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쥐들이 요란하게 찍찍대는 소리에 귀가 시끄러웠다. 꿈인 걸 안다. 쥐들의 발가락을 잘라 라벨링하는 날에는 으레 꾸는 꿈이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톱밥도 갈아야 한다. 어제 새로 들어온 개체들의 무게도 재야 하고.
‘할 일 천지네.’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유난히 몸이 찌뿌듯해 괜히 뒤척였다. 이불의 감촉이 좋았다. 닳아 빠진 것들은 늘 이렇게 부드럽다. 너무 연해져서 잘 찢어지는 게 흠이지만. 그런데 지금의 부드러움은 낡아 버린 것 특유의 해진 감촉이 아니었다. 보다 매끄럽고 짱짱했으며 마치 새것처럼 보들보들했다.
‘뭐지.’
이상한 기분에 도우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곤 몹시 당황했다. 놀랍게도 제집이 아니었다. 벽지도, 가구도, 모두 낯설었다. 일단 그녀의 집은 이렇게 크지 않았다. 사람 하나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지도 않고.
‘아무도 없나.’
분명 처음 접하는 장소인데 무서움보다는 호기심이 드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 누군가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일어나 앉은 그녀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도우는 그제야 여기가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던 까닭을 알았다.
‘소장님 집이었구나.’
이안의 공간이니까, 이안의 냄새가 묻어 있는 침실이니까, 당연할 밖에. 그와 별개로 어쩐 일로 제가 여기 있는지는 궁금했다. 퇴근 후 쓰러지듯 잠든 기억뿐인데 눈을 뜨니 차원 이동처럼 이안의 침대 위라니. 밤사이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안은 왜 저렇게 얼어 있는 걸까.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저…….”
입을 열자마자 굳어 있던 이안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 알겠어? 기억나?”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질문이 너무 엉뚱해서 도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안이 장난도 칠 줄 아는구나 싶어서. 뜻밖의 장난에 저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안에게 장난을 쳐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왠지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도우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갸웃거렸다.
“아니요. 기억 안 나는데요.”
기대 반, 우려 반이던 얼굴이 납빛으로 물들었다.
어, 이게 아닌가.
도우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손목에 꽂혀 있던 링거가 빠졌지만, 워낙 분위기가 심각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왜 몰라요.”
“그럼…….”
“소장님이잖아요.”
“…….”
“이안 소장님.”
잠시 되살아나는가 싶던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그 당연한 걸 왜 확인하는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래.”
힘없이 끄덕이는 이안의 얼굴에 이번엔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도우는 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봤다. 기억 속 모습보다 수척했고, 어딘지 모르게 날티가 났다.
‘날티?’
날티라니. 난데없이 떠오른 단어에 도우는 제 사고 회로를 의심했다. 어느 한구석이 고장 난 게 틀림없다. 세상에 이안만큼 단정하고 바른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게 날티라는 말을 붙이기에 무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우는 잠시 혼란한 기분으로 이안을 관찰하다 불쑥 물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 소장님 집에 있어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전 어제 분명히 집에서 잠들었는데…….”
혹시 꿈을 꾸나.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점점 작아졌다. 도우는 이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혀를 깨물어 보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적어도 꿈은 아니었다.
“일단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병원이요?”
“자세한 얘기는 거기서 듣자.”
혹 아파서 쓰러졌었나? 과로로 쓰러졌다면 이해가 갔다. 밥도 못 먹고 종종거리는 날이 허다했으니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네.”
잠자코 이안을 따라나섰다. 처음 와보는 그의 집을 은근히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엄청 좋은 곳에 사는구나 싶었다. 채도가 낮은 중후한 인테리어가 이안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은 하면서도.
‘신기하다.’
도우는 제가 쓰러졌던 것보다 이안의 집에 초대된 게 더 놀라웠다.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랄까. 물론, 전부터 그녀를 특별히 대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사적인 공간에…….
‘심지어 침대까지…….’
침대가 주는 상징성을 떠올리자 낯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머릿속엔 수많은 물음표가 떠 있었다. 왜? 나를, 왜? 갖은 가정이 수만 개의 가지를 뻗쳤다.
어느 하나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도착한 병원에서 도우는 해답을 찾았다. 그녀가 한 달 가까이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이안이 그녀를 돌봐 주었다는 것도.
“검사 결과 모두 양호합니다. 우려하셨던 뇌파 검사 결과도 정상이고요. 매우 안정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분적인 기억상실은 있지만 그 외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도우는 의기양양해졌다.
“소장님께서 워낙 잘 대해 주시니까요.”
“그렇습니까.”
뿌듯하게 가슴을 편 도우의 모습에 함께 미소 지으면서도 의사는 그녀의 뒤에 선 남자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소장님.
도우가 다정하게도 부르는 그는, 이안이 아니었다. 의사의 의중을 눈치챈 이긴은 검사 결과 외에는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도우가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쓰러진 당시에는 자가 호흡이 없었기에 영영 그녀를 잃는 줄만 알았다. 그러니 저를 잊어도 괜찮다. 살아만 있다면 감사할 뿐.
“다만, 부분적인 기억상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합니다. 자연적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알겠습니다. 여유를 갖고 접근해 보도록 하죠.”
의사는 괜찮다고 했지만, 이긴은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도우를 차에 태웠다. 그런 그를 보며 티 없이 미소 짓는 도우의 말간 얼굴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아무거나 다 좋아요.”
적지 않은 시간 누워 있던 그녀를 위해 이긴이 데려간 곳은 죽 전문점이었다. 소화하기 좋도록 모든 반찬이 잘게 다져져 있는 데다가 종류도 다양해 대번에 식욕이 돌았다. 아직 메인 요리인 죽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수저를 쥔 도우가 천진하게 물었다.
“소장님은 안 드세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렇구나. 잘 먹겠습니다.”
몹시도 출출해서, 도우는 사양 않고 수저를 놀렸다. 간이 적당해 죽과 잘 어울리는 색색의 반찬들도 골고루 맛봤다. 단 하나, 조그마한 생선구이를 제외하고는. 매실이 든 차를 마시며 그녀를 지켜보던 이안이 말없이 생선 접시를 집어 들었다. 전처럼 치우려나 보다,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들려는 찰나, 이안이 깔끔하게 발라낸 생선 살을 잘게 부스러뜨려 그녀의 수저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으면서도 갈피가 서지 않았다. 지저분하게 먹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직접 발라 주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도우는 제가 환자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염려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의 살가운 행동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이안은 원래 그녀에게 친절하기도 했고. 정말이지 늘, 과하게. 그녀만을 위해 속속들이 짜 맞춘 것처럼.
“저, 소장님. 그동안 저 보살펴 주신 거 감사해요.”
“…….”
“물론 항상, 언제나 감사하지만.”
슬쩍, 그의 표정을 살핀 도우가 우물우물 덧붙였다.
“그래도 직접 돌봐 주실 것까진 없는데. 식구들도 있으니까……. 부담스럽다는 게 아니고요, 아니, 부담스럽긴 하지만, 음, 매번 신세만 지기 죄송해서요.”
제 뜻을 다르게 받아들였으면 어쩌지? 결코 싫다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말주변이 없을까. 자책하는 도우의 귀에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해줄까 봐.”
“……예?”
사랑하는 사이라니, 잘못 들었나 싶어 얼떨떨하니 되물었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물론, 이안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대놓고 표현한 적은 없어도 그가 알고 있는 눈치긴 했지만……. 몇 달치 기억이 날라갔다고 하더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귀는 사이였어요?”
“아마도.”
뭐지, 이 애매한 대답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건 맞는데 사귀는 건 아마도, 라니. 이안이 진중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서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만 지금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어…… 몰랐어요. 같이 살기도 했었나 봐요.”
이제야 그의 집이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았다. 무의식 어딘가에 새겨진 기억이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사귀었던 기억이 사라진 건 아쉽다. 첫 연애인데. 황당한 와중에도 그게 그렇게 섭섭하다.
“분명 엄청 기뻐서 난리가 났을 텐데. 누가 고백했어요? 역시 저겠죠? 아닌……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어쩐 일인지 이안은 피해 버렸다. 조금은 멋쩍은 눈치여서 도우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쑥스럽겠지, 대신 제가 어서 기억을 되찾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종알종알 얘기하는 거 보기 좋네.”
“네?”
제가 말이 없는 편이었나? 딱히 과묵했던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지금이 유난히 말 많았던 것도 아니고. 곰곰이 그의 의중을 추론해 보다가 이 역시 의식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누워 있는 동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이안을 안심시키는 방도가 아닐까? 하여 도우는 열심히 다른 주제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이사님도 귀국했겠네요. 소장님 쌍둥이 형제요.”
기억을 잃고 있던 몇 달, 그사이에 다시 출국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이안이 저와 이렇게 지낸다는 건, 상대 알파 여자에게 선택받지 못했단 뜻이었다. 그럼 새로 온다던 이사는 그 여자와 결혼했을 테니 국내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우리 소장님 같은 분을 몰라보고. 그쵸.”
나름대로 위로랍시고 종알거리다 잔뜩 굳은 이안의 모습에 뒤늦게 아차 싶었다. 마치 다른 여자랑 잘되길 바랐다는 것처럼 들렸다. 사귀는 사이에, 실례였다.
“죄송해요. 실수……했어요.”
“……이긴, 기억나?”
“네? 아니요.”
왜 이렇게 기분이 씁쓸하지. 아무 말이나 지껄여 이안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 스스로에게 탓을 돌리며 도우가 덧붙였다.
“본 적도 없는걸요.”
“하긴.”
기운 빠진 대답이었다. 저조해 보이는 이안의 기분을 살피다 도우는 쌍둥이 형제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또 괜한 소리를 했구나.’
자책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사이가 안 좋다고 이안이 언제 얘기했었나? 들은 기억은 없는데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이 또한 무의식의 영역이려니, 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잃어버린 기억을 끄집어내느라 애쓰는 것보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게 우선이었다. 당장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부터가 문제였다. 아무리 사귀었던 사이라 한들, 연인이었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는 지금의 제게 이안의 침대는 부담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도우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식구들도 걱정하고 있을 거고.”
“그럴 거 없어.”
단칼에 그녀의 의견을 잘라 내는 이안을, 도우는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식구들에 관해선 언제나 너그러운 편이었기에 지금의 날 선 반응은 조금 의아하다. 아마도 제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하긴.’
염치없이 달라붙었을 부모를 생각하면 수긍이 갔다. 제가 있을 때도 극성이었는데, 정신을 잃은 동안 마구잡이로 시달렸을 게 뻔했다. 식구들에 대한 건 차마 더 묻지 못하고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럼, 복직은 언제부터 해요?”
일이 많이 밀렸을 텐데, 중얼거리는 도우에게 뜻밖의 소식이 돌아왔다.
“나갈 필요 없어. 해고됐으니까.”
“네? 해고……요?”
제 발로 나온 것도 아니고 잘렸다니, 오늘 들은 제 근황 중에 제일 납득하기 어려웠다.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이안이 짤막하게 이유를 들려주었다.
“여자인 게 발각돼서.”
“아…….”
그렇다면 해고당할 만도 하다. 가장 기본인 인적 사항을 속였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에 대해 새삼 조회해 본 걸까? 이쯤에서 도우는 다시 한번 새 이사로 취임한다는 이안의 동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이사님이 아셔서요?”
“……그런 셈이지.”
“네…….”
도우는 이제야 겨우 제가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리둥절한 일투성이라 더 놀랄 것도 없었지만, 당장에 생계를 이어 갈 수입이 끊어졌다는 걸 알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메가 신분에 그 이상의, 아니 그 비슷한 일자리라도 구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막막한 기분에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도우가 딱하다는 듯 다정한 위로가 건네졌다.
“눈뜬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어. 당분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쉬기만 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쉬어야 한다니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할 때는 그토록 쉬는 날을 손꼽아 바랐는데. 보통은 쉬면서 무얼 하지?
‘취미…… 같은 걸 하나?’
도우는 어렵지 않게 제 취미를 떠올렸다. 꽃을 사다가 매만지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꽃값도 만만치 않을 텐데. 강습을 받을 때는 강습비에 소재비가 포함되어 있어 실컷 매만졌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에 한숨이 터지려는 찰나, 도우는 아직 몇 번의 강습이 남았다는 걸 떠올렸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뿐이니 몸에 크게 무리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다행이다.
그동안 감을 잃진 않았을까. 조바심 내며 꽃 강습을 이어서 받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이번에도 뜻밖의 답변이 들려왔다.
“그만뒀어.”
“그만뒀다고요? 제가요? 왜요?”
지금껏 그녀에 대해서는 뭐든 다 아는 것처럼 따박따박 답을 내놓던 그도 이번만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난감해하는 눈치라 도우도 더는 묻지 못했다. 이 또한 잃어버린 기억 속에 답이 있으리라.
쉽사리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도우는 묵묵히 남은 죽을 비웠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식사를 마치고 도로 이안의 아파트로 왔을 때, 도우는 솔직하게 제 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차차 적응해야 하는 건 알지만…….”
그의 말대로 의식이 돌아온 지 겨우 하루였지만, 기억을 되찾더라도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마냥 불안했다. 직장도 없고 가족과의 연락도 요원하고, 애정을 갖고 배우던 플라워 강습조차 끊겼다니 저란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진 기분이었다.
“두려워요.”
“두려워할 것 없어.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혼자가 아니야. 그걸 잊지 마.”
허락을 구하듯, 주저하며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이상하다. 기꺼이 그의 손에 뺨을 대며 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런 식으로 만진 적이 있던가?
‘연인이랬으니까.’
제가 모르는 어떤 스킨십이 오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지로 가만가만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 손길에 어쩐지 안심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걱정이 일시에 사르르 녹는 기분이랄까. 그렇다면 그와 저는 정말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안도감을 느낄 리 없으니까.
“많이 얘기해 줘요. 어땠는지. 그럼 기억이 더 잘 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미련이 남아서, 얼굴을 감쌌던 손바닥에 지그시 힘을 가했다가 이내 떨어뜨렸다. 좀 더 어루만지고 싶은 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그랬음을 도우는 미처 몰랐다. 한결 마음이 놓인 얼굴로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하러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많이 얘기해 달라고. 무엇을.
돌이켜 보면 못해 준 것뿐이었다. 시작부터 어긋나선 만나는 내내 무수한 상처를 줬다.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여린 마음에 거듭 생채기를 냈다. 마지막에는 그녀가 원치 않는 임신으로 하혈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이긴은 도우의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다. 분노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그녀가 이긴이라는 사람을 깡그리 잊은 걸 확인했을 때, 아득한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차피 도우가 이안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다시 마주치더라도 못 알아볼 테고. 내기에서 이긴 대가로 그는 이안의 낯가죽을 요구했다.
“얼굴을 완전히 망쳐 놨더구나.”
조부의 혀 차는 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들리는 듯했다. 이안이 뻔뻔스레 지껄였던 말을 생각하면 그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도우, 임신 안 될걸.”
“무슨 개소리야.”
“말 그대로야. 도우는 아이 못 가져. 그렇게 각인시켜 놨으니까.”
여기에. 제 관자놀이를 집게손가락으로 찍으며 덧붙인 이안이 뱀처럼 웃었다.
“내 아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더 듣지 않고 달려들었다. 생살을 난도질하는 고통에도 이안은 키득키득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려 댔다. 다시 생각해도 역겹기 짝이 없어서, 이긴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달려오는 도우의 모습에 얼른 굳은 표정을 풀었다.
“진짜 넓다.”
그거 조금 뛰었다고 숨차하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귀여워서, 얼어 있던 이긴의 마음이 녹녹하게 풀어졌다. 때마침 저를 찾는 전화만 아니었으면 참지 못하고 품에 안아 버렸을 터였다.
“네, 접니다.”
뭐라도 마실 거냐고 눈짓으로 물으며 냉장고로 향했다. 다행히 상대의 용건은 별일이 아니었다. 다만 잠깐 얼굴을 비출 필요가 있는 일이어서 이긴은 바로 헬퍼를 호출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해달라고 해서 먹고 있어.”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메뉴를 주문하는 일은 없을 거라 도우는 장담했다. 아무리 죽이 소화가 잘된다지만, 돌아서서 바로 배가 고플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도우는 식탁 앞에 얌전히 앉아 헬퍼가 여러 밑반찬들을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재료를 손질할 때는 저도 손을 보태려 했는데 깜짝 놀라 사양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심심하다.’
직접 만드는 게 아니니 구경도 썩 재미가 없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거리를 찾다가 서재를 떠올렸다. 볼만한 책 한두 권 정도는 어렵지 않게 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슬쩍 자리를 떠 서재로 이동하던 도우는 도중에 마음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좀 더 누워서 쉬는 게 낫겠지.’
가만히 누워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침실에 가기 위해 도로 주방과 연결된 거실 쪽으로 발끝을 틀던 도우는 본의 아니게 통화를 엿듣는 꼴이 되고 말았다.
“네, 이사님. 지금은 서재 쪽 복도로 가셨습니다. 잠시 후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사님?
자연스레 도우의 걸음이 멈추었다. 직감적으로 인기척을 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멈추어 있던 도우는 주방이 다시 소란해진 틈을 타 살금살금 서재로 향했다. 문을 닫고 나서야 펄떡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분명…….’
통화 상대는 이안이었는데. 내용상 제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봤으니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건지. 도우는 나름대로 이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승진……했나?’
가능성 낮은 일이었다. 물론 이안도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후계자이니 이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연구소가 본사에 소속되어 있는 구도인 만큼 급작스러운 승진은 무리였다.
‘뭐지.’
의심을 품기 시작하자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켜 들었다. 계속 골몰하자니 머리가 아픈 듯도 해, 도우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대신 이안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금방 돌아온다던 약속대로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요, 분명……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요.”
나름대로 비장하게 얘기를 꺼냈는데, 괜한 기우였나 보다.
“헷갈렸겠지.”
아무리 그래도 소장님하고 이사님은 완전 다른 단어 아닌가? 어떻게 헷갈릴 수 있지. 쉽사리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도우에게 좀 더 상세한 해명이 돌아왔다.
“이긴……에게도 고용된 걸로 알고 있어.”
“아, 그렇구나.”
알파들의 세계는 매우 공고해서, 잡일하는 사람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집안 차원에서 고용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헷갈릴 수 있는 문제였다. 괜히 혼자 긴장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책은. 볼만한 게 있었나?”
“아직요.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책장을 뒤져 볼 마음도 없어졌기에 사실 무슨 책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도우는 어쩔 수 없이 살펴본 체했다.
“비서한테 얘기해서 좋아할 만한 책들을 좀 더 가져다 놓으라고 할게. 요즘 인기 있는 책들 위주로.”
“감사합니다.”
“영화도 볼 수 있는데 알려 주는 걸 깜박했군. 나도 잘 보지 않아서.”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에 파묻혀 사는 이안이니만큼 TV를 시청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집에서 느긋하게 영화를 즐기는 그는 어떤 표정일지, 어떤 자세로 앉아있을지, 감상하는 중간중간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는지, 아님 묵묵히 화면에 빠져드는 스타일인지.
“지금 보고 싶은데.”
“그럴까.”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녀가 보고 싶은 걸 고르는 동안 이안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부르면 뿅 하고 나타나는 요정처럼 따끈한 팝콘과 나쵸, 톡 쏘는 콜라가 바로 배달되었다.
‘그런데 비서가 있었나?’
다시 한번 의문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본가에서 출퇴근한다고 했었는데 이곳은 새로 얻은 곳인지 의아했고. 하지만 이미 헛다리 짚은 전력도 있고 해서 더 이상 사서 의심은 않기로 했다. 대신 화면에 집중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두 개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해도 어려운 법인데, 수십 개 중에 하나라니. 아무리 고심해도 좀처럼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위로 아래로 분주하게 버튼을 누르던 도우가 마침내 하나를 선택했다. 화창한 배경에 두 남녀가 환히 웃는 포스터가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이안이 불을 껐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그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림도 잠시. 팝콘을 집어 든 도우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다.
‘맙소사.’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두 남녀가 진하게 엉켜 뒹굴었다. 결단코 남의 속살을 보고픈 마음은 없었기에 나신의 향연에 아연해졌다. 성능 좋은 스피커 덕에 거실 가득 거친 숨소리와 야릇한 신음이 들어찼다.
‘어떡해.’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옆을 볼 생각도 못 했다. 이안이 미동도 않고 있어서 더욱 민망했다. 이 와중에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는 소리만 제 귀에 크게 울렸다. 이안의 귀에도 들리겠지. 이렇게 쿵쾅거리는데.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으로 무릎을 세워 고개를 묻고 있던 도우는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까지고 들러붙어 있을 것 같던 화면 속의 남녀가 서로를 간질이며 웃고 있었다.
‘다행이다.’
두 남녀가 잠시 떨어진 틈을 타 도우도 얼른 숨을 골랐다. 그러곤 리모컨을 집어 들고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거…… 볼까요?”
“왜. 좋은데.”
좋다고? 재미있다는 뜻인가? 아리송한 채 눈알만 굴리고 있다가 그의 숨죽여 웃는 소리에 비로소 장난임을 알았다.
“뭐예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려 중얼거리면서도 손으론 빠르게 다른 영화를 찾았다. 다행히 두 번째 고른 영화는 엉뚱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블랙코미디였다. 기상천외하고 유머러스한 내용에 도우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었다. 외계인을 목격한 사람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플래시를 터트리는 장면에서 잠시 제 처지를 떠올리긴 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땐 잠잘 시간이 다 되었다. 주전부리를 실컷 해 빵빵해진 배로 도우는 자연스레 침대로 향했다. 너무 당연하게 침대를 차지했다는 건 눕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
뭐야. 꼭 집주인같이 행세했잖아. 얹혀사는 주제에.
당황한 도우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실이 또 있었나? 손님방은 없었던 것 같은데.
뒤따라 들어오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머뭇거리는 도우를 발견한 이안이 의아한 눈초리를 했다가 이내 상황을 깨달은 듯 그녀를 다시 주저앉혔다.
“편히 자.”
“소장님은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소파에서 자면 돼.”
제가 정신을 잃었을 동안에도 줄곧 소파에서 잤을까? 그랬을 것 같진 않았다. 애매하게 답하긴 했지만 사귀었던 건 맞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지. 사랑했던 시간도 기억하지 못하고, 잠자리마저 어색해하는 연인을 보는 마음이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서운한 내색 한번 비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제는 자신이 노력할 차례라 여겼다.
베개를 챙겨 소파로 향하는 뒷모습에 대고 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만큼도 그녀 입장에서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같이…….”
“…….”
“자요.”
멀어졌던 그가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아까처럼 심장이 마구 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도우의 가슴은 잠잠했다. 대신 박동이 빨라졌다. 작은 새가 연달아 가볍게 뛰는 것처럼 콩콩콩콩, 도우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옆으로 돌아누워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언제까지고 가라앉을 것 같지 않던 두근거림도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잦아들었다. 떨림이 진정되니 도우도 여유를 찾았다. 등 뒤의 기척을 살피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나?’
눕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으니 잠들어 있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요하기까지 했으니.
‘되게 조용히 자는구나.’
오랜 시간 지내 온 만큼 이안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도우는 가만가만 몸을 돌렸다. 눈 감고 자는 모습은 어떨지, 또 숨소리는 어떨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러나 천천히 뒤돌던 도우는 예상과 다르게 또렷한 두 눈과 똑바로 마주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도우와 달리 그녀를 찬찬히 살피는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다시 눈뜨지 않을까 봐 겁나.”
“…….”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아픈 눈을 하고 있는지. 가슴이 죄어들도록 사무치는 목소리를 내는지. 숨마저 온몸이 저리도록 늦추고 있는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꼭, 일어날게요.”
“그래 줄래.”
목이 메어서 도우는 대답 대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제 자요.”
“그러자.”
그가 눈을 서서히 감는 걸 보고 도우도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감각이 그녀를 쉬이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이마를 따스하게 간질이는 부드러운 숨결 같은 것.
‘세상에.’
자그마치 ‘그 이안’이랑 한 침대에서,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다니! 뒤늦은 자각에 어쩔 수 없이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거기에서 그쳤으면 좋았으련만, 숨소리가 성난 황소처럼 거칠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제가 듣기에도 호흡이 너무 비정상적이었다. 어디 불편하냐는 물음이 들려온 것도 당연했다.
“그게 아니라…….”
“숨소리가 안 좋은데.”
“…….”
갑자기 처음 틀었던 영화가 떠올랐다. 설마 이안과 그런 행위도 했을까? 연인끼리 하는, 은밀한 관계.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도우의 몸이 배배 꼬였다. 호흡이 불안정한 것도 당연하다.
“저기 우리…….”
우리라는 말도 도우의 낯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정도 표현쯤은 써도 될 것 같았다. 이안도 부드럽게 음? 하고 물었으니까.
“우리, 잤어요?”
“…….”
무턱대고 질러 놓고선, 도우는 이미 감고 있는 눈꺼풀에 힘을 꽉 주었다. 얼굴이 눈을 중심으로 와락 구겨졌다. 잔뜩 찌푸린 이마에 길쭉한 손가락이 닿았다. 찌그러진 살갗을 살살 펴며 그가 은근하게 물었다.
“어땠을 것 같아.”
“……상상이 안 돼요. 그런데 좋았을 것 같아요. 엄청…….”
눈앞의 남자는 잔잔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문득 눈빛이 짓궂게 빛난 것 같기도 해, 불쑥 심통이 일어 냉큼 뒤돌아 누웠다. 그래도 미련은 남아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얘기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다 기억해낼 거니까.”
“나는 좋았어. 엄청.”
온 신경을 집중해 뒤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도우의 귀에 달콤한 속삭임이 흘러들어 왔다. 이어 단단한 팔이 그녀를 안아 가두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품에서 거짓말처럼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