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0)

09

순 거짓말.

피곤해서 잔다더니 새벽같이 일어나선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던 이긴의 손길을 떠올리자 절로 도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결에 밀어내자 이긴은 치사하게도 페로몬을 풀었다. 단박에 발정했다. 도우는 제 위로 올라오라는 그의 명령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개처럼 헐떡이며 그의 허리를 탔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나머지 엎드려서 제발 욕구를 채워달라고 구걸하듯 보채는 제게 이긴은 짓궂게 요구했다.

“짖어봐.”

“멍, 아응, 앙! 흐, 흣, 멍……, 멍멍!”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열심히 짖어대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제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도우는 치를 떨었다. 침실 외에도 욕조 안에서, 거실 소파 위에서, 식탁에 가로누워……. 조각조각 남아 있는 기억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중간에 여러 번 혼절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명료한 기억은 식사 장면 정도였다. 이긴은 기아라도 다루는 양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먹였다. 그것도 모자라 간식까지 살뜰히 챙겨 도우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태어나서 먹은 디저트를 다 합친 것보다 이긴의 집에서 이틀 동안 맛본 것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틈틈이 먹여 댔는데도 체중이 4kg이나 줄어 있었다.

헐렁해진 바지를 보며 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하게 입고 다니는데 이 정도로 흘러내리면 새 옷을 살 수밖에 없다. 빠듯한 지갑 사정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선물 살 돈도 부족한데.’

이안의 생일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입장에서는 한 푼이 아까웠다. 고심 끝에 도우는 벨트에 구멍 하나를 더 뚫는 것으로 바지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오던 도우는 예기치 않게 이안과 마주쳤다.

“소장님!”

“연구실에 없길래.”

“아…….”

화장실에 오래 있었나? 그렇다고 복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그저 반가운 건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음, 결과지 지금쯤 나왔을 것 같아서.”

“네? 무슨 결과가…… 아!”

2차까지 마친 정액 검사가 퍼뜩 떠올랐다.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을 수 있지? 상대 집안에서 요청한 만큼 이안에게 중요한 서류였는데 거짓말처럼 뒷전으로 미뤄 놓고 있었다. 허둥대는 도우에게 이안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급할 건 없지만, 이번 주 내였으면 좋겠는데.”

“당장 갖다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도우는 날듯이 검사실을 향해 뛰었다. 연구원 아이디를 입력하자 두 개의 검사가 화면에 잡혔다. 그제야 이긴에게도 결과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숨이 터진 둑처럼 쏟아졌다.

‘누구한테 먼저 갈까.’

고민하던 도우는 이안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긴을 만나고 와서 이안을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 될지 몰라 불안한 것보다는 그게 마음 편했다.

결과지를 받은 이안은 꼼꼼히 수치를 확인했다. 세심하게 결과지를 훑는 이안을, 도우는 새삼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안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본인 검사 결과쯤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검사실과 클리닉 모두 연구소 소속인데도.

너무 빤히 바라봤을까. 결과지 너머로 눈만 내놓은 이안이 빙긋이 웃었다.

“궁금해?”

“네? 아, 아니요.”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에 가슴이 뛰었다. 사람이 저렇게 멋있을 일인가. 이안이 옆에 와서 앉자 두근거림은 배가 되었다.

“왜, 왜요?”

“혈액 검사 해야지.”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바보 같은 말만 하는 걸까. 순간 이안이 제게 어떤 스킨십을 취할 거라고 생각했다. 볼을 쓰다듬는다거나, 가벼운 입맞춤 같은. 지금껏 이안은 그녀에게 손댄 적 없는데도 그랬다. 이것도 다 이긴 때문이라고 탓하면서 팔을 내밀었다. 얼굴만 사과처럼 붉어진 줄 알았는데 팔까지 불긋불긋했다. 어지간히 민망했다는 증거였다.

따끔한 통증이 밀려오는 동안 이안이 준 레몬 사탕을 입에 물었다. 주삿바늘에 찔리는 선득한 느낌과 입 안쪽 점막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신맛 중 어느 것이 더 괴로운지 알 수 없었다. 간단한 처치가 끝나고 연구실을 나설 무렵, 이안이 도우의 손에 든 다른 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건, 그러니까, 이사님 결과지인데요.”

사무적인 일이었다. 이안도 용인하고 있는. 그런데 어째서 자꾸만 말꼬리가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꼭 밀회를 들킨 것처럼.

“이사님도 갖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도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안에게 물었다.

“아님 소장님께서 직접 드리실래요?”

전에 둘의 검사 결과를 같이 모아서 준다고 했었던 것도 같다. 급격하게 화색을 띠는 도우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안이 싱긋이 미소 지었다.

“이긴도 결과는 알아야 할 테니까.”

결국 갖다주라는 뜻이었다. 네, 작게 대답하고 소장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일시에 힘이 빠져 복도에 기댔다. 긴장하고 있었나. 갑자기 탈력할 정도로. 소장실 앞 복도를 쓰는 눈빛이 씁쓸했다. 전에는 마냥 설레던 장소였는데. 운이 좋으면 이안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그랬던 복도가 지금은 어쩐지 부담스럽고 불편한 곳이 되었다.

‘나 때문이야.’

아무리 이긴이 제 약점을 잡고 뒤흔든다 해도 빌미를 제공한 건 결국 자신이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나락은 이미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대롱대롱 매달려 조금씩 기어 내려가는 기분이다. 언제고 손을 놓으면 그대로 끝일 나락. 차마 밝힐 용기조차 없는 자를 위해 마련된 구렁텅이.

자책감에 발밑이 푹푹 꺼지는 것 같다. 연구동에서 본관으로 건너가는 복도는 통유리창이었지만 훤한 대낮에도 눈앞이 캄캄했다. 어디로 걸음을 옮긴다는 의식도 없이 비실비실 걷고 있는 도우의 귀에 희한한 소리가 들렸다.

쫏쫏쫏.

어디 공원에서나 들릴 법한, 그러니까 강아지를 꾀는 소리. 회사에서 강아지가 돌아다닐 일도 없거니와 설령 누군가 키우는 강아지를 데려왔대도 풀어 놓을 리는 없었다. 잘못 들었겠지, 무시하며 지나가는 도우의 귀에 보다 선명한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쫏쫏쫏.”

그제야 도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리의 근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건지, 복도 끝에서 이긴이 그녀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아지.”

“…….”

설마 저를 부른 건가? 도우는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얼굴이 터질 듯이 화끈거렸다. 강아지처럼 멍멍거리며 헐떡대던 순간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이긴이 다시 혀를 굴려 강아지 달래는 흉내를 냈다.

“이리 온.”

도우는 더 상대하지 않고 휙 뒤돌았다. 그러다 손에 들려 있는 서류 봉투의 존재를 자각했다. 다시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제게 다가온 도우의 머리를 이긴이 다소 힘주어 쓰다듬었다.

“착하지.”

“정액 검사 결과지예요.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서.”

“읽어 봐.”

이만 놓아주었으면 했는데 이긴은 담배를 빼 물었다. 복도는 금연구역이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지적해 봤자 당당하게 벌금 내겠다는 소리나 할 게 뻔해 도우는 서류 봉투를 열었다. 빨리 읽어 주고 얼른 눈앞에서 꺼져 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1cc당 정자 수 정상, 운동성 정상, 정상 정자 모양 퍼센트 정상, 총정자 수 정상, 살아 있는 정자 퍼센트 정상…….”

숫자와 단위도 생략한 채 정상만 외치는 도우를 보는 이긴의 눈이 즐겁게 휘어졌다. 채 마저 읽기도 전에 보란 듯 으스댔다.

“봤지. 내가 다 이겼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 새끼들이 이안 것보다 운동성도 좋고, 머릿수도 많고, 속도도 빨라. 너도 봤을 거 아니야.”

“안 봤어요. 잠깐, 이사님은 어디서 봤는데요?”

물어보면서도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겠나. 이사씩이나 됐으니 연구소 전자기록 시스템에 접속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아니나 다를까. 이긴이 별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내 건데 먼저 보면 어때.”

모든 조직에는 지켜야 하는 규칙과 절차라는 게 있건만, 이긴의 머릿속엔 그런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누구의 승인도 거치지 않고 대표실에서 자료를 열람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여러모로 이안과는 대조적인 행태였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쪽으로.

“참 나, 정자마저도 우월하다니, 이안한테 미안한데.”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뻐기는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긴의 말대로라면 이미 수치로 증명된 거니까. 하여 도우는 다소 열없이 시비를 걸었다. 유치한 시비였다.

“항상 이겨서 이긴이에요?”

“아마도.”

이기죽거리느라 해본 소리였는데 진짜로 그렇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는 네 이름은 뭔데.”

“도우라고요…….”

“누가 이름 물어봤어. 뜻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도우라고, 식구들 도와주라고…….”

장녀는 살림 밑천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 않았나. 지금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제 입으로 반복해서 뱉고 나니 낯 뜨거워지는 뜻이었다. 이긴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담뱃재를 툭 떨어트리며 함부로 뱉었다.

“구질구질하네.”

“…….”

금세 풀이 죽어선 축 처진 눈꼬리가 진짜 강아지 같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속으로 혀를 찼다. 참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펄럭거리는 가운에 헐렁한 검정 바지, 두꺼운 뿔테 안경과 덥수룩한 머리카락까지. 이따위로 하고 다니니 사람들이 여자인 걸 눈치 못 채는 것도 당연하다. 오메가인 데다 왜소한 덩치도 한몫하겠고.

‘왜 저렇게 웃지?’

도우는 슬슬 불안을 느꼈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복도지만, 눈에 띄려면 충분히 띌 수 있는 곳이었다. 이긴이 펑퍼짐한 차림 속 둥글둥글한 가슴과 낭창낭창한 허리를 그리고 있는 줄은 모르고 긴장감에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괜히 주사 맞은 자리가 간지러웠다.

도우가 팔을 긁기 위해 무심코 소매를 걷은 순간, 이긴의 눈에 못 보던 주삿바늘 자국이 들어왔다.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뚝 부러지며 불씨가 후드득 날렸다. 그 탓에 도우의 몇 벌 없는 바지에 작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왜 이래요!”

속상한 마음에 소리쳐 봤지만 이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상 한번 더럽게 쓰며 도우의 손목을 낚아챘을 뿐이다.

“뭐야.”

도우는 피부가 약한 편이었다. 피를 뽑고 나면 주삿자국이 남들보다 서너 배는 오래갔다. 새 주삿자국에 겹쳐 채 아물지 않은 주삿자국이 붓으로 찍은 것처럼 듬성듬성 검붉게 번진 모양을 오해한 이긴이 이마를 찌푸렸다.

“약도 하나 보지? 가지가지 하네.”

뭐래. 진짜 약쟁이가 누군데. 이긴을 두고 떠도는 소문 중 하나를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잡힌 팔을 홱 뿌리치곤 맵게 쏘아붙였다.

“남이사. 약값 대줄 것도 아니잖아요.”

“뭐?”

이긴이 기막혀하는 표정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작 기막힌 사람은 자기였으니까. 발가벗겨 놓고 별짓 다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바늘 자국을 문제 삼는 게 황당했다.

‘그런데…….’

문득 그의 팔은 깨끗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약에 절어 산다는 소문대로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자국들이 없다는 게 몹시 이상하게 다가온 순간, 눈알이 멋대로 떨릴 정도로 머리 전체를 압박하는 두통이 일었다. 절로 낯이 구겨졌다. 이긴이 씹어뱉은 말에 더더욱.

“씨발, 아주 간을 내놓고 다니지.”

욕설에 도우가 이를 앙다물었다. 바지를 새로 사야 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이상한 오해를 받은 데다 욕까지 들었다. 회사에서는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깡그리 무시하고. 이런 취급을 받아도 참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들고 있던 결과지를 이긴의 가슴팍에 밀어 놓고 가차 없이 뒤돌았다.

하,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란 듯 단호하게 멀어졌다. 비록 모퉁이를 돌고 나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거렸지만. 그 와중에도 혹시나 쫓아올까 싶어 재게 걸음을 놀리는 게 제가 봐도 하찮았다.

천천히 뒤를 따르는 이긴의 눈에도 도우가 하찮아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쫓아가겠지만 벌벌 떠는 꼴을 보아 참았다. 어차피 꼬리 말고 도망갈 거면서 하룻강아지처럼 앙알대는 걸 발칙하다 해야 할지, 맹랑하다 해야 할지. 어느 쪽이건 딱히 거슬리지 않는 게 희한하다.

“우습네, 우스워.”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긴은 느긋하게 이안의 연구실로 향했다.

***

낙엽 썩는 냄새가 여전히 역겹다. 여기를 좋다고 들락거리는 도우의 후각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긴은 조금 전 도우가 넘긴 결과지를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네가 갖다줘. 그 집안에 눈도장 찍고 싶어서 안달 난 거 같은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이안이 서류 봉투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끝까지 고상한 척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면서. 좆같은 낙엽 우린 물을 꿋꿋이 내주는 것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이안이 타준 정체 모를 차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거만히 다리를 꼬았다.

“원하면 네 거랑 결과지 바꿔도 좋고.”

“내가 왜.”

“조금이라도 잘 보여야 할 거 아니야. 간택받으려면.”

신랄한 비꼼에 이안은 말없이 차를 비웠다. 잠자코 있는 걸 보니 이미 제 기록도 열람한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아닌 척 고개를 꼬고 있는 거다.

‘하여간 음침하기는.’

속이 답답해져 담배를 빼 물었다. 물론 이안이 음침하게 군다고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귓가에서 비실대는 모기처럼 성가신 정도랄까. 한때는 이안이 저를 사칭하지 않은 걸 신기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하도 제가 가진 모든 걸 선망해서. 이제 도우까지 제 손아귀에 들어온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무슨 실험 하는 거야? 그것도 사람 데리고.”

“갑자기 무슨 얘기야.”

이안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뜻밖이라는 듯 찻잔을 쥔 손이 경직되어 있었다.

“몰라서 물어?”

꼭 두 번 말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빈정거리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아끼던 이안이 드물게 이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메가 같은 거, 관심 없었잖아.”

“내기는 이겨야 하니까.”

장난처럼 시작된 내기였다. 이안은 어떤 생각으로 응했는지 몰라도 이긴은 그랬다. 오메가 따위, 따먹을 생각도 없었고. 그냥 이안의 신경을 조금 긁어 주는 게 목적이었던 내기. 도우가 발정열을 이기지 못해 회의실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내기 얼마든지 져주고 말았을 텐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나 싶어 픽, 웃었을 때, 뭔가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이안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내가 먼저 알았어.”

“어린애야? 먼저 주운 놈이 임자다, 뭐 이런 건가?”

“장난칠 기분 아니야.”

웬일로 본색을 드러낸다 싶다. 그만큼 이안에게 도우가 특별하다는 뜻일 테고. 어디 어떻게 나오나 보자 싶어 이긴이 한술 더 떴다.

“주웠으면 간수를 잘하든가.”

“……무슨 뜻이야?”

“혀 잘 쓰던데. 너한테 배운 건가?”

“…….”

딱 오해하기 좋을 만큼만 흘리자 가라앉아 있던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하겠지. 더해서 혀를 썼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하나 이번엔 이안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 넘어가.”

“좋을 대로.”

질 낮은 농담쯤으로 생각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안의 낯에는 묘한 우월감마저 드러났다.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어서, 또 빙긋거리는 면상이 재수 없어서, 이긴의 기분이 적잖이 더러워졌다. 이안이 통쾌한 표정을 지어서 더욱 그랬다.

“넌 네가 뭐든 잘난 줄 알지.”

“당연한 걸 물어.”

“다 손에 쥔 것 같고, 이해해.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제정신인가? 광기에 번들거리는 이안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미 맛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곧 원래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런데, 도우는 안 돼.”

“왜. 주인밖에 모르는 개라서?”

개 주인 바뀐 지가 언젠데. 도우가 제게 박히며 멍멍 짖던 게 생각나, 이긴의 입매가 절로 비스듬해졌다. 수치심에 발갛게 물든 눈가와 색이 같았던 엉덩이의 손바닥 자국도 음심을 부추겼다. 여차하면 오늘도 부르고 싶은데 그럼 강아지가 너무 힘들어하려나. 틈만 나면 먹여 놨는데 더 비실비실해지는 영문을 모르겠다.

“음.”

이쯤에서 이긴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도우의 살이 내리는 영문을 모른다니, 제가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럽다. 똑같이 그녀에게 들려주면 눈을 세모로 뜨면서 정말 모르냐고 파들거릴 테다.

“개라니, 실례야.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끈끈해.”

어이없다는 듯 이긴의 즐거운 상념을 깨트린 이안이 다시 찻잔을 입에 갖다 댔다.

“끈끈?”

너무 기가 차서, 이긴은 하마터면 이안을 따라 차를 마실 뻔했다. 도우가 천금같이 여기는 도움이 이안의 입장에서 얼마나 알량한 적선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목마른 사람이 탈수로 죽지 않을 정도의 딱 그만큼씩만. 그건 애정도 뭣도 아니었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조련’ 정도가 적당하달까.

“개가 웃겠네.”

차게 비웃고 나자 정체된 연구실의 공기가 답답해졌다. 항상 끓이는 차 때문인지 습하기까지 해서 어디 구석에 뱀 새끼 두엇이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됐고, 미팅 일정이나 나중에 알려 줘.”

그래도 명색이 선 자리인데 수많은 회의 일정 중 하나처럼 대하는 이긴을, 이안이 말끄러미 쳐다봤다. 간절함이 없는 것쯤은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없는데 어쩌라고.’

더 생각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성건성 손을 흔들었다.

“나 간다.”

“이긴.”

심상치 않은 음성에 돌아보니 정색한 얼굴이 보였다. 또 무슨 얘길 하려고 저리 무게를 잡으시나. 아무 말 없이 노려보자, 제 딴엔 배려를 가장한 경고가 조용히 울렸다.

“난 정말 네 생각 해서 말해 주는 거야. 도우는 안 돼. 걘, 내 오메가니까.”

까고 있네. 너무 유치해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이긴은 최대한 상냥하게 되물었다.

“이름표라도 붙여 놨어?”

대답은 필요 없었다. 이름표보다 더한 걸 도우의 몸에 각인시켜 놓은 참이니까. 제 분신의 모양대로 벌어지는 착실한 구멍을 떠올린 이긴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불현듯 도우가 보고 싶어져, 이안의 연구실에서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7시. 집으로.」

메시지를 남겨 놓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은 못 가겠다는 답장이 찍혔다.

“뭘 한다고.”

못마땅하게 중얼거리곤 다시 전화하자 이번엔 바로 받았다.

“내가 원하면 이유 불문 튀어오는 것 아니었나?”

―소장님이 부르셔서요.

“이안?”

―네.

하, 어이가 없어서 이긴은 뒤를 돌아봤다. 연구실에서 겨우 몇 발짝 멀어졌을 뿐인데 그새 도우와 약속을 잡은 이안의 속이 빤히 보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뭐가 불안하고 켕겼는지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전화를 받는 도우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혹시, 소장님 만나셨어요?

“그랬으면.”

―무슨…… 얘기 했는데요?

“글쎄.”

―…….

작은 한숨이 고막으로 흘러들어선 달콤하게 녹아 없어졌다. 한숨도 꼭 저같이 쉰다 싶다.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얘기해 주려다 이안을 만나러 가는 게 괘씸해서 그만두었다. 마음껏 속 끓여 보라지. 그럼 살이 더 내리려나? 그건 곤란하지 싶어 이긴이 얼른 친절하게 덧붙였다.

“이안 만나면.”

아무 말도 않는데, 휴대전화에 도우의 귀가 바짝 붙는 게 느껴졌다. 그게 우스워 대표실로 향하는 동안 내내 빙글거렸다.

“비싸고 맛난 거로 사달라고 하고.”

김빠진 신음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

진짜 못됐다.

이안을 앞에 두고 도우는 이긴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웃음소리를. 그것 좀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 탓에 그녀만 난처하게 됐다. 도우는 갑자기 이안이 만나자고 한 이유조차 찾지 못했으니까.

“오랜만이네.”

“네? 뭐가요?”

“이렇게 같이 밥 먹는 거. 워낙 바빠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아…….”

하긴, 연구소에 들어오기 전, 대학에서 선후배로 지낼 때는 이안이 자주 밥을 사줬었다. 주로 수업을 마치고 과외하려 이동하는 사이에 잠깐 남는 시간동안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었는데, 그 과외조차도 이안이 연결해 준 학생이었다. 이안이 없으면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는 아르바이트였다. 오메가한테 과외를 맡기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말 다방면으로 도움받았구나.’

이안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느 뒷골목에서 몸이나 팔고 있었을 거다. 아니면 아버지의 도박 빚에 팔려 가 알파들의 아기를 대신 낳아 주거나. 이쯤에서 다시금 지난 주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원치 않는 섹스, 몸 파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다. 그래서 도우는 고마운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쉽사리 감사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서.

“서운하네.”

“네? 뭐, 가요?”

식전 음료로 나온 차를 마시며 이안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기분이 상한 건 아니고, 도우에게 이따금 보내는 작은 신호였다. 집중하라고. 저만 아는 표정이 너무 좋아서, 일부러 딴청 피우며 이안이 미간을 얼마나 찡그리는지 속으로 몰래 셌던 적도 있다. 한데 지금은 어째서 설레기는커녕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까.

“왜 그렇게 굳어 있어. 나랑 있는 게 불편해?”

“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제야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던 걸 깨닫는다. 겨우 방긋 웃어 보이면서, 때마침 차림상이 들어와 제 억지웃음을 이안이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별 이유 없이 전처럼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불러낸 거였구나 싶어 안도했다.

마음이 놓이자 자연히 식욕이 돌았다. 우연인지 이안이 불러낸 곳은 전에 이긴과 왔던 한정식집이었다. 그래서 더 긴장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목적이 있는 식사가 아니라는 걸 알자 지금은 맛깔난 찬들에 군침만 꿀꺽꿀꺽 넘어갔다. 이미 알고 있는 맛이라서 기대가 더 높아진 탓이었다.

그중 도우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건 노릇노릇 구운 조기였다. 짭조름한 살점이 구수한 누룽지와 어우러지던 맛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얼른 먹으라는 이안의 말에 젓가락을 그쪽으로 가져가려던 도우는 엉뚱하게도 멸치볶음을 집고 말았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짧게 탄식한 이안이 조기구이 접시를 멀찍이 치웠기 때문이었다.

둘만 아는 사실을 발설치 않겠다는 듯 은밀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이안이 속삭였다.

“도우는 생선 잘 못 먹지.”

“……네.”

아쉬움에 미적거리며 답했다. 내가 지금 생선이나 아쉬워할 처지가 아닌데, 하면서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간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 레몬타르트를 시켰다. 내키지 않는 포크질을 하며 억지로 배를 채우는 것 같다는 불만을 자각한 도우는 연신 자신을 책망했다.

‘진짜 꼴불견이다, 너.’

얻어먹는 주제에 이것저것 가리기나 하고. 이런저런 자책들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비단 이긴과의 일을 숨기고 있어서만은 아닐 거다. 보다 근원적인 무언가가 자꾸만 속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그게 무언지 캐보려는 순간, 맞은편의 이안이 상체를 숙여 사이를 좁혔다.

“도우야.”

“네, 소장님.”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했다. 이안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칠 정도였으니까. 커다란 눈동자가 몹시도 수상한 꼴을 하고 있어 도우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왜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정말 없어?”

가슴이 쿵쾅쿵쾅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이긴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알 수 없어서, 아니, 이긴을 말하는 건지도 이젠 불명확했다. 하지만 그거 말고 말할 게 있었나? 뇌를 쥐어짜자 간신히 말할 거리가 떠올랐다.

“아, 저번에 도움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 덕분에 무사히 잘 넘겼어요.”

둘째가 다시 학교에 꼬박꼬박 다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속이야 얼마나 곪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라도 멀쩡해 보이는 게 어디냐고 위안하며.

거듭되는 감사 인사에도 이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는 듯이. 마음이 자그마한 공처럼 위축되는 것 같았다. 도우는 답을 찾으려 애썼다. 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알아채자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전에는 이안과 이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았으니까.

“이사님이랑 내기하신 거요…….”

절망적으로 뱉은 한마디에 이안이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이거였구나. 낙담으로 가슴 한 귀퉁이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럼에도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그냥 안 한다고 하시면 안 돼요?”

스스로도 모르겠다.

“이사님이 자꾸 연락하시는데 좀, 부담스러워서요.”

마치 자기는 조금도 응하지 않았던 것처럼. 거짓말을 술술 뱉는 자신이 낯설다. 제게로 쏠려 있던 이안의 상체가 멀어졌다. 완전히 기대서 우아하게 찻잔을 드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걸린 게 많아서.”

“아…….”

결국 무를 수 없다는 뜻에 도우는 멍하니 대꾸했다. 이상하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가올 폭로의 시간이 미뤄져서인지,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해서인지, 혹 저도 모르는 다른 까닭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몹시도 피로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만 일어날까. 바래다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

너무 단호하게 쳐냈나. 그냥 혼자 있고 싶었을 뿐이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머리를 비운 채 눈과 입을 닫고 싶었다. 어차피 집에 가면 크건 작건 시달릴 일이 있을 테니. 한번 거짓말을 내놓은 도우의 입은 잘도 핑계를 댔다.

“가족들이 볼까 봐 그래요. 소장님 보면, 또…….”

언젠가 식구들에게 그녀와 함께 있는 이안을 들킨 적이 있었다. 딱히 숨긴 건 아니었지만, 엄마 아빠의 눈에 띄었을 때 그런 생각이 스쳤었다. 들켰다, 하고. 아니나 다를까, 듣는 도우가 낯 뜨거울 정도로 시작된 부모의 입발림은 돈을 더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가장한 강요로 끝맺었다.

이안에게도 잊히지 않을 첫 만남일 거라고, 도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은 태어나서 처음 봤을 테니까.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질 것 같아요. 이미 신세 많이 지고 있는데…….”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이안의 뒷모습이 멀어지자마자 도우는 재빨리 둘이 있던 장소를 벗어났다. 덫에 걸렸다가 풀려난 쥐처럼.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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