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베아트리스의 결말
-괴물 공작의 시종으로 살아남는 방법.
옛날 이 나라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스.
어찌나 아름답던지 아주 어릴 때부터 구혼이 줄을 이었단다. 그것은 그녀의 가문의 기쁨이었다고.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나이가 찬 뒤엔 구혼자들의 사랑이 광기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사랑을 노래하던 남자들은 그녀를 소유하고자 했죠.”
다니엘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그녀가 도망갈 자리를 모조리 빼앗았단다. 가족, 친지, 돈, 그리고 명예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어이없게도 희대의 요부라 불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배부른 미친놈에게 팔려 가기 전.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두근두근.
흑막은 이야기를 참 잘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결심? 무슨 결심이요?”
“음, 다음 이 시간에?”
-66화 중에서.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단. 저 그 뒷이야기 몰라요.”
결혼 전 여행길의 어느 날에 알리샤가 말했다.
“알리샤로서의 기억에도 그 이야기의 결말은 없거든요. 그때 그렇게 끊다니 정말 너무했어요.”
알리샤가 그렇게 구시렁거리더니 이내 기대의 눈빛을 보냈다.
……귀엽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다니엘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흠, 알았어요. 이야기해 줄게요. 별거는 없지만.”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다니엘이 이야기를 이었다.
“그녀는 그 길로 자취를 감췄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이 나라 공작과 결혼을 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요.”
“그리고요?”
“그게 전부예요.”
다니엘이 살짝 눈을 내리깔며 나른하게 답했다. 저럴 땐 뭔가 의뭉스럽게 말하지 않는 게 있다는 뜻인데. 알리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그게 끝이에요?”
“네. 그래서 그 대회가 신분 상승용 미인 대회가 된 거고요.”
정말 그게 다란 말이야? 아무리 다니엘을 바라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구하게 마주 보는 것이 괜히 얄밉기만 했다.
알리샤는 묘한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것은 세간에 끝끝내 알려지지 않은 베아트리스의 이야기이다.
* * *
베아트리스 린데아는 세기의 미녀였다. 그러나 그 미모 때문에 그녀는 미친 구혼자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결국 배부른 미친놈에게 팔려 나가기 전.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니들한테 시집가느니, 저 괴물 공작의 시종이 되는 게 낫겠어.”
그것은 즉,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소리였다.
사람을 가축처럼 도륙한다는 괴물 공작의 시종 자리는 세간에서 무덤이라 불렸다. 그 자리를 거쳐 간 수많은 소년들은 언제나 단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그 사실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가면 한 달이라도 니들 면상을 안 볼 수는 있겠지.”
그녀는 그날 밤 머리를 잘랐다. 풍성한 은빛 머리채가 발치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침대보를 가위질해 만든 붕대로 가슴을 가렸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에도 붕대를 둘렀다. 마지막으로 낡은 남성 평복을 걸치니 그나마 조금은 소년으로 보였다. 아니, 보이기를 바랐는데.
“……망할 미모.”
이건 그냥 남장했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수준이었다.
한참 거울을 못마땅하게 보던 베아트리스는 좁은 방의 먼지와 검댕을 쓸어 모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좀 낫네.”
훌륭한 거지 소년이었다.
한숨을 푹 쉰 그녀가 숙이기도 어려워진 몸으로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주웠다.
“두고 가면 분명히 엄한 일에 쓰일 테니.”
손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몹시 보드라웠다. 그녀의 은발은 줄곧 별빛이 내려앉았다는 칭송을 듣고는 했었다.
“별빛은 개뿔. 모조리 태우고 가야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머리카락을 채 태우기도 전, 밖에서 계단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벌써?”
행여 그녀가 도망갈까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미친놈들이 꼭두새벽부터 그녀의 처소에 쳐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당장 그곳을 떠나야 했다. 화급히 머리카락을 짐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치미는 욕을 삼키며 창틀을 손으로 잡았다. 등에 멘 짐 위로 낡은 겉옷이 걸쳐져 있었다.
탁!
창틀을 박차는 소리가 가볍게 허공을 울렸다.
가는 인영이 어둠 속에서 허리를 구부렸다. 성공적으로 꼽추 거지 소년이 된 베아트리스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라펠테른 공작 저택. ‘괴물 공작’의 사저였다.
아멜롯 라펠테른 공작이 괴물 공작이라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는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마법을 상징하는 검은색은 당시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색이었다. 그런 색을 가진 자는 온 대륙을 통틀어 그 하나뿐일 것이었다. 그것은 평소에는 검정에 가까운 색이지만, 아멜롯이 마법을 쓸 때면 희미하게 보랏빛을 띤다고 했다.
그런 그가 쓰는 마법은 파괴의 마법이었다. 기괴함과 파괴성. 거기에 그의 아름다움이 맞물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거기다 시종들이 그렇게 연속으로 끔찍하게 죽어 나갔다니. 이미지가 좋을 수가 없지.”
그림자만을 찾아 잽싸게 몸을 움직이며 베아트리스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손에 전단지 하나를 꼬옥 쥐고 있었다. 그것은 라펠테른 공작가에서 공작의 전속 시종을 구한다는 구인 정보지였다.
“쯧. 오죽하면 공작가가 구인 전단지를 의뢰했을까. 하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멍청이가…… 아, 그게 나구나.”
빌어먹을 구혼자 새끼들. 베아트리스는 다시 한 번 제 인생을 망친 주범들에게 욕을 날려 주었다.
이윽고 그녀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골랐다. 저 멀리 공작가 저택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일단 저택으로 오라고 쓰여 있어서 오기는 했는데. 이 야밤에 받아 줄지 모르겠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문은 그녀가 다가가자 절로 끼익 하고 열렸다.
“허.”
찝찝한 표정으로 저택 안쪽을 응시하던 그녀는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텅 빈 성 안쪽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옅은 피비린내를 두르고 있는 괴물을.
“첫 지원자는 친애하는 황제폐하의 세작이었지.”
멍청하게 보고 있는데 괴물이 붉은 입술을 열어 대뜸 말했다.
“두 번째는 암살자였고.”
“아, 어…… 그렇군요.”
베아트리스는 얼어붙은 채 눈을 굴렸다. 그녀의 얼굴 바로 옆에 박혀서 징 울고 있는 칼은 핏빛이었다.
“그래서, 넌 뭐지?”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살기 위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름은 벤. 나이 15세. 연고 없음. 완전히 깨끗함. 죽일 가치도 없음! 입니다.”
“…….”
베아트리스, 아니, 이제는 벤이 된 ‘소년’을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보았다.
살벌한 침묵이 흐른 뒤, 베아트리스는 눈앞의 사신 같은 사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순간, 어디선가 들어온 빛에 남자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뜻밖에도 자못 우아했다.
무저갱처럼 깊은 흑안과 그녀의 장미꽃빛 눈동자가 덜컥 마주쳤다. 그것이 그들의 시작이었다.
‘벤’은 태어나서 우아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지독하게 잘생긴 남자도.
‘저만큼 제대로 미친 인간도!’
그의 외적 아름다움에 눈을 빼앗기기도 전에 자기 목 간수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라펠테른 공작이 맞기는 하겠지?’
심심하면 칼을 던지는 놀라운 생명체를 향해 벤이 말했다.
“식사하십시오, 주인님.”
오늘도 가까스로 피한 단검을 빼어 돌려주는 것도 시종이 할 일이었다.
벤은 해탈한 심정으로 일련의 일들을 했다.
‘이거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는 한데.’
청소도, 빨래도, 심지어 지금 먹으라고 한 식사도. 전부 안 보이는 누군가가 해놓고는 했다.
‘귀신이라도 있나 싶어서 처음엔 긴장했지만…….’
지금은 긴장은 무슨. 귀신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붉은 용의 심장은 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허공을 향해 공작이 말했다. 살기를 뿜으며.
“그리고 레어만 내오라고 하지 않았나. ……인간이 여기 있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지? 저건 내 시종이다.”
“…….”
그 ‘저거’는 이만 물러가면 안 될까요?
“……그래. 꽤 오래 버티고 있기는 하지. 피에서 좋은 향기가 나기도 하고. 좋아. 그 부분은 참작하겠다.”
물러가……. 잠깐. 피?
“배신하지 않고, 도망도 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 것을 내 시종이 어서 알아채야 할 텐데.”
“…….”
결국 물러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서 벤은 끝까지 식사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한 달이 지나 있었다.
“어째 죽지 않고 살아 있기는 한데.”
사시사철 눈바람이 부는 라펠테른 성 앞마당을 쓸던 벤이 우뚝 멈췄다.
“이대로 괜찮을까?”
마치 누구 들으라는 듯이 굳이 혼잣말을 하는 벤이었다.
“날씨는 한겨울인데 아침마다 큰 모기에게 물리지를 않나.”
쓱쓱 싹싹. 비질이 느릿하게 다시 시작되었다.
“식품 저장소에 분명히 싱싱한 음식만 가득한데, 그 주변만 가면 어디서 피비린내가 나고.”
쩌렁쩌렁한 혼잣말도 계속 이어졌다.
“난 하루에 세 끼나 챙겨 먹는데 빈혈이 생겼네?”
무표정한 얼굴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휘이잉. 갑자기 찬바람이 불었다.
“……이놈의 귀신은 화장실도 안 가는지 도통 마주치지를 못하고.”
이렇게 사람 성질만 돋운단 말이지?
“……벤.”
드디어 들리는 목소리에 벤이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돌아보았다.
“주인님.”
한 달간 입가에 밴 미소였다. 스산하고, 산뜻한 미소.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이지요.”
“……음.”
초반에 당당하게 단검을 날리던 피에 미친 인간은 어디로 가고. 한 달 만에 눈앞의 인간은 다른 의미로 피에 미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아니구나?’
잠시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보자 찔리는 것이 있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본다. 천하의 라펠테른 공작이 아주 귀여운 짓을 하고 있었다.
“위험 수당 같은 것은 없습니까?”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답에 벤이 허허롭게 미소 지었다. 미친놈들 피해 왔더니 뱀파이어를 만났어요! 어머나, 세상에.
“있어요?”
“흠. 나가지만 않으면 금은보화를 매달 상자로 주지.”
“오호라.”
내 불쌍한 피!
“후우. 좋습니다. 앞서 쌓인 위험 수당을 몰아서 받기 전에, 일단 얘기 좀 하죠, 주인님.”
휘이잉 하고 또 찬바람이 불었다. 착각일까. 바람이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느낌이다. 벤은 싸늘한 비웃음을 날려 준 뒤 빛나는 은발을 찰랑 휘날리며 앞서 걸었다.
“응접실에 먼저 가 있겠습니다.”
“음. 따라가지.”
제국의 비밀 병기인 뱀파이어 공작, 아멜롯 라펠테른. 그는 조그맣고 약한 새끼 강아지가 식식대며 걸어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괘씸한 인간!
-왕이시여! 처리…… 까지는 좀 그렇고 조금 혼내 주죠!
-왕이시여, 피만 뽑는 걸로.
“닥쳐라.”
저도 모르게 바람의 속삭임을 쳐 낸 뒤 공작이 걸음을 옮겼다.
‘근래 들어 내가 이상하군.’
신선한 먹이가 들어왔는데, 이게 그냥 신선한 정도가 아니라 별미였다.
‘아니, 별미 그 이상.’
그래서 아껴 먹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아프지 않게, 스트레스 받지 않게.
‘그런데.’
그는 제 가슴께를 낯선 느낌으로 문질렀다. 먹이를 보기만 해도 심장이 이상하게 웅성거린다. 많은 인간들의 아는 바와 달리, 뱀파이어의 왕에게는 심장이 있었다. 차갑고 기계적인, 피비린내 나는 심장이. 그 심장이 펄떡댄다.
‘세작도 아니고. 귀족파의 암살자도 아니고.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깨끗하고.’
아니, 그런 뒷조사를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저 소년’은 공작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뭘 한 건 나지.’
시종은 외양도 꽤나 훌륭했지만, 그 이상으로 피 맛이 굉장했으니까.
‘아껴 먹는다고 해도 하루 한 번은 먹어야 했어…….’
중독성이 있었다. 이빨 자국도 거의 남기지 않고 손을 잠깐 물었을 뿐인데.
‘큰 모기…….’
공작은 저도 모르게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어째 뭘 한 건 그인데, 당한 것도 그인 것 같았다.
“…….”
달팽이만큼 천천히 걸었건만 어느새 응접실이었다. 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가겠다.”
그리고 그날, 공작은 스산하게 미소 짓는 제 시종에게 자기도 모르게 개인 정보를 탈탈 털리고 말았다.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묘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약 3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째서 나는 너를 갖고 싶은 거지?”
“……예?”
흑발의 미남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벤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제 피가 맛있어서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찬바람들만 난리가 났다.
-제길! 인간은 역시 약하고 둔하고 모자라군요!
-저건 인간의 평균이 아닙니다, 왕이시여.
-저건 소설도 안 보나 봐…….
벤은 눈을 데굴 굴렸다. 사실 그녀는 근래 들어 마나를 느끼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빛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 그녀의 가문 사람들이 빛 속성 마나를 가지고는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거야…… 자연스러운데. 문제는 저 바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들린다는 거지.’
평균 이하라니. 아닌데.
‘아니, 뭐. 한두 번이어야 눈치를 못 채지.’
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둥, 먹고 싶은 건 다 말하라는 둥. 별별 대시를 하면서 표정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모를 수는 없지.’
저 어딘가 어벙한 뱀파이어의 왕은 벤을 사랑한다.
“하아.”
“왜 그러나?”
“아닙니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서 벤이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나 지금 남장 중인데.’
혹시 뱀파이어는 성별을 가리지 않나……?
‘아니면 성향이 그쪽인가?’
다만 그런 모든 의문들에 앞서서 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왜, 기분이 나쁘지가 않지?’
미친 구혼자들 때문에 벤은 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오한부터 드는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 덜떨어진 뱀파이어의 군주에게는 다른 것일까.’
동굴 같은 목소리에 사연 있어 보이는 깊은 흑안. 생긴 것만큼은 완벽한 뱀파이어의 왕이 시무룩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왜, 잡고 싶은 거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벤은 본의 아니게 밀당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약 6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 벤이 심하게 아픈 것을 공작이 밤낮으로 간호해 준 것을 계기로 둘은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여성체였네?
-좀 그런 거 같았지.
“내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아나! 후우.”
“그, 그게…….”
한바탕 벤의 성별 문제로 난리가 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둘은 그 후 1년도 되지 않아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 린데아는 해피 엔딩에…….
“헉!”
이르렀어야 했을 터인데. 베아트리스는 자신을 찌른 칼을 노려보다가 울부짖고 있는 공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멜롯.’
그때까지도 그녀를 잊지 못한 구혼자 중 하나의 소행이었다. 실력이 상당한 인간이었다. 무려 뱀파이어의 군주가 보는 앞에서 그 반려를 죽이다니.
‘사랑합니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베아트리스 린데아의 결말은 그처럼 비극이었다. 그리고.
“베스. 벤. 그대를 찾아낼 것이다.”
라펠테른 공작은 그 자리에서 맹세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찾아내서.”
그대가 그토록 염원했던 우리의 해피엔딩에 이를 것이라고.
* * *
“역사적으로 베아트리스 영애는 결혼하자마자 살해당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잠든 리샤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굳이 알리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 순간이 좋았다. 연인에게 있어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다니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부드럽게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멀리 떨어진 트리아노 제국 수도. 유진과 카인, 헤레이스는 이와 같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각하, 오늘따라 과음하시는군요.”
“취하지도 않으니 별 의미는 없네.”
“별 의미가 없기는. 오늘 무슨 날이야?”
헤레이스가 시큰둥하게 묻자 유진도 말없이 카인을 보았다. 침묵이 흐른 후 헤레이스가 짜증내기 일보 직전이 되었을 때, 타이밍을 맞춰서 카인이 입을 열었다.
“내 생일이다.”
“……?”
유진이 눈을 깜박였다. 헤레이스는 그래도 정보 길드장이라 그런지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아하.”
아무 일 없는 듯 넘겼지만 헤레이스의 입술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카인의 생일은, 곧 뱀파이어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난 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라지고, 어머니가 앓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눈치로 뒤늦게 그 의미를 알아챈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술을 넘기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카인이 무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달칵. 탁자 위에 놓인 것은 검은 브로치였다.
“생부의 유품이네.”
답지 않게 취했군. 유진과 헤레이스가 슬쩍 마주 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번 봐도 됩니까?”
지금은 볼 수 없는 진짜 뱀파이어의 소지품이라니. 호기심이 들 만했다.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신기해?”
의외로 헤레이스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운이 이상합니다.”
이게 뱀파이어의 마력인가? 유진은 브로치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어?”
잠시 후 오톨도톨한 무언가를 발견한 유진이 안력을 돋워 그것을 읽어 보았다.
“……아멜롯, 라펠……테른.”
“그거 마지막 뱀파이어 이름이잖아.”
시큰둥하게 헤레이스가 대꾸했다. 그는 지금은 볼 수 없는 뱀파이어보다 생전 처음 보는 아이릭 공작의 취한 모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는 게 주사인가? 정말? 이렇게 시시하다고?”
물론 조금 후에 탁자에 옆얼굴을 대고 곤히 잠든 카인을 보고서는 배신감에 휩싸여야 했다.
“헤레이스.”
“윽, 역시 니들 재미없어! 재미없는 인간들!”
“당신 재미있으라고 사는 게 아닙니다만.”
“익!”
“주사를 봐서 뭐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나중에 놀려 주려고 그러지.”
유진이 애를 보는 눈빛으로 헤레이스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왜 자길 그렇게 보느냐며 시비 거는 헤레이스와 유진의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점차 아득해지는 그 소음들이, 카인은 싫지 않았다. 그 아늑한 소리들을 들으며 카인은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