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슨 장난질이야.”
“결혼 미리 축하해. 널 선택했다며.”
예고 없이 연구실을 발 디딜 틈 없이 채운 꽃에도 이안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긴도 태연히 받아쳤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에 이안이 얼굴이 잠시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네 다람쥐, 딴짓하는 거 알고는 있어?”
원숭이라고 부를 땐 언제고, 다람쥐라는 호칭에 줄곧 심드렁하던 이안이 이긴을 빤히 쳐다봤다.
“도우 찾아갔었어?”
“왜 내가 찾아갔을 거라 생각하지? 우연히 마주친 걸 수도 있잖아.”
“멋대로 들쑤시고 다니지 마.”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명령질만 안 하면 조금은 고려해 볼게.”
담배에 불을 붙인 이긴이 첫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뿌연 연기에 꽃향기가 섞여 들자, 사타구니 사이가 뻐근해졌다. 도우를 안을 때 곁을 지키고 있던 꽃들 덕분에 어제의 정사가 생생히 살아난 탓이었다. 제가 싸질러 놓은 정액이 한 방울이라도 흘러 바닥을 더럽힐까 봐 다리를 오므리고 조심조심 속옷을 올리던 작은 손 같은 것들이.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더니 이젠 제법 엉덩이를 흔들 줄도 아는 게 앙큼하면서도 깜찍하다. 깨물어 주고 싶도록 보드랍고 통통한 엉덩이를 떠올린 이긴이 질 나쁘게 웃었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살결에 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으면 꽤 볼만할 것 같은데, 다음엔 시도해 봐야겠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이를 박아 넣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했다.
‘일단 놀라기야 하겠고.’
펑펑 울려나? 발칵 성을 낼지도. 상상은 잘되지 않지만 은근히 즐길 수도 있겠고. 어느 쪽이든 재미는 보장이다. 오메가인 건 차치하고, 이긴은 도우의 반응 그 자체를 즐겼다. 망가뜨리는 맛이 있달까. 발정기일 때와 아닐 때의 간극도 좋고.
오메가한테 미쳐서 족쇄를 채웠다가, 벗겼다가, 감옥에 가뒀다가, 풀었다가…… 별 지랄을 다 떨었던 선조들을 정신병자로 치부했었는데, 막상 당해 보니 그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사람을 돌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의식이 여기까지 흐르자, 이안의 속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뭉스러운 새끼.’
남장까지 시켜서 제 곁에 붙들어 매놓고, 여태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하니 진짜 고자는 아닐 거고.’
적어도 껍데기만큼은 그와 똑같으니 말이다.
석연찮은 기분에 이긴은 부러 이안의 주의를 돌려놓았다. 마치 도우가 꽃집 사장과 밀회 중인 것처럼 교묘히.
“내기나 이겨볼까 했는데, 덕분에 헛돈 썼지 뭐야.”
미끼를 던져놓은 이긴이 연구실에 수북이 쌓인 꽃다발들을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처치 곤란한 양의 꽃무더기와 저를 뜯어보는 이긴의 시선에 이안이 피곤한 한숨을 쉬었다.
“언제 돌아갈 거야? 결혼 후에?”
“내키면.”
이봐라. 철석같이 조부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곤 회사가 제 것이 될 거라 믿는 이안을 보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 이긴이 연기를 내뿜었다.
한편으론 빤한 속내에 실소했다. 이제 와서 쫓아내려고? 평소엔 자기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이긴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는다 해도 이안은 눈 하나 깜짝 않을 위인이었다. 그건 이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길러졌다. 필요로 맺어진 혈연이랄까.
내키면 돌아간다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는 이안에게 이긴이 느물거렸다. 이안의 동요에 역시 무언가 있다고 감 잡으며.
“그러게 바쁜 사람 왜 오라 가라 해. 어차피 쌍둥이인데. 선도 네가 두 번 보고, 정액도 네 것 두 번 뽑아서 대령하지.”
한 번에 많이 싸고 나눠 담든가.
이긴의 조롱에도 이안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니까. 이긴은 쉽게 납득했다. 이안의 연구실에서 뭉개는 것도 슬슬 지겨워졌다. 애초에 썩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길게 늘어져 기지개를 쭉 켜는 이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조용히 물었다.
“어땠어?”
“갑자기 뭐가.”
“도우. 그 플로리스트랑.”
“왜, 신경 쓰여? 이름이라도 새겨 놓은 것처럼 자신만만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기어이 낚였나. 이긴의 눈에서 흥미를 읽은 이안은 본래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갔다.
“너한테 물은 내가 잘못이지.”
“꽤 깊은 사이 같던데.”
“…….”
“섹스는 보지 못했으니 모르겠고, 페팅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믿기 싫음 마. 믿지도 않을 거 왜 물어봤어, 그럼.”
난 간다.
지체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이안의 어두워진 시선에 미련이 묻어났다. 이긴을 붙잡고 더 캐묻고 싶은, 그러나 더한 망설임. 굳이 기다려 줄 마음은 없었다. 이안을 이만큼 흔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니. 글쎄, 거짓이 섞이긴 했지만, 누가 따먹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닐 거다.
“무슨 자신감이신지.”
아주 혼자 잘났지. 다른 사람 머리 꼭대기를 밟고 섰다는 착각에 취해선. 뭐, 지금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번엔 아닐 공산이 컸다.
도우라는 변수가 있는 한.
때마침 복도 저쪽 끝에서 도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선 잔뜩 풀죽은 모습이었다. 이긴이 휘파람을 불자,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두리번거리던 도우가 그를 확인하고 멈칫했다.
“어깨 펴고.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 줄 알겠네.”
아, 잡아먹긴 했나.
중얼거리는 이긴의 입을 틀어막을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온 도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따졌다.
“소장님한테 얘기했어요? 아니죠? 설마 그런 짓…….”
파랗게 질린 낯만 봐선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긴의 심기가 절로 비딱하게 기울었다. 잘도 심술궂게 이기죽거렸다.
“내가 왜. 오메가랑 붙어먹었다는 거 알려져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그렇기야 하죠.”
단호한 부정에 도우의 코가 쑥 빠졌다. 맞는 말이고 바라던 바인데 왜 가슴이 따끔거리는지 모르겠다.
“야근 빠지는 거, 무슨 이유 둘러댈 건데?”
“그냥…… 힘들다고.”
“그럼 녀석이 잘도 들어주겠네. 여태까지 군말 없이 했는데. 그치?”
“그럼요? 뭐라고 해요. 다른 이유는 댈 게 없는데.”
“좋은 핑계 있잖아. 플로리스트 과정, 더 심화해서 배우고 싶다고 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정도면 이안도 받아 줄 것 같았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우에게 이긴이 눈매를 곱게 접어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악마같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황급히 눈을 깔고 도망치듯 이안의 연구실로 쏙 몸을 숨겼다.
갑자기 튀어 들어온 도우를 보고 이안은 꽤 놀란 듯했다. 짙은 꽃향기에 어질함을 느끼며 도우가 허둥지둥 인사했다.
“앗, 소장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 그게…….”
혀가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동안 이안의 앞에만 서면 뭐든 재잘거리지 못해 안달이었던 자신이 까마득하다. 왜 이럴까. 도우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거짓말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긴을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이안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속이 보이는 물고기처럼 투명하게, 갈비뼈 사이의 작은 틈마저 낱낱이. 이안은 도우에 대해서라면 뭐든 다 알고 있었다. 정작 도우가 이안에 대해 아는 건 단편적인 정보뿐이다. 수년간 알아 온 이안보다 이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로.
‘좀.’
정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 찰나,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관자놀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옆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빠르게 준비했던 말을 쏟아 냈다. 어서 얘기를 끝내고 나갈 속셈이었다.
“꽃 강습 말인데, 주 1회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요. 레슨을 늘리는 게 좋겠다고 선생님도 말씀하셔서…….”
이상하다. 보통 이 정도만 운을 띄우면 알아서 선뜻 배려해 줬었는데. 영민한 만큼 눈치 빠른 이안은 도우의 표정만 보고도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맞힐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도통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디 한번 계속해 보라는 듯 침묵을 지키는 이안 앞에 도우는 용건을 마저 내놓았다.
“그러려면 야근은 당분간 못할 것 같아서요. 시간이 겹쳐서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신경 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용건은 다 끝났지만 이안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아예 얘기를 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긴장으로 목이 말랐다. 역시 너무 주제넘었지 싶었다. 기껏 연구소에 취직도 시켜 주고, 야근도 편한 보직으로 빼줬는데. 이제 와서 그만둔다니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이긴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바탕 원망하려다 코앞의 동일한 얼굴을 보고 대신 입 안쪽 볼을 꾹 씹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안을 원망하는 건 힘들었으니까.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안이 천천히 차를 마셨다.
“강사가 실력이 좋은가 봐.”
“네? 아……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또 무척 친절하세요.”
실력을 평가할 주제는 못 되었다. 도우는 고르고 골라서 최대한 이안이 납득할 만하게 얘기하려 노력했다.
“그래? 그게 전부야?”
“예……?”
어딘가 캐묻는 투에 적잖이 당황했다. 강습 정도로는 야근을 그만둘 사유로 부족한 걸까.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도우를 보며 이안은 애매한 답을 내어 놓았다.
“알았어.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우에게 이안이 레몬 사탕을 내밀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면전에서 쳐다보고 있으니 달리 피할 도리가 없었다.
“…….”
마지못해 포장을 벗겨 낸 노란 알맹이가 도우의 입안으로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이안은 집요하게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뗐다.
***
발가락이 간질거렸다. 알 수 없는 건, 발가락이 차례로 이긴의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동안 전기가 오른 듯 찌릿찌릿 울리는 아랫배였다. 발가락이 성감대라니. 아무래도 해괴하다. 종아리를 당겨 민망한 장난질을 멈추려 했는데, 오히려 이긴을 제게 끌어당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더럽, 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깨끗하게 빨아 주고 있잖아.”
“진짜…….”
반대쪽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이긴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며 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묘수가 없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근처에 배쓰밤이 있었다. 설마 비눗물까지 빨지는 않겠지 싶어 냅다 그것을 주워 욕조에 넣자 입욕제가 요란하게 끓어오르며 부글부글 거품을 만들어 냈다.
“와, 예쁘다.”
우주처럼 짙은 보라색 물에 반짝이가 은하수 모양으로 퍼져, 도우는 소기의 목적도 잊고 어린애처럼 감탄했다. 이긴의 못마땅한 코웃음은 못 들은 척, 하며.
“이게 아주 약았지.”
약았다는 말에 도우가 방긋 웃었다. 이긴이 약았다고 하면 왠지 칭찬처럼 들리는 탓이었다. 그런 그녀가 얄밉다는 듯 코끝을 살짝 쥐고 흔든 이긴이 이내 입을 맞춰 왔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그러안자 굵은 살기둥이 아래를 두드려 도우는 배쓰밤을 괜히 풀었구나, 후회했다. 그럼 샤워라는 번거로운 과정은 건너뛸 수 있을 텐데.
“침대로 가요.”
몸이 달아오른 도우가 먼저 제안했지만, 이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양손에 가슴을 움켜쥐고 심술궂게 주무를 뿐이었다. 특히나 예민한 젖꼭지를 손가락에 끼워 갖고 놀듯이. 점점 단단해지며 볼록 솟아오르는 유두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요지부동인 이긴의 모습에 이 애무가 배쓰밤의 복수인 걸 알아차렸다.
너무해.
이긴이 바라는 대로 안달복달 매달리는 대신, 물 튀기기로 복수 진화에 나섰다. 소량이었는데도 갑자기 끼얹어진 물에 이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두고 봐.”
번쩍 그녀를 안아 든 이긴이 대충 타월로 물기만 닦아 냈다. 설마 이대로 할 셈인가?
“잠깐만요! 샤워하고……!”
“걱정 마. 거긴 아주 깨끗하게 핥아 줄 테니까.”
“그게 아니라……!”
바동거리던 도우가 문득 멈추었다. 길게 울리는 벨소리 때문이었다. 산통이 깨지자 이긴의 잇새에서 자연스레 욕이 흘러나왔다.
“씨발.”
도로 도우를 욕조에 내려놓은 이긴이 샤워가운을 둘렀다. 우람한 남근이 벌어진 가운 사이로 벌떡거렸다. 이긴도 어지간히 급했겠구나 싶어 도우가 얼른 혀를 내밀었다.
“쌤통이다.”
“뭐? 아주…….”
“가봐요, 얼른.”
말은 그렇게 하면서 도우는 부러 제 가슴을 꼼꼼히 씻는 척, 주물럭거렸다.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긴이 다시금 울리는 벨소리에 연신 욕설을 지껄이며 욕실을 나섰다. 도우는 통쾌해하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기분 좋은 향기가 은밀한 곳까지 배어들도록.
그러나 느긋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이안의 음성에 도우는 숨을 죽였다. 설마 여기까지 들어오진 않겠지 싶으면서도 불안감에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쥐었다. 이긴과 이안의 대화가 문틈으로 가감 없이 흘러들어 왔다.
“웬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을까.”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투에도 이안은 끄덕하지 않았다.
“화원에 갔는데 도우가 없었어.”
“그래? 어디 떡이라도 치러 갔나 보지.”
“강습 그만뒀더라고.”
“내 알 바야.”
빤히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을, 이긴 역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 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에 잠겨 허벅지를 손톱 끝으로 톡톡 치던 이안이 마침내 결심한 듯 속엣 말을 끄집어냈다.
“거기 사장이 나를 알던데.”
“전에 거기서 꽃 보낸 거 잊었어?”
“그랬지. 그런데 한두 번 본 사이가 아닌 것처럼 구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난들 알까.”
“난 이번이 처음이었어.”
“…….”
“그러니 사장이 아는 나는, 실은 너겠지.”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도우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어떡하지. 들켰나 봐. 뭐라고 말하지? 수만 가지 단어가 일시에 우수수 떠올랐다가 한데 뒤엉켜 가라앉았다. 곧 머릿속에 암전이 찾아왔다. 멍하니 주저앉은 도우의 귀에 둘의 대화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흘깃, 욕실 쪽을 향해 시선을 주어 문이 잘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한 이긴은 담배를 빼 물었다.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른 젖꼭지를 잔뜩 귀여워해 주려 했는데, 필터라도 씹어야 그나마 불만이 달래질 것 같았다.
“어쩌라고.”
이긴은 방해꾼을 향해 싸늘하게 비웃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따지는 게 우습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염탐질이나 하고.
“그래, 몇 번 찾아갔어. 그게 강습 그만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말없이 이긴을 직시하다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흘린 이안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오메가 하나 꼬시는 데 속셈이랄 것까지.”
“가만히 있는 애 들쑤시지 마. 헛수고하지 말란 소리야.”
“언제부터 내 수고로움이 네 관심 대상이었는데. 신경 꺼.”
“전에도 말했지만 넌 도우 감당 못 해.”
별 거지 같은 소리를 다 듣는다 싶다. 여태껏 좆을 그렇게 쑤셔 박았어도 아무 일 없었는데 뭘 감당 못 한다는 건지. 도대체 저놈의 뇌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건가 궁금했다. 약이라도 처먹었나. 엿 같은 소리만 해대는 걸 보면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너야말로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이 뭐야.”
“뭐 때문인 것 같아?”
씹, 내가 알 게 뭐야. 뭐라고 지껄이든 귓등으로 대강 넘기고 이만 쫓아낼 요량으로, 이긴은 일침을 놓았다. 그간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넌 걔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병적 집착이지.”
이긴의 지적에 이안은 비스듬히 웃었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도우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어째서 저게 보이지 않을까? 이안 특유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몹시 음침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을.
“사랑.”
이안은 한심한 눈길로 이긴과 시선을 맞췄다. 고작, 그 얘기냐고. 매우 기가 찬다는 듯이.
“사랑 같은 건 의미가 없어. 기껏해야 몇 년 정도 지속되다 마는 호르몬의 작용이지. 그런 일시적인 관계가 무슨 의미지? 난 보다 견고한 관계를 원했을 뿐이야. 따지고 보면 이것도 사랑의 일종이겠지만, 결이 다르다고나 할까.”
미친 새끼. 까고 있네.
기어코 담배에 불을 붙이게 만든다. 씨발,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이긴이 이안의 면전에 대고 독한 연기를 후 불어 댔다.
“이거 아주 변태가 따로 없네? 그래서, 가여운 애 숨통 붙잡고 쥐락펴락하니까 기분이 끝내줘? 그게 네가 말하는 고차원적인 사랑이고?”
사랑은, 씨발.
반복되는 낯간지러운 두 글자에 이긴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안은 도우를 학대하고 있다. 이것이 이긴이 내린 결론이었다. 때리고 욕설을 퍼붓지 않을 뿐.
“솔직히 말해. 걔가 너한테 도와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 보면서 쾌감 느끼는 거, 맞잖아. 하, 씹, 존나 역겹네.”
“진정해.”
이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어차피 도우는 도태될 운명이었어. 처음부터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걸 내가 꺼내 준 거고. 어차피 오메가로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든 자궁을 내줬을걸? 그걸 가지고 나를 비난하면 안 되지.”
자궁. 이질적인 단어가 대화의 흐름을 흔들어 놓았다. 갑자기 무슨 개소린가 싶어 이긴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설마, 하면서도 믿고 싶지 않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 후엔 유하 씨와 내, 수정란 인공 이식 할 거야.”
“뭐?”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담뱃재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정도로 놀라는 이긴이 재미있다는 듯 이안이 하하, 웃었다.
“이긴,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그딴 걸 제안할 거라고?”
“그편이 나도 안심되니까. 깨끗하기도 하고.”
깨끗.
언젠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긴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반항기 어린 눈빛만 보다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싶었던 기억도. 그 동그랗고 작은 여자의 수줍은 중얼거림은 이러했다.
“난 여전히 순, 결하니까요.”
하, 천치 같은 게.
제가 짓밟힌 것처럼 열이 올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럴수록 냉철을 유지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눈이 돌아갈 것 같은 걸 참으며 이안을 슬쩍 떠봤다.
“그냥 한번 박아 주지그래? 그딴 동의 받을 필요 없이 노팅하면 되잖아.”
“내가 왜?”
이안이 평온하게 되물었다.
“내가 어째서 내 핏줄에 오메가 형질이 발현될지도 모를 위험을 굳이 감수해야 하지? 그런 수고 들이지 않아도 도우는 내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미친놈. 눈앞의 인간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속에서 치미는 메스꺼움을 억누르며 현관을 똑바로 가리켰다.
“당장 꺼져.”
“이긴.”
이안이 곰살궂게 웃었다. 이긴은 순간 이안의 낯가죽을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괜히 공들이지 마. 도우는 우리 부부의 아기집이니까.”
“이 씹새끼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갔다. 고깃덩어리가 짓이겨지는 느낌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저만큼 나가떨어진 이안이 히죽 웃으며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피비린내 나는 웃음을 끅끅 흘렸다. 광기 어린 웃음이 거실에 들어찼다.
“별 변태 같은 새끼가.”
이안이 있었던 자리를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던 이긴이 파리한 낯으로 욕실에서 나오는 도우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디서 개가 짖나 보다 해. 다 잊어. 그런 거, 해줄 이유 없고, 할 필요도 없으니까.”
“…….”
감정에도 관성이 있을까. 그토록 상처 입었음에도 이안이 무엇을 제안하든 자신은 거절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과도 같아 순응하고야 말 거라고. 그래서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긴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걸 알아서.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못할 게 극명해서.
도우의 침묵을, 이긴은 충격의 후유증 정도로 받아들였다.
“연구소, 당장 때려치워. 나도 일 바로 정리할 테니까.”
근사한 섬에 가서 둘만 지내자는 속삭임에 도우는 힘없이 입꼬리를 당겼다. 너무나 꿈같은 얘기였다. 감히 바라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환상, 이룰 수 없어 더욱 아름다운. 동시에 가슴 한복판이 관통당한 것처럼 통렬하게 아파 왔다. 비로소 자각한다. 이긴에 대한 제 마음을. 언제 이렇게 깊어진 걸까.
어쩌면 모르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영영 깨닫지 말걸. 채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맺혀 흘러내린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그의 품에 파고들며 간절히 바랐다.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림없는 바람이었다. 내일은 기어코 올 테고, 여지없이 이안과 마주하게 되겠지.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닥치게 되어 있었다. 그게 너무 두려워 도우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다신 뜨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