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불편한 감각이 도우를 깨웠다. 아랫배를 빠듯하게 채우고 있는 묵직한 이물을 뱃가죽 위로 더듬거리다가 은밀한 부위까지 손이 닿았다. 굵직한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공급하듯이.
‘호스?’
막연히 주유기 비슷한 것을 떠올리다가 잠결에도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그것을 제 몸에서 떼어 내려고 낑낑거렸다. 굼뜨게 엉덩이를 놀리다가 보통 깊게 박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도우는 엉금엉금 앞으로 기었다. 주우우우욱, 길게도 뽑혀 나가며 내벽을 온통 들쑤시는 느낌에 몸서리쳤다. 무언가 입구에 걸려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조심스레 한 발, 또 한 발을 앞으로 뗀 순간.
툭, 매트리스를 둔중하게 울리며 그것이 빠져나갔다. 무엇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린 도우의 눈에 울퉁불퉁한 구렁이가 들어왔다. 헉! 순간 숨이 턱 막혔다가 구렁이가 아닌 번들번들하게 젖은 성기라는 걸 알아챘다. 습기를 머금어 다소 불어난 살갗을 보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미쳤나 봐.’
제 발로 찾아와서 부린 추태가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썼다. 은연중에 이긴이 받아줄 걸 알았던 것도 같다. 그걸 믿고 마음껏 행패부린 자신이 부끄러워 낯이 홧홧해졌다. 중간에 발정난 자신이 매달렸던 것까지. 조각조각 떠오른 기억들이 일련의 순서대로 맞춰질 즈음엔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으으…….”
머리를 감싸 안자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을 두드려 겨우 진정하고 나니 갈증에 혓바닥이 사막의 모래를 삼킨 것처럼 버석버석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났다가 어지러워 주저앉자 다시 반복이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 저려 왔다. 그야말로 안팎이 괴로워 동그랗게 몸을 말고 꿈틀거리는 도우의 귓전에 혀 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떨어졌다.
결국, 그가 깬 것이다.
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감조차 잡치지 않았다. 이대로 후다닥 일어나 도망갈까.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세우는 도우의 뺨에 원통형의 무언가가 닿았다. 눈을 번쩍 뜨니 숙취 해소 음료로 유명한 제품이 놓여 있었다.
“마셔.”
“…….”
받아 들고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만지작거리자 그것을 앗아 간 이긴이 뚜껑을 휙 돌려 딴 후 다시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한약재 향이 옅게 나는 음료가 까끌까끌한 목구멍을 시원하게 적시며 내려갔다. 몇 모금 마시고 나니 겨우 살 것 같았다. 도우가 손에 쥔 것을 반 정도 비우는 동안 생수 한 병을 다 마신 이긴이 빈 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움츠러들었다.
“죄지었어? 뭘 그리 놀라.”
그렇지 않아도 죄송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이긴이 먼저 선수 치는 바람에 사과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앉아 있다가 여태껏 알몸이라는 걸 깨닫고 얼른 시트로 몸을 가렸다. 한참 늦은 반응에 이긴은 기도 안 찬다는 얼굴을 했다.
“대신 결혼해 달라며. 그럼 발가벗고 춤을 춰도 모자랄 텐데 그렇게 가려서야 쓰나.”
“아…….”
꼴사납게 질척거렸던 게 떠올라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안이 정혼 상대와 만나는 동안 저는 이긴을 찾아와 다리를 벌리는 대가로 이안의 결혼을 무산시켜 달라는 요구나 하다니. 이보다 최악일 수 있을까. 아무리 술김에 저질렀다지만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갔다.
“잊어, 주세요. 진심이 아니라, 술 때문에…….”
구차한 변명이었다. 술 때문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이안에겐 차마 내비칠 수 없는 추악한 진심. 이토록 더러운 속내를 간파한 사람이 하필 이긴이어서, 도우의 속은 한층 말이 아니게 되었다. 새 담뱃갑을 손바닥에 대고 탁탁 두드리며 빈정거리는 이긴 때문에 더더욱.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뭐가……요?”
“들어준다는 약속은 받고 벌렸어야지.”
“…….”
“거기만 헐고 본전도 못 찾아서 어째.”
이미 생채기 난 가슴을 후벼 파는 질 낮은 비난에 급기야 도우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나쁜 인간. 역시 악질이다. 핏줄이 불거지도록 두 주먹을 꽉 쥐고선 발끈한 눈으로 노려보는 도우의 얼굴에 이긴이 뻔뻔스레 담배 연기를 후, 불었다. 매캐한 냄새에 눈이 매웠지만, 도우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았다.
“욕이라도 하고 싶은 눈이네.”
태연하게 담배 연기를 다시 뿜으며 이긴이 피식 웃었다.
“누군, 누군 입이 없어서 욕 못하는 줄 알아요?”
“해봐.”
“…….”
“해보라고.”
움질, 움질, 도톰한 입술이 일그러지다가 마는 것을, 이긴은 빤히 지켜보았다.
약해 빠져선.
그래도 맥없이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는 것보단 지금이 백번 낫다. 혀를 찬 이긴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도우를 도발하는 법을 알았으므로.
“또 누가 알아? 대신 결혼하고 싶어질지.”
“……나쁜!”
어깨까지 부르르 떨어 가면서, 고작 그거 한마디 하려고. 마음도 제 속살처럼 여리기만 해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게 다야? 욕 한번 거창하게 하시네.”
“…….”
꾹 다문 입술, 불거진 아래턱이 가히 반항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온몸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그러잖아도 작은 몸뚱어리를 더 앙증맞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고작 그걸로 뭘 해보겠다고. 잘 봐줘야 열불 내는 다람쥐 꼴을 하고선.
이긴은 너그러움을 발휘하기로 했다. 다람쥐가 솟구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불타오르기 전에.
“따라 해봐, 씹새끼.”
“……뭐요?”
“해봐. 조금은 속이 시원해질걸. 이 씹새끼야, 해보래도.”
미친놈.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솔깃했다. 그녀 기준으로 최고 수위의 욕을 면전에 대고 하면 손톱만큼은 기분이 나아질지도.
“뭐, 싫음 말…….”
“이, 이 씹, 새끼야……!”
정말, 조금 후련하긴 했다. 자기가 하라고 부추겨 놓고 못마땅함에 비대칭으로 어긋난 이긴의 눈썹을 보니 더욱 그랬다. 누가 못 할 줄 알고?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잠깐이었다. 이긴이 새 담배에 불을 붙이기 전까지.
후우, 이긴이 길게 뱉어 낸 첫 모금을 마신 순간 쓴물이 역류하는 것처럼 목구멍이 아팠다. 방금 불붙인 연초 냄새가 유난히 독해 결국 참지 못하고 연달아 기침했다.
“욕하니까 존나 꼴리네.”
“……!”
긴장감에 몸을 덮은 시트를 더욱 바짝 끌어 올린 도우의 얼굴에 샤워 가운이 날아들었다.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하는 사이 몇 모금 피우지 않은 담배 허리를 뚝 끊어 버린 이긴이 먼저 거실로 향했다. 주섬주섬 가운을 두르고 따라나서자 맛깔나게 차려진 콩나물 해장국이 도우를 반겼다.
‘진짜 염치없다.’
걸신이라도 들린 걸까. 목구멍을 지나 미끄러지듯 식도를 넘어가는 수란을 두 술째 뜨며 망연히 생각했다. 김이 펄펄 나는 뜨끈한 국물이 뒤집어진 위장을 잠재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속이 탁 풀리는 시원한 느낌에 자꾸만 손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마저 먹어.”
“배불러요.”
“부른 배가 그 모양이야?”
여전히 매끈한 배를 보고 눈살을 좁힌 이긴이 손수 수저를 들었다.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웠는데도 남아 있는 국물 두어 숟갈마저 먹여야 기어이 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결국 남은 국을 싹싹 비우고 후식으로 나온 배 셔벗까지 몽땅 먹어 치운 후에야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대끼는 속이 가라앉고 나니 상황이 명료해졌다. 술에 잔뜩 취해 억지를 부리고 그 와중에 발정열까지 해소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선 욕설을 지껄인 주제에 해장국까지 거하게 대접받은 참이고.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때마침 업무 전화가 걸려와 이긴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도우는 현관을 보며 심하게 갈등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튀고 싶었다. 뒷일이야 나중의 자신에게 맡기고.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자고 결심한 도우가 소지품과 옷을 챙기기 위해 살금살금 침실로 향했다.
막 붕대를 몸에 다 감고 셔츠를 찾아 한쪽 팔을 꿰려 했을 때, 통화를 마친 이긴이 불쑥 들어섰다. 그대로 얼어 버린 도우에게서 셔츠를 앗아 던지고 붕대를 훌훌 풀어 냈다. 그러곤 양팔로 가슴을 가리고 얌전히 서 있는 도우의 눈앞에서 붕대에 불을 붙여 버렸다.
“어, 엇? 무슨 짓이에요!”
“나 만날 땐 이딴 거 하지 마.”
활활 잘도 타오르는 붕대를 처리한 이긴이 어디론가 전화했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속옷 치수를 대곤 몇 가지를 더 주문했다. 전화 한 통이면 다 되는구나. 아연한 상태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안도 이런 식으로 쇼핑할까? 하는. 검소한 평소 이안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부리는 모습이 언뜻 상상되질 않았다.
‘지금쯤…….’
분위기 좋은 곳에서 간단히 한잔하기에 나쁘지 않은 저녁이었다. 여자와 헤어졌을까. 아님 마음이 잘 맞아 계속 만남을 이어 가고 있을까. 다른 여자에게 웃어 주는 이안을 떠올리니 우울이 삽시간에 도우를 덮쳤다.
“아직도 속이 안 좋아?”
어두워진 도우의 낯에 이긴이 또 어디론가 전화했다.
“김 원장님. 접니다.”
무슨 숙취로 의사까지 부르나 싶어 번개처럼 튀어 오른 도우가 황급히 이긴을 말렸다.
“괜찮아요! 저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그럼 왜 그리 죽상이야.”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진짜 바보 같다. 정말 별 짓거리를 다 하는구나. 그것도 가장 이런 모습 보이기 싫은 상대에게.
“자신이, 없어요.”
“무슨 자신.”
“소장님 결혼, 축하해 줄 마음이 안 들어요. 그거 지켜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저런.”
이긴이 드물게 안타깝다는 시늉을 했다.
“너 같은 걸 누가 초대나 해준대?”
“…….”
“하난 해결됐고, 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저는 아예 고려 대상조차 아니라고, 축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자 얼얼해졌다. 아니, 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저 같은 미천한 오메가 따위, 비루먹은 개만도 못하다는 걸. 이안이 그동안 너무 다정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것뿐.
다정도 독이구나. 아주 달콤한 독.
중독의 끝은 어디일까. 너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이렇게 바라는 것조차 분에 넘치는 걸지도. 길 잃은 어린애처럼 서러워졌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차올라 주먹을 들어 연신 닦아 내는 도우에게 이긴이 별스럽다는 투로 되물었다.
“왜 벌써 결정된 것처럼 슬퍼하고 난리야. 또 누가 알아? 결혼하기 전에 뒈질지.”
세상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도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자기 형제한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담. 놀랍게도 장본인이 눈앞에 있었다. 도우는 이안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못 들은 셈 치기로 했다.
“그야, 누구라도 소장님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허,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담배를 빼 문 이긴이 불을 붙이자마자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어딜 봐서?”
“능력 출중하시고.”
“난 회사 대표야. 그 녀석은 한갓 연구소 소장이고.”
“가정적이고.”
“네가 살아 봤어? 가정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데.”
“딱 보면 알아요. 금욕적이시잖아요. 유흥 하나도 안 즐기고.”
성스럽기까지 한 이안의 분위기를 떠올린 도우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가정에도 충실할 거라고.
“난 난잡하고 퇴폐적이고?”
잘 아네. 알면서 뭘 묻는담.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뾰로통하게 부푼 도우의 볼을 이긴이 심술궂게 쿡 찔렀다.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아니에요? 되물으려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완전히 저만의 오해는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 그를 두고 떠돌던 소문 몇 가지를 읊었다. 여럿이 모여 광란의 파티를 즐긴다거나, 도박에 중독되었다거나, 약을 한다거나 하는.
어마어마한 소문에도 줄곧 따분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긴이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일축했다.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와선.”
“…….”
그런가. 도우는 혀로 핥아도 문제없을 정도로 깨끗한 바닥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섹스를 즐기는 거야 그렇다 쳐도 확실히, 난교나 도박, 그리고 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안과 마찬가지로 일과 후에는 퇴근해 집에서 조용히 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와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미나였던가. 그런 소식을 어디서 들었냐고. 다시금 떠올려 보려 했지만, 머리에 뿌연 연기가 낀 것처럼 불분명했다. 마치 누군가 이긴에 대한 부정적 정보만을 뇌리에 쏙 주입해 놓은 것처럼 전후 상황이 이어지지 않았다.
미나와 얘기했을 때처럼 머리가 아파지려 해 도우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이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 소문이 사실이 아닐까? 여태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면, 어쩌면 상대방이 이긴을 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럴 리가 없잖아.’
한순간 제 바람 때문에 이긴을 우위에 두었던 도우는 이내 자책했다. 어딘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자책. 이렇게 된 데는 이긴의 당당한 태도도 한몫했다. 절대적으로 자신이 뽑힐 거라고 믿고 있는.
“이사님은 불안하지 않으세요? 그분이 소장님 택할 수도 있는데.”
도우의 의문에 이긴은 간단히 답을 냈다.
“내가 왜. 뭐가 아쉬워서.”
그럼 이안은 뭐가 아쉬운 게 있단 뜻인가? 이긴이 너무 당연하게 나와서 도우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가 도리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어째 자꾸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는 찜찜함을 지우지 못한 채.
“남의 걸 탐내는 건 언제나 걔야. 내가 아니라.”
이안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귀가 쫑긋 섰다.
의심은 나빠.
스스로를 비난해 봤지만 혀는 마음과는 영 다른 소리를 빚었다.
“소장님이 다른 여자를요?”
“음, 정확히 말하면 나를 좋아하는 여자들이지.”
뭐야. 결국 자기자랑이잖아. 뒤는 안 들어도 뻔했다. 불온한 호기심은 금세 식어 버렸다.
“진짠데.”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은 이긴이 담배 연기를 후, 불었다.
“순진하시긴.”
“…….”
“그놈 속에 욕심 사나운 구렁이가 득시글거리는 것도 모르고.”
이안더러 구렁이라니, 반사적으로 발끈할 밖에.
“구렁이라뇨? 정작 속 시커먼 게 누군데.”
또 앙알댄다. 이긴은 필터를 씹으며 비딱하게 도우를 쳐다봤다. 이안 얘기만 나오면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가시가 거꾸로 돋아 제 살 파먹는 고슴도치.
“질투하는 거죠? 뺏기기만 해봐서.”
“맞아.”
웬일로 부정을 않는다. 미심쩍게 올려다보자 사악 휘는 눈매가 여간 요사스럽지 않다. 꼭 빨아들이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한번 뺏어 보려고.”
“…….”
뜻밖의 의욕에 뭐라 대꾸 한마디 못 했다. 뒤늦게 말도 안 돼, 중얼거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것처럼 보여?”
“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면 그렇다고 쳐.”
어디까지나 장난이다. 사람 마음 가지고 놀며 얼빠진 반응을 즐기는 질 나쁜 장난질. 아는데, 다 알면서도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씨, 씻을게요.”
“자고 가게?”
“…….”
능청스러운 물음에 아차 싶었다. 잠시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욕실로 피할 생각만 했지 뒷일은 고려하지 못했다.
“네, 네…….”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하고 욕실로 향했다. 등 뒤에 낮게 깔린 웃음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체하며.
***
팔을 한껏 뒤튼 후에야 겨우 원피스의 지퍼를 끝까지 올릴 수 있었다. 유난히 튀어나와 보이는 가슴이 어색해서 자꾸만 겨드랑이 근처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내리기를 반복했다. 사이즈가 다르면 그 핑계라도 대고 안 입을 텐데 이긴의 눈대중은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손 빌려줘?”
어색한 제 모습에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다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은 기척에 냉큼 튀어 나갔다. 사뭇 다른 차림에 이긴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가자고 재촉했을 뿐. 그렇게 들떴던 건 아님에도 괜히 혼자 난리였던 것 같아 머쓱해졌다.
잠자코 차에 올라앉자 허벅지가 드러났다. 서 있을 땐 무릎이 보일 듯 말 듯 한 길이의 스커트였는데 앉은 자세가 되니 쑥 올라가 짧아졌다. 가방이나 손수건이라도 있으면 가릴 텐데. 맨손으로 몇 번 치맛자락을 끌어 내리다 포기했다. 그래도 훤히 드러난 맨살에 온 신경이 쏠렸다.
가뜩이나 어색한 차림인데 맨다리를 훤히 내놓고 있으니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혼자서만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아마도 설렌 듯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가락을 본 순간에.
이 감정은 뭘까.
차창 밖으로 늦은 오후의 도심을 바라보며 도우는 스스로가 비뚤어졌다고 느꼈다. 치마 입은 제 모습에 별다른 내색 하지 않는 이긴이 못내 서운했다. 서운할 일이 아닌데도 그랬다. 너무 서운한 나머지 심사가 뒤틀렸다.
‘인형놀이도 아니고.’
남을 온통 들쑤셔 놓고선 홀로 태평스러워 보이는 이긴이 얄밉다. 일어나자마자 특별한 일이라도 되는 양 퍼스널 쇼퍼니, 스타일리스트니 불러들여 사람 정신을 쏙 빼놓을 땐 언제고. 그 동안 계속 휘둘려 왔지만, 이런 식의 휘둘림은 싫다. 점점 제가 흐려지는 것만 같아서.
외면했던 초콜릿 맛을 일깨우고, 못 먹던 생선구이를 손수 발라 주고, 끼니를 챙겨 플라워 강습에 데려다주고, 술주정을 받아주고, 이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처럼 치장을…….
도우는 은근히 기대하는 자신을 의식했다. 비단 이번만이 아님을. 그래선 안 되었다.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선, 모호한 관계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살 섞는 사이, 몸만 탐하는 사이여야 했다. 하여 도우는 뾰족해지려 애썼다.
“어디 가는 거예요?”
“고기 좀 먹자. 너 너무 핏기가 없어.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별 핑계를 다 대는군. 전에는 살이고 이제는 핏기인가. 도우는 삐딱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혈색이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원래 타고나길 하얬다.
설사 혈색이 안 좋다 쳐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래, 병자 같은 사람을 그동안 잘도 한계까지 몰아붙였겠다. 어젯밤만 해도 몇 번이나 정신을 놓았다. 잠깐 의식을 찾을 때마다 침실에서 거실 소파, 욕조 안, 다시 침대로 눈앞의 장면이 바뀌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래 놓고 잘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혼자서 화를 키운다는 자각도 없진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자꾸만 성질이 뻗쳤다. 누구든 툭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처럼.
잔뜩 심통 난 도우를 미러로 슬쩍 확인한 이긴이 갸웃했다.
“왜.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거 얘기해도 좋아.”
“싫어요.”
“뭐가.”
“아무것도 먹기 싫어요.”
생각하니 이상했다. 한껏 꾸미고선 예약된 식사를 하러 가다니. 일반적으로 그런 걸 데이트라 부르지 않나. 내가 왜, 당신과. 미쳤어?
이안에게서 저를 빼앗아 보겠다는 장난 같은 선언도,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소 어색해진 차 안의 분위기가 아예 얼어붙도록, 도우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냥 호텔로 가요.”
“뭐?”
“어차피 그게 목적이잖아요. 그깟 고기 안 먹어도 벌리는 건 문제없으니 굳이 공들일 필요 없다고요.”
“너…….”
“어차피 난 누워 있기만 하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마냥 누워 있지만은 않았다. 이긴이 이리저리 굴릴 때마다 자세가 바뀌곤 했으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누운 채였다. 힘없이 늘어졌단 표현이 더 맞았다. 그거나 저거나.
그건 그렇고 너무 천박했나. 도우는 곰곰이 조금 전 제가 내뱉은 말을 되감았다. 약간 노골적이다 싶은 말은 있었지만, 한 방 먹이는 덴 성공한 것 같았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면만 쏘아보는 이긴이 그 증거였다. 도우는 그에게 조금이나마 상처를 입혔다는 작은 성취감에 젖었다.
“그러니까,”
“입 다물어.”
“…….”
제가 예상한 것보다 이긴의 기분이 훨씬 상한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묘해졌다. 이유가 뭘까 궁리하던 도우는 그럴싸한 답을 찾았다. 말버릇이다. 다물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다니. 보통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어쨌거나 제 의사는 모두 전했기에 도우는 그의 소원대로 입을 다물었다. 통쾌한 기분도 잠시, 침묵이 무겁게 다가왔다. 호텔로 그냥 가자는 도발에도 차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그게 도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기어코 그가 원하는 그림대로 이루어질까 봐.
초조한 마음에 도우는 무의식중에 스커트를 말아 쥐었다. 그 바람에 잠시 이긴의 시선이 닿았다 떨어졌다. 앉은 자세 때문에 가뜩이나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간 스커트가 더욱 짧아진 꼴이 되었다. 도우는 말아 쥔 손을 풀고 구깃구깃해진 밑단을 펼치려 애썼다. 그렇다고 길어지는 것도 아닌데.
“싸구려 유혹이네. 좀 고급지게 할 수 없어?”
설렘 따위는 싹 지워진 얼굴로 이긴이 비꼬았다.
“창녀처럼 벌리니 마니 하지 말고.”
“창녀랑 다른 게 뭔데요. 이사님이 벌리라면 벌리고 빨라면 빨잖아요.”
“…….”
이긴이 이를 악물어 아래턱이 단단하게 불거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운전대를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는 것도. 이러다 한 대 맞는 건 아닐까? 솔직히 저 성질머리에 여태 손찌검을 참은 게 용하긴 했다.
‘때리려면 때리라지.’
그러나 도우가 생각하는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목적지였던 듯한 한우 전문점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뿐. 버선코처럼 멋들어지게 휘어진 한옥 지붕 끝을 올려다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나 차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뭐 하는…….”
손잡이를 당기다가 허벅지 안쪽을 파고드는 손길에 도우의 숨이 턱 막혔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막다른 곳에 다다른 손은 망설임 없이 속옷을 젖히고 중지를 푹 쑤셔 넣었다. 흣, 급하게 숨을 삼키는 도우를 관찰하는 눈엔 서늘한 냉기마저 감돌았다.
“여기선…….”
벌써 발긋해진 눈으로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된 주차장. 비록 그들이 탄 차가 구석진 곳에 주차되어 있긴 하지만, 언제든 다른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상황에 아연해졌다. 치마 속에 박힌 팔을 떼어 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긴의 손가락은 이미 젖기 시작한 음부를 자유롭게 들락거리고 있었으니까.
“네 말이 맞아.”
이긴이 인정했다.
“목적은 섹스지. 안 그래?”
“호, 호텔로 가요. 여기서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긴의 입술이 냉혹한 선을 그렸다.
“어차피 넌 내가 벌리라면 벌리는 창녀인데, 굳이 비싼 호텔에 묵을 필요가 있나. 길바닥도 과분하지.”
“……그건, 그 말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이긴이 속옷을 잡아 내렸다. 돌돌 말린 팬티를 종아리에 걸쳐 두고 다시 안을 희롱했다.
“하, 흐…….”
“나는 싫은데 이 짓거리는 좋아?”
진짜 좋아하나 보네. 박혀 있던 검지와 중지를 빼낸 이긴이 눈앞에서 가위질을 해 보였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두 손가락 사이에서 투명한 실이 거미줄처럼 늘어났다.
“으응…… 아, 너무…….”
“좋아한다고 해.”
싫어.
필사적으로 흔드는 머리통이 가소로워 이긴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페로몬은 아직 풀지도 않았는데 손가락이 박혀 있는 쪽 팔뚝이 다 젖도록 줄줄 흘리면서 싫단다.
“그럼 나 말고 손가락이 좋다고 해.”
“그거 무슨, 아흣! 헛, 소리…….”
“인색하네. 손가락 하나 정도는 좋아해 줘도 되잖아.”
“싫…….”
완강히 고개를 흔들던 도우의 눈에 이긴의 휴대전화에 찍힌 번호가 들어왔다. 이안의 번호였다. 하필 이런 때에. 도우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받을까? 선택은 네가 해.”
“제발…….”
도우의 애원에 비릿하게 미소 지은 이긴이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이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뭐 해?
“알아서 뭐 하게.”
―가족 모임 잊었어?
한심하다는 투의 질책에 이긴이 느릿느릿 대꾸했다.
“아아. 누굴 좀 만나느라.”
―누구.
도우의 얼굴이 급기야 파랗게 질렸다. 그런 그녀를 감상하며 이긴이 느긋하게 앞섶을 풀어 놓았다. 튕겨 나온 흉흉한 성기가 우뚝 솟아올랐다.
“누군지 말하면.”
소리 없이 고개만 젓고 있던 도우는 서서히 그녀를 옭아매는 페로몬에 쉽사리 체념했다. 가슴이 쩡 얼어붙도록 차갑지만 언제나 그녀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체취에, 머리로는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도우의 몸은 착실하게 허리를 굽혀 종아리에 걸쳐 있던 속옷을 마저 벗었다. 양발을 빼내자 팬티의 축축하게 젖은 중심부가 확연히 드러났다. 색이 짙어진 속옷을 확인한 이긴이 비스듬히 웃었다.
“내 위로 올라와.”
이긴의 노골적인 명령에 이안이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너겠어?”
얕은 한숨이 휴대전화 너머에서 흘러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숨 쉬는 이안을 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일 때, 스스로를 달래고자 내쉬는 야트막한 호흡. 이안의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우의 가슴이 죄어들었다. 제가 일조하고 있기에 더더욱.
―중요한 상대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왜. 궁금해?”
어떻게 할까.
이긴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바꿔 줄 기세로. 더 지체하지 않고 도우는 고개를 내렸다. 막 선단을 입에 물었을 때, 뒤통수를 붙잡아 올린 이긴이 다시 한번 제 위로 올라오라는 뜻을 명확히 했다.
―그다지.
이안이 이긴의 섹스 파트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도우는 운전석 쪽으로 넘어갔다. 운전대를 잘못 건드릴까 주의하면서 이긴의 골반 양옆에 무릎을 대고 절반쯤 꿇은 자세를 취했다. 기둥을 부드럽게 위아래로 쓸던 이긴이 입구에 끄트머리를 조준했다.
―회장님께서 늦게라도,
“아, 읏……!”
―…….
천천히 내려앉으려 했는데, 그녀의 허리를 그러안은 이긴이 힘을 주어 단박에 주저앉혔다. 새된 신음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비명을 내지른 입술을 두 손으로 틀어막은 도우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알아챘을까.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그것도 잠시, 양 손목을 그러쥔 이긴이 밑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응! 하읏, 아, 응! 읏, 응!”
실낱같은 이성에 의지해 소리를 내지 않으려 억지로 입술을 붙이고 혀를 깨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가감 없이 흘러나온 교성이 차체 내부를 가득 메웠다.
“좋, 아……응, 읏, 더, 하응!”
“후으…… 누가 들어 주니까 흥분돼? 아주 씹물을 줄줄 흘리고. 변태네. 응?”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이안이 차갑게 뱉었다.
―……늦게라도 참석하라고 하셔.
“못 간다고 전해.”
뒷말은 관심 없다는 듯 종료 버튼을 누른 이긴이 휴대전화를 아예 뒷좌석으로 던져 버렸다.
“이게 또 혼자만 가려고.”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홱 꺾여선 늘어진 도우를 완력으로 띄워 놓은 이긴이 거칠게 밑을 박아 올렸다. 오로지 사정만이 목적인 듯 반복적인 출납 끝에 이긴이 골반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푹 박혀듦과 동시에 접합부로 젖빛 씨물이 뜨뜻미지근하게 흘러내렸다.
“하으흐…….”
정액이 안을 채우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이 도우를 휘감았다. 본능적인 기쁨에 취한 것도 잠시, 이긴이 끌어낸 열기가 식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수리가 차가워졌다.
‘이안이 다 들었어…….’
몰려오는 자괴감에 빠져 도우는 목 놓아 흐느꼈다. 엉망으로 발가벗겨진 몸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차 안을 들여다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더한 짓을 했으니까.
“흑…….”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도우를 보며 사정 후의 쾌감 같은 건 싹 가신 낯으로 이긴이 다그쳤다.
“왜 울어. 창녀 취급 받길 원한 건 너면서 왜 우냐고.”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냥 다 두렵다. 덮어놓고 겁부터 난다. 이안의 냉대도, 이긴의 다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