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사는 도서관에서-4화 (4/13)

Chapter 4. 시작은 오싹하게

‘안 와…….’

매일매일 출석 도장을 찍던 레이가 오늘은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비비안은 하룻밤을 꼴딱 새고 내내 레이만 기다렸다. 업무를 빠르게 끝마친 뒤에 벽에 기대어 서서 5분마다 발작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올 시간이 이미 한참 전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개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며 하릴없이 서성대다가, 곧 교대 시간을 앞둔 주간 사서들의 눈초리를 받았다.

“뭐 해, 비비안? 퇴근 안 하고.”

다들 그녀를 어디 아픈 사람 보듯이 쳐다봤다. 그렇다. 퇴근 시간에 퇴근을 안 하고 일터에 남아 있는 직장인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비비안은 참담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긴 뒤 퇴근길에 올랐다. 레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평일이고 주말이고 단 한 번도 도서관을 찾아오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이로써 확신이 서고 말았다.

레이, 그 자식은 사기꾼이었다!

‘내 노트 들고 튀었어!’

비비안은 끓어오르는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벽을 걷어찼다가 다리의 상처만 입고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는 서서히 씁쓸함으로 번졌다.

비비안은 문득 레이와의 첫 만남이 떠올렸다.

그 당시 비비안은 새까만 후드를 둘러쓰고 도서관을 찾은 레이를 유심히 살피다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소설로 읽는다고 해도 눈살을 찌푸릴 만한 고전적인 추파였으니까. 그런데 그 대사를 제 입으로 뱉었다니.

비비안은 이 시대 최고의 관능 소설 작가로서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그 낯선 상대에게 이유 모를 그리운 느낌을 받은 건만큼은 분명했다.

워낙 생생한 감각이라, ‘이게 말로만 듣던 운명이라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레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분히 연극적인 어조로 그녀의 말을 맞받아쳤다.

“만난 적 있다면, 사서님 같은 분을 제가 잊을 리가요.”

진심이라기보다, 비비안이 워낙 민망해하니까 비슷한 말로 받으며 그녀를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이렇게 답하면 되는 건가요?”

어쩐지 부끄럽다는 듯, 그는 수줍은 미소를 그리며 물어 왔다. 그녀의 느끼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부드러운 농담으로 순화시켜 준 것이다.

그날부터 비비안은 레이의 배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철저하게 선을 긋는 듯한 절제된 다정함도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그의 선 안에 들어서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사기꾼이었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기꾼은 너무한 거 아니냐. 내게 상처만 남기고 떠난 망할 놈의 이를 모를 남자.

비비안은 이를 갈며 무슨 일이 있어도 노트만큼은 되찾아와야 한다고 다짐했다.

“흑의 대공이 환궁했대!”

그때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비비안은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시녀들이 참새처럼 떠들고 있었다.

‘흑의 대공?’

아스티에 제국에서 흑의 대공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그는 전쟁이나 전염병과 비슷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비비안도 오래전 그를 황궁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잠시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마치 자유롭게 풀어놓은 맹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감히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야생 그대로의 맹수 말이다.

대공이 아무리 고귀함이 흐르는 조각 같은 외모를 타고났을지언정, 그 잘난 얼굴은 압도적인 분위기에 먹혀 제대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새하얀 피부를 새까만 옷으로 덧씌운 남자는 푸른 눈만 형형하게 빛나는 늘씬한 흑표범으로 보였다. 제 영역을 어슬렁거리다가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먹이를 그대로 집어삼켜 버리는.

당연히 거기에는 아무런 악의 없었다. 그에게는 사냥일 뿐일 테니까.

‘그래서 다들 두려워하는 거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막연한 자연재해보다 바로 코앞에서 이를 드러내는 맹수가 더 두렵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흑의 대공은 가장 실질적인 공포의 상징이었다.

황제조차 목줄을 죄지 못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와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어쩐지 오늘따라 황궁 분위기가 침울하고 우중충하다 했다.

‘대공이 발렌타인 대공령으로 돌아간 해에는 다들 축하 파티라도 열 기세더니…….’

하지만 지금 사용인들은 세상의 멸망을 앞둔 듯 절망에 가득 차 있었다. 악마가 영혼을 빼앗으러 찾아왔다고 해도 저런 얼굴은 안 하겠다.

“왜 궁으로 돌아오신 거야?”

“폐하께서 혼사를 억지로 추진하시려고 했나 봐. 황실에서 각 가문의 인장이 찍힌 청혼 협상서를 보냈더니 바로 찾아와서 보란 듯이 서류를 한꺼번에 담뱃불로 지졌다던데.”

“……맙소사.”

“역시 개망나니…….”

한 시녀가 무의식중에 본심을 중얼거렸다가 헉, 하고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다들 침묵했지만 내심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폐하께서도 이번만큼은 뜻이 확고하신지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연인이라도 데려오라고 했나 봐.”

비비안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와중에도 방금 접한 이 따끈따끈한 소식에 흥미를 보였다.

흑의 대공은 타락과 향락, 퇴폐의 대명사였다. 가장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설정부터 용사 무리와 대립할 최종 흑막 같은 남자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연인이라니, 갑자기 무슨 로맨스 같은 전개란 말인가.

‘장르가 다르잖아.’

그녀는 끙,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흑의 대공을 로맨스 장르에 억지로 끼워 맞춰 보았다.

‘흑의 대공이 만약 로맨스에 등장한다면 개망나니였지만 여주의 상냥함에 감복하여 개과천선한 서브 정도려나.’

잠시 상상해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음, 아니야. 흑의 대공이라면 여주의 상냥함에 감복하기는커녕 그 상냥함을 철저히 이용해서 악으로 물들여 타락시켜 버릴 것 같다.’

그를 로맨스로 엮기에는 너무 새까맸다. 별칭대로 암흑 그 자체였다. 악당 외에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로맨스는 무슨, 푸른 수염이겠지. 과연 흑의 대공이 어떤 여자를 제물로…… 아니, 연인으로 맞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궁금해 봤자인가.’

비비안은 8년을 황궁에서 일했는데 지나가다 대공을 본 게 여태까지 딱 한 번뿐이었다. 그만큼 서로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그’ 개망나니 흑의 대공이 황실 도서관을 찾을 리도 없잖아. 비비안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희생양을 속으로 애도했다.

* * *

“흑, 흑흑…….”

생각을 거듭할수록 서럽다. 마치 아름답게 흩날리는 꽃잎을 쫓아 무방비하게 달려가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인간관계는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이젠 친구가 적은 것까지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곧바로 출판사까지 달려가 사장 덴드로를 붙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어느 정도 그의 책임도 있었다.

“네가 연애하라는 말만 안 했어도!”

“아니, 그게 어떻게 내 탓이 돼?”

덴드로가 봤을 때 비비안은 사기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상대방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다짜고짜 연애부터 생각했다니. 아무리 연애에서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보면 어쩌란 말인가.

“내내 후드로 표정을 가리고 있었으니 속여 먹기 쉬웠겠네.”

그는 뭐 이런 바보가 다 있느냐고 타박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흉흉한 안광과 눈을 마주치고 난 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 건드려 봤자 벌집을 들쑤시는 꼴밖에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트 훔쳐 갔어. 확실해. 오늘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회심의 역작이었는데. 노트에 적은 대로 쓴다면 분명 다음 작품은 돈벼락…….”

“알겠으니까 진정해.”

“애초에 황실 도서관은 출입증 없이 드나들 수 없어. 아주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대체 그 사기꾼은 어떻게 매일 도서관 출입 심사를 뚫고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황궁 보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텐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지옥을 보여 줄 거야.”

비비안은 한숨을 마치 담배 연기처럼 폭 하고 뱉으며 아련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첫사랑의 날카로움을 곱씹고 있자니 입맛이 쓰디썼다.

“지옥은 지금 네가 볼 것 같은데.”

통통했던 비비안의 볼살은 이미 홀쭉해진 지 오래였다. 툭 치면 쓰러지는 게 아니라 죽을 것 같았다. 덴드로는 그녀의 반 시체인 몰골을 보고 치를 떨다가 이마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건강 먼저 생각해. 죽으면 돈벼락이고 뭐고 끝이니까. 일단 푹 쉬고, 일어나서 냉정하게 생각해. 이미 잃어버린 노트 어쩌겠어. 그냥 잊어라.”

네 첫사랑이 고백하기도 전에 깨져 버린 건 유감이다만 나중에 되돌릴 수 없을 때 알게 된 것보단 차라리 그게 잘된 거 아니겠어.

덴드로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다가, 비비안이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결국 잠 좀 자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그리고 어깨를 꾹 눌러 억지로 소파에 눕혔다.

“자라, 인마.”

그 사기꾼 놈을 잡을 때까지 절대로 자지 않겠다고 반항하던 비비안은 결국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비비안은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녀는 근처 잡화점에서 임시로 구매한 노트에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 그 당시의 느낌을 전혀, 조금도 살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평소 습관대로 써지다 보니 저번에 덴드로에게 지적을 받은 대로 비슷비슷한 묘사와 대사들이 튀어나왔다.

‘아니야, 좀 더 천박하면서 꼴리게…… 이것도 아니야. 너무 갔어.’

그녀는 머리를 쥐어짜며 끙끙 앓다가 결국 노트를 박박 찢은 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도통 만족할 수는 없었다.

소설이 써지지 않기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더욱 크기를 키웠다. 그 당시 도서관에서 보았던 두 번의 생생한 정사는 마치 구원 같았는데.

‘다시 기다리면 또 올까?’

비비안은 황제와 공작 중 하나라도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하지만 고래 두 마리 사이에 끼인 새우 꼴이 되어 버린 카르델을 생각해 보면 그건 매우 미안한 바람이었다.

그냥 덴드로의 말 따위는 무시하고 뻔뻔하게 응수하면 그녀의 네 번째 작품도 무사히 출판될 게 분명했다. 어쨌든 비비안의 관능 소설은 독보적이었고 언제나 수요가 넘쳤으니까.

하지만 한번 자극받고 나자 그 도발에 어떻게든 이기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게다가 소설의 다른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본 뒤라 다시 전처럼 돌아가는 게 쉽지도 않았다.

비비안이 절망과 분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택한 수는 매일 새벽 그 사기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약 올리려고 하는 것인지, 레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날도. 어느새 그녀가 현자를 기다리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비비안은 퀭한 눈으로 커다란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 지금 당장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비비안은 가까스로 졸음을 몰아내며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녀는 제 자리를 빙빙 돌면서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낭독했다. 현자의 탑 현자 100명이 인생 철학에 대해 논한 것을 엮은 책이었는데 이걸 보니 없던 잠도 쏟아질 것 같았다.

으아아! 안 돼! 자면 안 돼! 비비안은 손안에 들린 책은 던져 버리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을 계속 움직이니 이번엔 고단해져서 잠이 밀려왔다. 잠시 헉헉 숨을 고른 그녀는 이제 노래를 불렀다. 어떻게든 잠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었지만 고개는 계속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참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딱 6시 정각이 되자 정문을 통해 레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후드를 온몸에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헉, 왔다.’

무려 삼 일만이었다! 비비안은 그가 카운터 근처로 다가오기도 전에 씩씩거리며 레이 앞에 다가가 섰다.

그의 입꼬리가 천연덕스럽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조각 같은 미소였다.

“이리 반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비안.”

“하, 그렇죠.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당신만 기다렸거든요.”

“어쩐지 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시는 것 같습니다.”

레이의 손이 제멋대로 다가와 비비안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꽂아 주었다. 그리고 짙어진 그녀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안쓰럽게.”

거친 손가락 때문에 눈 밑이 따끔거렸다.

“좀 주무시지 그러셨습니까.”

가증스럽고 뻔뻔한 접촉에 할 말을 잊었던 비비안은 그의 손을 뿌리친 뒤 다시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사기꾼, 도둑놈! 당장 경비대에 신고하기 전에 제 노트 돌려주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도죄로 감방에 넣어 드릴 테니까요.”

“뭘 해도 신고하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다짜고짜 모욕적인 언사를 뱉었는데 그는 부정도 긍정도 없이 태연자약했다. 조금이라도 당황할 줄 알았는데 전혀 동요조차 없었다.

심지어 변명이나,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조차 없으니 비비안은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심기를 거스르면 노트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비비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대체 가짜 신분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 온 거예요? 제대로 신고하면 당신, 처형까지 당할 수 있는 거 알아요?”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 보니 신고하실 생각은 없으시군요.”

“노트만 돌려주신다면요.”

비비안은 제법 평정을 유지하며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노트만 무사히 돌아온다면 유혈 사태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절 농락한 건 관대하게 넘어가 드릴게요. 사실 그쪽도 이미 예상했겠지만, 저도 처음부터 당신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했으니까요.”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하는 걸까. 제 소설에 이용하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조금씩 진심이 될뻔했다는 건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 할 것이었다.

차라리 감정이 커지기 전에 이렇게 된 게 다행이었다. 저 노련한 사기꾼에게 완전히 홀려 헤어날 수 없게 되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진 않으신 겁니까?”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질문이었다. 비비안의 표정은 점점 싸늘하게 굳어 갔다.

남자의 정체? 그가 귀족이라면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일 테고, 평민이라면 아주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평민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봤을 때 당신의 정체는 정말 할 일 없는 사기꾼이에요.”

비비안의 신랄한 평가에 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네요.”

“덧붙여 도둑놈까지요.”

“훔칠 생각까진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변명해도 소용없겠죠.”

드디어 그는 품속에서 노트를 꺼내 비비안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협박도 회유도 없이 순순했다.

의외의 상황에 비비안은 잠시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당연히 그가 노트를 인질로 잡고 거래를 청해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다음으로 취한 행동 때문에 그녀는 그 목숨과 같았던 노트를 뚝 떨어트리고 말았다. 레이, 아니, 에이든이 꽁꽁 싸매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매끄럽게 쏟아지는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보다 더 먼저 들어온 것은 연푸른 눈동자였다.

비비안은 어느 날 저녁 한순간 마주쳤던 눈동자를 기억해 냈다.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황제 폐하?

이목구비가 똑 닮은 모습에 그가 황제 폐하일 것이라고 짧은 찰나 비비안은 착각했다. 설마 그날 몰래 훔쳐본 죄를 물으러 온 건가.

그대로 기절할 뻔했던 그녀는 곧 그의 머리카락 색을 발견했다. 한 치의 빛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물든 머리카락. 어슴푸레한 불빛을 받자 그것은 오히려 푸른빛으로 빛났다.

어둠을 배경으로 달빛 속에 녹아든 남자.

비비안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은 채 입을 벌렸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피까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흐, 흑…… 흑의…….”

그녀가 경악하든 말든 에이든은 제 할 말을 이었다.

“그 별칭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이든이라 불러 주십시오.”

에이든은 땅에 떨어진 비비안의 노트를 주워 주려는 듯했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사냥감을 방심시키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는 맹수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흑의 대공은 스스럼없이 몸을 숙였지만, 비비안은 오히려 위압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당장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중한 노트, 떨어트렸습니다.”

목숨과 같은 노트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차라리 노트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비비안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받아 들며 눈가를 파들파들 떨었다. 이대로 기절해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졌지만 튼튼하게 태어난 죄로 그녀의 정신은 너무도 멀쩡했다.

“대, 대공 전하?”

“에이든.”

“에이든?”

“네.”

헉, 이름을 불러 버렸어! 비비안은 무의식중에 그를 따라 중얼거렸다가 흠칫 놀랐다.

그의 명성대로라면, 이름을 함부로 부른 건방진 시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눈빛에 살짝 포만감이 어렸으니까.

‘얌전해도 너무 얌전한데.’

배부른 짐승 같다.

도서관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어슴푸레 물들기 시작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어둠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잔인하게 빛나는 푸른 눈을 마주하면서, 비비안은 상황도 잊고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공포에 질려 떨리는 건지, 설레서 두근거리는 건지. 그 경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상반된 개념이 공존하는 남자였다. 음습하면서 아름답고,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하면서 동시에 고귀해 보이는.

“그럼 전에 하던 얘기를 이어서 계속해 볼까요?”

“자,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흑의 대공이 레이라면.

비비안은 차분히 대리석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땅에 박아 물리적 충격을 가하면 깔끔하게 기절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없던 일로…….”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다고 자부했지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돌파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절 가지고 노신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목숨이 아홉 개인 것도 아니고 어떻게 흑의 대공을 가지고 논단 말인가. 그런 배짱이 있었으면 나는 시녀가 아니라 용사였겠지. 비비안은 고개를 휙휙 내저으면서 훌쩍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죽을 맛이었다. 여기가 바로 생지옥인가 싶었다.

세상에, 흑의 대공이라는 사람이 현자인 척 도서관에서 책이나 빌리고 있었다니. 할 일 없는 사기꾼이면서 도둑놈이었다니!

비비안은 눈가를 파들파들 떨며 말했다.

“아, 아까 제가 한 말 없던 일로 할 수 있나요?”

“할 일 없는 사기꾼에 도둑놈이라는 것 말입니까?”

“…….”

“딱히 그 일로 비비안을 벌할 생각은 없습니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막살다가 드디어 죽게 되는구나. 이번이야말로 죽음을 직감했으나, 에이든은 여전히 관대했다.

지금까지 대공은 제국에서 호환 마마보다 더 두려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비비안도 당연히 그렇게 믿어 왔다. 사리 분별 못 하는 개망나니처럼 굴다가 결국 황위에서도 물러난 얼간이 황자, 패배자. 그가 바로 흑의 대공 아니었는가.

하지만 레이로써 여태까지 보아 온 그의 모습은 소문과 전혀 달랐다.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달랐다. 비비안은 그녀가 느낀 감정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소문과 다른 분이시네요.”

비비안은 황실에 종속된 시녀였다. 황족인 대공에게 뻔뻔하게 나올 군번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노트를 훔쳐 간 건 그의 잘못이지만 계약상 대공의 말이 곧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에이든은 그녀의 무례한 언사에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어쩌면 대공은 누명을 쓰고 그런 억울한 취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비비안은 생각했다. 사실은 흑의 대공은 사실 매우 우아하고, 고상하고, 예의 바르며,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사람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속담도 있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런 흉악한 악명이 따라붙을 리가 없지. 어쩌면 목적이 있어서 저렇게 상냥하게 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까도 까도 양파 같을 줄 알았다, 내가…….’

비비안은 속으로 한탄했다. 난 바보 멍청이야.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도 아니고 위험할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접근해서 이 사달을 만든단 말인가.

“그런데 왜 굳이 정체를 밝히시는 건가요.”

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전혀 알고 싶지도 않았던 비밀을 끌어안은 판도라처럼 괴로워했다.

“비비안의 정체를 알아 버렸으니 저 또한 정체를 밝혔을 뿐입니다.”

“네?”

“페르디 아닙니까?”

“그, 그,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아닙니까?”

에이든은 비비안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발버둥 쳐 봤자 이미 그녀는 함정에 빠진 들짐승이요 낚싯줄을 문 물고기였다.

“페르디가 아니라면 노트에 적힌 내용은 혹시 당신의 성적 판타지인 겁니까?”

“……예?”

“의외군요. 꽤 과격하던데.”

“아, 아니!”

성적 판타지라니! 어떻게 순수한 작품 활동을 그런 식으로 몰고 갈 수가 있어. 비비안은 순식간에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노트에 적어서 소중하게 들고 다니는 변태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성적 호기심이라고 해 줘!

“거기 있는 내용 전부 제가 지어낸 얘기, 그러니까…….”

“특히 마지막 줄에 ‘드디어 덴드로 자식을 엿 먹일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두 번만으로는 자료가 부족할 텐데 앞으로 어떻게 더 몰래 볼 수 있지?’라고 쓰인 부분에서 그쪽의 숨길 수 없는 관음적 취향을 드러내는…….”

“아악!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창작 몰라요, 창작?! 소설이라고요!”

“그렇겠죠. 페르디.”

“…….”

비비안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에이든은 이미 짐작했다는 듯 냉소를 지으며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비비안은 그가 페르디라고 딱 짚어 낸 것에 새삼 감탄했다. 물론 운이 나쁘게 <망막 속의 음란>을 들켜 버리고 말았지만, 보통은 그런 작은 단서로 거기까지 유추해 내지 못한다. 구작과 새로 구상한 신작은 스타일이 전혀 달랐으니까.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문체와 서술 방식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자주 사용하는 단어도 겹치고요.”

많이 접하다 보니 저절로 같은 작가가 쓴 글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에이든의 설명이었다. 그게 진짜로 가능한 거였다니. 비비안이 발뺌하는 것을 반쯤 포기하며 한숨을 내쉬자 그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꺼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영향받은 작가 이름도 몇 댈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해낸다고요? 괴물 아닙니까.”

“자주 듣는 소리군요. 해 볼까요?”

“괘, 괜찮습니다.”

흑의 대공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쓸데없고 섬세한 능력의 소유자였다니.

제국 각지에서 떠들썩한 그에 대한 악명만 해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는데, 대체 언제 그 경지에 오를 정도로 책을 읽은 거야? 비비안은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여기서 왜 현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지.’

지금의 저 착실한 책벌레와 소문 속의 악마가 도저히 겹쳐지지 않았다. 소문과 다르게 순수하게 책을 좋아할 뿐인 사람이라든가,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비비안은 도저히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아, 저 사기꾼이 대공을 사칭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물론 황제와 굉장히 많이 닮았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비비안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시죠?”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으나 긴장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대체 이제 무슨 짓을 하려고. 사실은 페르디가 황실에 묶인 개인 데다가 도서관 사서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퍼트리시려고 그러시나!

아무리 그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에이든은 흑의 대공이었다. 그동안 자라 오면서 악명에 대해 세뇌받다시피 들어왔기 때문에 저절로 생각이 최악으로 치닫는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역시 이것을 빌미로 협박할 생각…….

“뭐, 특별히 뭘 할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이 빗나갔다.

“비비안의 작품 활동에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도움이요?”

비비안은 또다시 멍해졌다.

‘도움이라니 어떻게?’

자료를 제공해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엔 그녀는 황실 도서관 사서였다. 시중에서 팔리는 모든 서적은 물론 구하기 힘든 것까지 쉽게 접할 수 있는 위치의.

게다가, 제국을 다 뒤져도 관능 소설의 일인자는 페르디인 비비안 자신뿐이었다. 이건 자만이 아닌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줄에 대한 해답이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마지막 줄이요?”

비비안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관음을 두 번밖에 하지 못해서 참고가 안 된다고 했던, 민망해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내 낙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저 마지막 줄을 쓰는 내게 발차기를 먹이고 깃펜을 반으로 뚝 부러트리고 싶은 바로 그거? 그 문장에 대한 해답이라면…….

“설마…… 대공 전하, 그건 범죄에요.”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시는 겁니까.”

비비안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타이르자, 에이든은 그녀의 머릿속을 의심하며 눈 사이를 가늘게 좁혔다. 그제야 비비안은 민망함에 뺨을 붉히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자금이라도 제공해 주겠단 뜻인가요?”

그러자 그는 단정한 얼굴로 답했다.

“순결 서약을 깨트려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헉, 저, 정말요?”

“원한다면 제 몸이라도 마음껏 쓰시죠.”

몸이라고?

노골적인 표현에 비비안의 시선은 아주 자연스럽게 탄탄하게 짜인 몸으로 향했다. 미학적인 비율의 조각상 같은 몸매…….

에이든이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서 손을 휙휙 휘젓자 화들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조건은 마음에 드십니까?”

그가 화려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물었다. 비비안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얌전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비비안은 저게 다 터무니없는 내숭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무방비하시네요. 제가 무슨 요구를 할 줄 알고…….”

비비안은 흑의 대공의 위명보다 자신이 더 짐승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에이든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잠시 빤히 응시했다.

“정말 필요 없으십니까? 꽤 고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

“신작은 아마, 누군가의 정사를 참고해서 적으실 모양이신데.”

비비안은 황제의 외모 묘사를 자세히 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의 정사를 참고했다는 건 그 아무리 흑의 대공이라도 미쳤냐고 되물을 사안이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참고한 장면과 참고하지 않은 장면의 격차를 만들어 전체적인 소설의 질을 떨어트릴 뿐입니다.”

울컥했지만 너무 정론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긴 했다. 이번 작품은 자극적이고 색다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지독히도 매력적인 얼굴을 한 채 노트에서 읽은 한 구절을 읊었다.

“촉촉하게 젖은 두 개의 입술이 맞물렸다. 그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마치 갈구하듯 혀를 밀고 들어왔다. 깊게 빨아들이는 감각에 몸이 작게 떨리며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어떻게 저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서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감미로운 음성이 깊어질수록 비비안은 수치심으로 굳어져 갔다.

비비안은 그냥 죽은 척을 하기로 했다. 두 눈을 멀뚱히 뜨고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에이든이 멀뚱히 응시했다. 알 만하다는 듯 그 눈빛이 굉장히 거슬렸지만, 뭐라 변명할 것도 없었다.

사실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관능 소설에서 키스는 반복적이며 부수적인 것에 속했으니까. 그냥 대충 서술해 버리고 넘어가는 게 일종의 버릇이었다.

……그래, 솔직히 키스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전혀 없었다. 보통 로맨스 소설은 어린아이들도 많이 보기 때문에 키스의 묘사가 ‘입술이 서로 맞물렸다.’ 수준이었다.

“꼭 키스의 묘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담백하죠.”

그건 그녀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다 못해 소설까지 전부 다 갈아엎게 했던 덴드로의 말과 뜻이 같았다. 관능 소설 치고 꼴리지 않는다는.

“직접 해 보는 것만 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에이든이 돈, 권력, 명예 등등을 운운했다면 고려해 볼 것도 없이 이 협상은 결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든의 몸이라면, 흑의 대공이고 나발이고 못 이기는 척 수락하고 싶을 정도로 혹하는 제안이었다.

‘과연 악마다, 이건가.’

그녀의 욕망을 아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애초에 그에게 날 것 그대로 마음을 드러낸 탓도 있었지만. 비비안은 이젠 거의 자신과 한 몸처럼 느껴지는 순결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순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흑의 대공은 황족이었다.

황족 중에서도 비비안과 비슷한 나이대였고, 황제를 제외했을 때 그녀의 순결 서약을 깨트릴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사실 그녀는 레이와 붙어 다니면서 이따금 불쑥 솟아오른 성욕을 참아 내기가 힘들었다. 그건 레이가 쓸데없이 매혹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카르델과 황제와 공작의 탓도 컸다.

도서관에서 그들을 보기 전까지 비비안에게 남녀의 정사란 실제로 본 적 없는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다. 그냥 흰 종이와 검은 활자로 이루어진 판타지였단 말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너무 현실적으로 변해 버렸다. 직접 겪어 봐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성적 호기심이 일었다.

‘얼마나 좋길래 그런 표정을 하고 그런 신음을 낼 수 있는 건데?’

비비안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저 한 번 지켜보기만 해도 바로 전에 없었던 소재와 표현들이 신내림처럼 떠올랐는데, 직접 해 보면 인생 작품이 나오게 될지도 몰랐다.

레이를 향한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감정이 어느새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욕망으로 변하고야 말았다.

아니, 애초부터 원한 건 그의 몸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아무리 원해도 취할 수 없으니까, 원하는 건 정신적 교감뿐이라고 스스로 속이며 다독였지만.

그런데 더는 참지 않아도 된다니.

이것이 신의 시험이라면, 비비안은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순식간에 넘어간 어리석은 인간이 될 것이다.

“대체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데요?”

“욕심이 나니까. 원석을 발견하면 갈고 닦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에이든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다 묻느냐는 듯 답했다.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작가를 후원해 주는 일이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비비안은 관능 소설 작가였고, 관능 소설이라고 하면은 결국 남녀의 사랑과 몸의 대화가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걸 몸으로 제공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제정신이긴 한 걸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네게 거부권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비안에게 딱히 바라는 건 없습니다. 완성도 높은 소설을 출간해 주시는 것 그것 하나뿐이지요.”

정말 난데없는 상황에 난데없는 제안이었지만, 가장 난데없는 건 혹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비비안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완성도 높은 소설을 쓰기만 하면 된다니. 그것이야말로 비비안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목표 아닌가.

‘당장 필요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흔들리는 눈빛으로 연신 입술을 달싹이는 비비안을 보고 에이든은 책장에 가만히 등을 기댔다.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흥미 반, 욕심 반으로 던지는 제안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거절한다고 해서 딱히 집요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당장 아무 여자나 데려오라고 성화긴 하지만, 그런 어린애 투정이야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왜 하필 저죠? 많고 많은 작가 중에서요.”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만, 페르디는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이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런데요. 그게 왜요?”

비비안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에이든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는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소설계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했는지까지도.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당신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겁니다. 비유하자면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이자 개척자와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 아니 뭐 그렇게 거창할 정도까지야.”

“제겐 그 정도입니다.”

그는 그녀가 민망해하든 말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최초라고 해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습니다. 최초인 당신이 최고가 되십시오.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표정이나 말투는 무던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의 내용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심이구나.’

비비안은 이 남자의 책에 대한 열정은 자신 못지않게 넘쳐 흐를 거라고 확신하며 볼을 긁적였다. 어쩐지 낯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최초인 내가 최고가 되길 바라고 있다니.

‘그래서 내가 레이를 좋아했지.’

생판 남인 데다가 무려 ‘흑의 대공’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한 명의 작가로서 저런 말을 듣고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비안은 엄청나게 기뻤다.

“절 별로 안 좋아하셨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애써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도서관 야간 사서일 때는 철저히 선을 긋고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가 되니까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나서니까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무심했으면서!”

“관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히 친분을 쌓은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제가 비비안에게 관심을 가지길 바랐던 겁니까? 이어지는 에이든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에이든의 마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건 본인이었다.

비비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호, 혹시 살인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에이든이 잠시 두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전 대륙을 통틀어 온갖 나쁜 소문이란 소문은 다 몰고 다니는 악명 높은 흑의 대공이었다.

흐음, 그렇군. 무상으로 자료를 제공한다고는 해도 역시 위험한 사람의 원조를 받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페르디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너무 섣불리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친절하게 사실을 대답해 줄 의무 또한 없었다.

“글쎄요.”

에이든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의뭉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비비안은 주먹을 불끈 쥐며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도서관이 떠나가라 외쳤다.

“저, 절 죽이거나 잡아먹으면 안 돼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잠시 멍하게 굳어졌던 에이든은 이내 웃음을 흘렸다. 자신에 대한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식인 얘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제가 늑대쯤으로 보이십니까?”

비비안은 민망함이 밀려와 웅얼거렸다.

“제가 소문을 전부 다 믿고 있는 건 아니고요. 예방 차원에서…….”

“물론 페르디를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죠.”

에이든은 눈매를 나른하게 접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전히 하는 말과는 반대로 악당 같은 미소였지만 비비안은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관능적이고 퇴폐미 가득한 저 얼굴과 몸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칙이었다. 너무 치명적이지 않은가.

“전하께서는 황실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거나 정계에 진출하는 일이 없으신 거죠?”

“그렇습니다만.”

“한가롭고 돈 많은 백수라는 뜻이죠?”

“……책 읽는 것 외엔 딱히 할 일이 없긴 하죠.”

설마 그렇게 할 일 없느냐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건가. 에이든은 순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위만 대공일 뿐이지 표면적으론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착실히 답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든을 보고 비비안은 수줍은 얼굴로 그를 흘끔거렸다. 흑의 대공은 무시무시하게 무서운 사람이지만, 그녀가 알고 있던 레이는 누구보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전 사실 레이를 좋아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

기껏 비장하게 고백하려 하는데 그런 무신경한 대답은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비비안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레이를 흘겨보았다.

애초에 레이를 좋아하게 된, 그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비비안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나중에 잘못되면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하더라도 아무것도 못 하고 후회하는 것보단 나았다.

“큼, 아무튼 죽고 못 살 정도로 깊은 감정은 아니고 그냥 가볍게 좋아해요. 레이가 대공 전하가 되었다고 해서 호감이 사라지지 않네요.”

분명 비비안은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개미 뒷다리만큼의 가능성이 있어도 들이대겠다고.

“제가 최고의 소설을 쓰길 바라신다면 연애해 주세요.”

에이든은 그녀의 당돌한 발언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자 비비안은 고백한 지 5초 만에 후회하고 말았다. 개미 뒷다리만큼의 가능성이 있어도 들이대겠다는 사람치고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그때 에이든이 붉어진 얼굴로 속으로 악악 소리 지르는 비비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급한 걸음으로 그녀를 도서관 안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울상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피었다.

이, 이건 혹시 허락의 뜻……!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그럼 그렇지. 비비안은 실망한 표정으로 그가 이끄는 대로 졸졸 쫓아갔다.

에이든은 도서관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자신의 모습을 들키는 것도 곤란했고, 이런 타이밍에서 대화가 끊기는 것도 찝찝했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비비안은 책장과 벽이 맞물리는 구석으로 도망쳐서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았다.

“뭐 하십니까.”

“됐어요. 제가 그냥 쥐구멍에 들어가게 놔두시라고요.”

“이렇게 큰 쥐가 어디 있습니까.”

대담하게 고백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민망해하는 게 귀엽다.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작게 피식하고 웃자 비비안은 울컥하고 말았다.

지금 저거 비웃는 거 맞지? 등을 돌리고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그녀는 더더욱 쥐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망해 죽을 것 같은 심정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퉁명스러웠다.

“그래서 대답은요?”

“전 사실 연애 경험이 없습니다.”

“그렇……, 네? 정말요?!”

저 얼굴을 가지고? 세상에 그런 아까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만약 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면 천하를 뒤흔드는 옴므파탈이 되었을 텐데!

너무 놀란 비비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바로 코앞에 검은 정장 바지를 차려입은 아주 긴 다리가 있었다. 에이든은 쭈그려 앉은 비비안에게 붙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배려에서는 항상 무심한 듯 보이지만 태도는 굉장히 정중한 모순이 느껴졌다. 마치 몸에 밴 습관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황족이라 그런 걸까. 그에게 처음 호감을 느낀 것도 이런 세심한 배려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까마득히 높이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가뿐히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정말 연애해 본 적이 없다고요?”

“딱히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품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마치 자신의 마음 따위는 자신이 알아서 조절할 수 있다는 말투였다. 비비안은 뒤늦게 에이든이 자신에게 결여된 감정을 알기 위해 로맨스 소설을 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황제가 강요해서 책이라도 빌려 본 건가.’

정말 쓸데없이 성실한 남자였다.

비비안은 저 다음엔 당연히 거절에 말이 나오겠지 싶어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말은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래도 좋다면 비비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네? 뭐라고요?”

그딴 고백이 성공했어? 비비안이 놀라 되묻자 그가 답했다.

“관능 소설 소재로 사용하기에는 제가 썩 도움 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따, 딱히 소재만을 위해서 연애하자거나 그런 건…….”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그녀는 순순히 시인했다. 에이든에게 호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 봤자 풋사랑일 뿐이고, 애초에 들이대기로 마음먹은 것도 덴드로의 도발 때문이 아니었던가.

덴드로, 그 자식이 ‘연애도 안 해 본 게 연애 소설을 쓰고 앉아 있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봐서.

물론 지금껏 연애 한 번 못 해 본 게 억울해서 조급해진 것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장 화를 낼 줄 알았던 에이든은 오히려 소재로 사용하기 위한 연애라면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불순한 의도로 하는 연애라면 상관없습니다. 마침 저도 폐하께 보여 드릴 위장용 연인이 필요했으니 잘됐군요.”

그냥 지르듯이 한 고백이 먹혔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토록 바라던 게 이루어졌음에도 비비안은 반쯤 넋을 놓은 표정이었다.

“기한은 비비안이 제가 인정하는 최고의 소설을 쓸 때까지.”

“좋아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관계가 좋습니다.”

대신 진지해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어투였다.

비비안이 바라는 것도 가벼운 연애일 뿐이지 그와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에게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져 버릴지도 모르지. 반대로 하루도 못 가서 질려 나가떨어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에이든이 그럼 없던 일로 하자고 할 것 같았으니까. 비비안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해요, 불순한 연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설마 내가 추하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겠는가. 누군가에게 절실할 정도로 깊이 빠져 본 경험이 없는 비비안은 자만했다.

절대,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누군가 사랑에는 자존심도 없다고 했지만, 자신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이다.

“계약이 끝나면 순결 서약 없이도 원할 때까지 황궁에서 머물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얼굴도 몸도 끝장나게 잘 빠진 남자와 연애도 하고 질펀하게 놀기도 하며 소설을 쓰면 된다는 건가?

그건, 천국일 것 같은데.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잠시간 쾌락의 노예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비비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생각하지도 못한 발언이었던 걸까.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에이든이 처음으로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속 안에서부터 시원하게 터트리는 내숭 없는 웃음이 마치 소년 같았다.

듣기 좋은 싱그럽고 청량한 웃음소리, 요요한 빛을 머금은 채 둥글게 휘어지는 눈꼬리.

비비안은 신이 빚은 최고의 예술품을 흘린 듯이 지켜보다가 시간이 되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범죄 수준으로 치명적이었다.

“그럼 계약은 성사된 겁니까?”

“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비비안은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었다. 관능 소설 작가인 그녀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대놓고 물어보기에 좀 무례한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계약하면 끝 아닌가. 나중에 실망스럽다고 무를 수도 없으니 확인을 안 할 수도 없었다.

비비안은 온갖 고뇌를 짊어진 얼굴로 에이든의 다리 사이를 빤히 응시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이미 시선만으로 무엇을 묻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집요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네.”

에이든은 입꼬리를 휘며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관능 소설을 읽어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남주는 전부 다 우월한 물건을 가졌거든요.”

“흠, 그렇습니까?”

“소설 쓸 때 참고가 되려면 크기가 엇비슷해야 할 것 같은데요…….”

비비안은 흑의 대공을 희롱하는 질문을 했으니 사실 살해당해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확인해 볼래요?”

헉, 미친!

비비안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빨개지면서 그녀는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휙휙 고개를 휘저었다. 그녀는 변태였지만, 대공의 은밀한 곳까지 만져 보고 품평할 정도로 정신 나간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그, 그걸 어떻게 만져요!”

“만져 보란 말은 안 했는데.”

“…….”

짓궂은 건 여전했다.

“아무튼, 됐어요.”

비비안은 빨개진 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에이든을 흘겨보았다. 그가 확인까지 운운하는 것 보니 진짜 자신 있는 듯해서 그냥 믿기로 했다.

뭐, 사실 살면서 유일한, 앞으로도 유일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니 선택권이 없기도 했다.

설마 희생양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흑의 대공의 연인이, 자신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비비안은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심란한 얼굴을 했다. 어쨌든 좋았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전부터 거슬렸는데.”

그때 에이든의 손길이 손가락을 타고 뱀처럼 기어왔다. 그는 비비안의 순결 반지를 아주 손쉽게 빼내면서 짙게 웃었다.

“그럼, 계약은 성립인 걸로.”

헉, 드디어 빠졌다.

비비안은 고삐 풀린 짐승이 된 기분으로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제가 지금부터 몸으로 직접 자료를 제공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늘을 등지고 서 있던 그가 나른한 걸음으로 한 발짝씩 가까워졌다. 에이든의 태도에서는 전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무심한 표정도, 어스름한 어둠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도.

하지만 판이해진 주변 공기에 비비안은 잠시 숨을 멈췄다. 지척에서 맹수를 마주친 일반인처럼 슬슬 뒷걸음질을 치며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이 미친 듯이 위험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새삼스럽게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책꽂이의 그늘에 묻힌 도서관 구석은 꽤 어두웠다. 에이든이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을 치던 비비안은 그만 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순식간에 다가와 비비안의 어깨 너머로 손바닥을 짚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지긋이 자신의 무릎을 눌렀다. 음영 진 얼굴은 웃는 얼굴도 살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환상을 보기라도 한 듯, 에이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예고는 없었다. 이미 그는 행동으로 그녀에게 경고를 마친 뒤였다. 에이든이 고개를 숙이자 그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다. 얼굴에 닿는 숨결조차 이상하게 찌릿 거리는 기분이었다.

벽을 짚지 않은 반대 손이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얼음장처럼 서늘한 온도에 비비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숨소리에도 온몸이 달아오르더니 이젠 닿는 곳마다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심장은 이미 터질 것 같이 뛰고 있었다.

청량함이 느껴지는 옅은 향수 냄새와 함께 물컹한 촉감이 입술에 닿았다. 마치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아 비비안은 작게 몸서리를 쳤다.

에이든은 마치 귀한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뒤통수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러자 볼 언저리에 닿는 비비안의 숨결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입술을 부딪쳐 온 것치고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간 없는 토끼처럼 굴기에 살짝 위협만 줄 생각이었다. 겁도 없이 흑의 대공에게 연애하자는 소리를 하기에 경각심을 가지라는 의미에서였다.

혹시나 앞으로도 소설 소재를 얻겠다고 아무 남자한테 가서 이럴까 싶어서. 그런데 그녀의 달콤한 살 내음이, 서로의 숨결이 얽혀 든 순간 이성이 옅어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타고 촉촉한 혀가 자연스레 흘러들어 왔다. 마치 탐색하듯 이곳저곳을 건드렸다. 비비안은 몸을 움찔 떨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것이 무언가의 신호라도 되듯, 에이든은 더욱 가까이 그녀와 밀착했다. 짐승의 낮은 위협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는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시려는 것처럼 깊게 흉부를 들썩였다.

빈틈없이 맞닿은 입술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강하게 물더니, 더욱 깊숙이 안쪽을 헤매기 시작했다. 혀가 잇몸 안쪽을 더듬다가 갑자기 입천장으로 옮겨 갔을 때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예민한 안쪽 살을 집요하게 건드렸다.

“흐응!”

그가 코끝으로 웃더니 그녀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이제는 심장뿐만 아니라 온몸이 박동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가슴팍을 밀던 손이 서서히 힘이 빠지더니 이제는 애절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간질간질한, 무언가 건드리듯 애태우는 키스에 비비안은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비비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다가, 에이든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미리 대어놓은 무릎 덕분에 가까스로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녀는 튼튼한 무릎 위에 걸터앉은 채 울상을 지었다.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덕분에 다른 곳을 아주 강하게 자극당한 탓에 전혀 괜찮지 못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비비안이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와의 입술 사이에서 길게 늘어지는 은사가 보였다.

에이든은 온몸이 달아오른 채 작게 숨을 몰아쉬는 비비안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다지 여유로운 표정은 아니었다.

비비안은 꿀꺽 타액을 삼킨 뒤 한참을 얼빠진 표정으로 있었다. 입술이 아직도 따끔거리고 비릿한 쇠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방금 그건 뭐였지. 머릿속이 터질 것 같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비비안은 더듬더듬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나, 날 물었잖아요.”

“아픕니까?”

나름 상냥하게 군 겁니다. 그가 속눈썹을 내리뜨며 달래듯이 속삭였다. 그제야 에이든을 둘러싸고 있던 묘한 느낌이 사라졌다.

비비안이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볼을 타고 큼지막한 눈물이 뚝 한 방울 떨어졌다. 전혀 울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는데, 왜 이러는지 몰라 비비안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에이든은 허둥대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에 난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 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평정을 잃은 것에 대한 나름의 사과였다.

“이게 바로 키스에서 섹스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비비안.”

“…….”

“이제 잘 쓰실 수 있으실 것 같으십니까?”

비비안은 잠시 다른 세계에라도 다녀오기라도 한 듯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제 좀 냉정해지려나.’

에이든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어쩌면 울음을 터트리거나, 도망가거나, 적어도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뭣도 모르고 겁 없이 제안한 것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흑의 대공인 걸 밝힌 시점에서 사색이 되어 도망갈 줄 알았다. 웬만한 사내들도 그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굴지는 못했다. 이 정도면 간덩이가 부은 게 아니라 없는 수준이었다.

간 없는 토끼. 에이든은 이래도 물러서지 않으면 앞으로 비비안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십니까.”

에이든이 귓가에 입가를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비비안은 그와 입을 맞추는 순간만큼은 소설 생각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정말 혼을 빼놓는 키스였다.

그리고 아무런 애무 없이 고작 키스 하나만으로 자신의 아래가 젖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는 달아오를 수 없이 빨개지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키스는 대충 묘사하고 넘어갈 정도로 단지 의무적으로 혀를 섞는 것이 아니었다. 섹스의 강렬한 전조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어떻게 키스를 담백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거지?’

비비안은 에이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다. 키스가 이럴진대 그 이상의 성적인 접촉은 얼마나 다를 건지 상상만 해도 속이 답답해져 왔다.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어서 말이다.

덴드로, 네놈이 맞았다. 비비안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기는커녕 눈을 반짝였다.

에이든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녀가 최초의 관능 소설 작가 페르디라는 사실이었다. 이론으로는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통달한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자. 미숙한 점이 있다고 해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파고들 정도의 의욕으로 가득한 자.

“확실히 그렇네요.”

“네?”

에이든은 반문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비비안의 머릿속에는 낮게 가라앉은 관능적인 목소리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아니면 부족했습니까, 라니.

물론 부족했다. 소설로 녹여 내기엔 턱없이 모자라지.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외쳤다.

“역시 저는 한 번 더 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자, 잠깐 비비안……, 읍!”

이 감각을 놓치기 싫었던 비비안은 에이든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황한 그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입술을 붙인 뒤 어색하게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에이든의 입이 얼떨결에 벌어지자 그 사이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서툴기 그지없는 키스였다.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 입안을 헤집는 혀를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키스를 반사적으로 응해 주다가 비비안의 양 볼을 꾹 눌러 억지로 입술을 떼어 냈다.

“뭐 하시는 겁니까.”

“키스요?”

아무리 눈빛으로 예고했다지만, 에이든도 멋대로 시작했으니 비비안도 지금 막 멋대로 시작한 참이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당신은 두려움이라는 게 없습니까?”

“네? 아뇨. 무서운 건 무서운걸요. 다만…….”

“다만?”

“성욕이 공포를 지배했을 뿐.”

“…….”

정말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는 시선이라 비비안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학구열도 포함해서.”

그는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녀의 볼을 쭉 꼬집어 당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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