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0)

13

「소장님께 다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니 내기는 끝이에요.」

고심 끝에 문자를 보냈지만, 이긴에게서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저질러 놓고도 두려운 마음에 문자를 보낸 첫날은 휴대전화 전원을 꺼놨었지만, 다른 업무마저 엉망이 되는 바람에 도로 켜놓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시계를 보면 고작 30분 정도만 흘러 있을 뿐이다. 사흘이 3년처럼 길다고 생각하며 이안의 연구실로 향했다.

“잠시만.”

여느 때처럼 따뜻한 차와 함께 내밀어진 레몬 사탕을 쳐다만 보다가 이안이 잠시 다른 일을 하는 사이 껍질을 까 알맹이를 조용히 주머니에 넣었다. 주사기를 가져온 이안이 혈관을 더듬는 동안, 도우는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어떠셨어요?”

“응?”

“……상대 여자분이요.”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이안이 되물었다.

“궁금해?”

“그냥…….”

어딘지 벽이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간단히라도 얘기해 줄 법한데, 문득 이긴이 비웃었던 게 생각났다. 너 따위를 결혼식에 초대나 해줄 것 같냐고. 어디까지나 이긴의 의견일 것이다. 이안은 다르니까. 다른 알파와는, 다르니까.

‘정말?’

문득 든 의구심을 열심히 부정했다. 이안은 정말 다른 알파들과는 다르다. 오메가를 위해서 밤낮을 잊고 연구에 매진하는 그니까. 누구보다도 오메가의 생리적 특성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는데, 그런데.

왜 자신이 없을까.

이긴 때문이다. 도우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긴만 아니었다면, 이런 의심 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이런 질문 따위도 하지 않았을 거다.

“결혼식 저도 초대해 주실 거죠?”

“…….”

대답이 없었다. 마치 질문을 못 들은 것처럼 눈을 마주치고 웃는 모습에 가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미묘하게 틀어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도우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소장님, 이번 토요일에 잠깐 만나 주실 수 있어요?”

“토요일? 별일 없기는 한데, 왜?”

“다음 주에 소장님 생일이잖아요. 미리 챙겨 드리고 싶어서…….”

“그래, 그러자.”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소장님은 몸만 오세요. 알았죠?”

“좋아.”

순순히 응하는 이안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지어 낸 건 웃음도 찡그림도 아닌 어색한 실룩임뿐이다. 도우는 당초 계획에서 한참 벗어난 선물을 떠올렸다. 그토록 여러 날 고민해 놓고 막상 준비한 건 시계도 지갑도 아닌 향초였다. 레몬버베나 향이 나는 초. 어차피 제 초라한 예산으로 고가의 선물은 불가능했다. 대신 근사한 한 끼를 대접하기로 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기대할게. 고마워.”

모처럼 이안과 단둘이 만날 약속이 잡혔는데 설레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는 레몬 사탕을 의식하며 물러 나왔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안 먹어 놓고 입에 넣은 척.

멍하니 생각하다가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연노랑 사탕을 손바닥 위에 꺼내어 놓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걷느라 앞에 누가 있는지 몰랐다.

“정신 빼놓고 다니지.”

“어…….”

이긴이었다. 그가 왜 여기 있지.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다가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임을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이쪽으로 걸어온 듯했다. 이 길이 그렇게 익숙했나. 언제부터? 도깨비에게 홀린 것만 같아 얼이 빠졌다.

쯧쯧.

혀를 찬 이긴이 매시근한 도우의 낯에 대고 연기를 후, 뿜었다.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쏟아졌다. 콜록, 콜록, 흡, 콜록……. 눈물이 맺히도록 콜록대는 꼴에 이긴의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에 지난 사흘간 혼자 애 끓였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뭐야.”

독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는 도우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이긴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담배 끝을 이로 꽉 물고 미간을 구기는 게 끔찍한 장면이라도 목격한 것 같다. 무심코 따라간 시선 끝에는 슈가바인 덩굴을 철사에 엮다가 실수로 절반가량 부러진 손톱이 있었다.

“너 자신을 좀 소중히 여겨. 밴드는.”

겨우 손톱 부러진 것 갖고 뭘 밴드씩이나. 딱딱한 조갑 밑에만 있다가 드러난 여린 살이 시리긴 하지만 몇 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 않을 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안다. 오히려 밴드를 붙여 두는 게 회복에는 더디다.

“손톱만 그런 게 아니야. 잘 먹지도 않고, 그러면서 이상한 주사나 맞고. 그 실험, 당장 그만둬.”

이안에게 들렀다 온 걸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알았지. 의아해하다가 손바닥 위에 있는 레몬 사탕에 눈이 갔다. 멋쩍게 주먹을 쥐어 내리고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가봐야 해요.”

“…….”

“실험 돌려야 해서.”

구차한 변명을 덧댔다. 이젠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멈칫멈칫 걸음을 떼다가 휙 돌아서 도망치듯 그의 곁을 벗어났다. 어지러이 떨어져 있던 꽁초 여러 개가 이상할 정도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뭐야.’

꼭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

초반부터 김이 샜다.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지배인이 이안을 보고 알은체를 했을 때부터. 이안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는 걸 깨닫자, 큰맘 먹고 이곳을 예약했던 자신이 초라해졌다. 모처럼 준비했는데 풀죽은 걸 알았는지 이안이 위로를 건넸다.

“여기 정말 좋아하는 곳이야. 마음이 통했네.”

“네. 여기. 비싼 거로 고르셔야 해요?”

읽을 수는 있어도 알아먹을 수 없는 음식명이 잔뜩 적혀 있는 메뉴를 넘겼다. 이안이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주지 않기를 바라며. 거하게 대접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만큼 스테이크가 나와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식사를 마칠 무렵 호기롭게 계산서를 주문한 도우는 다시 한번 실망했다.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어? 언제…….”

이안은 당황한 도우가 귀엽다는 듯 웃었지만, 도우는 그럴수록 움츠러들었다.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다음에.”

다음이 있을까. 비정상적인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도 많다는 건 도우도 알고 있다. 일반적인 선에서 결혼 상대가 있는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건, 그걸 표출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오메가임에도 제 안에 그런 기준이 바로 서게 된 건 바로 이안 덕분이었다. 이안이 저를, 오메가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줬으니까.

“좀 걸을까?”

다음 코스로 정해 둔 카페도 어차피 그가 부담할 것 같아 잠시 주의가 흐트러진 사이 이안이 산책을 제안했다. 발갛게 지는 석양을 정면으로 받으며 뒤를 따랐다. 앞선 이안의 모습은 검은 인영으로만 존재했다. 눈빛도 표정도 보이지 않는 이 순간, 비로소 이안과 제대로 마주했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냄새 좋다. 무슨 꽃이야?”

“아, 히아신스요.”

곁으로 다가와 그녀가 직접 엮은 꽃다발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안을 보며 도우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식사에 곁들인 와인이 독했나? 의아해하면서.

“히아신스. 예쁜 이름이네.”

“이름보다 꽃말이 좋아서요. 꼭 소장님께 드리고 싶었…….”

모처럼 공통의 관심사에 신이 나서 떠들다가 뒤늦게 아차 했다. 너무 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꽃말이었다. 어차피 모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속에만 묻어 두는 것과 공공연히 떠드는 건 다른 문제니까.

“꽃말이 뭔데?”

“…….”

“응?”

타오르는 해보다 더 빨개진 도우에게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붙인 이안이 장난기를 숨기지 않고 반복해 물었다.

“영원한.”

“영원한.”

“……사랑이요.”

이건 고백이다.

태양이 마지막 몸부림처럼 뿜어내는 강렬한 황금색 빛이 도우를 에워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서, 마주 선 이안의 얼굴조차 가려 버린 빛 속에서 도우는 그동안 고이 접어 두었던 마음 한 귀퉁이를 끄집어냈다.

“사랑……해요.”

“…….”

“정말, 많이.”

이안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토록 밝은데도.

“사랑해요.”

다시 한번 또렷이 힘주어 말하고, 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빛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듣고 싶기도 했고,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환상 속에 있는 것 아닐까. 오랜 갈망이 빚어낸 환상.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어 이제는 현실감마저 없어진 이때, 부드러운 손길이 도우의 정수리에 가볍게 얹혔다.

“나도 그래.”

“…….”

눈물이 고였다. 저와 같다는데, 같은 마음이라는데, 실은 같지 않다는 걸 극명히 깨달아서. 눈을 뜨니 거짓말처럼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땅거미가 드리운 어둑어둑한 거리, 어슴푸레한 그림자들. 이제는 이안의 얼굴이 분명히 보였다. 가면처럼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그럼에도 도우는 미련을 떨었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무슨 부탁? 말해 봐.”

“한 번만…….”

“…….”

평생 간직할 기억 하나 정도는 갖고 싶었다. 이안과 하나로 이어지는 경험만큼 간절한 게 있을까. 설령 아픔으로만 점철된 기억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그 품에 온전히 안겨 보고 싶었다.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면서도, 한 번만. 단 한 번만.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요?”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줄곧 바닥만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던 도우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무어라도 반응을 보고 싶었다. 눈썹의 가느다란 떨림 같은, 찰나의 미약한 반응일지라도.

“……!”

마지막 남은 용기를 박박 긁어모아 이안을 직시한 도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안은 몹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은 것 자체가 모욕이라는 듯. 그녀 앞에선 항상 갈무리 해두는 페로몬까지 살벌하게 일렁였다. 삭막한 혹한기의 겨울이 눈앞에 펼쳐졌다. 날선 냉기가 도우의 가슴을 모질게 할퀴었다. 가감 없이 내비치는 상한 기분에 도우는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해졌다.

“죄송……해요.”

어느 정도는 건방진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이안도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을 거라는, 아주 조금이라도. 그래서 다소 비굴하더라도 도우는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수많은 시간 동안, 야릇한 분위기가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아슬아슬한 긴장을 흐지부지하게 풀어 버리는 건 언제나 이안이었다. 숨의 결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 피식 웃는 식이었다. 모든 게 장난이었다는 듯.

그럴 때마다 헷갈렸다. 저와 같은 마음인지 아닌지 가늠하느라 밤이 새도록 뒤척이며 여러 날을 꼬박 할애했다. 답 없는 고민이었다. 결론은 늘 같았다.

그게 무슨 소용인데.

이안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좋아하면 그만인 거지. 뭘 바라는데. 이만큼 돌봐 준 것만도 어딘데, 왜 자꾸.

욕심이야. 욕심이라고. 너 정말 욕심이 지나쳐.

스스로를 자꾸만 채찍질하던 시간이 있었다. 이따금 불쑥 치미는 의구심을 애써 모른 척하던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때가 왔다. 건너야만 하는 외나무다리가 있는데 언제까지고 그 앞에 주저앉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사랑, 한다고.”

“맞아.”

이안이 순순히 시인했다. 너무 매끄러워서 따져 물은 쪽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도우는 꿋꿋이 뚫어 나갔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이런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게 자명해서. 퇴색된 채로 체념 속에 흘려보내게 될 시간이 막막해서.

“여자로 보이는 ‘좋아해’인가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이긴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수없이 부정하며 반박하고 쏘아붙였던 말들이, 화살이 되어 가슴을 찌르고 쑤셨다. 뚝, 뚝. 굵은 눈물방울이 이안과 그녀의 발치에 흩어졌다. 도우의 머리 위로 낮은 한숨이 떨어진 건 그때였다. 몹시 성가시단 의미의 한숨.

여실히 흔들리는 도우의 앞에 이안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다정을 되찾은 얼굴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이 어린아이를 다루듯 부드러웠다.

“설마 내 마음을 오해한 건 아니겠지. 널 좋아하는 건 진심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어째서 그것을 모르냐는 듯, 이안은 안타까운 투로 친절히 일깨워 주었다.

“넌 내 오메가니까.”

명료한 답변에 도리어 멍해졌다.

“도우야.”

“…….”

“왜 자꾸 울어.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변하는 건 없어. 이안이 속삭이듯이 단정 지었다. 그가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도우 너는 계속해서 내 오메가로 남아 있을 거라고. 오메가는 그런 부속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누구보다 도우의 자립을 응원하고 손수 이끌던 이안이었는데. 그녀의 삶이 곧 이안의 바람 그 자체였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한낱 오메가일 뿐이라고?

“이번엔 못 들은 걸로 할게. 다음부턴.”

“…….”

“같은 실수 두 번 하지 말자.”

“…….”

“알았지? 대답.”

“네…….”

실수.

온 힘을 끌어모아 내보인 속마음은 한순간의 치기 어린 잘못이 되었다. 이안이 상냥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해 집으로 바래다주는 동안, 도우는 얼마 되지 않는 대화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어차피 이안의 오메가라고.

그렇게나 확고한 선언이 또 있을까. 그런 순간을 바라던 날도 있었다. 이안에게 종속되는. 그런데 어째서 조금도 기쁘지 않은지. 도우는 견고한 새장에 갇힌 것 같은 무력감에 싸였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주인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새.

“들어가 봐. 주말 잘 보내고.”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요즘 내가 소홀했지. 다음에 더 좋은 시간 보내자.”

“……네.”

다음.

도우는 가만히 두 음절을 혀끝에서 굴려 보았다. 다음, 다음……. 몇 번을 반복해도 절로 입이 다물어지게 만드는 단어였다. 이제 그 다음이 제가 기대했던 다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런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아.’

이렇게 되고 나니 영원이란 말처럼 부질없는 게 또 있을까 싶어졌다. 언젠가 잘라 내버린 히아신스 꽃대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시들어 버린 관계. 새 성장을 방해하는, 잘라 버려야 할 인연. 그건 마치 팔다리를 잘라 내는 것과 같아서 도우는 한동안 숨조차 죽인 채 가슴을 쥐어뜯었다.

깨진 가로등 밑에 웅크려 울음을 삼키는 도우를 보고 지나가던 행인이 쓰레기봉투인 줄 알았다며 욕설을 뱉었다. 쓰레기라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건 정말 자신이 쓰레기여서인지, 그간 이긴의 거친 언행에 단련되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도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 가게로 향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 도우는 전처럼 소주병을 들고 동네 놀이터에 자리를 잡았다. 전처럼 엉망으로 취할 마음은 없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조금만 비우면 적당히 알딸딸해지겠지. 하룻밤쯤은 아무 시름 없이 잠만 자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연달아 초록색 병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 병을 거의 다 비웠음에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저번과 뭐가 다른가 생각하다가 빗발이 점차 굵어지는 비에 탓을 돌렸다. 깜박 정신을 놓으려 해도 차갑게 뺨을 때리니까.

아, 처량하다.

두어 모금 남은 소주를 홀짝이다 작게 혼잣말했다. 비에 젖은 쥐 꼴을 하고서 그네를 타고 흔들거리는 꼴이라니.

“쥐? 쥐…….”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소주병을 옆구리에 끼우고 열 손가락을 쫙 펼쳤다. 제가 표식 삼아 실험 쥐의 발가락을 잘랐듯이 이안도 제 손가락을 자르지 않았을까 해서. 걱정과 달리 열 손가락은 모두 잘 붙어 있었다. 기쁜 마음에 도우는 손가락을 굽혔다가 쫙 펴기를 반복하며 소리쳤다.

거봐. 이안은 나를 이렇게나 아낀다고.

혀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져 입안에서 웅얼대다 말았지만, 진작부터 취해 있어 알지 못했다. 그저 이안이 제 오메가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지 않은 것만이 고마웠다. 고마운데, 정말이지 너무 고마운데 왜 이리 속이 아릴까. 저를 이리도 소중히 대해 주는데.

“오메가 주제에…….”

배가 불러서 그러지, 아주 분에 겨워서. 옹알이처럼 혀를 놀리며 옆구리의 술병을 다시 입에 댔다. 그나마도 조준을 못해 병 모가지와 손가락이 함께 입안에 들어왔다. 혀를 날카롭게 긁는 느낌에 병이 깨졌나 했는데, 확인해 보니 부러진 제 손톱이었다. 이 손톱을 두고 못마땅하게 이맛살을 구기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

당시에는 모른 척했지만, 이긴은 분명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이긴뿐이니까. 바닥이 꽁초 밭이 되도록, 얼마나 기다렸을까. 고작 오메가 따위를.

“나빠.”

정말 질 나쁜 남자다. 그런 남자와 얽혀도 더럽게 얽혔다. 어쩌면 잘라 버려야 할 시든 줄기는 이긴 쪽인지도 모른다. 시든 줄기가 아니라 아예 뽑아 버려야 할 독초인지도. 그것도 아주 새파랗게 돋아난 독초. 가까이해선 안 되는.

‘위험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긴이 떠올랐다. 이안의 얼굴을 하고서 못된 말을 뱉고, 못된 짓을 저지르는.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 도우의 손은 이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긴이 혼약 상대와 만나고 있다는 건 안중에 없었다. 이안이면 몰라도, 이긴이 누굴 만나든 관심 두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에 이긴이 떨떠름하게 받았을 때도 제가 먼저 연락한 건 처음이어서 그렇겠거니, 했다.

―뭐야.

“소장님한테 고백했어요.”

―…….

“이사님 말이 맞았어요. 다시는, 흑…….”

이미 볼이 흠뻑 젖어 있었다. 우는 걸 자각도 못 하다가 뒤늦게 깨닫고선 그게 또 서러워 흐느꼈다.

―어디야.

“알면 뭐 하게요? 만나러 오게요? 좆질…… 그거 하러요?”

―무슨…… 취했어?

“와요. 와서 안아 주세요. 소장님 닮은 얼굴로 안아 달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이긴도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여러 사람 어이없게 만드네. 실소하며 도우가 보이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허공에 대고 손사래 쳤다.

“됐어요. 오기 싫음 말아요. 어차피 소장님 아닌 건 다 똑같은데. 아무하고나 자버리지 뭐.”

―이게 미쳤나.

잔뜩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욕설을 뇌까린 이긴이 다시 한번 그녀의 위치를 확인했다.

“놀이터에 있을 거예요.”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

그것으로 통화는 끝이었다. 도우는 그네에 앉아 초라하게 흔들거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어? 아…….”

동네에 놀이터가 두 군데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어느 쪽에 있는 건지 알려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도 다시 전화를 걸진 않았다. 이긴이 저를 찾아 헤매고 다녔으면 했다. 그 정도 응석쯤은 부려도 될 것 같았다. 그가 받아 줄 걸 알아서.

***

늘어지게 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정오도 지나지 않았다. 거실로 나오자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건 뭡니까.”

두 벌씩 놓인 식기 세트를 가리키자 자신이 지레짐작했음을 깨달은 헬퍼의 낯이 하얘졌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함께 식사하시는 줄 알고…….”

“식사 안 합니다. 다 치워요.”

생수만 들고 도로 침실로 향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다시 자야지. 그렇지 않으면 딱히 시간을 죽일 일이 없었다. 지독히도 따분했으니까. 실컷 갖고 놀던 장난감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으니 당연한 건가.

창녀 운운에 어린애처럼 비죽이던 얼굴이 뿌연 연기 사이로 그려졌다. 밤톨 같은 머리통 한번 보자고 매일 회사 복도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그래 봤자 고작 한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이긴은 휴대전화를 켜 이제는 외워 버린 마지막 메시지를 습관처럼 확인했다.

「소장님께 다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니 내기는 끝이에요.」

“잘도.”

쭈뼛대는 꼴이 눈에 선했다. 그러고도 아무 말도 못 했을 공산이 크다. 정작 그 새끼는 다른 여자랑 결혼하려고 눈깔이 뒤집혔는데.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긴이 그 알파 여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름이 유나라고 했던가, 유영이라고 했던가. 뭐가 됐든. 노인네 소원이라니 얼굴은 보여 줘야겠지. 생각해 보니 여자 쪽이 좀 웃겼다. 어차피 똑같은 낯가죽, 두 번이나 봐서 뭐에 쓰려고.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관계인데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그런 면에서 이안의 하고 다니는 꼴이 같잖다. 그 알파 여자와 결혼했을 때 자신의 지분을 모두 물려주겠다던 조부의 선언은 어디까지나 이긴에 한해서였다. 그런 걸 단단히 착각하고 등신 짓거리 중인 게.

“골 때리지, 하여간.”

하도 우스워 그냥 내버려 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후회가 되었다. 처음부터 기도 못 펴게 밟아 줄걸.

“씨발.”

내키는 대로 지껄이며 담배를 비벼 껐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약속 시간이 되어 옷을 챙겨 입으며 밖을 보니 가뜩이나 귀찮아 죽겠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날씨마저 좆같다고 중얼거리며 운전대를 잡았다. 약속 장소인 호텔 근처는 번화가라 길이 꽉 막혔고, 덕분에 이긴은 팔자에 없는 사과를 해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만 그럴싸할 뿐,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에 여자가 살짝 당황했다. 금세 여유를 찾긴 했지만.

“괜찮아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도로에 차가 가득해서.”

“네.”

이긴은 빈말로라도 이해해 줘서 고맙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담배를 꺼내려다가 금연 표지를 확인한 후,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커피를 주문했다. 상대방은 무슨 메뉴를 시킬 건지 묻지도 않았다. 서둘러 같은 것을 주문한 여자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 주에 이안 씨 만났던 건 알고 계시죠.”

“압니다.”

“외모는 똑같은데 두 분 느낌이 굉장히 다르네요.”

“그렇습니까.”

워낙 자주 듣던 말이라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렇게 된 데는 전적으로 이안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별 고상한 척은 다 떠니 달라 보일 밖에.

제 사나운 눈빛이나 거친 언행, 오만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자세 같은 건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이긴이 커피를 마셨다. 여자도 천천히 이긴을 따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긴은 쉽게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따분한 여자.

앞으로도 이렇겠지. 그가 커피를 시키면 따라서 커피를 시키고, 그가 마시기 시작하면 그제야 저도 마시고. 앙알대지도 않고, 발긋하게 젖은 눈으로 쏘아보는 일은 당연히 없을 거고. 마주 앉아있는데도 인상이 흐릿해서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

‘좋은 건가.’

그다지 신경 쓰고 싶은 상대는 아니니. 생김새가 잘 떠오르지 않는 게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둥둥 떠다니는 도우의 눈코입만으로도 신경을 거슬리긴 충분하니까.

“별…….”

두서없이 떠올리던 둥근 눈매, 예쁜 콧날,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불현듯 하나로 합쳐져, 이긴은 작게 뇌까렸다. 다행히 선자리라는 자각은 남아 있었다. 초면에 욕을 뱉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네?”

맹하게 되묻는 상대를 보며 흡연 욕구가 간절해졌다. 미친 척하고 라이터를 켜는 대신 이긴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서로 원하는 조건 까놓고 얘기하는 게. 돌려 말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확실히 두 분이 많이 다르시네요.”

바로 그런 화법이 짜증 난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는 그쪽은 딱 그 자식 과인데. 이거 어차피 게임은 끝난 거 아닌가. 굳이 시간 낭비 할 이유가. 진작부터 몰려와 있던 따분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긴은 시계를 매만졌다. 10년은 허비한 것 같은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안 씨는 차차 알아 가는 시간을 갖자고 했거든요.”

여자가 묻지도 않은 걸 줄줄이 털어놨다. 이안다운 가식이었다. 차차 알아 가기는 씨발,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정략혼에서 그런 게 다 무슨 필요라고. 가소롭기도 하지.

이긴은 수줍어하는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안의 제안대로 연애라도 꿈꾸는 것처럼 설렌 표정이라니. 탯줄로 맺어진 정혼자가 공교롭게도 쌍둥이라 얼굴이 같다니 다른 조건을 비교하기 위해 나온 주제에 낯짝도 두껍다. 그예 속엣말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네?”

이긴은 뻔뻔스레 사과했다. 오늘만 해도 마음에 없는 사과가 벌써 몇 번째인지. 시작부터 앞날이 피곤할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실례 같은 거, 저지르지 않으려 했는데. 그런데 솔직히 우습잖습니까. 차차 알아 가고 싶으면 아무 놈이나 골라 사랑놀음이나 하면 될걸. 안 그렇습니까?”

“그건 이긴 씨 말이 맞아요. 그래도 인생의 파트너인데 어느 정도 친밀함이 있어야 좋잖아요.”

“네, 뭐. 이 얘긴 그쯤 해두고.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설마 아침밥 차려 주기 이런 건 아닐 테고.”

아침밥,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이 나왔다. 아침밥을 차려 주면 마지못해 식탁에 앉아선 코를 박고 달게도 먹던 어떤 얼간이가 떠올라서였다.

“음, 다른 사람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소문은 안 나게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 부분은 조심할게요.”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이긴은 느긋하게 등받이에 기대 더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혼외자녀도 없어야 하고요. 이거는 혼약서에 명시해 두려 해요. 동의하시나요?”

“그러시든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긴이 갑자기 되물었다.

“그런데 만약에 생기면? 그땐 어쩝니까. 위약금이라도 내야 하나.”

“그땐…… 지워 주셨으면 해요.”

“생긴 애를?”

빙글거리는 이긴에 비해 여자는 자못 심각했다.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잖아요. 이물질로 오염되는 거, 원치 않아요.”

어련하실까.

비아냥대다가 이긴은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주장은 다 정당했다. 알파들의 세계에선 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들의 지위를 공고하게 다지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고. 그런데 왜 자꾸 반발심이 드는 건지.

“그러다 내 강아지가 삐져서 잠자리 거부하면, 그쪽이 대신 보지 벌려 줍니까?”

“네?”

황당하게 되묻는 상대를 보며 이긴은 결국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네 말고 할 줄 아는 말이 없나 보네.”

“…….”

이긴의 모욕에 오물을 뒤집어쓴 표정으로 앉아 있던 여자가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겼다. 제 발로 꺼져 주니 그 점 하나만은 마음에 들었다. 막 불을 붙이려 했을 때 탁자에 올려 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의외의 번호에 잠시 멈칫했다. 손가락은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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