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발에 초조해졌다. 가로등이 대부분 깨져있어 멀쩡한 조명을 찾기 힘든 것도 한몫했다.
“씨발.”
오메가들이 사는 환경이 열악하다는 건 알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조금 전 찾아낸 놀이터에는 도우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누가 놀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아니, 사람 사는 동네는 맞나? 언뜻 봐서는 폐가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골목을 노려보다가 핸들을 틀었다.
같은 경로를 두 바퀴 돌고 나서야 이긴은 헤드라이트에 비친 조그마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친 모래밭에 달랑 그네 두 개가 전부인, 놀이터라고 부를 수도 없는 놀이터에 도우가 죽은 듯이 놓여 있었다. 그나마도 무언가 번쩍이는 바람에 발견했다.
“씨발.”
위험한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이긴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번쩍거린 것의 정체는 초록색 소주병이었다. 겨우 한 병에 이렇게 된 걸 보면 어지간히도 술이 약한 모양이었다. 겨드랑이에 꼭 끼워 놓은 병을 조심스레 빼자, 고개를 번쩍 치켜든 도우가 도로 그것을 앗아 갔다. 뚜껑도 없는데 돌려 따듯이 입구를 비비더니 빈 병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꼴이 가관이었다.
“으, 써, 후…….”
중얼거리며 빈 병을 던지곤, 다시 주워 소중히 옆구리에 끼우곤 꾸벅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자세를 낮춰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지가 흠뻑 젖는 건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누가 나 없는 데서 이렇게 만취하도록 마시래.”
이긴의 음성에 애써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깜박거리던 도우가 문득 얼굴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뭐?”
어이없는 비난이었다. 취할 때마다 말꼬리를 뚝 떼어 먹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인지.
“너…….”
한 소리 퍼부으려 동그란 이마를 검지로 쿡 밀던 이긴이 석상처럼 굳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는 고열에 도리어 오싹해졌다. 정황상 추정컨대 발정열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 바보가……!”
비에 젖다 못해 수로에 빠진 고양이 꼴로 웅크리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단박에 들쳐 안고 조심스레 차에 태웠다. 급한 대로 가장 가까운 호텔을 찾아 도우를 뉘여 놓고 바로 주치의를 불러들였다. 끙끙 앓다가 약을 먹고 겨우 잠드나 했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이 새도록 도우의 곁을 지키다 결국 새벽 동이 부옇게 터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
누가 그녀의 두개골에 정을 대고 망치로 꽝꽝 때려 대는 듯했다. 벌떡 일어났다가 깨질 듯한 두통에 도로 드러누워 눈만 깜박였다.
‘여긴 어디지.’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다 바로 옆자리에 비스듬히 기대 잠든 이긴을 발견했다. 그녀의 기척을 알아챘는지 꿈틀거리는 미간에 곧 잠이 깰 것 같아 얼른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만 내놨다. 이미 한 이불 속에 있으면서 무슨 짓인지 저도 모를 일이었다. 슬그머니 옷을 더듬어 보는 도우의 손짓에 이긴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내가 건드리기라도 했을까 봐? 이거 원, 아주 악질로 찍힌 모양이네.”
“…….”
“인사불성으로 취한 거 거둬 줬더니.”
“죄송, 해요…….”
우물우물 덧붙이는 고맙단 말에 이긴이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장난기 어린 근사한 웃음에 도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더 누워서 쉬어.”
그러잖아도 일어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여전히 얼떨떨한 채 도우는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이긴은 또 언제 만났는지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에 이긴에게 전화하는 제 모습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시는 술 같은 건 입에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과음하게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석양 속의 이안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쁘게 토해 냈던 제 본심과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던 이안의 상냥함이. 온 힘을 다해 제 마음을 외쳤는데, 마치 귀가 없는 것처럼 저를 대했던 이안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시큰하게 저려 왔다.
“아…….”
욱신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도우가 신음했다. 그러나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을 통곡해도 모자랄 것 같더니. 생각보다 허하지도 않았다. 가슴이 텅 빌 줄 알았는데, 심장이 뜨거운 피 대신 찬바람을 뿜어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했다.
‘왤까.’
아직 차인 게 실감 나지 않아서 그러나.
찌르르 번지던 가슴의 통증이 먹먹함이 되어 묵직하게 내려앉는 동안, 도우는 뒤늦게 이긴의 일정을 떠올렸다. 쌍둥이들은 주말마다 번갈아 가며 유하라는 알파를 만나기로 정했고, 오늘은 이긴의 차례라는 게. 아니. 이젠 어제인가. 뭐가 되었건, 도우의 전화가 이긴의 선을 망친 건 자명해 보였다.
“어…… 죄송해요.”
“갑자기 또 뭐가.”
“약속, 저 때문에…….”
“신경 쓸 것 없어.”
신경이…… 쓰였다. 이긴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간단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지만,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일인 건 도우가 더 잘 알았다. 이안만 해도 선택받기 위해 꽤 공들이고 있다는 걸 아니까.
‘어째서.’
제가 뭐라고. 도우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도우는 헤드레스트에 비스듬히 기대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이긴을 묘한 눈길로 쳐다봤다.
“미안해할 것 없대도. 어차피 따분해서 핑계 대고 일어날 참이었고.”
그답지 않게 주저리주저리 따라붙는 이유 끝에 도우가 불쑥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권태롭게 담배를 물고 있던 이긴이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켰다. 도우의 얼굴로 뿌옇게 뿜어진 연기는 덤이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스토킹이라도 한 줄 알겠네. 와달라고 한 건 너야.”
“아니, 그러니까…….”
이런 말, 해도 되나?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닌 것 같은데.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 어쩌면 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부정하고 있는 것뿐. 진, 짜? 정말 그런……가?
“아…….”
별안간 지난밤 일이 우수수 떠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제게 다가오던 이긴이. 그녀를 찾아 부근을 다 뒤졌다던 말도. 깊게 팬 미간과, 걱정 가득했던 눈빛도. 열이 펄펄 끓는 그녀를 안고 뛰느라 급하게 이어지던 구둣발 소리도. 자그마치 맞선자리를 깨고, 그녀에게로.
하지만 어쩐지 쉽사리 물을 수 없었다.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그럼에도 궁금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증이 굳게 가리키는 한 방향을 굳이 외면하고서, 도우는 그나마 가능성 있는 질문을 던졌다.
“섹스, 하러 온 거예요?”
하.
헛웃음을 터트리며 이긴이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그래. 씹질하러 왔다. 아니, 좆질이랬나.”
“…….”
“아주 거기가 헐도록 박아 볼까 했는데 질질 짜고나 있고.”
더는 참지 못하고, 도우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에 대고 찌를 듯이 물었다.
“저, 좋아해요?”
“…….”
잘만 떠들어 대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적중했다는 뜻이었다. 이긴이 절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비벼 끄는 동안 도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떡해.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이제 승기는 이긴에게로 넘어갔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닌데도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긴이 바로 여유를 되찾아서 더욱.
도우는 이긴이 따라 내미는 와인을 고갯짓으로 거절했다. 목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느낌이었다. 숨만 간신히 쉬었다. 천천히 와인 한 잔을 비운 이긴이 마침내 정적을 깼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고 싶은 말? 그런 건 딱히 없었다. 갑자기 그럴싸한 가능성이 떠올랐고, 충동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뒤 같은 건 생각해 두지 않았고.
역시 사람은 계획을 해야 한다.
도우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한가하게 깨달음이나 얻을 때가 아닌데도.
“어? 그럼 어쩔 건데.”
이긴이 따끔하게 그녀를 다그쳤을 때도, 그저 멍하기만 했다. 그래서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정말, 저 좋아……해요?”
“그럼 내가 할 지랄이 없어서 다 팽개치고 너 보러 왔을까.”
말본새하고는. 도우는 저절로 삐딱해졌다. 잠시 빼놓고 있던 넋도 야무지게 회수했다.
“좋아한단 고백도 안 했잖아요. 시작도 없이 끝만 남은 관계네요, 우린.”
“끝은 없어.”
이를 갈면서도 이긴은 ‘우리’에 주목했다. 무심결에 내뱉은 줄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한마디로 무의식에 박혀 있단 얘긴가. 깜찍하긴. 바보처럼 보일까 싶어 이긴은 헤벌쭉 벌어진 입매를 매만지는 척했다. 그래도 완전히 숨겨지진 않았다.
왜 저렇게 웃지.
영문을 모르는 도우는 성질을 버럭 냈다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는 이긴이 못내 불안했다. 고백 얘길 괜히 꺼냈다 싶어 후회했다. 저 성격에 고백이라니, 언뜻 상상이 되질 않았다. 고백을 말하는 그녀의 면전에 쌍욕을 박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그럼 이제 고백만 하면 되는 건가?”
“됐어요.”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긴은 기어코 입을 열었다. 무척 중요한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널 만나고.”
“…….”
“희로애락의 역치가 내려간 것 같아.”
“…….”
“씨발, 돌아 버릴 것 같다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이물질처럼 끼어든 욕설에 냉수를 맞은 것처럼 정수리가 차가워졌다.
“그게 뭐예요? 무슨 그런 고백이 있어요?”
“말 그대로야.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널을 뛰어.”
언뜻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했다. 암만 그래도 고백이라며 뭐 이런…… 싶은 게…….
“좋아한다면서 좀 다정하게 해주면 어디 덧나요?”
“다정이 뭔지 몰라.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고. 그렇게 잘 알면 네가 가르쳐 주든가.”
“됐어요. 나도 몰라요, 그런 거.”
“알면서 모른 척은.”
여기처럼만 반기라고. 은근슬쩍 다리 사이를 파고든 이긴이 능청스럽게 속삭였다. 여지없이 젖어 있는 살점에 이긴이 여봐란듯이 웃었다. 부러 요란하게 손가락을 흔들어 찔꺽거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벗어나려 하자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어 가장 느끼는 정점을 찔러 온다. 아학! 허리가 절로 튀었다.
“사람이, 흣, 왜 그렇게 못됐어요?”
“너도 나한테 못되게 굴잖아.”
내가 그랬나? 못되게 굴었는지는 몰라도 사근사근 대한 건 아니었으므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헐떡이기에도 바빴으니까. 살이라도 발라 먹을 것처럼 굴려 대는 능란한 혀 놀림에 자꾸만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아!”
“힘들어?”
도우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주취가 가시지 않았는데, 더 누워서 쉬랄 땐 언제고 이리 몰아붙이는지.
“조심할게, 살살.”
살살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나. 흉기를 살살 쑤셔 넣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냔 말이다. 뾰족해진 도우의 눈가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살포시 떨어졌다. 속눈썹을 간질이는 따스한 숨결에, 굳었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사르르 녹았다. 은근슬쩍 무릎을 벌려 놓는 도우의 행동에 이긴이 웃음을 터트려 눈꺼풀이 떨렸다.
그게 웃겨서 따라 웃다가 헉! 허리를 뒤챘다. 방심한 틈을 여지없이 파고든 이긴의 낯에선 어느덧 여유가 지워져 있었다. 나긋이 감기는 도우의 눈에 이긴이 욕설을 씹었다. 안된다고 고개를 젓고 손을 내어 밀어내는 대신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그러안자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적절한 욕을 찾지 못한 듯했다.
이렇게 여유를 잃고 흔들리는 이긴의 모습은 처음이어서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쩐지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아 재미있기도 했다. 좀 더 도발하고 싶었다. 제가 늘 그러하듯이 그도 음욕을 제어하지 못해 괴로워했으면, 하고.
하여 상체를 약간 세우곤 이긴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그의 아랫입술을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잠시 얼어 있던 이긴이 선명한 욕설과 함께 아래를 치받았다. 응, 앓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사방을 에워싸는 짙은 체취에 숨이 턱 막혔다. 도발은 무슨, 실컷 굴려지게 생겼다. 그래도 더 이상 두렵진 않았다. 기꺼이 그를 들이마시며 활짝 몸을 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데. 아주 어디고 존나게 달아선…….”
달짝지근한 솜사탕 냄새에 무르익은 복숭아 향기가 덧입혀졌다. 그녀가 한껏 달아올랐다는 증거였다. 수줍어하면서도 그를 반기듯 물씬 피어오르는 체취에 이긴은 도우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 살을 발라먹을 듯 굴었다.
“으응…….”
교태 섞인 신음이 흘렀다. 살갗에 대고 굴리는 혀는 사탕을 녹이듯이 녹진한데, 맞물린 성기는 가장 깊은 곳부터 가차 없이 긁어내린다. 상반된 감각에 눈에 하얀 섬광이 황홀하게 튀었다. 곧 끔찍할 정도의 쾌감에 휩싸이겠지.
“흐, 너무 깊어…….”
칭얼거리면서도 조르듯 엉덩이를 흔들었다. 단단한 성기와 맞물린 여린 점막에서 음란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질컥질컥 흘러나왔다. 아, 아아! 멋대로 지르는 제 목소리가 점차 아득하게 멀어졌다. 홀로 극을 향해 치달았다.
“흥, 읏……!”
애액과는 다른, 뜨뜻미지근하고 맑은 액체가 가랑이 사이를 푹 적셨다. 높이 떠올랐다가 일시에 추락하는 기분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불수의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얇은 뱃가죽이며 팽팽하게 당겨져선 파들파들 떨리는 허벅지 안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가운데 박혀있는 이긴의 성기는 아직 성성한 채였다.
어차피 그녀가 몇 번은 가고 나서야 사정하는 그를 알고 있기에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려 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억눌린 신음과 함께 끈끈한 온기가 아랫배 가득 퍼졌다.
“큿, 하…….”
의도치 않게 얼마간 가벼워진 고환의 느낌에 어리둥절해진 이긴은 곧 어찌된 상황인지 깨닫고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스스로, 그것도 적극적으로 제게 응해오는 도우의 몸짓에 소름이 쭉 끼치는가 싶더니, 눈앞이 아찔해졌을 땐 이미 그득 싸지른 후였다. 정서적 만족감이 이른 사정을 끌어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쪽팔린 건 쪽팔린 거였다.
“씹, 조루 새끼도 아니고.”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도우의 시선이 이긴의 상기된 뺨에 닿았다. 부끄러워하는구나. 이제야 조금, 저를 좋아한다는 이긴의 고백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요?”
“…….”
담배를 빼 물던 이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당황한 모습도 신선해하다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싶어 어물쩍 중얼거렸다.
“그냥, 궁금해서…….”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린 이긴이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던 걸 엄지로 쓸었다.
“눈물이 바위를 뚫는 걸 바위는 모르지.”
눈물이 아니라 낙숫물 아닌가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제가 알게 모르게 그에게 스몄다는 고백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좀…… 좋은 듯했다. 괜히 발가락이 간질거려 꼼지락거리는 도우에게 이긴이 강하게 요구했다.
“이제 너도 해.”
“저도, 뭐, 뭘요?”
“고백.”
“…….”
다짜고짜 고백하라니. 도우는 몹시 당황했다. 준비해 둔 멘트도 없거니와…… 고백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는 거 아니었나.
“아직…….”
“모르나 본데 넌 이미 나를 좋아해. 그것도 열렬히.”
“…….”
제 마음은 그렇게까지 나가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긴의 확신에 말문이 막혔다. 무슨 근거로?
“너, 이 껍데기 엄청 좋아하잖아.”
“그거야…….”
“내 좆도 좋아하고.”
“…….”
“부정할 생각 마. 조금만 먹여 줘도 자지러지면서.”
“…….”
“거봐. 절반 이상 좋아하면 됐지. 뭘 더 바라.”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도우는 잠자코 제가 어느 정도는 이긴을 좋아하고 있나 보다,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데?”
“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좀처럼 이안을 그 새끼로 인식하지 못하는 도우를 보며 이긴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백했다며. 무슨 개소릴 들었길래 비 맞은 생쥐 꼴로 있었냐고.”
“별 얘긴 없었는데…….”
분명히 선을 긋고도 제 오메가임을 주지시켰단 설명에 이긴은 무언가를 꾹 참는 얼굴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은 무서운 표정에 도우는 숨을 삼켰다. 한데 너무 깊이 삼킨 탓일까, 배가 요란하게 울렸다. 흡사 좁은 관을 따라 내려가는 물소리처럼.
“저런.”
이긴이 깜박했다는 듯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엇국을 곁들인 죽이 차려졌다. 아예 환자 취급하며 떠먹여 주려는 걸 겨우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혼자 할 수 있다고요.”
“까칠하긴.”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려던 이긴의 손가락이 도우가 죽 한 술을 뜨자 그대로 멈추었다. 대신 초조하게 담뱃갑을 톡톡 두드리는 이긴에게 도우가 웅얼거렸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고심하다가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지 싶어서.
“담배 줄였으면 좋겠어요. 안 피우면 더 좋고.”
“뭐야. 내 걱정 해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건강에 안 좋잖아요…….”
꽤 훌륭한 포장이었다. 저를 괴롭힐 목적으로 연기를 뿜어댈 땐 아주 위력적인 무기가 된다는 사실은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상기시켜봐야 좋을 게 없으니. 다행히 이긴은 그녀의 뜻을 갸륵하게만 해석한 듯했다.
“아니긴. 그런 깜찍한 생각을 다 하고.”
들어줄 것 같다. 내친김에 도우는 하나 더 질러 보기로 했다.
“욕도요. 안 했으면 좋겠는데.”
“담배도 안 된다, 욕도 안 된다, 이건 뭐 숨도 쉬지 말란 뜻인가.”
얘기가 왜 그렇게 되나. 물론 그가 숨 쉬듯이 욕설을 뱉고, 담배를 피우는 건 맞지만……. 다소 풀죽은 도우를 떠보듯 이긴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이안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령 바란다 한들 이긴 특유의 나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지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진짜,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 부정하자 이긴이 피식 웃었다.
“좋아. 노력할게.”
“…….”
이런 식으로 불온하게 웃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술렁이는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도우는 얼른 죽 그릇에 코를 박았다.
***
죽 그릇을 비우자마자 도우에게 달려든 이긴은 그녀를 답삭 들어 바로 침대로 옮겼다. 일찍 싸버렸다고 내내 투덜거리던 걸 만회하겠다는 듯 도우를 괴롭혔다. 몇 번의 격정을 겪어 내고서 도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지쳐 버렸다. 배불리 먹고 얌전히 누워 이긴이 하는 대로 맡기고 받아만 낸 게 전부인데 어째서 뭣도 먹지 않고 쉼 없이 움직이던 그보다 더 힘이 빠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해놓고도 부족한지 다시 슬금슬금 치대기 시작한 이긴을 피해 도우는 침대에서 기다시피 내려왔다. 내려온 김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도우를, 이긴이 희한한 눈으로 구경했다.
“뭐 해?”
“집에 가려고요.”
“집엔 왜.”
“그야,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
“그런데.”
너무 당연한 걸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어보는 바람에 잠시 저마저 헷갈릴 뻔했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요.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가방도 챙겨야 하고.”
“외근 나왔다고 해.”
“연구직에 외근이 어디 있어요?”
어이가 없어서 톡 쏘아붙이자 이긴이 게으르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결근.”
“무단결근하라고요? 대체 남의 직장을 뭐로 보는 거예요?”
“그 회사가 누구 건지는 잊었나 보네.”
“…….”
무단결근을 종용하는 회사 대표라니, 더는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적절한 타협점이라도 찾은 것처럼 이긴이 눈을 빛냈다. 이제는 뭐라 하건 기대조차 들지 않았지만.
“월차는?”
피 같은 월차를 고작 이따위 일로 낭비하다니 말도 안 된다. 어떻게든 붙잡고 한바탕 뒹굴고 싶은 검은 속내가 보여 도우는 딱 잘라 냈다.
“의심받기 싫어요.”
흐음.
불량스럽게 눈을 치뜨곤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넘긴 이긴이 일어나 앉았다.
“태워다 줄게. 기다려.”
“필요 없어요.”
“말 들어.”
그녀가 말도 없이 사라질까 봐 그랬는지, 이긴은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서 운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채 머리카락을 말리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급했던 걸까? 왜? 기다리지 않고 저 혼자 가버릴까 봐? 겨우 그것 때문에? 자꾸만 흘끔거리는 걸 눈치챘는지 이긴이 씩 웃었다.
“잘생겼지.”
그야 이안하고 똑같이 생겼으니까. 어쨌든 그의 말대로 그녀가 좋아하는 얼굴이긴 했다. 이제는 조금 의미가 달라졌지만.
“자세히 봐. 내가 훨씬 더 잘생겼어.”
“…….”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했다. 묘하게 설득당해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둘을 헷갈렸나 싶을 정도로 이긴은 이안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같은 줄 알았던 페로몬도 다르지 않았던가. 이안의 겨울이 살풍경한 황무지라면 이긴의 겨울은 짙푸른 상록수가 어우러진 설원이었다. 첫눈처럼 설레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어느덧 도우가 사는 동네로 접어들었다. 그냥 편하게 내려 달라고 했는데 한사코 비좁은 골목길을 달리는 운전 실력에 감탄했다.
“여기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는지 몰랐어요.”
순수하게 놀라는 도우를 보며 이긴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걸리는 줄도 모르고.
“하도 좁은 델 들락거리다 보니.”
“…….”
충분히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엉큼하게 쿡쿡 웃는 이긴을 곱지 않게 째려본 후, 차에서 냉큼 내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대로 곱게 내일을 기약하나 했는데, 지척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삽시간에 도우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아니, 세상에! 도우 네 선배님 아니냐?”
“거봐요. 내 말이 맞았다니까요.”
부모님이었다. 반사적으로 부모와 이긴 사이를 가로막은 도우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거세게 흔들리는 고개에 이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분은…….”
이안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이긴이 앞으로 썩 나섰다.
“네, 접니다. 이안.”
아연해진 도우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흔쾌히 부모의 초대에 응한 이긴이 성큼성큼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어린 동생들은 구석으로 피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추지 못하는 동생들을, 대강 상황 파악한 둘째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런 곳에서 사는군요.”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냐는, 순수한 놀라움에 도우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무어라도 대접할 게 있으면 좋으련만, 있는 거라곤 쉬어 버린 보리차뿐인 냉장고에 그만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머뭇거리며 음료라도 사 오겠다는 도우를, 부친이 뻔뻔스레 만류했다.
“도우야, 신경 쓸 것 없다. 어차피 사정 다 아는데 뭘.”
그건 아빠가 할 말이 아니잖아요. 반발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럴 거면서 뭐 하자고 집까지 불러들였는지, 부모의 속이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우의 예상과 달리, 그녀의 부모는 너무나도 빨리 흑심을 드러냈다.
“보시다시피 물 한잔 대접하는 것조차 변변찮습니다, 저희 사정이. 에,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도우에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뭘 하나 해보려 해도 자금이 부족해서, 예.”
“그런 얘기를 지금 왜 해!”
“그럼 지금 하지 언제 해? 얼굴 본 김에 해야지. 안 그러냐?”
“네, 맞습니다.”
이긴이 긍정하자 부모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도우는 차라리 그 앞에서 발가벗고 춤을 추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이런 말 염치없지만, 그러니 조금만 더 도와주십사 하고…….”
“아빠!”
말만은 염치없다고 하면서 그녀의 부모는 무척이나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만이 조금이 아닐 것을 안다. 게다가 더 도와 달라니. 이전에 있었던 숱한 원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행태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만해요. 이사님, 아니 소장님. 엄마 아빠도 그만하세요! 오늘 이러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도우 넌 좀 가만히 있어라! 볼일 있어 왔다가 다른 일도 보고 그러는 거지. 안 그렇습니까, 소장님?”
“뭐, 그렇다 치고. 무슨 얘긴지 들어나 볼까요.”
뒤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건강이 좋지 않다, 집에 수리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나가서 일을 구하려 해도 입고 나갈 변변한 옷가지도 없다, 등등. 입에 올리기도 구질구질한 이유들이었다.
그럼에도 이긴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들어주었다. 아무리 이안 행세 중이라도 원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인내심이었다.
“그럼 다 합해서 얼마가 필요합니까.”
“……구, 구백만 원 정도…….”
그렇게 구구절절 떠들어 놓고 천만 원도 못 부르고 간을 본다. 9백만 원도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늘어놨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엔 턱도 없다. 결국 다 거짓이다. 받은 돈은 파도에 쓸려 나간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허물어질 테니까. 그걸 지적하면 그녀의 부모는 그게 돈의 본질이라며 도리어 큰소리쳤다.
“9백만 원이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결국 그녀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이긴의 입에서 나왔다. 그를 배웅해 준다는 핑계로 따라나선 도우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긴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
“절대, 절대 도와주지 말아요. 어차피 의미 없어요, 그 돈. 흥청망청 쓰다 없어질 텐데.”
“도울 생각 없어.”
“아…….”
왜 당연히 그가 도와줄 거라 생각했지? 선뜻 돈을 내놓을 거라고. 이미 사고방식이 그런 식으로 굳어진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가 거지라고 할 때마다 발끈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소릴 들어도 쌌다.
‘씹, 망할.’
가까스로 욕을 입 밖에 내지 않는 데는 성공했으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도우를 보는 이긴의 입맛은 썼다. 그녀의 부모는 이긴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제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썩은 살도 마다 않고 파먹는 구더기 같은 인간들. 한 줌이나 될까 말까, 깡마른 도우를 보면 안쓰럽다 못해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는데. 딸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는 작태에 구역질이 났다. 씹, 속으로 욕을 삼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했네.”
“맞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절대, 절대 주지 말아요.”
“그냥 널 산다고 할걸.”
“…….”
“홀랑 팔아 버리고도 남을 것 같던데. 딸이 둘밖에 없어서 아쉬워서 어째.”
다분히 모욕적인 말에도 도우는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이 다 맞았으니까. 팔라고 하면 얼마든지 팔아넘길 제 부모를 알아서, 할 말이 없었다. 팔을 길게 뻗어 도우의 집을 손끝으로 찍은 이긴이 단호하게 요구했다.
“당장 저 집구석에서 나와.”
“저는, 아…….”
부모와 식구들을 버리고 나온다고? 갑자기 머리둘레에 띠를 두르고 조이는 것처럼 두통이 일었다. 식은땀이 배어나는 이마를 닦아 주는 이긴의 눈빛이 흔들렸다. 느릿느릿 고개를 젓는 도우의 동공이 멍하니 풀려 있었다. 꼭 저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져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정신 차려.”
이긴이 어깨를 잡고 세지 않게 흔들자 겨우 도우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상황 판단이 안 되는지 어리둥절한 모습에 이긴은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당장 정할 거 없어. 천천히 결정해. 기다려 줄 테니까.”
“미안,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자꾸, 도움만 받는 거.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긴이 품에 가두는 바람에 겨우 멈췄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도우는 조금 전의 일을 헤아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랬다.
말도 안 돼.
도우는 경악했다. 제가 이긴에게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었다. 이제 겨우 마음을 확인한 사이에.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앵무새처럼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읊으려 했다. 마치 입력해놓은 대사를 읽는 것처럼……. 그게 그녀가 이안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음을 상기한 순간 다시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윽……!”
반사적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던 도우는 자신을 면밀히 살피는 이긴을 향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원래 두통이 자주 있어요. 괜찮아요.”
“괜찮은 거 맞아?”
“……네.”
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꼭 머릿속을 누가 헤집어 놓은 것만 같다.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는 의문에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은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아니 찾아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어서.
‘그게 아니라…….’
사실은 찾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표의 행렬을 끊은 건 이긴이었다.
“도움받는 게 어때서.”
“됐어요, 그런 거.”
“그 새끼 도움은 잘만 받아 놓고.”
정말, 이안의 도움은 잘만 받아 왔으면서 무슨 객기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긴에게만은 정말 그런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살래살래 고개 젓는 도우의 뺨을 이긴이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다 엄지를 입술 사이로 불쑥 집어넣어 지그시 혀를 눌렀다. 성적인 의도가 다분히 읽히는 손놀림이었다.
“등골이라도 빼주고 싶은데 어쩌라고. 음? 아주 골수를 쪽쪽 빨아먹으란 말이야.”
“…….”
“정액만 먹지 말고.”
“지금 그걸…….”
“왜.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하지 말라고요!”
얼른 손가락을 퉤 뱉어 내곤 찰싹, 소리가 나도록 팔을 때렸다. 그래 놓곤 제풀에 놀라 바짝 얼어붙었다. 빨갛게 남은 손자국을 도우더러 보란 듯 핥으며 이긴이 야릇하게 웃었다.
“나한테 와.”
“…….”
섣불리 긍정할 수 없어 도우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고.
“누구, 누구세요?”
만만하게 잠들었다 일어난 도우는 새벽같이 출근했다가 문 바로 앞에 세워진 세단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이곳에서 보기 드문 차종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에서 내린 기사가 별안간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기 때문이었다.
“이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니, 저는 그냥, 버스 타고 갈 건데…….”
“꼭 모셔 오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도우가 무슨 핑계를 대도 남자는 귓등으로 넘기며 기어코 그녀를 차에 태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도우는 백기를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출근 때마다 동네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연구소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 내려 남들 눈을 피해 숨어드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되니 고역이었다. 몇 번 이러다 말겠지 했던 건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기사 딸린 차 부담스럽다고요! 누가 보면 제가 여기 회장인 줄 알겠어요!”
회사에서는 아는 척하지 말라고 당부할 땐 언제고 제 발로 대표실을 찾은 도우를 보며 이긴은 의자 등받이에 느긋이 상체를 기댔다.
“알았어, 알았어.”
항복하듯이 양팔을 든 이긴이 대단한 양보라도 하듯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내일부턴 내가 직접 운전해서 데리러 갈게.”
“무슨……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펄펄 뛰던 도우의 눈에 웃음을 참느라 실룩이는 입술이 들어왔다. 그제야 짓궂게 빛나는 이긴의 눈빛을 알아채고 맥이 탁 풀렸다.
“진짜…… 얼마나 곤란한데요.”
“그러게 같이 살면 곤란할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
“잠깐,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요?”
“설마.”
설마가 사람 잡지. 이제 알았냐는 듯 코웃음 치는 이긴을 향해 입술을 비죽여 보였다. 며칠이나 지나서야 그의 계략을 알아챈 둔감함이 아쉽다. 이긴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후와 통화하는 내내 집요하게 뒤통수에 따라붙는 눈길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도우는 애를 먹었다.
“누구야?”
“선생님이요, 내일 일이 있어서 자리 좀 비울 건데 한 시간 정도만 화원 좀 봐달라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우는 괜히 눈치를 살폈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이긴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 배우는 거, 그만둬. 데이트할 시간 부족해.”
데이트할 시간이 아니라 섹스할 시간이겠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게 그거 아니냐며 뻔뻔하게 나올 게 눈에 훤해서였다.
“싫어요.”
도우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떤 상징 같은 거란 말이에요.”
“무슨 상징.”
“그게…….”
도우는 우물거렸다. 어차피 막연히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것이었기에. 호기롭게 뱉어 냈어도 뚜렷한 윤곽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네가 꽃처럼 예쁜 거야 나도 잘 알고. 그것 말고 또 있어?”
낯간지러운 해석이었다. 꽃처럼 예뻐서 꽃이 상징이라니, 그런 부끄러운 표현을 잘도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이긴에게 도우는 적잖이 충격 받았다.
“너, 너무, 당당한 거 아니에요?”
“아 물론 거기도 꽃 같고.”
“미쳤나 봐.”
“진짠데. 들어 봐.”
“아니요! 됐어요.”
도우는 이긴의 입을 틀어막았다. 꽃잎이니 꿀이니 붙여 댈 게 뻔한데 굳이 귀로 듣고 확인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상징이 아니라요, 나만의 일이 갖고 싶다는 거예요.”
이긴이 혀를 비죽이 내밀어 입을 가로막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을 야하게 핥았다. 반달처럼 접힌 눈에 장난기가 그득했다. 여기서 더 넘어가면 이다음은 금방이다. 퇴근하자마자 여태 시달렸는데 또 할 수는 없었다. 도우는 용건만 빠르게! 를 속으로 외치며 다다다 쏟아 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일이요. 그러니까 오메가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설 수 있는 일.”
“흐응.”
“체취가 꽃향기에 묻힐 테니까. 그러니까…….”
“기각.”
지금껏 일부러 당하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입을 막은 도우의 양손을 가볍게 떼어 낸 이긴이 손목을 하나로 그러쥐고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밑에 깔았다.
“꽃에 널 파묻어 놔도 난 너 찾을 수 있어. 네 냄새만 날 테니까. 이걸…….”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가볍게 코를 비비던 이긴이 별안간 이를 세워 어깻죽지를 깨물었다.
“아, 음!”
“어떻게 헷갈려. 응?”
그럴까. 하긴, 저도 이긴이 어디에 있건 페로몬으로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도우가 별다른 반박하지 않자 이긴은 한층 노골적이 됐다. 손가락으로 음부의 갈라진 틈을 문지르며 질 나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음란한 냄새를 줄줄 흘리는데 어떻게.”
“그만…….”
“그만둘 건 네 플로리스트 강습이고.”
“그건…….”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끝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긴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새끼가 뭐라도 되는 양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거 기분 나빠.”
“지시가 아니라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거나 저거나.”
축축하게 젖은 여린 꽃잎에 무자비한 대가리를 꾹꾹 들이밀며 이긴이 으르렁거렸다.
“하필 사내 새끼야. 네 옆에 있는 좆 달린 새끼들, 다 치워 버리고 싶어.”
“흐, 선생님이, 실력이 좋…… 아!”
끝까지 정후를 두둔하는 도우를 벌주듯, 이긴이 단박에 허리를 밀어 넣었다. 무지막지하게 차오르는 느낌에 도우가 자지러졌다. 워낙 버거운 크기와 길이였다. 두어 번 숨 쉴 틈을 주어도 헐떡이는 그녀인데, 충격이 너무 컸다.
“흑, 빼요.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묵직하게 안을 채운 물건을 짜내듯이 도우가 아랫배에 대고 손을 밑으로 힘주어 밀었다. 그녀의 괴로움에 십분 공감한다는 듯 이긴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빼줄게.”
선선한 건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느릿느릿, 느물거리며 심술궂게 허리를 물리는 이긴의 움직임에 도우의 가느다랗게 뜬 눈매에 원망이 서렸다. 빠듯하게 맞물린 내벽이 뼈처럼 단단한 기둥에 짓이겨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절대 지지 않을 거야.’
이를 악물었다. 격정적인 밤의 시작이었다.
***
결국 이긴과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하나로 의견 일치를 보았던 건 색정에 달아오른 몸뿐이었다.
‘정말.’
잠시 입술을 비죽이던 도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손님이 오면 응대를 잘할 수 있을까. 바짝 긴장했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무도 오지 않았다. 좀 있으면 약속한 정후가 올 테고 그럼 이 부담감도 해방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수업할 꽃대들의 이파리를 다듬던 도우의 코에 희미한 담배 냄새가 스쳤다.
“어서 오세…….”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얼른 나서던 도우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떻게…….”
“꽃 사러 왔는데.”
그런 것치곤 시선은 도우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겨우 이딴 꽃으로 네 냄새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해?”
성큼성큼 다가온 이긴이 주저 없이 가랑이 사이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그가 뿜어낸 페로몬에 잠깐 사이에 엉망으로 젖은 팬티를 젖히자 고여 있던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양에 히죽 웃은 이긴이 검지와 중지를 번들거리는 살틈에 대고 좌우로 벌렸다. 다물려있던 음순이 쩌억, 음란한 소리를 내며 꽃처럼 붉게 벌어졌다.
“이렇게 독보적인 꿀을 줄줄 흘려 대면서.”
“가요, 여기 내 꽃집, 흐, 아니에요……! 언제 선생님이, 읏!”
정후만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고 손님이 들이닥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긴은 그녀의 애원은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럼 협조 좀 해줘야겠는데.”
무심히 중얼거리며 흉흉하게 일어선 살기둥을 꺼내 놓은 이긴이 성급하게 들어섰다.
“아, 흑!”
속절없이 꿰뚫리면서도 멋대로 가버리지 못했다. 누가 불시에 들이닥칠까 봐. 손님도 손님이지만, 들키면 정후를 볼 낯이 없었다.
“읏, 아응, 흣, 빨리, 해요, 네?”
“싫은데.”
심술궂은 반응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긴에게 비는 대신 차선책으로 자극할 방법을 찾았다. 도우는 종아리를 가위처럼 겹쳐 그의 허리를 꽉 옭아맸다. 그러곤 어설프게 그를 도발했다.
“가득 싸줘요. 잔뜩 먹고 싶어.”
흥. 가당찮다는 듯 비웃으면서도 이긴의 허리 놀림이 격해졌다. 계란처럼 단단하고 굵은 것이 자궁구를 꾹꾹 밀어 올리는 느낌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불규칙해진 이긴의 호흡에 사정이 가까워졌음을 알아챈 도우가 애원했다.
“그냥, 그냥 안에 해줘요. 네? 안에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오메가면 알파의 정액 냄새를 절대 모를 수 없었다. 정후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들켜선 안 되었다. 그러려면 바닥에 흘리지 않도록 모두 제 안에 담아야했다. 뒤처리는 다음 문제였다.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이긴의 허리를 꽉 옭아맸다.
“밖은 안 돼요, 안에, 아…….”
간절한 부름에 화답하듯, 마침내 이긴이 사정했다. 오래도 꿈틀거리면서. 민감한 내벽은 울컥울컥 정액을 쏘아 내는 움직임을 그대로 감지해 냈다. 양이 상당해서 이대로 새는 건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마개를 틀어막는 기분으로, 다리를 풀지 않았다.
“빼지 마요, 아, 응! 움직이지 마…….”
“어지간히 들키기 싫은가 보네.”
느긋하게 허리를 물리며 이긴이 미운 소리를 골라 했다. 길게 뽑아낸 기둥을 따라 그가 잔뜩 싸질러 놨던 정액이 뭉클뭉클 흘러내렸다. 여봐란듯이 고개를 까딱이는 이긴을 있는 힘껏 째려본 도우가 울상을 지으며 뒤를 수습했다. 어떻게든 제 흔적을 지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도우를 두고 이긴이 비아냥거렸다.
“이안도 알아? 이렇게나 꽃집 사장을 아끼는 걸 알면 꽤 섭섭해하겠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남의 사생활 제멋대로 캐고 다니고…….”
“그러게 연락받았으면 좋잖아. 그럼 쫓아오는 일도 없었을 거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도착해서 바로 손님 맞을 준비에 정신이 없어서 연락이 온 줄도 몰랐다. 어이가 없어서 대꾸도 하기 싫었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짚어야 했다. 이안에 관해선 언제나 결백하고 싶었으니까.
“소장님도 아세요. 그래서 수요일마다 야근 빼준 거고.”
“아, 야근.”
이긴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빼 물었다. 지난번 담배를 줄이겠다고 약속한 이후로 자제하고는 있지만, 그녀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시위하듯이 피우는 걸 알고 있다. 이 또한 유치해서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도우의 모른 척에도 이긴은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소장님께서 아주 큰 은혜 베푸셨다. 그죠?”
“담배 꺼요! 냄새 밴단 말이에요!”
“아직 불 안 붙였어.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야간 근무 그만둬.”
다 그만두래. 기가 차 혀를 차면서도 도우는 이긴이 은근슬쩍 불붙인 라이터를 날래게 낚아챘다.
“제가 왜요? 그만두면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요?”
“너 왜 이렇게 앙칼져.”
졌다는 듯 이긴이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야간 수당, 받고 더블로.”
“남의 인생 갖고 도박하지 말아요. 난, 난 정말 간절하단 말이에요!”
이긴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아도 도우는 신중하고 싶었다. 알파들의 변덕은 익히 안다. 잠깐의 흥미로 인한 결과들을. 그녀 밑에 줄줄이 딸린 동생들이 살아 있는 증거였다. 이긴은 잠시 놀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은 그녀는 생계를 이어야 한다. 이안이 애써 꽂아 준 야간 보직을 멋대로 그만뒀다가 다시 요청할 낯짝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강경하게 나가자 이긴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꽃집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럼 수요일이라도 찾아올 수밖에.”
“수업 있어요. 오늘은 선생님이 잠시 자리 비운 거지만 다음번엔…….”
“이안이 강습 땡땡이치고 나랑 섹스한 것도 알려나?”
“…….”
“특별히 야근까지 빼줬는데, 이실직고해야지. 안 그래?”
“……야근 뺄게요. 그러면 돼요?”
“똑똑하네. 말도 잘 듣고.”
이긴이 충성스러운 개를 쓰다듬듯 그녀의 정수리를 힘차게 비비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정후가 들어왔다.
“금연입니, 아. 죄송합니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확인하고 정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혹시나 정후가 정사를 눈치 챌까봐 도우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정후는 위압적인 우성 알파의 존재에 온 정신이 쏠려 희미하게 남아있는 비릿한 정액과 페로몬 냄새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듯했다. 이긴이 부러 진하게 풀어낸 페로몬도 정사의 흔적을 교묘하게 감추는 데 한몫 거들었겠지만.
“도우 씨, 이분은?”
“아, 저희 회사 이사님이세요.”
“그러셨구나. 여긴 어쩐 일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편인 정후는 경계 섞인 눈빛으로 이긴을 탐색했다. 일견 사나워진 이긴의 눈빛에 도우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까고 있네.
말은 안 했지만 분명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태도만은 더없이 정중했다.
“마침 선물할 곳이 있어서 주문하러 들렀습니다.”
“선물이요?”
“네. 일단 여기 있는 꽃, 다 포장해 주십시오.”
“여기 있는 걸 전부요?”
정후의 경계는 바로 풀렸다. 꽃을 사겠다는 말에 여느 손님과 다름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더욱이 지금 있는 꽃을 모두 달라고 하니. 도우에게도 그편이 나았다. 정말 손님으로 온 상사를 대하는 것처럼 도우는 쇼케이스의 화병을 모두 꺼내 차례로 가지런하게 매만졌다.
“저, 그런데 받는 분이?”
“음, 이안 소장 앞으로. 자세한 주소는 여기, 우리 연구원이 알 겁니다.”
바쁘게 손을 놀리던 도우의 얼굴이 한순간 파리하게 질렸다. 꽃을 보낸다고? 그것도 이안에게? 정사의 냄새가 비릿하게 묻어 있는 꽃들을, 왜? 정말 음탕한 냄새가 배었을 리 없지만, 이안의 연구실에 놓인 꽃들을 보며 이긴 밑에서 신음한 기억이 떠오를 건 자명했다.
‘안 돼!’
이제라도 말려야 했지만, 기쁜 표정으로 주문서를 받아 적는 정후를 보자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다.
***
결국 다 자기 마음대로면서.
막상 그만두려고 생각하니 어지간히 속이 상했다. 그래도 그의 뜻을 존중해 보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이긴은 드물게 함빡 웃으며 볼을 톡톡 두드렸다.
“예쁘네. 응?”
“내 의견은 하나도 존중 안 하면서. 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요?”
“정 배우고 싶으면 다른 강사로 바꿔. 좆 안 달린 거로.”
“진짜.”
그것도 내 마음이라고요.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가는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두려웠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덤비는 건 비겁한 게 아니다. 현명한 거지. 같잖은 합리화로 소심한 자신을 외면한 도우는 이긴이 타격받을 만한 말을 떠올렸다. 바로 이안을 끌고 오는 것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랬듯이.
언제부터 이안이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는 효율적인 도구로 전락했는지 의식조차 못 한 채, 도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장님은 내가 뭘 하든 지지해 주셨는데.”
휴우, 곁들인 한숨까지 완벽했다.
움찔하는 이긴을 보며 잠시 고양감을 맛봤던 도우는,
“그야 그 새낀 고자니까.”
실패한 작전에 이내 시무룩해졌다. 승리에 도취된 이긴은 한술 더 떴다.
“너 머리 길러.”
“왜요…….”
“사내 새끼 같아서 안는 맛이 없어.”
지금까지 잘만 박아 댔으면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이제는 어느 정도 그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해 못 할 인간이다.
“길러 줄 거야?”
“얼마나요?”
“허리까지.”
“…….”
그 정도 기르려면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그때까지 만나고 있을까?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져 도우의 안색이 흐려졌다.
난, 말 그대로 진짜 좆도 없는 오메가인데.
물론 좆이 있다고 해서 처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건 그렇고 모처럼 도우도 건수를 잡았다. 설마 머리카락까지 이래라저래라 할 줄은 몰랐다. 이긴이 뭐라 하건 들은 척도 안 하면 그만이겠지만.
“싫어요.”
이안을 의식한 것도 있었지만, 좀 더 비딱한 이유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사내 새끼 같아서 안는 맛이 없다고? 웃기시네. 어디 계속 남자랑 하는 기분 느껴 보라지.
흥.
속으로 작게 코웃음을 쳤다. 다시 승기를 쥐게 된 것 같아 얼마간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우의 유치한 꾀는 금세 간파당한 듯했다. 이긴은 낯도 안 바꾸고 야한 말을 읊어 댔다.
“네 엉덩이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그 속에 어떻게 생긴 구멍이 있는지 알면 천년의 고자 새끼도 벌떡 설걸. 물론 보여 주진 않을 거지만.”
세상에. 입이 떡 벌어졌다. 차 안엔 단둘이 있는데도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음란함이었다.
“가슴도 응? 딱 내가 주무르기 좋게 생겼고. 젖꼭지는 왜 그렇게 귀여운 건데. 씨발, 누구 환장하는 꼴 보려고.”
“하지 마요!”
이번에도 도우의 완벽한 패배였다. 도우는 잔뜩 시무룩해져서 어물어물 이유를 댔다.
“소장님은 아직 모르시니까. 그러니까, 음, 나중에요.”
“나중에 언제.”
글쎄. 정확한 건 도우도 몰랐다. 이안은 그저 그녀가 언제나 자기의 오메가라고만 말했을 뿐이니까. 언제나라는 건 영원을 뜻할까. 그렇다면 이긴과 만나는 이상, 언젠가는 불편한 순간을 마주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소심하게 중얼거린 도우는 얼른 이긴의 표정을 살폈으나, 운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저, 그 여자분은 누구 택했어요?”
“적어도 난 아닐걸.”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답은 뻔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음에도 도우의 속은 이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안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심란하다든가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이긴에게 미안했다. 어쩌다 저 같은 오메가와 얽혀 가지고.
“저 때문에 인생 망하면 어쩌려고요.”
“망하지, 뭐.”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토록 싫어하던 사람인데. 진저리나게 미웠는데. 그렇게 망하길 바라던 사람이 막상 자기 때문에 인생이 어그러진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울적했다.
도우의 심각한 표정에 이긴은 입 안쪽 살을 지그시 물었다.
아아, 놀리고 싶어라.
그 알파 여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제가 가진 모든 걸 앗기고 풍비박산 나는 줄 아는 순진함이란. 설령 겉으론 그렇게 보일지라도 알파들, 특히 우성들의 세계란 무척 공고해서 결국은 비등비등한 세력을 유지하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알 리 없겠지.
제 부모가 입에 올린 고작 9백만 원에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던 도우니까. 그래도 쉽게 가르쳐 주진 않아야지. 당사자는 모를 벌이었다.
“왜, 내 인생이 망한다니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 이거 이거, 내가 하늘만큼 땅만큼 좋은가 보지?”
“무슨?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내친김에 조금 더 골려주려는 이긴의 속셈도 모르고 도우가 주먹까지 쥐어가며 발끈했다. 제 감정이 그만큼 깊어진 걸 채 자각하지 못하고, 도우는 제 속상함의 원인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