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배양액을 보관하는 저장고 중 하나가 고장나 오전부터 정신이 없었다.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아 변질된 배양액을 폐기하는 것도, 새 배양액을 조합하여 만드는 것도 모두 도우의 몫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대부분의 실험이 올 스톱이었다. 이래선 막대한 투자비를 들인 연구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이번엔 넘어가도 다음 프로젝트에선 밀려나기 십상이란 뜻이었다. 그예 성격 좋은 미나마저 날카롭게 굴었다.
“도우 씨, 우리 거 먼저 해달라고 했잖아. 이거 급한데.”
“아직 오토클레이브 돌리는 중이라.”
“이제 멸균한다고? 왜?”
신경질적인 반응에 입술을 다물었다. 미나 눈에는 아침부터 무거운 배양액 병들을 옮기느라 고군분투한 그녀가 보이지 않는 걸까.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였는데도 이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망했다는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저장고가 고장 난 게 그녀 책임도 아닌데, 모든 화살이 제게 쏠리는 듯했다.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저장고의 고장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예견된 수순이었다. 도우는 묵묵히 시약병들을 챙겨 실험대로 향했다. 나중을 위해 미리 양을 재어 소분할 속셈이었다.
막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보나 마나 담배 두 글자가 찍혀 있을 테니까. 이제는 전화까지 걸어 대는 걸 보지도 않고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무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슨 깡인지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계기는, 모르겠다. 그냥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아 왔던 것이 조금씩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것 말고도 허공에 붕 뜬 것처럼 현실감이 떨어졌다. 너무 바빠서 그런 거다. 바빠도 너무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이 종종거렸으니 감각이 무뎌진 게 당연하다.
“아…….”
갑자기 주변이 빙 도는 듯 어지러워 허공을 노려보며 초점을 모았다. 그러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전전날 저녁부터 굶었으니 꼬박 이틀을 굶은 셈이었다. 이안의 연구실에서 먹은 사탕 두 알을 제외하곤.
인식하기 전엔 몰랐는데 주린 배를 의식하자마자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그렇다고 실험대를 떠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쉬는 만큼 실험 스케줄이 밀린다는 뜻이었으니까.
‘이것만, 이것만 끝내고…….’
이럴 때 삐끗하면 귀찮은 일이 배로 늘어난다. 다행히 그녀는 숙련된 연구원이었고, 실수하는 법 없이 손실분만큼의 배양액을 모두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실험을 재개하기엔 늦어 버렸다. 프로토콜대로라면 밤샘은 필수였다. 오늘 하루 공쳤다며 당직자인 그녀만 남고 모두 퇴근한 후라 도우는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늘어져 있었다.
‘피곤하다…….’
고된 일과에 뼈가 삭아 버린 듯 팔다리가 온통 물렁물렁했다. 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 펴면서 몸을 일으켰다.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무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뭐라도 입에 넣어야 살 것 같았다.
‘이상해.’
눈앞이 노란 건 그렇다 쳐도 복도가 울렁거리는 건 뭔지. 진창을 헤매는 것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것 같기도 했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이 둥둥 뜨기도 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갑자기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딘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뚝, 뚝, 손끝에서 촛농 같은 것이 떨어져 시선을 내리다 깜짝 놀랐다. 손가락이 녹아서 떨어지고 있었다. 손가락만 그런 게 아니었다. 발가락도, 코도, 귀도, 녹아서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왜…….’
이유를 찾던 도우는 무심코 이마를 훔쳤다. 끈끈한 땀이 진하게 배어나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녹아내리는 까닭을 알았다.
덥다.
지나치게 덥다. 순간 어디서 화산이 터진 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짚이는 게 있어 혼미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날짜를 세었다.
‘27, 28……!’
그제야 불길 속에 휩싸인 것 같은 열기가 발정기가 만들어 낸 거짓 감각이라는 걸 알았다. 깨달음과 동시에 목표는 오직 하나가 되었다. 연구실의 제 자리, 가방 속에 있는 억제제.
괜찮을 거야.
도우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최근에 너무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방심했지만, 이안이 넉넉하게 챙겨 준 억제제 덕에 발정기를 말 그대로 발정 나서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악재라고 여겨졌던 저장고 고장이 어찌 보면 천만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다들 퇴근해 버렸으니까. 볼썽사나운 꼴은 면했다.
훅, 훅, 겨우 복도를 오갔을 뿐인데 더운 숨이 올라왔다. 이지를 어지럽히는 열기 때문에 자리를 찾은 게 스스로 용할 정도였다. 희열에 차서, 도우는 가방을 열었다. 눈에 익숙한 약병을 집어 들고 사력을 다해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
없었다.
상비용으로 두세 알 정도는 늘 챙겨 가지고 다녔는데,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은 빈 통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골리기 위해 짓궂은 장난이라도 친 걸까. 하지만 연구소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메가는 그녀 하나뿐이니 절박한 누군가가 가져갔을 리도 없었다.
‘절박?’
도우는 어제 잠들기 전 유난히 제 눈치를 살폈던 식구들을 떠올렸다. 할 말이 있는데, 그녀의 반응이 걱정되어 머뭇거리던 모습.
‘설마…….’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다. 지잉, 지잉, 쉴 새 없이 알림이 울렸다. 초점이 흐려진 두 눈이 우수수 쏟아지는 밀린 알림 사이를 배회했다.
「담배.」
「미안하구나. 억제제가…….」
굳이 메시지를 끝까지 확인하지 않았다. 한심한 변명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자꾸만 헛짚는 손가락을 놀려 겨우 이안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나 통화 버튼을 채 누르기 전에 힘이 빠진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흐윽…….”
휴대전화를 줍기 위해 엎드렸다가는 이대로 무너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도우는 흐느꼈다. 비틀거리며, 돌아온 길을 되짚어 나갔다. 이안을 만나기만 하면 되니까, 연구실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까. 찾아가 사정을 말하면 언제든 그녀를 도와줄 그를 아니까.
열이 올라 뿌옇게 수증기가 낀 것 같은 눈은 숫자를 제대로 감별하지 못하고, 귀는 열탕에 잠긴 듯 먹먹하게 들끓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오로지 후각만이 민감했다. 페로몬 방출이 극대화되는 발정기의 특징이었다. 먹이를 추적하는 짐승처럼, 도우는 실낱처럼 가느다란 냄새의 흔적을 추적해 이안을 찾아 나섰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알파와 다른 이안만의 독특한 체취를 알고 있으니까.
이안에게서는 겨울 숲 냄새가 났다. 소리마저 눈 속에 묻힌 고요한 숲, 가슴이 쩡 하고 벌어질 정도로 맑고 차가운 공기. 들끓는 발정열에 뇌마저 끓어 버린 지금, 겨울 숲만이 그녀를 숨 쉬게 해줄 테다. 맑고 청량한 이안의 숲만이…….
“아아……!”
그리하여 마침내 저의 설원을 발견했을 때, 시원한 공기를 가득 담느라 도우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틀림없이 이안의 페로몬이 만들어 낸 체취였다. 몇 번의 호흡만으로도 목구멍을 사르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감격에 겨워하면서도 도우는 기대에 부풀었다.
고작 숨결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이런데, 다른 걸 마시면 얼마나 빨리 진화될까. 보다 은밀한, 이를테면 체액, 그중에서도 보다 진하고 농밀한 어떤 것.
고결한 이안에게 바라기엔 너무나 더러운 욕망이라는 걸 안다. 알지만, 그래도.
눈먼 이성에 기대어 도우는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다. 불온한 의도를 눈치챘는지 이안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뭐야.”
상관없어. 그가 저를 경멸해도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를 오롯이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뿐.
“약은. 억제제 없어?”
그런 게 왜 필요해요? 당신이 제 앞에 있는데. 열 때문에 하느작거리는 팔을 힘겹게 움직여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억지로 발끝을 세우곤 딱딱하게 굳은 턱에 무작정 입술을 비볐다.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는 그녀보다 머리통 하나는 키가 컸고 고개를 숙여 주는 간단한 수고조차 들이지 않았다.
야속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금이라도 응해 주면 그 얼마나 기쁠까.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었다.
어쨌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이러면 그녀가 향할 곳은 하나였다. 주춤주춤, 도우가 무릎을 꿇었다. 파스너에 손을 댄 순간,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열기에 녹아 목구멍이 달라붙고 말 거다. 그럼 아사하게 될까? 그 전에 타 죽겠지.
죽음에의 공포가 그녀를 몰아붙였다. 도우는 느슨해진 바지춤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간절한 손짓에 화답하듯 묵직한 살덩이가 퉁 튕겨 나왔다.
“아…….”
생소한 물건에 흐릿한 정신에도 도우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끝이 약간 휜 기둥의 선단 끝, 요도 구멍 옆의 작은 점을 초점 삼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막막해졌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발정기를 맞이하기 전부터 이안의 후원을 받아 왔기 때문에 그동안 도우는 한 번도 이런 상황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펠라티오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귀동냥으로 얻은 단편적인 정보 몇 개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불완전했다. 은연중에 이안이 성교를 천박한 행위라고 여기는 것을 알고 그녀 또한 멀리한 결과였다.
하지만 자위도 하셨는걸.
실성한 것처럼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상대가 이안인데 꺼릴 게 있을까. 그가 베푸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아야지. 다만 그가 기꺼이 하사하게 만들 방법을 몰랐다. 그게 너무 바보 같아서 또 웃음이 나왔다.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던 도우는 과실이 저절로 익어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그게 끝이었다.
“할 줄 몰라?”
짜증스러운 물음이 돌아왔다.
“어…….”
아예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도우는 좀 더 얼굴을 그의 사타구니에 바짝 붙였다. 할 줄 모르냐고 물었다는 건, 할 줄 안다면 머금어도 된다는 허락이겠지.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하며 조심스럽게 끄트머리에 입술을 갖다 댄 도우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중얼거렸다.
“점이…… 생겼어요.”
씨발.
짧지만 격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욕설과 함께, 흉흉한 살 기둥이 우악스럽게 입안으로 짓쳐들었다. 마개처럼 목구멍을 틀어막은 탓에 끅끅거리느라 타액이 입가로 줄줄 흘러내렸다. 도망갈 수도 없게 뒷머리를 고정한 악력이 대단했다. 별수 없이 눈물만 줄줄 흘렸다. 이 와중에도 입안에 가득 차 있는 덩어리가 몹시도 기꺼웠다. 기분 좋은 숲 냄새가 물씬 풍겼다. 곧, 이 열기도 가라앉혀 주겠지.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서툴게나마 입술을 오물거리자 그녀에게 제 것을 물린 상대의 음성에 다정함이 섞였다.
“이로 긁지 말고 입술을 더 동그랗게 오므려.”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뻐근한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오므리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도우는 노력했다. 최대한 이가 닿지 않도록 기둥과 아랫니 사이에 혀를 밀어 끼웠다. 동시에 제 것 아닌 신음이 얕게 터졌다. 뒷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손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말 잘 듣는 개를 칭찬하듯이. 그러다 머리채를 감아쥐고 앞뒤로 움직였다.
“혀 쓸 줄 몰라?”
쯧, 혀 차는 소리에 경황없는 와중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그만두라 하면 어쩌지. 살고자 하는 절박함이 그녀를 상대의 사타구니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방법도 모르면서 혀를 놀렸다. 도드라진 핏줄과 팽팽하게 당겨진 소대를 문지르고 핥았다.
“왜 이렇게 서툴러.”
핀잔하면서도 상대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동시에 약간 흘러나온 선액이 도우의 목을 살짝 적시며 넘어갔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열증이 가셨다. 비록 잠깐뿐이었지만.
선액이 나오는 구멍에 대고 조르듯 혀를 누르고, 사탕 물듯 귀두만을 머금고 쭉쭉 빨아도 보던 도우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흥분시킬 방법을 깨쳤다.
츕, 츄릅, 혀와 점막이 성기를 희롱하는 소리가 한층 야해졌다. 이내 능숙하게 움직이게 된 도우를 쳐다보는 눈길은 곱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머리채를 쥔 손아귀의 힘이 강해진다 싶었는데, 도우는 더 이상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성기가 수월하게 드나들도록 턱을 한계까지 벌려 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쑥 내밀어 놓은 혀 위를 활주로 삼아 딴딴하게 일어선 거근이 반복적으로 안을 찔렀다.
턱에서 시작된 얼얼한 감각이 얼굴을 뒤덮을 즈음에,
“큿…….”
신음과 함께 격한 움직임이 멈추고, 남자가 허리를 잘게 털었다. 안면이 남자의 아랫배에 처박힌 채로, 도우는 울컥울컥 목구멍 뒤로 쏘아지는 덩어리를 꾸역꾸역 삼켰다.
양이 꽤…… 많았다.
“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살뜰하게 그녀의 혀 위에 비벼 닦은 남자가 만족스럽게 숨을 토해 냈다. 열기가 서서히 가시면서 절절 끓는 것 같던 감각도 점차 둔해졌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발정열을 넘기느라 몸도 몸이지만 난생처음 겪은 행위에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했다. 불구덩이에 있다가 물에 던져진 사람처럼 까무룩 의식이 끊어졌다.
***
씨발.
습관처럼 셔츠 윗주머니를 더듬다가 뱉은 욕설에 앞에 앉은 임원이 움찔 떨었다. 무능력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몇 안 되는 안건으로 종일 지지부진하게 구는 꼴을 보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서넛이 불복의 눈빛을 보냈지만, 노골적으로 쏘아보자 금세 꼬리를 내렸다. 한심하기는.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서는 사람의 휑한 뒤꽁무니를 꼬나보다 문이 완전히 닫힘과 동시에 두 다리를 탁자 위로 올리고 상체를 길게 젖혔다.
원래대로라면 사무용 의자가 아니라 요트에 이런 자세로 누워 있어야 했건만. 이 시간쯤 저녁놀을 만끽하며 잔잔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던 게 어제 같은데 어쩌다 고리타분한 꼰대들과 우중충한 회의실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됐는지.
‘재미없네.’
따분한 하루가 느릿하게 재생됐다. 틀어박혀 서류나 뒤적이는 일 따위,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이안은 이 자리가 못내 탐나는 모양이지만.
“되겠나.”
이안을 두고 조부가 한 소리였다. 천성이 자와 같아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번번이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맺을 거라고. 이안과 이긴의 진로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안이 제가 가진 건 무엇이든 눈독 들이고 보는 게.
따지고 보면 이번 귀국도 이안 때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상대 알파의 정혼자는 자신이었으나 쌍둥이라는 조건을 내세워 자격이니 권리니 운운한 게 이안이었으니까. 널린 게 여자인데 제 형제의 정혼자와 만날 기회를 공평하게 달라니 역시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호시탐탐 저를 불러들이고자 하는 조부와 이해가 기가 막히게 떨어진 탓도 있었지만. 그걸 두고 마치 뭐라도 된 양 구는 게 우스울 따름이다.
“어쩌라고.”
내가 잘난걸.
피식, 조소가 절로 흘렀다.
덕분에 긴장이 슬쩍 풀리고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담배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괘씸하게 구는 건 이안만이 아니었다. 개들은 주인을 닮는다 했던가. 이안이 키우는 오메가도 주인을 닮아 가소롭게 굴었다. 주말이랍시고 지시를 무시하더니 월요일이 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
제 딴엔 휴일이라고 그의 연락을 무시하고 대표실이 위치한 꼭대기 층을 목이 꺾어져라 올려다보던 당돌함이 또렷이 기억났다. 그때 이긴은 로비에 있었다. 하는 짓거리가 하도 어이없어 불러 세울 생각도 못 했다.
내기고 뭐고 귀찮은데 다 그만둘까.
오메가 따위, 그게 뭐라고. 이안이 않던 짓을 하니 궁금했을 뿐이다. 순 제 것만을 노리더니 웬일로 이안이 자신만의 것을 찾아냈나 싶었다. 내기를 제안한 배경에 너도 역으로 당해 봐라, 고약한 심보도 얼마간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여간.”
녀석하고 엮이면 성가셔진다는 걸 잠시 잊었다. 빈 셔츠 윗주머니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그만 자리를 물리고 일어났을 때, 노크 없이 벌컥 열린 문으로 다디단 꽃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담배 심부름이라면 반가웠을 텐데, 한눈에 보아도 오메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저를 볼 때마다 뾰족한 세모꼴이던 눈이 곱게 휘어진 것부터가 그랬다. 물기 어린 눈이 깜박일 때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반달 같은 눈알을 핥고 싶다는 충동이 일도록, 달콤하게.
“약은. 억제제 없어?”
다그친 것도 아닌데 금방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래 놓고 또 방긋방긋 웃는 걸 보니 저를 이안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무렴 어때.
이긴은 느긋하게 열 오른 오메가를 감상했다. 발정기의 오메가가 교태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복숭아꽃처럼 달아오른 눈꺼풀을 하고서 눈웃음을 철철 흘리는데, 그게 제가 알던 모난 얼굴과 너무 달라서 신선했다.
어디고 발갛게 무른 낯을 하고 아양 떠는 고양이처럼 뺨을 비벼 댄다. 응하지 않자 금세 눈물이 고이는 것도 신기하다. 공손하게 꿇은 무릎을 보며 무심히 생각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지.
맞닿았던 턱에 후끈하게 전해져 온 열기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쉬이 뜻을 받아 줄 마음은 없었다. 갈급한 거야 저쪽 사정이고. 아무리 반반하게 생겼대도 저와 같은 사내 새끼한테 박는 건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였다.
억제제나 한두 알 쥐여 줄까.
한데 하필 회의실이었다. 타 죽기 일보 직전의 오메가를 구해 줄 수 있는 건 결국 저뿐인가. 난감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걸 보면 제 걸 물려도 괜찮을 것도 같고. 어쨌든 지금으로선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 발정 난 오메가의 성질은 생각보다 급한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묻었으니.
너무 굶었나.
이긴은 자조하며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건조한 입술이 슬쩍 닿았다 떨어졌을 뿐인데 희한할 정도로 기대감이 솟구쳤다. 가칠한 입술 안쪽에 머금은 뜨겁고 습한 숨결의 존재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상대가 너무 서툴렀다. 달려들어 고개를 처박을 땐 언제고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게 그랬다. 감나무 아래에 누워 감이 익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어느 바보처럼 헤 벌어진 입술에 대고 짜증을 부렸다.
“할 줄 몰라?”
이 정도도 모르는 건 둘 중 하나다. 이안이 어지간히 아꼈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전자 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이안의 개를 제가 길들인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슬쩍 머리카락을 쥐었을 때, 바짝 얼굴을 붙이고 있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점이…… 생겼어요.”
순간 머리꼭지까지 열이 뻗쳤다. 씨발, 내 앞에서 감히 누굴 떠올려. 제 가랑이 사이에 얌전히 꿇어앉아 제 좆을 달라고 조른 이상 그딴 말을 꺼내선 안 되었다. 홧김에 단박에 쑤셔 넣은 성기가 목구멍 안쪽까지 휘어져 들어갔다.
“후우…….”
부드럽고 끈끈하게 감기는 느낌이 욕 나오게 환상적이었다. 샅샅이 들러붙은 점막이 물고 있는 성기를 본이라도 뜰 것처럼 집요했다. 너무 뜨겁고 물렁물렁해서 열기에 녹아내린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슬쩍 고개를 틀어 확인한 안은, 의외로 멀쩡했다. 박아 넣은 채로 허리를 몇 번 추어올리자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득거리며 고개가 따라오는 게 꽤 볼만했다. 한계까지 벌어져선 뭐든 해보겠다고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도.
그래서 이긴은 조금 다정해지기로 했다.
“이 세우지 말고. 옳지.”
지루했던 하루의 끝이 달콤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혀를 어쩌지 못하고 자꾸만 할짝거리다가 침만 줄줄 흘리는 게 영 서툴지만 귀여운 맛이 있었다. 어디를 자극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멋대로 놀리는 혀를 두고 저도 멋대로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거기에 맞춰 작은 머리통도 제법 그럴싸하게 움직였다.
“음, 으응…….”
어느새 야릇해진 오메가의 신음을 들으며 기분이 묘해졌다. 수석 연구원이라더니 과연 깨우침이 빨랐다. 더 이상 요령 없는 움직임은 없었다. 기둥 전체를 감싸듯 문지르는 혀나, 동글게 말아 부드럽게 압박감을 가하는 입술, 뽑을 듯 빨아 삼키는 목 넘김에 차츰 사정감이 고조됐다.
“이게.”
부러 쪽쪽 소리를 내며 저를 도발하듯 바라보는 두 눈이 요사스럽다. 거칠게 허리를 놀리자 순종하듯 사르르 감기는 눈꺼풀도.
“씹,”
더는 느긋하게 입안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손에 잡힌 머리카락을 꽉 움켜쥔 이긴이 아래를 한껏 뒤로 물렸다가 그대로 안에 처박았다. 같은 동작을 반복할 동안, 오메가는 우악스러운 힘에 밀리지 않으려는 듯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선 끝내 버거운지 가늘게 뜬 눈으로 저를 올려다본 순간,
“큿…….”
더는 사정감을 참지 않고 허리를 바짝 올려붙였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받아 마시는 소리가 났다. 게걸스럽기는. 가볍게 탓하며 적당히 허리를 털고 빠져나왔다. 벌어진 입안에 거미줄처럼 쳐진 정액을 구경하다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혀 위에 닦아 냈다.
“나쁘지 않았지. 음?”
아예 넋을 놓은 듯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오메가의 볼을 톡톡 두드리자, 상체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싶더니 완전히 스러졌다. 펄펄 끓던 이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게 식어 있었다. 옆으로 웅크려 누운 몸이 가냘프다. 저러고 있으니 꼭 계집애 같다.
비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연구소 내 유일한 오메가, 도우의 성별은 이미 서류로 확인했다.
XY.
이안이 설마 유전자 검사 결과까지 조작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수고로움을 들일 이유가 없으니까. 여성 오메가에 비해 남성 알파에게 선택받을 확률이 적은 남성 오메가는 체구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만큼, 가녀린 저 모습은 저 같은 알파를 유혹하기 위한 장치일 가능성이 컸다.
“여러모로 발칙하네.”
매무새를 정돈하며 쓰러진 오메가를 향해 툭 뱉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돌이켜 보니 꽤 만족스러운 행위였다. 귀국 이후 사정상 강제 금욕 하느라 고여 있던 것들을 산뜻하게 빼낸 쾌감이 짙었다.
이래서 오메가를 찾나.
모로 누운 작은 몸뚱어리를 태연히 넘어가며 그럴 법하다고 수긍했다. 회의실을 나서기 전, 잠시 뒤를 돌아봤으나 그게 전부였다.
***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자정을 넘긴 뒤였다. 씻은 듯이 열이 내려 있었다. 차가운 바닥과 닿았던 뺨에서는 냉기마저 느껴졌다.
“여긴 왜……!”
낯선 장소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목구멍을 지나 배 속 저 아래에서 훅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조심스럽게 입안을 더듬던 혀끝에 보다 진한 맛이 묻어났다. 생경하고 원초적인, 한 번도 접한 적 없지만 무엇인지 모를 수 없는 맛.
“아…….”
안 돼.
절망 섞인 신음이 비명처럼 새어 나왔다. 보다 최악인 건 기억나지 않는 상대였다. 도우의 기억은 누군가의 페로몬에 끌려 헤매던 복도에서 끊겨 있었다. 본능을 좇아 누군가에게 애걸했고, 펠라티오의 보상으로 발정열에서 해방되었을 일련의 과정이 차마 떠올리기 끔찍했다. 더 끔찍한 건 아무리 노력해도 떠올려지지 않는다는 거지만.
망연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스케줄 반복 알림에 정신을 차렸다. 측정기의 프로그램에 결과값을 입력해야 할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분석실로 달려갔다. 기계를 붙잡고 버튼을 누르는 동안 도우의 머릿속을 채운 건 오직 한 가지였다.
회의실에 누가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연구소에서 회의할 때 사용하는 세미나실이라면 어떻게 수소문해 볼 텐데. 본관에는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소속도 다르고 오메가인 제게 그런 걸 알려 줄 리 만무하다. 이상하게 보지나 않으면 다행일 뿐.
‘제발.’
도우는 익명의 상대를 향해 간절히 빌었다. 누군지 몰라도 제발 모른 척해 줬으면 좋겠다고. 조금 구겨졌다 뿐, 복장이 흐트러지지 않았던 걸 봐선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만약 상대가 질 나쁜 알파였다면 심심풀이로 노팅까지 갔을 수도 있었다. 그럼 임신은 피할 수 없다.
‘미친…….’
하마터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가질 뻔했다고 가정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동시에 얼마나 한심한 짓을 저지른 건지 선명하게 깨달았다. 제 안위를 스스로 망친 건 물론이고, 이안마저 곤란에 빠뜨릴 뻔했다. 무책임한 임신보다 저 때문에 이안이 난처해지는 상황이 몇 배는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하아…….”
생각하니 아찔해 그대로 주저앉아 선득거리는 가슴을 한참 동안 진정시켜야 했다. 아무리 괜찮을 거라고, 제게 성기를 물린 상대도 흔한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그렇고 그런 유희 정도로 여길 거라고,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만약에 아니면? 연구소 소속 오메가가 발정이 나선 달려들었다고 소문이라도 내면?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오메가로 살면서 익숙히 보아 온 풍경이었다. 그러니 그런 모욕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액 좀 받아먹은 게 어때서? 그게 없으면 난 살 수 없잖아? 열기에 뇌고 심장이고 다 익어 죽어 버렸을걸. 억제제도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안만 아니라면, 그녀도 다른 오메가와 마찬가지로 응당 그럴 만했다고 합리화하며 약간의 수치심을 간직한 채 꿋꿋할 수 있을 터였다. 이안만 아니라면.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그녀에겐 이안이 있었으니까. 발정 난 오메가를 섹스 토이 정도로 이용하는 다른 알파들과 달리 그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다정한 이안이. 첫 발정기가 왔을 때에도 이안은 친히 억제제를 먹여 주며 열이 가라앉는 동안 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었다.
그랬는데.
그가 그토록 소중히 아껴 주었던 게 무색하게 형편없는 쓰레기처럼 굴었다. 이안이 챙겨 주는 억제제의 양만 해도 도우의 가족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그녀의 부모가 쓸데없이 낭비하지만 않았더라면.
“씨…….”
따지고 보면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녀의 가방까지 뒤져 비상용으로 챙겨 놓은 몇 알마저 털어 갔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잘못한 건 알아서 쭈뼛거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새삼 화가 치밀었다. 보탬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게 폐만 끼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되었다.
정말 보탬이 안 되는구나.
원망이 눈시울에 그렁그렁 맺혔다가 후드득 떨어졌다. 눈가를 훔칠 생각도 못 하고 오래도록 흐느꼈다. 겨우 그쳤을 땐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을 때 빼고는 꼬박 밤을 새운 격이었다.
‘쉬고 싶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마냥 늘어져 있고 싶다. 출근 시간까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요량으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