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0)

05

원래도 아침을 챙겨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입맛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속이 울렁거렸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소장실 문을 두드렸다.

“왔어?”

“네, 소장님. 저, 2차 검사 아시죠?”

이안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지 않으면 잠깐 앉았다 가.”

“저, 이사님이 저번처럼 부르셔서…….”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잠깐의 함께할 시간조차 거부하는 도우를, 이안이 찬찬히 살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부러 숨을 참으면서 그나마 핑곗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안 그랬다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 털어놨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이렇게나마 이안을 보는 일은 영영 없을 테지.

“이긴이 많이 괴롭히나 보네.”

“아니,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는 게 이상하게 비치진 않을까. 울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한편으론 속이 울렁거렸다. 괴롭힌다는 게……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거지? 설마, 다 알고 있나? 둘은 쌍둥이니까 그럴지도. 아니, 그럴, 그럴 리가 없는데. 혼란스러워하다가 침묵이 길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수상쩍어하는 낌새에 황급히 덧붙였다.

“그냥, 담배 심부름 정도…….”

“비서도 새로 뽑았으면서 왜 그런 짓을.”

어이없어하며 혀를 차는 이안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내기…… 때문에.”

뱉고 나니 어쩐지 원망처럼 들렸다. 내기 같은 거, 하지 말지 그랬냐고. 말도 안 되는 억하심정이었다. 제가 어떻게 이안에게 그런 걸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이안은 자기를 믿어 준 것뿐인데, 믿음을 저버린 건 자기 자신이면서.

‘최악.’

도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파렴치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일자로 입술을 다물고 캐내듯 응시하는 이안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에게 꾸벅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죄송, 합니다.”

그러곤 몽글거리는 흰색 정액이 채워진 무균 통을 다짜고짜 집어 들었다.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안이 쫓아올 리도 없는데 도망치듯 연구실을 빠져나와서 마구 내달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잠시 복도 벽에 기댔다. 이안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한 건 처음이었다. 도우는 크게 자책했다.

‘분명 언짢았을 거야.’

호흡이 가라앉고 나니 뒤늦게 손바닥이 아팠다. 무언가 싶어 쳐다보니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뚜껑의 모양대로 손바닥에 동그란 자국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손안에 든 것이 미지근했다. 사정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증거여서 느낌이 묘했다. 반듯하게 정돈된 이안의 연구실 안에서는 어떤 불온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향긋한 차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 뿐.

그 공간에서 난잡하고 더러운 건 저뿐이었다. 그걸 알아서 가쁘게 도망쳤는지 모른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긴이 싸지른 음란한 냄새가 퍼질까 봐. 채 서러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검사실 앞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이긴이 들썩이는 그녀의 가슴을 짓궂게 턱짓해 보였다.

“벌써 흥분한 건가. 엄청 기대한 모양인데.”

누가.

눈빛이 창이라면 심장을 찔러 버릴 텐데. 도우는 한껏 힘을 줘 이긴을 노려보았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님 말고.”

이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죽일 듯이 이를 갈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 그녀가 화를 내면 낼수록 상대의 흥미를 돋울 뿐이다. 그런 면에서 도우는 그녀가 관리하는 실험 쥐와 닮았다. 발가락을 잘리고 억지로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선 어느 날은 이를 세워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손가락을 물지만 손가락 끝엔 피 한 방울 맺히지 않는다.

아주 작은 상처도 입히지 못하는 필사의 반항. 그게 도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기요.”

독방에 들어서서 이긴에게 통을 건네준 도우가 그곳에 놓인 여러 도구들을 두고 의미 없는 설명을 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려는 수작이었다. 이미 한 번 들어서 알고 있는 건데도 이긴은 경청하는 척했다. 결국 당기는 대로 끌려오면서 번번이 잔꾀를 부리는 게 앙큼하다.

“그럼 이만…….”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독방을 나서려는 도우를 이긴이 시니컬한 어조로 붙잡아 세웠다.

“이만큼 장단 맞춰 줬으면 적당히 하지.”

“오늘은…….”

지난번엔 주말이어서 사람이 없었지만 평일인 지금은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주의 깊게 눈여겨보지는 않을 테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이상하게 볼 게 뻔했다. 난색을 표했지만, 이긴은 요지부동이었다. 뻗대 봤자 같이 있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다. 도우는 더 저항하지 않고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저번에 했던 말은 취소야. 이안이 인재 하나는 제대로 뽑았네.”

말귀를 잘 알아들어 기특하다며 이긴이 물건을 꺼내 들었다.

“빨리 해요.”

이제는 익숙했다. 어떻게 꿇어야 무릎이 덜 아픈지, 고개를 어느 정도로 젖히고 있어야 숨이 수월하게 쉬어지는지. 아무 생각 없이 겪어 내면 그만인 일이다. 어차피 지나갈 일이고. 그러니까 조금만 참자. 조금만.

내리깐 눈꺼풀에 체념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게, 이긴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날카롭게 굴 땐 언제고 박제당한 표본처럼 무력하게 순응하는 게.

씨발.

근래 들어 자주 이런 기분이 되곤 한다. 제게 날을 세울 땐 마냥 순종했으면 싶다가 막상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굴면 짜증이 왈칵 몰려왔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성질머리에 치를 떨던 이긴은 이내 기분이 나아질 방도를 떠올렸다. 반쯤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로 건성건성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빼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건 이제 좀 질리는데.”

“그럼…….”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처럼 눈을 꾹 감고 있던 도우가 이긴을 올려다보았다. 물음표가 커다랗게 떠 있는 얼굴보다 조금 아래에 이긴의 시선이 닿아 있었다. 실험 가운 속, 셔츠 안 은밀히 감싸 놓은 속살을 응시하듯이.

그 의도가 너무 분명해서 도우는 당황해 두리번거렸다. 그와 둘만 들어 있는 독방임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양팔로 가슴을 겹쳐 가로지른 도우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요?”

“그럼 어디서 할까.”

나가 볼 테면 나가 보라는 듯 이긴이 문을 턱짓해 보였다. 심상한 눈짓이 나가지 말라는 으름장보다 더 협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못 먹을 거라도 받아 문 것처럼 끝나자마자 내빼는 거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정 후에 대화를 나누며 노닥거릴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래도 도우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되뇌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서 초조했다. 이렇게 오래 둘이 들어 있다면 분명 오해를 살 거다. 뒤꼭지에 눈이 달린 것처럼 바깥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너랑 내가 게이가 아닌 이상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은 없을걸.”

“그래도 지금은, 지금은 좀…… 다음에……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다음?”

다음이라고 했던가.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되는대로 뱉었기에 제가 무슨 말을 한 줄도 몰랐다. 어차피 정정하는 게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이미 그가 들어 버렸고 아주 좋은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다음 언제.”

“언제라도, 다음에…….”

혀를 깨물고 싶다. 그동안은 그가 호출하면 기계적으로 입을 벌리는 게 전부였다. 이긴도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마치 정액을 배출하고 성욕을 해소하는 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하지만 이젠 아니라는 걸 알겠다. 바뀌게 된 계기가 무언지는 알 수 없지만.

“정 그렇다면.”

큰 아량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알았다는 의미로 이긴이 고개를 까딱했다. 더불어 이제 그만 나가 보라고 손사래까지 쳤다.

“네? 감, 감사합니다…….”

“웃어.”

이긴이 사근사근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죽상으로 있지 말고. 음?”

얼빠진 채 굳어 있다가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제 딴엔 황급히 달아난 것처럼 느껴져도 이긴의 눈에는 비틀거리며 허우적대는 꼴이 꼭 물에 빠진 모양새다.

서서히 닫히는 문 틈새로 작아지는 인영을 끝까지 추적하며 느긋하게 손을 놀렸다. 이제야 조금 맛이 났다.

***

결국 점심을 건너뛰었다. 먹은 게 없는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날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오면 조금 나아질 것도 같았다.

“저, 잠시…….”

주위를 의식하며, 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업이 잘되어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건 알파들에 한해서고 잡무도 모두 떠안고 있는 그녀는 마음 편히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위치였다. 담배 심부름 정도는 그럭저럭 눈치 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이상 이긴이 만족할 때까지 그의 것을 빨아 주느라 자리를 비우는 건 일에 지장이 없을 수 없었다.

갖은 핑계를 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슬슬 그녀의 핑계를 믿지 않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결국 미나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이제 연차 좀 쌓였다고 멋대로 구는 거냐고.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들리도록 바로 사과했지만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같은 연구원인데 본인들의 자잘한 일거리를 그녀에게 떠넘기는 건 분명 잘못됐다. 암묵적으로 동조하며 그렇게 몰아가는 분위기도. 오메가 따위가 자기들과 동등한 업무를 하는 건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도우가 본격적으로 자기 연구를 맡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시기인데…….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바람 쐬러 나가는 것조차 이렇게 허락받듯이 보고하게 된 것도 그녀에게만 지워진 의무였다. 다른 이들은 실험 중간에 시간이 비면 은행 업무 정도는 자유롭게 다녀왔다.

‘꼭 노예 같네.’

하긴, 오메가가 알파의 공식적인 노예였던 적도 있으니 영 틀린 판단도 아니다. ‘차라리 그만두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잠적할까?’

근래 들어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이었다. 지난번 제 억제제에 손을 댄 일로 가족들에게 엄청나게 화를 낸 이후로 집은 잠만 자는 곳이 되었다. 연구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 이긴의 시도 때도 없는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고…….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건 이안뿐이었지만 지은 죄가 있어 도리어 제 쪽이 불편했다. 이안과는,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꿈에 나올 정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지만.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그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것 같은데 대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이안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한데, 너무 그리웠던 탓일까. 거짓말처럼 이안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 소장님!”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그 앞으로 달려간 도우는 그의 코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뒤늦게 가운을 걸치지 않은 멀끔한 정장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쥔 담배도.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굳어진 그녀를 보고 이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뭐야.”

“…….”

어떻게 착각할 수 있지? 이렇게나 다른데. 전혀 다른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이긴을 마주친 것 보다, 그를 이안으로 착각한 자신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젠 부르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오고. 맛이 꽤 좋은가 보지? 내 거 말이야.”

“무슨…….”

도우는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행여나 누가 귀담아들을까 걱정이었다. 이긴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지만. 전전긍긍하는 건 그녀뿐이었다.

천적을 만난 토끼처럼 예민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도우를 관찰하며 이긴이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지 않으면 깊고 검은 눈동자에 입술을 박고 내키는 대로 빨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 것 같았다. 세상 무심한 듯 가라앉아 있다가도 툭 건드려 주면 금세 일렁이는 새카만 눈이 방금 전까지 저를 이안으로 착각하고 흑요석처럼 반짝였더랬다.

“오늘 뭐 해.”

남의 사생활을 왜 묻지. 설마 회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것만으론 부족한 건가. 발끈해선 톡 쏘아붙였다.

“왜요?”

“…….”

그러다 대꾸 없이 담배를 물며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괜히 주눅이 들어선 웅얼웅얼 덧붙였다.

“약속 있어요.”

“누구랑.”

“……그런 걸 왜 물어요.”

정말, 불안해졌다. 이러다 삶을 완전히 저당 잡히는 건 아닐까? 성별을 속인 게 들통 나고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일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언제까지 허덕여야 할까. 제발 제게서 빨리 흥미를 잃었으면. 그것만이 요즈음의 바람이었다.

“이번엔 누구 거 빨아 주러 가나 궁금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저질. 나쁜 인간. 재수 없어.

사람들은 알까. 대표이사란 작자가 훤한 대낮에 음담패설이나 지껄이는 걸. 하나 아무리 욕을 해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목구멍 밖으로는 내지도 못할 욕이다. 이런 자신이 한없이 비겁하게 느껴져서, 도우는 아프도록 입술을 물었다. 그가 갑자기 팔을 뻗어 그녀의 볼을 꽉 누르지 않았다면 피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못생긴 게.”

“우븝, 븟!”

“입술까지 터지면 더 못생겨질걸?”

“이거 놔요!”

아귀힘이 그리 세지는 않아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문제였다. 황급히 누가 있나 주변을 확인한 도우의 두 눈이 서넛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걸 발견하고 흔들렸다. 다행히 아직 이쪽에 눈길을 주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이렇게 아는 척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 비상식적인 인간은 처음 보았다. 당연한 걸 굳이 짚어 말해 줘야 하나? 지나치게 뻔뻔한 건지, 아니면 남의 눈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건지. 아마 후자겠지. 아님 둘 다거나. 도우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또박또박 일러 주었다.

“소장님이 아시면 안 되니까요.”

“네 그 잘난 소장님이 자기 연구원이 자그마치 대표이사한테 시건방지게 구는 건 알까 모르겠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기 허락하고 담배 심부름 눈감아 주고 있는 건 그 녀석이야.”

“…….”

“이미 내기에서 진 것도 모르고. 그것도 일종의 기만 아닌가.”

기만이라니. 가책을 느낀 도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일 끝나고 남아.”

“안 돼요. 정말, 약속 있어요.”

저번 주에도 예고 없이 플로리스트 강습을 취소해서 강사를 볼 낯이 없었는데 또 그럴 수는 없었다.

“퇴근 후에 일 시키면,”

살짝 눈치를 본 도우가,

“안 되는 거잖아요.”

마저 할 말을 했다.

제법 귀여운 소리를 하네. 이긴은 새 담배를 빼 물며 피식 웃었다.

“좆 빠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런 말……!”

화들짝 놀란 도우가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두 손으로 이긴의 입을 막았다. 아직 담배에 불을 붙이기 전이어서 화상은 면했지만, 다행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저 다급하게 고개 젓기 바빴다.

이긴은 눈썹을 찌푸리며 도우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부드러운 손에 가로막힌 입술이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혀를 내어 핥으면 기절할 것 같아, 이긴은 도우의 팔을 치우고 부러진 담배를 툭 버렸다.

“올라가 있어. 한 대 더 피우고 따라갈 테니까.”

싫다고 하면 퇴근 후에 남으라고 하거나, 훤히 트인 이곳에서 뭔 짓을 벌일 것 같다. 눈앞의 남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당연했다. 그는 잃을 게 없으니까. 꼼짝없이 목줄이 잡힌 도우는 순순히 대표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늦게 들어가면 엄청 눈총 받겠지.’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자잘한 일들을 미리 해놓은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남아서 잔업을 해야 할 테니까. 그럼 약속을 핑계로 이렇게 대표실에 이긴을 기다리는 게 무의미하니까.

‘싫다.’

부단히 흘러가는 초침을 보며 도우는 절망에 잠겼다. 다른 직원들은 아직 모르는 눈치지만, 대표실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서는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 도우를 보는 시선이 사뭇 달라져 있었으니까.

‘정말 싫어.’

급기야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기약도 없이 끌려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막막했다. 얘기를 해본다 한들 귓등으로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놓아줄 것 같지도 않고.

‘도대체 왜?’

의문이었다. 처음 저를 대할 때, 벌레 보듯 하지 않았나. 그때의 모멸감을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와서 귀하신 알파님께서 제 수발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리 내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감이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긴이 들어왔다. 그러곤 익숙한 태도로 소파에 앉아선 초콜릿을 내밀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분명 초콜릿이 싫다고 했는데, 고문하는 것처럼 먹이고 있으니.

‘아, 그건가.’

고문이라고 생각하니 납득이 갔다. 사람을 괴롭히는 게 즐거운 거다, 저 남자는.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서 굳이 불러들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도우는 초콜릿을 부러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개까지 완강히 저었다. 그간 순순히 받아먹다가 거절하는 도우를 향해 고개를 갸웃해 보이는 눈빛이 일견 흉포해졌다. 그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의 심정으로 덤빈 건.

“오메가 같은 거, 싫어하잖아요. 혐오하잖아요. 사람 취급도 안 하면서. 벌레보다 징그럽다고 했으면서.”

“누가 아니래?”

진짜 뻔뻔하다, 이 남자는. 정수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으로 저를 모욕하는 이긴을 노려보는 도우의 눈가가 붉었다. 너무 새빨개서 도리어 구미가 당기는 눈에, 이긴이 느긋하게 파스너를 내리며 명령했다.

“가까이 와.”

“…….”

“싫음 그냥 말할까? 너, 여자였다고.”

버티고 서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도우는 빠르게 허물어졌다. 말 잘 듣는 개처럼 그 앞에 섰다. 이제는 주인을 섬길 차례였다.

“약 줄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잘 받아 마셔야지.”

심술궂게 말한 이긴이 혀를 찼다.

“천연물 억제제도 아니고, 참 나.”

비아냥거림을 귀담아듣지 않으려 노력했다. 머리를 비우고 그냥 하는 거다.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비참하다는 생각도, 역겹다는 생각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럼, 그러다 보면 끝나 있으니까.

도우는 비웃는 이긴의 사타구니 사이에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기다렸다는 듯 퉁, 페니스가 튕겨 나왔다.

“왜냐고? 빨리는 맛이 꽤 괜찮더라고. 이런 서비스, 오메가나 되니까 하는 거 아닌가?”

저질. 개새끼.

증오로 머리가 뜨거워졌다.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비참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흉물을 받아 이로 긁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는 점이었다. 분출하지 못한 화가 눈가에 빨갛게 맺혔다. 이긴이 특히 좋아하는 포인트였다. 발긋한 눈에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힌 게 아주 볼만했다. 촉촉하니 젖은 꽃잎을 연상시켜선.

갓 고인 눈물이니 따스하겠지.

이긴은 별생각 없이 뭉툭한 선단을 한쪽 눈꺼풀에 대고 꾹 눌렀다.

“흑, 무슨……!”

“젖었네. 응?”

나쁜 인간, 미친 자식! 차라리 죽어 버려.

으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긴이 보란 듯이 다른 쪽 눈꺼풀로 옮겨 도장을 찍듯 눌러 귀두 끝을 적셨다. 눈물 적신 페니스를 흐느끼느라 벌어진 입술의 틈에 갖다 댔다.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술에 쑥 밀어 넣었다. 앞니에 주욱 긁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뚝뚝 흘러나오는 선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혀에 대고 비볐다.

찝찔한 맛에 도우가 몸서리쳤다. 이긴은 잠자코 마저 비비면서 턱짓했다.

“왜. 그거 네 눈물 맛인데.”

변태 새끼.

웅얼거리느라 입술이 성기를 가볍게 물고 우물거렸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방문에 깜짝 놀란 도우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 것을 물고 침 범벅이 되어선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게 여간 꼴리는 게 아니다.

씨발.

이게 사람을 아주 홀리지.

흥이 깨지기는커녕, 더 독이 올라 버렸다. 아플 정도로 팽팽해진 성기를 꾸준히 밀어 넣으며 이긴이 태연히 물었다.

“뭡니까.”

“나야.”

이안이었다. 이긴은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차분한 이안의 음성에 도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꼴을 보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웬만해선 이만 정리하고 보내 주려 했는데 상대가 이안이어서 마음이 바뀌었다.

“잠깐만.”

손님이 왔으니 이제 풀려날 거라 생각했는지 뒤로 빼는 뒤통수를 잡아 꾹 눌렀다. 그런 채로 의자로 걸어갔다. 제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고 뒤뚱거리며 따라오던 도우가 문득 이를 세웠다. 나름의 저항이었다. 그 덕분에 표피가 날카롭게 긁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잇자국이 남겠지만, 나쁘지 않다. 오히려 도우의 펠라티오 증거로 잇자국을 문신으로 새겨 두고 싶은 비정상적인 충동이 일었다.

이긴은 버둥거리는 작은 몸뚱이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고 원망 가득한 두 눈을 똑바로 맞추며 고갯짓했다.

‘계속해.’

그런 직후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

평생 도우에게 좋은 소린 못 들을 팔자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죽도록 미워하겠지. 어차피 저를 좋아할 일은 없을 테니 차라리 잘된 건가. 원망마저 기꺼우면 정말 미친놈인데. 왜 이렇게 됐지. 어느 틈에.

“씨발.”

문을 열자마자 이유도 모르고 욕먹은 이안이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책상 앞 소파에 단정하게 앉아 우아한 동작으로 다리를 겹쳤다.

“뭔데.”

“음, 연구비를 더 늘려 줬으면 해서.”

“또?”

“억제제로는 지금 이상의 수익 창출은 어려워. 이미 수요가 안정적이라. 봐, 그래프로 보면 지표가 명확해.”

치밀한 새끼.

이긴은 이안을 욕했다. 뭘 또 꼼꼼하게 자료까지 만들어 와서 코앞에 들이미는지. 그럼에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던 건, 도우의 작은 혀가 어설프게 귀두 둘레를 할짝거리는 맛이 꽤 좋아서였다. 그가 이안에게 어떤 눈치를 줄까 봐, 그녀는 정성을 다해 이긴의 것을 물고 빠는 중이었다. 특히 제가 이를 세워 그었던 부분을 사죄하듯 혀로 쓸고 문지르면서.

“으음…….”

이안의 귀에는 자신의 제안을 고려하는 신중함으로 들렸겠지만, 이긴의 살덩이를 턱이 빠지도록 물고 있는 도우에게는 달뜬 신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책상 너머에 이안이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됐다. 그 와중에 이안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적당한 보폭에 서두르지 않는 걸음, 천천히 꺼지는 가죽 소파, 부드럽게 넘어가는 종이의 소리.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이안이 그려졌다.

그녀가 이긴의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성기를 빨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들키면 경멸할 거야. 결국 너도 그렇고 그런 인간들과 다르지 않다고. 슬픈 건 그럼에도 이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충성스러운 개를 쓰다듬는 것처럼, 이긴이 그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비비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소홀하다 싶으면 언제든 제 것을 목구멍 깊숙이 쑤셔 주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턱이 얼얼했지만 도우는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과 기둥이 맞물린 틈에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들을 핥아야 할지, 그냥 지금처럼 움직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멍해졌다.

“그래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야.”

“그게 뭔데.”

“오메가들의…….”

갑자기 나온 오메가란 단어에 도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그 바람에 선단이 목젖을 꾹 찔렀다.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욕지기가 솟았다. 그나마도 막혀서 끅, 끅! 괴상한 신음만 흘렀다.

헛구역질이 겨우 진정됐을 땐 묘한 정적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체된 공기를 휘저은 건 이안의 물음이었다.

“뭐야?”

음성에 희미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도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긴이 그녀의 입에서 빠진 페니스를 친절히 다시 물려 주었다. 다소 과장 섞인 행동이었고 이로써 이안이 생각하는 불쾌한 상황은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낮부터 사무실에서 펠라티오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

도우는 그 상대가 자기란 게 밝혀질까 봐 완전히 얼어 있었다. 그가 책상으로 다가와 안을 확인할까 봐. 이안의 성격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후.

작은 한숨이 들렸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이안이 비난조로 말했다.

“않던 짓을 다 하네.”

“같이 할래? 꽤 기술이 좋은데. 넌 그냥 뒤에다 박아도 좋고.”

제발……! 도우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치욕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긴의 성기를 물고 이안에게 뒤를 벌리는 것만큼은. 차라리 혀를 깨물지언정, 제가 어떻게.

대답 대신 착착 서류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얘기는 다음에 하자.”

“다음도 장담할 수 없겠는데.”

“앞으론 미리 연락하고 찾아올게. 그리고 남이 쓰던 걸 주워 쓰는 취미는 없어서.”

“왜? 더러워?”

더럽냐는 질문에 이안은 침묵했다. 그것이 도우에게 크나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괜찮다고, 더럽지 않다고, 더불어 이긴의 지난 악행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 같아서. 문고리를 당긴 이안이 경멸 섞인 어조로 또박또박 말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더럽냐고? 당연한 건 묻지 마.”

탁. 얌전히 닫힌 문소리와 동시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두 뺨이 흠뻑 젖도록 우는 얼굴을, 이긴은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줄곧 울려 놓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우는 걸 보니 짜증이 일었다.

“고작 저딴 새끼 땜에 울어? 음침한 새끼가 뭐가 좋다고.”

음침한 새끼는 저면서.

도우는 힘을 그러모아 이긴을 노려보았다. 더럽다는 이안의 발언에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망쳐 버린 거,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고.

“더는, 더는 이런 짓 안 할 거예요. 싫어, 안 할 거야. 당신 따위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쩌게.”

“소장님께 얘기할 거예요.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무릎 꿇고 용서라도 빌게? 그럼 녀석이 받아 줄 것 같나?”

“무릎 꿇을 필요도 없어요. 소장님은 그런 분 아니니까.”

“그런 분이 아니라……. 아주 철석같이 믿고 있네. 세뇌라도 당했나?”

새 담배에 불을 붙인 이긴이 뿌연 연기를 부러 도우의 얼굴에 대고 뿜었다.

“그럼 이대로 나가. 이안한테 말하면 되겠네. 그동안 속여 왔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이대로 대표실을 박차고 나가 이안의 뒤를 쫓으면 되는데. 그래서 저간의 사정을 밝히면, 그러면 되는데, 이긴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도리어 의구심이 들었다.

‘왜지.’

결과야 장담할 수 없겠지만, 이 더러운 고리를 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뿐인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이안이 했던 말.

‘않던 짓을 다 하네, 라고 했어.’

제가 알기로 이긴은 그런 짓 하고도 충분히 남을 사람인데. 분명 문란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물론 이미 저와 그러고 있으니 이안의 발언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래도. 석연찮은 기분으로 도우는 자꾸 이유를 찾아냈다. 이안에게 밝혀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뭘 한 것도 아니잖아요. 난 여전히,”

후, 이긴이 놀리듯 그녀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었다. 찰나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감지한 후였다.

미간을 찌푸린 도우는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숨을 참고 할 말을 빠르게 뱉었다.

“순, 결하니까.”

피식,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긴이 실소를 흘렸다.

“순결이 다 얼어 죽었네.”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참는 도우의 얼굴에 다시금 뿌연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흩어졌다. 어디 얼마나 참나 두고 보자는 심산인 것 같았다.

“아무렴. 위로는 좆을 물리도록 빨아도 아래는 순결하시지.”

“…….”

“싫으면 그만둬.”

처음부터 그녀에게 선택권이 있었던 것처럼 결정권을 넘겨 놓은 이긴이 즐겁게 궁리했다.

“내기에 이겼으니 뭘 달라고 할지는 고민 좀 해보고.”

“…….”

“그보다 이안 표정이 볼만하겠는데.”

악랄한 협박이었다. 그러잖아도 흔들리고 있던 도우의 결심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에 충분한.

“하지, 하지 마세요. 얘기하지 말아요!”

“우리가 뭘 했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그래도, 그건…….”

실수했다고, 잘못 말했다고 사과할까?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자충수를 둬버렸다. 무를 수도 없게.

스스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 앞에 선 도우를 향해 이긴이 살살 부채질했다.

“글쎄, 진짜로 뭘 했다면 입 다물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도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들어서는 안 될 걸 들어 버린 것 같아 눈앞이 캄캄했다.

“뭐를…….”

“이안이 알면 정말로 곤란해질 만한 것?”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도우는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잘도 그녀와의 잠자리를 요구하면서 이긴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아깐 다음이라며. 네 입으로 한 약속도 지킬 겸.”

“그게…… 그건…….”

기껏해야 가슴을 노출하는 정도를 얘기한 거였는데. 이런 식으로 들고 나올 줄은 몰랐다. 식은땀이 손바닥 전체에 축축하게 배어났다. 몇 번이나 바지를 움켜쥐었다 놓는 도우를 이긴이 너그럽게 타일렀다.

“강요는 안 해. 어디까지나 네 선택에 달렸어.”

그럼 이안에게 말할 거면서. 그녀가 이긴의 성기를 물고 기꺼이 그를 받아 마셨다고. 이제 몸마저 열어 주고 나면 저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더는 돌이킬 수 없도록.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왜 하필 나예요?”

이긴은 왜 그녀를 이렇게까지 몰아가는 걸까. 혐오하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알파들의 세계는 소문이 빨라서 어떤 관계든 금방 퍼진다고 들었어요. 그건, 그건 정혼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내 걱정까지 해주고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제, 제 입을 믿는 건 아니죠? 이사님이랑 잤다고 제가 소문내면 어쩌려고.”

“네가 퍽이나.”

이긴은 무척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생각해도 가소로운 협박이었다. 지금도 지난번 실수가 이안의 귀에 들어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스스로 그런 소문을 낼 리 없으니까. 아까부터 모순에 빠져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혼란한 와중에도 방금 댄 이유는 꽤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저도 제 위주의 착각이었지만.

“소문난다 해도 오메가 따위,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붙어먹든가 말든가.”

발끝이 푹 꺼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비틀거렸다. 이안이 쳐둔 안온한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잠시 망각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알파에게 오메가란 존재는 애완동물 정도에 준한다는 것을. 이긴 정도의 우성 알파에게는 더욱이 그 이상의 인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나는 그냥 네가 궁금해. 어디까지 기어오르려나 싶어서.”

“…….”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에게 기어오른 적은 없었다. 혹여나 책잡힐까, 하여 이안에게 폐를 끼칠까 언제나 조심조심 가슴을 졸이며 살아왔는데. 도우는 잘못도 모르면서 납죽 엎드려 빌었다.

“죄송해요. 제가 만약 그런 적이 있었다면, 그러니까, 그게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무튼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빌라면 얼마든지 빌고 또 빌 테니 부디 너그럽게 그녀를 놓아주었으면 했다. 이기든 지든 별반 그의 삶에 영향 없을 내기 따위도, 그저 눈감아 주십사 했다. 이토록 자존심이고 뭐고 팽개치고 바닥을 기며 빌었음에도 이긴에겐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듯했다.

“바로 이런 점이 건방지다는 거야.”

“……네?”

다 틀렸구나. 도우는 포기했다. 그녀가 평생 이긴이라는 남자를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 발을 핥을 기세로 이마를 조아린 모습 어디에서 건방짐이 묻어났을까. 낙심했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더는 울지 않을 테다. 적어도 이긴 앞에서는. 나약한 눈물에 쾌락을 느끼는 악질에게 어떤 빌미도 던져 주고 싶지 않으니까.

더는 구차하게 비는 일도 없을 거라고 다짐하며, 도우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됐어요. 소장님께 다 말씀드릴 거예요. 이사님한테, 아니, 당신 같은 사람한테 다리 벌릴 일 없어.”

“좋을 대로. 후회하지나 마.”

당차게 질러 놓고선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쩌지 못해 어정쩡한 자세로 대표실을 나가는 도우의 뒤통수에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눈물 콧물 빼며 절절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 몰수하고 들이받다가. 그 뒤에 항상 따라붙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이안, 이안.”

콧노래하듯 가볍게 흥얼거린 이긴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도우에게 옮겨붙은 제 관심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끝을 보게 될 거라 직감했다. 이안도, 도우도, 입을 모아 이안의 오메가라 천명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음…….”

그럼 이안에게 조금은 미안해지려나? 남의 것을 빼앗는 취미는 없으니. 잠시 이안을 떠올려 본 이긴이 씩 웃었다.

‘이안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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