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꾸만 몸이 나른했다. 처음엔 배불리 먹어서 졸린가 했다. 하지만 입맛이 없는 날에도 졸린 건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몸살처럼 근육통을 앓을 때도 있었다.
도우는 이 모든 증상들을 정신을 잃고 침상에 누워 있던 후유증으로 여겼다. 누워만 있던 사람이 일어나 돌아다니니 근육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게 당연하다. 머리에 충격을 입었으니 자꾸 졸린 거고.
‘아무것도 아닐 거야.’
하지만 이것들을 후유증으로 치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안 때문이었다. 도우는 이안의 불면증을 알고 있었다.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앉아 괴로운 한숨을 토하다가 그녀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을. 이젠 정말 괜찮은데 이안은 얇은 유리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그녀를 대할 때마다 과하게 굴었다.
졸립고, 입맛이 없고, 이따금 몸이 욱신거리는 것 말고 다른 이상은 없었으니, 가뜩이나 예민한 이안에게 굳이 걱정 한 스푼을 더 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울컥 메스꺼움이 솟았을 때는 더 이상 숨겨서도 안 되고 숨길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웁, 우웁!”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는 도우의 뒤에 남은 이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이안이 도우의 뇌에 저질러 놓은 못된 짓거리의 여파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다. 황급히 쫓아간 화장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연신 구역질하는 소리마저 차단하진 못했다.
“괜찮아? 당장, 당장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간대도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건 안다. 몇 가지 테스트를 한 뒤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해석하는 데 그칠 터였다. 그래도 의사의 몇 마디 외에는 매달릴 곳이 없었다. 이긴은 한없이 무력해졌다. 자꾸만 지는 기분이었다. 도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지고 또 지겠지만, 끝이 불확실한 지금에서는 암담하기만 했다.
이긴이 스스로를 암담한 수렁 속에 끊임없이 밀어 넣고 있을 때, 문이 힘없이 열렸다. 도우는 한바탕 게워낸 자신보다 더 파리한 그를 보고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미안해할 거, 아무것도 없어. 이리 와, 간단하게 챙겨 입고…….”
“아니요.”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그의 손목을 잡은 도우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그냥, 음식이 역했던 거예요.”
“말 들어.”
“정말이에요. 냄새를 맡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저 진짜 괜찮아요. 음식이 상했나 봐요.”
“정말 음식 때문이야?”
“네. 이런 적 없잖아요. 틀림없이 음식이 문제예요. 뭐 사 온 거예요?”
이긴은 난감한 눈길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유난히 기운 없어하는 도우를 위해 특별히 잘하는 집을 수소문해 사 온 장어탕이었다. 바로 끓여 낸 거니 상했을 리는 없었다. 담백한 국물 맛 덕분에 젊은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좋다는 후기를 여럿 확인했는데.
아님 단순히 기호 차이인가? 생각해 보니 장어탕은 함께해 본 적 없는 메뉴였다. 어쨌거나 음식 탓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긴은 한결 누그러져선 도우를 부드럽게 소파에 앉혔다.
“장어탕인데, 다른 거 시켜 줄게. 뭐 따로 먹고 싶은 건 없고?”
“음, 별로요.”
“그래도 한번 생각해 봐.”
자상함이 지나치면 간절함이 되는 걸까. 어떻게든 자신을 위해 주려고 애쓰는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도우도 응해 주려 노력했다. 다행히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연어 샐러드요.”
“연어 샐러드?”
“네. 연어는 큐브 모양이고요, 루꼴라와 양상추 베이스에 망고 슬라이스랑 리코타 치즈, 그리고 유자 소스를 곁들인 걸로요. 아! 발사믹 식초도 살짝 뿌려서.”
뭐가 이렇게 구체적이람. 마치 연어 샐러드를 먹으려고 헛구역질한 것처럼.
도우는 이토록 자세하게 메뉴를 줄줄 읊은 스스로가 창피했다. 그래도 변명을 대자면 결코 제 의지는 아니었다. 눈앞에 누가 그려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이미지가 떠올랐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렇게 생겨 먹은 연어 샐러드여야만 했다.
까다로운 주문에 그는 도리어 흐뭇해했다.
“바로 대령할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식탁이 차려졌다. 입맛을 돋우는 상큼한 냄새에 유혹당한 도우는 제 발로 의자에 앉았다. 선명한 주홍색 연어와 파릇파릇한 채소들,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치즈 위로 먹음직스럽게 뿌려진 드레싱을 보며 눈이 즐거워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별로야.’
왜 연어와 치즈를 조합했지? 도우는 뒤늦게 후회했다. 막상 먹으려 보니 조금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입에 떠 넣는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게다가 유자 소스라니. 끈적끈적하고 달기만 할 텐데. 차라리 아무것도 안 뿌리는 게 더 나았겠다.
여기까지 감상을 마친 도우는 코를 틀어쥐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누르며 포크를 들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가 배를 채우길 바라는 이안에게 미안해서였다.
“맛있겠다.”
기계적으로 미소 지은 도우는 작은 연어 조각을 골라 입에 넣었다. 물컹한 식감과 함께 역한 비린내와 유자 향이 섞여 후각을 뒤흔들었다. 마치 유자를 삼킨 거대한 생선 내장에 갇힌 기분이었다.
“욱! 우우욱!”
도우는 지체 없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흐뭇하게 도우의 먹는 모습을 감상하던 이긴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이로써 음식 탓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역시 뇌에 문제가 생긴 거다.
혹시라도 존재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이긴은 도우가 내팽개친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한입 맛보았다. 신선한 연어는 부드러웠고, 유자는 더할 나위 없이 상큼했다.
포크를 내려놓은 이긴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기는 도우를 설득하는 대신 조용히 외투와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겼다. 업무 대부분을 재택근무가 가능하도록 세팅해 놓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짜 괜찮은데.’
출근만 안 한다 뿐,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는 그를 알기에 도우는 이 상황이 마냥 미안하기만 했다. 재택근무가 늘어난 이유도 저를 보살피기 위함인 것 같았다.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연구 계획서라도 검토해 손을 덜어 주려 했는데 기밀이라며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
기밀은 무슨,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대부분의 연구 계획서는 그녀의 손을 거쳤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핑계 한번 거창했다. 서류 좀 본다고 크게 피로해지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과잉보호였다.
‘어쩌겠어.’
기억을 되찾거나 그를 안심시킬 수 있도록 건강해지는 수밖에. 답답한 마음에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핫도그나 컵 떡볶이를 든 아이들이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빨간 양념이 덕지덕지 묻은 길쭉한 떡을 보자 갑자기 식욕이 미친 듯 솟았다. 침샘이 아리더니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침이 고였다. 너무너무 먹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꾹 참았다.
충족되지 않은 식욕은 원망으로 변질되어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운전석이었다.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서운한 감정이 일었다.
‘한 번쯤 더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입술을 비죽이던 도우는 급작스러운 제 감정 변화에 깜짝 놀랐다.
‘왜 이러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안에게 서운해하다니.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마음을 추스르며 도우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벤치에 앉은 여자가 책을 읽으며 샌드위치를 맛있게 베어 물고 있었다.
‘와, 맛있겠다.’
꼴깍, 침이 절로 넘어갔다. 샌드위치가 스쳐 지나가는 게 아쉬워 도우는 눈알을 창문에 바싹 붙였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병원에 다 다다라서는 서러워 눈물이 고였다.
“내리자. 어……?”
이긴은 발갛게 부은 도우의 눈에 적잖이 당황했다.
“많이 힘들어? 얼른 들어가자.”
“그게 아니라.”
“검사하고 그러면, 뭐라도 원인이…… 하…….”
“그게 아니라고요!”
버럭! 지른 소리에 그도 놀랐지만 도우도 못지않게 놀랐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진짜 머리가 고장 났나 봐. 머리만 아니라 입도 고장 난 것 같았다. 혀와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으니까.
“떡볶이랑 핫도그, 왜 안 사줘요? 샌드위치도 진짜 맛있어 보였는데. 흑…….”
“…….”
도우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긴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긴은 더듬거리며 절절맸다.
“진료 끝나면, 전부, 전부 사줄게. 검사……해야 하니까.”
검사에 따라 공복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다. 이긴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도우를 설득했다. 그럼에도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진정시키는 데만도 한나절이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쏟는 도우를 보며 착잡한 마음은 점점 덩치를 불렸다. 감정이 들쑥날쑥하고 조절이 안 된다는 건…….
‘역시 뇌에 문제가…….’
어차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긴은 새삼 이를 악물었다. 씨발, 그 사악한 새끼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람 구실 못 하도록 조져 놨었어야 한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그래 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며 진찰실로 들어갔다.
“음…….”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치의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는 법 없는 양반이라, 이긴은 더욱 긴장했다. 상태가 얼마나 안 좋길래. 지난번 검사에선 분명 별 이상 없다고 하지 않았나?
“말씀하십시오.”
여차하면 주치의도 갈아치울 마음으로 재촉하자, 도우와 그를 번갈아 보던 의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임신입니다.”
“…….”
임신. 분명 아는 단어인데도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닐 뿐, 좀처럼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이긴의 귀에 아, 하는 도우의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번에 분명.”
하혈 양을 보고 초음파는 의미 없다고 하지 않았나. 따지고 싶었으나 옆에서 도우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지켜보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눈치 빠른 의사는 용케도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쌍둥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네? 아기가 쌍둥이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천진하게 묻는 도우를 향해 급하게 손을 내저은 의사가 이긴의 눈치를 살폈다.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눈치였다. 물론 이긴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이긴과 이안이 쌍둥이라서 같게 인식해 버린 것이다. 도우의 몸이. 이안의 자식으로 인식된 이긴과 도우의 아기가 유산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고.
‘미친…….’
이긴은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우와 그의 아기가 살아 있다.
초음파실로 이동해 울려 퍼지는 아기의 힘찬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동안, 이긴의 가슴도 아기와 같이 빠르게 뛰었다. 그저 행복했다. 아기를 잃지 않았다는 기쁨에 겨워서, 이긴은 다소 가라앉은 도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했다.
***
도우는 손안에 든 동그란 사탕을 노려보았다. 입덧이 심하다는 설명에 친절한 점원이 챙겨 준 레몬 사탕이 몹시도 거슬렸다. 노란색 알맹이를 보자마자 거부감이 들었는데 신맛까지 떠올리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해졌다. 전에는 이안에게 잘만 받아먹던 것이다. 도우는 그에 대한 불만이 레몬 사탕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난 거라고 해석했다.
“그거…… 했었나 봐요.”
“음?”
“임신하려면…….”
“아아, 노팅.”
그가 순순히 인정했다.
“했었어.”
왜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도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저야 그렇다 쳐도 이안이 그런 짐승 같은 행위를 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생각하며.
“네…….”
노팅한 게 불만이 아니었다. 이름도 마음대로 못 부르게 하면서.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아이 아버지가 ‘소장님’으로 불리나? 입맛이 뚝 떨어져 도우는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것도 입맛에 안 맞아?”
고급 한우구이 전문점이었다. 살살 녹는 고기하며 신선한 채소, 간이 알맞게 밴 장아찌까지 모두 맛있었지만, 배를 채우는 것보다 눈앞의 남자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그냥 쉬고 싶어요, 소장님.”
“어어, 그래. 쉬어. 가서 푹 쉬자. 한숨 자고 나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소장님.”
꼬박꼬박 붙이는 소장님 소리에도 별 반응이 없자 도리어 속이 상한 쪽은 자신이었다. 갑자기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진 것처럼 서러워졌다. 조수석에 앉아 말없이 뚝뚝 눈물만 흘리는 도우를 발견한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우는 습관처럼 변명했다.
“호르몬 때문일 거예요.”
아니야, 거짓말.
“식구들 만나고 싶어요.”
완전 거짓말.
지금껏 가져 본 적 없던 의문이 새록새록 쏟았다. 어째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까지 그의 눈치를 보는 걸까. 여태까지 잘도 그래 놓고 왜 이제 와서 반항심이 드는 걸까. 늘 그래 왔듯 그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될 텐데. 우스운 건 이런 감정이 익숙하다는 거였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지 않으면 계속 원인을 알 수 없는 낯설지만 익숙한 감정들에 시달리게 될 것임을.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도우에게 언제나 그랬듯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가서 보자, 그럼.”
“네?”
“식구들. 만나고 싶다며.”
“이렇게 갑자기…….”
어차피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을 걸 안다. 돈을 쥐여 주자 미련 없이 자기를 버렸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고.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부모를 만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전에는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으면서도 끝내 놓지 못했던 끈이었는데. 그래도 둘째는 보고 싶었다. 둘이서만 만나고 싶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시간이 뚝 잘려 나간 게 맞았다. 달력을 확인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동생의 얼굴을 보니 실감이 됐다. 위태로운 분위기는 어디 가고 차분하고 조용한 학생이 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응? 으응. 이, 아니, 소장님께서 워낙 잘 대해 주셔서.”
“그래?”
제게 그랬듯 동생의 학비를 대주고 있다는 얘기에 도우는 조금 의아해졌다. 완전히 연을 끊은 것처럼 말했었는데. 그러다 둘째도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학교 같은 곳에서 지낸다는 말에 의심을 거뒀다. 제가 각별히 여겼던 걸 알고 돌봐 주는 거구나,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런데 언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글쎄. 몇 달 치 기억을 잃었다고는 들었어.”
“아…… 그럼, 정말 모르겠네.”
아무것도가 무얼 의미하는 거지? 제가 알고 있는 사실 말고 또 다른 게 있나?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둘째의 행동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꼭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행여나 실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뭔데.”
도우는 부러 장난스레 동생의 손을 쥐었다.
“네가 말해 줘봐. 나 어땠는지. 궁금해서 그래. 떠올리려고 해도 그냥 캄캄하단 말이야.”
“그런 거, 없어. 똑같았지, 뭐.”
왜 눈을 피할까.
“내가 소장님이랑 사귀는 얘기도 안 해줬어? 연애한다고 신나서 떠들었을 것 같은데.”
“안 했어!”
“…….”
이렇게 단호하게 반응할 일인가, 당황한 도우를 두고 둘째가 일어났다.
“나, 잠시 화장실 좀.”
“어어, 다녀와.”
“연애 얘기는…… 부모님이 아시면 더 난리 칠까 봐 입 다물었던 것 같아.”
“아, 그래. 알았어. 어서 화장실 다녀와.”
제 부모라면 충분히 그럴 법한 얘기였다. 도우는 잃어버린 기억 속 자신을 칭찬했다. 제법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그러다가 동생이 놓고 간 휴대전화에 눈이 갔다. 책, 보드게임, 영화 등등, 각종 오락거리가 도우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만, 휴대전화만은 주어지지 않았다. 당분간은 머리를 어지럽히는 행위, 이를테면 뉴스나 기사 같은 것들을 찾아보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다고.
그래도 도우는 가볍게 화면을 켰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조금 궁금했다. 헤드라인 몇 개만 읽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다행히 휴대전화는 잠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상단에 뜬 메시지 알림이 바로 보였다.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주어조차 불분명한 명백한 경고에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누군가 둘째를 협박하고 있다. 옳지 못한 방식으로. 유난히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보던 둘째를 떠올리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이사님」
“…….”
갑자기 묵직한 쇳덩이가 가슴 한가운데로 쿵,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혀, 도우는 서둘러 검색창을 켰다.
‘이안 소장, 이안…….’
달랐다. 제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연구소와 제약회사 홈페이지에서도 이안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아주 낯익은 얼굴이 대표이사 소개말에 걸려 있었다. 사진 밑에 또렷하게 적힌 ‘대표이사 이긴’을 확인한 순간 손에서 힘이 풀렸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화장실에서 돌아온 둘째가 떨어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뭐야?”
“어, 그게, 식구들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사진, 같은 거…….”
“사진은 무슨. 아, 한 장 있다.”
“어, 그러네. 다들 좋아 보여.”
휴대전화를 가져와 자세히 보는 척하면서 도우는 재빨리 제가 보았던 것들을 지워 버렸다. 자연스러웠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혼란에 잠겨서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둘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언니, 피곤한가 봐. 아기 가지면 그렇지?”
“아마도.”
억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렸다가 사라졌다. 동생은 여전히 곁눈질로 사방을 훑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괜히 곤란한 일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 참았다. 묻는다고 제대로 대답할 것 같지도 않았고.
“자꾸 졸려서, 가봐야 할 것 같아.”
결국 먼저 자리를 파한 건 도우였다. 아쉬워하면서도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후련해하는 동생을 보며 착잡해졌다. 그가 기다리는 차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숨이 턱 막혔다.
“얘기 많이 했어?”
자연스럽게 시동을 거는 남자를 낯선 눈으로 쳐다봤다.
‘모르는 사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제 옆에 앉아 다정하게 구는 이 남자는 이안이 아니다.
‘아마도…….’
이긴이겠지.
정체를 알고 나자 그동안 모호했던 의문들이 일시에 설명되었다. 이사님이라 부르던 헬퍼, 본가가 아닌 거주지, 절대 보여 주지 않는 연구 계획서, 한밤의 흡연, 세상으로부터의 차단 같은 것들이.
‘하지만 왜?’
설사 그렇다 해도 왜 이안인 척 자신을 속이는 것일까. 단언컨대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떳떳지 못한 사정이 있다거나, 아니면 이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이안, 아기 아버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부풀기 시작한 배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그럼 이 아이는 누구 아이지?’
이안? 이긴? 어차피 둘이 쌍둥이니까 누구 아기든 상관없나. 생판 모르는 남자와 몸을 섞고, 생부도 모르는 아기를 품고 있다니. 생각하니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입술을 꾹 물어 참아 냈다.
‘어떡하지.’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지금처럼은 지낼 수 없었다.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떴을 때부터 시종일관 이안인 척 저를 대해 왔던 걸 떠올리자 소름이 쭉 끼쳤다. 도우는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노렸다.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뒷일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도우는 무작정 눈에 보이는 상가 한 군데를 찍었다.
“저기서 잠깐 세워 줄 수 있어요?”
“왜?”
“화장실이 급해서…….”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임신부는 방광이 눌려 소변이 잦다는 걸, 어제 그와 함께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해 다룬 책을 읽으며 확인했으니까. 같은 걸 떠올렸는지, 이긴은 별 의심 없이 상가 앞에 차를 세웠다. 으레 따라나서려는 그를 만류하기 위해 부끄럽다고 중얼거렸다.
“금방 다녀올게요.”
“혼자서 괜찮겠어?”
“그럼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지만 애써 웃음으로 무마했다. 상가 안으로 날듯이 뛰어들고 나선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구원처럼 건물 뒤쪽으로 난 문을 발견했다. 도우는 정신없이 그쪽을 향해 뛰었다.
당연히, 임신한 몸으로 멀리 가는 건 무리였다. 조금 뛰었다고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낯선 장소를 무작정 헤매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처음 내렸던 상가는 이제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
길을 잃었다.
그제야 도우는 멈추었다. 몸에 지닌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당장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모했다는 깨달음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방향도 목적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다가 일단 누구에게라도 휴대전화를 빌리기로 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빌리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외우고 있는 번호도 다섯 손가락 안쪽이었지만, 도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망설임 없이 가장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는 몇 초 동안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안 받으면 어쩌지. 그다음은? 막막함에 사로잡힌 찰나, 언제까지고 울릴 것만 같던 연결음이 뚝 끊겼다.
“소장님!”
―도우……?
아, 진짜 이안이다. 탄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주변의 상호를 참고해 제가 있는 곳을 알렸다. 자세한 상황을 풀어 놓는 건 만나서 해도 충분할 테니까. 이안은 언제나 그랬듯 지체 않고 달려왔다.
***
이안이 오는 동안 ‘그 남자’가 먼저 저를 발견하면 어쩌지. 불안에 싸여 꼼짝도 못 하고 오도카니 앉아 발끝만 쳐다보고 있을 때, 경적 소리가 두 번 짧게 울렸다.
“소장님!”
익히 알고 있는 차 모델과 번호판을 확신하자 안도감이 물밀듯 몰려왔다. 이안이 어째서 차에서 내려 반기지 않는지, 그답지 않은 행동에 조금은 궁금해하며 조수석에 올랐다.
“소장님, 어떻게 지내셨, 아…….”
안전벨트를 매면서 옆 좌석을 돌아보다가 그대로 호흡이 멎었다. 철컥, 벨트가 잠기면서 거친 쇳소리만이 불길하게 울렸다.
“잘 지냈나 보네. 궁금했는데.”
“…….”
“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거 좋아했지.”
너무 얼어붙은 나머지 이안이 포장까지 벗겨 내미는 레몬 사탕을 얼결에 받아 입에 넣었다. 턱 전체가 아릴 정도로 신맛에도 굳은 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안은 머리까지 뒤덮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눈, 코, 입, 귀에 뚫린 구멍 사이로 얼기설기 기운 자국이 보였다.
‘누가 이런 짓을…….’
충격으로 도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너무 얼어 버린 나머지 붙박이처럼 이안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 이안이 흉측한 웃음을 지었다.
“궁금해? 보여 줄까?”
아니요. 부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 긁히는 소리만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조금씩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가면 안쪽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면을 통째로 뜯어 버렸다고밖에 할 수 없는…….
가면에 손을 올렸던 이안이 피식 웃으며 팔을 내렸다.
“임신부한텐 무리인가.”
아직 겉으로 티가 많이 나진 않았지만, 도우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아이 아버지가 이안이 아니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면……?’
한순간 혼돈에 휩싸였다. 정말 이긴이 아이의 아버지가 맞는다면 왜 이안인 척한 거지? 분명 알파 여자랑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조차도 거짓인가?
이제는 무엇도 불확실했다. 저조차도 기억을 잃었으니 자신을 믿어선 안 되었다.
쉬이 속내를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함께 도우는 이안에게서 시선을 뗐다. 순순히 자신을 만나러 온 저의가 뭔지 궁금해졌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잔혹하게 훼손한 사람이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이안이 물었다.
“궁금하지 않아? 누가 이런 짓 했는지.”
“모르……겠어요. 별로요.”
“거짓말.”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역겹더라도 노팅해 둘 걸 그랬어. 오메가 새끼 하나쯤 있으나 마나 한걸.”
“…….”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안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제가 알던 차분하고 다정다감한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열하게 키득거리는 낯선 웃음소리가 도우의 고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정말 쓸데없지. 나도 참, 허술했다니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이안을 보며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나 그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측은함은 빠른 속도로 희석되어 갔다. 텅 빈 감정의 자리에 공포가 몰려들었다.
“몸도 마음도 완벽하게 각인해 놨어야 하는 건데. 아니지. 난 완벽했어. 넌 분명 하혈했으니까. 내가 몸까지 지배한 게 맞아. 이건 순전히 이긴 때문이지.”
“이긴…….”
저도 모르게 멍하니 따라서 중얼거렸을 뿐인데, 일순간에 분위기가 포악해졌다.
“오, 이긴, 이긴, 이긴. 이긴한테 왜 그리들 환장을 하는지. 나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지 않아?”
서글픔과 분노가 강하게 느껴졌지만 도우는 동정하지 않으려 애썼다. 흔들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어디 가는 거예요?”
도우의 질문은 이안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님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어느 쪽이든 이안은 실성한 사람처럼 제 할 말만 끝없이 늘어놓았다.
“그 녀석이 네게 끌릴 거라는 건 알았어. 쌍둥이니까, 보는 눈이 기가 막히게 닮았거든. 그래도 난 미개한 오메가 따위에 직접 손대는 짓은 안 해. 더더군다나 남자인데.”
잠깐 말을 멈춘 이안이 단발로 긴 도우의 머리카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물론 남장이지만.”
“…….”
이안의 음성 위로 비슷하지만 다른 음성이 겹쳤다.
“아님 게이인가?”
이건 뭐지. 갑자기 머릿속에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도우는 심히 당황했다. 자꾸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듯, 정수리가 부풀었다 꺼지는 착각이 일었다.
“발정기가 다 뭐야. 그런 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짐승이지. 같은 선상에 놓는 것 자체가 불가해야.”
“유사 인류도 인권이 있나?”
또. 이건 무슨 기억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머릿속 잔상에 집중하는 동안, 옆자리가 조용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백미러로 연신 뒤를 확인하는 이안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 있었다. 그가 가속 페달을 밟으면 밟는 대로 뒤따라오는 차도 속력을 냈다. 이를 악물고 운전에 집중하던 이안이 어느 순간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난 항상 뺏기기만 했어. 가장 좋은 건 언제나 이긴 차지였지. 내겐 선택권조차 없었어.”
“…….”
“그런데 나도 이제 빼앗을 수 있는 게 생겼네.”
도우는 직감적으로 이안이 노리는 게 태중의 아기라는 걸 알았다. 기억을 잃게 만든 게 이안이라는 것도. 슬픈 끝을 예감하면서도 도우는 간절하게 매달렸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난 이 말을 정말 좋아해. 진정한 안식이 기다리는 것 같거든.”
이안의 연구실 액자에 걸린 문구였다. 갑자기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다,
“Omnis,”
그가 라틴어로 첫음절을 꺼낸 순간, 도우는 본능적으로 그게 또 한번 제 기억을 삭제하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자각과 함께 반사적으로 입 안의 레몬 사탕을 뱉었다. 잠겨 있는 차문을 힘껏 연 것과 동시였다.
‘더는……!’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소중한지 모르면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고막을 찢을 듯한 요란한 굉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도 도우는 빙긋이 웃었다.
‘다행이다.’
이안은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