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2권) (10/20)

이중 각인 2권

10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

이안을 피하기 위해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하긴 했다. 시약보관실로 이동하는 중간에 위치한 소장실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본관을 거쳐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는 경로인데,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겨우 반나절 동안 네 번이라니.

복도 저 끝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긴을 발견한 도우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모른 척 돌아가기엔 이미 눈에 띄고 말았다. 아까는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꾸벅 인사만 하고 넘어갔지, 지금은 하필 단둘이었다. 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이긴이 빙글거렸다.

“이안이 맛있는 거 사줬어?”

“네.”

빠르게 대답하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팔꿈치를 붙잡혔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고개까지 잡혀 버렸다.

“맛있는 거 뭐.”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없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온한 말들이 쏟아질 것만 같은 예감. 서둘러 무얼 먹었는지 실토하려고 입을 연 찰나, 이긴이 한발 앞서 질 낮은 말들을 뱉어 냈다.

“힘도 없어서 깔릴 때마다 비실거리면서 먹는 것까지 부실하면 쓰나. 부서질 것 같아서 맘대로 박을 수도 없고.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대낮부터. 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참고 조절한 게 그건가 싶어서. 그의 집에서 매번 기어 다니다시피 돌아다녔던 걸 떠올리자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최대한 공손하게 답했다. 안 그러면 저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전에 같이 갔던 한정식집에 갔어요. 충분히 잘 먹었고요.”

“그것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레몬타르트가 떠올랐다.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해야 하나 싶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건 마치…….’

연인 사이에나 있을 법한 추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등 뒤에서 다소 딱딱한 음성이 울렸다.

“건물 내 금연이야. 이사씩이나 돼서 모르진 않을 테고.”

이안이었다. 밀회를 들킨 것처럼 도우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냥, 진짜 우연히 마주친 것뿐인데. 그러다 제가 서 있는 곳이 본관과 이어지는 연결 통로라는 걸 깨달았다. 이안이 왜 여기에 있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소장님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다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안의 눈에는 그녀가 일부러 이긴을 만나러 온 것처럼 보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머릿속뿐만 아니라 눈앞도 하얗게 바랬다. 물리적인 변화였다. 이긴이 이안을 향해 길게 내뿜은 담배 연기.

“꼬우면 네가 대표 하시든가.”

이긴의 빈정거림에 이안은 대응하지 않았다. 얼어 있는 도우에게 어찌 된 상황이냐고 물었을 뿐.

“여긴 무슨 일로 왔어?”

부드럽지만 어딘지 가시 돋친 어투였다. 어쩌면 스스로 찔려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어쨌든 지금으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이안과 마주하는 순간이 수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막 이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긴의 손이 불쑥 들어와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눈앞에 놓인 손에서 씁쓸한 담배 냄새가 났다.

“내가 궁금해서 불렀어. 내기, 자꾸 네가 도발하니까 재미있어졌거든.”

“그게 따로 불러낼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야?”

“회사의 명운이 걸린 건데, 아무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한 이긴이 친근한 척 이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네가 얼마나 잘해 주는지 알아야 나도 따라서 꼬셔 보지 않겠어? 그래서, 한정식 말고 또 뭐 사줬어?”

정말 어제 무얼 먹었는지 물었다는 걸 알게 된 이안이 맥 풀린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크랑 티.”

“초코케이크?”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중얼거린 이안이 어깨에 걸린 팔을 쳐냈다.

“도우는 초콜릿 안 좋아해. 그렇지?”

“……네.”

이긴의 거실에서 받아먹었던, 뜨끈한 초콜릿이 줄줄 흘러나오는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도우가 작게 끄덕였다. 들으란 듯이 별일이네, 혼잣말을 흘린 이긴이 새 담배를 빼 들었다. 막 라이터를 꺼내 들었을 때, 이안이 손을 뻗어 그의 입술에 물린 담배를 툭 꺾어 버렸다.

“씹, 뭐 해.”

“금연이라고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대표면 대표답게 행동해. 앞으론 이런 일로 우리 연구원 불러내지 말고.”

“다른 일로는 불러내도 되나?”

부러진 담배를 툭 버리고 태연하게 새 담배를 꺼내 문 이긴이 보란 듯 불을 붙였다. 빨갛게 타오르는 끄트머리를 보던 도우는 제게 꽂힌 이긴의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불붙은 게 담배가 아니라 저인 듯 뜨거워서.

더 응하는 법 없이 깔끔하게 돌아선 이안이 도우를 가까이 당겼다. 그녀의 소속은 이긴이 아니라 이안이라는 걸 분명히 하듯이.

“가자, 도우야.”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돌아서는 뒤통수가 따가웠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겠지. 두 다리가 기계처럼 어색하게 움직였다. 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도우는 살짝 뒤를 돌아봤다.

없다.

이긴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는데. 씁쓸한 연기만이 아스라이 떠도는 복도에 가슴이 스산해졌다.

‘뭘 기대한 거지.’

빈자리에 실망한 자신이 이상하다. 이긴이 먼저 자리를 떴다고, 그게 뭐라고.

속이 술렁거려 이안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떻게 제자리까지 돌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6시. 주차장」

회사에서는 아는 척 안 하기로 했는데. 어차피 그런 건 이제 무의미한가. 그래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그의 차에 오를 생각을 하니 가슴속 수런거림은 어디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도우가 주차장 입구에 나타나자마자 이긴은 고막을 찢는 경적을 울려 댔다. 아무 관심 없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후다닥 차로 뛰어드는 도우를 보며 이긴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이리 심술궂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초콜릿 안 좋아한다며.”

“……원래 안 좋아해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지.”

“…….”

이런 식의 대화는 불편하다. 초콜릿 좋아하든 말든, 그게 왜, 당신이 뭔데.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긴의 집으로 이동하는 이 몇 분이 유난히도 길었다. 얼른 도착했음 하고 바랄 정도였다. 그냥 빨리 박고 흔들다 싸버리면 끝일 테니까. 그러나 바람과 달리 차가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이긴은 도우의 질문을 깔끔히 무시했다.

“그럼 이안이 한 번이라도 더 쳐다봐 줄 것 같아?”

저도 이긴이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려 했다. 일일이 대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이긴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듣고 있어? 이게 아주 딴생각이지.”

재수 없는 게 누군데.

도우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하필 쌍둥이여서 마음대로 욕도 못하게 하면서. 이안의 얼굴로 잘도 욕지거리에 담배에 술에 여자에…… 하여간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이안의 얼굴을 제멋대로 쓰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도우는 최대한 공손하게 돌려 말했다.

“소장님 얼굴로 그러시니 적응이 안 되어서요.”

하, 가소롭다는 듯 비틀린 웃음을 흘린 이긴이 되물었다.

“그 씹새끼가 내 얼굴로 고상한 척 역겹게 구는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봐?”

어떻게 이안에게 그렇게 심한 욕을 할 수 있지? 제가 모욕당한 것보다 더 가슴이 욱신거렸다. 표출할 곳 없는 분노로 턱이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긴은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초콜릿케이크 싫어하는 건 알아도 내 밑에 깔려서 자지러지는 건 모르는 모양이던데.”

“소장님과 전, 적어도 서로 몸만 밝히는 그런 더러운 관계는 아니니까.”

호오, 이긴이 과장되게 턱을 쓸며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그 말은 너도 내 몸을 밝힌다는 거네.”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분명 서로라고 했어.”

갑자기 뭐에 동했는지 이긴이 급격히 핸들을 틀었다. 타이어 마찰음이 날카롭게 고막을 때렸다. 사방에서 요란한 경적 소리가 울렸지만 이긴은 개의치 않았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잠깐 동안 긴장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난, 흡, 읏!”

문이 닫히기 무섭게 속절없이 입안을 점령당했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긴이 음험하게 중얼거렸다.

“플라토닉한 사랑은 그쪽이랑 실컷 하라고. 난 이게 더 취향에 맞으니까.”

“아! 흣!”

아플 정도로 입술을 빨렸다. 통렬한 아픔은 열기가 되어 머리를 뜨겁게 점령했다. 초콜릿, 조기 따위가 터질 것처럼 열 오른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이안에 대해 가졌던 불편한 감정도. 모두 이 남자 때문이다. 자꾸만 쥐고, 흔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비교하게 만들고. 그런데, 플라토닉? 사랑? 누구 때문에 깨져 버렸는데? 그걸 당신이 입에 올릴 자격이 있나?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해서, 못 견디게 서러워져서, 도우는 셔츠 단추를 푸는 이긴에게 격렬히 저항했다. 침대에 눕지 않으려 바동거리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픽, 흘린 이긴의 실소에 화가 치민 나머지 눈물까지 고였다. 상체를 타 누르며 바지 버클에 손대는 이긴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성욕 하나 조절 못 하는 유사 인류라면서! 원숭이가 더 낫다고 했으면서……! 누가 원숭이랑, 읍, 읏!”

“그 원숭이가 씨발 존나게 예쁜 걸 나보고 어쩌라고.”

입 걸레.

더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 그를 비난하고 싶지만 이미 입안이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였다. 차라리 이편이 나은지도 몰랐다. 곤란하게도 벌써부터 아랫배가 찡하니 울리기 시작했으니까. 주변에 흩어져있던 이긴의 서늘한 체취가 점차 예리하게 범위를 좁혀들었다. 농축된 페로몬을 깊이 흡입한 순간 어이없을 정도로 열기가 솟구쳤다. 안달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으나, 소용없는 시도였다.

“으으응…….”

유혹하듯 길게 흘려낸 한숨에 이긴이 피식 웃었다. 페로몬에 반응해 타오르는 열기와 별개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성욕 하나 조절 못 하는 짐승이 바로 저였다. 자괴감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흑, 으응…….”

울면서도 연신 그를 갈구하는 제 모습에 진저리치면서도 열렬하게 이긴에게 매달렸다. 성마르게 그의 입술을 빨고 혀를 맞댔다. 채 받아 넘기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흘렀다. 게걸스럽게 그것들을 핥아 올리며 부러 젖은 소리를 흘렸다. 성교를 연상시키는 마찰음에 이긴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이게.”

어디서 사람을 홀려.

대꾸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호흡이 곤란하도록 혀뿌리까지 쑤셔 넣고 도우의 상반신을 완전히 압박한 이긴이 손쉽게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냈다. 별안간 공기 중에 노출된 음부가 서늘해, 아래가 젖어 있었단 걸 그제야 깨달았다.

손가락을 가볍게 두들겨 찰기 있는 물소리를 들려준 이긴이 입을 맞춘 채 쿡쿡 웃었다. 그가 뱉어 놓은 숨 덩어리가 목구멍을 간질이며 넘어가는 느낌에 몸을 비틀었다. 기다렸다는 듯 한쪽 다리만을 옆으로 벌린 이긴이 그대로 깊이 파고들었다.

흐으으응!

길게도 울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단 한 번의 삽입으로 절정에 올랐다. 배꼽을 중심으로 잔뜩 수축했던 긴장이 일시에 이완하며 팔다리로 저릿한 쾌감이 퍼져 나갔다. 나른하게 처져서, 도우는 하염없이 흐느꼈다.

“흑…….”

이런 감각은 무섭다. 아득하고도 강렬한, 언제고 적응될 것 같지 않은 쾌감의 간극. 오르가슴의 여파로 안쪽이 멋대로 출렁거려, 도우는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댔다. 얇은 뱃가죽 밑으로 툭툭 조였다 풀어지는 움직임이 손바닥에 생생히 전해졌다. 두려웠다. 제 몸이 제가 아닌 것처럼 외따로이 구는 게.

“아파?”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리는 물음이었다. 가만가만 눈물에 젖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손길에 기대 도우는 고개를 저었다.

“어지러워요. 배꼽이…… 어지러워요.”

“그게 뭐야.”

픽 웃은 이긴이 얕게 허리를 움직여 가볍게 안을 찧었다. 부드럽게 드나들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나는 조급함에 그녀가 혼자서 가버릴 동안 그는 그저 분신을 묻어 두기만 한 채 움직이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쾌감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연달아 살을 섞는 건 무리다.

무의식중에 그를 피해 침대 머리맡으로 달아나는 그녀를, 이긴이 완전히 포박했다. 애무도 없이 허리만을 끊임없이 쳐올렸다. 너른 품에 사로잡혀선 집요한 탐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 단단한 가슴팍에 짓눌린 유방이 이따금 틈이 벌어질 때마다 탄력 있게 부풀었다. 그럴 때마다 젖꼭지가 땀에 젖은 살갗 위를 이리저리 미끄러져 찌릿찌릿 울렸다.

“흣, 아앙, 응…….”

다시 시작된 흥분의 전조에 도우가 몸서리쳤다. 그럴수록 안은 팔이 단단히 조여들었다. 착실히 쌓인 자극에 발가락 끝이 절로 곱아들고 눈앞에 희게 바랜 순간, 저 높은 곳으로 쭉 끌어당겨지는 환희에 새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앙, 아아! 아아아앙!”

도우의 열락에 때맞춰 몸을 세운 이긴이 불근거리는 남근을 힘껏 들이박았다. 기다렸다는 듯 성기를 뿌리까지 받아 물고선 꽉꽉 쥐어짜는 내벽에 대고 고인 열기를 쏟아 냈다.

“후…….”

고환이 텅 비어 가는 여운에 가볍게 허리를 털며 무지개처럼 둥글게 등허리를 휜 여체를 감상했다. 얌전히 감긴 눈, 쌕쌕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를 보아하니 또 정신을 놓은 듯했다. 작은 자극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몸이었다. 견디지 못하도록 단시간 내에 극한까지 몰아붙인 것도 맞고. 그렇다 해도 기절이 너무 잦은 것 아닌가. 이래서 먼저 잘 먹여 놓고 데려오려 했던 건데, ‘서로’라는 한 단어에 눈이 돌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

제 탓임을 인정하면서도 이긴은 제 피부에 쓸려 딴딴하게 부푼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며 아쉽게 중얼거렸다.

“아주 제멋대로지.”

하여간 괘씸한 오메가라고 생각하며 곤히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기처럼 동그란 뒤통수에 속눈썹이 길다. 이어 코, 입, 뺨…… 남은 얼굴을 샅샅이 뜯어볼 동안, 씹어 삼킬 듯이 달려들던 질 내부의 기세가 잠잠해졌다. 이제껏 담가 놓았던 살덩이를 쑤욱 뽑아내자 으음, 하고 앙살스러운 신음을 뱉는다. 그러더니 손을 더듬어 체온이 없는 곳으로 옮겨 가는 게 아닌가.

“하!”

혼미한 와중에도 한사코 제게서 멀어지려는 도우가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억지로 제게 맞추는 대신, 이긴은 리모컨을 찾아들었다. 에어컨에 표시된 온도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때까지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는 온기를 찾아 본능적으로 이긴의 품을 찾아 기어들어 왔다. 동그란 머리통이 목 아래를 깊이 파고들수록 이긴의 눈빛 또한 요요히 빛났다.

***

자정이 가까워서야 도우는 눈을 떴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통화를 마친 이긴이 욕실을 눈짓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려면 씻어야 했기에 도우는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 온수가 찰랑거리는 욕조를 보고 멈칫했다. 같이 씻겠다는 뜻인가 싶어 뒤를 흘긋거렸지만,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주저하면서, 일단 몸을 담갔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얼얼했던 몸이 따스한 물에 녹녹하게 풀어졌다. 얼마간 콧구멍 위쪽으로만 머리를 내놓고 있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싶어 벌떡 일어났다. 남의 집 욕조에서 유유자적 목욕을 즐기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난생처음 해본 짓이 그렇게 낯 뜨거웠다.

목욕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나오자 왜 벌써 나왔냐는 듯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뗀 이긴이 시계를 확인했다. 도우도 채 식지 않은 목욕물이 아깝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해서 초조했다.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또 시작할 셈인가. 긴장하려는 찰나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당해져서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이 늦은 시각에 호출만 하면 즉각 상을 차려 낼 누군가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별개로 맛있는 냄새에 급작스럽게 허기가 돌았다.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이긴이 당연하다는 듯 식탁에 앉아 도우도 따라 자리를 차지했다. 맑은 연포탕과 메로 조림에 군침이 돌았다. 손수 그것들을 앞 접시에 덜어 주던 이긴이 귀찮다는 듯 냄비째 그녀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다 먹어.”

“왜 저만 먹어요?”

수저 대신 진한 커피 한잔을 든 이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은 손도 안 대는 걸, 설마 이걸 저 하나만 먹으라고 차려 놓은 건가 싶어서. 쉽사리 수저를 뜨지 못하는 도우를 이긴이 가볍게 비꼬았다.

“네 저질 체력에 맞추려면 난 굶어서 비실비실해져야지.”

“…….”

군말 없이 연포탕으로 숟가락을 가져갔다. 시원한 국물을 연신 떠먹다가 메로구이에도 손이 갔다. 큼직한 살점이 먹음직스럽게 떨어졌다. 짭조름하고 부드러운 생선 살이 달짝지근한 뒷맛을 남기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릇을 싹싹 비울 동안 이긴은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후식으로 준비된 작은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흔적조차 없이 해치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이제는 가보겠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밥만 먹고 일어서려니 염치가 없는 것 같아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을 때, 핥아 놓은 것처럼 깨끗한 디저트 접시를 보며 이긴이 뇌까렸다.

“그 새끼, 애를 완전히 망쳐 놨네.”

“…….”

그 새끼라 함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안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저를 보고 애라니,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망쳐 놓지 않았어요.”

뒤늦게 웅얼거렸다. 왜 목소리가 기어드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 못 하는 게 망쳐 놓은 거지. 여잔데 사내자식처럼 지내고 있고.”

“그건, 소장님은 저를 아끼셔서…….”

“망상 중증이네.”

“자꾸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지 말아요.”

“너야말로 그딴 식으로 그 새끼 치켜세우는 짓 그만해. 듣고 있기 짜증 나니까.”

짜증 나거나 말거나.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속으로 비딱하게 씹으며 다시 입술을 물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집에 간다고 말할 시간만 재고 있는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일어난 이긴이 침실로 향했다.

‘어쩌지.’

눈알만 굴리고 앉아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뒤돈 이긴이 도우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집에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은 혀끝에도 못 올렸다. 밤새 시달릴 예감에 벌써부터 눈앞이 흐려졌다. 오늘은 잘 수 있으려나. 내일은 플로리스트 강습이 있어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잔업을 쳐내야 하는데.

그러나 지레 긴장했던 것과 달리, 이긴은 침대에서도 서류를 검토하는 데 골몰했다. 비대칭으로 일그러진 눈썹과 좁아진 미간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생김새 말고는 닮은 점을 찾기 어려운 쌍둥이다. 보고서를 제출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스캔하듯 천천히 훑는 이안과 달리, 낱장을 훌훌 넘기는 이긴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 이따금 어느 지점을 자세하게 보곤 했다.

이렇게 집중해서 일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도우는 정신없이 이긴을 훔쳐봤다. 제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뒤늦게 자신의 행태를 깨달은 건, 어느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룩인 이긴의 입술 때문이었다.

“왜. 너무 잘생겼어?”

“…….”

도우는 황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이미 들킨 마당에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평소 짓궂게 굴던 걸 떠올리면 다시 물을 법도 한데 이긴은 이불을 도우의 목까지 올려 주었을 뿐, 다시 일에 열중했다. 그래서 ‘그야 소장님이랑 똑같이 생겼으니까.’ 하고 대꾸하지 못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보드라운 깃털로 갈비뼈 밑을 살살 건드리는 것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자각하자마자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이상해져, 도우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잠이나 자자.’

부러 말을 꺼내서 불을 붙이느니 그냥 잠드는 게 이득이다. 집에 가기도 늦었고, 택시값도 없고. 일찍 일어나 출근할 요량으로 도우는 베개에 옆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이미 한잠 자고 일어나서인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뒤척 꼼지락거리던 도우는 슬그머니 휴대전화를 찾아 들었다.

이안의 생일이 코앞이었다. 이미 연구원들끼리 돈을 모아 소정의 선물을 하기로 입을 맞추긴 했지만 도우는 보다 특별한 걸 준비하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담긴 어떤 것.

‘보자…….’

도우는 이미 수십 번 검색했던 선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여성 선물은 종류도 많고 의미도 여러 가지지만, 남성 선물은 몇 가지로 좁혀졌다.

넥타이, 시계, 지갑, 라이터 등등.

이제는 구체적으로 품목을 결정해야 했다.

‘일단 넥타이, 라이터는 제외.’

연구원들은 대부분 가운 안에 티셔츠 같은 가벼운 차림을 즐겨 입었다. 티셔츠처럼 자유로운 복장은 아니라도 이안 역시 갑갑하게 목을 죄는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라이터도 담배는 피우지 않으므로 생략.

‘그럼…….’

지갑과 시계.

좁혀진 두 후보를 놓고 도우는 비교적 쉽게 시계로 결정했다. 지갑이 여러 개면 소지품을 이리저리 옮기느라 번거로울 테지만, 시계라면 바꿔 차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낫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마저도 이안이 선택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음…….’

도우는 이안이 차고 있는 시계를 떠올렸다. 검정 가죽 끈에 은 테두리가 있는 심플한 형태였다.

‘비슷한 스타일이 좋을까?’

도우는 입시를 치를 때보다 더 집중했다. 인기 있다는 시계들을 늘어놓고 골몰하느라 뒤에서 이긴이 한참 구경하는 것도 몰랐다.

“누구 주게?”

이긴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황당하다는 어투가 거슬려, 도우의 마음에 즉각 반발심이 일었다. 무슨 상관이지.

“알아서 뭐 하게요. 신경 꺼요.”

“건방지기는. 다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됐거든요.”

“설마 이안 생일 선물은 아니겠지.”

“…….”

뜨끔한 도우가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에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선물, 잘못 골랐나.

대꾸라도 하듯 이긴이 실소를 터트렸다.

“하. 이걸 선물이라고.”

어이없어하며 이마를 친 것까진 그러려니 하겠는데, 뒤에 붙은 꼬리는 뭔가. 마치 그녀가 똥을 고르기라도 한 것처럼 한심해하다니. 눈을 세모꼴로 뜨면서도 도우는 제 안목이 그리 형편없었나 싶어 다시금 시계들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비교해 봐도 이안이 차고 있는 시계의 디자인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소장님 거랑 비슷한 거로 고른 건데…….”

이긴의 도움 따위 받고 싶지 않았지만, 몇 개월 동안 돈을 모아 큰맘 먹고 선물하는 이상 헛된 수고는 사양이었다. 이왕이면 이안의 마음에 쏙 들 만한 것으로 하고 싶었다. 쌍둥이인 만큼 취향 정도야 잘 알고 있겠지 싶어 도우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가격이 안 비슷하잖아.”

“…….”

아, 결국 그 얘긴가. 도우는 열어 두었던 귀를 딱 닫기로 마음먹었다. 내세울 거라곤 돈밖에 없으면서. 속으로 비아냥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도발은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이안의 인품을 걸고넘어졌을 땐.

“거들떠도 안 볼걸.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으면 감사한 거고.”

“소장님은 그런 속물 아니거든요!”

“아, 뭐, 그러시겠지. 네 골통 속에서 이안은 아주 고매한 성직자랑 맞먹는 것 같은데. 어련하시겠어.”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비뚤어진 걸까. 유전자는 똑같이 나눠 가졌으면서. 아무래도 발현에 문제가 생겨 편차가 극과 극으로 벌어진 게 분명하다. 특히나 인성 쪽으로.

도우는 이제 대꾸도 않고 검색 화면만 보았다. 얼추 디자인은 정했으나, 다이얼 종류나 베젤의 재질, 글라스 기능 등을 따지느라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가격 확인은 필수였다.

‘이거다!’

겨우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나서 지불해야 할 금액을 확인한 도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백만 원이 조금 넘었다.

‘비싸다.’

시계가 백만 원 단위라니. 한도 초과였다.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갈 건 예상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 70만 원 남짓 모으고 나서 이 정도면 되겠지 했는데 역부족이었다. 이것만도 최대한 아끼고 아낀 거라서 더는 여력이 없었다.

‘할 수 없지.’

조금 가격을 낮춰서 다시 찾아볼 수밖에. 한숨과 함께 내려앉은 어깨를 주무르는데 이긴이 또 불쑥 끼어들었다.

“설마, 그거?”

여전히 깔아뭉개는 말투였지만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아직도 보고 있네, 라는 감상 정도가 다였다. 정말, 왜 자꾸 참견이지?

발끈하며 돌아본 도우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실룩이는 이긴의 뺨을 보고야 말았다. 사람 기분 더럽게 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도 그렇게 별로인가 싶어 주눅 들었다. 그래서 무슨 짓이냐고 따지는 대신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요.”

더 싼 거.

따지고 보면 속물은 저다. 액수에 따라서 기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원망이 일었다가, 가라앉았다가. 무얼 선물해도 기뻐할 거라며 호언장담했으면서 머릿속으로 온갖 반응을 상상해 가며 이안을 재보는 게, 영락없는 속물이다. 그래서 이긴에게 이따위 질문이나 꺼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

“저…… 혹시 소장님 시계 얼마짜리인지 아세요?”

갑자기 공손해진 도우의 태도에 이긴의 한쪽 눈썹이 산처럼 뾰족해졌다. 한쪽 입매도 씩 올라간 걸 보면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같은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필터 끄트머리를 이로 씹으며 이긴이 물었다. 순하게 깜박거리다가 자신 없게 입술을 오물거리는 도우를 즐겁게 관찰하면서.

“음, 백, 아니…… 2백만 원?”

백이라고 하자 이긴의 눈빛이 한층 짓궂게 빛나서, 황급히 금액을 늘렸지만 소용없는 시도였다. 쿡쿡, 배까지 붙잡고 웃느라 이긴은 담배에 불조차 못 붙이고 있었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왕 지르는 거, 크게 지르자. 작심한 도우가 제법 자신만만하게 빽 소리쳤다.

“처, 천만 원!”

이번에도 실패였다. 아하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웃는 걸 보면. 그냥 저대로 숨이 넘어가 버렸으면. 도우는 곱지 않은 눈길로 이긴을 쏘아봤다.

“어라? 그 눈빛 뭐야. 착하게 굴어야 가르쳐 줄 마음이 생기지, 안 그래?”

겨우 숨을 고르고 담배에 불을 붙인 이긴이 첫 모금을 가볍게 빨아 내쉬며 도우의 머리를 개처럼 쓰다듬었다. 핥으면 녹을 것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에 감겼다.

“얼만데요?”

조심스럽게 다시 물어보면서, 도우는 뒤늦게 제가 부른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었다고 생각했다. 시계 하나에 무슨 천만 원씩이나. 아무리 그런 쪽으론 담쌓고 살아온 도우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는 건 안다. 그녀가 검색한 것들도 비싸 봤자 이삼백 수준이었고.

시계라고는 길거리에서 만 원 남짓한 돈에 사본 적밖에 없는 도우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시간을 알려 준다는 기능적인 면에서 도우의 싸구려 시계도 꽤 쓸 만했다. 비록 밤에 자기 전 몇 분 느려진 태엽을 감아 줘야 하긴 했지만, 중간중간 건전지를 갈아 주면서 녹이 슬어 버리기 전까지 꽤 오래도 썼다. 그런데 천만 원을 외치다니.

‘역시.’

천만 원은 너무 나갔다. 이긴도 그래서 웃었을 거다. 멋모르고 그녀가 바보 같은 소릴 지껄이니까.

“3억.”

“네?”

“이 아니라, 3천.”

그럼 그렇지. 사람 속도 모르고 눈치 없이 장난질인 이긴을 슬쩍 흘긴 도우가 마음속 선물 목록에서 시계를 조용히 삭제했다. 있을 법한 가격이라고 생각되면서도 3천은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70만 원을 모으는 데 꼬박 반년이 걸렸다. 3천은 몇 년간 먹지도 입지도 말고 월급을 몽땅 적금해야 모일까 말까 한 액수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꿈도 꿀 수 없는 돈.

“더해서 3억 3천.”

이안의 덧붙임에 통장 잔고와 월급을 쪼개 더해 보던 도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요?”

“내가 아는 정가는 그래. 또 모르지. VIP니까 할인받았을지도. 정 궁금하면 한번 물어보든지.”

“…….”

도우는 의욕을 상실했다. 손수건이나 할까. 이니셜 박아서.

‘갑자기 웬 손수건.’

후보 목록에도 없었지만, 이안이 손수건 쓰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설령 손수건을 쓴대도 그건 또 얼마나 비쌀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의욕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도우를 일깨운 건 이긴의 뚱딴지같은 물음이었다.

“내 선물은?”

“네?”

“내 생일 몰라? 알잖아.”

물론 알고 있다. 쌍둥이니까 이안과 같은 날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게 생일을 챙겨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요? 도우는 목구멍에 간당간당하게 걸려 있는 질문을 애써 삼켰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럼 정말 어떻게 하라고 일러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우가 묻지 않아도 이긴은 이미 희망 사항을 읊고 있었다.

“난 많은 거 안 바라. 어차피 네 선에서 살 수 있는 거 변변치 못할 테고.”

대체 무슨 소리지. 도우는 귀를 의심했다. 어째서 제가 선물할 거라고 단정 짓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추호도 그럴 마음은 없었다. 이긴이 일깨우기 전까지는 그도 생일이라는 걸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그러니까 부담 가질 것 없어.”

잠깐, 잠깐. 이건 아니지. 이안의 선물만으로도 머리도 지갑도 과부하인데.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도우가 더듬더듬 물었다.

“제가, 제가 왜요?”

“내가 원하니까.”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말에 도우는 대거리할 의지를 잃었다. 정 챙겨 주길 바란다면 플로리스트 강습에서 실습용으로 만든 꽃다발이나 안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적어도 돈은 절약할 수 있을 테니. 발칙한 속셈을 읽은 듯, 이긴이 심술궂게 이안의 일정을 일깨워 주었다.

“누구는 선물 고를 시간에 이안은 선보고 있겠네.”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말.”

결국. 이안이 다른 여자와 마주 앉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명치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심장이 뚝 떨어져 저 밑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휑하게 파헤쳐진 느낌에 무심코 가슴에 손을 대자, 두근대는 박동이 전해졌다. 멀쩡히 잘 뛰고 있는 게 이상하다. 이렇게나 먹먹하고, 이렇게나 저릿한데.

폭탄 같은 소식을 던져 놓고 이긴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바꿨다.

“네 생일은 언젠데.”

“안 가르쳐 줄 거예요.”

뾰족하게 쏘아붙이는 꼴에 이긴은 피식, 웃었다. 뾰로통하게 부푼 볼이 영락없이 골난 다람쥐다. 그게 뭐라고. 당장 사원 명부만 열람해도 나오는 걸 국가기밀이라도 되는 양 재는 건 뭔데.

아, 씨발.

이긴은 이를 악물었다. 들키지 않으려 괜히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걸 귀여워서 어쩌지.

뭐든 물고 빨고 싶은 충동에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이긴이 모른 척 중얼거렸다.

“그럼 이안에게 물어야겠군.”

단박에 반응이 돌아왔다.

“그걸 왜 소장님한테 물어봐요?”

“형제끼리 그런 얘기도 못 하나.”

역시 다람쥐는 놀리는 맛이 제격이다. 밤톨 같은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리는 게 빤히 보여 이긴은 속으로 웃었다. 조금 예뻐해 줬다고 앙알대며 감기는 걸 보면 새끼 고양이 같기도 하고. 아마 자신이 그러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12월 21일이요.”

결국 항복하고 제 생일을 실토한 도우가 도로 누워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다시 기획서로 시선을 돌린 이긴의 눈앞에 한겨울 풍경이 그려졌다. 스산한 바람에 떠는 마른 나뭇가지가 도우의 야윈 몸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그렇게 웅크려 자나. 겨울잠 자는 다람쥐처럼.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설원 이미지를 떨쳐 내고자 새로 커피를 내려 왔다. 오가는 동안 미동도 없어 잠든 줄만 알았던 도우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어디서 만나는데요? 선, 이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스토킹이라도 하려고?”

“…….”

스토킹이라니. 별 미친 소릴 다 듣겠다. 도우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단지 이안의 만남이 궁금했을 뿐이다. 홀로 상상하는 게 조금 궁상스럽긴 하지만.

“그냥, 소장님 어디서 만나시나 궁금해서…….”

“호텔.”

자나 깨나 그놈의 소장님, 소장님. 기르는 개도 저렇게는 안 하겠다 싶어 이긴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언짢은 기분에 상호나 위치도 생략하고 개떡같이 말했는데도 도우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중앙공원 사거리에 있는 거기요? 거기 뷔페 맛있다던데.”

눈을 끔벅거리며 순진하게 중얼거리는 도우에게 이긴이 대놓고 코웃음 쳤다.

“호텔 가본 적 없어? 누가 선보는데 뷔페를 간다고.”

“저도 호텔 가본 적 있거든요!”

발끈하는 꼴을 보아하니 끽해야 로비나 들어갔을까 말까다. 내친김에 이긴은 도우를 실컷 골려 댔다. 따분한 기획서보다 이편이 훨씬 재미있으니까.

“그거 알지? 호텔 정문에서 신발 벗고 들어가는 거. 팁 주면 안 잃어버리게 잘 보관해 준다고.”

“하! 누가 그런 유치한 거짓말에 속을 줄 알아요? 진짜 가봤다고요!”

듣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떤 새끼랑 들락거렸다는 건지. 희미한 짜증을 느끼며 담배를 빼 문 이긴이 불을 붙이며 채근했다.

“……누구랑.”

“소장님이랑요.”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진짜예요. 제가 왜 거짓말해요.”

물론 이긴 같은 사람이나 생각할 법한 불순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도우는 쉽게 알려 주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다. 별 대단한 정보도 아닌데 그랬다. 생일에 이어 두 번이나 순순히 알려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요컨대 어깃장이라는 걸 저도 놓고 싶었다. 비록 결심이 금방 깨지긴 했지만.

“그 새끼, 진짜 고자네. 호텔까지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야?”

확신에 찬 이긴의 어조에 말려든 게 패착이었다.

“고자……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안 서나 본데.”

아니면 진작 따먹었어야지. 중얼거린 이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님 게이인가?”

멀쩡한 여자를 남장시킨 이유를 알 것도 같다는 이긴의 말에 얼굴이 숯불처럼 활활 타오른 도우가 필사적으로 이안을 변호했다.

“학회 갔던 거예요! 소장님이 특별히 저도 접수해 주셔서 참석했던 거라고요. 포스터 게시 기회도 주시고,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그게 뭐야. 결국 일 시킨 거잖아. 포스터 만들라고 부려 먹은 거 갖고 감지덕지하기는.”

“진짜!”

역시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다. 세상 사람이 다 저처럼 비열하고 여자만 밝히는 줄 아는. 분해서 씩씩거리는 도우를 보며 이긴이 얄궂게 웃었다. 단순하기는. 저보고 고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길길이 뛸 게 뭔데.

“그렇게 부려 먹고 뷔페도 안 사주고.”

“더 맛있는 거 먹었어요.”

“더 맛있는 거 뭐.”

“불고기도시락이요.”

“뭐?”

하하하! 이마까지 치며 웃는 이긴이 못내 얄밉다. 왠지 지는 것 같아 도우는 열띠게 해명했다.

“그냥 불고기 아니었고요, 한우 불고기였어요. 협회에서 준비한 건데, 반찬도 많아서, 다들 맛있게…… 아, 진짜…….”

뭐라 변호해도 안 먹힐 걸 알았나. 잔뜩 약이 올라선 쏘아붙이더니,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먹이느라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이긴은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맛있게 빨아들였다. 도우의 눈물에 머릿속이 씻은 듯 상쾌해져 기획서 위를 어지러이 떠돌던 글자들이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악취미.

이렇게 고약한 인간이었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토 작업에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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