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씨발.”
이긴은 축축해진 고간을 들여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몽정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것도 저와 같은 사내 새끼 꿈을 꾸면서.
더러운 기분을 안고 이긴은 샤워기 아래에 섰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도 배꼽 아래 부풀어 오른 윤곽이 뚜렷했다. 너무 팽팽해서 사타구니를 당기는 느낌이 불쾌했다.
“망할.”
이긴은 마지못한 동작으로 곧추선 성기를 대강 휘어잡았다. 그러곤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뿌리부터 대가리까지, 성의 없게 손을 위아래로 놀렸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은 꽤 힘차게 주무르기도 했지만, 만족할 만한 반응은 있지 않았다.
이러다간 자위하다가 날 새겠네.
“씨발, 진짜.”
이긴이 다시금 욕설을 뱉으면 성기 끝을 감싸듯이 고쳐 쥐었다.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몹시 찝찝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았다. 해소되지 않은 욕망을 다리 사이에 달고 출근하기는 싫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내키진 않지만 이긴은 꿈속에 나온 인물을 떠올리기로 했다. 짧지만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겁먹은 초식동물 같은 두 눈, 백지장처럼 하얀 피부, 작지만 도톰한 입술. 그 입술로 그의 것을 빨아들이자, 찹쌀떡 같은 볼이 볼록 늘어났더랬다.
여기까지 떠올리자 딱히 어루만지지도 않았는데 요도 구멍에서 바로 선액이 흘러나왔다. 이긴은 약간의 점성이 있는 선액을 귀두에 얇게 펴 발랐다. 어설펐던 혀 놀림과 닮아 있는 손놀림이었다.
“하아…….”
음경이 살아 있는 것처럼 불끈거려 이긴은 신음을 토했다. 머릿속의 광경은 점점 구체적이고 농밀해져 갔다.
‘맛있어요.’
열정적으로 들러붙어 제 것을 빨던 오메가가 슬쩍 고개를 젖히고 요사스러운 혀 놀림으로 입술을 쓸며 생긋 웃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몽롱하게 환상에 젖었다. 연구개에서 식도로 꺾어지는 부분에서 살짝 휘어지며 짜부라지던 귀두의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발끈대는 대가리를 힘주어 누르며 슬쩍 휘자 끄트머리에서 게걸스러운 침이 뚝뚝 떨어졌다.
“후, 으읏…… 좀 더 깊숙이 빨아 봐.”
그러나 상상은 언제나 오메가가 바지를 벗는 데서 끝이 났다. 이쯤 되면 어차피 기계적으로 문질러도 사정하는 데 무리는 없었으므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다만 며칠째 같은 인물이 반복적으로 꿈에 나오는 건 마음에 걸렸다.
왜.
특별히 인상 깊은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닌데. 기교는커녕 서툴고 매너 없는 오럴 섹스였다. 그 덕분에 반나절 정도는 이에 긁힌 자국이 상흔처럼 길게 부풀어 있었다. 그만큼 참아 준 것도 제 딴엔 꽤 관대하게 봐준 거였는데, 이 괘씸한 오메가는 어디 숨어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후우.
길게 뱉은 담배 연기 사이로 몇 개비가 남았나, 세어 보다가 피식 웃었다.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어차피 불러들일 거, 의미 없는 짓이었다.
***
사흘간 바짝 긴장했는데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일로 이안에게 불려 가 걱정 어린 질책을 받아야 했다.
“결과값 제대로 입력한 거 맞아? 데이터가 너무 튀는데. 이대로라면 이 실험은 꽝이야. 중단해야 해.”
“아…….”
당직이었던 날 새벽에 기입했던 자료였다. 언뜻 봐도 그래프가 엉망이었다. 그럴 리 없는데. 제가 잘못 입력한 게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다시 프로그램 돌리겠습니다.”
“요즘 너무 멍한 것 같아.”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실수 없도록…….”
“많이 힘들지.”
“…….”
두서없는 사과를 툭 끊어 버리고 훅 치고 들어온 위로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지난 일 이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틀 동안 바지가 헐렁하도록 살이 내린 것만 봐도 그랬다.
“뭐든 나한테 얘기하라고 했잖아. 혼자 견디지 말고.”
도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 모든 치부를 다 내보여도, 그것만은 솔직해질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 내가. 발정기를 당신 아닌 다른 알파와 넘겼다고.
“도우야.”
다정함이 벌처럼 마음을 할퀴었다. 기꺼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다. 방심한 벌을 이렇게 받는 거다. 발정기가 가까운 걸 알았으면서. 아무리 신경 쓸 일이 많았어도 약통 한 번 들여다볼 틈은 있었을 텐데. 자책이 면죄부가 될까 봐 도우는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다 네 잘못이야. 전부 네가 망친 거라고.
“정말 괜찮아요. 그냥, 요즘 좀 피곤했어요.”
“발정기였지.”
“……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조금씩 다시 올라붙었다. 태연하게 그랬노라고 답하는 스스로가 낯설다. 잘 대처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미웠다. 이안조차 아는 걸, 제 몸인데도 챙기지 못했다는 게.
“그럼 혈액 채취는 다음에 할까.”
“아니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도우의 혈액은 억제제 연구에 쓰이고 있었다. 보다 저용량으로, 보다 부작용이 없도록. 오메가로서 반가운 연구가 아닐 수 없기에, 도우는 기꺼이 제 팔을 내밀었다.
“여기요. 어서요.”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안이 주사기를 비롯한 몇 가지를 챙겨 왔다. 위팔을 압박하고 혈관을 잡아 바늘을 찌르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숙련된 솜씨로, 채혈 튜브 몇 개가 금방 채워졌다. 이제 도우가 가장 좋아하는 절차만이 남았다.
“고생했어. 자, 아.”
“감사합니다.”
연구실 소파에 편히 누워서 이안이 주는 레몬 사탕을 황송하게 받아먹으며 쉬는 것. 안락한 기분에 절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작은 사탕 알갱이가 녹는 잠깐의 시간 동안 기가 막힐 정도로 잠이 솔솔 쏟아졌다.
“핫!”
퍼뜩 눈을 떴을 땐 15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옆에서 논문을 검토하고 있던 이안이 빙그레 웃었다.
“잘 쉬었어?”
“네…….”
민망함에 말꼬리가 흐려졌다. 평소에 이안 앞이라면 곧잘 긴장하면서 어째서 이 시간만 되면 무방비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구색을 갖추려는지 길지 않은 단잠에 꿈도 꾸었다. 이안이 무어라고 제게 상냥하게 속삭이는 꿈.
늘 같은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도우는 꿈에 이안이 나온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고. 적당히 꾀부리면서 요령껏 쉬어. 알았지?”
“네? 아, 네…….”
꾀를 부리라니. 요령껏 쉬라니.
근면성실의 대명사인 이안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어서 조금 놀랐다. 놀라면서도 기뻤다. 그 스스로에게도 용납하지 않는 틈을, 그녀에게 특별히 허락해 준 것 같아서.
‘그러면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데요.’
뼈를 갈라면 갈겠어요.
헤헤, 바보같이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발을 동동 굴렀다가, 오두방정을 떨었다. 한없이 붕붕 날아오르는 기분을 일시에 추락시킨 건 문자 하나였다.
「담배」
“또 시작이네.”
처음이야 휴일이라 그랬다지만 본의 아니게 두 번이나 무시한 후로는 연락이 없기에 차라리 잘됐다 했더니, 역시 방심은 금물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담배 심부름을 무시할 핑곗거리가 딱히 없었다.
‘배고픈데.’
하필 점심시간이었다. 이안이 준 사탕으로 기대감이 생겼는지 위장에서 수도꼭지 튼 것처럼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빨리 사다 주고 식당에 내려가려 했는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제일 가까운 편의점은 점원이 잠시 자릴 비운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떨어진 곳에 갔더니 손님이 몰렸는지 계산 줄이 길었다.
결국 담배 한 갑이 손에 들어왔을 땐 점심시간이 절반이 지나 있었다. 이긴에게 담배를 갖다주고 나면 식당에 내려간대도 이미 정리하고 있을 분위기였다. 오늘도 점심은 굶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아…….”
주린 배를 안고 이동하며 뒤늦게 후회했다. 이왕 간 김에 편의점에서 요기할 거라도 살걸. 아쉬운 마음에 뒤를 흘긋 돌아보았지만 절반 이상 걸어온 길을 다시 오갈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담배, 가져왔습니다.”
책상 모서리에 사 온 것을 내려놓으며 저도 모르게 어지러운 책상을 훑었다. 만약 저번처럼 담배가 남아 있는데도 심부름시킨 거면 몹시 화가 날 것 같았다. 화가 난대도 어찌할 방도는 없지만.
참아야 한다고 미리부터 마음을 다스리고 있던 게 무색하게 구깃구깃 뭉쳐진 빈 담뱃갑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쓰레기인데 곱게 버리면 안 되나. 역시 성질이 더럽다고 속으로 욕하는 찰나, 자연스레 그 옆에 놓인 초코바에 눈이 갔다. 그냥 초콜릿도 환장하게 좋아하지만 고소한 견과류나 바삭한 쿠키와 붙어 있는 건 사족을 못 썼다.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 어차피 디저트는 그림의 떡이었지만, 그나마도 이안의 눈치를 살피느라 딱 끊어 놓고 나니 금단증상이 심했다. 못 먹게 된 점심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초코바가 눈길을 붙잡아 놓은 것처럼 영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갑자기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눈이 따가워졌다. 그 전에 기침을 한바탕 쏟아 냈지만.
쿨럭쿨럭,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기의 주범을 노려봤다. 면전에 대고 담배 연기를 뿜는 건 얼마나 글러 먹은 인성일까. 그런 주제에 쯧, 혀를 찬 이긴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초콜릿 중 하나를 그녀에게 던지듯 굴려 주었다. 저러다 눈알이 튀어나와 박히는 게 아닌가 싶게 쳐다보던 것이었다.
예상 못 한 행동에 초코바가 책상 밑으로 툭 떨어졌다. 잘게 부순 아몬드가 토핑된 초콜릿을 무심코 집어 올린 도우는 그것을 당장 입에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도 용케 손안에 말아 쥐는 것으로 그친 건, 오랜 자제가 본능을 이긴 결과였다.
“괜찮습니다.”
“독이라도 탔을까 봐?”
“……단거 안 좋아합니다.”
“그럼 며칠 굶은 새끼처럼 넋 놓고 보질 말든가.”
이마를 구긴 이긴이 단걸 싫어하는 것마저 이안과 비슷하다며 중얼거렸다.
“별 거지 같은 것까지 닮기는…….”
그를 만날 때마다 하도 욕을 들어서 그런가, 이제 웬만한 건 자동적으로 귀에서 걸러졌다. 지랄이네, 씹, 재수 없게 등등. 그보다는 손안에 놓인 초콜릿의 존재가 문제였다. 다시 올려놓자니 이미 바닥에 떨어졌던 거라 좀 그렇고, 버리자니 그래도 음식인데 아깝고.
없이 자란 도우에게는 음식을 버리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어쩌다 상한 반찬을 버릴 때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잠시 갈등하던 도우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달라고 했던 것도 아닌데 멋대로 굴려 보낸 건 이긴이다. 원래 초콜릿의 주인이기도 하고. 그러니 그냥 놔두면 알아서 처리하겠지.
“더 시키실 일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초코바를 조심스럽게 책상 모퉁이에 올려놓은 도우는 얌전히 걸음을 물렸다.
“그냥 간다고?”
“더 하실 말씀이라도……?”
의아하게 되물었다. 평소엔 담배를 건네주고 나면 끝이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먹을 것을 권하질 않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세워 두질 않나.
“됐고.”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이긴이 탁자 위의 한 점을 턱짓했다. 동그란 초콜릿이 그의 시선 끝에 놓여 있었다.
“치워. 처먹든지 버리든지.”
어.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처먹는 것도, 버리는 것도, 둘 다 할 생각이 없어 막막했다.
“씨발, 멍청한 새끼가. 빨리 갖고 안 꺼져?”
멍하나 눈만 깜박이다 잔뜩 뒤틀린 소리에 화들짝 놀라 아무렇게나 초콜릿을 움켜쥐고 후다닥 도망 나왔다. 쾅 닫힌 문소리에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고 보니 손바닥이 온통 엉망이었다. 어차피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먹지 못하게 된 모양새를 본 도우가 이를 악물었다.
나쁜 새끼.
누군 입이 없어서 욕을 못 하나. 가뜩이나 기운 빠지는데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니 정말로 힘이 없었다.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해야 할 일이 끝없이 늘어서 있으니. 한 가지 위안은 퇴근 후에 맡게 될 꽃향기였다.
‘조금만 더 힘내자.’
언젠가 은퇴하면 작은 꽃집을 차리는 게 도우의 꿈이어서 플로리스트 과정을 등록해 배우고 있었다. 딱히 꽃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었다. 각종 꽃향기로 가득한 꽃집에선 제 달콤한 향도 묻힐 거라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녀에게 꽃 쥐는 법을 가르치는 강사도 같은 오메가로서 도우의 의견에 깊이 공감했다.
“꽃에 둘러싸여 있을 땐 나도 온전한 사람처럼 느껴져요.”
온전한 사람.
이미 자신을 그렇게 봐주는 이안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안, 나의 빛. 이안을 떠올리자 그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시야가 환히 밝아졌다. 허기 때문에 날카로워진 신경도 일시에 누그러졌다.
오늘은 내 할 일만 마치고 바로 퇴근하자. 혹시 도와줄 일이 있냐고도 묻지 말고. 그런 담에 향긋한 꽃 냄새에 파묻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거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아름다운 꽃들에 둘러싸여.
‘그러니까 힘내야지!’
이안에게 불려 가 한 소리 들은 것도 있어, 도우는 기분에 일이 영향받지 않도록 부러 활기차게 움직였다. 처져 있는 건 자기 손해다, 되뇌면서. 그 덕분에 퇴근 시간을 넉넉하게 남겨 두고 일과를 모두 마쳤다.
시계를 확인한 도우는 흐뭇하게 웃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조금 더 서두르면 간단히 우동도 한 그릇 할 수 있겠다. 정시가 되자마자 튀어 나갈 요량으로 가운을 벗어 곱게 걸어 두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화면을 확인한 도우의 이마가 콱 구겨졌다.
「담배」
골초.
하루에 두 번이나 담배 심부름이라니 어이없는 걸 넘어 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냥 갈까.
이미 퇴근 중이었다고 변명하면 넘어가질 것도 같은데. 잠시 망설이다가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 덕분에 우동 한 그릇은 물 건너갔지만, 찝찝한 기분으로 강습받긴 싫었다.
‘늦겠다.’
어영부영하다 시간 잡아먹기 십상이다. 뛰다시피 걸음을 빨리 해 대표실에 도착한 도우는 이사님은 이미 퇴근하셨다는 비서의 답변에 어이를 상실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황당해서 어찌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는데,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낯선 주소가 찍혀 있었다.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그녀가 당연히 와야 한다는 듯.
‘웃기시네.’
새 비서를 구한 것,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얼토당토않은 내기 때문에 이안의 얼굴을 봐서 꾹 참았던 거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더 이상 들어줄 마음이 사라졌다.
텅!
비서더러 보란 듯이 담배를 쓰레기통에 처넣은 도우는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그러나 만용도 잠깐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내 전화가 울렸다. 저장조차 하지 않은 발신 번호는 심부름 때문에 이미 눈에 익어 버린 이긴의 것이었다.
도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에 대고 있는 것도 싫어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상대방도 침묵을 유지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잘못 걸었다 생각하고 끊길. 바람은 바로 날아갔다. 지나가던 차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댄 경적 때문이었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도우가 어쩔 수 없이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찍어 준 주소로 와.
제가 왜요. 대꾸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순순히 듣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불이익이 생길 것 같은 예감, 혹은 압박감.
“……네.”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택시를 탄 게 무의미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높다.’
까마득하게 높은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주소에 적힌 층수를 누르고 보니 꼭대기 층이었다. 대표실도 회사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었는데, 사는 집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본가에서 출퇴근하는 이안과는 다른 행보에 삐딱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젊은 남자 혼자서 이 좋은 아파트를 차지하다니, 낭비다. 물론 이안이 이곳에 살고 있다면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응원하겠지만. 이렇게 이안의 편을 들고 나니 어느새 도착이었다.
‘아무도 없나.’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가서도 멀뚱히 현관에 서 있던 도우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고민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갈지, 누가 있나 불러 볼지. 잠을 청하기에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자려면 못 잘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방만한 이긴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저기요…….”
도우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며 한 발 내디뎠다. 장식 하나 없는 거실은 꼭 모델하우스처럼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 없었다. 먼지 한 톨 없는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넓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잘못 찾아왔나.’
엉뚱한 의심마저 들었을 때, 복도 안쪽에서 누군가 앓는 소리가 들렸다. 도우의 걸음이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이제는 익숙해진 담배 냄새가 났다. 거기에 희미하게 섞인…… 동족의 냄새도.
오메가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깨닫고 우뚝 멈춰 섰지만, 벌써 반쯤 열린 문 앞이었다. 그냥 탁자에 담배만 놓고 나갈걸. 이 또한 늦은 후회.
비스듬히 침대 모서리에 기대앉은 이긴의 가랑이 사이에 누군가 고개를 처박고 연신 주억거리고 있었다. 앓는 소리는 꿇어앉은 남자, 오메가에게서 났다. 무언가 맛있어 죽겠다는 듯 응응대며 쭙쭙 빨아 댔다. 그가 무얼 물고 있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변태 새끼.’
도우는 이를 악물었다.
***
―네.
쥐어짜 낸 목소리에 억지로 대답하는 모습이 선연히 그려졌다.
좆같네.
이긴은 제 앞에 다소곳이 꿇어앉아 비굴한 웃음을 흘리는 남자를 짜증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봤다. 오메가라고 다 예쁘게 생긴 건 아닌 듯했다. 하긴, 여성 알파에게 구애하는 선 굵은 오메가도 있을 테니, 제 생각이 너무 편협했는지 모른다.
어쩔까, 이걸.
험악하게 굳어선 풀릴 기미 없는 이긴의 낯에 남자가 눈치를 살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닥쳐.”
붉은 기가 보이지 않도록 합 다문 입술도 꼴사나웠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짓거리까지 하는 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맹세코 저와 같은 물건을 사타구니 사이에 달고 있는 새끼들한텐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도우는 달랐다. 왜 오메가들을 빨대라고 부르는지 단박에 깨달았다.
정액이 아니라 영혼을 빨아 갔나.
이긴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긴 했지만.
후우…….
이긴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아무 기미 없는 사타구니 사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 빨대는 도우 한정인 듯했다. 그 증거로 탐욕스럽게 제 것을 훑는 남자의 눈길에도 성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후에 도우가 담배를 갖다주러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일부러 바닥만 쳐다보는 게 분명했던 녀석은, 담배를 내려놓으며 바퀴벌레라도 쥐었던 것처럼 몸서리치면서도 그의 책상을 빠르게 훑었다.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심부름 올 때마다 시선의 종착지는 항상 초콜릿이었다. 여기까진 새로울 게 없었는데.
허기와 갈망이 공존하는 두 눈, 무의식적으로 얕게 벌어진 입술에 이긴은 발기했다.
지금처럼.
“뭐야.”
연상만 했는데도 섰다고? 아무래도 어딘가 고장 난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자가 곧게 솟은 끄트머리를 넙죽 물고 부러 마찰음을 내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감흥이 없었다. 남자의 턱이 빠지기 전까지, 아니 빠진다 한들 사정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될 대로 되라지.
새 담배를 꺼내 물며 위아래로 열심히 움직이는 머리통을 심상하게 구경했다. 도우가 그의 눈앞에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나타난 건, 그러잖아도 의미 없는 행위가 다소 지루해질 즈음이었다.
새하얀 얼굴에 동그랗게 뜬 눈을 보자 허리 아래로 피가 빠르게 쏠렸다. 벌컥 부피를 키운 물건에 남자가 기겁하며 입안에 든 것을 내놓으려 했다.
“어딜.”
이제 재미있어지려 하는데.
이긴은 달아나는 남자의 정수리를 붙들어 콱 잡아당겼다. 목젖을 건드렸는지 남자가 발작처럼 기침과 함께 타액을 토해 냈다.
“크헉, 컥, ……크흣…….”
고통 가득한 신음에 도우는 그만 귀를 막고 싶어졌다. 한 손엔 꼬나문 담배를 느슨하게 끼우고 다른 손으론 오메가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이긴의 감흥 없는 눈빛을 보자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세게 말아 쥔 팔이 파들파들 떨렸다.
‘진짜 재수 없어.’
이대로 돌아 나가려던 찰나, 이긴이 시선을 들어 도우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곤 손에 잡힌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제게 굴복하는 오메가를 갖고 놀듯이 그 남자의 둘레로 페로몬을 풀었다 거뒀다하면서.
“하흑! 아, 좋아요! 흐으…….”
조금 전 괴로워하던 남자가 이제는 거친 손길에 좋다고 흐느꼈다. 다시금 입에 처넣어진 살덩이를 우물거리면서도 무어라 웅얼거리는 건, 발음이 뭉개졌어도 분명 좋다는 소리였다. 별스러운 광경도 아니었다. 생존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혐오스럽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하고 싶을 뿐.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는 그녀였기에 마음만 먹으면 외면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아니라고. 나만은 아니라고. 다른 오메가들 같은, 그러니까 눈앞의 저 남자처럼 굴욕적인 생을 이어 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긴이 직접 눈앞에서 난잡한 행위를 보여 주기 전까진 그랬다.
도우는 복잡한 기분으로 개처럼 들썩이는 오메가 남자의 허리를 쳐다보았다. 발정이 나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불룩한 바지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걸 보니 혼자 몇 번은 싼 것 같았다.
비릿하고 음란한 냄새가 뒤섞인 습한 공기, 질척거리며 점막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와 신음, 적나라한 짐승의 행위. 구역질 나는 광경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긴과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아…….”
마침내 이긴이 나른한 숨과 함께 정액을 토해 냈다. 쑥, 성기를 뽑아내고선 아무렇게나 쏘아 보냈다. 후드득, 미백색 덩어리가 남자의 얼굴을 타고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남자가 그것을 달게 그러모아 삼켰다. 그동안에도 이긴은 여전히 그녀와 눈을 맞춘 채였다. 그런 주제에 새삼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걸 깨달은 듯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거기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질 나쁜 인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람 불러 놓고 뭐 하자는 건지. 정액을 싹싹 핥아먹고 이긴의 벌린 가랑이 사이에 얌전히 꿇어앉아 있던 남자는 내미는 돈을 받고 정수리가 바닥에 닿도록 꾸벅꾸벅 절하고는 공손히 물러났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쾌감의 여운을 감추지 못한 채 흥분으로 불콰해진 낯으로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도우는 같은 오메가로서 모멸감을 느꼈다. 한편으론 그의 손에 들린 지폐의 액수가 넉넉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금액이라면 며칠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지금 남 걱정할 땐가.’
도우는 퇴근 후에도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불려온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그녀를 면전에 세워 두고서 바지 지퍼를 채우는 이긴의 뻔뻔스러운 행동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리 외면해도 시야에 잡히는 게 문제였지만.
한 번은 자위, 한 번은 타인과의 오럴 섹스.
저 인간은 얼마나 더 바닥을 보여야 만족할까. 바닥이란 게 있긴 할까. 하필 저런 인간과 얽혀도 더럽게 얽혀서.
“굳이 집까지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
귓구멍이 막힌 것도 아닐 텐데 왜 대답이 없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줄곧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도우는 흘긋 이긴을 쳐다봤다. 그러다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앞섶에 눈길이 닿았다.
‘미친놈.’
이쯤 되니 조금 억울했다. 따지고 보면 발정이 나는 건 오메가만이 아닐 텐데, 오명은 전부 뒤집어쓰고 있다는 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도우의 눈이 한결 뾰족해졌다. 그래 봤자 눈매가 조금 더 선명해졌을 뿐이다. 워낙 순한 눈매라 아무리 노려본들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새 부리처럼 삐죽 나온 아랫입술이 더 설득력 있었다.
새 담배를 꺼내 물며 이긴이 그녀의 복장을 훑었다.
“그 옷, 그때랑 똑같네.”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하고 있던 도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뭐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무슨 상관이람.
워낙 자주 입기 때문에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회색 남방과 어중간한 색의 청바지는 아끼는 옷이었다. 유행을 타지 않고 이물이 묻어도 여간해선 티가 나지 않는 효자템이랄까. 비슷한 색상과 스타일의 옷이 두 벌 더 있다. 세 벌만 돌려 입어도 일주일은 거뜬히 버틸 수 있고, 사는 데 지장도 없다.
도우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고작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겁니까?”
여전히 뭐가 못마땅한 듯 이긴의 눈썹이 비대칭으로 꿈틀거렸다. 몇 모금 연달아 뻑뻑 피워 대는 바람에 눈이 다 매웠다. 눈싸움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부릅뜰 이유는 없다. 도우는 이유를 붙이면서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됐고.”
이긴이 재떨이에 대고 손에 든 것을 꺾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야 제대로 된 얘기를 하려나. 도우는 허리가 뚝 끊긴 담배를 보며 귀를 열었다.
“그래서 감상은?”
“……네?”
멍하니 되물으면서도 이미 이해해 버린 자신이 싫었다. 열어 둔 귀를 다시 닫고 싶었으나 방도가 없었다. 이긴은 뭘 모른 척하냐는 듯 눈썹을 까딱하며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 봤잖아.”
마치 그녀가 일부러 엿봤다는 투였다. 발끈한 도우가 밉게 말했다.
“남자끼리 물고 빠는 취미는 없어서.”
“동감이야.”
뭐래.
그럼 내가 본 건 뭔데. 다시 한번 미친놈이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아님 영혼이 탈출했거나. 뭐가 됐든 제정신이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계속 이곳에 있다간 저마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어서 심부름이나 마치고 가자.
“담배 여기…… 어?”
가방을 뒤지던 도우가 멈칫했다. 쓰레기통에 부서져라 처박았던 담배가 불현듯 떠올랐다. 민망함에 얼굴이 숯처럼 달아올랐다. 정작 가져와야 할 것을 안 가져오고 뻗댄 꼴이었다.
“그게…….”
허둥대는 도우를 뿌연 연기 너머로 바라보는 눈빛이 나른하면서도 사나웠다. 마치 맛없는 고기로 배를 채운 맹수의 그것과 비슷했다. 엉뚱하게도 고기를 떠올리자 그 고기가 아닐 텐데도 허기가 동했다. 갑자기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 같더니 설상가상으로 배에서 고약한 소리까지 났다. 흡사 굶주린 거지가 절규하는 소리.
“아…….”
별안간 몰아친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 채, 멍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린 건 그다음이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이긴이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나가지.”
어디로요?
차마 묻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다른 이의 머리통이 다리 사이에 처박혀 있는 걸 보았을 때보다도 현실감이 없었다.
눈앞에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훤히 펼쳐진 테이블에 앉아서도 마찬가지였다.
뇨끼.
메뉴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걸 아무거나 골랐는데, 이름조차 이상한 음식이 앞에 놓였다. 이긴은 익숙하게 포크와 스푼을 놀렸지만 따라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곳의 모든 게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가사 없이 흐르는 잔잔한 음악, 저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매달았나, 궁금해지는 샹들리에. 가장 어색한 건 눈앞의 남자였다.
내가 왜 저 남자와 마주 앉아서 식사 따위를 하는 거지.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자연스럽지. 저와 이러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좀처럼 포크를 들지 않자 냅킨으로 입술을 꾹 눌러 닦은 이긴이 접시를 눈짓했다.
“다른 거 시켜 줄까.”
“괜찮습니다.”
“고기 환장하잖아? 스테이크 고르지 그랬어.”
“……환장 안 합니다.”
자기가 언제부터 내 식성을 알았다고? 까칠한 대꾸에 이긴의 이맛살이 슬쩍 접혔다. 이제야 상황이 익숙해졌다. 갑자기 숨통이 트인 것 같아 포크로 조개 모양 덩어리를 쿡 찔렀다. 먹음직스러운 육즙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어 통통한 새우를, 곁들여 놓은 브로콜리를 두서없이 쿡쿡 찔러 입으로 가져갔다.
맛은 있는데, 부담스러운 시선도 덤이었다. 그녀가 절반 가까이 접시를 비울 동안 이긴은 입맛을 잃은 사람처럼 자기 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먹고 있는 건 제 얼굴인 듯 낱낱이 뜯어보는 게, 사람을 저런 식으로도 볼 수 있구나 싶어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왜요.”
“너, 아무것도 기억 안 나?”
“…….”
부지런히 움직이던 포크가 허공에 뚝 멈췄다. 이상하게 가슴이 선득선득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고 억지로 묻어 두었던 열기가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홀로 쓰러져 있던 싸늘한 회의실 바닥도.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잖아? 이제 와서, 굳이? 다른 얘기겠지. 다른 얘기일 거야. 그런데 이 불안감은 뭘까.
“무슨 기억…….”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리 부정해도 무시할 수 없는 감이란 게 있다.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뱀처럼 미끄러졌다.
“아니……죠?”
질문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반들거리는 눈이 씩 휘어졌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뒤늦게 같은 옷차림에 대해 꼬집었던 게 떠올랐다.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 이 옷을 입고 있었다.
‘맞구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째서 안일하게 마음을 놓아 버렸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저 이긴이라니. 실망할 이안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배신해 버렸어.’
이안은 저를 믿어 주었는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나서 주었는데.
‘그랬는데 난…….’
다른 누구도 아닌 이긴을 찾아가선 보란 듯이 이안의 믿음을 부정해 버렸다. 자꾸만 고이려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도우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저처럼 한심한 인간에게 울 자격이 부여되어선 안 되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새파랗게 떨고만 있는 도우를 보며 이긴은 양가감정을 느꼈다. 다정하게 달래고 싶은 마음과 조막만 한 얼굴이 온통 젖도록 엉엉 울리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맞섰다.
어느 쪽도 결정하지 못한 채, 이긴은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이렇게 마주 앉기 전, 그의 침실에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잔이 거의 비어 갈 즈음, 미동도 않던 맞은편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동그스름한 볼을 타고 주르륵 떨어지는 투명한 눈물에 비로소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웃게 만드는 것보다 울리는 쪽이 좋겠다고.
다소 고약하지만 어쩌겠나. 그쪽이 제 취향인 것을. 그러니 좀 더 울어 봐. 그럼 조금은 아량을 베풀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말할 거예요?”
“안 될 것 있나?”
이긴은 벼랑 끝에 몰린 도우를 찬찬히 감상했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 볼만했다. 조금만 건드리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겠지. 그렇다면 기꺼이.
“내기의 승자도 가려야 하고.”
“…….”
내기. 단 한마디에 도우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뭘 어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비는 것 외에는.
“그냥, 그냥 넘어가 주시면, 그러니까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왜.”
“실수, 실수였는데,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를 하니까,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자신을 안다. 하지만 이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상대의 자비에 기대어 애원하는 것. 절망스러운 건 눈앞의 남자에게는 자비심이라는 게 조금도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비는커녕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슬쩍 들린 입매에 새로운 장난감을 접한 아이처럼 천진하고도 잔인한 호기심이 진하게 배어났다.
“실수? 언제는 절대 그럴 일 없다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다짐하면서도 직감했다. 상대가 원하는 건 이런 전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해야 했다. 자꾸만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신음하던 낯선 남자가 떠올랐다. 삐끗하면,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정말 다시는…….”
“곤란한데.”
“예……?”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자 짓궂게 반짝이는 눈빛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내기에 이겼으니 이안한테 연구소를 넘기라고 할까 생각 중이라. 없던 일로 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
연구소가 이안에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 얼마나 열정을 바쳐 왔는지. 알기에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제 방심이 불러온 엄청난 대가에 짓눌려 입술이 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굳어 있는 것 말곤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도우 때문에 심심하다는 듯, 이긴이 심드렁하게 핀잔했다.
“뭐라도 대안을 제시해 봐. 가만히 있지만 말고.”
“대안……이요?”
제가 연구소에 상응하는 걸 마련할 수 있을까. 당장 제 앞가림조차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마당에. 그래도 이안에게 털어놓는 시기를 늦출 수 있다면 최대한 늦춰야 했다. 그 안에 무슨 대책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가망 없는 희망이지만, 그거라도 붙잡아야 했다.
“돈……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진짜 재미없게 구네.”
당치 않다는 듯 이긴이 실소를 흘렸다. 도우는 제가 얼마나 멍청한 제안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가 대표이사이자 재단 상속자인데 돈이라니. 하지만 그것 말고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 한 가지, 아까부터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도우는 애써 무시했다. 입 밖에 내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도우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간절하게 의견을 구했다.
“그럼 무엇을…….”
다시 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잖아도 비참한 제 처지를 시궁창에 처박지 말아 달라고, 마음 깊이 호소했다. 그러자 어떤 인간적인 기대가 솟는 것도 같았다. 불량하지만, 이안과 똑같이 생긴 얼굴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대는 싹트기도 전에 여지없이 짓밟혀 버렸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제가…….”
“진짜 잘 빨던데. 너희들을 왜 빨대라고 부르는지 알아 버렸잖아.”
“…….”
결국.
심장이 툭 떨어졌다. 온기를 앗긴 손끝에서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이대로 증발해 버리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전, 전 소장님의, 오메가인데, 그런데, 그런데, 이사님께서 어떻게 그런…….”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파리하게 질린 낯이 소리 없이 젖어 갔다.
“그렇게 우니까 꼭 내가 나쁜 사람 같네.”
부정하지 않고 저를 직시하는 물기 어린 눈망울에 흡연 욕구가 강하게 일었으나 금연구역이었다. 씹, 짜증 섞인 욕설을 뱉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올려 두고 일어섰다. 처연하게 올려다보는 얼굴에 대고 눈짓하자 의외로 순순히 따라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목을 길게 뺀 채였다.
주차장으로 곧장 향하려던 이긴은 방향을 바꾸어 화장실로 도우를 이끌었다. 담배보다는 젖어서 축축해져 있을 말랑한 뺨을 빨고 싶었다. 얄궂은 변덕이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도우가 입구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싫어요. 싫어요, 이런 데서, 싫어요.”
가슴을 밀어내는 손을 떼어 내며 종잡을 수 없는 건 이 녀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꼭 계집애처럼 가늘어진 목소리로 앙알거리는 게. 한편으론 조금만 힘주면 꺾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손목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못 들어갈 곳도 아니고 사내 새끼 둘이서 뭘 가려.”
그렇게 위협적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뻗대던 몸에서 별안간 힘이 쭉 빠졌다. 얌전히 들어와선 두리번거리는 꼴이 누가 있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화장실치고 지나치게 넓은 공간임에도 사람은 저와 이긴 둘뿐인 걸 확인하자 어깨가 시옷 자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가장 안쪽 칸에 밀어 넣자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더듬거렸다.
“입, 입으로만……이에요. 다른 건, 다른 건 절대…….”
“그건 내가 정해.”
건방지네. 한마디 중얼거리자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며 눈까지 부릅뜬다.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게 어이없었다. 제 딴엔 제법 정색한 꼴이 웃기기도 하고.
“나도 다른 건 취미 없어.”
이 오메가는 알까. 제가 은연중에 사람을 자극한다는 걸.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이치긴 해도,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면이 도우에게 있었다. 빗장을 풀어 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긴은 서슴없이 굴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오니 자꾸 다른 게 궁금해지네.”
보고 나면 또 어떨지 모르지.
혼자서 정액을 빼다가도 막상 남성의 성기를 떠올리면 흥이 식었던 것처럼, 이 짓거리도 그만두고 싶어질지 모른다. 그럼 비정상적인 욕구도 자연스레 해소될 거고.
“일단 확인 좀 해보고.”
이긴의 손이 본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버클에 향하자 도우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안, 안 돼요. 이런 거, 않기로 했잖아요.”
“그런 약속 한 기억 없는데.”
“안, 싫어! 이러지, 마! 하지 말란…… 흑……!”
또 계집애처럼 구네. 이긴은 문고리를 향해 하느작거리며 뻗은 도우의 팔을 가볍게 제압하고 목덜미를 잡아 눌러 그대로 변기를 잡고 엎드리게 만들었다. 바르작거리는 게 고작인 상대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쑥 벗겨 낸 거친 손길이, 허벅지 중간 즈음에 이르러 멈칫했다.
“……뭐야.”
제 것과 사뭇 다른 가랑이 사이가 낯설다. 동그란 엉덩이와 뽀얀 허벅지로 이어지는 부분이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채 매끈했다. 그 사이에 예쁘게 접힌 세로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잠시 멍해 있는 사이 몸을 일으킨 도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지를 올렸다. 벌벌 떨리는 손이 몇 번이나 지퍼를 잡았다 놓쳤다.
담배에 불을 붙인 이긴은 비딱하게 기대서서 물끄러미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완전히 바지를 입는 데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만큼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도우가 바지의 단추를 꿰었을 때, 새 담배에 불을 붙인 이긴의 손이 셔츠로 향했다.
하나씩, 하나씩. 셔츠 단추가 풀어질 때마다 앞섶이 벌어졌다. 가늘게 떨면서도, 도우는 이긴을 제지하지 못했다. 마침내 겨드랑이 아래로 미라처럼 붕대로 전체를 꽁꽁 싸맨 상체가 드러났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조인 가슴에 이긴의 눈매가 좁아졌다.
후우…….
유난히 길게 연기 내뿜는 소리에 도우는 눈을 질끈 감아 스스로 만든 어둠에 저를 가뒀다.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지. 이젠 여자인 것까지 들켜 버렸다. 이제는 내기의 승패보다 당장 잘릴 일이 걱정이었다. 허위로 입사한 게 되어 버리니까. 그것도 대표에게 직통으로 걸리다니,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재미있네.”
서늘해진 음성에 배 속이 다 싸해졌다. 먹은 것이 그대로 올라올 것만 같은 구역감을 꾹 참으며 다음 선고를 기다렸다.
“이안은 알아? 너 이런 놈인 거.”
뭐라고 말해야 할까. 멍한 가운데에도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어떻게든 이안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잔대가리 굴리지 말고.”
이긴이 엄포까지 놨지만, 도우는 기꺼이 거짓을 입에 올렸다.
“소장님은, 소장님은 모르세요. 다 제가 꾸민 일이라, 제가, 소장님이 너무 좋아서, 곁에 있고 싶어서……. 정말 소장님은 모르는 일이에요.”
“스토커도 아니고.”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만두라면 그만둘 테니까, 제발 소장님께만은, 소장님은 끝까지 모르게 해주세요. 네?”
“곤란한데.”
“……예?”
“겨우 그만두는 걸로 조용히 덮겠다고. 그렇겐 안 되지.”
비에 젖어 낑낑거리는 개새끼처럼 절박하게 굴면서도 어지간히 이안이 좋은 모양이었다. 녀석을 덮어 주기 위해 거짓말도 곧잘 하고. 이안은 모르는 일이라는 그녀의 말은 조금도 설득력이 없었다. 서류를 위조할 만한 간덩이가 요 조그만 몸뚱어리에 들어 있을 리 없으니. 그럼에도 남자 행세를 하고 다녔던 건 꽤 높이 사줄 만하지만.
아무튼 잔머리 굴리지 말라고 미리 경고까지 했는데 이안을 감싸고돈 건 괘씸한 일이었다. 괘씸한 일엔 벌을 내려야지.
이긴은 잔뜩 웅크린 어깨를 눌러 앉혔다. 턱 끝을 슬쩍 들자 눈물범벅인 얼굴이 따라 올라왔다. 발갛게 익은 코끝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살짝 틀어쥐었다. 조금 숨을 참아 보는가 싶더니 결국 입술이 벌어졌다. 헐떡거리느라 오르내리는 가슴은 덤이었다. 붕대를 풀어 어떻게 생겨 먹었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우읍, 읍!”
별안간 입안에 들어찬 묵직한 존재감에 도우의 숨이 턱 막혔다.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 씹, 응? 아주…….”
아래를 물리기 무섭게 뿌리까지 쑤욱 밀어 넣으며 이긴이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거친 몸놀림을 받아 내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잠시 허리를 물린 그가 머리채를 거머쥐었다. 흉흉하게 일어서 번들거리는 성기가 눈앞에 바짝 다가왔다. 그 와중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점……!’
약간 휘어진 기둥의 모양과 귀두 끝에 박힌 점을 보자 어렴풋했던 그날의 기억이 별안간 선명해졌다. 눈앞의 흉기는 머릿속에 떠오른 성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정말, 그와 해버린 것이다. 무언가 알아챈 그녀의 표정을 민감하게 감지해 낸 이긴이 심술궂게 물었다.
“이안 것도 이렇게 빨아 줬어?”
“우븟, 웁…….”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연한 입 안쪽 살이 굵은 몽둥이 같은 것에 짓이겨졌다.
“그럼 점 없는 건 어떻게 알아. 큿, 아…….”
무어라 변명하려다가 기둥을 질겅질겅 씹은 꼴이 되었다. 단단한 고무가 어금니를 지그시 눌렀다 떨어지는 감각에 몸서리치자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을 흘렸던 이긴이 코웃음을 쳤다.
“이게, 아픈 게 누군데. 똑바로 안 해? 전에 알려 줬잖아. 이 세우지 말라고.”
배운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도우는 이미 얼얼한 턱을 한껏 벌리고 입술을 말아 치아를 감싸려 애썼다. 그러다 또 한번 앞니로 밑동을 길게 긁어 버렸다.
“이렇게 배움이 늦어서야.”
이긴이 혀를 쯧쯧 찼다.
“수석 졸업생이라더니 이안이 사람을 잘못 뽑았네. 응?”
순간 도우는 눈을 부릅떴다. 저를 뭐라 모욕하든 상관없지만, 이안까지 엮고 들어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비열한 자식.’
이런 저급한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리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워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맺혔던 눈물방울이 끝내 둥글게 떨어지는 걸 발견한 이긴의 허리 놀림이 거칠어졌다. 콱콱 짓쳐들던 살덩이가 사정감에 벌떡거리며 혀를 짓눌렀다. 이제 끝인가 생각한 순간,
“후으…….”
길게도 뽑힌 성기를 빼 든 이긴이 그 끝을 도우의 미간에 조준했다. 울컥, 울컥, 쏘아진 정액이 눈꺼풀에, 콧등에, 입술 주변에 난잡하게 흘러내렸다. 그중 입가에 묻은 덩어리를 엄지로 쓸어 그녀의 입안으로 밀어 넣은 이긴이 눈을 휘며 악동처럼 웃었다.
“예쁘네.”
얼굴을 뒤덮은 짙은 페로몬 향에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덩어리진 정액이 뒤덮인 눈은 뜨지도 못한 채 남은 한쪽 눈으로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끝났다 안도했으나,
“하마터면 내 성정체성을 오해할 뻔했잖아.”
사정 후에도 조금도 죽지 않고 빳빳이 선 물건을 보고 도우는 눈을 의심했다.
증오에서 경악으로 바뀐 눈빛에 이긴이 느긋하게 그녀의 아랫니를 눌렀다. 가지런한 치아 안쪽에 놓인 진분홍 혀가 마찰로 인해 유난히 통통했다. 그게 뭐라고 구미가 당겼다. 이긴은 기꺼이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이렇게 예쁜데, 음?”
말랑한 입술에 대고 제 입술을 꾹 누르자, 발갛게 부풀어선 어디고 뜨겁게 달라붙는다. 진득하게 밀착했다가 떨어질 때 남기는 촉촉한 여운이 그를 감질나게 만들었다.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안을 파고들었다. 세운 혀끝으로 어금니 안쪽을 긁자 달콤한 샘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읏, 싫…….”
도우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벌어졌다. 혀가 침범하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입에 담기 버거운 부피감은 줄었지만 호흡이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무엇보다 이건, 너무 이상하다. 차라리 페니스를 물고 흔드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얽혀 있는 혀의 접촉면이 문지르듯 미끄러질 때마다 의지와 상관없이 야릇한 신음이 피어올랐다. 희롱하듯 여기저기를 콕콕 가볍게 쑤시는 것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 이긴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도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 하지 말아요. 이런 거, 별로…….”
솔직하지 못하시긴. 상기된 도우의 뺨을 톡톡 두드린 이긴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 사이에 그녀를 앉혔다.
“이게 더 좋다고? 그럼 소원대로, 아, 해야지.”
“흡, 우읍…….”
다시금 목구멍에 드세게 처박히는 살덩이를 꾸역꾸역 받아 삼키며 질끈 눈감았다. 어서 이 악몽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고개를 묻고 두 눈만 꼭 감고 있으면 매가 지나쳐 갈 거라 믿는 어리석은 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