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각인 1권
01
가난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담뱃진에 찌든 낮은 천장에, 입가에 핀 버짐에, 더께가 두껍게 얹힌 발톱에. 도우는 암울한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발 들이고 싶지 않지만, 핏줄의 시선이 늪처럼 그녀를 빨아들였다. 굶주린 새처럼 입을 쩍 벌린 모양새로.
“도우야. 억제제 말인데…….”
말끝을 흐리는 모양새에 반사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동시에 희미한 두통이 일어 더욱 그랬다.
“억제제 왜? 이틀 전에 줬잖아. 그런데 왜?”
“그게…….”
말꼬리가 길어지는 게 어째 불안하다 싶더니.
“몇 알만 더 구해 줄 수 있나 해서.”
“…….”
불길한 예감은 어김이 없다. 이틀 전에 넘겼던 약통에는 무려 마흔 알이 들어 있었다. 그 정도 양이면 다섯 명이 한 달 동안 넉넉히 쓰고도 남았다. 이제 막 발정기에 들어선 막내 때문에 특히 더 많이 넣었는데.
아무 말 없이 쏘아보자 엄마가 더듬거렸다.
“앞집 총각 알지? ……왜 전에 우리 피자 시켜 줬었잖아. 어제 보니까 힘들어 보이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피자를 시켜 준 게 아니라 먹다 남은 걸 넘긴 거였다. 반 판이었나. 식어 빠져선 치즈가 떡처럼 꾸덕꾸덕 달라붙은 피자를, 동생들은 맛있다고 잘도 먹었다. 먹여야 할 입이 여섯이나 되니 피자 반 판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우는 주머니 속의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갈등했다. 하나 더 시켜 줄까 말까.
말자.
독립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러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매달 억제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인 것만도 꽤 이득이었다. 곧 작은 원룸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부모가 이번처럼 엉뚱한 짓만 벌이지 않는다면.
“힘들어 보이는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래서 억제제를 나눠 줬다는 거예요, 지금? 얼마나?”
“으응…….”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엄마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세 알이면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양이다. 그렇다 해도 눈감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얼만데. 피자 서른 판은 족히 사 먹고도 남았다.
“그런데 왜 모자라? 아직 월초잖아요.”
셋째, 넷째의 발정기는 월말에 몰려 있었다. 설령 일찍 시작했더라도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도우는 초라하게 벌어진 세 손가락을 물끄러미 노려봤다. 설마 아니겠지. 세 알일 거야. 손가락도 세 개……니까.
“아니죠? 서른 알…… 아니잖아. 그렇죠?”
“도우야…….”
다그치듯 묻자 엄마가 금세 눈물을 글썽거렸다. 안타까운 건 이젠 더 이상 그 모습이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엄마!”
“앞집 총각도 사정이 많이 안 좋더라고! 총각이 아주 착해. 우리 집 잘 챙겨 주기도 하고. 우리야 또 얻으면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아니니까…….”
“뭐? 우리가 뭘 또 얻으면 되는데? 그게, 그게 왜 우리야? 말해 봐, 그게 왜 우린데!”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나잖아. 다 내 몫이잖아. 맨날 나 혼자 아등바등 난리잖아!”
“도우야, 미안해. 너 힘든 거 뻔히 알면서, 미안해. 내가 죄인이다, 죄인.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됐었던 거지, 응, 도우야, 미안해.”
“미안하다면 다야?”
좀처럼 그녀의 화가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자 이때까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아빠가 끼어들었다.
“도우야! 너도 적당히 해라. 그럼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떡하니? 서로 돕고 살아야지.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앞집 총각이 얼마나 우리를 잘 챙겨 준다고.”
“그렇다고 서른 알이나 퍼줘요? 나는 어디서 억제제가 샘솟는 줄 알아요? 그거,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서…….”
“엄밀히 말하면 전부 네 능력은 아니잖니. 너도 도움받는 거면서.”
“……뭐라고요?”
중얼거림 속에 이안의 이름이 들려와 머리끝까지 열이 뿌옇게 올랐다. 흘긋 곁눈질로 안색을 살핀 아빠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야 따지고 보면 인맥도 네 능력이긴 하다만.”
“…….”
“도우야, 일이 이렇게 된 것 어쩌겠니. 동생들은 살고 봐야지. 나나 네 엄마는 어디서 대주기라도 하면 되겠지만 동생들은…….”
협박이었다. 어떻게든 억제제를 구해 올 걸 아는 여유가 측은하게 꾸민 표정 속에 녹아 있었다. 더는 참기 힘들었다. 이안의 이름이 거론되어서 더욱 그랬다. 어째서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지. 알파들의 혐오도 이해가 갔다.
도우는 어느 부자와 거지의 일화가 떠올랐다. 매일 거지에게 금화를 적선하던 부자가 어느 날은 깜박하고 동전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주머니에 잡히는 대로 은화를 줬더니 거지가 자기를 뭘로 보냐며 은화를 내동댕이쳤다는. 염치를 모르는 거지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도우는 제 부모에게 쏘아붙였다.
“대주긴 뭘 대줘요? 어딜 대줄 건데요? 대주면 누가 박아나 준대요?”
제가 생각해도 독한 언사였다. 하지만 분이 올라 씨근덕대는 가슴은 그리해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여간해선 순종적으로 넘어가는 도우가 가시를 세우자, 부모는 창으로 공격해 왔다.
“뭘 그리 혼자 고고한 척이야? 다달이 월급 좀 찍힌다고 어깨가 으쓱한 모양인데, 그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착각하지 마. 네가 하는 거, 희생 아니야. 너 잘난 맛에 사는 거지.”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최소한으로 먹고 입는 것 빼고는 다 식구들 밑으로 들어가는데, 희생이 아니라 나 잘난 맛에 산다고? 내가 언제 그랬어? 대체 언제?
“누구 코에도 못 붙이는 있으나 마나 한 돈, 필요도 없겠네요, 그럼. 알았어요. 안 주면 되잖아. 그럼 되는 거잖아.”
“끝까지……. 넌 너밖에 모르니?”
“여기서 뭘, 뭘 더 어떻게 해야 위해 주는 건데요? 어떻게?”
발악하듯 악을 써대는 도우를 따라 숨죽이고 눈치만 보던 동생들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책임한 부모의 태도에 자기들의 미래를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저가 다르게 울려 대는 울음소리에 귀가 먹먹한 가운데에서도 냉랭한 어조로 읊조리는 부모의 말은 똑바로 알아들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도우는 멍하니 되물었다.
“뭐, 뭐라고요?”
“대리출산.”
“…….”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 너. 연구소에 그런 의뢰가 한두 건 들어오는 것도 아닐 테고.”
기어이. 내가 뼈 빠지게 벌어 오는 돈으로는 모자라서.
분노와 절망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아무리 오메가라도 자식한테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것 아닌가. 파르르 떨고 있자 양심이 남아 있긴 했는지 살살 눈치를 살폈다.
“도우야, 미안하다. 몸만 성하면 나라도 할 텐데. 미안하구나, 미안해.”
부모가 울자 어린 동생들의 울음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흐느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아무 잘못 없는데 죄책감은 제 몫인 건.
아니야. 그건 정말 아니야.
두통이 점점 심해져 머리에 쇠로 만든 모자를 얹어 둔 것 같다. 도우는 삐걱거리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알아들었다고 하면 정말로 바랄 게 뻔해서. 마음의 빈틈을 노려 끈질기게 매달릴 걸 알아서. 그게 너무나 악몽 같아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선 한동안 빈 거리를 눈으로 쓸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편의점 의자에라도 앉아 있을라치면 작은 캔 음료라도 사야 했다. 남들은 여유라 부르는 잠깐의 휴식을 도우는 낭비라 불렀다. 밝은 편의점 불빛을 보며 망설이던 도우는 터덜터덜 놀이터로 향했다.
춥다.
유난히 스산한 밤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느릿하게 걸었다. 거친 모래가 깔린 구식 놀이터는 어둑하고 음침했다. 오메가들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놀이터 중 하나였다. 도우는 쇠 비린내 나는 낡은 그네에 앉아 하릴없이 발을 굴렀다. 모래 먼지가 검은 구두코에 누렇게 앉았다.
가난은 어디에나 있구나.
여기도 노랑, 저기도 노랑. 노란 가로등 조명이 도우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냥 당직이나 신청할 걸 그랬다. 보너스 좀 탔다고 우쭐거리며 집에 올 게 아니라.
“이게 뭐야.”
동생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치킨을 시켜 주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웃게 해주기는커녕 실컷 울린 꼴이 되었다. 보너스로 받은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은 규모 없이 살림하는 부모의 주머니로 들어가 먼지보다 의미 없이 흩어질 테고 동생들의 배는 여전히 고플 거다. 그 생각을 하니 입맛이 썼다. 별이 총총해 더욱 서러웠다.
구두 끝으로 모래를 푹푹 찌르면서 도우는 부모를 원망했다.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지. 책임도 못 질 거면서.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더욱 기가 막힌 건 그녀의 밑으로도 줄줄이 딸린 동생들이 있다는 거였다.
우울을 낙수 삼아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도우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소장님!”
―잘 들어갔어?
“네.”
―모처럼 식구들하고 오붓한 시간 보내는데 내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
“……아니에요.”
도우는 애써 밝은 척 목소리를 꾸몄다. 오랜만에 동생들 배 터지게 포식시켜 줄 거라고 자랑하고 퇴근했는데, 이런 꼴은 좀 부끄럽다.
―그래. 다른 게 아니라 몇 가지 확인 좀 해줬으면 해서.
도우는 신중하게 이안이 불러 주는 시약 번호를 기억해 두었다. 혹시나 잊을까 손가락으로 모래에 숫자를 그리며. 프로토콜은 이미 알고 있어서 굳이 모래 위에 적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찍 나올 필요는 없고. 내일 회의가 잡혀 있던 걸 깜박해서 미리 알려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진 마.
배려가 녹아 있는 부드러운 음성에 도우는 한껏 귀를 기울였다. 이안은 늦게 전화를 걸어 업무를 떠안기는 걸 미안해했지만 도우에게는 그의 지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할 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지.
도우는 그네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근처의 호프집에 들렀다. 배짱 좋게 치킨 두 마리를 포장한 후 집으로 발을 옮겼다. 현관문이 떨어져라 닫고 나올 때보다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
일찍 나올 필요 없다던 이안의 말과는 다르게 도우는 새벽부터 연구소에 도착해 있었다. 자발적 조기 출근이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저 말고도 이미 연구원이 몇 있었다. 새집처럼 난장인 머리카락에 거멓게 죽은 얼굴을 보니 아마 밤샘한 모양이었다. 그들과 간단한 눈인사를 마친 도우는 이안이 지시한 시약들을 꺼내어 늘어놓고 비율을 조정하며 섬세하게 피펫을 다뤘다.
“좋은 아침!”
연구소 마당발 미나가 힘차게 연구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활기차졌다.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환히 밝히는 사람. 도우는 부러운 눈으로 미나를 바라봤다. 별것 아닌 가벼운 농담도 미나가 던지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웃어 주는 연구원들은 언제나 낯설다.
그들의 관심과 호의는 제 몫이 아님을 잘 안다. 그녀는 오메가니까. 저들에게 오메가라는 건 수입 금지된 애완동물과 비슷한 존재랄까.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오메가에게 족쇄를 채우는 건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이 설치된 족쇄는, 소유의 상징이었다. 어느 알파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노예의 표식.
이제 족쇄를 찬 오메가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생명을 벌레 짓이기듯 날려 버리는 위험한 장치 같은 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니까. 그렇다고 오메가들의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목숨의 안전이 보장되었다고 해서 안정된 삶까지 보장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상위 계층인 알파에게 빌붙어 살던 오메가들에게 남은 거라곤 발정열뿐.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은 억제제값을 대기에도 급급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족쇄는 언제나 오메가들의 발목을 조이고 있었다.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운이 좋았다. 이안을 만났으니까. 이안, 그녀의 어두컴컴한 삶에 비친 단 하나의 빛. 이안의 후원이 있어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알파들에겐 발에 차이는 직장 중 하나일지 몰라도, 오메가에게는 입사한 것 자체가 기적적인 꿈의 직장이었기에 도우는 자부심을 갖고 업무에 임했다. 비록 그녀에게 주어지는 일은 대부분 허드렛일에 불과하지만.
“그 소식 들었어요?”
재킷을 벗고 가운으로 갈아입으며 미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 얘기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나의 옆자리인 도우는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제게 향한 눈빛도 아닌데 방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새 이사님이요. 우리 소장님 쌍둥이래요.”
여기저기서 놀랐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탄성을 한껏 즐긴 뒤 미나가 어깨를 으쓱대며 마저 털어놓았다.
“회장님께서 부르셨대요. 이만 들어와서 결혼하라고. 뭐, 겸사겸사 회사도 물려줄 겸 부르셨겠지만. 그런데 재미있지 않아요? 여자는 하난데 남자는 둘이라니. 그럼 탈락한 사람은 어떡하려나? 누가 선택될 것 같아요?”
“저는 우리 소장님한테 겁니다. 이러지 말고, 우리 내기하죠. 점심 내기, 콜?”
미나의 물음에 누군가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제안한 것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동참했다. 결과는 얼추 비슷했다. 이안이 새로 올 쌍둥이 형제보다 한 표 적었다.
“이래서야 재미가 없는데.”
엇비슷한 결과에 중얼거린 미나가 도우에게 불쑥 물었다.
“자기도 할래? 어느 쪽?”
“전, 됐습니다.”
도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기든 지든, 같이 끼어서 점심 먹을 주제가 못 되었다. 물론 돈도 아까웠지만. 저들도 달갑지 않을 것이다. 아니, 관심이 없다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도우가 내기에 끼든 말든.
그녀에게 살갑게 구는 건 성격 좋은 미나가 유일했다. 무시당하는 처지지만 도우는 연구소 직원들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좋게 생각했다. 혐오보다야 무관심이 백배 나으니까. 내기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가 얼추 가라앉을 때쯤, 도우는 이안이 지시했던 작업을 마무리해 놓았다.
“헤, 이건 또 뭐래? 신약?”
도우는 고개를 슬쩍 저었다. 신약은 아니고 기존 억제제를 살짝 변형해서 효율을 높이려는 거겠지만, 굳이 미나에게 일러 줄 이유는 없었다. 이안이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연구였기 때문이었다. 다소 무례한 표현 방식에도 미나는 개의치 않았다. 과묵한 도우는 그녀에게 익숙했다.
“이건 그냥 내가 궁금해서 그런 건데, 도우 씨는 어느 쪽이야? 우리 소장님? 아님 새 이사님?”
도우는 전적으로 이안의 편이었으므로 그의 쌍둥이 형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새 이사를 둘러싼 소문부터가 흉흉했다.
도박, 여자, 술, 담배, 약.
익히 알려진 오메가 혐오는 차라리 얌전한 수준이었다. 그건 대부분의 알파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새 이사가 온다는 소식에 도우는 그녀답지 않게 분개했었다.
“자기가 뭔데 소장님보다 직급이 더 높아요? 그동안 고생한 건 소장님인데!”
불퉁하게 튀어나온 도우의 입술에 이안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몇 번을 보아도 설레는 미소다. 심장을 부여잡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도우는 귀를 기울였더랬다.
“사업 수완이 좋아. 제품이 좋은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러시겠지. 검은돈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었을 테니까. 이긴이 불법적인 경로로 자금을 확보해 두었다는 것 또한 예사롭게 들리는 소문 중 하나였다.
더럽기도 하지.
이안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라는 것만으로 본 적도 없는 새 이사를 향한 도우의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오메가 채용을 극렬히 반대했던 전적까지 겹쳐 철천지원수처럼 여기게 됐다. 그러므로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내기를 건다면 그녀에게 답은 하나뿐이었다.
“……소장님.”
도우는 목을 긁어 일부러 허스키한 소리를 냈다. 이안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남성이었다. 그게 도우의 입사 조건 중 하나였다. 여성 오메가인 걸 들키지 말 것.
“역시 자기는 일편단심 소장님뿐이구나. 그런데 우리 소장님은 좀, 재미없지 않아? 사람이 너무 딱딱해.”
미나는 도우를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이안을 깎아내리는 발언에 도우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고 말았다.
“새 이사는 여자관계 문란하잖아요. 딱 질색이에요.”
“어머, 그게 정말이야?”
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게 퍼졌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다. 도우는 뚱한 표정으로 미나를 쳐다봤다.
“네.”
“세상에. 안 그렇게 생겨선.”
안 그렇게 생기긴. 딱 그렇게 생겼는데.
속으로 비죽거리다가 새 이사가 누구와 판박이인지 떠올린 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안과 같은 피가 흐르는 것까진 어떻게 참겠는데 하필 쌍둥이라서 얼굴까지 같은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상대가 질 나쁜 인간이라서 더더욱.
“그건 그렇고, 도우 씨.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듣긴. 다들 새 이사에 대해 떠들지 못해 안달인데. 그러나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하라고 하면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쩐지 흐릿했다. 분명 듣긴 들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알파들 사이에서 떠도는 정보를 어떻게 제가 알겠는가. 더군다나 이안과 같은 우성 알파에 대한 정보를, 한갓 오메가인 제가.
들었다면 상대적으로 소문이 느린 연구소 쪽이 아니라 인공 수정 클리닉 쪽이었을 텐데. 그래서 더 오리무중이었다. 도우에게 무관심한 연구소 직원들과 달리 클리닉 직원들은 겉으론 친절하게 굴면서 속으론 오메가인 그녀를 불가촉천민쯤으로 여기며 멸시했다. 그런 만큼 귀동냥으로도 들었을 리 없다.
‘이상하다.’
정말, 누가 얘기해 줬지? 다시금 집중해서 떠올리려 했는데, 눈알이 뽑힐 것 같은 두통이 몰려들었다.
“아으…….”
머리를 감싸 쥐자 미나가 어련하겠느냐는 투로 투덜댔다.
“자긴 항상 그러더라.”
거짓말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면서. 계속 증명하려 해봤자 스스로만 피곤한 일이다. 도우는 간단히 해명을 포기했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를 저지르게 될 가능성이 높고 그럼 꼬리가 밟히고 만다. 도우는 묵묵히 할 일을 처리해 갔다. 그러다 보니 두개골을 으깨는 것 같은 두통도 차차 가셨다.
이안이 지시한 것을 모두 마쳤을 때는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겨우 20분 남짓, 지금 식사를 놓치면 퇴근까지는 굶어야 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산적해 있는 과제가 지나갔다. 망설일 것도 없이 식사를 포기하고 사육장으로 향했다.
“윽…….”
쥐 오줌 냄새는 언제 맡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우는 익숙한 솜씨로 쥐들의 꼬리를 잡아 새 톱밥이 깔린 케이지로 옮겨 넣고, 그중 내일 날짜가 적힌 것들을 수술대 위로 가져갔다. 네 개의 케이지에 담긴 다섯 마리의 쥐가 운명을 예감한 듯 날카롭게 울었다. 말을 알아들을 것도 아닌데, 예민해진 쥐들을 다정하게 달랬다.
“가만, 가만히 좀 있어. 빨리 끝내 줄게. 응?”
약물 반응을 보기 위해서 개체마다 라벨을 붙이는 건 필수였다. 쥐의 경우에는 털갈이가 잦고 크기가 작아 뒷발가락을 잘라야 했다. 이를테면 왼쪽 가운뎃발가락이 없는 쥐는 3번이라는 뜻이었다. 왼쪽 새끼발가락부터 엄지 방향으로 1번, 2번, 3번…….
마침내 스무 개의 잘린 발가락이 수술대 위에 가지런히 놓였을 때, 기다리고 있었던 듯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이봐. 새 이사님 오시는 거 잊었어? 빨리 내려가. 늦었어.”
내 정신 좀 봐.
시계를 확인한 도우는 서둘러 케이지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연구동에서 본관까지는 한참이어서 날듯이 로비로 내려왔을 때에는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다. 이미 모든 직원들이 입구부터 두 줄로 도열해 있었다. 도우는 그 끄트머리에 눈에 띄지 않도록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었다. 소용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아니나 다를까.
저벅저벅 거침없이 들려오던 구두 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딱 멈췄다. 잔뜩 얼어붙어선, 도우는 땅바닥만 내려다봤다.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분명 이안과 쌍둥이라고 했는데, 그림자조차 더 길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우뚝 멈춰 선 채, 남자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아, 씹. 비린내.”
경멸이 그대로 묻어났다. 굳이 지칭하지 않아도 누구를 이르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한 점으로 시선이 모여들었으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우는 실험 가운의 칼라에 대고 코를 킁킁댔다. 쥐 오줌 냄새가 배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위안하며. 하지만 위안은 어디까지나 위안이었다.
“거기.”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차가운 눈초리와 마주친 도우는 독사 앞의 생쥐처럼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익숙한 눈코입이 시야에 가득 찼다. 이안과 같은 얼굴. 얼굴은 분명 이안인데 온도 차가 극명했다. 눈앞의 남자는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눈이 시렸다.
“어디 소속이지?”
“…….”
남자는 이안처럼 도우를 배려해 페로몬을 갈무리해두지 않았다. 오히려 위협하듯 그녀의 주위를 음산하게 떠돌도록 내버려 두었다. 뱀처럼 칭칭 감싸는 느낌에 완전히 압도당한 도우는 혀가 돌덩이처럼 굳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 한번 깜짝이지 않는 그녀를 대신해 누군가 대답했다.
“연구소 소속입니다.”
“연구소? 그럼 이안이 데리고 있는 건가?”
낯을 찡그린 남자는 더 이상 지체하기 싫다는 듯 대표실로 향했다. 새 이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을 때에야 도우는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기침이 발작적으로 쏟아졌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연구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는 할 일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조르고 말 것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며 몰두한 탓에 업무를 모두 마쳤을 때는 새 이사에게 느꼈던 두려운 감정은 지워져 있었다. 마침 실험 데이터도 유의미한 결과값을 내놓아 도우는 기쁜 마음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새벽부터 일한 보람이 있었다고 자축하며, 도우는 서둘러 이안에게 달려갔다.
도우가 건넨 자료들을 꼼꼼히 훑어본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통계가 깔끔하네. 논문에 쓸 수 있겠어.”
뿌듯해하면서도 수줍음에 도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발긋한 뺨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이 다른 주제를 던졌다.
“이긴은 어땠어? 나랑 많이 닮았어?”
“아니요.”
쌍둥이니까 닮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너무 달랐다. 새 이사, 이긴과 대면했을 때 질식할 것 같았던 기분을 떠올린 도우가 무심결에 목을 매만졌다. 자비 없는 손아귀가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아서.
완전히 겁에 질린 도우의 표정에 예의 잔잔한 미소가 한층 깊어진 이안이 서랍에서 사탕을 꺼냈다. 알록달록 반짝거리는 포장지를 볼 때마다 도우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달콤한 것들은 하나같이 겉껍질조차 예쁠까, 하고.
잠시 손안의 것들을 바스락 소리가 나도록 만지작거리던 이안이 물었다.
“차 한잔 줄까?”
“제가 탈게요!”
도우는 벌떡 일어나 물을 끓였다. 이안이 여러 찻잎을 섞어 직접 조합한 차는 맛과 향이 독특했다. 제 몫까지 두 잔을 만들어 그의 앞에 놓은 후, 도우는 보상처럼 레몬 사탕 몇 알을 받았다. 사탕을 움켰던 손을 펼 때 이안의 손톱이 간질이듯 그녀의 손바닥을 긁었다. 그에겐 아무 의미 없는 접촉이었겠지만 도우는 손바닥이 아니라 앙가슴을 긁힌 듯 부끄러워졌다.
두근대는 가슴을 티 내지 않으려 부러 세심하게 사탕 껍질을 벗기던 도우가 멈칫했다.
“어?”
“왜?”
“초콜릿이 섞여 있어서요.”
느긋하게 몸을 기댄 이안의 눈빛이 성마르게 그녀를 훑는 걸 채 눈치채지 못하고, 도우는 초콜릿을 골라 빼놓았다.
“먹지 않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
“네.”
거짓이었다. 실은 환장하게 좋아했다. 하지만 이안의 앞에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깔끔한 이안은 초콜릿을 싫어했다. 금세 녹아 손에 묻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걸 알고 나서 도우는 초콜릿을 끊었다. 순전히 이안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자꾸만 초콜릿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도우는 노란색 사탕 껍질을 벗기고 반투명한 연노랑 사탕을 쏙 넣었다. 침샘이 아플 정도로 쨍한 레몬 맛이었다. 신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레몬은 말할 것도 없이. 하지만 도우는 활짝 웃었다.
“진짜 맛있다.”
“천연과즙으로 만든 거라. 몇 개 더 줄까?”
“아뇨, 아직 세 개나 남았는데요.”
양손을 흔들어 만류한 뒤 조심스레 덧붙였다.
“다 먹으면 또 받으러 올게요.”
혹시, 안 된다고 할까 봐. 어디 너 따위 오메가가 멋대로 드나들 생각이냐고 할까 봐, 도우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지 않을 이안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안의 앞에서는 언제나 한 가지 긍정을 두고 수백만 가지 부정과 싸웠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제 존재가 불안 그 자체였으니까.
“물론.”
다행히, 역시나, 이안은 다정하게 그녀를 허락했다. 이 순간만큼은 입안의 사탕이 조금도 달지 않았다. 도우는 이안이 주는 달콤함에 폭 젖어 버렸다. 평소엔 맛도 모르던 차가 무척 향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텐데.”
“네? 아…… 네.”
멍청히 되묻던 도우는 이안과 함께하는 달콤함에 젖어 아예 머릿속에서 미뤄 놓았던 새 이사의 존재를 새로이 떠올렸다.
‘세심하게 헤아려 주고 있었구나.’
이안의 배려에 새삼 감동했다. 이안이 그렇게 말하니 오후 내내 시끄러웠던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안과 피가 섞인 형제인데, 너무 노골적으로 싫은 감정을 내비쳤다.
“신경 안 써요.”
“그래.”
이안이 싱긋 웃으며 차를 음미했다. 그래, 다음에 착하지, 가 생략된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이안은 종종 그녀를 강아지 다루듯 했다. 아주 귀엽다는 듯이.
상관없었다. 이안이 개가 되라면 그녀는 정말 개가 될 거니까.
***
첫날부터 죽여주네.
이긴은 쌓여 있는 결재 서류를 보며 잔뜩 찌푸린 이마를 문질렀다. 습관처럼 담뱃갑을 뒤지자 돛대 한 개비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가 손으로 툭 떨어졌다. 빨간 불빛이 손가락 끝에서 점멸하다가 희부연 연기로 피어올랐다. 초점 없이 바라본 허공에 오후에 보았던 얼굴이 잔상처럼 그려졌다.
유난히 하얗고 연약해 보이던 것에선 달콤한 솜사탕 냄새가 났다. 혀끝을 대면 사르르 녹아날 것만 같다. 이긴은 처음 본 상대를 두고 핥고 싶다는 충동이 인 자신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알파들을 작정하고 꼬시려는 유전자가 골수에 박혀 있는 종자들이니 오죽할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크고 순한 눈망울. 빨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도톰한 입술. 아기처럼 보들보들한 살결. 여린 선을 가진 존재.
대체로 예쁜 오메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예쁜 오메가였다. 그런 만큼 알파들 사이에서 그게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남자임에도 계집애같이 생긴 외모가 역겨웠다. 순진한 얼굴로 정액이나 빨자고 쫓아다닐 걸 알아서 더욱 그랬다.
상종 못 할 것들.
부러 혐오를 숨기지 않은 것 역시 당연했다. 뭘 기대한 건지 그 앞을 지날 때 움찔하는 바람에 주변에 고여 있던 달달한 냄새가 일시에 폭 퍼졌다. 혀끝에 단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긴은 작게 뇌까렸다.
“씨발.”
고작 2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동안 벌레가 꼬였다. 스멀스멀 기어들어 와 뻔뻔스레 자리 잡은 꼴이 그의 비위를 뒤집었다.
‘연구소 소속이랬지.’
더 지체할 것 없이 이안을 찾았다. 한창 퇴근 시간이 겹쳐 어수선한 바깥의 분위기와 달리 이안의 연구실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보고서를 검토하던 이안이 바로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을 대하듯 이긴을 맞았다.
“왔어? 시차 때문에 피곤하겠다. 차 마실래?”
“무슨 꿍꿍이야.”
“뭐가.”
“몰라서 물어?”
빙긋이 웃은 이안이 대답 대신 찻잔을 내밀었다. 태연한 태도가 신경을 긁었다. 이긴은 찻잔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안 마셔.”
낙엽 우린 물 따위,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모르겠다. 신물 나는 레몬 맛 사탕도 그렇고.
‘입맛 한번 참.’
노인네 같다. 하긴, 늙은 구렁이 같은 새끼니까 입맛조차 그런지도.
“언제까지 구습을 답습하며 살 거야. 상생해야지.”
“까고 있네.”
오메가 따위와 상생하고 싶어 하는 알파가 있을 리가. 일단 ‘서로’라는 전제부터가 틀렸다. 대등한 위치가 아니니까. 상하가 명백한 관계에서 오메가는 입만 벌리고 있음 되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건 뭐든 받아먹으며. 그런데 상생이라니.
처돌았나.
혀를 차며 담배를 찾다가 조금 전 마지막을 태웠던 걸 떠올리며 다시 한번 욕설을 뇌까렸다. 이긴은 담배 심부름을 위해 비서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연결이 도중에 끊겼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다. 쯧, 혀를 차자마자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땐, 당황한 비서의 목소리 뒤로 경적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상사도 못 한 퇴근을 비서가 먼저.”
어이가 없어서 낄낄거리자 퇴근하신 줄 알았다며 몇 분만 기다려 달란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이번엔 웃음도 안 나왔다. 제가 저 따위나 기다리는 사람인 줄 아는 게 한심해서였다.
“됐습니다. 당신, 해고야.”
끽, 보지 못할 상대에게 목 긋는 시늉을 하며 전화를 끊자, 그런 이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유하 씨는 누가 먼저 만날래? 순번을 정해야지.”
“좋을 대로 해.”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가 맺어 놓은 정혼 상대 같은 건 별 관심 없었다. 여자가 이안을 택하면 알아서 살게 두면 될 일이고, 자신을 택해도 저 하고픈 대로 살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아이도 어차피 인공 수정을 통해 오메가가 대신 낳아 줄 테니 정자 제공 정도야 하겠지만,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 시간이 비니까 내가 먼저…….”
“소장님! ……아.”
둘의 대화는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끊겼다. 이안이 우린 썩은 낙엽 물 냄새 사이로 달콤한 향기가 삽시간에 섞여들었다. 역겹게도, 씹. 이긴은 나가는 대로 욕설을 뱉었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얼어 있던 방해자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되돌아 나갔다. 동그란 뒤통수를 한입에 삼킬 것처럼 쳐다보던 이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에게 턱짓했다.
“저거, 너 좋아하네. 축하해. 곧 따먹히겠어.”
이긴의 비아냥거림에 이안은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언짢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게 보였어?”
“눈깔이 삐지 않은 다음에야.”
귀 끝이 앵두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긴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오메가는 이안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한데, 누가 저를 좋아한다는데 왜 불쾌해하지. 더더군다나 연구소 소속이면 이안이 직접 뽑아 들여놨단 소린데.
“뭐가 문제야.”
“잠깐이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알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에 의아해하던 이긴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웬 거지 같은 오메가 새끼가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면 저도 기분이 엿 같을 테니. 하지만 그건 자신일 경우고, 이안이 그러는 건 웃기지 않나. 역시 겉과 속이 다른 놈이다. 음흉하기도 하지. 이긴은 조금 전 이안이 했던 말을 꼬집었다.
“상생한다더니.”
“……됐어. 아무튼 이번 주말엔 내가 유하 씨랑 만날게.”
“맘대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긴은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2주 더 늦게 들어올걸. 그럼 무더위가 조금은 가셔 있을 텐데. 날씨가 너무 습하다.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오메가들처럼.
“저거, 치우지 그래.”
“치우라니, 무엇을.”
“너보고 자지 세운 새끼.”
적나라한 표현에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굳었다기보다는 묘하게 일그러졌다.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한배에서 한날한시에 났지만, 저놈의 의뭉스러운 속은 다시 탯줄을 이어 놓는다 해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도우 얘기하는 거야?”
“씹, 피자도 아니고.”
도우. 형편없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이긴이 못 박았다.
“아무튼 치워. 존나 역겨우니까.”
“도우는 실력 있는 연구원이야. 수석으로 졸업했고. 연구소에서도 우수한 실적을 내고 있어.”
“까고 있네. 그 정도 실력 널리고 널린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거슬려. 알잖아. 그 새끼들 하는 짓이 어떤지. 굳이 끼고 있을 이유가 뭐야. 상생? 개 같은 소린 집어치우고.”
이안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이럴 때 담배가 없는 게 짜증스럽다. 저 상판에 대고 매운 연기를 한가득 불어 대면 속이 좀 시원해질 텐데.
“……상처가 컸나 봐.”
“또 무슨 헛소리야?”
“그냥,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야.”
“하…….”
도대체 말이 안 통하네. 이긴은 소파에 털썩 기대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사탕을 집어 들었다. 그거라도 물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입에 들어온 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초콜릿이었다. 별수 없이 동그란 조각이 녹아내리도록 입을 다물어야 했다.
‘상처?’
까고 있네. 이긴은 비웃었다. 고작 그딴 걸로 상처 입을까 봐. 기분이 더럽긴 했다. 제게 목매달며 쫓아다니던 오메가들이 이안의 성기를 빨지 못해 할딱거리는 걸 목격하는 건. 그냥, 재수가 없었다. 이안의 말대로 그들의 발정기 때 이안이 가까이 있었을 뿐이니까.
추정컨대 둘은 쌍둥이라 체향이 비슷하니 아마 이안을 자신으로 착각했을 거다. 그런 만큼 발정열을 참기 힘들었을 거고. 오죽하면 발정기 때의 오메가를 빨대라고 부를까. 볼이 홀쭉해져선 주둥이가 길게 늘어진 모양이 꼭 그랬다. 매번, 정말이지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건 좀 유감이지만.
당시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지만,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볼 수밖에. 이안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긴의 손에 들어간 건 뭐든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을 냈다. 그러면서도 겉으론 아닌 척 점잔을 빼고 뒤에서 교묘하게 수를 꾸몄다.
이안의 계략은 대부분 성공했다. 특별히 일을 꾸미는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이긴이 경쟁에 관심 없어서였다. 타고나길 그랬다.
그래도 다시금 생각하니 괘씸해서, 이긴은 심술궂게 이안을 건드렸다.
“이제 보니 상처 입을까 두려운 건 너인가 본데.”
“……내가 왜.”
“왜긴 왜야. 네 훌륭하신 연구원이 내 좆 맛을 알아 버릴까 걱정되니 그렇겠지.”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안은 시계를 확인하고 이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이긴의 도발을 깔끔히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하!”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하려면 얼마든 더 긁을 수 있겠지만, 공항에서 바로 이쪽으로 온 데다가 담배가 없는 게 영 신경 쓰였다.
“그럼 난 간다.”
소득 없는 대화에 희미한 짜증을 느끼며 초콜릿 껍질을 아무렇게나 버렸다. 어디론가 인터폰을 연결하던 이안의 두 눈이 바닥의 구겨진 포장지에 박혔다. 깔끔한 이안으로서는 참기 힘들 터였다. 때마침 상대가 인터폰을 받았다. 약간의 통쾌함을 느끼며 이긴은 이안의 연구소를 나섰다.
상쾌함도 잠시, 이안의 연구실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오메가 덕에 개운해진 기분은 금세 오염됐다.
“오늘 자주 보네?”
“그, 그게…….”
“뭘 쥐새끼처럼 엿듣고 있어.”
“엿듣지 않았습니다. 그냥, 대화가 끝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는데, 윽!”
“변명은. 기다리면서 얘기도 맘대로 듣고?”
“아닙…… 큿…….”
멱살을 잡힌 채 벽에 처박힌 오메가의 안색이 자줏빛으로 변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끅끅대는 꼴을 보니 겨우 기분이 나아졌다. 수년 전에 어떤 미친놈이 오메가의 인권 어쩌고를 주장한 뒤로 줄곧 이런 식이다. 그 미친놈이 연구소의 전대 소장이었다는 걸 상기한 이긴은 미간을 구겼다.
“씨발, 터가 안 좋나.”
이안마저 상생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니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 전에 이 쥐새끼 먼저 조지고. 반반한 낯짝을 못 쓰게 만들어 놓으면 꽤 볼만할 것 같다. 발정 난 개처럼 알파 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짓거리도 당분간은 못 할 테고.
이긴이 팔을 높게 치켜들자 호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둥근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운 좋은 오메가를 구해 낸 건 이안이었다. 바깥의 소란에 허겁지겁 달려 나온 이안이 이긴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야!”
허공에 들린 이긴의 팔을 잡아챈 이안이 드물게 화를 냈다. 그럼에도 묘하게 여유로운 저 표정은 뭘까. 성을 내고 있는데도 어쩐지 웃는 것처럼 보인다고, 기시감을 느끼며 이긴은 항복의 표시로 두 팔을 번쩍 들고 이기죽거렸다.
“그래 봤자 걔는 어떻게 하면 네 좆 한번 빨아 볼까, 그 생각밖에 없을걸.”
“아니에요. 그런 거…….”
새빨갛게 젖은 얼굴로 오메가가 부정했다. 불쌍하게 울먹거리는 것도 꼴불견이었다. 원래도 혐오스러운 존재지만 이안의 비호를 받는 녀석이 유독 거슬렸다. 아마, 이안이 저와 똑같은 얼굴로 저 지랄인 게 꼴 보기 싫어서겠지.
“도우는 안 그래. 멋대로 속단하지 마.”
이렇게 편도 들고. 저게 뭐기에 이리 싸고도나. 호기심이 일어난 건 순식간이었다.
“아니긴. 내기할까?”
“그게 무슨……. 헛소리 그만해.”
“너의 도우는 안 그런다며. 그런가 안 그런가 어디 한번 보자고. 왜, 자신 없어?”
“…….”
“자신 없나 보네. 헛소리 지껄이는 건 너 아냐?”
“해, 그럼.”
“뭐?”
“내기하자고.”
뜻밖이었던 건 이긴뿐만이 아니었는지, 눈물 질질 흘려 가며 매달려 있던 오메가도 하얗게 질렸다.
“소장님!”
“아무 일 없을 거야.”
차분히 오메가를 다독이며 이안이 장담했다.
“대신 비겁한 방법은 쓰지 않기로 해. 억제제를 숨긴다거나.”
“내가 왜.”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어이가 가출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오메가한테 좆이나 대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도 쪽쪽 빨아먹어서 빨대라고 불리는 인간 망종들한테.
“좋아. 그 오메가가 발정열을 못 이기고 누구든 유혹하면 이안 네가 지는 거야. 아니면 내가 지는 거고. 기한은 1년,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요구 들어주기. 어때?”
“네가 지게 될 거야.”
“눈물겹네.”
단호한 이안이 낯설어 이긴은 고개를 갸웃했다. 약이라도 처먹었나, 그게 아니라면 아주 대단하신 라포를 형성하셨구만. 좀 더 비꼬아 주려다 그것조차 귀찮아 마음을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발정 난 거지 새끼들 뒤치다꺼리하려고. 끝이 없을걸. 잘 생각해.”
이안의 어깨를 툭툭 친 이긴이 그 옆의 오메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다행이었다.
조금 전 목을 졸렸을 때 죽일 듯 노려보던 눈빛을 떠올린 도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막혔다. 이안이 막아 주지 않았다면 최소한 코뼈 하나는 나갔을 거다.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소장님.”
“당연한 걸 가지고.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겨우 안도하던 찰나였다. 멀어져 가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잔뜩 긴장한 도우 앞에 빙글거리는 이긴의 얼굴이 바짝 들이밀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너무 불리하잖아?”
“뭐가.”
“마주칠 일도 없는데 발정기인지 아닌지 내가 알 게 뭐야. 그러니 당분간, 내 임시 비서 해야겠어.”
비서? 별안간 도우의 발밑이 까마득하게 꺼졌다. 끝없이 추락하는 도우를 건진 건 맹수 같은 눈빛을 한 이긴이었다. 머리 가죽을 벗겨 낼 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이긴이 그대로 손아귀를 뒤로 확 틀었다.
“아……!”
자연스럽게 하늘로 치켜진 턱 끝에 냉혹한 얼굴이 놓였다.
“그럼, 이제 담배 좀 사다 주실까.”
지시 사항을 주지시키듯이 손아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가 팽개친다. 도움을 구하듯 이안을 바라본 도우는 흠칫 놀라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이토록 당하는데 이안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실험 쥐를 확인하듯이. 그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여기.”
“…….”
도우는 벌벌 떨면서 이긴이 내민 신용카드를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