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출근 즉시 본인의 연구실로 오라는 이안의 메시지도 있었지만, 도우 역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긴이 영 못 미더워하는 걸 알기에, 도우는 그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이안에게 향했다. 그게 옳다고 여겼다. 이긴의 말대로 무작정 연구소를 관두고 숨어 버리는 건 도피지 해결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안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기억나는 그녀의 모든 순간에 이안이 있었다. 짓눌려 지내던 암울한 십 대에 유일하게 도우의 숨통을 틔워 주었던 것도, 생활고와 학비에 시달리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도, 연구원이 되어 어엿한 사회인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안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도우는 얼마간 낙관에 젖어 있었다. 이안에게 잘 이야기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 줄 거라는 낙관이. 그건 마치 그제도 해가 뜨고 어제도 해가 뜨고 오늘도 해가 떴으니 내일도 해가 뜰 거라는 믿음과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이안의 앞에 서자 스스로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졌다. 이안이 평소와 다름없이 차를 우려 내주고 다정하게 레몬 사탕을 권했는데도 그랬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 정말 염치없고, 실망스러우실 거라는 건 알지만…….”
음성 끝이 절로 갈라졌다. 이안을 실망시키고 말 거라는, 그런 익숙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한데 왜 이리 가슴이 조마조마한 걸까. 양심의 가책? 심리적 부담? 좀처럼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하던 도우는, 이 시도가 그녀가 낸 최초의 용기라는 걸 깨달았다.
첫 시도가 몰고 온 저항감을 애써 누르며 도우는 입을 열었다. 생을 쥐어짜 내어 또박또박 고백했다.
“이사님을 좋아해요.”
그를 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아픔이 수반됐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 살가죽을 스스로 찢고 거죽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처럼 도우는 고통에 몸서리쳤다.
“죄송, 해요.”
끝내 뜨거운 눈물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슴이 이렇게나 옥죄어드는데, 숨이 막혀 들어 가는데,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그녀의 말을 너무 잘 이해해서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겪어 온 시간을 생각하면 응당 그럴 법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마따나, 지금의 도우를 만든 건 이안이니까.
하여 도우는 이안의 속마음이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줄곧 예뻐해 주던 개에게 갑자기 목을 물어뜯긴 것과 같은 기분일까?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기분일지도. 어느 쪽이든 불쾌하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죄송해요…….”
도우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다 해서 그로 인해 누리고, 그에게 받았던 모든 것들이 다 갚아지진 않겠지만. 그저 지금껏 그래 왔듯이 너그러움을 베풀길 바랐다. 염치없는 바람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어쨌거나 도우의 청은 다 들어주던 이안이었으니까. 이긴이 저를 위해 나섰을 때야 제가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으니 그렇다 쳐도, 이제는 확실히 제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안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을 거라 믿었다.
거듭된 도우의 사과에 비로소 이안이 시선을 맞춰 왔다. 뜻밖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은 눈치였다. 어쩐지 안심이 됐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안에게는 제가 별 큰 의미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고. 이긴이 늘 말해 왔듯이 그녀에게 베푼 호의 같은 건 이안처럼 대단한 알파의 입장에서는 바다에서 물 한 컵을 퍼주는 정도였을지 모르겠다고. 그러니 저토록 따스한 눈빛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여기까지 생각하고 막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이안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거 없어.”
“…….”
묘하게 빗나간 답변이었다. 걱정이라니 무엇을.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이 이안이 자신감 있게 장담했다.
“내가 지워 줄게.”
“…….”
굳이 되묻지 않아도 이안이 지워 준다는 대상이 이긴과 함께했던 시간, 그에게 향했던 마음이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긴과의 기억을 오염 정도로 치부하고 닦아 내겠다는 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이물 취급 당해서만은 아니었다. 이안이 내비친 순수한 함의에 질려 버렸다. 기억을 지운다고? 어떻게?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본능적인 직감이 도우를 엄습했다. 반사적으로 레몬 사탕으로 눈이 향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먹었던 레몬 사탕. 도우의 시선을 알아챈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약속 같은 거야.”
“…….”
“너와 나의 약속.”
약속? 무엇을?
도우는 모르는 약속이었다. 저 노란 사탕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았더라면, 선뜻 받아먹었을까. 모르겠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그녀에게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몰래 일을 꾸며놓고선, 속인 사실이 드러나자 태연히 수긍하는 이안의 모습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나락 같은 혼란에 빠져서도 도우는 가까스로 어떤 선택을 해냈다. 최소한의 저를, 이긴과의 기억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을. 이긴을 입에 올린 건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한 잔꾀처럼 보이길 간절히 기도하며.
“그냥, 결혼 안 하시면 안 돼요?”
갑작스러운 투정에 이안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속을 헤집기라도 할 듯이.
“제 마음 아시잖아요. 오랫동안, 너무 오랫동안…….”
정말 긴 시간을 착각해 왔다. 대가 없는 애정을 받아서 행복하다고 여겼다.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이 벼락처럼 제게 주어졌다고. 이제는 알겠다. 그런 기적 같은 건 오메가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싸늘하게 식어 버린 젖은 뺨을 부러 닦아 내지 않은 채, 도우는 구차하게 매달렸다.
“소장님의 오메가라면서요. 그런데 꼭, 버리는 것처럼……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자꾸만, 정말 힘든데…….”
“도우야.”
“잘못했어요. 몰래 이사님 만난 거, 죄송해요. 혹했어요. 소장님 껍데기라도 안고 가는 기분이어서, 둘이 똑같이 생겼으니까 소장님이라고 생각하려고요.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런 마음이 들어서…….”
“그만 말해도 돼.”
철없는 어린아이를 토닥이듯, 이안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정한 손길에 따스함이 묻어났지만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한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번 넘을 수 없는 벽의 존재를 느꼈다. 고백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단절이었지만, 이번엔 결이 달랐다. 단순히 높고 단단한 벽이 아니라, 사방에서 그녀를 조여 오는 감옥과도 같은 벽.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정말 그럴 일이 없을 거란 예감이 막연히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이긴에게 마음을 가져선 안 되는 거라고. 그랬다간 남김없이 지워질 거라고. 그도, 그를 담았던 그녀도. 그렇다면 이긴에게도 이안에게 그러했듯이 솔직히 털어놔야 하나. 그를 위해 그를 떠나 이안에게 가겠다고.
가정만으로도 가슴 전체에 찌르르한 통증이 번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이를 악물었다. 그것만은, 도저히…….
‘못 해.’
도우는 뒷걸음쳤다. 자신에게서도, 이긴에게서도.
***
연구소를 그만두었다. 이긴과 마주치기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목적 완수를 눈앞에 둔 이안은 쉽게 승낙했다. 어차피 쉬게 해줄 생각이었다며. 그들의 아이를 안정적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그편이 낫다는 친절한 설명에 도우는 더 이상 비통하지 않았다.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이긴과 억지로 몸을 섞었을 때 애써 머리를 비웠던 것처럼. 그게 오메가의 숙명이라고 단정 짓고 나면 슬플 일도 아니었다. 그녀 인생에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도우는 언제고 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이안이 진실로 두려웠다. 제게 어떤 암시를 걸었는지도 알 수 없고, 안다한들 그걸 풀 방법을 몰라 한없이 무력했다.
도망칠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이따금 불쑥불쑥 치미는 충동은 몰려드는 막막함과 함께 번번이 좌절됐다. 무작정 도피한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혼인 경쟁에서 승리한 이안이 쥐게 될 권력도 두려웠다. 다행히 이리되어서 저로 인해 이긴이 망하는 일만은 막았다. 이긴의 삶도 곧 본래 궤도로 돌아가겠지. 비록 유하와의 혼인은 어그러졌지만 이긴 정도면 다른 알파 여자와 결혼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므로 제 선택은 옳았다. 씁쓸한 자위였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버틸 수 있었다.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아주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겨우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화려한 도시 구경을 마치고 쓰레기 더미로 돌아온 시궁쥐 모양으로 지쳐선 내내 잠을 잤다.
이안이 마련해 준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안성맞춤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조용했으니까. 그녀 혼자 먹을 만큼의 적절한 음식과 생필품 같은 것들이 채워진 오피스텔을 보며 도우는 새삼 이긴이 했던 말들의 진위를 깨달았다.
숨통을 잡고 쥐락펴락,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이긴이 옳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언제나 옳았다. 옳았음에도 아득바득 제가 맞는다고 우겨 댔다. 그 결과 이렇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연구소를 그만두고 이안을 피하라는 이긴의 조언을 그대로 그에게 적용한 꼴이니.
‘생각하지 말자.’
변하는 건 없을 거다. 자꾸 기억해 봐야 우울해질 뿐. 도우는 일부러 다른 걸 떠올리려 애썼다. 예를 들면 이안이 건네주었던 청첩장 같은 것을. 언젠가 이긴이 말했듯이 초대 목적의 청첩장이 아니었다. 일종의 예고였다. 곧 수정란이 올 테니 준비를 하라는.
금박이 고급스럽게 둘러진 청첩장은 이안이 나가자마자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러니 더 떠올릴 게 없었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도우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천장, 똑같은 벽, 똑같은 하루…….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멀쩡한 게 아쉽다. 차라리 미쳐 버리면 더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발정기가 언제였더라. 때가 된 것 같은데. 억제제를 챙겨 먹지 말아 볼까. 그럼 정말 어떻게 되어 버리지 않을까? 아예 흔적도 없이 녹아서 사라질지 몰라. 불타서 사라질지도 모르고. 뭐가 됐든 그녀가 증발하는 건 마찬가지니, 꽤 매력적이다.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달칵거리는 쇳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 충동적으로 걸쇠를 잠가 두었던 게 떠올랐다. 그녀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이안은 아무 때나 불쑥불쑥 찾아오는 게 싫어서 그랬다. 청첩장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 때문이기도 했고.
“가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퉁명스레 던지자 바깥이 잠잠해졌다. 별 의심 없이 걸쇠를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밀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도우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여긴, 어떻게…….”
“얼굴이 많이 상했네. 기껏 찌워 놨더니.”
개새끼.
이안을 두고 짤막하게 욕을 쏟은 이긴이 마른세수를 했다. 아마, 더 욕설을 퍼붓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듯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랬다. 예상치 못한 이긴의 방문에 도우의 머리는 완전히 멍한 상태였다. 누군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했다. 그 와중에도 재빨리 걸쇠를 채우는 도우의 행동을, 이긴이 날카롭게 지켜봤다.
“그놈은 어차피 여기 못 와. 지금쯤 하객 맞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아…….”
멍하니 중얼거리는 도우의 손목을 이긴이 잡아끌었다.
“필요한 것만 대충 챙겨.”
“…….”
대충 챙기라면서도 휑한 내부를 둘러본 이긴은 이미 판단을 마친 듯 그녀를 이대로 번쩍 들어 나갈 기세였다. 사실상 챙길 게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도우는 미적거렸다. 소중한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어설픈 꼼수였다. 어차피 그를 따라가지 않을 거니까, 따라가선 안 된다는 걸 잘 아니까. 그저 잠깐의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여긴 어떻게 알아냈어요? 소장님이 꽁꽁 숨겼을 텐데.”
“그 새낀 내 손바닥 위니까.”
툭 뱉은 이긴이 멋쩍은 듯 덧붙였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사람 하나 찾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고.
“그렇구나…….”
도우가 없어진 뒤로 이긴은 줄곧 그녀를 찾았단 말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감히 그런 마음 가져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이제.”
“…….”
성급히 그녀의 팔을 당기는 이긴의 손을, 도우가 조용히 잡아떼었다. 한발 앞서 현관으로 향하던 이긴이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꺾어 내렸다.
“못 가요. 아니, 안, 가요.”
“내 귀가 이상해졌나.”
이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긴, 이 얼굴 봤을 때 눈을 의심하긴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아서, 도우는 입 안쪽 살을 모질게 물었다.
“내가 너무 늦게 찾아서 그래? 함정이 있었어. 그 자식이 평소답지 않게 여러 군데…….”
“아니, 아니에요.”
도우는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늦게 찾다니, 당치 않다. 너무 일찍 찾아서 문제인 거다.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찾아서. 끝내 그녀가 잔인한 말을 하게 만들어서.
“저, 소장님 뜻 들어 드리려고요.”
“진짜 귀가 어떻게 됐나.”
혀를 가볍게 찬 이긴의 눈빛이 일견 사납게 돌변했다.
“설마 여기가 신혼집인 건 아닐 테고.”
“…….”
대번에 이런 오해는 슬프다. 감정 같은 거 주고받은 건, 사실상 당신밖에 없는데. 고개를 저으며, 도우는 후회했다. 한 번쯤은 전해도 좋았을걸.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고. 은근히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 본 적도 있다고.
“씨발, 아니면 뭔데. 말해 봐.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
“할 말 없어요. 그냥, 그냥 소장님 배신하기 싫어요.”
“그 새끼가 너한테 뭘 하려는 건지 잊었어?”
“상관없어요. 충분히 원하실 만하고. 그만큼 투자했잖아요.”
“뭐?”
이긴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팔이 스르르 풀려났다. 허탈한 헛웃음을 몇 번 짓던 이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자존심만 없는 줄 알았더니 대가리도 없네.”
“…….”
“거지 같은 게.”
경멸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런 반응 반가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속이 쓰렸다. 눈물이 고일 정도로.
“뭔데.”
이긴이 도우의 양어깨를 억세게 쥐었다. 강한 악력에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왜 울어. 사람 속 박박 긁어 놓고 왜 우는데. 네가 바라던 말, 아니었어?”
“울든 말든.”
“…….”
“이제 무슨 상관인데요.”
거친 욕설이 들린다 싶더니 도우를 품에 확 가둬 안은 이긴이 다짜고짜 그녀의 고개를 제 쪽으로 비틀곤 입술을 박았다.
안도했다.
불쑥 안을 점령한 쌉쌀한 혀에 진저리치면서도.
이대로 그를 탐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미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욕심이 일었다. 그와 함께한 마지막 기억이 다툼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해서.
“으음…….”
적극적으로 그의 혀를 잡아 채 얽어매며 깊이 앓았다. 뜨거운 숨을 생명수인 양 받아 마셨다.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이 뒤섞인 타액에선 감미로운 맛이 났다. 녹은 눈에 설탕을 섞은 듯 청량한 단맛.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점막을 샅샅이 훑어 달게 삼켰다. 메말랐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들어 내는 애처로운 소리에 몸이 달아 애타게 그를 갈구했다.
어느덧 열렬히 응하고 있는 도우를 이긴이 가볍게 품 안에서 잡아 뗐다.
“이래도 상관이 없어?”
서글픈 눈으로 그를 응시하면서도 말만은 매몰차게 뱉었다.
“어차피…… 무슨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그냥, 내기로 얽힌 것뿐이면서.”
“너한텐 내가 고작 그 정도였어?”
“…….”
“서로라고 느꼈던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자괴감이 묻어나는 이긴의 말투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평생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줄만 알았다, 이긴이라는 남자는. 그러나 마냥 아파하기엔 늦었다. 도우는 예리하게 알아챘다. 이 상처가 그녀가 파고들어야 할 틈이라는 것을.
“좋아해요. 당연하잖아요. 이안 소장님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요? 잘 알면서…….”
똑같긴 누가. 도우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긴은 이긴이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 자신한다. 수백, 수천의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 한들 그 홀로 독보적일 것을. 알면서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우르르 무너졌다.
예상대로 이긴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래서. 이제 그 새끼가 내 오메가니 뭐니 떠들어 대니까 이 얼굴은 필요 없어?”
“……이사님은, 소장님이 아니잖아요. 그걸 깨달았어요.”
“깨달아?”
분명 입매는 웃고 있는데, 이긴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한순간에 광기 어린 눈동자가 섬뜩했다.
“그 새끼 낯가죽을 벗겨 내면, 다시 나한테 오나? 응?”
“그런…….”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넓지 않은 공간,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걸음 떼지 않아 어느새 등 뒤는 벽이었다. 동시에 언제 맞닥뜨려도 생경한 감각이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열감을 동반한 전율.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
‘안 돼…….’
때마침 공교롭게 시작된 발정기에 아연해하며 도우는 본능적으로 이긴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그녀의 발정열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 한곳에 꽂혀 있었다. 선명한 채혈 자국이었다.
“이건 또 뭐야.”
“별거 아니에요.”
숨기려 해봤지만 감춘다고 자국이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각종 산전 검사들을 위해 여러 차례 피를 뽑아 간 흔적이 어지러이 남아 있었다. 손목을 황급히 등 뒤로 돌리던 도우는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 싶어 한발 늦게 아차 했다. 그냥 평소처럼 억제제 신약 테스트라고 했음 조용히 넘어갔을 것을. 아니나 다를까. 수상쩍은 낌새를 챈 이긴의 눈빛이 한층 사나워졌다.
“별건가 본데.”
“아니에요. 이건…….”
“네 입으로 말해. 내가 그 새끼한테 직접 묻기 전에.”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 그냥 모른 척해 주지. 어째서 당신은 하나도 곱게 넘어가는 법이 없어. 사람 힘들게. 원망이 치솟았다. 턱 끝까지 서러움이 차올랐다. 끝내 눈물이 고였다.
“흑…….”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르자 이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감아 주면 안 돼요? 안 그럼 너무 비참한데…….”
“그러니까 씹…… 이게 뭔데. 알아야 눈을 감든 뜨든 하지.”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짤짤 흔들어 뭐든 털어 내고 싶은데, 그러기엔 동그랗게 말린 어깨가 너무 작지 않은가. 담배라도 피우면 좋으련만, 하필 다 놓고 왔다. 금연 약속이 떠올라서. 비록 그녀는 저를 버리고 이렇게 도망갔지만.
“됐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싫었다. 이 좁아터진 곳에서조차 이안의 냄새가 났다. 정제를 가장한 통제의 냄새가. 거기에 달콤한 향기가 이질적으로 스며들었다. 발정을 알리는 무르익은 복숭아 냄새였다.
“잠깐.”
본능을 일깨우는 익숙한 도우의 체취에 감각이 예리해진 이긴은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안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듣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충격은 확연히 달랐다.
“이거 설마.”
“…….”
침묵이 이미 긍정이었다. 대리 임신을 해주겠다고. 제 새끼도 아닌 걸 끝내 배겠다고.
“그럼 여기…….”
제 아랫배를 짚으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이긴의 낯에 도우의 핏기가 가셨다. 여기를 찾았을 때부터 줄곧 보였던 갈급함이 그에게서 사라져 있었다. 굳이 음험한 속내를 숨기지 않으며 이긴이 아직 납작한 도우의 배를 슬슬 어루만졌다.
“다른 걸 배면 더 넣을 자리가 없겠네.”
도우는 이긴이 무얼 할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때마침 찾아온 발정열이 그에게 어떤 기회로 다가왔는지를.
“안 돼요.”
“말로만.”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의 품에 허물어지는 도우를 보고 이긴이 비스듬히 웃었다. 뻔히 그녀가 발정열을 이기지 못해 치대는 걸 알면서도.
“진짜, 안 돼요.”
허우적거리며 그에게서 도망치려 애썼지만,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열기에 팔다리가 촛농처럼 녹아내린 듯 했다. 솟구치는 욕구를 거스르기 위해 이성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이대로 그가 안아 주었으면, 아니, 그래서는 안 돼, 그래도 한 번만, 아니, 그래도, 그래도…….
‘제발…….’
도우는 덧없이 빌었다. 그가 페로몬만은 풀지 않기를. 벌써 열기로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페로몬까지 푼다면 그 뒤는 장담할 수 없었다.
피한답시고 정신없이 침대로 향하는 그녀를, 이긴은 느긋하게 쫓았다. 그예 풀썩 엎어져 하느작거리는 여체를 가볍게 제압했다. 헐렁한 팬츠를 벗겨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손길에 고양이처럼 가르릉, 애교 섞인 신음을 흘리던 도우가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도리질 치는 걸 보며 이긴은 비스듬히 웃었다. 그러곤 페로몬을 한계치까지 풀어버렸다.
“흡……!”
도우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농도 짙은 페로몬에 숨통이 턱 막혔다. 사방이 그로 꽉 찬 것 같았다. 이긴은 자유자재로 페로몬을 다루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가 느슨하게 페로몬을 물려주어야 도우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흡, 하아, 흣…….”
내쉬었다 들이마셨다……, 호흡조차 그녀의 의지로 불가능하게 길들여 놓은 이긴이 한순간에 페로몬을 과시하듯 쏟아 붓자 사지를 결박당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어졌다. 믿을 수 없는 위압감에 도우의 눈이 망연히 벌어졌다. 그동안은 정말 장난이었구나. 이따금 그가 풀었던 건 원활한 관계를 위한 윤활제 정도였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하흐…….”
감당하기 버거운 페로몬에 짓눌려 도우는 속절없이 앓았다. 숫제 그의 체액으로 일렁이는 바다에 빠진 듯했다. 페로몬의 해일이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어삼켰다. 익사할 것 같은 와중에 젖꼭지가 꼿꼿하게 섰다. 아래로는 뜨끈한 애액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위고 아래고 뭐라도 쑤셔 넣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살 내음을 맡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음, 음…….”
흥분으로 제대로 몸도 못 가누면서 조르듯 빠끔거리는 도우의 입술에 이긴이 기꺼이 입술을 포갰다. 점막의 마찰만으로도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의 혀를 뽑을 듯이 쭉쭉 빨아대며 도도록하게 솟은 정점을 마구잡이로 판판한 가슴에 비벼댔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가슴을 주무르던 이긴이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웠다. 그대로 비틀자 고무처럼 단단한 유두가 슬쩍 꼬였다가 탄력 있게 풀어졌다.
“아읏!”
찌릿한 자극감에 도우가 자지러졌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뜩했다. 발정열에 뇌수가 질퍽하게 녹아내린 듯 했다. 남은 건 오로지 중독될 것 같은 쾌감뿐이었다. 예민하게 달아올라선 그의 살갗이 스치기만 해도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아, 좋아, 흑, 너무…….”
희열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동시에 온몸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은 아래를 이긴의 허벅지에 대고 치댔다. 고작 옷 위에 대고 문지르는 것뿐인데 끔찍하게 좋아 눈알이 휙 뒤집혔다. 단지 비벼대는 것만으로 이럴진대 그의 것을 품으면 그 얼마나…….
도우는 애타는 눈을 하고 이긴과 시선을 맞췄다. 아랫배가 불덩이를 품은 것처럼 홧홧했다. 이걸 달래줄 수 있는 건 이긴뿐이다. 그녀는 그에게 꼭 맞춰진 몸이니까. 아직 단정한 그의 옷을 벗기며 드러나는 살갗마다 입술을 맞추고 혀를 내어 핥으면서 도우가 유혹했다.
“하고 싶어…….”
“이렇게?”
뻔히 무얼 원하는지 알면서 이긴이 가볍게 손가락을 눌렀다. 검지로 입구를 쿡 찌르고 깔짝거렸다. 기대에 차있던 도우의 눈망울에 서러움이 그득해졌다. 그러면서도 조르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쉬운 대로 손가락이라도 품으려고 하체를 그의 팔뚝에 바짝 밀착시키곤 허리를 둥그렇게 움직였다. 박힌 손가락이 자동으로 안을 휘저었다.
“으응, 응…….”
아쉬움과 쾌락이 뒤섞인 한숨 끝에 도우의 시선이 불룩한 그의 앞섶에 머물렀다. 입맛을 다시며 그의 앞에 엎드려 속옷 위에 무작정 혀를 댔다. 그러곤 선액으로 젖은 얼룩을 가볍게 입술에 물고 즙을 짜내듯 빨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차며 잠시 그녀를 떼어 낸 이긴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던졌다.
우뚝 선 기둥에 도우가 냉큼 달려들었다. 투명한 액으로 번들번들 젖어있는 귀두를 볼이 불룩해지도록 입 안에 담으면 중얼거렸다.
“맛있어…….”
이제야 내놓은 게 억울하다는 듯 울먹거리는 도우를 보며 이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조차도 도우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꿀물을 귀에 들이붓는 기분이었다. 싸한 향이 나는 달콤한 꿀을.
“하흐읍…….”
언제까지고 그의 것을 빨고 싶다. 어서 이걸 제 안에 담고 싶다.
동시에 이뤄질 수 없는 걸 바라며 부단히 고개를 움직이는 도우의 턱을 이긴이 잡아 올렸다.
“귀엽게 구네. 진작부터 이럴 걸 그랬나.”
끄덕끄덕.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도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술 주변에 인 거품을 혀로 핥으며 졸랐다. 그의 성기를 소중히 쥐고 위아래로 문지르며.
“안아주면 안 돼요? 안아줘요, 넣고 싶어, 이거…….”
“뒤돌아.”
도우는 순순히, 고분고분 뒤돌아 엎드렸다. 그녀가 평소에 이 자세를 얼마나 굴욕적으로 여겼는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 이긴이 박아줄 거란 기대에 들떠 마냥 기쁘기만 했다. 지독할 정도로 주위를 메우고 있는 페로몬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상관없었다. 이대로 미쳐버리면 어때. 아예 그의 성기에 꿰인 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흥분이 극에 달은 도우가 파괴적으로 자신을 몰아갈 동안, 그녀의 뒤에 자리 잡고선 엄지가 움푹 들어가도록 엉덩이를 움켜쥔 이긴이 말랑한 살덩이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여기.”
빠끔거리는 입구를 제 좆으로 꾹 누르며 이긴이 조소했다.
“내 거 말고 다른 건 못 넣어. 음?”
“으응…….”
온순하게 끄덕이는 도우의 턱을 잡아 제게 향하도록 고정한 이긴이 끄트머리만 물려둔 좆을 사납게 쑤셔 박았다. 자궁구까지 단박에 꽂히도록 거침없이 파고드는 살기둥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아읏, 흣, 아, 아학!”
후, 만족감 섞인 낮은 신음이 충만감에 파들거리는 도우의 여린 살갗 위로 떨어졌다. 무자비한 삽입에 숨도 제대로 못 고르는 도우와 대조적이었다. 음낭이 음순을 때려 발갛게 자국이 남도록 허리를 턱턱 놀려 대면서 이긴이 잔인하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그 새끼 낯가죽을 뜯어내야겠어. 네가 좋아하는 얼굴이 두 개라는 걸 참을 수 없거든. 지금은 네가 이 얼굴에 혹하는 걸 아니까 겨우 참고는 있지만.”
섬뜩한 속삭임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던 도우는 흡, 숨을 삼켰다. 미쳤다. 눈빛이 정상을 벗어나 있었다. 자비 없는 몸놀림에서 이미 그가 그동안 자기를 봐줬다는 걸 알았지만. 막상 광기 어린 두 눈을 확인하고 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러지, 말아요.”
이젠 뭐가 두려운지 모르겠다. 마냥 무섭기만 했다. 그녀에게서 모든 걸 지우겠다고 하는 이안도, 아득바득 제게 자신을 새기려는 이긴도. 그런 그에게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고야 마는 자신도.
“왜. 아직도 그 새끼가 그렇게 좋나?”
오해였다. 그저 낯가죽을 뜯어낸다는 게 잔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이제 이안에게 남은 감정은 부채 의식 말고는 없었다. 얼마간의 죄책감이 동반된 부담. 그마저도 이제는 희미해져 버렸지만……. 그러나 세세한 감정의 결을 나누기엔 발정열에 잠식당한 혀가 무뎠다. 발정 난 몸이 제멋대로 이긴에게 반응 중이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착실하게 엉덩이를 흔들고 교성을 질러 댔다. 더없이 달콤하게.
“앙, 아응, 앙, 앙! 아아앙!”
난폭한 삽입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영혼만 두개골에 갇힌 기분으로 제게 얽어 붙은 남성의 움직임을 좇던 도우는 생경한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깊숙한 안쪽에서 무언가, 서서히 부풀고 있었다. 그의 것인 듯 아닌 듯 낯선 듯 낯익은 것이 꽉 다물린 자궁 입구를 억지로 벌리는 느낌이 생생했다.
“아, 앗!”
팽창한 성기의 둘레에 난 뾰족한 돌기 같은 것이 벌어진 입구를 따끔하게 안을 찔렀다. 마치 닻을 내리듯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어 봤지만, 접붙은 하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흡사 거대한 작살에 꿰뚫린 것 같아, 도우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정말로 짐승, 한 마리 개가 된 것만 같다. 원초적 행위가 불러온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비명이 터졌다.
“싫, 싫어……!”
처절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긴은 보란 듯 그녀의 엉덩이를 제 허리 높이에 맞춰 추어올렸다. 입으로는 연신 안 된다고 외치던 도우의 몸도 기다렸다는 듯 그를 위해 무릎을 바짝 세웠다. 흑, 머리와 상반된 몸의 반응에 도우가 자괴감 섞인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밀어내지는 않는 도우더러 들으라는 듯 동그란 엉덩이를 가볍게 통통 두드리며 이긴이 칭찬했다.
“착하지.”
보드랍고 뽀얀 엉덩이 사이에 제 것을 받느라 한계까지 벌어진 붉은 구멍, 거기에 우뚝 박힌 흉흉한 기둥이 무척 선정적이었다. 볼만하다는 감상과 함께 이긴은 허리를 마저 꾹꾹 밀어 넣었다. 이윽고 약간 남은 뿌리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변형된 성기로 인해 장기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상당했는지 도우는 이제 색색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음? 내 거라고.”
고집스런 중얼거림에 그녀의 가장 은밀한 구석까지 차지한 만족감이 진하게 묻어났다. 노팅은 그도 처음이었지만, 도우에게 단단히 제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야무지게 꼭꼭 받아 삼키는 안쪽도 새삼 기특하고.
후으…….
정복감에 도취되어 절정에 이른 이긴은 허리를 곧추세워 진득이 정액을 흘려보냈다. 폭발적으로 흘러드는 사출액에 도우의 자궁이 팽팽하게 팽창했다.
“아, 아파……!”
급격하게 늘어난 자궁의 부피감에 아랫배가 봉긋 솟았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사정에, 도우는 제 속에 뜨끈하게 쏟아지는 게 소변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나, 배 속 가득 들어찬 것이 알파의 정액이란 증거로 고통스러워하던 도우의 신음에 일순 환희가 섞여들었다. 정액에 농축되어있던 페로몬이 말초까지 구석구석 퍼지자 비정상적인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할퀴었다.
“하으으으으읏!”
도우는 잔뜩 일그러진 낯을 하고 기쁨에 겨워 웃었다. 텅 비었던 껍데기가 그로 가득 채워져 비로소 완전해진 것 같았다. 완벽한 충만감.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극치의 쾌락에 어쩔 줄 모르고 감겨 있다가 종내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이며 엉엉 울었다.
“싫다더니,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못되게 말하면서도 흠뻑 젖은 뺨을 쓸어주는 이긴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도우와 한 치의 틈도 없이 빡빡하게 맞물려 있는 느낌이 그에게 안정감을 선사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붙어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고 나서야 이긴은 평소의 여유를 찾았다.
“그만 씹어 먹어. 이러다 끊어질라.”
제가 한계까지 부풀려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으면서 순 억지였다. 이만하면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반응할 만도 한데 도우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발정이 가라앉은 후 의식이 명료해진 그녀는 즉각 현실을 자각했다.
그가 각인했다.
이긴이, 제게, 돌이킬 수 없도록.
“뭘 짜고 있어.”
이제 와서 어쩔 건데.
제가 벌여 놓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언뜻 비정하게 뇌까리면서도 늘어진 여체를 안아 가둔 품은 다정했다. 아무래도 노팅이 풀리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비스듬히 누워 뺨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긴을 저지할 생각도 못하고 도우는 마냥 울었다.
“흑,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요……. 빼요, 이거, 빼줘요.”
“못 빼. 안 빠져.”
심술궂게 못 박은 이긴이 중얼거렸다.
“넌 내 오메가야. 다른 건 생각하지 마.”
발정에 노팅까지 겹쳤으니까 어차피 임신은 기정사실이었다. 도우가 좀 더 편히 제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 주면서, 이긴의 시선이 자연스레 벽으로 향했다. 이안의 연구실에 걸려 있던 문구와 같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넘겼는데 이제 보니 모든 알파에게는 저만의 오메가가 있다는 뜻을 교묘하게 내포한 문장이었다.
“지랄.”
저따위 좆같은 문구를 보며 혼자 자위라도 했나. 썩은 뱀처럼 구역질 나는 놈의 속내를 떠올리자 대번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도우의 말랑한 가슴을 주무르자 사납게 들끓던 속도 이내 잠잠해졌지만.
자궁구가 천천히 다물리는 동안 도우는 체념한 듯 숨만 색색 몰아쉬었다. 시간이 흘러 비정상으로 부풀었던 성기도 가라앉아 본래 모양을 회복했다. 이긴은 천천히 아래를 빼냈다. 싸질러 놓은 게 주르륵 딸려 나오던 전과 달리 도우의 체액만 옅게 묻어 있는 게 신기했다.
깊이 잠이 든 도우를 내려다보는 이긴의 마음이 착잡했다. 그사이 많이도 여위었다. 속앓이한 티가 얼굴에 역력했다. 이안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지만, 어지간히 궁지로 몰아넣었지 싶다. 도우가 하얗게 질렸을 꼴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이제 그럴 일 없어.’
다신 둘이 마주치지 않도록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이젠 제 아기까지 가진 몸이니 더더욱 그래야 했다. 이긴은 도우를 시트로 둘둘 말아 안았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
평생 비행기 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여권을 받고 나니 얼떨떨했다.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 어리둥절해하면서, 도우는 가만가만 제 배를 쓸어 보았다. 아직 아무 징후도 없지만 차차 부풀어 오를 테다. 필연적으로 닥쳐 올 변화를 생각하면 기분이 묘했다. 아기를 가진 게 좋은지 나쁜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휩쓸리는 삶.
도우는 그게 오메가의 본질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모든 게 철저한 이안의 계획이었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금은 이긴의 뜻대로 임신해 버렸다. 그녀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멍하니 앉아 있던 도우는 상념을 지우고자 몸을 일으켰다.
‘짐이나 싸자.’
곧 출국인데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었다. 계속 넋이 나간 채였긴 하지만……. 어쨌든 생각난 김에 움직이려 했는데, 막상 짐을 챙기고 나니 커다란 여행 가방이 무색하게 공간이 한참 남았다.
‘뭐 더 가져갈 거 없나.’
괜히 두리번거리던 도우의 눈에 아기 신발 한 켤레가 띄었다. 양쪽을 다 올려놔도 손바닥 하나를 채우지 못하는 작은 신발.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노란색이지만 자잘한 꽃무늬 레이스에 딸을 원하는 이긴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가 별 반응 하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포장째 도로 들고 나가던 이긴의 뒷모습이 기억나, 도우는 가만히 신발을 쓰다듬었다.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어찌할 바를 몰랐을 뿐이다. 아직 실감도 나지 않는 데다가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어어서 더더욱.
‘모르겠다.’
아직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자그마한 신발을 보고 있자니 이긴과 별개로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 아빠 동생들.
이긴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극구 말렸다. 문 앞에 경호를 표방한 감시인을 세워 둔 것만 봐도 도우의 외출을 얼마나 꺼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텐데.’
그러나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이긴이 그녀의 휴대전화도 어디론가 감춰 버린 까닭이었다. 도우는 고심 끝에 경호원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나간다는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화뿐인데,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할까 싶었다.
“저기요…….”
사람 맞나. 분명 들었을 텐데도 미동도 않는 상대에게 도우가 재차 부탁했다. 열심히 사정을 설명했는데도 돌아온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안 됩니다.”
“네…….”
순순히 물러나긴 했지만 이럴 일인가 싶었다. 소식을 전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애가 탔다. 두통마저 심하게 일었다. 송곳이 관자놀이를 쑤시는 듯한 예리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매번……어?’
가족을 등지는 상황이나 원망할 때마다 이처럼 머리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지금에서야 그간의 반복된 우연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무의식의 수면 아래 잠겨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떠올라 윤곽을 드러내려는 순간, 때마침 통한 것처럼 인터폰이 울렸다.
“어? 엄마, 아빠!”
화면에 비치는 식구들의 얼굴에 도우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출입구 버튼을 눌렀다. 아니 누르려 했다. 조금 전 들었던 찰나의 의문이 없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망설이는 사이 다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마치 버튼 누르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결국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경호원이 그녀의 앞을 막아선 것과 간발의 차이였다. 당연히, 경호원의 반발이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얼굴만, 잠깐 보는 것도 안 돼요?”
도우는 혼란에 빠져 더듬거렸다. 마치 가족들을 변호하는 것 같은 제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멋대로 말을 뱉는 제 혀가 낯설다. 실은 가족들을 감쌀 마음이 없어서 더더욱. 이 와중에 노란 레몬 사탕이 떠오른 건 지나친 비약일까.
“절대 안 됩니다. 이사님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출입구를 통과하면 꼭대기 층인 이곳까지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현관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열지 못하게 막는 자보다 열려는 자가 월등히 많았다. 경호원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가족들은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도우야! 어휴, 너는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대체! 응?”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던 마음가짐은 어디가고,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거부감이 일었다. 이 불안은 뭘까. 가슴이 사늘하게 내려앉는 이 기분은. 도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꺼림칙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쩐지 식구들의 아우성이 작위적인 것 같다고 느꼈을 때, 그들의 뒤로 이안이 천천히 나타났다.
“여기 갇혀 있었구나.”
모든 걸 이긴의 탓으로 돌린 이안이 도우를 자상하게 다독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듯.
“안 돼요.”
도움을 구하려 두리번거렸지만, 경호원은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쩔쩔매고 있었다. 그로써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소름이 쭉 끼쳤다.
“제발…… 안 돼요. 저를, 놓아주셔야…….”
배 속의 아기는 이안의 조카도 될 것이다. 설마 같은 알파인데 자기의 핏줄을 해하진 않겠지. 그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다. 이긴이 그녀에게 노팅했음을 이안에게 알린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일순 안면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던 이안이 표정을 풀고 인간미라곤 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내가 다 지워 줄게. 그럼 넌 다시 순결해지는 거야.”
“무슨……, 싫어요. 그러지 말아요…….”
도우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럿이 아수라장으로 얽힌 현관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어차피 그중에 저를 도와줄 사람은 없겠지만.
한통속.
제 식구들을 해로운 무리로 규정했을 때, 다시 한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마치 동전을 넣으면 사탕이 나오는 기계처럼, 식구들을 부정했을 때마다 두통이 찾아왔다는 자각이 이제야 또렷해졌다. 깨달아 놓고도 거짓말 같아서 도우는 망연해졌다. 이 또한 세뇌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이안이 제게…….
“윽……!”
도우는 머리통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이안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리자, 머리가 터져나갈 것처럼 아파왔다. 겪어본 적 없는 고통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속절없이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때, 시야마저 흔들리는 극심한 두통을 뚫고 이긴의 고함이 들려왔다.
‘왔구나……!’
분노에 찬 이긴의 욕설에 이상할 정도로 안도한 것도 잠시, 이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볼을 감싸고 눈을 맞췄다. 별안간 뺨에 가해진 강한 악력에 새된 신음이 흘렀다.
“아……!”
작게 벌어진 입술로 동그란 알갱이가 들어왔다. 시큼하면서 익숙한 레몬 사탕 맛이 욱신거리며 퍼졌다. 경악으로 동그랗게 벌어진 도우의 눈에 이안이 한가득 잡혔다. 그녀의 눈동자에 새겨 넣는 것처럼 이안이 한 글자씩 똑똑히 발음했다.
“Omnis alpha habet omega.”
“……!”
거부할 수 없는 주문에 얽매인 사람처럼, 도우의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을 뇌에 박고 마구 휘젓는 것 같았다. 동시에 끈끈한 것이 미지근하게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점차 붉게 물드는 발 언저리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피…….”
다 끝났구나. 이안의 말대로 완전히 다 지워지는 거야. 이긴도, 아기도, 저도, 모두 다.
손 위에 얹힌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최근의 일이 희미해졌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기억 속에 의식적으로 무엇이든 떠올리려 애썼다. 그나마도 곧 멍해졌다.
‘여기가…….’
어디일까. 낯선 곳을 살피느라 눈알을 굴리다 번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긴……!’
마지막임을 인지했음에도 뭐라도 쥐어 보려 미련을 떨었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이내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