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0)

06

결국 이안에겐 아무것도 얘기하지 못했다. 기껏 찾아가선 별 중요하지도 않은 연구 주제나 실컷 떠들고 온 게 전부였다.

‘내일은 할 수 있을까.’

내일 못 하면 모레는? 모레 못 하면 그다음 날은, 또 그다음 날은?

언제고 고백할 날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럼 남은 건 이긴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는데도. 도우는 생각에 잠겨 멍하니 강사의 설명을 흘려들었다.

“보존제랑 락스를 섞어 쓰면 꽃이 더 오래가는 것 같아요. 제가 찾아낸 조합이에요.”

아릿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동시에 점성이 있는 반투명한 액체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모습이 점심에 삼켰던 정액을 연상시켰다. 이긴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녀의 혀에 사정한 결과였다. 마치 정해진 일과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는 담배 두 글자만 봐도 속이 좋지 않았다. 심부름을 빙자한 호출일 뿐, 담배를 대령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런, 잘못 샀네. 신제품이라 더 좋을 줄 알고 샀더니.”

유난히 점도가 높다 했더니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점착력을 높인 모양이었다. 도우는 더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도우 씨, 표정이 안 좋아요. 유난히 집중도 못하는 것 같고.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그냥, 회사에서 일이 좀 많아서.”

도우는 애써 미소 지었다. 오늘 소재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탐스러운 하노이 라넌큘러스와 사랑스러운 샤만트 장미를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입술이 다 부르텄어요.”

피곤한 건 맞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입술이 튼 건 아니었다. 가끔 이긴이 무지막지하게 자신을 밀어 넣을 때가 있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거칠게 몰아 댈 때도. 대부분은 그런 이유로 입술이 텄다. 수치스러운 흔적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도우는 가만히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걸 수줍음으로 해석한 강사 정후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전에 리스 만들 때 얘기했던 황금비율 기억해요? 오늘은 그걸 응용해서 부케를 만들어 볼 거예요.”

“네.”

“도우 씨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 즉석 과제 하나 내볼까 하는데, 어때요? 상은 센터피스 한 작품!”

“좋아요.”

플로리스트로서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후에겐 강습을 즐겁게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센터피스는 도우가 특히 재미있어하는 분야였다.

“과제가 뭔데요?”

빙긋 웃은 정후가 파릇파릇한 잎사귀에 앙증맞은 흰색 꽃이 달린 줄기를 가져와 기존 소재에 더했다.

“은방울꽃 돋보이게 하기.”

“아…….”

의욕이 넘쳤다가 맥이 쭉 빠졌다. 화려한 메인 소재에 비해 올망졸망한 은방울꽃은 상대적으로 수수해 돋보이기 어려웠다.

‘다른 꽃들도 밝은 색감이고. 센터에 몰아넣으면 균형이 안 맞을 텐데.’

그렇다고 사이사이에 섞으면 이도 저도 아닌 어지러운 모양새가 될 확률이 컸다. 도우는 신중하게 꽃을 쥐었다 놓으며 색감과 구도를 확인했다. 어느새 푹 빠져서 열중하는 도우를, 정후가 다정다감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계속 고심하던 도우는 은방울꽃의 초록색 잎사귀를 과감하게 떼어 버리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강사가 요구한 건 잎이 아닌 꽃을 돋보이게 만드는 거였으니까. 한번 방향을 정하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도우는 신중하면서도 재빠르게 꽃을 엮었다. 마침내 풍성하면서 우아한 부케 한 다발이 손에 쥐어졌다.

“아, 예쁘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다가 자화자찬한 것 같아 부끄러워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정후가 그럴 것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도우 씨 작품은 따스해서 좋아요.”

“예?”

“은방울꽃 돋보이게 하기라곤 했지만, 다른 꽃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공들인 티가 나요.”

“아…….”

“그래서 좀 과해지는 경향은 있지만. 여기는 조금 쳐내도 좋을 거예요.”

싱긋 웃으며 부족한 부분을 짚어 준 정후가 도우가 만든 부케와 함께 캔들 센터피스를 내밀었다. 기껏해야 손바닥 크기의 작은 센터피스를 생각했던 도우는 예상보다 큰 선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

“네. 도우 씨 향기 나는 건 다 좋아하잖아요. 라벤더 향초예요.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너무 예뻐요.”

“대신 앞으로도 열심히 나오기. 저번 주에 갑자기 취소돼서 서운했어요.”

“아, 그땐…….”

악몽이 시작된 날이었다. 뇨끼, 이름 모를 오메가 남자, 스카이라인, 화장실의 차가운 타일 벽이 눈앞에 어지러이 스쳐 지나갔다. 이긴의 다리에 매달려 짓쳐드는 굵은 살덩이를 받느라 헐떡이는 제 모습도…….

“도우 씨! 도우 씨?”

“네…… 네?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뭐라고 하셨어요?”

“이번 주말에 뭐 하는지 물었어요. 그런데 정말 너무 피곤해 보여서 쉬게 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같이 영화나 보자고 하려고 했는데.”

“아…….”

“너무 고전적인 수법인가요?”

정후가 솔직하게 제 마음을 드러내는데도 기억이 자아낸 잔상에 사로잡힌 도우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작 거절 이유를 대는 게 전부였다.

“아니요, 그게, 음, 이번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해서요. 죄송해요.”

“그럼 다음에 시간 날 때는 허락하는 거죠?”

“네? 그게…….”

“알겠어요. 기대할게요. 오늘 강습은 여기서 끝!”

정류장까지 데려다준다는 정후를 한사코 만류하며 완성한 부케와 선물받은 센터피스를 들고 나섰다. 차가운 밤바람에 머리를 식히고 나서야 무얼 허락해 달라는 거였지, 뒤늦게 의아해졌다. 몇 걸음만 되돌아가면 다시 정후를 만나 뜻을 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그 몇 걸음마저 버거워서.

‘힘들다.’

평소에는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도 강습만 받고 나면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어깨가 무거웠다. 그다지 무거운 걸 들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버스에 실려 이동하는 시간이 꿈처럼 몽롱했다. 그래도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이 안심되었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 도우는 이긴과의 관계도 버스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는 목적지가 있다. 도착해서 내리면 그만. 목적지가 아니라도 내키는 데서 내리고 떠나보내면 끝이 나니까.

얼마간 흐느꼈나 보다. 자정이 가까워 종점에 도착했을 때는 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차피 승객은 저 하나뿐이라 부끄럽진 않았다. 소매를 내려 대충 슥 훔치고 꽃들을 소중하게 안고 내렸다. 집으로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도우는 멈칫했다. 듬성듬성해서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둘째가 있었다. 그것도 낯선 남자와.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이쪽을 확인한 둘째가 남자에게 무어라 속삭이자, 남자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 남자가 지나칠 때, 진한 페로몬을 풍겨 도우는 그가 알파임을 알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다소 캐묻는 투가 됐다.

“누구야, 저 남자는?”

“애인이야.”

“애인이라고? 정말? 언제부터 만났는데?”

“뭘 따져? 내가 애인이라면 애인인 거지. 그런 것도 언니한테 보고하고 만나야 해?”

“아니, 난, 그냥,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런 분위기가 뭔데.”

“몰라서 물어? 알파랑은 단순한 연인 관계가 되기 힘들잖아.”

“모르겠는데. 또 단순하지 않으면 어때.”

“그게 무슨 뜻이야?”

가뜩이나 피곤한데 날 선 대화에 살갗이 저며지는 것만 같다. 오늘 무슨 마가 꼈나. 온 세상이 저를 잡아먹자고 덤비는 것 같으니.

“그냥 그렇다는 거야. 언니도 좋은 알파 만나서 잘 살잖아.”

좋은 알파, 이안. 그를 떠올리자 여지없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울컥 치받아 오른 슬픔에 목구멍이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잘, 살지 않아.”

내가 다 망쳐 버렸으니까. 당장 내일부터가 걱정이었다. 이긴이 어떻게 나올지 가늠할 수 없어서. 도우의 속사정은 조금도 모르는 동생은 계속해서 아픈 곳을 후벼 팠다.

“꽃 놀음할 시간도 있고 그만하면 잘 사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도 없는 짬 쥐어짜서 배우는 거야. 내 꿈 잘 알면서, 왜 그렇게 못되게 말해.”

“꿈꿀 수 있는 것도 특권이야. 집안일 나 몰라라 하는 것도 특권이고.”

“내가 언제……!”

그렇게 갖다 바쳐도 부족한 거냐고 소리 지르려다 불현듯 든 싸한 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둘째와 있던 남자는 아무리 좋게 봐도 연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것처럼 수상쩍게 주위를 살피는 것부터가 그랬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가질 만한 목적이란 거기서 거기였다. 대부분 돈 몇 푼으로 해결되는 일시적 흥분에 불과한.

“무슨 일이야? 엄마가 또, 누구 보증 서줬대? 아님, 아빠가 사기당했어? 그런 거야?”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둘째가 몸을 사렸다. 역시 무언가 있는 거다.

“사실대로 말해. 저 남자 뭐야? 벌써 돈 받은 거 아니지? 응?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 빨리!”

여세를 몰아 추궁하자 둘째의 입술이 씰룩였다. 말도 꺼내기 전에 울음부터 터지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아빠가…….”

“아빠가 어쨌는데? 이제 사고 칠 돈도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노름.”

“뭐……?”

너무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작지만 분명해서 듣긴 들었는데,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노름, 흑…….”

“무슨, 무슨 돈으로? 빚 갚기도 바쁘잖아? 내가 다 확인했는데. 꼬박꼬박 납입하는 거.”

“현물로만 하는 노름이 있대. 언니 억제제 앞집 사람 줬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다…….”

“…….”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많은 양을 선뜻 남에게 내주었다고 했을 때부터. 워낙 남에게 생색낼 때는 손이 커지는 걸 알아서 그러려니 넘겼던 게 화근이다. 최근엔 그녀의 억제제에도 손댔던 것까지.

“그게 다야? 그럼 그 남자는?”

“나도…….”

“너도, 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노름한다고?"

“……아빠가 나도 걸었어.”

말문이 턱 막혔다.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어째서 내 주변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넘쳐나는 걸까.

“아…….”

부모를 쓰레기로 정의한 순간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그대로 주저앉았다. 둘째의 흐느낌이 이명이 되어 울렸다. 그만, 제발 그만……. 중얼거리면서도 이대로 무너지면 정말 끝일 것 같은 예감에 간신히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가자.”

싸울 힘이 없는데 싸우러 향하는 마음이 참담하다. 도우가 나서 줄 것 같으니 데면데면하던 둘째가 종알종알 고자질했다. 평소였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거금이 귀에 들려왔으나 무감각했다.

그만한 돈을 어떻게 마련하려나.

막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안. 아니, 이긴. 아니, 이안. 아닌가. 이긴인가. 모르겠다. 어차피 똑같이 생겼으니까. 온통 엉망진창이어서 분별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토록 연모하는 상대인데도.

***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밤새 한잠도 못 이뤄서만은 아니었다. 머릿속 어딘가에 녹음기라도 달렸는지 끊임없이 부친의 악다구니가 재생됐다.

“다 같이 잘살아 보자고 그랬지, 나 혼자 덕 보려고 그랬겠냐! 도우 너, 그렇게 돈 버는 유세 떨 거면 앞으로 네가 갖다주는 돈 필요 없다! 우리 다 같이 말라 죽는 꼴을 봐야 네가 정신 차리지!”

어차피 사과할 거란 기대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희한할 정도로 금전 감각이 없는 부모였으니까. 그건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돈이라도 아껴 모으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도우는 그런 의미에서 제 부모도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오메가로 태어나, 멸시받고 체념하는 것 말고는 배울 수 없는 자의 숙명이라고.

‘뭐 이래.’

발끝으로 아스팔트를 툭툭 찍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부친이 현명한지도 모른다. 그래, 다 말라 죽어야 한다. 오메가들은. 그편이 구차한 목숨을 이어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인지도 모른다고.

“도우야.”

“소장님.”

“여기서 뭐 해.”

딱히 목적은 없었다. 그냥, 이안이 보고 싶었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운 고통이 나을 것 같았기에.

“그냥, 머리가 아파서.”

어떤 친절은 뼈에 새겨진다. 온기가 뼈에 스며서, 끝내 잊을 수 없도록. 도우는 제가 그 온기를 본능적으로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동사를 목전에 둔 조난자처럼. 이안의 스케줄은 모두 꿰고 있는 그녀니까, 이렇게 우연을 가장해서 그를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랬구나. 참, 이번 실험 말인데, 통계상 유의한 수치가 나왔어.”

“아, 정말요?”

“이번에는 시약 비율을 조금 조정할까 해. 프로토콜은 이번과 똑같이. 비율은 메일로 보낼게.”

“네, 소장님.”

별것 아닌 대화에도 기분이 들떴다. 차분하게 복도에 깔리는 이안의 저음이 그 어떤 음악보다 듣기 좋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으면 좋으련만. 연구실이 가까워지자 입맛이 썼다.

“부모님은 잘 지내셔? 동생들은? 별일 없고?”

“네? 아, 그럼요. 별일…… 없어요.”

“무슨 일 있으면 숨기지 말고 바로 얘기해. 어려워 말고.”

“네. 어……?”

불시에 쏟아진 눈물을 도우는 수습하지 못했다.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울었다. 그 와중에도 소리 내지 않으려 숨을 참다 도리어 꺽꺽거리면서. 한숨을 폭 내쉰 이안이 연구실 문을 활짝 열고 안쪽을 손짓했다.

“표정이 어둡더라니. 들어와. 잠깐 얘기 좀 하자.”

다행이다. 귀찮아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안은 늘 그녀를 따스하게 맞아 주었는데도 이상하게 불안이 있었다. 냉정하게 내쳐지지 않을까 하는. 왜 그럴까, 처음엔 의문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름의 답을 내렸다.

이안이 저 같은 걸 좋아하는 자체가 기적이니까.

오메가라는 태생과, 주렁주렁 달린 가난한 식구들. 이 두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도우에게 이안은 과분한 상대인데, 부모는 도우의 통장을 밑 빠진 독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따금 이안에게도 손을 벌렸다. 부모가 돈 사고 친 것을 저 몰래 이안이 갚아 줬다는 걸 알았을 때, 도우는 진심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

한데, 또 손 벌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쯤 되니 정말 뻔뻔스러운 건 누구인지 헷갈린다. 무슨 배짱인지 자꾸만 사고를 치고 다니는 제 부모인지, 그럴 때마다 이안을 찾아와 울상 짓는 저인지. 솔직히 믿는 구석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은연중에 이안의 도움을 구하는 제 속내가 역하다. 딱 까놓고는 얘기 못 하고 빙빙 둘러 말하는 간교함도.

“……다행히 제가 먼저 알게 돼서. 나쁜 일은 면했어요. 정말 다행이죠…….”

다행이란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자꾸만 다행이라고 우격다짐하다 보니, 뒤늦게 전혀 다행스럽지 않다는 깨달음이 새록새록 찾아왔다. 자초지종을 전부 들은 이안은 바닥의 어느 한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다고, 제가 한 말임에도 도우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이안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었는지, 어느새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힘들었겠다.”

“…….”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이번에도 그가 도와줄 걸 알아서. 그렇게 위기를 넘겨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리 큰돈도 아니니까. 너무 그럴 것 없어. 그보다.”

“네.”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 없어?”

“…….”

순간 심장이 저 밑으로 수직 낙하 했다. 코에 까슬까슬하게 비벼졌던 이긴의 음모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목구멍 안쪽까지 가득 메웠던 살덩이의 단단한 감촉도. 이토록 생생한데도 도우는 부정했다. 머뭇머뭇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를 감싼 이 온기가 일시에 얼음 가시가 되어 전신을 관통하리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이안은 천진하게 웃었다. 티 없는 웃음에 도우는 죄인이 되었다. 정답을 알겠다. 정말 뻔뻔스러운 건 저다. 돈은 이안에게 받고, 다리는 이긴에게 벌리는.

“온 김에 채혈 좀 하고 가자. 약도 먹고.”

“네.”

도우는 순순히 약을 받아먹고 팔을 내밀었다. 채혈 후 레몬 사탕을 먹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오기까지, 도우의 얼굴은 죄책감에 온통 얼룩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안이 한번 여지를 줬음에도 그릇된 판단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다시 들어가 털어놓는 것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최선일까?’

한순간에 이안을 모두 잃는 것과, 끝까지 모르는 척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 어느 것이 더 끔찍한지 알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는 도우의 옆얼굴에 길게 그림자가 졌다.

“선수를 뺏겼네. 내가 먼저 말하려 했더니.”

이긴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최악의 상대를 만난 도우의 낯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여긴, 여긴 왜…….”

“왜긴 왜야. 볼일이 있어서 왔지. 내가 일개 연구원한테 그런 것까지 소상히 밝혀야 하나?”

신랄하게 비꼰 이긴이 의뭉스럽게 덧붙였다.

“무슨 볼일일 것 같은데?”

다분히 의도가 있는 도발이었으나,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도우는 패닉에 빠져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안, 안 돼요!”

“아직 얘기 안 했나? 왜.”

“안, 싫어요.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얘기하지 마…….”

겁에 질려서 오들오들 떠는 꼴이 어지간히 불쌍했지만, 이긴은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제 손안에 들어오나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뿐.

“그럼, 나랑 붙어먹게?”

“…….”

두려움에 질려 흔들리던 초점이 한순간 명료해졌다. 차오른 눈물에 금세 이지러졌지만.

네.

입술 모양으로 작게 읊조린 도우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기특하네.”

강아지를 쓰다듬듯 도우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긴이 연구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 제 것인데 조금이라도 이안의 눈길이 닿는 건 싫다.

“가봐.”

도우가 막 모퉁이를 돌자마자 이안이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이긴을 확인한 이안의 눈빛이 곱지 않게 돌변했다.

“뭐 하는 거야.”

“한 대 피우고 들어갈까 했지.”

이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담뱃갑을 손바닥에 대고 탁탁 두들겼다.

“건물 내 금연이야.”

“무슨 상관이야.”

태연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긴은 이안이 최대한 약 오를 말을 던졌다.

“어차피 다 내 건데.”

“…….”

예상대로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욕심 사나운 새끼를 세상에 다시없는 생불인 양 믿고 따르는 도우가 한심했다. 눈알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안경을 쓰고 있긴 했다. 아주 두꺼운 뿔테 안경. 도수가 없는 걸 보아 남장을 위한 눈속임용이겠지만.

“농담이지, 농담. 잘만 하면 네 게 될 수도 있고. 이번 주부터인가? 선보는 게?”

“됐고, 무슨 일이야.”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느물거리는 이긴을 마지못해 연구실로 들인 이안이 레몬 사탕과 차를 내밀었다. 둘 중 어느 것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이긴은 연구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주인만큼 따분한 연구실에 볼 거라곤 벽에 걸린 액자뿐이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이안처럼 촌스러운 문구다. ‘시작’에는 알파(A), ‘끝’에는 오메가(Ω) 기호까지 덧씌워져 있었다. 이긴은 액자를 턱짓하며 새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근사한 그림 하나 선물해 줄까.”

“필요 없어. 그건 그렇고 이젠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볼일인지. 마냥 말장난이나 할 시간은 없어서.”

딱딱하게 굴기는. 부러 비스듬히 소파에 상체를 기댄 이긴이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빨았다. 그동안 이안은 벽에 걸린 액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따분한 문구에도 이채가 감도는 눈빛에 역시 저놈은 정상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인공수정 클리닉 회원 명단 좀 줘.”

“클리닉은 비밀 유지 계약으로 돌아가고 있어.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그래? 시술 횟수랑 매출이 다르다는 보고가 있던데. 잘못하면 감사 나와. 그땐 싫어도 명단 공개해야 할걸.”

“그건…….”

잠시 고심하던 이안이 이내 이긴을 직시했다.

“어딘가 누락이 있었던 모양이지. 다시 검토해 보라고 지시할게.”

“그러든가.”

저렇게 눈을 똑바로 쳐다볼 땐 그만큼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증거지만, 이긴은 심드렁하게 넘겼다. 회사 전체적으로 보면 이안이 야심차게 운영하는 클리닉 따위는 하루아침에 망해도 아무 타격이 없을 정도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알아서 잘 굴러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렇게 찾아올 일 없이.

“그럼 일 보라고. 바쁘기로는 이 몸도 못지않아서.”

마지막으로 뼈 있는 말로 이안의 속을 긁고 일어선 이긴은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 7시. 전에 알려 준 주소로.」

이걸 받은 말간 낯이 어떻게 흐려질까 궁금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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