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도우는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나지막이 탄성을 뱉었다.
“아…….”
하필 날이 맑았다. 이런 날은 좀 흐려도 좋을 텐데. 아니야. 다 잊자. 죽어라 일만 해야지. 기계처럼 몸을 혹사할 거다. 머리를 굴릴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도록. 굳게 결심하고 쉴 틈 없이 움직이자 정말 머리가 비워지는 것도 같았다.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반이나 지나 있었다.
입맛은 없지만 그렇다고 점심을 건너뛰었다간 정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무얼 제대로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줄곧 공복이라는 점이었다. 연구원증을 들고 맥없이 일어났을 때였다. 이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장님?”
―도우야, 잠깐 시간 낼 수 있을까?
“네. 소장님 연구실로 가면 될까요?”
―그래.
“바로 가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궁금한 것보다 이안을 만난다는 사실에 설레는 게 더 컸다. 그냥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은 마음이 나아질 테니까.
‘나도 참 뻔뻔스럽구나.’
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긴과 한 침대에서 몸을 섞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뻔뻔스럽게 이안을 만나 위안받을 생각만 하고 있다니. 죄책감에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망설이는 이유는 또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옷. 어차피 몇 벌 없는 옷 돌려 입는 사정이지만 켕기는 게 있으니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너무 오래 지체했을까. 다시 한번 휴대전화가 울려, 제풀에 놀란 도우는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셨어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이안이 물끄러미 도우의 안색을 살폈다. 깊이 꿰뚫어 보는 눈빛에 도우는 전전긍긍했다. 혹시 이긴과 함께 있었던 걸 들킨 건 아닐까. 외박했다는 걸 알았다거나. 자꾸만 목을 가리고 싶었다. 키스 마크를 남기지 않은 건 확인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울혈 자국이 있을까 봐서.
그러나 이안이 살핀 건 그녀의 지저분한 속사정이 아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아…….”
파리해진 안색을 걱정하는 이안 앞에서 도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책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난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일까. 지난밤의 행위는 이렇게나 자상한 사람의 등에 비수를 꽂은 거나 다름없었다.
“죄송해요, 소장님.”
“그럴 거 없어. 집안에 그런 큰일이 있으면 힘든 게 당연하지.”
“그게…….”
할 말이 없어 도우는 입을 닫았다. 도우는 지금 이안을 배신한 벌을 받고 있었다. 더는 아무것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것. 상대를 속이고 있다는 가책이 입술에 빗장을 걸었다. 죄인처럼 푹 수그리고만 있는 도우를 이안이 자상하게 위로했다.
“통장 확인해 봐. 그거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야.”
“네? 소장님이 왜!”
화들짝 놀란 도우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봐주네.”
“…….”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는 이긴을 보고 있으면 이안이 떠올랐는데 이제 이안과 마주한 이 순간, 이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눈앞에 있는 저 얼굴을 한 남자와 어제 잤다. 짐승처럼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간밤 그녀를 할퀴고 지나간 쾌감이 생생하게 살아나 도우는 얼어붙었다.
“너무 놀랄 것 없어. 눈먼 돈이 찾아갔다고 생각해.”
“그런, 아니에요, 소장님. 받을 수 없어요. 정말, 이제는…….”
“또 이제는 직장인이다, 소리 하려고? 진짜 귀엽다니까.”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도움받은 건 사실이나, 도우의 ‘이제’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이안은 그녀에게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있다며 풋, 웃기만 했다.
“내 것 네 것 따지지 말자, 도우야. 네가 내 오메가인 이상 무의미해.”
“……네.”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만 신물이 올라오려 했다.
그 때문에 이안이 으레 그렇듯 내놓은 레몬 사탕을 먹지 못했다.
“속이, 안 좋아서…….”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네. 가서 좀 쉬어.”
도우는 고개를 얕게 저었다. 오래 붙잡아 둔 거 아니라고, 얼마든 붙잡아 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난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힘없이 나와서 통장의 잔액을 확인했다. 노름빚을 갚고도 남을 액수가 입금되어 있었다.
“아…….”
혼란스러운 기분에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나마도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지만.
‘출금, 해야겠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멍한 채로 주어진 일을 쳐내다 보니 어느덧 퇴근이었다. 둘째를 생각해서라도 집에 돈 봉투를 갖다줘야 하겠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집까지 갈 기운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몇 대나 보내며, 도우는 정류장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귀를 찢을 것처럼 경적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었을 테다. 반사적으로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퍼뜩 스치는 것이 있어 벌떡 일어났다. 눈이 아플 정도의 빛에도 외제차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챈 탓이었다.
“뭐 해, 안 타고.”
담배 연기와 함께 상체를 운전석 밖으로 슬쩍 기울인 이긴이 책망했다.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회사 앞인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건 그녀뿐인 듯했다. 이긴은 뒤에서 차가 빵빵거리거나 말거나 태연히 담배나 물고 있었으니까. 쏠리는 이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조수석에 올랐다.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한 차 안에서 도우가 불만을 토해 냈다.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요? 회사에선 아는 척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건 누가 정한 룰이야? 너나 실컷 지켜.”
“그래도, 그래도 들키면, ……손해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손해는 누가. 들키든 말든 그는 잃을 게 없었다. 그래도 도우는 알량한 몸뚱어리를 내세워 보았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피식 웃은 이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긴 적 없어. 여긴 회사 밖이고.”
순 억지였다. 회사 밖이어도 보는 눈이 얼마인데.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 싶어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어디 가는지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 하든 그의 마음대로 할 테니 그냥 끌려가는 게 속 편했다. 가능한 집에 늦게 들어가고픈 속셈도 있었고. 잠자코 앉아 있는 그녀를 곁눈질한 이긴이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용케 출근했네.”
“……!”
잊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허둥댔던 걸 떠올리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왜 깨우지 않았어요?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잖아요.”
호오, 과장되게 놀란 척한 이긴이 자기는 정말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비꼬았다.
“누가 들으면 내가 자장가라도 불러 준 줄 알겠어.”
“그런 말이 아니라! 됐어요. 아무튼, 앞으론 거기서 자는 일 없게 해주세요.”
“혼자 두고 가서 화났어?”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혼자 두고 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긴과 한 침대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정말이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제가 왜요. 어차피 몸만 섞는 사이인데. 먼저 가든지 말든지 알 게 뭐예요.”
최대한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보니 대꾸가 없었다. 질러 놓고 눈치 보는 자신이 싫지만 약자의 숙명이 그러려니 하며 옆자리를 살폈다. 사이드를 올린 이긴이 안전벨트를 풀며 눈짓했다.
“다 왔어, 내려.”
주차 중이라 그랬구나. 어쩐지 안심하며 내리고 나니 한정식집이었다. 미리 예약해 두었는지 자리에 앉고서 5분도 지나지 않아 한 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졌다.
“이 집, 괜찮게 해.”
“…….”
아무 말 않고 차려진 것들을 보고만 있자 이긴이 수저를 눈짓했다. 그러면서 익숙한 솜씨로 그녀 몫으로 놓인 돌솥의 밥을 퍼내고 온수를 부어 누룽지를 불렸다.
“숟가락질은 할 줄 알겠지.”
전에도 포크를 쓸 줄 몰라서 먹다 만 게 아니다. 한가하게 맛집이나 찾아다닐 사이가 아닌데, 왜 자꾸 불러내서 밥을 먹이는지. 할 말이 많아 보였는지 이긴이 혀를 짧게 차며 허락했다.
“말해.”
“왜 이러는 거예요?”
“뭐가.”
“몰라서 물어요? 이사님이랑 나, 같이 밥 먹을 이유 없어요.”
“없긴 뭐가 없어.”
“뭔데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들어나 보자 싶었다.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요구하면 언제든 다리를 벌릴 거니까. 그 점을 확실히 해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공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너 너무 말랐어. 살 좀 쪄.”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내 살은 내가 알아서…….”
“섹스할 때 느낌이 별로야. 뼈다귀로 처맞는 기분이라.”
“…….”
“이제 알았지. 그러니까 먹어.”
그게 식사 자리에서 할 소린가. 아무리 막힌 공간이라지만 댓살에 얇은 창호지를 입힌 문 하나만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그 너머엔 종업원들이 다니고 있을 텐데. 그가 딱히 주위를 의식해 목소리를 낮춘 것도 아니니 만약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그들의 얘기를 들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몹시 수치스러워졌다. 그냥 일어서서 나가 버리자. 손가방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을 때, 마치 탁자 밑을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이긴이 딱딱하게 명령했다.
“멈춰. 여기서 나가면 다음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난 이안한테 너랑 내 관계 다 얘기할 거고. 그다음은 알아서 생각해.”
움켜쥔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이안을 내세우면 도우는 언제나 무력해졌다. 더군다나 거액의 도움까지 받은 이 상황에.
‘밥만 퍼먹자, 밥만. 어차피 점심도 먹지 못했으니까. 배나 채우고 가자.’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래도 절대 그에게 장단 맞추진 않을 거라고, 나름대로 옹골지게 다짐했는데 그조차 얼마 가진 못했다.
“골고루 먹어. 꼼수는 안 통해.”
“사사건건…… 왜 사람을 통제하려고 해요?”
“밥만 퍼먹으면 알량한 자존심이 지켜지나? 그 새끼가 사주는 건 잘만 받아먹으면서. 왜, 공깃밥만 따로 계산하시게?”
말을 밉게 하는 것도 재주다. 이긴을 똑바로 노려보며, 도우는 보란 듯 숟가락을 크게 놀려 밥알을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떡갈비가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건 그다음이었다. 이미 감당 못 할 만큼 물고 있으니 이긴이 뭘 쑤셔 넣는대도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계속 먹여 줘?”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이상 어떻게 해도 이 남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마침내 깨닫고선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순순히 입안의 것을 씹자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이긴이 물었다.
“입맛엔 맞고?”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왠지 완패를 선언하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맛있었다. 고기는 분명 힘줄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인데 어째서 생크림처럼 살살 녹는지 알 수 없었다. 매일 먹는 쌀밥, 새로울 게 없는데 어쩜 이리 달고 찰진지. 잔뜩 주린 배에 먹을 게 들어오니 그야말로 회가 동했다.
한번 맛보고 나니 체면치레할 마음은 싹 사라졌다. 한 입 먹으나 두 입 먹으나 어차피 얻어먹은 몸.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는 도우를 보며 이긴도 천천히 제 몫을 비워 갔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건 쌍둥이의 공통점인 듯했다. 은근히 곁눈질하며 이긴이 식사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도우는 텅 빈 접시를 발견하고 혼자 고기반찬을 모두 해치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애야? 편식하게.”
어쩐지 다정하게 들리는 핀잔과 함께, 이긴이 그녀의 앞에 생선구이를 밀어 주었다.
“안 먹어요.”
“또 왜.”
“비려서.”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골고루 먹어야 쑥쑥 큰다, 몰라?”
그녀는 이미 스물이 한참 넘었다. 진작 닫혔을 성장판이 생선살 한 점에 열릴 리 없건만, 이긴은 기어이 바삭하게 구운 조기를 먹기 좋게 발라 그녀의 숟가락 위에 얹어 놓았다.
“먹어.”
도우는 잠자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기름지고 통통한 생선의 흰 살에선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충분히 배가 불렀음에도 식욕이 도는 맛이었다.
사실, 생선을 싫어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보다는 창피했다. 솜씨 좋게 가시 바르는 법을 모른다는 게. 젓가락질이 서툴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접할 기회가 적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흔한 고등어조림도 먹을 기회가 없었다.
입사 후에 이안을 비롯한 연구원 몇 명과 갔던 식당에서 생선구이가 반찬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엉망으로 파먹어 부스러기를 대거 생산해 빈축을 샀다.
“도우 씨는 생선을 왜 그렇게 지저분하게 먹어? 밥맛 떨어지게.”
“아, 네. 죄송, 죄송합니다…….”
그것까진 어떻게 넘기겠는데 그 자리에 이안도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폭격 맞은 것처럼 너저분한 그녀의 생선구이 접시와 대조적으로 그의 것은 깔끔하게 뼈와 가시가 모아져 있었다. 당시에는 못 본 척 넘어가 주었지만,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구성으로 차려진 한정식집에 함께 갔을 때 이안은 생선구이 접시를 멀리 치워 두었다.
“굳이 안 먹어도 돼.”
“네…….”
이안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무척 창피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때도 조기구이였는데.’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얌전히 누워 있던 조기 두 마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잘 먹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눈앞의 조기 두 마리는 어느새 대가리와 뼈만 나란히 남아 있었다. 새삼 민망해졌다. 싫다고 버틸 땐 언제고 그가 발라 주는 조기 살을 얹어서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먹은 참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나도 모처럼 제대로 된 식사 했으니까 그렇게 당장이라도 목매달고 싶은 표정 지을 거 없어.”
“…….”
그러니까 당신이 왜. 저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태연하게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이안도 아니면서 밥을 사주고, 누가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생색이나 내고.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이긴이 곁에 난 창을 열었다. 잘 정돈된 화단에 어우러진 조명이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뿌옇게 가린 건 이긴이 내쉰 담배 연기였다. 분명히 입구에서 금연 표시를 본 것 같은데, 어느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VIP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VIP면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야? 갑자기 심사가 뒤틀렸다. 엉뚱하게 굴절된 분노였다. 그걸 알면서도 건수라도 잡은 것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여기 금연이에요.”
“벌금 물어 주지, 뭐. 까짓것.”
회심의 반격에 이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작 그 얘기 하려고 눈에 힘을 주고 있었냐며 코웃음이나 쳤을 뿐이다. 보란 듯이 깊이 들이마셨다가 한층 뿌연 연기를 뱉어 내면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뭐가요.”
“모를 줄 알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잖아, 너.”
“소장님이 돈 주셨어요.”
왜 이러는 걸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구질구질한 개인사가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구제불능의 가난, 과분하기만 한 이안의 호의를 두서없이 늘어놓으며 다시 한번 한심한 자신을 뼈에 새겼다. 무력하게 끌려다니기나 하고.
‘이게 다…….’
털어놓은 자책들은 원망으로 귀결됐다. 도우는 눈앞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도우가 주절주절 떠드는 동안 줄곧 말없이 듣고 있다가 새 담배를 꺼내 든 이긴이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돈은 그 새끼한테 받고 씹질은 나한테 공짜로 해줘서 미안해?”
“뭐, 라고요?”
내포한 의미보다 상스러운 표현에 충격받았다.
“사람이 왜 그렇게 저속해요? 어떻게 그런 말을 쓰냐고요! 소장님은, 소장님은……!”
“그래서 네 소장님이 통장에 얼마나 꽂아 줬는데.”
액수를 말하자 이긴은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씨발, 껌값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부자라고 거지한테 돈 뿌리는 건 아니잖아요! 저한텐 정말 큰 도움이에요.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구요!”
“알겠어요, 거지야.”
“…….”
내가 미쳤지. 도우는 입을 딱 다물었다. 한순간이나마 저 인간한테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미웠다. 절반도 넘게 남은 담배를 대강 비벼 끈 이긴이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만 가지.”
“어디……로요?”
“몰라서 물어.”
“오늘은 안 돼요. 말씀드린 것처럼 집에 가봐야 하고…….”
“네가 조건 붙일 주제야?”
“진짜예요. 그리고, 좀…….”
“뭐.”
“……많이 아파요.”
거기가요. 차마 직접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새침하게 덧붙인 작은 중얼거림에 이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못마땅한 속내를 감추지 않으며 맡겨 놓은 것처럼 구는 건 여전했다.
“기껏 먹여 놨더니.”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도우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주말에, 하면 되잖아요.”
“그럴까.”
비로소 이긴의 낯이 완전히 풀렸다.
“주말 내내 뒹굴면 되겠네.”
아뿔싸. 도우는 뒤늦게 후회했다. 당장 모면할 생각만 하고 주말이 이틀이나 된다는 건 깜박했다. 재빨리 주말 당직 일정을 떠올려 봤지만 제 차례는 한참 멀었다.
“금요일 밤에 와. 어디로 튈 생각 하지 말고.”
손쓸 새도 없이 하룻밤이 더 늘어났다. 도우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정말 그렇게 말랐나?
도우는 평생 해본 적 없던 고민을 했다. 입안에서는 달콤 짭짤한 계란 초밥이 부드럽게 뭉개지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박을 때마다 뼈로 맞는 것 같다더니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몇 번 씹지 않아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근사한 초밥을 앞에 놓고도 이긴은 손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의 젓가락이 자주 닿는 것을 골라 옮겨 준 게 전부였다.
저만 먹는 게 부담스럽다. 제가 먹는 걸 쳐다보기만 하는 것도. 도우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안 드세요?”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말은 생략했다. 굳이 맛있게 먹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한가하게 음식 맛이나 평가할 사이도 아니거니와, 식사를 마친 후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도우의 권유에 이긴은 금가루가 얹힌 회 한 점을 집었다. 생살 씹는 소리가 육감적으로 울려, 그만 낯이 뜨거워졌다. 자꾸만, 어떤 장면이 연상되었다. 이를테면 그녀의 구멍을 들락거리는 손가락이나, 더 굵직한 무언가.
‘미쳤나 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성적인 방향으로 의식이 흐르는 것 같다고 합리화하면서도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급하게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입에 넣다가 그만 입 안쪽 살을 깨물고 말았다.
“읏……!”
입안의 것을 삼킨 이긴이 술로 입가심하며 살점이 떨어지는 아픔에 눈물까지 고인 도우를 놀렸다.
“유혹하는 거라면 어설픈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대꾸 없이 우동 국물만 마시는 도우 앞으로 이긴이 계란 초밥을 모두 밀어 놓았다.
“더 놀리지 않을 테니까 마저 다 먹어. 회는 못 먹나?”
“그냥…….”
못 먹는다기보다는 생소한 음식이었다. 어릴 때는 접할 기회가 없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안이 몇 번 사준 적은 있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떨려서 뭐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간장 맛인지 초장 맛인지. 초밥 중에서도 계란 초밥이 제일 좋은 이유였다. 확실히 아는 맛이 제일 맛있는 법이니까.
도우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별로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이안이 박하게 구는 모양이지.”
“아니요.”
왜 얘기가 그쪽으로 흐르는지 모르지만, 도우는 반사적으로 발끈했다.
“소장님께서 자주 사주셨어요. 그냥, 제가 익숙하지 않아서 안 먹는 것뿐이에요.”
“그러시겠지.”
“진짜예요. 부모님보다 더…….”
이안이 부모보다 낫다는 얘기를 하려하자 갑자기 두통이 일어 잠시 입술을 깨문 도우가 힘겹게 말을 맺었다.
“……부모님보다 더 잘해 주세요. 소장님이 박하니 뭐니,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요.”
“뭐, 어미 새야? 넌 아기 새고?”
아기 새라니 그건 너무 귀여웠다. 어울리지 않게. 반면 이안에게는 어미 새라는 호칭이 잘 어울렸다. 안온한 둥지에 새끼를 거두어 먹이는 어미 새.
아니.
도우에게 이안은 어미 새 이상이었다. 새는 다 자란 새끼한테 먹이를 물어다 주진 않으니까. 연구소에 그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줬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그녀의 가족까지 도우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이안에게 은혜를 갚는 건 불가능하겠지. 보은은커녕 지금도 이렇게 배신 중이니까.
이안을 향한 도우의 절대적인 믿음이 이긴에게는 그저 한심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너 그 새끼 약혼 상대 있는 건 알고 좋아해?”
“……알아요.”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태어나기 전부터 정혼한 사이였다는데. 문제는 쌍둥이가 나올 줄 몰랐다는 거지. 선택권은 상대 여성에게 넘어갔는데 도우는 그녀가 결국에는 이안을 택할 거라고 확신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라도 그럴 거다. 제정신이라면 썩어 버린 인성, 겉모습만 멀쩡한 쓰레기를 고를 리 없을 테니까.
“막장이 따로 없네.”
누가 할 소릴. 이렇게 뻔뻔스럽기도 힘들다 싶다. 따지고 보면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니 그도 약혼 상대 후보에 올라 있는 거나 마찬가지면서.
“무슨 상관이에요? 좋아하는 마음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고백할 생각도 없고요. 이루어질 거란 생각, 꿈에도 한 적 없으니까.”
“웃기시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이긴이 피식 웃었다.
“걔가 너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고?”
“왜 아니겠어요? 좋아하니까 도와주고, 또…….”
“그런 거 말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은 그런 거.”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면의 바다 저 깊은 바닥 속에 은밀하게 묻어 두고 있던 속마음이 갑자기 수면 위로 훅 떠올려진 것 같았다. 품어선 안 될 불경한 마음이었다.
‘나 따위가 어떻게 감히…….’
이안에게 그런 애정을 바랄 수 있단 말인지.
“아니에요. 소장님하고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아니긴.”
이긴이 비웃었다.
“네가 내 좆으로 갈 때마다 그 새끼 떠올린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
정곡을 찔렸다. 이안이랑 한 거라고 생각하니 견딜 만도 해서였다. 어쨌거나 겉껍데기는 똑같으니까.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자 이긴이 허, 하고 혀를 찼다.
“이게 사람을 살아 있는 딜도로 쓰고.”
“그게 아니라…….”
“아니긴.”
이긴의 말이 맞았다. 딜도로 썼다. 그에게 반박할 수 없어서 도우는 입을 다물었다. 억울한 감도 있었지만, 느낀 것도 사실이니까.
“이안이 알면 좋아하겠네.”
“…….”
도우는 새로운 죄책감에 휩싸였다. 이안의 눈을 피해 이긴에게 몸을 대주면서, 상대가 이안이라고 멋대로 상상하며 가버렸다. 이것만으로도 이안에게 죄스러워 죽을 지경인데 이긴은 한술 더 떴다.
“이안한테 자자고 해보지그래.”
“제가 어떻게…….”
“어차피 나한테 한번 뚫린 몸, 뭐 어때. 원풀이하는 거지.”
왜 이렇게 말을 밉게 할까. 꼭 노골적으로 사람 속을 긁어 놔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그에겐 별거 아닌 하룻밤이었을지 몰라도 도우에겐 처음이었다. 몸도 마음도 진창 망가져 버린.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안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됐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소장님 얘기 할 이유 없어요.”
당신? 이것 보라는 듯 중얼거린 이긴이 새로이 잔을 채웠다. 도우는 제게도 술이 있었다면, 간절히 바랐다. 꼭지가 돌도록 취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보내고 나면 월요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맨 정신으로 그를 받고 또 받아 내야 할 시간이 벌써부터 까마득하다. 도우는 일부러 젓가락을 느릿느릿 놀렸다.
“진짜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무슨 근거로 이안이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이거 아주 바보 아냐?
대놓고 비난하는데도 도우는 지지 않고 꿋꿋이 받아쳤다.
“대학도 보내 주셨고.”
“네 등록금 다 합쳐도 그 녀석 한 달 카드값도 안 돼.”
“그것 말고도 꾸준히 지원해 주셨어요. 우리 집 사정 어려운 거 다 알아서.”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리고, 저 무척 아껴 주세요.”
“퍽이나.”
자꾸 어깃장을 놓자 도우의 입술이 새처럼 뾰족해졌다. 도우가 좀처럼 입 열 생각을 않자 이긴이 자신의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발정열 왔을 때도, 다른 알파들처럼 무책임하게 굴지 않았어요.”
이제야 흥미롭다는 듯 이긴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껏 혼자서만 간직해 온 이야기였기에, 도우는 몇 번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억제제 먹여 주면서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곁에서 지켜 주셨거든요.”
그냥 평범한 알파였다면 모른 척했거나, 옳다구나 하고 바지를 내리며 덤벼들었을 테다.
“염병, 그 새끼 안 서나?”
봐라.
즉각 여느 알파와 다를 바 없는 인물임을 스스로 증명한 이긴에게 도우가 한심한 눈빛을 흘려보냈다.
“……아무튼 그렇다고요.”
“눈물겹네.”
그녀가 식사를 마친 걸 확인하고 담뱃갑을 집어 든 이긴이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 안 해봤어?”
“다른 가능성이라니요?”
“실은 너 따위 오메가한텐 손끝 하나 닿고 싶지 않았다거나.”
“말도 안 돼요!”
“이건 신뢰가 아니고 신봉 수준이네. 종교가 따로 없지, 아주.”
“그런…… 그럼 그냥 발정열 같은 거, 모른 척 지나쳐도 되는 거였잖아요.”
“그건 나도 궁금하네.”
도대체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놈이니까.
잇새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긴이 뇌까렸다. 다른 건 그럭저럭 넘어가겠는데 한 가지 미심쩍은 게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성별을 남자로 속여 입사시킨 것. 남성 오메가라고 해서 특별히 알파들의 표적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남자인 척하도록 시킨 저의가 궁금했다. 그러자 갑자기 칭칭 감은 붕대가 보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붕대 속에 꽁꽁 숨겨진 것이.
“식사 끝났으면 벗어.”
“저, 씻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언제까지고 이안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또 이렇게 갑자기.
“옷 입고 씻게?”
결국 제 앞에서 벗으라는 소리였다. 도우는 덤덤하게 옷을 벗어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손끝이 무감각했다. 이대로 뛰쳐나가고 싶어 무릎이 움찔거렸다. 그래도 붕대를 푸는 속도는 꾸준했다. 몸통의 부피를 절반은 키울 정도로 감은 붕대를 보고 이긴이 이기죽거렸다.
“붕대값도 만만찮겠는데. 네 소장님이 붕대값은 대주시나?”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마지막 실오라기마저 떨어졌을 때 도우는 잽싸게 욕실로 도망쳤다. 그의 말대로 했으니 책잡힐 건 없겠지 하며.
“순진하시긴.”
쪼르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남은 담배를 태운 이긴은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랐다. 아까부터 목이 바짝 말라선 음식 맛도 모를 지경이었다. 술조차 매끄럽게 넘기질 못했으니, 이제 그 원인을 파헤쳐 볼 차례였다.
“뭐, 예요?”
성큼성큼 들어온 이긴을 발견한 도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허겁지겁 양팔로 가슴을 가리더니 뒤늦게 한쪽 팔을 내려 가랑이 사이에 댔다. 눈이 마주치자 홱 돌아서기까지. 이런 점이 사람을 동하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물줄기 속 희고 가녀린 몸을 훑으며 이긴이 질 나쁘게 뱉었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금방 나갈 거였, 아……!”
돌아선 그녀의 등 가운데를 꾹 밀자 넘어지지 않으려 도우는 반사적으로 타일을 짚었다. 자연스레 훤히 뒤를 노출한 꼴이 됐다.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젖어 있는 타일 벽이 미끄러워 우스꽝스럽게 허우적거렸을 뿐이다. 몸을 세우지 못하도록 앞으로 숙여진 허리를 꾹 누른 이긴이 낮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그대로 있어. 착하지.”
어딘지 모르게 음험하게 들린다 생각한 순간, 도우는 흠칫 몸을 떨었다. 입구를 꾹꾹 찌르는 그건, 분명 코였다. 높은 콧대가 갈라진 틈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무슨, 아으, 응……!”
예고 없이 침입한 물컹한 혀가 검질기게 내벽에 들러붙었다. 음미하듯 으음, 하고 울리는 소리에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움츠렸다. 아직 아래는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치부를 고스란히 먹혔단 생각에 너무나도 창피했다.
“힘 빼.”
별안간 좁아진 통로에 이긴이 으르렁거렸다. 몽실몽실한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덕분에 긴장이 더해졌다.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데 이안은 가차 없이 벌을 내렸다.
짝!
물기를 머금은 엉덩이에서 제법 차진 소리가 울렸다. 아픈 것보다 소리에 놀랐다.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맞아 본 적이 없었기에 수치심은 배가 됐다. 어릴 적에도, 심지어 부모에게도. 무엇보다 괴로운 건 그럼에도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야 하는 제 모습이었다.
어떻게 해야 힘이 풀리는지도 모르면서 도우는 어정쩡하게 무릎을 굽혔다. 입구에 박혀 있던 축축한 살덩이가 쑤욱 파고들었다. 좁아터진 내벽을 따라 들어오는 움직임이 은근했다.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안을 점령하곤 달게 핥는다. 즙 같은 게 나올 리 없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아…….”
다시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단단히 세워선 강하게 긁어내리는 혀끝의 갈구에 보다 은밀한 안쪽에서 무언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반응하는 제 몸이 낯설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찔움찔 수축하는 하복부에 겁이 덜컥 날 정도로.
줄줄 흘려 대는 아래에 입을 맞추고 꿀을 빨 듯 샅샅이 안을 훑어 낸 이긴이 입맛을 다시며 젖어 드는 음부를 구경했다.
“여기 엄청 단데, 알아?”
“몰라요,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노골적이고 이렇게 생소한 행위일 줄 미처 몰랐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냥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고 해달란 대로 성기를 물고 고개를 움직이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니, 미친 게 틀림없다.
“아, 응!”
혼란에 빠져 끙끙 신음만 흘리는 도우의 안에 손가락 두 개가 불쑥 침입했다. 그러곤 안을 정성스레 휘저었다.
“그럼,”
“아, 아읏, 응, 하아…….”
“너도 한번 맛봐 봐.”
손가락이 빠져나가나 싶더니 길고 굵다란 것이 예고 없이 쑤셔 박혔다. 입술을 벌리고 두 손가락이 처박힌 것과 동시였다. 위고 아래고 여지없이 휘둘렸다. 혀의 중앙을 지그시 누르는 손가락 때문에 입가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수습하려 억지로 침을 삼키다 보니 손가락이 목구멍까지 파고들어 공갈 젖꼭지를 물려 놓은 것처럼 쪽쪽 빠는 소리가 났다.
민망해하는 도우의 반응에 이긴이 쿡쿡 웃으며 허리를 꾹꾹 밀어 넣었다. 단맛이 난다고 했던 건 핑계였다. 어느 구멍이든 제 것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를 그렇게나마 달랜 것뿐. 결과적으론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물려 놓은 건 뭐든 놓치지 않는 근성이 있다고나 할까.
“하으읍…….”
신음조차 막혀서, 끊임없이 안을 가르는 느낌에 도우는 정신없이 흐느꼈다. 너무, 정말이지 너무 깊었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받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뒤꿈치를 들었다. 장신인 그의 키에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안에 담긴 그의 것을 바짝 조이는 셈이 되고 말았다.
“끊어 먹겠는데.”
짓궂게 중얼거렸지만 더는 희롱할 여유가 없었다. 꽉꽉 물어 대며 졸라 대는데 넘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한 발 가볍게 빼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심한 즉시 혀를 지분거리던 손을 빼곤 가느다란 두 손목을 뒤로 그러모아 잡았다. 틀어쥔 양팔을 고삐 삼아 말을 몰듯 마구 내달렸다.
“아, 아아! 흐, 깊어요, 깊, 아, 응!”
오메가들은 원래 신음도 예쁘게 흘리나. 아님 제게 잡힌 이 오메가가 유독 그런 걸까. 앙알대다가도 끙끙 앓아 대는 걸 듣고 있노라면 참을 수 없이 아래가 불끈거렸다. 달래 주기는커녕 아예 극으로 몰아붙여 펑펑 울게 만들고 싶다는 비뚤어진 욕구가 치솟아, 이긴은 당장에 페로몬을 풀어냈다. 급격하게 고조되는 쾌감에 도우가 한층 애 닳는 신음을 흘려댔다.
“흑, 흐으윽, 읏, 으응! 흑…….”
“후우…….”
마침내 제 뜻대로 도우를 울리는 데 성공한 이긴이 아래를 둥글게 굴렸다. 비좁은 안이 제 모양대로 짓눌리는 느낌이 산뜻하다. 힘줄이 도드라진 부위가 내벽을 긁으면 몸서리치면서 잔뜩 흐느끼는 꼴도 볼만하고. 문득 눈물로 어룽진 얼굴이 궁금해졌다. 발긋하게 물든 젖은 눈가를 쪽 빨아 당기면 제게도 붉은 물이 들 것도 같아서, 이긴은 사형수처럼 축 늘어진 도우의 고개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음? 나 봐야지.”
“읏……!”
미묘하게 깊어진 체위에 짧게 신음을 흘리던 도우의 한쪽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긴이, 제 눈알을 빨고 있었다. 못하도록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하려 하자 턱을 으스러뜨릴 듯 양 뺨을 강하게 쥐었다. 고통에 새로이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눈꺼풀에 입술을 붙이고 그것들을 남김없이 핥아 낸 이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물은 짜네.”
“…….”
도우는 진심으로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제 몸에서 흐른 음액이 달다고 할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 눈, 나한테 반했나?”
이긴의 지적에 도우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반했다니? 제가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기에? 어떤 눈이었건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그런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완강히 고개를 젓는 도우에게 보란 듯 이긴이 짓쳐들었다. 한층 집요해진 움직임에 내벽이 발끈거렸다.
“아, 응!”
“아니긴. 구멍이 벌벌 떨릴 정도로 좋은가 본데.”
사뭇 달라진 제 안쪽의 반응을, 도우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꾸하지 못하고 맥없이 신음만 흘려 댔다.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자세가 무너졌다. 분명 벽을 짚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주한 건 수챗구멍이었다. 엉덩이만 높게 쳐든 채, 굴욕감을 느낄 새도 없이 쾌감에 몸을 떨었다.
“흐, 아닌, 아응, 으응, 하, 아, 아아아, 아!”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쏠린다 싶더니 별안간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차곡차곡 쌓인 자극이 일시에 터져선 온몸을 휘감았다. 파들파들 떨다가 축 늘어진 도우를 추어올리며 이긴이 몇 번 더 아래를 놀렸다.
“이러면 쓰나. 잘 받아먹어야지.”
이긴이 채 여물어지지 않은 구멍으로 비어져 나오는 희부연 정액을 살뜰하게 밀어 넣는 동안 도우는 멍하니 몸을 내맡겼다. 매번 절정으로 치닫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관계가 이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물며 억지로 응하는 제 입장에서…….
이건 다 제가 오메가인 탓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결론을 내는 건 쉽다. 마음과 다르게 반응하는 몸과 그런 태생을 저주하는 건 여전히 제 몫인 게 괴로울 뿐.
“앗, 차거!”
불시에 끼얹어진 냉수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이긴이 다시 한번 물 뿌릴 준비를 하며 심술궂게 웃고 있었다.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거야.”
마냥 장난스럽지만은 않은 웃음이었다. 다소 진지한 표정에 터무니없게도 이안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안을 떠올리자 죄책감에 흥분으로 뜨거워졌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멋대로 느끼기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절대 반응하지 않을 거야.
몸을 열고 흥분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반응 정도는 오롯이 제게 달려 있다고, 도우는 생각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휩쓸렸어도 이제는 그러면 안 되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교성을 내지르고, 잔뜩 흥분해선 절정을 이기지 못해 기절이나 해버리는 건 너무 한심하다. 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시는 형편없게 굴지 말아야지, 혀를 끊어버려서라도 소리 내지 말아야지, 석상처럼 꼼짝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거듭했다.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챈 이긴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잘 나가다 왜 또 어그러지는 건데.”
잘 나가는 게 뭔데. 당신 뜻대로 내가 헐떡거리는 게 잘 나가는 거야? 아님 페로몬에 반응해서 억지로 절정에 오르는 거? 도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집스레 버텼다. 이긴에게 도우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재밌게도 살아 숨 쉬는 인형.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건 인형이 아니다. 제 생각을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도우는 무표정하게 이긴을 응시했다. 이렇게 같이 샤워하는 것도 꼭 연인이 하는 행동 같아 싫었지만 그냥 입 다물기로 했다. 이러지 말라고 해봤자 어차피 무의미한 외침에 그칠 게 뻔하니까.
연인이라니.
처음부터 이긴은 그런 생각 따위 없었을 거다. 벗은 몸을 봤으니 몸이 동했을 거고 아무 데서고 욕구를 풀 마음에 따라 들어온 것뿐이다. 그녀가 씻는 그 잠깐도 참지 못해서.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눈앞의 남자가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하필 겉껍데기가 이안과 같아서 치가 떨렸다.
후.
굳어있는 도우를 보며 이긴이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이 오메가는 얼굴이 도화지 같다. 뭘 생각하는지 고대로 그려지니까.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어쨌든 짜증이 치밀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이긴은 담배를 밖에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씨발.”
혼잣말에도 흠칫 떠는 주제에 사람을 그딴 눈으로 봐.
“아주 내가 병신인 줄 알지.”
“그런 거, 아니에요.”
“까고 있네.”
“…….”
고작 몇 마디로 꼬리 내릴 거면서. 얼어붙어선 미동도 못하는 도우를 향해 픽, 가소로움에 입술을 비튼 이긴이 수건을 던졌다. 반항기 가득한 치뜬 눈은 어디 가고 가만히 받아 들고 머리의 물기를 닦는다. 가늘게 내리깐 눈꺼풀마저 심기에 거슬렸다. 침대에 얌전히 올라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감은 모양새를 보니 더더욱.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척일 뿐, 끝까지 불복하려는 의지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자세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스울 정도로 수동적인 저항이었지만 이긴의 성질을 긁기에는 충분했다.
“일어나.”
매캐한 담배 연기에 인상을 찌푸린 도우가 멍하니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 채, 너는 떠들어라, 나는 한 귀로 흘릴 테니. 뭐 그런 심산이었다. 이조차 훤히 읽히는 속내여서 이긴은 쉽게 도우를 무너뜨릴 수를 꺼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웃겨서.”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이긴이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방금 전에 도우가 누워 있던 자리였다.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 됐어. 실컷 봉사나 하고.”
매번 절정에 올라 혼자 가버리는 그녀를 꼬집는 말에 도우는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당신이 끌어낸 것 아니냐고 반박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반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변명거리를 마련해 낸 자신이 싫다.
“날 만족시켜야 하는 건 너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벌써 몇 번째인지. 앵무새처럼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이긴은 조금 지겨워졌다. 숨도 못 쉬게 찍어 눌러야 위아래 분간을 제대로 하려나.
“알아들었으면 올라와. 처음부터 다 네 스스로 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그냥 세우고 박고 흔들고 싸고. 그렇게 차근차근 하면 될 테니까. 별거 아니다, 이것 또한 지나갈 일이다,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도우의 팔다리는 힘없이 하느작거렸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쪽 다리를 길게 뻗은 이긴의 옆으로 돌아가 성기의 끝을 입에 머금을 때도, 현실 감각이 없었다.
“어디 오메가답게 굴어 보라고.”
머리를 비우게 만드는 요구에 도우는 이상하게 침착해졌다. 이긴이 저를 짐승 취급 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해방감을 안겼다. 그래, 짐승. 그냥 본능적인 행위를 할 뿐이라고.
“으음.”
귀두 전체를 입술로 감싸자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세심한 성격이 꼼꼼한 혀 놀림에 그대로 드러났다. 성기 아래쪽의 힘줄을 길게 긁어 올리곤 귀두 둘레를 따라 둥글게 핥아 내는 게. 한 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샅샅이 빨아 당기는 입술이 마찰로 금세 붉게 물들었다.
“꽤 잘하는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곤 아래로 손을 내린 이긴이 구멍 근처에서 노닐었다. 벌써 입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야들야들한 둔덕은 아무리 주물러도 질리질 않는다. 음순을 벌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예쁘게 발름거린다. 쯧, 이긴은 혀를 찼다. 이렇게 예민한 몸을 갖고선.
손가락 두 개를 한꺼번에 쑤셔 넣어 주니 기다렸다는 듯이 너끈히 받아먹는다.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굽혀 샘을 퍼냈다. 보다 입구에 가까운 쪽, 우묵하게 팬 지점을 찔러 주는 걸 좋아한다는 건 진작 알아챘다.
“하음, 음…….”
주륵, 뭐가 고여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음액이 흘러내렸다. 잠시 위아래로 움직이던 도우의 고개가 멈췄다. 곱게 감겨 있던 눈이 찌푸려졌다. 당황한 기색이 여실했다. 보나 마나 뻔했다. 제풀에 놀라 자책하고 있겠지.
그게 네 본질인 걸 왜 몰라.
이긴은 도우의 뒤통수를 잡아채 그녀가 머금고 있던 성기를 뽑아냈다. 이미 흉흉하게 서 있는 걸 미적거리고 빨고 있는 목적이란 시간 벌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니. 물론 이대로 입안에 사정하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이겠지만. 그럼 안달을 내고 있는 밑구멍한테 미안하지 않나.
“뭐 해? 벌려.”
이긴은 고작 좆을 세운 걸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도우를 재촉했다. 싫으면 나가라는 말도 천연스레 덧붙였다. 이안까지 들먹거리면 더 효과가 좋았다.
“하면 되잖아요. 할게요, 해요.”
그가 원한 반응이었으나 탐탁지 않았다. 이안을 입에 올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 뭐가 문제지, 되돌아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이유를 끝까지 캐는 대신 이긴은 애꿎은 도우를 몰아세웠다. 맨 정신으로 오롯이 저를 받아내도록 페로몬도 풀지 않을 작정이었으나, 마음을 바꿨다. 이러나저러나 그를 받아먹는 건 똑같을 텐데, 좀 더 제 처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지 않겠나.
“더 공손하게 부탁해야지.”
한층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도우의 정신이 멍해졌다. 이게 아닌데, 몸에 불씨가 던져진 듯했다. 갈비뼈 안쪽의 내장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에 도우는 도리 없이 허물어졌다.
“넣어, 넣어…… 주세요.”
혀끝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그에게 반응하지 않기 위해 짓뭉개지도록 깨문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그럼에도 행동만은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했다. 똑바로 드러누워 이긴이 박기 편하도록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세워 놓았다. 그는 그저 조준만 하면 되도록. 하나 그것으로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구멍, 잘 보여 줘야지.”
“…….”
손가락을 내려 집게와 중지를 갈라진 틈에 댔다. 미끌미끌한 살갗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대감이 일어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절로 힘이 들어간 손가락을 좌우로 늘리자 질척질척 젖은 음순이 벌어지면서 쩍, 야한 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뭉개졌다. 보짓물이 줄줄 흐르는 구멍을 고스란히 내보인 채 좆을 구걸하는, 그게 저였다.
“이제 넣어, 주세요.”
“뭘.”
“……그거요.”
“잘 알아듣게 말해. 좆 박아 주세요, 음? 이렇게.”
“좆, ……박아, 주세요.”
이만하면 되었겠지 했는데 이긴은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흥이 식었다는 투로 도우의 애원을 튕겼다.
“귀찮은데.”
말과 달리 아래는 터질 듯 팽팽했다. 아까부터 눈깔이 돌아 있었는데 이만큼 참은 스스로가 용하다. 이긴은 한계를 느끼며 바닥에 고인 인내심을 긁어모았다.
“네가 직접 흔들어.”
머뭇머뭇 무릎을 세운 채 그 위로 올라탄 도우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내렸다. 막 선단에 축축한 음순이 닿았을 때, 이긴이 다시 명령했다.
“아니. 개처럼 엎드려. 뒤로 돌아서.”
복종시키려는 거구나. 어렵지 않게 읽힌 의도를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도우는 천천히 뒤돌아 그의 다리 사이에 네발로 엎드려 기는 자세를 취했다. 이 순간에도 곧 성기를 품을 생각에 들떠 뻐끔거리는 입구가 절망스럽다. 페로몬에 감응한 몸은 한껏 고양되어 수치심 따윈 잊은 것처럼 천박하게 굴었다.
페로몬에 미쳐 돌아가는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사고도 비정상적으로 흘렀다. 도우는 입술을 달싹이며 애를 끓였다.
‘어서…….’
그의 것을 담고 싶다. 숨이 턱 막히도록 드세게 처박곤 안이 흐무러지도록 마구 짓쑤셔 주기를. 달아오른 내부를 저 홀로 어쩌지 못하자 구멍이 발름발름 안쓰럽게 여닫히며 움직였다. 도우는 제 가랑이 사이에 드리워진 기둥의 그림자를 가늠해 엉덩이를 뒤로 빼었다. 어느 순간 뭉툭한 것이 입구에 닿았다.
묵직한 중량감에 두려움이 선연해졌다. 흥분을 동반한 두려움이었다. 뒤가 보이지 않는 불안에 긴장이 배가 되었다. 바르게 누워서 받아도 버거운 그의 것을, 이렇게 깊이 파고드는 자세로 스스로 품는 건 너무나도 괴롭다. 괴로우면서도 황홀하여 더욱 고통스럽게 허덕였다.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은 언제고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럼에도 그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쑤셔 넣기 위해 안달하는 자신이 낯설어서 끝내 느껴 울었다.
“흐, 읏, 아아…….”
“엄살 피우지 마.”
겨우 한 마디쯤 물어 놓고 그것도 다 머금지를 못해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딸려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사라지는 빨긋한 속살에 이긴의 눈빛이 잔인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엎어 놓고 쑤셔 박고 싶은 욕구를 반영하듯 바짝 고개를 치켜든 남근이 멋대로 불끈거렸다. 울퉁불퉁 일어선 힘줄이 뱀처럼 꾸물대며 더 깊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흑, 더는, 못 하겠…… 학!”
절반쯤 삼켜 놓고 도우가 고개를 저었다. 가타부타 대꾸 없이 가느다란 허리를 일시에 잡아 내렸다. 뿌리 끝까지 관통하자 거대한 창살에 꿰뚫린 것처럼 파드득 떨던 도우가 꼼짝도 못 하고 숨만 탁탁 뱉었다. 목 끝까지 치받은 충격에 어찌할 바를 몰랐건만, 이긴은 봐주지 않고 채근했다.
“움직여.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야 하나?”
천천히, 도우가 허리를 튕겼다. 어설픈 움직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얼마 이어지지도 못했다. 겨우 뭉그적거리는 게 전부였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보드레한 엉덩이에 엉킨 실 같은 생채기를 냈다. 그마저도 쾌감을 부추기는 자극이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치골에 대고 둔부를 비벼대자 살갗이 점점 발긋하게 물들었다. 꽃 떨어진 자리가 붉게 익은 백도처럼 말캉한 엉덩이를 쥐고 이긴이 상체를 세웠다.
갑작스러운 자세 변화에 중심을 못 잡고 퍽, 엎어진 도우의 얼굴이 시트에 묻혔다. 턱, 턱, 허리를 놀리면서 이긴이 무심히 요구했다.
“오늘은 얼굴 보기가 힘드네. 어디, 반반한 낯짝 좀 보여 줘봐.”
간신히, 도우가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바라봤다. 물기 어린 동공에 쾌감이 서서히 덧씌워지고 있었다. 정복욕을 부추기는 낯에 이긴은 조금 아쉬워졌다. 이럴 때 휘어잡을 머리카락이 있으면 좋을 텐데. 고개를 잔뜩 젖혀 놓고 허리를 짓쳐 올릴 때마다 야릇하게 물드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이안을 향해 짜증 섞인 욕설을 뱉었다. 제게 한 말도 아닌데 놀란 도우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끙끙거리면서 우는 게 영락없는 강아지다. 원래도 개 같기는 했다. 이안의 충견처럼 구는 꼴이. 하지만 앞으로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제 그녀의 주인은 저니까.
강아지에게 새 주인을 어떻게 인식시켜야 할까. 궁리하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짖어 봐.”
“…….”
무슨 소린지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린 새끼를 다루듯, 이긴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명령했다.
“짖어 보래도.”
“…….”
이번에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딱 개처럼 네발로 엎드려 그를 받고 있으니. 얕게 울렁거리는 목울대를 보며 이긴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다.
“짖어.”
“…….”
말 안 듣는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고 했던가. 이긴은 깊이 박혀 있는 몽둥이를 길게 쑥 빼었다가 단박에 처박았다. 하흣! 갈무리하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다시금 끄트머리만 아슬아슬 걸쳐지게끔 기둥을 뽑았을 때,
“……멍…….”
아주 작은 짖음이 들려왔다.
“옳지.”
마음을 바꾸어 아래를 얕게 놀리며 이긴은 짓궂게 지시했다. 더 크게, 더 열렬하게 짖으라고.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세찬 허리 놀림에 만족할 만한 짖음이 허공을 울렸다.
“좋아, 계속 이렇게 말 잘 듣는 개가 되는 거야. 음? 착하지.”
도우는 멍하니 끄덕였다. 목이 쉬도록 짖고 나니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것 같다. 다행히 이긴은 그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안을 파고드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다. 몽롱해진 시선을 몇 번 다잡아 보다가 포기했다. 이질적인 소리가 고막을 스친 건 그때였다.
“누가, 있는 것, 흐, 같아요.”
엉켜 버린 둘의 호흡과는 다른 인기척이 예민해진 도우의 청각에 잡혀 들었다. 분명 제삼자가 내는 소리였다. 가만가만 내려놓는 그릇 소리에서 조심히 움직이려는 노력이 보였다. 그렇다는 건 여기 상황을 알고 있다는 건데…….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혹여나 그 사람이 이안과 연관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본데.”
“……!”
도우의 망상이 극한으로 치달을 무렵, 엉덩이에서 연달아 마찰음이 울렸다.
찰싹, 찰싹, 찰싹!
얼얼한 아픔보다 바깥의 누군가에게 엉덩이 맞는 걸 들킨 수치심이 더 컸다. 그 증거로 바깥이 잠잠했다. 삽시간에 눈물이 고였다.
“흑, 싫어, 싫어요.”
“진짜 싫은 거 맞아? 이렇게 싸달라고 쥐어짜면서.”
몇 차례 더 가차 없는 손길이 엉덩이를 후려쳤다. 한층 짙게 풀어낸 페로몬과 함께였다. 짙푸른 겨울 숲 냄새를 들이마시자 갑자기 제 엉덩이를 차지게 때리는 손이 무척 달게 느껴졌다. 잠깐의 마찰이 아쉬워 더 때려달라는 듯 도우가 아양을 떨며 허리를 흔들어댔다.
“앙, 앙, 아앙!”
졸라대는 그녀를 대놓고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릿한 통증이 번지면서 엉덩이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리자 질도 따라서 바짝 조여들었다. 그럴 때마다 짜릿한 쾌감에 아랫배 전체가 덜덜 떨렸다. 민감한 내벽에 불거진 힘줄이 아로새겨졌다. 어느새 교태 섞인 울음을 흘리는 도우를 바로 누이며 이긴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왕 하는 거, 재미 좀 봐야지. 안 그래?”
“으응…….”
고조된 성감과 페로몬에 취해 저도 모르게 순하게 끄덕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선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이성에 의지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안 돼…….”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흥분하지 않을 거니까.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을 알면서도 도우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논리가 비약해 버렸다. 이건 그냥, 자위 같은 거다. 그래, 자위. 딜도를 넣고 쑤시고 흔들다 빼는 거랑 다름없는 행위. 이긴도 비슷하게 말했었으니까…….
혼몽한 상태에서 내린 결론과 함께 도우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이제까지 정신을 붙들고 있던 게 신기했다. 아득한 가운데 징, 징, 울리는 아랫배의 감각만이 생생했다. 발끝까지 전류가 저릿저릿 흐르는, 극렬한 쾌감의 전조.
“아응, 응, 으응…….”
고개가 절로 홱 젖혀졌다. 유연하게 휘어진 허리가 짓쳐드는 움직임에 부드럽게 굽이쳤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기 위해 착실히 들썩이는 엉덩이를 쥐며 이긴이 중얼거렸다.
“아주 입하고 몸이 따로 놀지, 너. 음? 느끼질 말든가.”
아랫입하고 윗입의 차이인가, 조롱하면서.
대꾸하지 않자 허리를 반쯤 띄운 그가 얕게 아래를 놀렸다. 도드라진 귀두의 테두리만을 출납하자 텅 빈 안쪽이 욱신욱신 떨려왔다. 얄궂은 출납이 서럽다. 기둥을 삼켜보려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보았으나 그만큼 그가 허리를 물려 무모한 시도가 되었다.
“하흑…….”
아쉬움에 도우가 느껴 울었다. 묵직하게, 내장이 밀려나도록 안을 채워주길 간절히 바랐다. 숨도 못 쉬게 몰아붙여주었으면, 아주 흐무러지도록 쑤셔 박아주었으면, 함부로 저를 타고 마구 내달렸으면.
“이제 그만…….”
박아달라고 칭얼거림은 타액을 갈무리 하지 못하고 길게 빼문 혀끝에 열없이 흩어졌다. 할딱이는 꼴이 영락없이 발정 난 개였다. 뻔히 그녀가 무얼 바라는지 알면서 이긴은 짐짓 움직임을 늦추었다. 그러곤 슬쩍슬쩍 아래를 굴렸다.
“그만할까?”
감질나게 만드는 자극에 도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구와 달리 열기만 고인 안쪽이 허전했다. 뭐라도 좋으니 깊은 곳부터 가득 메워 주었음 했다. 조바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달래듯 이긴이 깊이 몸을 묻었다.
“아으응!”
뿌듯하게 차오른 쾌감이 도우를 단박에 절정으로 올려놓았다. 붕 떠올랐다가 한없이 추락했다. 슬프면서 기쁘고, 서러우면서 안락한, 알 수 없는 기분에 도우가 흐느꼈다. 그나마도 마음껏 울지 못하고 끅끅 삼켜 내는 울음에 이긴은 문득 안쓰러움을 느꼈다. 차츰 젖어 드는 볼을 진득하게 쓸어 낸 건 그 때문이었다. 마냥 달래고 싶었다. 발그레하게 물들어선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게 그렇게 저릿해서.
“이게 또 사람을 홀리네. 응?”
차라리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으면 다른 기분이 들었을까. 궁금해하며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요란스러운 움직임 없이 느긋하게 파정하곤 쾌감이 잦아들 때까지 여운을 만끽하다 몸을 물렸다. 정액은 꾸물꾸물 흘러나오고 있건만, 민감한 여체는 아직도 흥분의 파고에 잠겨 있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잘게 튀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이긴은 드러난 근육의 결을 따라 길게 뺀 혀를 주욱 긁어 올렸다. 제가 쏟아 낸 정액과 오메가 특유의 체향이 섞여 기막힌 냄새가 났다. 몽실몽실한 엉덩이에 그것을 펴 바르자 늘어져 있던 도우가 질겁했다.
전에는 기절해 버리더니, 이만큼 의식이 있는 게 기특하다. 따뜻하게 적신 수건을 도우에게 던져 주곤 담배를 빼 물며 주방 쪽을 확인했다. 주문대로 음식을 차려 놓은 사용인은 눈치껏 돌아간 모양이었다.
“야식 뭐 좋아해.”
“…….”
뜬금없는 질문에 도우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시계를 확인하고 저녁을 먹은 지 벌써 네 시간이나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이틀 밤을 더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상기해 냈고. 그러자 갑자기 암울해졌다. 설마 잠도 재우지 않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긴을 흘긋거리며 조심스레 답했다.
“아무거나요.”
“아무거나가 메뉴 이름이야?”
“…….”
“됐고.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오늘은 대강 준비해 놨으니까 먹어.”
좋아하는 음식 따위를 물어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도우는 잠자코 가운을 걸치고 이긴의 뒤를 따랐다. 대강 준비해 놨다더니 식탁 가득 상이 차려져 있었다. 갈비탕, 잡채, 완자, 보쌈, 구절판, 신선로까지. 차림만 봐서는 생일상 같았다. 이 많은 음식을 그렇게 소리 죽여 차리느라 엄청 애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웬 거예요?”
“체력 좀 키워. 살도 좀 찌우고.”
결국 박을 때마다 뼈로 맞는 것 같다던 지난번 발언의 연장이었다. 도우는 잠자코 의자에 앉았다. 입맛은 하나도 없었지만, 거절했다간 다시 침대에서 그를 받아 내야 할 것 같았다. 깨작깨작 밥알을 세는 도우의 앞 접시에 모양 좋게 밀쌈을 말아 올려놓은 이긴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는 젓가락질에 이마를 구겼다.
“밖에 나가는 거 불편해할 것 같아서 집에다 차리라고 했는데, 맘에 안 들면 나갈까.”
기어코 배를 채워 줄 목적인가 보다. 당장이라도 차 키를 집어 들 기세에 도우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맛있어요. 그냥, 아직, 속이 거북해서…….”
정확히는 아랫배가 꽉 찬 듯했다. 묵직한 살덩어리가 내내 안을 채우다 일시에 빠져나갔는데 부듯한 느낌이 남아 있는 건 당연했다. 도우의 해명에도 이긴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지만, 그래도 억지로 권하진 않았다. 다만 식사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판단한 듯 장식장에서 새로이 술을 꺼내 들었을 뿐.
“다 먹어. 남기지 말고.”
도우에게는 무리한 주문을 해놓고 정작 본인은 한 술도 뜨지 않는 이긴의 행태에 작게 한숨이 나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야식을 즐기지도 않았거니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너덧 명은 너끈히 배를 채우고 남을 양이었다.
‘과하다.’
되짚어 보면 줄곧 그래 왔다. 그녀를 경멸할 때도, 내기를 꼬투리 삼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도, 지금 이렇게 몸을 섞다가 차려 준 상마저도, 모두 과했다. 이만큼 제게 무언가 퍼부어진 적이 없어서 도우는 마냥 어리둥절하고 불편했다.
그래, 불편.
제 감정에 정확히 정의 내린 도우는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입맛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그저 누워만 있고 싶었는데 막상 맛을 보자 거짓말처럼 식욕이 돌았다. 그중 가장 도우의 눈을 사로잡은 건 아담한 크기의 초콜릿케이크였다. 아마도 후식으로 마련해 가장자리에 두었겠지만, 도우는 자꾸 그것을 힐끔거렸다. 반짝이는 초콜릿 코팅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이긴도 도우의 은밀한 시선을 알아챘다. 피식, 웃음을 흘린 이긴이 어린아이를 다루듯 엄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간식은 밥 다 먹고.”
“…….”
다 먹고 나면 저게 들어갈 자리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도우는 최선을 다했다. 한 공기를 싹싹 비우고 나자 상을 수여하듯이 초콜릿케이크가 주어졌다.
“아…….”
포크 끝으로 모서리를 떼어 혀에 대자 침샘이 폭발할 것처럼 부풀었다. 달콤하고도 씁쓸한 맛이 묵직하게 어우러졌다. 포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동안 꾹꾹 참아 왔는데, 한번 맛보자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성인 주먹 크기의 케이크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잔재만 남은 바닥을 긁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도우는 뒤늦게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인식했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가 했더니.”
팔을 길게 뻗은 이긴이 엄지로 그녀의 입가를 쓸었다. 작게 묻어난 초콜릿 조각을 핥은 이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있네.”
“……잘, 먹었습니다.”
얼마나 정신없는 모양새로 퍼먹은 건지. 낯이 뜨겁다 못해 홧홧했다. 엄청난 비밀도 아니지만, 들켜선 안 될 걸 들켜 버린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개인의 취향 같은 걸 그와 공유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 정말 이상해질 것 같아서…….
“다 먹었으면.”
이긴이 침실을 눈짓했다. 도우는 순순히 일어섰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일인데, 다시 침대에 올라야 하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른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쩌면 방금 먹은 것들을 모조리 게워 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한들,
‘내 알 바야?’
도우는 비뚤어졌다. 지키고 앉아서 음식을 먹인 건 그니까, 토사물쯤이야 알아서 처리하겠지. 스스로를 고약하다 여기며 가운을 벗고 얌전히 이긴의 지시를 기다렸다. 뭘 요구하든 머리를 비우고 몸을 움직이면 되는 일이다, 다독이면서. 그러나 돌아온 건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정력이 대단하신가 본데.”
얼뜨게 쳐다보는 도우에게 이긴이 기다란 무언가를 던졌다. 받고 나서 보니 칫솔이었다. 이건 정말 이상하다. 묘한 패배감을 느끼며 욕실로 향했다. 양치질을 마치고 나선 칫솔을 어디에 꽂아야 할지 몰라 또 한참 고민했다. 그의 것과 나란히 칫솔꽂이에 둘 마음은 없어서 세면대 끝에, 최대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욕실에서 나오니 이긴은 이미 자리에 누워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경우의 수는 없었기에 도우는 당황했다. 우두커니 서 있지만, 마음은 침실 구석구석을 방황했다.
“피곤해.”
이긴이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조심스레 옆으로 올라 눈치를 살피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자는 건가? 그냥 이대로?’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다녔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호흡은 벌써부터 일정했다.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해 도우는 눈꺼풀에 힘을 주어 잠을 참았다. 깜박, 깜박, 눈꺼풀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배불리 속을 채운 몸은 노곤하고 이불 안은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다가, 그만 덮쳐 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깜박 정신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