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일을 하지 않으면 뭘 하고 지내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시간이 잘 갔다. 도우는 제가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퍼즐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두 가지가 어찌나 재미나는지 설레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물론 꼬박꼬박 제시간에 잠들긴 했지만.
이렇게 지내도 좋은가 싶을 정도로 무탈한 나날에 변화가 있다면 몸무게였다. 이 집의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음식을 잘해서 도우는 매 끼니마다 배가 불룩해지도록 과식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안의 영향도 컸다. 입을 벌리면 목 끝까지 차오른 음식이 보일 기세로 먹여 댔으니까.
‘좀 조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욕실 한쪽에 마련된 저울에 오른 도우는 계기판의 숫자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지금껏 가져 본 적 없는 몸무게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려오다가 슬쩍 쓰레기통을 확인했다. 언젠가 새벽, 이유 없이 잠을 깼다가 우연찮게 이안이 담배 피우는 걸 목격한 후 생긴 버릇이었다.
“어? 소장님 담배도 피우세요?”
“……가끔.”
가끔이라고? 전혀 몰랐는데. 학생 때도 물론이고 대학 때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밤에만 한두 대 피우는 거면 그럴 만도 하지만……. 잠이 확 달아나서 말똥말똥 쳐다보는 도우를 보며 머쓱해하던 이안이 피우던 담뱃대의 중간을 툭 꺾어 버렸다.
“끊었었는데, 다시 끊을게.”
“아니, 아니에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싶었다. 제가 감히 이래라저래라할 입장도 아니고. 괜찮다고 만류하는 도우에게 이안이 뜻밖의 요구를 했다.
“피우지 말라고 화내 봐.”
“……제가 어떻게 소장님한테 화를 내요.”
그가 창을 등지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씁쓸한 기색이 그녀가 있는 곳까지 전해져 왔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 속의 저는 화를 잘 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설마.’
제가 이안에게 화를 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안이 저를 화나게 할 일이 있었다는 게 더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한 번도 서로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도우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래도 안 피웠으면 좋겠어요. 건강에 안 좋잖아요.”
도우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극히 일반적인 조언이었음에도 이안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알았어. 다신 안 피울게.”
단박에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던 게 떠올랐다. 퉁, 하고 무거운 소리가 난 걸 봐선 거의 새것 같았는데. 그 뒤로 정말 꽁초 비슷한 것도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꼭 감시하는 것 같잖아. 여전히 쓰레기통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은 도우가 얼른 허리를 폈다. 어쩌면 그녀가 의식을 잃어서 심란한 마음에 일시적으로 피운 걸지도 모르겠다. 설령 이안이 실은 헤비스모커였다 해도 그게 어떻단 말인가? 이리 신경 쓰일 일이 아니었다.
‘아닌데…….’
왜 집착적으로 매일 쓰레기통을 살피는 건지. 참 할 일도 없다 싶다. 정말 할 일이 없긴 했지만. 아니다. 재미있는 소설책이 있었지.
도우는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 어제 읽던 부분을 찾아 펼쳤다.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잠이 쏟아졌다. 이것도 정신을 잃은 부작용일까. 부쩍 졸음이 자주 몰려온다고 생각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이렇게 자고도 밤에 또 잠이 오는 게 신기했다. 물이라도 마실까, 일어나는데 이안이 들어왔다. 퇴근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었나 보다.
“일어났어? 배고프지. 저녁 먹자.”
“네.”
“늦게 와서 미안했는데 다행히 자고 있어서.”
“워낙 바쁘시잖아요.”
검토해야 할 보고서가 산처럼 쌓여 있는 연구실을 떠올리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 게 양심에 찔렸다. 이안은 부지런히 제 앞으로 접시들을 밀어 주고 있지만. 도톰한 갈빗살을 야무지게 숟가락 위에 얹은 도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참, 소장님, 이제 그거 안 해요?”
“그거?”
“실험이요. 주사 맞을 때가 된 것 같은데.”
주사를 맞고 나면 잠에서 깬 것처럼 몽롱하고 두통을 동반한 메스꺼움이 약간 있었다. 이안은 그걸 완화시키기 위해 매번 세심하게 레몬 사탕을 마련해 두었었고. 주기적으로 혈액 검사도 했었는데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은 어떻게 진행됐나 궁금했다. 그러나 이안에게서는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끝났어.”
“네? 끝나다니요?”
“말 그대로. 종료했어.”
“진짜요? 결과는요? 잘 나왔어요?”
어떤 의미에선 완벽했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는 도우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이긴은 이를 갈았다.
도우의 내면은 오래도록 이안의 집요하고도 은밀한 세뇌로 완전히 조작돼 있었다. 불우한 가정에 대한 책임감, 고혈을 빨아먹는 부모를 향한 효심조차도 이안이 최면을 통해 무의식에 각인한 결과였다. 거부감이 들 때마다 극심한 죄책감과 두통을 동반하도록. 이안이 직접 제조한 차와 레몬 사탕은 세뇌를 위해 일정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고.
도우가 이긴에게 근거 없이 가졌던 혐오감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의 형식을 빌려 교묘하게 이긴에 대한 거짓을, 이를테면 문란하다거나, 약을 한다거나 하는 정보들을 도우의 기억에 주입해 놓았다. 그 결과 도우는 쉽사리 이긴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그를 부정했다. 실로 악의적인 조작이었다. 이는 이안이 그만큼 이긴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한 인간의 머릿속을 이처럼 제 맘대로 설계해 놓고 그 세계가 침범당하자 이안은 가차 없이 키워드를 발화해 도우의 기억을 삭제해 버렸다. 연구실에 걸린 액자마저도 그를 위한 장치였다는 게 기막힐 따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안은 자신 말고는 무엇도 도우의 안에 남겨 놓지 않는 데 성공했다. 이긴과 도우의 아기마저도.
당시 도우가 하혈한 출혈량을 확인한 의사는 이 정도면 초음파를 확인하는 게 의미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긴이 봐도 그랬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아기, 사라졌대도 별 느낌은 없었다. 이긴에게는 그저 도우의 안위만이 중요했다.
입맛이 뚝 떨어져 수저마저 놓은 그를 보며 도우가 중얼거렸다.
“잘…… 안 됐나 보네요.”
이긴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착하게도 도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 몫의 음식을 비우는 데 열중했다. 순종적으로, 제 할 말도 못 하고. 이안에게 내내 이런 식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이긴의 속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지금처럼 온순하게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화도 내고, 원하는 게 있으면 제 성질대로 밀어붙이길 바랐다. 충동적으로, 이긴은 하고 싶은 것 없냐고 도우에게 재차 물었다.
“하고 싶은 거요?”
“뭐든.”
“음…….”
한참 망설인 끝에 도우가 내놓은 소원은 뜻밖의 것이었다.
“이안……이라고 불러도 돼요?”
“…….”
기껏 쥐어짜 냈는데 어쩐지 반응이 떨떠름했다. 그럼 그렇지. 도우는 바로 납득했다. 아무리 연인이었대도 이안이라면 선을 지켰을 것이다. 친밀한 것과는 별개로……. 솔직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표현하는 사이라니. 그건 좀, 이상했다.
“괜찮아요. 사실은 저도 소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해요.”
말은 그렇게 해도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도우의 모습에 이긴은 몹시 난감해졌다. 설마 그런 부탁이 나올 줄이야. 아무거나 말하래 놓고 들어주지 않는 우스운 꼴이지만, 저를 이안으로 부르는 것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소장님, 정도가 이긴이 참아 줄 수 있는 한계였다.
‘그래도…….’
들어줘야겠지. 잔뜩 풀죽은 도우를 보며 이긴은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다면.”
“아…….”
“얼마든지.”
얼굴은 잔잔히 미소를 띠고 있는데, 목소리는 어딘가 억눌려 있었다. 마지못한 허락이란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사실은…….’
사랑한다고 하고 싶었는데. 썩 내켜하지 않는 것 같으니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볼까? 이안, 사랑해요, 하고.
‘어?’
속으로 가만가만 발음을 굴려보던 도우는 떨떠름해졌다. ‘이안’과 ‘사랑해요’의 연결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한 문장 안에 양립해선 안 될 것처럼. 몇 번을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도우는 고백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제가 느낀 게 맞는지 역으로 물었다.
“불편하신 거 알아요. 이름 부르는 거…….”
예상대로 그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안 할게요, 작게 속삭이곤 수저를 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불편한 정적을 이기지 못한 건 역시 도우였다.
“다른 거 생각났어요. 하고 싶은 거.”
“뭔데.”
이번에야말로 하늘이 두 쪽 나도 들어줄 각오로 이긴이 귀를 기울였다. 누워 있는 동안 다듬지 못해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도우가 사랑스럽게 종알거렸다.
“저…… 그럼 머리카락 길러도 돼요? 긴 머리 좋아하는데.”
“…….”
“싫으면 안 할게요. 사실 짧은 게 편하고 더 좋아요.”
그 당연한 걸 허락을 받는다고.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도우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거두는 바람에 얼른 대답했다.
“길러 줘. 나도 보고 싶으니까.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네.”
“네? 네…….”
기대된다니.
짧은 머리카락을 쥔 채로 도우는 갸웃했다.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이안은 그녀가 머리 길렀던 모습을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기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보고 싶다니. 기억이 잘 나질 않나? 하긴,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이안 정도의 바쁜 남자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
‘정말?’
그것만 이상해? 도우는 납득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계속 스스로 설명할 거리를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 애써 그럴 거라 가정하고, 그냥 믿어 버리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동안 모른 척했을 뿐.
솔직히 말하면 제가 알던 이안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이안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펼치는 것처럼, 겉은 그럴싸하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도우는 저를 향해 부드럽게 눈웃음 짓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안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혹은 이안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
자연스럽게 그가 ‘쌍둥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그의 쌍둥이 형제가 굳이 이안 행세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연구소 쪽과 본사 쪽은 현실적으로 접점이 없었다. 건물도 나뉘어 따로 쓰는 데다가 하는 업무도 완전히 달랐으니까.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기 일쑤인 일개 연구원 나부랭이가 자그마치 이사님과 만날 일이 무어 있겠는가. 게다가 오메가인 저와. 그쪽을 의심한다면 망상이 도가 지나친 거다.
‘모르겠다, 진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생겨난 심리적 거리감도 못내 속상하고. 낯선 감정을 해소할 바를 몰라 망연해하는 도우에게 그가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창밖 풍경이 운치 있는 카페를 알고 있다고.
“좋아요.”
먹구름처럼 자리 잡았던 우울감이 순식간에 걷혔다. 딱히 드라이브를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차가 없는 도우는 드라이브의 묘미를 몰랐다. 다만, 함께 나가자는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그래, 이렇게 하나하나씩 다시 친밀감을 쌓으면 되는 거지. 추억도 새로 쌓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억에 매몰되는 것보다 현재를 즐기는 게 훨씬 나았다. 어쨌거나 제게 손 내미는 그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임은 틀림없으므로.
***
차를 타고 달리니 확실히 기분이 색달랐다. 그도, 그녀도 좀 더 자주, 활짝 웃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았고 산들거리는 저녁 바람이 좋았다. 도우는 따라나서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신호 대기를 틈타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을 때, 특히 그렇게 느꼈다.
쓸 듯이 다가와선 볼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손가락에선 애틋함이 묻어났다. 아주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고작 그 작은 터치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이안을 보며 도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데도 우리가 잤단 말이야?’
사랑하는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혼자서 생각해 봤지만 기억 같은 게 떠오를 리 없고, 망상만 커져 갔다. 그와 끌어안고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옷을 다급하게 벗겨 내고 종내는 알몸이 되어 뒹구는 상상.
‘어…….’
몰입하고 있던 도우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머릿속 이안이 생각보다 점잖지 않아서였다. 아니, 점잖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능란하게 도우를 몰아붙이고 끝내 음탕한 신음을 끌어냈다. 개처럼 엎드려 할딱대는 그녀의 갈라진 틈을 길게 핥아 올리며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매가 몹시 퇴폐적이었다.
‘어라.’
이것도 묻힌 기억의 일부분일까. 행여나 머릿속 음란한 장면을 들킬까 조마조마해하면서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운전에 집중하는 옆모습에 도우는 작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혼자 음란한 상상에 젖어서는…….
“어…….”
도우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젖었다. 정말로, 젖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팬티 한가운데가 푹 젖어 있었다. 겉으로 티가 날까 두려울 정도로. 당황하여 꼼지락거리는 도우에게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어디 불편해?”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글쎄. 가고 싶은 곳 있어?”
“음…….”
얼마나 대단한 걸 말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시나. 이긴은 흐뭇한 마음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좀처럼 원하는 걸 입 밖에 내지 않는 도우였기에 이런 변화는 반가웠다. 무얼 요구하든 다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도우의 선에서 바라는 거면 아마 비싼 케이크 정도겠지만.
그러나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 너무 황당해서 이긴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호텔, 이요.”
“…….”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문을 잃은 이긴은 애써 다른 이유를 떠올렸다. 도우가 한 호텔의 망고 케이크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을. 매번 사놓던 초코케이크가 떨어져 대신 갖다놨었는데 새 접시처럼 깨끗이 비웠었다.
씨발.
뭐가 되었건. 넌 왜 그렇게 바짝 약 오른 건데. 이긴의 어느새 성성하게 대가리를 치켜든 제 물건을 탓했다.
옆자리의 침묵이 길어지자 도우는 역시 호텔은 좀 아닌가 생각했다. 하긴, 젖은 속옷을 갈아입기 위해 꼭 호텔 룸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목적에 비해 과하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속옷도 없었다.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
분위기가 한층 어색해졌다. 너무 이랬다가 저랬다가 변덕 부린 건 아닐까. 도우는 후회했다. 이안 정도의 남자에게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서.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 한들 그가 멀게 느껴지는 건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데서 오는 게 아니었나, 새삼 돌아보기도 했다.
“죄송해요.”
한눈에도 시무룩해진 도우의 표정에 도리어 초조해진 건 이긴이었다. 즉각 호텔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가속 페달을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샛노란 망고 과육이 층층이 얹힌 케이크를 마주하게 된 도우는 어리둥절했다.
“이거 먹고 싶은 거 아니었어?”
자신만만하게 내밀었으나 선뜻 케이크로 향하지 않는 도우의 포크에 이긴의 속이 말라 들어갔다. 호텔이건 달나라건 어디든 가자는 대로 오케이 했어야 했는데, 잡스러운 생각에 머뭇거리다 초를 친 것만 같다.
“사실은…….”
급격히 어두워진 상대의 낯에 도우는 더 이상의 실례를 저질러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더없이 민망하지만, 괜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보단 나았다. 자신의 창피함쯤이야.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어요.”
옷?
이긴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계절이 변했는데 집에만 두다 보니 변변한 외출복이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헛다리만 짚었다. 그런데…….
호텔에서 옷도 파나?
간혹 부티크를 갖춘 곳이 있긴 했다. 도우가 말한 옷이 그런 곳에 걸린 것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이안 그 여우 같은 새끼가 한두 번쯤 선심 쓰듯이 데리고 가줬을지도.
그래서 이긴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케이크 다 먹으면 상으로 예쁜 옷 사줄게.”
“…….”
이게 아닌가. 이긴은 서둘러 덧붙였다.
“다 못 먹겠으면 더 예쁜 옷 사주고.”
“그게 뭐예요.”
도우가 배시시 웃었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순식간에 그의 긴장이 탁 풀린 것도 모르고 도우가 수줍게 종알거렸다.
“그게 아니라, 음, 옷이긴 옷인데.”
말할까 말까. 호텔에서 옷 갈아입기라니, 너무 엉뚱한 발상이었다고 비웃음을 사진 않을까. 아니다. 이안은 이해심이 넓으니까, 분명 별 오해 없이 받아들여 줄 거다.
“속옷이 젖,…….”
“…….”
“…….”
기탄없이 얘기를 꺼내던 도우는, 이건 이안이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속옷이 왜 젖었느냐가 문제였다. 실금이 아니면 이유는 딱 하나뿐인데.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들은 건지, 그가 곧장 객실을 잡았다. 펜트하우스 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숨을 어떻게 쉬었는지 모르겠다. 잔뜩 눌러 놓은 호흡마저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하게 침범하는 혀에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대로 침대로 직행하는 그에게 매달려 다급하게 외쳤다.
“씻, 씻을래요!”
“굳이.”
해갈되지 않은 욕망이 득시글한 눈빛이 사납게 빛났지만, 도우도 양보할 수 없었다. 한차례 젖은 속옷이 키스로 인해 다시금 질척해졌으니, 안이 얼마나 엉망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걸 그대로 내보일 순 없었다.
“안 씻고 하는 거, 싫단 말이에요.”
불만스러운 한숨을 터트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도우는 냉큼 욕실로 도망쳤다. 그러곤 구석구석을 공들여 깨끗이 닦았다. 몇 번을 확인하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다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살금살금 까치발로 나왔다.
“어?”
잔뜩 긴장했는데 응당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이안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도우의 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욕실이 한 군데 더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다 씻으러 간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천천히 나올걸.’
막상 제가 기다리는 입장이 되니 어떤 얼굴로 그를 맞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건 꼭 날 잡아먹으라는 것 같고, 멀뚱히 소파에 앉아 있는 것도 어색하다. 고심 끝에 도우는 침대 모서리에 얌전히 앉았다. 그사이 물소리가 잦아들었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저도 모르게 자세에 각이 잡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먹 쥔 양손을 무릎 위에 얹어 놓은 도우의 앞에 젖은 머리를 하고서 가운을 걸친 이안이 나타났다. 헉, 저도 모르게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문턱을 넘다가 그녀를 발견하곤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모습에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아서.
도우는 그녀를 지나쳐 음료수를 확인하는 그의 뒷모습을 무아지경으로 구경했다. 널찍한 어깨가 새삼 강인해 보였다. 사과 주스와 포도 주스를 골라낸 그가 둘 중 무얼 고를까 고민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잘생긴 이마 위로 흐트러진 젖은 머리카락에서 색기가 줄줄 흘렀다. 그의 동선을 따라 옅게 뿌려진 페로몬도 야릇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이상하다.’
도우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기억 속에 남은 이안의 페로몬과 사뭇 다른듯해서였다. 이런 느낌이었나? 겨울 숲은 겨울 숲인데, 따스한 햇살이 비쳐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밭 같았다. 한층 포근하고 어딘지 그리운…….
갸우뚱하다 돌아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거?”
“네, 그거.”
그가 둘 중 한 병을 흔들어 보여 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점점 가까워지는 장신을 넋 놓고 구경하던 도우의 시선을 끄는 게 있었다. 그게 무언지 깨달음과 동시에 정신이 확 들었다. 가운 자락 사이로 슬쩍슬쩍 비치는 음영에 무릎에 올려놓은 손이 죽 미끄러졌다. 긴장감에 진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대강 닦으며 도우는 부정했다. 저런 게 제 몸에 들락거렸을 리 없다고.
“무슨 생각 해.”
갑자기 심각해진 도우의 뺨에 차가운 음료수 병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 혀끝에서만 맴돌던 말을 그대로 뱉어 버렸다.
“정말 그걸로…… 했어요?”
“뭐?”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에게 더듬더듬 변명했다. 아무리 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물학 전공이면서.”
“…….”
가당찮다는 반박에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여성의 그곳이 매우 탄력적이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잘 늘어나는 고무풍선도 무리하면 터지게 마련 아닌가? 아랫배가 빵빵해지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자꾸만 연상되는 걸 어쩌라고.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네.”
어느새 목이 꽉 잠긴 걸 자각하며 이긴이 가운을 젖혔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뻣뻣하게 앉아 있는 귀여운 모습에 머리가 뜨거웠는데, 풍선 어쩌고 중얼거린 순간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 갈급하게 입을 빨아 당기고 통통한 젖가슴을 움켰다.
“읍……!”
도우는 속절없이 휘말렸다. 조금이라도 동그랗고 둔덕이 진 곳은 어디든 빨렸다. 귓불, 턱 끝, 어깨 모서리, 쇄골이 마주 보는 자리, 갈비뼈, 배꼽 언저리, 그리고…….
“하흣!”
어쩔 줄 모르고 애무를 받기만 하던 도우의 허리가 펄떡 튀었다. 저도 모르게 상체를 세워 아래를 확인했다가 도톰한 아래 둔덕을 가볍게 문 그의 입술에 경악했다.
“거, 거길 왜…….”
음부를 가로막은 손을 치워 놓고 지그시 누른 그가 보란 듯 보드랍고 야들야들한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맛있다는 듯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았다. 수치심에 눈물이 맺히는 와중에 근질근질 피어나는 묘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어르듯 그녀의 주변을 부드럽게 일렁이는 페로몬에 숨결이 뜨거워졌다.
“부, 끄러워요.”
“더한 것도 할 텐데.”
더한 거? 이보다 더할 수 있나? 물음표가 떠오른 것과 동시에 혀가 세로로 갈라진 틈을 가르고 음순을 젖혔다. 무르익은 과일 파먹는 소리에 의문부호가 느낌표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자극에 도우는 속수무책으로 앓았다. 그러다 혀와는 다른, 굵직하고 단단한 것이 입구를 파고들었을 때는 숨 쉬는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찢어, 찢어져요.”
가쁘게 숨을 토해 내며 밀어내는 팔을 가볍게 제지하며 이긴은 그녀가 자신을 안을 수 있도록 상체를 낮춰 주었다. 보드라운 유방이 제 가슴팍에 뭉그러지는 느낌에 내장이 들끓었다.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것 같던 분신이 빳빳하게 대가리를 치켰다.
“힘들면 할퀴고 물어.”
“그럼…… 멈춰 줘요?”
순진한 물음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럴 리가.
입 밖에 내어 말한 것도 아닌데 속셈을 알아챈 도우의 눈망울에 원망이 담겼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그가 안을 때면 꼭 저런 눈을 했었으니까. 발정을 부추기는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제 하체를 담그기 시작했다.
“응, 아……!”
원망이 가신 눈망울에 물기가 고였다. 젖은 속눈썹에 입술을 맞춰 달래 가며 더욱 깊숙이 진입했다. 고작 절반쯤 들어갔을 뿐인데 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 아…… 으응…… 흐, 흣! 너무, 너무 깊어요!”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 듯했다. 너무 몰아붙였나. 그답지 않게 자책하며 아래를 물리자, 한쪽 가슴에 이마를 맞대고 끙끙거리던 도우가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이마가 비벼진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힘든데, 좋아요.”
씹, 이긴은 가까스로 욕설을 삼켰다. 수줍은 속삭임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말캉한 입술을 빨아들이다 성마르게 혀를 쑤셔 넣었다. 위고 아래고 온통 저로 헤집어 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제 안을 함부로 꿰뚫는 살덩이들을, 도우는 착실하게 감내했다. 서툰 혀 놀림으로 설근을 얽어 대고, 콱콱 짓쳐드는 흉포한 성기를 꿀떡꿀떡 받아 삼켰다.
“왜 이렇게 예뻐. 응?”
그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악착같이 감기는 그녀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워, 이긴은 도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주 닿아오는 말간 두 눈, 그 속에 담긴 게 오로지 저라서 그만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해버렸다.
“아흑! 깊, 어…….”
단박에 들어선 충격에 몸서리치는 도우를 포박하듯 양팔로 받쳐 안곤 집착적으로 파고들었다. 마침내 자궁 입구까지 도착해서도 이긴은 꾸역꾸역 아래를 밀어 올렸다. 장기가 들썩이는 느낌에 도우가 길게 신음했다.
“아아…….”
깊게 앓는 소리에 겨우 자제력을 발휘했다. 가만히 몸을 겹치고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안을 만끽했다. 더듬더듬, 도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음부를 더듬었다. 제 반드러운 둔덕에 비벼지고 있는 이긴의 거친 음모를 만져 보곤 눈이 동그래졌다. 어느새 제 안으로 완벽하게 자취를 감춘 기둥을 직접 확인하면서도 도우는 믿을 수 없어했다.
“거짓말. 말도 안 돼요.”
“진짠데.”
이긴이 상체를 세워 앞으로 슬쩍 기울이자 도우의 허리가 둥글게 접혔다. 그 덕분에 결합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래도 못 믿겠어?”
이긴이 허리를 빼자, 굵은 살덩이가 주르륵 딸려 나왔다. 들어가기 전 보송했던 살갗이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음모에 맺힌 불투명한 거품이 제가 흘려 댄 애액이라는 걸 눈치챈 도우는 민망함에 시선을 황급히 내렸다. 그러자 그의 것을 무느라 벌어진 음부의 발갛게 달아오른 속살이 보였다.
“기분 좋게 젖었어, 너.”
이긴은 부러 능글맞게 제 것을 담갔다 뺐다.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를 꾸욱 밀어 넣었다가 쑤욱 잡아 빼기를 반복할 동안 도우는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사코 보기를 거부하더니, 지금은 넋을 놓고 구경하는 게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한계까지 벌어지도록 좆을 담고 있는 주제에 저토록 순진한 표정이라니, 치미는 자극감에 이긴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이렇게 잘 받아먹으면서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그게 아니라, 정말, 아, 응…….”
정말 다 들어갈 줄 몰랐는데. 게다가 처음 느꼈던 불편함은 어디 가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 도우는 내심 당황하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슬쩍슬쩍 움직이는 엉덩이를 발견했을 땐 비명마저 지를 뻔했다. 전에야 어쨌든 제 기억으론 처음인 이 행위가 주는 만족감이 상당했다. 그의 것을 완전히 품을 때마다 꽉 차오르는 아래가 은근히 뿌듯했다. 좀 더 저를 가져 주길 원했다. 낙인을 찍듯이 가장 깊숙한 곳을 찧어 주었으면 했다. 도우는 벌어져 있던 다리를 그러모아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더 줘요.”
“…….”
느긋하게 그녀를 희롱하던 낯에서 여유가 싹 가셨다. 사나움이 깃든 안광에 그저 눈을 감고 매달렸다. 별다른 기교 없이 정직하게 찍어 내리는 허리 짓에 연달아 교성이 터졌다.
“아, 응! 하흣, 흣!”
격렬한 움직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조금 해소가 될 듯도 싶었다. 그러나 하나로 몸을 섞은 지금에도 소장님이라고 부르긴 싫었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내켜하지 않을 테니까, 도우는 잠깐의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사랑, 해요.”
마음만 전하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도우는 그렇게 위안 삼으며 다시 속삭였다.
“사랑해요, 아……!”
더욱 깊어진 삽입에 도우는 눈앞의 목덜미에 매달려 끙끙거렸다. 자극이 더욱 강해졌다. 눈앞이 하얗게 부서졌다. 쾌감의 파고를 따라 감정이 더욱 격해졌다. 그러나 왜인지 사랑한단 말이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이 감정은 분명 사랑이 맞건만.
“흐, 좋아, 좋아해요……!”
드디어 꼭 들어맞는 표현을 찾은 것 같았다. 사랑보단 가볍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 오는.
“좋아해요.”
언뜻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제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흑…….”
왜 우는지도 모르고 눈물이 터졌다. 당황한 그가 몸을 떼려 했지만 도우는 더욱 단단히 상체를 끌어안고 다리로 감은 허리를 힘껏 옥죄었다.
“좋아요, 그냥 해요. 네? 너무, 좋아서 그런 거니까.”
눈물에 젖어 뺨과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그가 다정스레 입술을 내렸다. 쉼 없이 담금질하는 아래는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지만.
“사랑해.”
담백한 고백에 도우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달뜬 호흡과 흠뻑 젖은 신음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혈관을 내달리는 열기 때문일까. 허공으로 붕 떠오른 도우의 눈에 수많은 빛이 반짝였다. 마주친 시선에 그도 같은 별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눈이 부셔서, 질끈 감은 눈가로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흘러내렸다. 농도 짙은 열기가 그녀의 안을 적신 것과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