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연심
여린 잎은 향기롭다. 움트는 모든 것들의 설렘과 싱그러움을 그 작은 몸에 한껏 품었기 때문이리라. 봄은 여린 잎으로 와서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물들였다.
“완벽해야 해.”
라빌로프가 말했다.
“아무렴!”
아리엘이 외쳤다.
“폐하께서 무엇이든 다 써도 좋다고 하셨으니, 걸릴 것은 없어.”
“기간만 빼고 말이지……. 청혼을 겨울에 받으셨는데 봄에 결혼식을 올리시다니.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잖아.”
한창 신혼인 시기에 두 사람은 알리샤의 결혼 준비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시무룩한 아리엘의 말에 지켜보던 가일 후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보다, 식순이 간단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만…….”
“…….”
“…….”
순식간에 우중충해진 황태자 부부를 가일 후작이 떨떠름하게 응시했다.
“……순서는 간략하게 하면 되지.”
“맞아. 요정님, 그리고 하나하나 최고로 하는 거야.”
사실 가일 후작이 신혼부부를 찾아온 것은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시간 안에 모든 순서를 끝내고 같이 음식을 나누는 걸로 하겠다고 하셨지.’
리샤 님의 이러한 의사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머리를 맞대며 초호화 결혼식을 상상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를 않는군.’
결국 가만히 지켜보던 후작은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대륙 일주로 구상하기 시작할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와아!”
광장에서부터 달려온 웨딩마차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모두 숨을 죽이고 신랑의 손을 잡고 내리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헉 소리가 날만큼 눈부신 아름다움이었다.
알리샤 황녀의 웨딩드레스는 새하얗고 꼬리가 몹시 긴 드레스였다. 천사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드레스라서 마치 날개가 달린 것 같은 착시까지 일게 했다.
검은 정장으로 차려입은 다니엘과 알리샤가 나란히 서자 선남선녀의 아름다움에 다들 얼마간 넋을 잃었다. 다니엘 특유의 유하면서도 위험한 분위기가 알리샤의 곁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던 것이다. 그것은 천사와 악마가 사랑에 빠진다면 저럴 것 같다는 망상까지 불러일으켰다.
“세상에.”
감탄하는 마음으로 소피아 영애가 중얼거렸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눈물을 머금고 드레스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다더니. 정말이지 완벽하네요.”
“리샤 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완벽하니까요.”
이비엔 경이 진지하게 응수했다. 소피아 영애도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결에 그들 옆에 서게 된 가일 후작이 괴상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는 익숙한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였다.
세 사람은 무언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밝은 얼굴이었지만.
“와, 결혼을 다 하네, 저 자식이?”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헤레이스.”
“이렇게 일찍 리샤 님이 결혼을 결심하실 줄은 몰랐다.”
다니엘 쪽을 볼 때는 미약하게 허탈함과 어이없음, 짜증 같은 감정들이 엿보였다.
‘참 한결같은 사람들이란 말이지.’
가일 후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알리샤와 다니엘이 있는 쪽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연인의 가벼운 입맞춤, 그리고 반지 교환. 이어서 또 키스.
‘본래대로라면 저 순서들 사이에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는데.’
황족의 결혼식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략해진 순서였다.
“누나, 벌써 끝난 거야?”
“뭔가 휙 지나간 것 같습니다, 누님.”
쌍둥이들이 제인에게 묻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 주위 좀 둘러봤더니 그사이에 벌써 반지도 교환했고, 마지막 키스까지 끝났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제인이 답했다.
평민들까지 환호성을 지르다가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와중에 기다렸다는 듯이 만찬이 차려졌다.
“우리는 황궁에 초대받았으니 궁 쪽으로 가면 돼.”
“아! 콜린도 오랜만에 보겠네?”
“그래.”
그렇게 일찌감치 축제가 시작되었다. 주인공들은 이제 손님맞이를 한 뒤에 바로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가일 후작은 한숨을 작게 쉬었다.
“한심하군.”
툭 나온 말에 제인이 힐끔 후작을 보았다. 그러다 동생들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영애들도 떠나고 저쪽의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도 떠났다. 그렇게 주변이 한산해지기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던 후작은 이제 비어 있는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알리샤 황녀를 마음에 품었던 것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 조금이다. 호감보다는 조금 많은 정도. 주변에 꽤 냉랭한 편이던 가일 후작은 황녀와 그다지 가깝지도 않았다.
‘그나마 가까이서 지냈던 것은 잠깐 동안 억지를 부려 감시를 했을 때뿐이고.’
그런데 정말로, 어느 새에. 지인들만 모아서 한다던 파티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참석했을 때, 왜 그렇게 심기가 불편하던지. 그때 이미 그는 황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파티에 초대도 하지 않으셨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너무 가깝지 않아서 이리 된 걸지도 모르겠군.’
유진이나 카인, 헤레이스 저들은 다른 방식으로 알리샤 황녀와 가까웠다. 가족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방향으로 감정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이야.’
기분이 이상했다. 나쁘지도 않았고 좋지도 않았다. 그냥 이상했다.
“우습군.”
시작도 하기 전에 흔적도 거의 남지 않은 옅은 연심이. 저 스스로가, 그냥 좀 웃겼다.
그는 잠시간 그 이상한 기분을 곱씹다가 그답지 않게 홀가분하게 씩 미소를 그렸다.
“행복하십시오.”
이 존재감이 미약한 감정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작은 축복의 말이면 충분했으므로.
후작이 떠난 자리에 분홍색 작은 꽃잎 한 장이 떨어졌다. 꽃잎은 잠시 그곳에 머물다 멀리 부는 바람을 타고 이내 자리를 떴다.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황제의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축복도 한 조각 더해졌다.
하나둘 그런 축복이 쌓였다. 봄날의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 * *
신혼여행지에서의 첫날밤을 마주하고서 사실 둘 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알리샤는 키스나 포옹에는 적극적인 편이었지만, 그 이상은 거의 꿈도 꾸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리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니엘도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았다.
헤레이스에게 누군가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고 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더하군.’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가슴이 떨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 밤이라는 것은.
서로 자연스러운 척 눈치만 보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손만 꼬옥 잡고서.
“…….”
“…….”
자신들의 행태를 깨달은 뒤 먼저 웃음이 터진 것은 알리샤였다.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알리샤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상기된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흠.”
그런 그녀를 보며 잔잔하게 마주 웃던 다니엘이 문득 가만히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알리샤는 부드럽게 가까워지는 얼굴을 보고 그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것은 잔잔하게 스미듯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새삼스럽고, 사랑스러운. 리샤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음.”
처음 했을 때보다도 떨리고, 이상하게 더 서툴러진 것 같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러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서툴다 할 수도 있는 움직임은, 사실 서로를 향한 연심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사랑해요.”
신음처럼 고백이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밤이었으나.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 * *
“으음.”
알리샤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이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가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 잤어요, 리샤?”
“네. 단은요?”
“전 안 잤어요.”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는 그녀의 이마에 다니엘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입을 맞췄다.
“당신이 사랑스러워서요.”
시간이 흐르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알리샤는 조금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그저 웃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잔잔한 웃음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그들에게 대공 위가 내려진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