래 왔어요.”
아. 유진은 그 덤덤한 말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잘못 생각했구나. 그 소문을 믿은 건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는데. 모든 사람이 르페르샤 황녀를 악녀라고 부르고, 잔혹하고 차갑다고 여기고 꺼려 했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래 왔다는 황녀의 말은 유진의 이야기였다. 유진이 바로 그랬으니까.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는데.’
그는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르페르샤가 웃고 있어서 잊고 있었지만, 한 달 전까지도 유진도 그들과 같았으니까. 그녀는 익숙하다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했다. 또, 또 그랬다. 유진은 감히, 화가 나고 말았다.
“늘 그래 왔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전 정말로 괜찮은걸요.”
“당신은 괜찮은 게 아닙니다, 전하.”
“아니에요. 유진. 왜 납득하지 못하는 거죠?”
감히 다그치고 말았다. 아, 제가 뭐라고.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전하…….”
그는 그저, 그래, 괴로웠던 것 같다.
“전하, 왜, 약을 아끼십니까? 진통제를 록스 그자가 왜 주었는데. 줄지를 않더군요.”
묻고 싶었다.
“왜 그런 것에 익숙하십니까. 왜 음해를 음해로 여기지 못하십니까!”
가냘픈 음성이 그를 불렀다. 들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못했다.
“왜, 왜 스스로에게 그리 가혹하십니까?”
그녀는 그저 가만히 웃었을 뿐이었다. 그 고운 미소는 그토록 무시되었던 미소였다. 그러나 그리 무시될 이유가 없는 미소였다.
“전하…….”
그는 슬펐던 것 같다.
“당신은 곧 죽는데도…….”
그래서 꾹꾹 내리눌렀던 말을 기어코 뱉고야 말았던 것이다. 자신은 이 말을 한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웃으실 수 있는 겁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하필 어두운 시간이었다. 내리는 달빛 아래 선 그녀는 너무 선연하였다.
르페르샤 황녀는 그저 말없이, 어딘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그를 보고만 있었다. 더없이 온화하고, 또 어쩐지 눈물이 나는 모습이어서. 유진은 부러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아름답다고 할까. 그도 아니면 가엾다 할까.
아니다. 귀하다고 해야겠다.
황금보다는 달빛을 닮은 그녀의 머리칼이 흩날린다. 시야가 이지러지는 감각 중에 유진은 문득 한 가지를 깨닫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저 죽음을 상징하는 빛깔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을.
“…….”
찬바람이 불자, 마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한 차례 눈을 깜박였고, 그늘진 보랏빛이 점멸했다. 아아. 사실은. 그 빛깔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제는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 아픈 빛깔이 잠시라도 잦아드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을.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어.’
절망과도 닮은 나락을 느끼며 그가 불현듯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품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꺼낼 수 없는, 지어 온 죄들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당신이 차라리 울기를 바랐다. 괴롭다 소리치며, 뭐 보태 준 것도 없으면서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붙들고 화내 주기를 바랐다.
가볍다고 생각했던 호의가, 친구 정도로 여기던 마음이 유진의 죄책감을 거대하게 짓눌렀다. 그에게는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계속 혼자 담고 있다 보면 당신이 더 많이 상할 것이 분명해서. 그런데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되도 않는 말뿐이었다고.
“제가, 제가 감히…….”
“……유진?”
그를 부르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순간 목이 메었다. 그 맑은 소리에 한 점의 화도 묻어 있지 않아서. 어쩌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몸의 병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이렇게 만든 건 유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아니었겠는가?
“제가 감히 주제넘게도 그런 말을.”
마음이 이상하다. 죄송하다는 말은 너무 가벼워서 유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 *
으. 아. 아아아아앙아아아아.
나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나는 정신없는 중에 황급히 엄지손톱으로 가운뎃손가락을 꾸욱 찔렀다.
진정해야 해. 코, 콧김. 어, 미남 냄새……가 아니고 진정! 진정!
……진정은 무슨!
‘안겼어! 꺅!’
뭐가 어찌된 건지 하나도 이해는 안 되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유진의 가슴은 단단했고, 팔은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의외로 묵직하게 날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느껴진 그의 몸은…….
헤, 헤헤. 이분 식스팩 있는 거 같은데? 지금도 충분히 엄청난 상황이라 만질 용기가 나지도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르페르샤 언니의 병은 심장이 가장 나중에 멎는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록스는 돌팔이였던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말로 심멎할 것 같았으니까.
“흐…….”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지. 아니, 이건 분명 우리 르페르샤 언니의 몸일 텐데……?
속에 든 인간이 글러먹었네요. 흑흑, 언니 미안해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 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었다. 그만큼 꼬옥…… 안겨 있었다는 말이다.
에헤. 에헤헤헤헤.
그리 반쯤 미쳐서 해롱거리고 있던 차였다.
“제가, 제가 감히…….”
“……유진?”
네? 나는 조금 늦게 그의 말에 반응했다. 지금, 내 귓가에 닿은 숨이 미남, 그대의 숨결인가 하며. 그런데 그때 유진이 조금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감히 주제넘게도 그런 말을.”
으음?
“…….”
아, 맞다. 지금 유진 취했지?
나는 조금 짜게 식은 기분으로 납득했다. 사실 이 두 미남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았다. 함께 어울리며 습득한 지혜다. 거기다 지금은 취하기까지 했고. 쯧쯧.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하기에는 이 미남의 상태가 심상찮았다. 취하면 화내고 끌어안는 습관이 있나 본데. 흠. 실은 끌어안는 건 아주 바람직하지만.
큼큼, 저기, 여기 말고 돌아가서 마저 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답할 수는 없겠지? 너무 안타까워서 나는 잠시 울먹거렸다.
침착하자. 취객의 말에는 대꾸를 안 하는 게 답이라지만 그래도 나의 미남이니까. 음, 방금 그가 자신이 주제넘었다고 했던가.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정말 아니었다. 나는 이 미남에게 소심한 반박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제넘은 건 저지요…….”
이렇게 꼬옥 안겨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굳이 나쁘게 표현하자면 주제넘은 것!
아, 이건 아닌가. 르페르샤 언니의 몸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나는 황송하니까. ……그러니 내친 김에 초콜릿 복근도 자랑해 준다면 기꺼이 찬사를 건넬 텐데. 그러니 미남이여, 그저 고맙고 또 고마워요. 비록 취중이라지만. 그때 유진이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졌다.
어, 정신이 좀 드나?
나는 조금 진정되어 감에 따라 눈에 고이기 시작하는 물기를 한 차례 눈을 깜박이며 털어 냈다. 그리고 몸을 굳힌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유진.”
역시 마무리는 이게 무난해. 하지만 그렇게 말한 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내 상태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현기증으로 창백해졌을 얼굴. 채 막지 못하고 흘려보낸 눈물 몇 방울과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 유진이 조금 몸을 떼어내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나와 눈을 맞췄다.
오!
안긴 것도 좋지만 역시 난 당신 얼굴이 너무 좋아요, 미남이여.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음…… 심장이.”
그러다가 나는 내 얼굴이 지금 상태가 좋지 않을 거라는 데에 닿았다. 아마 욕망이 아주 선연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 민망해라. 하여 시선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내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들은 기특하게도 유진의 옷을 아주 옴팡지게 쥐고 있었다. ……찢어 버릴 기세로.
“…….”
음. 머리보다 앞서간 손을 조금 민망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정말로 조금 뜯어진 가슴 부위를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그냥 깔끔하게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곧 죽어도 미남에게 변태로 낙인찍힐 수는 없었다.
눈을 스륵 감고 몸에서 힘을 빼자마자 나는 정말로 혼절하고 말았다. 유진은 스륵 무너지는 황녀의 몸을 받아 들었다. 그날, 지금껏 정식으로 주인을 섬기지 않았던 은의 기사 유진 드 볼턴은 마음을 정했다.
‘모두가 짓는다고 해서 죄가 아닌 건 아니기에.’
콰앙!
그가 르페르샤를 안아 들자마자 범인은 들을 수 없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당신이 죽을 때까지라도, 곁에서 갚겠어.’
술집의 남자를 때린 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깔린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향해 날아온 무언가를 막아 낸 것은 카인이었다. 유진이 카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날카롭게 기감을 세웠다.
“…….”
카인은 줄곧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유진을 상당히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하고 눈을 감으며 돌아섰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참는 듯 손을 꾸욱 쥐고 있었다.
“……귀히 모시고 오게.”
로브를 펄럭이며 뒤돌아 선 카인이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앞장을 섰다. 유진은 눈을 내리깔고서 르페르샤의 얼굴을 로브 모자로 덮어 주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편한 자세를 잡도록 안아 든 뒤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뒤로 “음.” 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발에 녹안을 지닌, 천사처럼 생긴 소년이 스륵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 헤레이스는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받으며 무료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르페르샤 황녀는 유진의 품에 폭 싸여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귀찮은 것들이 붙어 있네.”
다니엘을 따돌리고 따라온 보람이 없잖아. 헤레이스의 눈에 광포한 빛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키득 웃고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 * *
정신이 들고 보니 침대 위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그간 나는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하아…….”
내 한숨 소리에 조용히 내 옆에 다과와 차를 놓던 리니의 손이 멈칫했다.
“전하,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너무 민폐라서.”
“네에?”
경악한 리니의 목소리에 픽 웃으며 그녀의 벌어진 입에 쏙 맛있는 음식을 넣어 주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먹으며 오물거리는 리니의 눈이 열정적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다 알았어.”
말 안 해도 알아. 어휴.
착한 아이다. 나는 어제 유진이 취한 일과, 그로 인해 아마도 터져 나왔을 그의 진심에 대해 생각했다.
“리니.”
“웅음. 네, 전하.”
재빨리 음식을 씹어 삼킨 리니가 답했다.
“난 행복하게 살고 싶어.”
리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지금 행복하고.”
“전하.”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그랬거든. 자유롭게, 살라고 말이야.”
우리 르페르샤 언니. 언니 몸 가지고 언니 말대로 살아가려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리니가 눈을 데굴 굴리다가 답했다.
“자유롭게 사세요, 전하!”
원작 카인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꼭 이해하고 해 준 말이 아니더라도 위안이 되는 말이 있는 법이지.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물론 민폐는 좀 줄여야겠지만. 어제는 확실히 술도 그렇고 너무 들떠서 민폐가 되었던 것 같았다. 덕질이란 자고로, 덕질의 대상들을 위한 것이어야 진정한 덕질이라 할 수 있는 법.
“고마워. 좋아, 그럼 록스에게 가 볼까? 지금 록스 궁에 있니?”
“네. 요즘은 궁에서 연구하신다더라고요.”
“다행이네. 그럼 리니, 식사 맛있게 해!”
나는 바로 록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각성제 있어? 그때 그 뱀의 독 말고, 좀 효과가 덜해도 좋으니까 상시 먹을 수 있는 걸로.”
“예? 전하. 그게, 무슨!”
“록스, 난 어제 또 정신을 잃었어.”
“전하…….”
나는 록스에게 억지로 정신을 깨워 놓는 약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커피나 에너지 음료 같은 것 말이다. 록스는 매우 놀란 것 같았다.
“너무 자주 그러는 것 같아. 이러면 안 돼.”
침중함을 도저히 감출 수 없어 어두워지는 얼굴을 살짝 숙였다. 록스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게 말했다.
“전하, 그, 전하께서 정신을 잃으시는 것은…… 이렇게 강제로 막을 일이 아니옵니다. 그것은 약해지고 있는 몸이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록스는 말하다가 시무룩해졌다. 저거 꽤 오래 간다. 경험상 그것을 알고 있는 내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적어도 할 수 있는 한은 대비를 하고 싶어, 록스.”
나는 아주 진지하다고요, 영감님. 그래, 솔직해지자.
“내가 어제, 얼마나 큰 폐를 끼쳤는지 알아?”
엉엉, 무엇보다도 어제처럼 밖에서 기절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앞으로 내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흥분하면 기절이라니. 내 필사적인 어투에 록스가 눈을 크게 떴다.
“폐, 폐라니요, 전하!”
신음처럼 그가 외쳤다. 그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린 것은.
“…….”
으앙. 어떡해. 유진.
우리 은발의 미남께서 거기 서 계셨다. 그는 무언가 크게 평정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유들유들한 가면을 쓰고 있던 평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 갑자기 열린 약제실 문에 놀라 돌아보았다가 나는 재빨리 고개를 모로 틀었다. 볼 면목이 없었다. 술을 마시기 싫다고 했다면 물을 줬을 텐데. 깡패가 된 느낌이야.
게다가 들어보니 어제 얼마나 얼굴을 마주 보기 어려웠으면 르페르샤 언니의 예쁜 얼굴을 글쎄 로브로 꽁꽁 감싸다시피 한 채로 들고 왔다고 들었다. 세상에. 나는 르페르샤 언니에게도 못할 짓을 한 것이다. 창피하고 착잡했다. 유진은 자기도 취해서 몸 가누기 힘들었을 텐데 기절한 나를 안아 들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고.
속으로 왁왁 대고 있는데, 그때 누가 내 곁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와 놓고 말이 없던 그였다.
“전하.”
“아.”
나는 슬쩍 그를 보았다가 결국 울상을 짓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마주 보는 게 좋았다. 그때였다. 답지 않게 몹시 떨리는 한숨을 뱉으며 유진이 말했다.
“왜, 무엇이 폐였다고 하시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그러니까 이거 그거지? 네가 뭘 잘못했는지 네 입으로 말해 봐.
힝. 이럴 땐 이실직고가 짱이죠. 그래도 사과할 타이밍이 온 건가. 다행이다.
나는 시무룩한 기색으로 큼큼 목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술도 억지로 마시게 한 것 같고요.”
미남이여, 술이 약하면 약하다고 하시지 그랬어요. 어제 그건 확실히 주정이었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
“좋지 않은 내용의 말도 들으시게 됐고, 그리고…….”
“그리고요?”
속삭이듯 되묻는 그의 목소리는 불안할 정도로 다정해서 나는 제일 잘못한 걸 바로 말했다.
“정신을 잃어서…….”
약한 게 죄는 아니지만 민폐는 죄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내 사랑하는 덕질 대상에게 민폐를!
미남이여, 내가 잘못했소. 엉엉.
더 시무룩한 기색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유진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수고를 끼쳐서.”
“전하, 제발.”
그가 갑자기 몹시 애절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네?”
헐. 나는 사과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애절함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발. 제게.”
나는 멍하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고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은발이 오늘따라 더 단정해 보였고, 그와 달리 전체적으로는 조금 흐트러진 느낌이었다. 고풍스럽고도 색스럽게 생긴 얼굴이 아주 추운 곳에 있는 것처럼 얼어 있었다. 인형 같은 이질적인 얼굴은 묘하게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어린 물기가.
“경……?”
다음 순간, 또륵 하는 의성어를 붙여야 할 만큼 아름다운 궤도를 그리며 눈물이 떨어졌다.
이, 이거 내 거 아니지? 그렇지?
정신없는 내게 그가 속삭였다. 애원조였다.
“제게 이러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를, 제 신념을, 제 죄를 지우시지 마셔야 합니다.”
엥?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다는 난감함과 별개로 나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뭔가 진짜 많이 미안해지고 있었다. 왜 우는지는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 울고 있는 그를 보며 황홀해 하는 스스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색하게 침을 삼키고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혼미해지는 정신과 자꾸만 열이 오르는 것을 사력을 다해 참아 내면서.
“왜 울어요. 울지 마요, 경.”
“…….”
그의 볼 대신 내 손끝을 타고 맺히는 눈물방울들은 촉촉했다.
어어. 이, 이건.
나는 순간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그의 눈물에 집중했다.
……좋아. 이건 성수다.
감격하여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나는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마주 보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전부 괜찮을 테니까 슬퍼하지 마요. 네?”
유진은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우아한 늑대를 연상시키던 그의 눈동자가 다채로운 빛으로 일렁였다. 그리고 그 가까이에 내 손끝이 닿아 있었다. 나는 조금 뿌듯해졌다.
하여 기분이 순식간에 회복되어서 그사이 눈물이 멈춘 그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쩐지 훌쩍이고 있는 록스에게 나중에 다시 온다고 말한 뒤 유진과 함께 약제실을 나섰다.
“있죠, 전 경이 정말 좋아요.”
내 뜬금없는 말에 오늘 온갖 희귀한 모습을 한 번에 보여 준 자랑스러운 나의 미남이 답했다.
“……저 또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주 부드럽고 정중한 미소를 그리며. 유진은 어딘가 피로해 보였다. 처음 듣는 유진의 그런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리샤, 라고 조그맣게 덧붙였다.
* * *
“주신의 이름을 빌어 맹세합니다.”
자유 기사의 맹세는 조금 특별했다. 맹세를 한 기사는 주군의 숨이 다하는 날 검을 내려놓아야 했다. 유진은 기사이되 기사가 아니었다. 자유기사를 선택한 것은 누군가를 섬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는 그저 강함을 추구해왔다. 검으로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검을 쥔 자이되 검을 옹호해본 바가 없었다.
‘그것으로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반드시 무언가를 해치게 될 테니.’
그러나 그는 어느새 정이 든 이 황녀가 울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고, 부디 오래도록 그녀를 볼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아니, 실은 동정과 같은 속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벗은 아니야.’
이토록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벗도 무엇도 아닌 이상한 관계였다. 하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의 검을 걸기에는.
“르페르샤 람 트리엘을 나의 주군으로 삼아.”
이 맹세에는 그녀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 끝까지 그의 검이 되고 방패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된 맹세의 구절.
“이제 당신은 이 맥박보다 나의 생명이 되십니다.”
마지막 구절을 읊음과 동시에 소드 마스터 ‘유진 드 볼턴’이 마침내 주인을 맞이했다. 그날 그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었다.
“잠든 사람에게 바치는 맹세라니.”
카인이 묘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유진이 빙긋 웃었다.
“전하께서 아시면 분명 말리실 테니까요.”
카인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드 볼턴은 카인 드 아이릭 공작이 공증을 서는 가운데 그녀 몰래 기사의 맹세를 올렸다. 그녀가 꼭 이것을 알 필요는 없었다. 폐를 끼쳤다며 시선을 피하던 그녀를 보고 유진은 어이없게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평생 제대로 된 기사는 될 수 없을 거라 여겼는데.’
검만 다룰 줄 알았지 사람을 다룰 줄은 모르던 그가, 사람에게 매달렸다.
“처음에 말입니다.”
둘만 있을 때는 정중한 척 얄밉게 유들거리던 유진이 이번에는 아주 편안한 어조로 카인에게 말을 걸었다. 카인이 어두운 눈을 들어 그를 보자 유진이 작게 말을 이었다.
“소문만큼은 아니어도 얼음인형이라고 여겼습니다.”
처음 마주했던 황녀는 정말로 인형 같았다. 사람들은 황녀를 차갑고 잔혹하다 입방아를 찧었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가 보기에 르페르샤 황녀는 텅 빈 그릇이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러나 얼음으로 만들어져서 거기 무언가를 담는 것 자체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그릇 말이다.
“그게 참 싫었죠.”
싫었다, 는 단어가 서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술집에서의 일을 둘 모두가 떠올렸던 탓에 카인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듣든 말든 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가왔고 그래서 마주 다가갔더니 얼음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보고 판단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어느새 소문에 휘둘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이란.
“……참, 예쁘더란 말입니다.”
예쁘다는 말에 망가짐이 내포되면, 황녀를 닮은 말이 될 것 같았다. 속없이 곱고, 밝은데 안타깝고. 그녀가 ‘좋아해요!’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이성적인 감정을 내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담백했다. 그러나 몹시 투명하고 순수한 느낌.
봄날의 천진한 꽃무덤 같은 느낌이었다. 유진은 사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여자는 누구든 그를 가지려 들지 않았나. 어떤 명백한 목적도 없는 것. 그런 호감은 난생처음이었고, 그래서 중독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아십니까? 전하는…… 누구도 깊게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걸.”
한 방향의 순수한 호감에는, 뚜렷한 선이 있다. 그녀가 호의를 주되,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볼 때면, 그 선이 도드라졌다.
“어느 순간에 느끼는 겁니다. 아, 밀려나는구나 하고.”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스럽다. 그 선을 긋는 것조차 이해할 수 있어서 애처롭다.
“전하는 자신의 사람을 가져본 적이 없는 분이라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인이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밖을 경계하는 중에도 유진의 말이 귀에 들어박혔다. 그런가 하고 속으로 되뇌니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전하를 잘 모릅니다.”
카인이 저도 모르게 유진을 슬쩍 보았다. 유진은 슬며시 웃으며 한 박자 늦게 카인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게 맞는 거죠. 모르는 사람이니 모르는 게 맞는데, 안다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습니다.”
언제나와 같은 얄미운 웃음이었으나, 기분 좋아 보이는 것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알기 위해 맹세를 한 건가.”
“그럴 리가요.”
유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유진이 르페르샤 황녀를 가만히 보며 혼잣말을 하듯 말을 맺었다.
“하나쯤 안겨 주고 싶어서요.”
자기만의 사람을.
카인의 알 수 없는 묵직한 시선을 가벼이 받아 내며, 유진은 주점을 나오던 길에 보았던 르페르샤 황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폐라며 대는 것이 안타까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을 폐라 여기는 사람이라는 게 또 확인이 되어서.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맹세에 대해서는 차후에 제가 말할 테니 당분간은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유진이 그런 식으로 절박하게 군 상대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 다정한 성품에, 분명 걱정하고 부담스러워할 것이 분명하니.”
잠든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유진은 그 평온을 기필코 지켜 내리라 다짐했다.
“그러지.”
“감사합니다, 각하.”
기사의 충심이란 것은 이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나. 유진이 설핏 웃으며 눈을 가만히 내리감았다.
* * *
톡톡. 지붕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헤레이스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다섯 겹이나 친 장막을 확인한 그가 미끄러지듯 황녀궁 지붕에 자리 잡고 앉았다. 황녀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누군가에게 툭 말했다.
“아, 참견하지 마.”
어디선가 헤레이스와 접촉하고 있던 누군가가 곤란하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헤레이스,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녀의 외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자 헤레이스가 희게 웃었다.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어? 그리고 상하게 한다니. 그걸 걱정할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이 다칠까 봐서 그러죠.’
“누가? 네가? 여기서 더 잔소리하면 아무래도 네가 다치지 않을까 싶은데.”
해사하게 웃으며 되묻는 헤레이스의 말에 누군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글쎄요.’
다정한 어조의 그 말을 끝으로 접촉이 끊어졌다.
“재수 없는 놈.”
그와 동시에 자유롭게 떠다니던 한 기사의 맹세가 끝났다.
“…….”
헤레이스는 그것을 시큰둥하게 듣고 있다가 문득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윽고 막이 사라진 자리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록스는 끝내 각성제를 달라는 내 요청을 거부했다. 안타깝지만 그냥 적응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진정제나 많이 달라고 해야지. 문득 어제 가슴 아프도록 처연하고, 또 그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눈물이 다 났던 유진이 떠올랐다.
달래 주고 나니 자기도 좋아한다고 답해 주던 정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크.
“영화네, 영화.”
인생의 질이 한층 진일보한 느낌이었다. 확실히 유진이랑 더욱 가까워진 거 같기는 했다. 카인도 저번의 그 일 이후 거리감이 확 줄었고 말이다.
“끄응…… 차!”
기지개를 켰다. 일찍 자서 그런가? 오늘따라 좀 더 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각성제는커녕 차라리 잠을 그냥 푹 주무시라며 록스가 준 약을 먹었더니 어제 좀 일찍 잠이 들었었다.
‘음. 다른 원작 인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고 또 시장으로 발 도장을 찍어야겠지?’
주점에 가기는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일단은 정보 길드장 헤레이스를 봐야 하니까. 하지만 그건 일단은 보류해 두었다. 다니엘을 생각하니 조금 꺼려지는 것이 있었고, 또 그보다 급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레이스는 언제 만나든 강한 인상을 주기만 하면 되지만, 이비엔 영애와 제인은 반드시 시기를 잘 살펴야 했다.
“체력이 따라 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건 어쩔 수 없지.”
일단 내일까지는 쉬자. 쉬는 것도 중요하다. 할 일이야 많았다. 리니와 생각쿠키를 굽거나, 아린이 바느질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아, 그러고 보니 돈 찾으러 가야겠네?”
내가 내놓은 살롱들의 소유주 자리는 꽤 비싸고, 또 인기 있는 자리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빨리 팔려서 조금 전에 연락이 왔다고 엠마가 그랬다.
“돈 찾으면 이비엔 영애를 찾아봐야지.”
원래 이비엔 영애는 원작이 조금 진행된 뒤에 나오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황태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무려 메인 남주를 사랑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의 친구로 남은 신기한 인물이었다. 르페르샤 황녀 언니를 몹시, 엄청, 굉장히 싫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싫어하게 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될 예정이었다. 정확히는 동업자. 미래를 그리며 나는 한껏 음험하게 웃었다.
* * *
르페르샤 언니의 아홉 번째 기억을 찾았다. 이번에도 나는 훌륭하게 피를 토하는 것을 감추었다. 의기양양하게 엠마를 맞이하자 밖에 서 있던 유진이 날카로운 눈으로 안쪽을 살폈다. 아차, 유진! 혈향을 맡았을 것이 분명한 그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홉 살의 언니는 선물을 세고 있었다. 여섯 살 생일 때 받은 깃펜부터 일곱 살에 받은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자. 그리고 여덟 살 생일로 받은 아직 풀지 않은 상자가 있었다. 언니는 가만히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왜 풀지 않지?
한참을 보다가 하품까지 했을 무렵, 심각한 얼굴로 보고만 있던 언니에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전하, 왜 풀지 않으십니까? 무언가 문제가 있으십니까?”
엠마였다. 그때 언니가 답했다.
“풀기 전이 더 좋은 것 같아서.”
엠마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 아.
선물을 풀기 전의 기대감이 소중해서, 그걸 놓칠까 봐 저렇게 심각하게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 애틋했고, 동시에 미친 듯이 귀여웠다.
으헝. 안아 주고 싶어. 안아 주고 싶다고!
그렇게 발광을 할 때 기억이 끊겼다.
“힝. 언니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내가 혼자 놀랐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언니의 열 번째 기억을 되찾기 전에 나는 외출을 하기로 했다. 두 번째 외출에는 리니를 데려가기로 했다.
“전, 아니, 리샤 님! 저것 좀 보세요!”
“그렇게 신기하니?”
“네!”
귀여운 리니는 알고 보니 귀한 집 출신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릴 때 그 집 사람들이 전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 리니는 가족들을 잃은 후 곧바로 황궁에 속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첫 외출 때의 나만큼이나 모든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물론 나는 그래도 한 번 봤다고 리니보다는 덜 신기해할 수 있었, 헉 잠깐만!
“리니, 저것 좀 봐!”
저거 솜사탕 아니야? 근데 만드는 과정이 뭐 저렇게 현란해? 내가 가리킨 방향에는 어떤 괴상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솜사탕을 만들고 있었다. 솜사탕이 진짜 구름처럼 크고 뭉글뭉글한 것이 굉장했다. 거기다 색이 무지개색이야!
“헉! 리샤 님! 너무 신기해요!”
그때 무지개색 솜사탕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우와.”
“우와!”
“픕.”
나와 리니의 뒤를 따르던 기사 하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서 심호흡을 하고 그 기사를 힐끔 보았다. 전에 내가 카인을 만나고 돌아갈 때 마중 나왔던 그 순박한 기사였다.
이름이 아마 던이었던가. 알고 보니 아린의 소꿉친구라고 하지 뭔가. 심리적 친밀감이 한층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순박한 던이 내 눈길에 긴장하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전, 리샤 님을 보고 웃었!”
“소리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경, 여기가 연무장입니까?”
“시장입니다!”
그 기사 옆에서 상당히 얄밉게 웃으며 기사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 사람은 우리 유진이었고. 나는 리니와 함께 그 둘을 멀뚱히 보다가 우리끼리 마주 보고 조그맣게 웃었다. 역시 동성 친구랑 나오면 이런 소소한 맛이 있다니까.
나는 이왕 전하로 불리지도 않는 김에 리니의 손까지 잡고 시장 곳곳을 쏘다녔다. 물론 쉬었다가 다니다가를 반복해야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어차피 내 돈은 황궁으로 보내 준다고 하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실컷 놀아야지.’
물론 주점은 금지였다. 리니도 있고, 유진이 잘 취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놀았기 때문에, 그날은 조절을 잘 못 하고 말았다. 결국 체력이 방전된 나는 유진에게 또 공주님 안기로 안긴 채 저녁이 되기 전에 환궁하고 말았다.
“전하.”
“네? 후우.”
내가 체력이 부족해서 거칠게 헉헉대고 있자, 그런 나를 안아 들면서 유진이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록스에게 체력을 보하는 약도 지어 달라고 하겠습니다.”
“…….”
보인 꼴이 있어서 차마 거부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내 품에 벌써 세 칸이나 차지하고 있는 결코 작지 않은 부피의 약통들을 떠올리며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유진은 기어코 록스에게 말을 했고, 록스의 처방을 전달받은 엠마는 그것을 주방장 테오에게 건넸다.
테오는 기운이 확 떨어졌을 때 먹을 수 있는 고열량 음식들을 내게 먹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너무 많다며 같이 먹자고 끌어들인 바람에 리니의 살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저 이틀 만에 살이 찐 거 같아요.”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리니의 뺨을 살짝 만져 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귀여운 걸 뭐.”
리니는 물론 믿지 않았다. 아린이 드물게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며칠 후, 언니의 열 살 기억까지 되찾았다.
열 살의 언니는 1년 만에 아주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사실 조금은 전의 얼음 같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고 종이 접는 것도 좋아하는 아이였다.
나는 언니에 대한 기억들을 돌려보는 것이 일상의 낙이 되어 있었다. 기억은 떠올리면 무조건 처음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거 완전히 육아일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히히. 이 감동을 남길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그리고 그날 저녁, 꼭 내 마음의 소리를 읽은 것처럼 엠마는 내게 일기장을 가져왔다.
엠마가 어딘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민 노트는 무슨 위인전 같은 느낌의 양장본이었다.
“전하, 전에 말씀하신 기록노트입니다. 이 부분을 건드리면 노트가 전하를 주인으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응? 주인?”
노트 군데군데를 짚어 설명하는 엠마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온화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일기장에 무슨 주인 인식 기능이!
“다양한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기능은 주인만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확실한 것은 보안성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오, 오오. 훌륭하다.
“또한 가벼운데도 타격감이 커서 호신용으로도 쓸 수 있다고 했지요.”
“호신용?”
“위험한 부분은 없다고 하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멍하니 손에 들린 노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살상무기쯤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하하…….”
무, 무기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줬으니 고마워서 한껏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엠마는 내 말에 어쩐지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금 후에 나직하게 말했다.
“전하께선…….”
“응. 말해, 엠마.”
엠마의 시선은 따스했다.
“좋은 분이십니다.”
헉. 설레서 추태를 보일 뻔했다. 뭐야, 엠마, 왜 이래요!
“제게는 완벽하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
어버버 거리며 말을 못 하고 보고만 있다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외쳤다.
“엠마, 엠마도 내게 좋은 사람이야! 난 엠마를 정말 좋아해.”
엠마가 그렇게 놀라는 표정은 처음 보았다. 세상에!
“나에겐 어머니 같은 존재인걸.”
“전하…….”
“아, 미안. 부담스럽게 내가 그만…….”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처음이라서 눈치를 보는데, 엠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아닙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전하.”
그리고 그녀가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전하, 저는 늘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
하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호의로 하는 말인 것을 알고 있으니 나는 생긋 미소로 답했다. 이윽고 그녀가 나갔다. 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그녀가 한 말을 곱씹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멋져.”
너무 좋아. 그러다 무심코 입술을 핥았다.
“아, 피가 덜 닦였었네?”
조금이니까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그리고 첫 일기를 쓰기 위해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누르라고 했지?”
주인 인식 부분을 꾸욱 누르자, 마치 머릿속에 물을 끼얹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일기장에서 손을 떼었다.
“뭐야, 이거 뭐지?”
기능이 아주, 다양했다.
“추적 마법, 방수 마법, 실드 3회, 그리고 뭐? 한 번 다 채우고 나면 일기의 정령을 만난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바란 적도 없는 기능이 이 외에도 가득했다. 그래도 몇 가지는 놀랄 만큼 유용한 기능이었다. 일단 이거, 주인이 아닌 사람이 펼치면 가짜 일기가 보인다. 정령을 만나고 나면 이게 마법인 것도 들키지 않게 된단다.
그리고 일기의 정령은 주인의 기억력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일기를 쓸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배려라나?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배시시 웃고 말았다. 뭐야 기억력이래. 엄청 유용해!
“대박.”
나만 볼 수 있다는 것도 일기장으로서는 정말 최고였다.
“와, 만든 사람 얼굴이 궁금하네.”
내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엠마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외친 뒤 바로 펜을 들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단은 빙의 후 기억하는 제일 첫 순간부터.
“나의 행복한 덕질 일기 1. 신은 공평하다…….”
[00년 0월 0일 0요일. 해가 쨍쨍.]
[첫 번째 일기로, 공작의 흑탑 집무실에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를 기록하기로 한다.]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인사치례를 했더니, 그가 말했다. 전하는 강한 분이시군요. ……뭐지?]
[(중략)]
[……아무래도 이 세상의 미남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는 것 같다.]
[신은 공평했다.]
* * *
곧 언니의 열한 살 기억이 돌아오는 날이다. 벌써 한 달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어디 가시려고요?”
“안에만 있으면 안 좋으니까요.”
“하지만.”
“어휴, 걱정 마요. 이제는 체력 조절 잘할 테니.”
나는 유진과 굳게 약속한 뒤, 포부도 당당하게 내 방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두 미남과 마주쳤다.
‘아니. 내 옆까지 셋인가?’
싸늘하게 한곳을 노려보고 있는 유진과 카인. 그리고 조금 먼 곳에 서 있는 황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들에게 결코 꿀리지 않는 사랑스러운 외양의. 아니, 웬 반짝이는 미소년이?
나는 엥,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뇌리에 남은 금발의 미소년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 미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
내 소리에 셋의 시선이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대체 누구냐고 물으려던 찰나, 나는 점점 경악하는 그들의 시선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하하하. 이런.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오, 정말! 덕심이 독이구나!
“읏.”
황급히 부축해 오는 손길들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은발의 내 기사님. 그리고 완벽한 흑색의 조각미남이 곁에 있었다. 거기다 보지 않아도 미소년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미소년의 찬란한 미모도 가까워질수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참듯이 입을 막고서 허리를 살짝 구부렸다. 미남 허용치를 넘어섰다.
갑자기 둘이 셋이 되어 버렸다. 찬란함이 셋. 미모에 익숙해지긴 개뿔, 이런 것에 어떻게 익숙해진단 말인가! 저 미소년은 누굴까? 원작 인물이 아닌가? 주요 인물도 아닌데 저런 미모일 리가! 예전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 르페르샤 언니의 몸으로는 이런 지나친 황홀감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하여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두 미남의 부축을 사양했다.
“……! 리, 전하?”
“……전하.”
유진과 카인이 당황하며 내 이름을 불렀고, 마침내 도달한 황금빛 미소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비틀거리며 문 안쪽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턱.
“아……!”
“안녕?”
그리고 막혔다. 떨리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황금빛 미소년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구한 표정인데, 어쩐지 첫눈에 나는 소년에게서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의 살벌함을 느꼈다. 입술이 파들 떨렸다. 묘한 긴장감에 나는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굴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유진이 그 소년을 경계하며 떼어 내고, 카인이 묵직한 시선으로 나를 찬찬히 살펴 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
저, 저리 좀 비켜 봐요. 나 일단 좀 삽시다! 정말로 정신없이 현란한 미모 바다잖아! 사람이 너무 좋아도 죽을 수 있구나.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기 전에 몸이 들렸다. 역시나, 유진이었다.
‘……이 사람 날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는 데에 맛 들렸나?’
이런 바람직한 미남 같으니. 가물가물한 시야로 유진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유진이 어딘가로 급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우리 사이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아니지, 작게 몇 마디는 속삭였던 것 같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라고.
뭘? 너희의 미모를? 그걸 어떻게 참나요!
그냥 돌아가서 아까 그 미소년의 이름을 알아와 준다면 고마울 텐데.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록스가 아니라 소년의 이름이야. 나는 슬픈 눈으로 그들을 원망스럽게 보다가 힐끔 그 뒤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안타까운 탄식을 삼켰다. 황금빛 미소년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아니, 이건 기억인가? 지나치게 혼자 지내기는 해도 나름 평범한 아이인 우리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열한 살. 또 선물을 보고 있었다.
오, 이번 선물은 강아지인가보다. 하얗고 조그맣고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언니의 손안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강아지도 너무 귀여웠고, 무표정한 얼굴에 볼이 발개진 우리 언니도 너무 귀여웠다.
실은 나는 이제 언니가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선물들을 관찰하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외가에서 보내는 선물은 언니의 세상을 넓혀 주는 돌파구였다. 이번엔 그럼 동물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려나? 여러 번 돌려 보면서 느낀 건데 이 기억이라는 거, 해를 넘어갈수록 길어진다.
그러니 이번 열한 번째 기억은 지금 보인 것 이후 부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즐거운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언니가 어떤 사람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선물로 왔으니까요?”
퉁명스럽게 반응하는 목소리였다.
엠마가 아니네?
언니는 퉁명스러운 투에는 반응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이 아이도 엄마가 없어?”
그래서 여기 있나 보지? 무미건조한 물음이었다. 내가 멈칫한 사이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저야 모르죠.”
그제야 언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뚫어져라 보자 그 사람은 방을 나가 버렸다. 언니는 다시 손안의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네 이름은 리샤야.”
리샤는 내 애칭이래.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이지만 소중한 거야. 너한테 줄게.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미약한 소리를 냈다. 언니의 입가에 처음으로 온화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리고 기억이 끝났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 코에 맡은 냄새로 확인했다. 역시나 약제실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를 어쩌고 한 것 같다. 아, 그래, 기절한 채로 피를 토했구나. 기억을 되찾아서 그랬지.
“분명히 우리의 마나로 처방한 것이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효과는 분명히 있습니다만, 이제 보니 이건 조금 다른 증상입니다.”
“조금 다른 증상이라니?”
카인에 이어 유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진이 물었다. 나는 집중하려 애썼다.
“자꾸 피를 토하시는 게 병 외에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예…….”
록스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즈음.
“예전에 이런 증상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황녀 전하의 피를 토하는 증상은…… 단순히 정신적 충격만이 아니라 영혼이 균열을 일으켜서 나타나는 희귀한 증상입니다.”
그것은……. 록스가 말을 이었다.
“……영혼이 망가진 이들에게 나타나는 초기 증상입니다. 이는 영혼의 병인 라파엘리스의 부작용 중 최악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걸 듣고만 있었다. 어차피 저건 내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 테니까. 그런데 그때 록스가 말했다.
“영혼이 바뀐 게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균열이 시작되면 고통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 영혼이 바뀐 상황이 나니까.
“그리고 진행을 보아, 곧 토혈을 더 많이 하게 되실 겁니다. 늦춘다고 늦췄지만…… 이대로라면 2년 이상은 어려운…….”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고, 덤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방금 본 기억이 떠돌아다녔다.
언니, 아니 르페르샤는 외로웠을 것이다.
원작을 읽을 때 짐작하며 찌통이라고 소리치는 것과 지금은 너무나 많이 달라서. 그것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기억이라는 게, 안아 줄 수 없었던 게 너무 속이 상했다.
그때 카인이 입을 열었다.
“그만.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군.”
“하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지.”
그의 동굴 목소리는 뭔가 꾹꾹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전하께서 주무시니 편안히 쉬실 수 있도록.”
내가 혼자 있고 싶기는 하지만 영문을 모를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다들 말없이 동의했는지 하나둘 내가 누워 있는 약제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모로 돌려 누운 뒤 숨을 참고 눈을 꼬옥 감았다. 차마 하지 못했던 속내가 파르르 떨리는 숨결로 뱉어졌다.
사실, 내가 가장 구해 주고 싶었던 사람은 언니였다고.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