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남이 하면 소재, 내가 해도 소재(1)
다음 날 비비안은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다고 울상이었다.
“분명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명백한 거절의 표현이었다면 저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진 못했을 겁니다.”
“말이나 못 하면!”
“용서해 주십시오.”
힘이 없다는 사람이 입만 살아서 펄펄 날뛰는 것을 보고 에이든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미안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첫 관계부터 그렇게 거칠고 자극적이었으니 투정을 부리는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비비안이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깨어난 이후에도 침실에서 두 번이나 더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에이든은 따귀가 날아와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분명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애원하듯 올려다보는 요요한 눈동자를 보면, 어느새 그녀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자신이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귀엽고 예쁜 것도 모자라 사랑스럽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열기에 취한 것인지 주위의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오로지 그녀만 빛나 보였다.
관계를 갖는 내내 그 빛을 손에 쥐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으스러져도 상관없으니 움켜쥐고 싶었다. 이성을 놓은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에이든은 나름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자발적으로 수발을 들었다.
그 귀찮고 성가신 걸 싫어하는 작자가 아침에는 수프를 직접 입에 퍼 나르고, 지금은 그녀의 팔다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비비안은 놀라워하면서도 어제 일을 떠올리며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고 했는데 계속했으니까.
그렇다고 완전히 싫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나쁜 건 에이든이었다.
“그나저나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써야 할 텐데.”
그녀는 너무 울어 붕어같이 툭 튀어나온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러자 에이든은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눈 위를 덮어 버렸다. 마사지하듯 꾹꾹 누르는 손길이 시원했다.
“정 기억이 나지 않으면 다시 알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설마 또 몸으로?
아직도 골반과 아랫배 언저리의 통증에 시달리는 비비안은 이 몸이 이 이상을 버틸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에이든에게 말했다.
“앞으로 제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접근 금지입니다.”
쾌락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몸을 한계까지 혹사하면서까지 좋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하고 또 하실 기운이 있으신 건가요.”
에이든은 그녀의 말을 듣자 답지 않게 장난기가 불쑥 솟았다. 몸이 고단하여 평소보다 얌전하게 변한 비비안의 반응만 보면 자꾸 어떻게든 쿡쿡 찔러 보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렸다.
그는 듣기 좋은 바리톤의 정중한 음성으로 은밀히 속삭였다.
“먼저 유혹할 땐 언제고 질색하는 겁니까.”
“이러다간 소설을 쓰기도 전에 몸이 먼저 거덜 나겠다는 거예요.”
일단 대공 전하는 일반 사람보다 더 저질적인 작가의 체력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비비안은 넓은 도서관을 홀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야 했기에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말이다.
“사람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제가 곁에서 그렇게 만들어 드리지요.”
설마 그렇게 하고도 벌써 또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비비안은 눈을 덮은 수건을 내린 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그의 중심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음.’
다행히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걸 보니 딱히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이성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한번 놓아 버리면 답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거 남자주인공 대사로 사용해도 되죠?”
“비비안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이미 그녀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한 에이든이 한숨과 함께 답했다.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제가 이제부터 어제 일을 노트에 정리하려고 하는데,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죠?”
“꼭 그걸 지금 여기서 해야…….”
첫 쾌락을 선사해 준 당사자 앞에서 감상문을 쓰겠다고 당당하게 밝힌 꼴이었다. 에이든은 비교적 수치에 둔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는 인상을 쓰며 말끝을 흐리다가 재차 한숨을 내쉬며 허락해 주었다. 간절하게 반짝이는 자색 눈동자를 매몰차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비비안은 고작 하룻밤이 지났다고 벌써 희미해진 기억들 때문에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기억 안 나면 다시 알려 준다고 하셨죠? 그럼 이왕 도와주시는 거 어제 하셨던 말들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요.”
“비비안, 제가 졌습니다.”
“네?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우리가 언제 싸웠어요?”
입으로 희롱하는 것에 특화된 비비안과 몸으로 희롱하는 것에 특화된 에이든. 하지만 전문분야로 받아치기에는 한쪽이 혹사당해 골골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글거리며 웃는 비비안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긋이 응시하다가 노트를 내밀었다. 이거나 받고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비비안은 끙끙거리며 일어나서 탁자 위에 올려진 잉크를 찍어 어제 있었던 일을 꼼꼼히 적어 가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흥분하면 입이 전보다 험해지고 은근슬쩍 하대를 사용하기도 했다. 정중하기만 하던 평소 모습과 다른 그 모습은 성적 흥분과 다른 쪽으로도 그녀를 두근거리게 했다.
험해졌다고 해도 저번에 봤던 브론 공작에 비하면 양반인 셈이었지만, 오히려 선을 넘지 않는 거친 모습이 설렌다고 해야 할까. 그는 마치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돌을 던지면 잔잔한 파동이 일지만, 그 근본은 고요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 쓰는 소설은 이미 모든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이 정해진 상태였다. 비비안은 그게 아쉬웠다. 나쁜 남자를 빙자한, 나쁜 새끼. 브론 공작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보다는 이쪽이 훨씬 멋있는데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대공의 캐릭터를 넣기는 힘들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를 남자주인공으로도 소설을 쓰고 싶었다. 분명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주인공이 될 것이다.
‘콩깍지가 씐 건가.’
뭐, 아무렴 어때. 언젠가는 써야지! 비비안은 그를 자세히 묘사해 놓은 메모 옆에 별표를 치며 결심했다.
“뭐가 좋아 웃고 있습니까.”
“그냥요.”
그녀는 노트를 재빨리 다음 페이지로 넘기며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이 반지는 뭐예요?”
하도 얇고 착용감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비비안은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한때 순결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에 새로운 반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보석의 빛깔이 계속 불꽃처럼 일렁이는 것으로 보아 이것 또한 마법이 깃든 물건인 것 같았다. 아티펙트는 어떤 마법이 걸려 있든 간에 보통 가격이 아닌데.
“피임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아…….”
그렇지. 피임은 굉장히 중요하지.
서로 원하지 않은 아기를 가지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었다. 그녀는 진작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에 반성하며 수긍했다.
임신 걱정을 덜게 된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왜 하필이면 왼손 약지에 끼운 것인가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오른손잡이니까 글 쓸 때마다 걸리적거리지 않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긴 하지만.
설마 다른 뜻이 있지는 않겠지.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그때 약을 먹으면 될 텐데 아예 반지로 맞춰 버리다니. 대체 저와 얼마나 더 자주 할 생각이신 거죠? 매일 할 생각인 게 아니고서야.”
비비안은 추파를 던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 신경을 소설에 쏟아부었다.
당연히 그녀가 치대면서 유혹해 올 줄 알았던 에이든은 잠시 굳어 있다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비안은 열심히 집필하기 시작했다. 내용 대부분을 바꿨기 때문에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지만, 쓰다 보니 쓸 만했다.
어차피 초기 설정에서 남주가 다정한 남자였으니 그게 사실 다 연기였으며 가식이었다는 식으로만 고치면 된다. 그게 바로 브론 공작이었으니까. 씬 부분과 갈등, 결말 부분만 살짝 수정해주면 되니 수월했다.
그리고 황제 폐하를 모티브로 한 서브 남자주인공 또한 새로운 등장인물로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여자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지만,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해 그녀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악역이었다.
권력으로 짓누른 뒤 억지로 취하고 범하며 어떻게든 제 곁에 두려고 하는 최악의 남자. 그걸 보다 못한 남자주인공은 결국 여자 하나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게 되고, 황제는 칼에 맞고 죽고 만다.
죽음으로서 비로소 완성되는 조연!
‘원래 서브란 그런 법이지.’
이것 참 즐겁군. 비비안은 실실 웃으며 간략하게 요약하여 노트에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황제는 칼을 맞고 차가운 시체가 되어 버리기 직전에 여주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는 것으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는 편이 더 불쌍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악인은 이승에서 퇴장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여주는 영원히 황제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남주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행복한 결말……. 황제의 측면에서 보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비비안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가차 없었다. 그저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권선징악 최고!’
그런데 비비안이 적는 것을 빤히 들여다보던 에이든이 물었다.
“혹시 폐하를 따로 만나 뵌 적 있으십니까?”
“네, 네? 네니요?!”
“어느 쪽인 겁니까.”
“아주 먼발치서 용안을 뵌 적밖에 없습니다!”
대공 앞에서 황제의 정사를 훔쳐봤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비안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만난 적은 없다고 부정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땀이 다 났다. ‘사실 노트에 적혀 있던 끝내주는 정력을 가진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황제 폐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는 순간, 아무리 상대가 타인에게 무심해도 웃으면서 넘어가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왜요?”
“만약 폐하께 정인이 생긴다면 딱 이렇게 되실 것 같은 느낌이라.”
“……사랑에 눈이 멀어 제멋대로 굴다가 단명하실 것 같다고요?”
무슨 그런 악담이 다 있담. 비비안은 그냥 그날의 정사를 보고 앞으로의 전개를 상상했을 뿐이었는데 친형에게 저런 평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지금도 좀 위험해 보이던데.”
에이든은 무슨 남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도 하나뿐인 제 핏줄인데 평가가 아주 박했다.
‘카르델을 아는 눈친데.’
비비안은 그날 이후 카르델과 황제, 브론 공작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변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만나 봐야겠다.’
비비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노트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뛰어난 캐릭터 분석력에 혀를 휘두르며 ‘황제’를 은근슬쩍 ‘대공’으로 바꿨다.
대공이라면 반역 대신 죄를 뒤집어씌우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남자주인공이 뒷공작으로 사람을 묻어 버리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니 말이다.
‘뭐, 이대로 출간된다고 해도 설마 폐하께서 이 책을 읽어 보시겠어.’
아무리 페르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인식 자체는 좋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세상 말세라면서 온갖 욕을 듣는데 황제가 뭐 하러 시간 내서 관능 소설을 읽겠는가.
‘하지만 겉으로는 욕해도 다들 몰래 사서 보긴 하던데. 판매량만 봐도…….’
비비안은 혹시 몰라 ‘공작’을 ‘백작’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걸로 모든 추문은 해결되었다. 그녀는 뿌듯한 얼굴로 노트를 내려다보다가 에이든을 돌아보았다.
새삼 다시 보았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눈가를 살포시 찌푸렸다. 이크. 비비안은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레이.”
“말씀하십시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제 노트 읽어 보셨으니 이번에 제가 뭘 쓰는지 대충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흠. 그럼, 말이죠. 비비안은 말끝을 늘이며 그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 남자주인공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불량배라…… 고전적이네요.”
“불량배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요.”
“대체 이 여자는 왜 틈만 나면 시비에 걸리는 겁니까?”
“아이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고전적이지만 멋있는 모습을 보여 줄 장면이라고요.”
비비안은 잠시 틈만 나면 시비에 걸리는 연약한 여주에게 잠시 애도를 표했다.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남자든 여자든 쉽게 질투와 미움을 사고 말지.
하지만 괜찮아. 남주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멋있게 널 구해 줄 테니까. 세상 모두가 널 미워해도 남주만큼은 널 지켜 줄 테니까!
비비안은 대체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노트를 쭉 살피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파악하고는 줄줄 읊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남자주인공은 비참한 과거사가 있고, 감정적으로 굉장히 메말라 비틀려 있으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웃음과 다정함, 가식으로 무장한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 맞습니까?”
“네, 맞아요.”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때는 오로지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였고요.”
“정확해요!”
비비안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는 보통 그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순서, 배경, 대사가 두서없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매번 알아보는 것도 놀라울 따름인데 자신이 잡아 놓은 남자주인공 캐릭터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펜촉에 잉크를 찍었다. 그가 하는 말 전부 노트에 적어 내릴 기세였다.
“거울을 보는 듯해 좀 불쾌합니다. 대체 어디서 저 같은 인물을 만들어 온 겁니까?”
“엥?”
비비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비슷한 구석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궤가 완전히 다른데요?”
흑의 대공의 비참한 과거사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또 감정적으로 메말랐다기엔 자주 웃기도 하고 자주 놀려 먹기도 하지 않은가.
그리고 가식이나 내숭을 보일 때도 많긴 했지만 원래 귀족들은 거의 다 그렇지 않은가. 에이든의 다정함은 진심에서 우러나올 때도 분명 많았다.
물론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함께 지내 오면서 느낀 바는 그랬다.
“뭐 온갖 추문을 다 휩쓸고 다니시긴 하지만, 전 제가 직접 보고 겪은 것만 믿고 싶거든요.”
에이든은 잠시 침묵하더니,
“비비안에게는 다르겠죠.”
짧게 웃음을 뱉으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리송한 답을 내놓았다.
“이 남자라면 자신의 본성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불량배를 인적 드문 곳으로 유인한 뒤 잔인하게 죽일 겁니다. 혹은 본인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은 채 타인을 이용하여 죽이거나 하겠군요. 아니면 간섭 자체를 하기 싫어 불량배를 지나쳐 가겠죠. 비비안이 기대하는 멋있는 장면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
“이런 남자주인공은 별로 대중적이지 못합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아주 충격적인 총평이었다.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냉정한 판단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내심 불안해하던 부분을 에이든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들으니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볼을 부풀렸다.
대중적이지 못하면 대중적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천하의 페르디가 고작 그 정도도 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뭐 확실히 새로운 시도긴 하죠. 하지만 세상 모든 잘난 남자들은 다 남자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남자주인공은 어떤 성격이라고 해도 순정남이라는 사실 하나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요.”
“그렇군요.”
에이든은 그녀의 뻔뻔한 말에도 성실히 대꾸하며 좋은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정답을 원하고 꺼낸 질문이 아니라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화두를 던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사랑은 가장 위대한 마법이죠. 사람을 변하게 하기도 하거든요.”
에이든을 제외하곤 단 한 번의 연애 경험도 없는 비비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잘난 척 말했다. 그는 전혀 설득력 없는 소리에도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에 성실히 대꾸했다. 아하.
“사랑에 빠져 평정을 유지할 수 없고,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어느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고. 어때요?”
“글쎄요. 그다지 사랑을 믿는 편이 아니라.”
“물어본 제가 잘못이죠.”
비비안은 자신도 감정에 영 둔한 편이긴 하지만 이 남자보단 나을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중에 남녀의 정사 장면이나 열심히 물어봐야지. 아무래도 사랑을 믿지 않는 에이든의 전문 분야는 그쪽인 것 같았다.
비비안은 조언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이 불량배에게 질질 끌려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돼요. 그리고 그만 눈이 뒤집혀서 다정한 연기고 뭐고 다 잊어버린 채 불량배들을 다 죽여 버리는 거죠.”
“눈앞에서 사람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괜찮은 겁니까?”
음. 현실에 대입하면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발이고 당장 절연이었지만 소설은 괜찮았다. 왜냐하면, 소설이니까!
“당연히 무서워하겠죠. 여자주인공이 슬슬 피하니까 남자주인공은 더더욱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돼요. 어떻게 해야 날 봐 주는 건지 초조해지기 시작하겠죠.”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슬슬 피하는 거로 괜찮은 건가. 에이든은 여자주인공이 이상한 부분에서 강심장이라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그것보다 이 소설의 궁극적인 도달점이 로맨스가 맞는 건가? 스릴러가 아니고? 사랑은 위대한 마법이다 어쩌고 하지만 감정이 식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살인을 밥 먹듯 저지르는 자인데 사랑했던 여자고 뭐고 수틀리면 죽이지 않을까?
과연 흑의 대공에게 겁 없이 다가온 비비안이 만들어 낼 법한 캐릭터였다. 두려움이라곤 일절 없는 것처럼 뻔뻔하게 다가오면서 또 위협하면 오들오들 떠는 간이 없는 토끼.
“게다가 여기서 남자주인공 본인보다 신분이 높은 라이벌까지 등장!”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비비안의 말을 듣고 그는 작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왜, 왜요? 왜 웃어요!”
비웃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뇨. 행복해 보여서요.”
삶의 일부, 아니 전부를 글에 투자하는 여자.
열정에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작가라는 본인의 일에 대단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저 눈을 하고선 입에 담기도 힘든 음담패설을 할 때는 참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야한 소리를 해도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빛나고 있었다.
유달리 볕이 잘 드는 창문 때문인지,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먼지 때문인지, 정말로 그녀의 열정 때문인지.
정말 눈이 어떻게 되어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에이든은 눈을 비벼 볼까 하다가 굉장히 얼빠져 보일 게 분명했기에 그만두었다.
대신 자신을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비비안을 잠시 빤히 내려다보다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어제 하도 물고 빤 덕분에 퉁퉁 부은 붉은 입술이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아니, 진짜 고양이 아닌가?’
비비안은 황당했다. 적극적으로 들이댈 땐 빼더니, 힘들어서 못 하겠다니까 야한 얼굴로 유혹하고, 일에 집중하려고 하니까 괜히 옆에 와서 툭툭 건드리다니.
그는 정말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술을 몇 번 핥다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굳어진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요정의 것처럼, 이 세상의 빛깔이 아닌 것 같은 요요한 눈동자가 마치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지척에서 일렁였다. 그는 붉은빛과 푸른빛이 교묘하게 섞인 신비로운 색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마법이죠. 사람을 변하게 하기도 하거든요. 사랑에 빠져 평정을 유지할 수 없고,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어느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고. 어때요?”
글쎄. 어떨까.
* * *
비비안은 수정구 너머의 영상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당사자에게 허락을 구하고 이 영상을 사 왔을 때만 해도 기대로 가득했는데 괜히 기분만 나빠졌다. 사창가의 광경을 담은 거라길래 보통은 아니겠다 싶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비비안은 감정 없이 짐승처럼 몸만 탐하는 두 남녀를 보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음, 이건 아니야.
기본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봉사한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저건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갑을 관계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사창가의 여자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흠, 따지고 보면 레이도 내게 별 감정 없이 몸을 취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저들과 달랐다. 어디가 다른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으음…….”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만큼 변변찮은 자료가 없어서 오히려 환상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충 체위나 표현 따위만 노트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성들을 위한 자료가 부족해서야. 여자도 같은 사람인데 성욕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관능 소설이 그렇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유가 있었네. 그녀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배부른 소리였다. 만약 에이든을 만나기 전에 이 자료들과 접했다면 이거라도 어디냐고 눈에 불을 켜고 연구했을 것이다.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에게는 절실했으니 말이다.
‘황제의 정사를 훔쳐볼 정도니 말 다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지금 최선을 두고서 차선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최선은 에이든이었다.
역시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게 최고지! 비비안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다가 이런 자료들로는 정작 궁금한 걸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첫 경험이 어떤 거냐고 끊임없이 에이든에게 들이댔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관계를 맺을 때 어떤 고통이, 혹은 쾌감이, 감정이 뒤따르는지 이런 영상들을 보고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니까 지금 비비안이 에이든을 찾는 건 순전히 학구열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전하께선 외출 중이십니다.”
“네? 또요?”
그녀는 집사의 말을 듣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 수정구를 감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택 내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밤마다 어딜 돌아다니는 건지. 밖에 나가는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밤중에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상 보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곧바로 물어볼 걸 그랬다.
“흐음, 어디 가셨는데요?”
궁금한 게 생겼을 땐 그 즉시 해결해야 속이 풀리는 법. 만약 그가 간 곳이 가까운 곳이라면 비비안은 그곳까지 찾아갈 의향이 있었다. 물론 그가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외출한 게 아니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지난밤과 같았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
수상하다. 매우 수상했다.
‘집사에게 알리지도 않고 밤마다 사라지는 흑의 대공이라니.’
누가 들어도 수상하지 않은가.
대공의 저택으로 발을 들인 날부터 비비안은 자신의 의심이 완전히 씻은 듯이 사라지길 바랐지만, 날이 갈수록 증폭될 뿐이었다. 단지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었을 뿐이지.
그녀는 왠지 오늘만큼은 애써 외면하며 넘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의 눈이 가늘어지자 집사가 시선을 깔았다. 언뜻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더는 물을 수가 없어진 비비안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어차피 물어도 말해 주지 않겠지.
그래도 혹시나 하고 슬쩍 물었다.
“뭐 하러 가셨어요?”
“몸을 단련하러 가신 듯합니다.”
“이 달밤에?”
생각보다 선뜻 대답하기에 놀랐는데 그 내용은 더 놀라웠다.
“단련이 목적이면 저택 내에 있는 수련장을 이용하면 되지 왜 굳이 외출을…….”
비비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대공이 악귀같이 웃으며 사람들을 살육하는 장면을 떠올랐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저어 방금 떠올린 것을 털어 버렸다. 작가라는 족속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서 문제였다.
‘아니야! 그거 아냐! 잊어!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이미 한 번 떠올린 것을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이든이 소문의 피에 취한 살인귀라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도덕과 인성을 운운하기 전에, 그는 처리하는 게 귀찮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을 게 뻔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런 사람이 굳이 밤마다 나갈 이유가 있나?’
그것도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말이다.
차라리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찾으러 나갔다고 하면, 이렇게 의심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든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방으로 돌아가 발 뻗고 잠들었겠지.
‘그러고 보니 몸이 상처투성이였지.’
비비안은 욕실에서 언뜻 보았던 그의 몸을 떠올렸다. 영광의 상처로 넘길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처참할’ 지경의 흉터.
지금 이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비비안은 기억을 더듬다가 집사가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느끼고는 정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 일에 대해 자신이 깊게 파고들 권한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집사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그를 지나쳐 빠르게 어두워진 복도를 걸었다.
한밤중이라 그런 건지, 벽 군데군데 매달린 희미한 횃불 외에는 앞길을 밝힐 만한 게 달빛밖에 없었다.
비비안은 달을 빤히 응시하며 걷다가 넘어질 뻔한 이후로 얌전히 앞을 보며 발을 내디뎠다. 처음 대공의 저택에 왔을 때처럼 흥미롭게 이곳저곳을 살피지는 않았다.
안 가 본 곳이 없었기 때문에 방 대부분이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위험해.’
비비안은 생각했다.
그녀의 본능은 대공을 둘러싼 비밀이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적신호를 내보내고 있었다. 어서 이 위험한 일에 손을 털어 버리고 예전으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물론 이 적신호는 처음 에이든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이 저택으로 향했을 때부터 계속 울리던 것이었다.
‘도망칠까?’
적당히 놀다가 끝낼 생각이라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몰랐다. 더 미적거리면 아예 발을 뺄 수 없게 될 테니까.
비비안은 최근 들어 에이든의 태도가 묘하게 변한 것을 알고 있었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확실히 날 선 분위기가 부드럽게 변했다. 마치 경계를 푼 고양이처럼 말이다.
‘왜 계속 고양이로 비유하고 있지.’
비비안은 자신이 계속 덩치 큰 사내를 작고 여린 짐승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역시 그에게는 고양이가 어울렸다.
모든 것에 노련해 보이지만 의외로 요령 없고, 작은 일에도 귀찮아하며, 혼자 구석에 박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역시 떠날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이야말로 에이든에게 단단히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벽에 쾅 이마를 박았다.
모르겠다. 비비안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에게 이끌렸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빠져들다가 어느샌가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동경인지, 아니면 모성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미 글러 먹었다는 것은 잘 알겠다. 뭐든 간에 전처럼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정해진 선로를 따라서 달리는 기차처럼 질주하는 것밖에 없었다.
‘와, 내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봐.’
자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한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대체 당신은 뭐예요? 왜 그런 소문에 시달리는 거지? 왜 몸에 그렇게 처참한 흉터를 지녀야 하고, 밤마다 어디를 나가는 거야? 무엇 때문에? 혹시…….’
비비안은 속으로 중얼거리다 말고 흠칫 걸음을 멈췄다. 호기심 때문에 저택 내부를 헤집듯이 돌아다닌 그녀도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저택 지하실.
지하실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전에 에이든이 푸른 수염을 들먹이며 놀려 댔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는 그게 농담일 뿐이었다고 말했지만, 비비안은 ‘금기’가 나온 이상 되도록 그것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보든 책임질 각오가 되어있지도 않았고, 어쩐 이유에선지 그도 되도록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말이다.
비비안은 저택 지하로 가는 계단을 흘낏 쳐다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심연처럼 어둡기만 한 광경은 굉장히 불길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저택 지하의 금기, 그리고 밤마다 사라지는 흑의 대공.’
어린 시절, 비비안은 동화를 읽으며 여자주인공을 욕했다. 푸른 수염이 열쇠 꾸러미를 주면서 ‘들어가지 말라’고 한 건 누가 봐도 널 시험해 보겠다는 고약한 심보 아닌가. 정말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면 지하실을 단단히 잠가 놓고 열쇠는 푸른 수염 본인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이제야 여자주인공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푸른 수염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는 저택 지하로 들어가, 단지 확인받고 싶었던 거겠지. 사랑하는 푸른 수염이 그녀가 믿고 있는 그대로 결백하기를 말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미치광이 살인마였지만.
‘만약 이게 동화일 뿐이었다면 굉장히 흥미진진했을 텐데 말이지.’
비비안은 왠지 오싹한 한기가 들어 양팔을 쓱쓱 문질렀다.
지금이라도 당장 계단에서 눈을 떼고 도망치듯 뛰어가고 싶었지만, 발은 땅바닥에 붙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 또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콕 박힌 채 떨어지질 않았다.
‘그, 그만둬. 미친 짓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적신호가 미친 듯이 울리다 못해 온몸이 박동하듯 쿵쿵 뛰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시끄러운 심장 소리 때문에 머리까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짚은 뒤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용인은 물론 쥐새끼 한 마리도 없다.
땅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울릴 것처럼 고요했다. 차라리 누가 있기를 바랐는데, 이러면 내려갈 수밖에 없잖아.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이기라도 하지 난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비비안은 울상을 지으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얼른 손등으로 훔쳐 냈다. 이러다 심장이 터져 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죽던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난간을 더듬으며 발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눈이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시야 끝에 지하실 문이 어슴푸레 보였다.
금기가 걸린 지하실의 문치고는 꽤 고풍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대공 저택에 달린 문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어째 저걸 보니 열어도 별일 없을 것 같다는 희망이 불쑥 생겨났다.
비비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꼭 이렇게 일이 잘 풀리다가 나대서 죽는 사람이 있지. 그게 바로 나였다니.’
슬쩍 등 뒤를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누가 갑자기 어깨를 턱 하고 잡는다거나 하는 스릴러 소설 같은 연출은 없을 듯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가 나지 않게끔 문고리를 조금씩 돌렸다.
끼긱, 끽, 끼익……. 철컥.
잠겨 있었다.
‘역시 그렇겠지.’
비비안은 푹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야 당연히 잠겨 있겠지,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극도로 긴장한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다음에 땀 때문에 축축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충 치맛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고 문고리에 묻은 땀도 소매로 훔쳐 내고 있을 때였다.
크르르르르…….
명백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비비안은 그대로 굳은 채로 창백하게 질렸다. 몸이 허약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거품을 물고 기절했을 것이다.
‘개, 개를 키우나?’
늑대? 사자? 표범?
그녀는 얼음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이 알고 있는 맹수의 울음소리를 전부 다 대입해 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울림이…….’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다. 저게 과연 같은 생명체가 내는 목소리란 말인가. 여태 이곳에 지내면서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문에 바짝 귀를 댔다.
정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기어갈 듯했지만, 올라갈 때는 순식간이었다. 비비안은 쫓기는 것처럼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올라온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뭐야. 방금 그거, 대체 뭔데?!’
환청인가? 환청이겠지?
‘젠장, 이걸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뚜벅뚜벅. 침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느려졌다.
물어볼 수 없다. 평생, 아무에게도. 지하로 향하는 문은 당연하다는 듯 잠겨 있었으니까.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건가.’
푸른 수염은 신뢰를 시험하기 위해 열쇠 꾸러미를 건넸는데, 비비안은 시험조차 받지 못했다.
에이든은 그녀에게 ‘지하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애초부터 당연하다는 듯 잠겨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믿은 적도 없다는 듯이.
신뢰를 쌓을 만큼 오래 본 것도 아니고, 멋대로 지하실 문을 열어 본 건 자신이 잘못한 것이었지만, 우울한 생각들로 계속 축축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비안은 실망하고 있었다.
애초에 뭘 기대했다고 실망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대체 이게 뭐야.”
그녀는 제멋대로 구는 마음 때문에 더더욱 심란해지고 말았다. 에이든을 믿지 못해 저택 지하를 어떻게든 확인하려는 자신과 비비안을 믿지 못해 저택 지하 문을 단단히 잠가 버린 그는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서로 진짜 연인인 것도 아니고 이쪽은 정보를, 저쪽은 소설을 원하는 계약 관계 아닌가.
‘아니지. 계약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신뢰 아니야?’
비비안은 재빨리 합리화를 해 봤으나, 계약 관계라고 해서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낼 필요는 없단 결론이 나왔다. 그녀 또한 에이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얘기한 건 아니지 않은가.
‘아, 몰라 머리 아파! 그냥 대놓고 물어봐?’
대관절 흑의 대공이라는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하고. 하지만 그에게서 대답을 회피하는 답이 돌아오거나, 딱 잘라 알 필요 없다는 거절을 들으면 그건 그거대로 상처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게 왜 상처인데.’
가벼운 마음 아니었냐고. 자기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겠다. 비비안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잠재우고 이마를 짚었다.
‘밤이라서 더더욱 쓸데없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 같네. 일단 잠이나 자야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갑자기 무언가 단단한 것에 몸이 부딪히고 말았다. 어딘가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악!”
비비안이 퉁 하고 튕겨 나가기 전에, 그녀와 부딪힌 단단한 것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비비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뭐, 뭐야. 레이가 왜 여기 있어요?”
“그야 제 침실 앞이니까요.”
“헉, 내가 어느새 여기에…….”
너무 놀란 그녀는 생각을 그대로 입밖에 뱉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그만 본인의 침실을 지나쳐 복도 가장 끝 쪽에 있는 대공의 침실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에이든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비비안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침실에 몰래 숨어들려다가 본인에게 딱 걸린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억울했다.
변명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비비안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정신을 빼놓고 걷다 보니 여기네요.”
“절 찾으셨습니까?”
“다른 목적으로 찾은 거 아니거든요? 소설 때문에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랬어요.”
“아무도 혼내지 않습니다, 비비안.”
“아, 아니라니까요!”
비비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비비안은 살짝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밤기운의 힘을 빌려 과감하게 물었다.
“피 냄새가 나네요.”
의식하기 시작하니 짙은 혈향이 그의 몸 곳곳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비비안은 자신이 말하고도 긴장이 되어 슬쩍 제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어슴푸레한 달빛에 음영 진 탓인지 에이든은 평소보다 더욱 차가운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푸른색 눈동자는 마치 맹수의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반짝였다. 이 순간만큼은 나른한 고양이가 아니라, 먹이를 눈앞에 둔 한 마리의 흑표범 같았다.
그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제 피는 아닙니다.”
피 냄새가 아니라고 발뺌할 줄 알았더니. 에이든은 쓸데없이 솔직한 구석이 있었다.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본인 피가 아니라면 남의 피라는 것이고, 피 냄새가 몸에 밸 정도라면 대체 어디서 뭘 한 거란 말인가.
설마 자신이 상상했던 그 끔찍한 학살의 풍경이 사실이었던 걸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서늘하게 굳은 얼굴을 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비비안은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잡고 결론을 내렸다.
‘우린 서로를 신뢰하지 못해.’
고작 그가 태도를 바꾼 것만으로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러면서 육체적으로 서로 끌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비비안은 희게 질린 얼굴로 허허 웃었다. 마치 필사적으로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에이든은 자신의 손끝에서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녀의 몸을 느끼고는 서서히 손에 힘을 풀었다.
“밤마다 어디 나가는지 말 안 해 줄 거예요?”
“…….”
그는 말없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비비안은 그 시선에서 대답을 읽었다.
에이든은 절대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어쩐지 힘이 탁 풀리는 느낌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들이 지금까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던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예정된 결말이지.’
현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애초에 비비안은 그에게 신뢰를 쌓고 모든 걸 털어놓을 만큼의 존재가 아니었다. 에이든 또한 그녀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그런 당연한 일이, 비비안은 마치 가슴 한편이 꽉 막힌 듯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다. 그녀는 다시금 내면의 경고를 떠올렸다.
‘관계를……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어.’
새벽은 감성이 깨어나는 시간, 이성이 흐려지는 시간이었다. 이 모든 혼란은 전부 새벽 감성에 취했기 때문이겠지.
“여쭤볼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
“답해 드릴 수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이제 레이가 숨기고 싶은 걸 파고들진 않을 테니까요.”
비비안은 덤덤하게 답했고 이번에는 에이든이 표정을 구겼다. 완벽하게 선을 그어 버리는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에이든이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취하곤 하는 태도였다.
늘 목표를 향해 돌진밖에 모르는 비비안이 밀쳐 낼 줄은 몰랐기에 그는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졌다. 조금 더, 파고들 줄 알았는데.
‘파고들어 주기를 바란 건가?’
에이든은 무의식중에 생각하고는 화들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완전히 놓아 버렸다.
‘이게, 무슨…….’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숨기기 위해 침실 문을 활짝 열고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비비안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검을 옷장 속에 처박아 두고 문을 닫았다. 피 냄새가 나는 원인이기 때문이었다.
비비안도 그것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 그러는 새에 에이든은 외출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내보긴 했지만 정말 당당하네요.”
“이제 와서 내외하십니까?”
그녀는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바로 그 대리석같이 탄탄한 완벽한 근육질의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였다.
‘이건 분명 육체적인 끌림이야.’
사랑이라고 착각해선 곤란했다.
그동안 바람 불어오는 대로 정신없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들이 서로 신뢰가 없단 걸 깨닫자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관계로 확실히 선을 그어 둘 필요가 있었다.
‘영상구에서 봤던, 사창가의 풍경처럼.’
미련을 털어 내기 위해 극단적인 예시까지 드니까, 어째 괜히 눈물이 나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옷을 다 갈아입은 에이든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단련’이라는 그의 말대로 밖에서 몸을 열심히 움직이는 일을 했는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자신이 할 말을 고르던 비비안은 전에 덴드로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속궁합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
“부정은 않겠습니다만…….”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이 들려오자 에이든은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굉장히 심각했다.
비비안이 그동안 그렇게 해 달라고 졸랐던 목적은 결국 ‘어찌 됐든 한번 하고 싶다!’였다. 가벼운 마음이었다.
경험을 통해 직접 자신의 느낌을 담아 소설을 완벽하게 완성 시키겠단 사명감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근본은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렇게 막상 해 보니 얻게 된 건 생각보다 무거운 것들뿐이었다.
“얼굴, 몸매, 테크닉 다 상관없을 정도로 죽여 주는 상대가 있다니까. 내 몸과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넣는 상상만 해도 싸 버릴 것 같은 상대가. 성격이 안 맞아서 관계가 틀어지고 휘청거려도 절대 못 헤어지지 그런 여자랑은. 다시 없을 쾌감을 안겨 주거든.”
그때 그 말을 더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
설마 첫 관계 첫 남자가 바로 그 상황에 해당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덴드로의 말대로 비비안은 지금 당장 이 저택을 뛰쳐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에이든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쾌락을 내가 잊을 수 있을까.’
그와 평범한 연인 사이였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속궁합이 맞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 벼락 맞을 확률만큼이나 희박한 확률이었으니까.
비비안은 에이든과 계약이 끝난 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예전처럼 안아 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비비안의 질문에, 에이든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레이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깔끔하게 끝내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저는…….”
“절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
“저도 그래요.”
사랑할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하기 두려운 것이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불쌍했다. 상대는 감정 소모하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절대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는 흑의 대공이었으니까.
상처받기 싫었다.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그때마다 끔찍하게 괴로운 건 마음의 상처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친척들에게 갖은 모욕과 학대를 당했던 비비안은 사람을 대할 때 본능적으로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했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연인 계약을 취소하고 싶었다는 뜻이에요. 서로 속궁합이 맞아도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자, 뭐 그런 뜻이죠.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비비안은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에이든의 평온한 표정이 서서히 험악한 기운을 뿜어냈다.
판이해진 분위기 때문에 비비안은 공기가 무거워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손끝을 살짝 떨었다.
“다른 사내를 찾으시겠다는 뜻입니까.”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돼요?”
잠시 놀라 호흡을 멈췄던 비비안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그건 나중 일이고…….”
“그 몸을 이렇게까지 만족하게 해 줄 사내가 어디 더 있을 것 같습니까?”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왜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당연히 없지. 현생은 물론이고 다음 생까지도 찾을 수 없을 거 같은데.’
비비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에이든이 더 자신감이 넘치면 재수가 없었기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 몸을 이렇게까지 만족시킬 여자도 저밖에 없을걸요.”
“…….”
에이든은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비비안을 지그시 응시했다. 어이없지만 맞는 말이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논점 흐리지 마세요. 다른 남자가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비비안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침대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이불을 꾹 움켜쥐고 있는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작고 보드라운 온기가 손등 위에 내려앉자 에이든은 흉흉한 기색을 지우고 움찔 떨었다. 동글동글 강아지 같은 보라색 눈망울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표정, 사랑스러운 눈빛과 달리 툭툭 내뱉는 잔망스러운 말들은 비수가 따로 없었다.
“진지한 관계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말한 건 대공 전하셨는데요.”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습니다.”
“불건전한 연애 외에는 용납 안 하신댔죠.”
“기억이 굉장히 왜곡된 것 같은데.”
에이든은 좀 억울했다. 심지어 호칭도 레이라는 애칭에서 급격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공 전하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목이 콱 막힌 듯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괜히 애꿎은 미간만 구긴 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갑자기 눈가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전히 흉흉한 기색은 지워 내지 않은 채로.
푸른 시선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났다. 고귀한 귀족의 가면을 뒤집어쓴 짐승 같은 웃음이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라도 생기신 겁니까?”
공기 중에 녹아든 살기에 살갗이 따끔거리는 듯했다. 있다고 하면 찾아내서 죽일 기세였다.
“만난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생겨요?”
“그럼, 저로 만족하지 못하시는 건가?”
“제가 섹스하고 싶어서 아무나 붙잡고 하룻밤 보내는 성향은 절대 아니거든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동안 계속 순결 서약에 묶여 있지 않으셨습니까.”
비비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 보게?
“섹스에 미치지는 않았어요. 소설에 미쳤다면 몰라.”
“소설을 위해서라면 섹스든 뭐든 다 하신다는 뜻이잖습니까.”
표정으로 보아하니 에이든은 정말 그녀가 소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분명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뭐든 다 할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어요!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섹스해 달라고 계속 집요하게 군 건 대공 전하가 계속 절 피하니까 제가 매력이 없나 싶어서 그런 거고…….”
다른 남자가 아닌 레이라서…….
‘아니,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하는 거지?’
비비안은 말하던 도중에 의문을 느끼고 자신에게 반문했다. 하마터면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꺼낼 뻔하지 않았는가.
이게 다 에이든이 뜬금없이 다른 남자 얘기를 화제로 꺼내서 그런 거였다.
다른 남자라니! 그러고 보니 욕실에서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저런 비슷한 말을 했었던가.
대체 왜 저런 말이 나왔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섹스하자고 덤벼들었을 때, 홧김에 계속 피하면 다른 남자 만날 거라는 말을 꺼냈던 것도 같았다. 물론 도발의 의도일 뿐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녀가 소설을 위해서라면 아무에게나 가서 유혹하고 다리를 벌릴 거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사가 뒤틀린 비비안은 그의 말을 더욱 꼬아 듣기 시작했다.
그런 착각도 기분이 나빴지만, 무엇보다 에이든이 갑자기 소유욕 강한 애인처럼 구는 게 가장 비참했다.
어차피 사랑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자신을 헤픈 여자로 보고 진지해질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으면서 저런 태도를 보이면 이쪽이야말로 착각하게 되잖아. 혹시나 나를 좋아해서 질투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런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다가는 결국 괴로워지는 건 자신이었다.
‘내가 대체 카르델이랑 뭐가 다르냐.’
사람의 마음은 소설처럼 머리로 써 내려갈 수 없는 모양이다. 비비안은 애처롭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튼…… 제가 아무리 지조가 없어 보여도 이 남자 저 남자 막 만나고 다니진 않아요.”
“…….”
“전 앞으로도 대공 전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확실히 정상적이지는 않잖아요.”
“그래야 비비안의 마음이 편해지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단호하게 답했다.
“어차피 감정을 배제할 거라면 연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굳이 우리 관계에 명칭을 붙이자면 섹스 파트너인 거죠.”
“하.”
잠시 에이든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조 없이 아무 남자나 막 만나고 다니지는 않는다면서 섹스 파트너 제안이라.
그가 웃자, 비비안은 잠시 멈칫 입술을 달싹였다. 에이든의 얼굴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일그러졌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박동이 제멋대로 기대를 품고 말았다. 번쩍하고 스치는 마지막 희망처럼, 혹시나 그가 자신이 관능 소설 작가인 페르디라는 것 말고도 다른 매력에 끌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위태로운 희망은 서서히 크기를 키웠다. 아주 미묘한 차이라도 정말로 호감을 품게 된 건 아닐까. 언젠가 연인의 감정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상대가 흑의 대공이라는 걸 대체 몇 번 속으로 곱씹어야 미련이 사라질까. 학습능력이 없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비비안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에게 묻고 말았다.
“전에 소설을 완성하면 그대로 관계를 끝내자고 했죠. 그거 아직도 유효해요?”
비비안의 소설은 대체로 단권이라 장편보다는 중단편에 가까웠고, 아마 이번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길어야 한 달이에요.”
그 말은 곧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 되었다. 에이든은 그녀가 그 말을 굳이 언급해서 확인시켜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은 자신을 너무 믿었다. 본인을 둘러싼 모든 일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성은 이대로 그녀를 놓아주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썩, 아니 굉장히 내키지 않았다.
‘후회하고 있는 건가…….’
에이든은 제 속을 뒤집어 대는 불쾌한 감정을 털어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속은 더 새까맣게 타올랐다.
‘섹스 파트너.’
그들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는 그 단어를 소리 없이 혀로 굴려 보다가 아득 씹었다.
왜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걸까. 애초에 먼저 호감이 있다고 멋대로 다가온 게 누군데. 연인이 되어 달라 고백한 게 누군데 멋대로 그만둔단 말인가.
그 와중에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찬 건 비비안의 말 한마디였다.
‘절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래요.’
딱 잘라 없다고 했다. 설마 지금 당장 떠나고 싶다는 뜻인가.
에이든은 상황도 잊고 울컥하고 말았다. 심지어 비비안은 연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곁에 묶어 둘 수 있는 구실조차 없애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을 굳힌 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희망 따위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그가 자신을 놓아주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다고 말한다면 도망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섹스 파트너?”
에이든은 재차 되물었다. 그에게서 비릿한 광기의 냄새를 맡은 비비안은 영문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흠칫 굳었다. 까맣게 달아오른 눈빛과 다르게 그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비비안의 몸도 마음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제게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면 일부러 놓아주는 척을 할 수는 있었다. 물론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든 뒤에.
‘그것조차 불가능하다면, 아무에게도 눈 돌리지 못하게 완전히 망가트려서라도…….’
에이든은 뒤늦게 자신이 꽤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솔직히 지금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지금 난 이성적인 건가? 아니, 아닌 것 같다.
‘왜?’
모르겠다.
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유효합니다. 제가 인정한 최고의 소설을 쓸 때까지라고,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죠.”
지독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 느긋하게 말끝을 늘였다.
“……그래서 비비안은 지금 쓰는 소설이 완벽하다고 확신하십니까?”
그의 발음은 여느 때처럼 완벽했고 어투는 정중하고 또 신사적이었다. 비비안은 나른하게 귓가를 울리는 그의 말이 무겁고 잔혹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잔혹하다니. 이따금 그를 흑의 대공이라는 이유로 꺼림칙함을 느끼긴 했지만, 이토록 생생하게 위험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오싹함에 숨을 멈추고 완전히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옆얼굴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왜, 왜 갑자기. 비비안은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 않자 당황하고 말았다.
“저런 겁먹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에이든의 거친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쓸었다. 땀을 닦아 주는 다정한 행동이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늘 무심했던 그의 벽안이 들끓는 용암처럼 격렬한 감정을 담고 일렁였다.
그것도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의 감정인 것 같았다.
비비안은 지금 상처를 받아야 하는 건 자신인데 왜 그가 저런 얼굴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억울했다. 억울한데 너무 무서워서 입만 달싹일 뿐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무방비한 상태로 사자의 입안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인간은 모두 완벽하지 않죠…….”
비비안은 적나라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하지만 푹신한 매트릭스 때문에 몸이 비틀거리는 사이, 에이든이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놔주세요!”
“왜 거부하는 거지? 섹스 파트너라면 전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연인도 아닌데.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반항하는 그녀를 앉혀 버렸다. 그리고 버둥거리는 손을 그대로 꼭 감싸 쥔 뒤 느릿한 동작으로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쪽.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입술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붉은 입술이, 입술을 스치는 붉은 혀가, 쾌감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허덕이던 그날의 기억을 끌어 올렸다. 그녀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라와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에이든은 눈가를 둥글게 휘며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완벽한 소설을 완성해 내기 위해서잖아, 페르디.”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그가 비비안을 바짝 당겨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서로의 코가 맞닿았다.
지척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엉덩이와 음부 위에서, 완전히 단단히 발기한 그의 것이 비벼졌다.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비비안은 놀라 숨을 들이켰고 에이든은 그 숨결마저 삼켜 버렸다. 그녀의 숨결이 없으면 질식해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는 듯 모조리 다.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혀가 입천장을 순식간에 훑고 목구멍 근처까지 치고 들어왔다. 입안에 타액이 차오르자 그가 그녀의 혀를 깊이 빨아들였다.
비비안은 코끝으로 작게 신음을 흘렸다. 에이든은 그녀의 영혼까지 먹어 치우려는 건지 게걸스럽게 타액을 삼켰다. 집요했다. 그가 전투적으로 달려들 때마다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이게 키스인지 짐승의 영역 표시인지 모르겠다.
절박함? 아니 그것보단 소유욕에 가까웠다.
짙고 어두우며 질척거리는 집요한 감정이 비비안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몸 밖으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빛에서도, 표정에서도, 행동에서도 아주 뚜렷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지긴 싫지만 그렇다고 남 주기도 싫은 심리인가?’
비비안은 서로의 혀가 비벼질 때마다 몸을 움찔 떨면서도 울컥 짜증이 일었다.
키스만 했는데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솔직하게 반응하는 예민한 몸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하필 최악의 상대와 속궁합이 잘 맞다니. 마음 같아선 이제 그만하라고 밀어내고 싶은데 몸은 그때의 자극을 기대하고 들썩이고 있었다.
속옷 바로 밑에 바짝 붙어 있는 그의 하체도 그녀의 음란한 상상력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박동하는 단단한 남성과 볼록한 돌기가 스칠 때마다 참지 못하고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비비안은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굉장히 애매한 자세로 울상을 지었다. 에이든은 완전히 그녀의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한 건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혀를 농염하게 움직였다. 질척이는 키스는 그녀를 이지를 녹진하게 늘어트렸다. 비비안의 성감대를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의 키스도 손놀림도 거침이 없었다.
새하얀 슈미즈가 스르르 어깨를 타고 내려갔다. 어깨와 가슴골은 물론 딱딱하게 맺힌 유두까지 순식간에 드러났다.
어차피 저택 안이라고 편한 차림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에이든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포장지처럼 그녀의 옷을 순식간에 벗겨 냈다. 비비안은 그의 혀와 어깨를 밀어내며 반항해 보았으나, 그는 우습다는 듯 그녀의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아!”
“귀엽게 굴지 마.”
에이든은 비소하며 그대로 그녀의 옷자락을 찢었다. 드드득 하고 천 자락이 뜯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질 좋은 고급스러운 옷감이 순식간에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었다.
‘차력쇼?’
비비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슈미즈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벗느니 못한 굉장히 흉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는 길게 뜯어 낸 천을 그녀의 눈 위에 덮고 그대로 묶어 버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된 비비안이 눈가를 더듬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뭐예요!”
“쉿.”
“쉿이 아니잖아!”
“벗으면 손도 묶어 버리겠습니다.”
“이런 악당!”
익은 문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대드는 게 굉장히 귀여웠다. 향할 곳을 잃고 머리를 맴돌던 거친 감정이 조금 누그러질 정도로.
에이든은 상황도 잊고 결국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 버리고 말았다.
자꾸 듣기 싫은 말만 하는 저 입을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는데, 한번 약해진 마음은 다시 전처럼 강렬하게 타오르지 않았다.
악당이라니.
“그걸 이제 안 건가.”
에이든은 그렇게 답하며 그녀의 양손을 붙잡아 올려 버렸다. 그녀의 입술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혀로 길게 핥은 뒤 서서히 고개를 내려 목덜미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로 턱 아래를 가볍게 깨물자 비비안의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이젠 하다 하다 턱을 깨문다고 반응하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에이든이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지, 뭘 하는 건지 볼 수가 없었다. 그냥 가볍게 툭 건들기만 해도 온몸이 과민반응을 보이며 움찔 튀었다. 타액으로 젖어 버린 목덜미가 차갑게 식어 가는 감촉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비비안이 겁에 잔뜩 질린 토끼처럼 가만히 있자 그는 순순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젖은 숨결이 귓가에 닿더니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진정한 작가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읏.”
쿵쿵 귓가를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 치맛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순식간에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도 하는 거친 숨결. 예민해진 몸을 예고도 없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가 반응하는 곳마다 집요하게 건드리는 손길.
에이든은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는 지휘자처럼 농염한 손길로 그녀를 연주했다. 몸 이곳저곳에 피어나는 뜨거운 열기를 이끌고 휘둘렀다. 쾌락의 극치로 자연스럽게 유인했다.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자극을 각인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도발에 능숙한 뜨거운 손이 등줄기를 훑고 내려왔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새겨 두십시오. 바로 여기에.”
순식간에 지배당한 비비안은 완전히 그에게 몸을 맡겨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완전히 넝마가 된 슈미즈를 완전히 벗겨버렸다. 속옷 기능을 하던 새하얀 천 자락의 끈도 굉장히 능숙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풀러 바닥에 던졌다.
갑자기 닥친 한기에 비비안이 바르르 떨었지만 단단하고 뜨거운 손길이 몸을 순식간에 데웠기 때문에 추위는 순식간에 잊혔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유륜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다가 크게 베어 물고 쭉 빨아들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천천히 퍼진 열기가 온몸을 달궜다. 어깨나 등, 허벅지, 가슴 주위를 맴돌던 손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양쪽 엉덩이를 한가득 움켜쥐었다.
“하으…….”
안절부절못하던 비비안은 애단 신음을 흘리다가 결국 사내의 뜨거운 성기 위로 자신의 음부를 비비듯 마찰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두드리는 강렬한 쾌감을 떠올리며, 금단의 과실에 손을 대 버린 죄인처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안은 사내의 어깨 근육이 단단해지며 잔뜩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숨을 뱉어 냈다.
그와 동시에 몸이 공중에 뚝 떨어졌다. 갑자기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비비안은 순간 호흡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파르르 떨었으나, 등 뒤에서 침대 시트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안심했다.
아마 자신은 침대 위로 던져진 것 같았다. 상체만 푹 꺼진 느낌인 걸로 보아 에이든이 지금 자신을 덮치듯이 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바스락대는 소리는 아마 황급히 자신의 옷을 벗는 소리 같았다.
이게 과연 안심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비비안은 이 끓어오르는 열기를 어떻게든 잠재워 줄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손을 더듬어 사내의 목에 팔을 두른 뒤 본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아 줘요.”
말 그대로 꼭 끌어 안아 달란 뜻이었다.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건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서 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은 에이든을 미치게 하기 충분했다.
소유욕이 사라진 자리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이 여자를 지금 당장 내 밑에서 울게 하고 싶은 잔인한 지배욕이었다. 그가 욕망으로 탁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설을 위해 이런 짓도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는 목에 둘린 손을 풀어내고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어, 어디 가요?”
비비안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목덜미 언저리에 있던 뜨거운 열기가 섞인 숨결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가슴에서, 그리고 배에서, 그리고 허벅지 사이에서 차례로 느껴졌다.
에이든의 숨이 닿는 곳마다 비비안은 움찔거리며 떨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바짝 힘을 줬지만, 그는 아주 손쉽게 그녀의 양다리를 잡아 벌렸다.
비비안은 무방비하게 활짝 드러난 은밀한 곳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졌다. 분명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까부터 갑자기 말이 없어진 에이든도 그녀가 불안하게 하는데 한몫했다.
비비안이 알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가 시선이 따끔거리게 느껴질 정도로 어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건지 말이다. 그녀의 얼굴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거길 왜 빤히…… 꺅!”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술을 벌리던 비비안은 이내 비명을 지르듯 신음을 뱉었다. 그가 갈라지기 시작한 꽃잎을 입술로 물고 강하게 빨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가기도 전에 뾰족하게 세워진 혀끝이 두 잎 사이를 가르고 속살을 파고들었다. 비비안은 에이든의 검은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며 허리를 꺾었다. 그는 그녀의 둔덕을 손가락으로 잡아 벌린 뒤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혀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내부를 헤집었다.
“아, 하응, 하!”
쾌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자극은 없었다. 오히려 닿을 듯 말 듯 한 간질간질한 감각에 애가 탈 지경이었다. 그녀의 음부는 입구를 타고 계속 찔끔거리며 애액을 뱉어냈다. 축축하게 벌어진 채 노골적으로 다음을 요구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혀를 끊임없이 죄고, 풀기를 반복하는 속살을 집요하게 건드리고 빨았다. 청각과 촉각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그녀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추웁, 춥 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아, 으응! 그, 그만! 하악!”
그의 혀가 어느 부분을 스치자 비비안은 마치 척추를 관통당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느꼈을 게 뻔한 에이든은 일부로 그곳을 스치듯 피하며 애먼 곳만 툭툭 건드리며 희롱했다.
비비안은 허리를 어정쩡하게 세운 채 파들파들 떨다가 그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얼떨결에 수풀에 코를 박게 된 에이든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몸이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말이다.
“참아.”
장관이었다. 그는 완전히 활짝 만개한 꽃잎에 마지막으로 쪽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입과 몸이 완전히 따로 노는군.”
“하아, 하아.”
“몸은 이렇게 날 원하고 있는데…….”
지금 비비안에게는 ‘앗, 그거 관능 소설 단골 대사잖아요.’ 하고 산통을 깰 여유가 없었다.
에이든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단단하게 바짝 서 있는 클리토리스 위를 닿을 듯 말 듯 덧그렸다. 잔뜩 예민해져 있던 그곳이 찌르르 울렸다.
비비안은 발을 오므렸다가 펴길 반복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간질간질 애타는 감각에 죽을 것 같았다. 그냥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문질러 줬으면 좋겠다. 이젠 아파도 상관없으니까.
“으읏.”
머리에 열이 올라 펑 터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비비안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허리를 들썩이다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얼마 안 가 에이든에게 손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만져 줘요. 아니 그냥 박아 줘요.
원색적이고 저급한, 노골적인 수많은 말이 머리를 핑핑 돌았다. 하지만 정작 입 밖에 나온 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눈, 흑, 흐읏! 눈에 이거라도 풀어 줘요.”
“아니, 눈 가린 채로 말해.”
“대체 왜…… 아!”
에이든은 안절부절못한 채 몸을 들썩이는 그녀에게 낮게 읊조렸다.
“그때 네가 한 말 기억나? 감정 이전에 몸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그랬었잖아.”
“으, 흐으.”
“보지도 머리로 생각하지도 말고 오로지 몸으로 느껴. 지금 네 몸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구지?”
그녀의 몸이 쾌락에 약하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었다. 다른 사내를 알기도 전에 완전히 몸으로 길들이고 세뇌한다니. 에이든도 이게 굉장히 정상이 아닌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 모든 게 충동이라는 점에서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은연중에 묻어난 건 조급함이었다. 빨리 말해.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는 위협하듯 낮게 울었다.
“지금 네 몸이 원하고 있는 게 누구냐고 묻고 있어.”
까만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비비안이 움찔 떨었다. 꺼떡거리는 뜨거운 불기둥이 그녀의 음부 위를 거칠게 문지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속살을 파고들어 올 것처럼 매우 크고 단단했다. 이렇게 될 지경까지 꾹 눌러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에이든은 지금 굉장히 안달을 내며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확인받고 싶어 했다. 필사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소유욕의 일종인가 싶었다.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비비안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인내심과 자신의 인내심 중 누가 더 긴지에 대한, 굉장히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한계였다. 그녀는 백기를 들고 절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이든. 에이든이요.”
그와 동시에 비비안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 쪼가리가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밝은 빛에 그녀는 눈가를 찌푸리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에이든은 여전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빛에, 눈가가 조금 충혈된 걸 제외하면 평소의 보던 모습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비비안의 뇌리에 각인되듯 선명하게 박혔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팔 근육이 그녀의 양옆으로 단단히 구속하고 있는 게 보였다. 푸른빛으로 곤두선 핏줄이 창백한 피부에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굉장히 두껍고 견고한 나무 기둥 같았다. 비비안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와 동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것이 마치 꿰뚫듯이 밀고 들어왔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비비안은 입을 벌린 채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아팠다. 빌어먹게도 아팠다. 처음 경험했던 그때처럼. 너무 아파서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중얼 말을 뱉었다. 아파, 빼! 제발 빼 줘요. 하지만 그는 뻑뻑함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자신의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의 코끝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비비안의 가슴에 뚝 떨어졌다. 이러다가 자궁경부까지 닿겠다 싶을 때쯤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랫배가 가득 찬 것 같은 엄청난 이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것이 순식간에 빠져나갈 때는 마치 몸의 일부까지 같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건 허전함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그녀의 질 주름이 귀두를 붙잡고 마치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딸려 오자 에이든은 혼탁하게 흐려진 눈빛으로 신음을 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근은 이미 한계까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 쫄깃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헤집으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어떻게 된 여자가 아래까지 날 놓아주지 않아. 뿌옇게 흐려진 머리로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비비안을 뒤집었다. 그리고 골반을 붙잡아 엉덩이를 추켜세우게 했다.
베개에 고개를 박게 된 비비안이 잠시 허우적거렸지만, 이내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가 살이 맞부딪혀 철썩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뿌리까지 단숨에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하으으윽!”
고통은 짧았다. 빠지고, 다시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밀고 들어오고, 다시 빠지고. 골반을 단단하게 움켜쥔 그는 자비 없이 헤집고 쑤셔 댔다.
마구잡이로 흔드는 것 같아도 애가 탈 정도로 그녀의 성감대 스치고, 찌르고, 비벼 왔기 때문에 비비안은 정신없이 신음만 뱉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뜨겁게 달아오른 맑은 액이 기둥과 고환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하응, 학! 하앗! 앙, 하앙!”
그녀가 의식하지 못한 채 바짝 조여 올 때마다 행위는 더욱 거칠어졌고 자세는 무너졌다. 마치 짐승처럼 허리를 놀리며 에이든은 그녀의 몸에 자신의 흔적들을 새겨 갔다. 목에, 어깨에, 등에, 팔뚝에. 깨물고, 핥고, 빨아들이고, 입 맞추면서.
그녀의 몸만큼은 지금 자신이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고 싶어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아무도 침입하지 않은 새하얀 눈밭을 흙발로 짓밟으며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고 있었다.
“흐으, 흐아앙! 하아앙……!!”
빠져나갈 틈 없이 계속 안쪽으로, 안쪽으로만 밀고 들어왔다. 한계까지 깊숙이 쑤셔 넣은 뒤 휑한 허전함이 느껴질 정도로 빼냈다가, 다시 뿌리 끝까지 박아 넣는 것의 반복이었다.
철썩거리며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다. 물이 끓어오르며 접합부에 거품이 일었다. 그럴수록 비비안은 쾌감과 함께 차오르는 충만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가는 것만 같았다.
골반을 단단하게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그녀의 온몸을 애무하듯 더듬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가슴을 양손에 가득 움켜쥐고 유두를 손가락으로 굴리자 비비안의 팔이 꺾였다.
에이든은 힘없이 기울어지는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손에 닿는 홀쭉한 뱃가죽 뒤로 자신의 물건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만져지는 착각이 일었다.
에이든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다시 강하게 퍽 속살을 찔러 왔다. 자궁까지 닿는 듯한 압박감에 비비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끓는 물에 담겨 정신없이 익혀지는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신음이 튀어나왔고, 정신없이 그의 것을 조여 댔지만, 그녀는 무엇 하나 자각하지 못했다.
“아, 앗, 하앙, 아아!”
“하아, 하…….”
그저 쾌감에 쫓아 어설프게 그와 박자를 맞추며 몸을 흔들었다. 그것이 끝도 없이 반복됐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번쩍 피어오르는 것도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꿰뚫리고 후벼 파지는 매 순간순간이 새로웠고 황홀함의 연속이었다.
욕실도 아닌데 어디서 물소리가 들렸다. 질척거리는 애액은 이미 흥건히 넘쳐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점점 더 빠르게 속도를 높여 갔다. 맞닿은 살이, 서로의 열기가 타오를 듯 뜨거웠다.
사정이 가까워진 듯 페니스는 안을 숨 막히도록 꽉 채우며 더욱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그 압박감에 더욱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내벽 안쪽에서 서서히 팽창하던 얇은 막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하으, 하, 잠, 잠깐, 흑! 가, 갈 것 같아!”
비비안은 곧 다가올 절정에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 허리를 비틀고 들썩이며 에이든을 졸랐다. 그와 동시에 그가 그녀를 반 바퀴 돌려 자신 쪽을 보게 했다.
몸이 뒤집히며 삽입된 채 내벽이 쓸리자 그녀는 허벅지를 파들파들 떨면서 발가락을 꼿꼿하게 세웠다. 끝에 닿을 듯 말 듯 애타는 기분에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비비안은 간절한 눈빛으로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쾌감에 완전히 흐트러져 굴복한 사내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미칠 것 같다는 표정. 짙어진 파란 눈동자는 소금에 절인 것처럼 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우위를 점하고 누가 상대를 휘두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절실하게 원했다. 갈망했다. 몸 구석구석 깊은 곳까지 미친 듯이 씹어 삼키고 탐하기를 원했다.
비비안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고, 에이든은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비비안은 팔다리를 발발 떨며 그의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음부가 페니스를 야금야금 입에 물듯 서서히 집어삼키자 낮게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쳐올렸다.
“크윽, 하…….”
“흐하아앙!”
수직으로 꽂혀 단박에 뿌리까지 박히자 비비안은 고개를 젖히며 손톱으로 그의 등에 상처를 냈다. 눈물과 쾌락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하고서 뜨거운 액을 쏟아 냈다. 속도가 줄어드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에이든은 그녀를 힘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가 한 번에 놓는 일을 반복했다. 귀두 끝까지 빠졌다가 푹 꽂혀 들자 새하얀 엉덩이가 경련하며 튀어 올랐다.
“학, 아앗! 하, 하응! 하아앗!”
비비안은 자지러지며 발작적으로 신음을 뱉었다. 에이든이 아예 작정했는지 성감대만 집요하게 찔러 대는 통에 절정을 맞이하고도 머지않아 또 절정이 찾아왔다. 성감대를 긁힐 때마다 홍수처럼 쏟아 부어진 쾌감이 한계를 넘고 뚝뚝 흘렀다.
그녀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바짝 죄어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대체 이 향락의 끝은 어디일까. 끝없는 추락감 때문에 자신이 떨어진 곳이 지옥인가 싶었다.
비비안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야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에이든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의 표정을 뇌리에 새기듯 집요하게 응시했다.
거친 숨소리,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음, 비 오듯 흐르는 땀, 한 몸처럼 뒤섞여 끈덕지게 늘어지는 액이 한데 얽혀 야릇한 합주곡을 만들어 냈다.
“아아……!!”
“크읏, 윽, 하아…….”
그리고 어느 순간, 비비안은 몸은 물론 정신까지 하얗게 뒤덮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절정에 사내를 꽉 끌어안았다. 온통 새하얀 번개가 쳤다. 아랫배부터 시작된 감각은 온몸을 타고 머리끝까지 치솟아 눈앞에서 불꽃처럼 번쩍 튀어 올랐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듯, 쾌감이 너무 심하면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벌린 채 그의 것을 아주 강하게 죄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에이든도 움직임을 멈춘 채 페니스를 한계까지 밀어 넣고 부들부들 떨었다. 안에서 꿈틀거리던 남성이 뜨거운 것을 울컥울컥 뱉어 냈다.
“하아, 하아…….”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다. 단지 출렁대며 밀어닥친 파도가 썰물에 쓸려나간 듯 한순간에 나른해졌을 뿐이었다.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 비비안은 가쁘게 숨을 토해 내다가 에이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문질렀다. 그러자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두둥실 머리를 가득 채웠다. 물론 몸의 대화까지도.
눈을 가리던 순간부터 그가 주었던 자극들이, 했던 말들이 지금이라도 느껴질 듯 생생했다.
처음에는 분명 불확실한 그와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립은커녕 지금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섹스 파트너란 말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 같은데…….’
연인처럼 굴긴 싫고 섹스 파트너도 싫고 대체 그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비비안은 대체 왜 또 이런 상황이 된 것인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다가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결론 내리고 그의 품에 늘어졌다.
됐어, 어차피 소설을 완성하면 헤어질 관계고. 그냥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믿을 수 없게도 한 번의 사정 후 힘을 잃었던 그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겁하는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직 정사 후 여운을 채 즐기기도 전에 정액을 뱉어 냈던 그것이 내부에서 서서히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유혹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 능숙하디능숙한 남자는 마치 처음 여자와 관계를 맺는 10대 청소년처럼 굴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것도 정도가 있지. 비비안은 잠시 질린 듯이 에이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사정 후에도 여전히 흐렸다. 그녀를 진탕 마시고 취한 사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네.’
그녀는 삽입된 걸 빼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여전히 허벅지는 그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식은땀이 다 났다. 저번처럼 저도 모르게 휩쓸려 세 번, 네 번 더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비비안이 놀라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느긋하게 놀리며 속삭였다.
“하아…… 저와 더 어울려 주시죠. 섹스 파트너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와, 뒤끝 진짜.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비비안은 뒷말을 황급히 삼켰다.
서로 감정 없이 지속해서 섹스하는 관계가 어떻게 연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건 섹스 파트너 외에 부를 말이 없었다. 물론 그녀는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볍게만 여기다가 이제야 그 위험성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계속 연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가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물론 아무도 사랑할 생각이 없는 그에게는 딱히 해당 사항이 없는 위험이었다.
비비안은 왠지 자신만 이렇게 속이 타는 듯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지만 이렇게 괴로운 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 걸 그랬다.
그녀는 다시 자신을 다독이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됐어, 어차피 조만간 헤어질 거니까.’
그녀가 우울한 생각에 잠긴 사이 에이든은 그녀의 우중충한 안색을 살피며 불만스럽게 눈가를 찌푸렸다.
섹스 파트너가 왜 불만이냐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더니 저 표정이라니.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왠지 그는 기분이 나빠졌다. 어쩐지 굉장히 불쾌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는 비비안을 숨 막히도록 꽉 끌어안은 뒤 물었다. 그녀는 내벽을 쿡 찌르다가 살살 문지르는 묵직함 때문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쾌락의 극에 닿은 직후라 가뜩이나 예민한 몸이 더 예민해져 있었다.
비비안은 다시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전혀 소용이 없자 애써 태연한 척 생각과 다른 말을 꺼냈다.
“덕분에 궁금하던 건 해결됐다는 생각이요.”
“궁금한 거 어떤 거?”
“후배위가 어떤 기분인지 궁금했거든요.”
“흐음, 어땠습니까?”
“……제가 이런 얘기 입에 담는 거 싫어하시지 않으셨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입으로 묘사하려고만 하면 차라리 나중에 글로 보겠다고 기겁하고 피했으면서. 비비안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이따금 그를 놀려 먹으며 즐거워했지만, 갑자기 그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어쩐지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왜 대공 전하는 내가 들이대면 뒷걸음질 치고, 피하면 갑자기 다가오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했던 비비안의 머릿속으로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연애의 고급 기술, 밀고 당기기?
‘혹시 그도 내심 마음속으로 나를? 일단 철벽부터 쳐올리고 보는 성격 때문에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그 착각이 망상으로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또 다른 내면의 소리가 튀어나와 초를 쳤다.
‘밀고 당기기는 개뿔 그냥 어장 속 물고기 관리겠지.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다는 사람치고는 섹스에 능숙한 거 보면 모르겠니? 덴드로랑 비슷한 과일지도 몰라.’
그녀가 혼자 설레발을 치며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이,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뭐…… 기분이 좋았다는 얘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습니다.”
“당연히 기분 좋았을 거라 확신하시네요.”
“물론이죠.”
비비안은 그의 당당함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잠시 입술을 비죽이던 그녀가 순순히 말했다.
“속궁합 잘 맞는다고 얘기까지 했는데 후배위든 뭐든 당연히 좋았죠.”
후배위는 뒤쪽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좀 수치스럽기도 하다는데, 확실히 서로의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기보단 지배당한 느낌이 강하긴 했다. 애초에 사랑이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사실 기억이 쾌감과 함께 날아 버려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수치심이 들 틈도 없었다.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상위일 때보다 더 깊이 박혀서 좋아 죽을 것 같다는 느낌 외에는 딱히.
아, 에이든도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미친 듯이 박아 오는 통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부딪칠까 봐 좀 무섭기는 했다.
전체적인 감상은 끝도 없이 절정에 달해서 몸이 망가질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까지 들었다는 거였다.
비비안은 노트 대신에 제 생각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쨌든 그런 후배위는 잠깐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한참 관계를 나눌 때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보았던 그 눈빛. 몽롱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참 야했다.
그녀가 주는 쾌감에 완전히 굴복해서 혼탁해진 연푸른 눈동자, 그리고 일그러진 그 표정. 그 순간 그녀의 속에서 피어올랐던 아주 강렬한 감정이 있었다.
‘지배욕…….’
지위도 높고, 체격도 좋으며, 힘도 강하고, 머리까지 똑똑한 남자가 이성을 잃고 허리를 놀리며 매달린다. 저로 인해 완전히 흐트러졌던 순간에 찾아왔던 강렬한 쾌감.
훗날 에이든이 다른 여자를 안아도 지금의 정사를 잊지 못해 비비안을 떠올리게 될 거라는 확신을 얻었던 순간. 그 순간을 떠올리자 그녀는 갑자기 갈증이 일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건 엄청난 포만감이었다.
완전히 내게 빠져들어 버리도록. 사랑을 믿지 않는 저 완고한 남자가 사랑 때문에 흐트러지도록.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차라리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를 찰나의 인연으로 놓치는 것보다.
‘뭔 미친 생각이야. 무슨 요부도 아니고.’
그녀는 고개를 휙휙 저어 잡념을 털어 낸 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후배위 얘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당연히 기분 좋았다고 대답했고…….
“그러고 보니 서로 몸을 완전히 겹친 채 후배위로 박히면 숨도 못 쉬게 좋다는 소리를 지나가다 들은 적도 있는데, 그것도 궁금하긴 하고.”
물론 성기가 큰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했지만, 에이든은 발기하기 전에도 제발 그만 크길 바랄 정도로 컸다.
“궁금하십니까?”
앗, 실언했다. 비비안은 평소의 습관대로 성적 호기심을 드러냈을 뿐이었는데 그가 자연스럽게 받아치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야 이렇게 삽입하고 있는 데다가 그의 것이 서서히 부피를 키워 가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미끼를 던지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덥석 물겠지. 애초에 그녀는 던질 생각도 없는 미끼였지만 말이다. 관능 소설 생각밖에 없는 뇌도 필터 없는 입도 음란한 게 죄라면 죄였다.
“파트너의 궁금증이 해결될 때까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울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파트너란 말을 강조한 게 굉장히 꺼림칙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비비안은 또 그 예의 소유욕인 건가 싶어 재빨리 답했다. 아니, 답을 하려고 했다. 그가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여 안쪽을 찔러 오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흐읏!”
“저는 몇 날 며칠이고 당신을 안고 싶을 정도로 굉장히 좋았습니다만.”
“하아…….”
“한 번만 더 하자, 응?”
아니 심장에 안 좋게 갑자기 왜 애교를.
대공과 애교라니. 하늘과 땅만큼 접점이 없는 단어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소름 끼치게 어울렸다.
그가 퇴폐미 가득한 얼굴로 야한 음성을 귓가에 흘리자 비비안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 주제에 자신보다 요염했다. 가뜩이나 정사를 막 마친 다음이라 에이든은 눈빛부터 얼굴, 행동까지 관능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아니면 그런 마음이 들게 해 드릴까요?”
비비안은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놓고 턱 아래를 살살 긁어 오자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서서히 눈을 찡그렸다. 오싹한 감각이 팔다리를 저릿저릿하게 하고 등줄기를 내달렸다.
그녀는 여린 신음을 코끝으로 뱉어 내다가 가라앉았던 흥분이 서서히 차오르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긁고 있는 살갗 아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흐응…….”
“여기도 성감대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으응, 잠깐.”
“정말이지, 강아지 같군.”
그 말에 비비안은 퍼뜩 정신을 찾았다.
“핫!”
그녀는 그가 또 멋대로 추삽질을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그의 위에서 일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애액과 섞인 진득한 점액질이 주륵 흘러내렸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비비안은 재빨리 그에게서 한두 걸음 물러나 슬쩍 그의 중심을 응시했다. 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검붉은 그것은 아주 두꺼운 힘줄이 징그러울 정도로 툭툭 곤두서 있었다.
비비안은 본인의 물건을 세우는 에이든을 빤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 아니…….”
그렇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지. 원한다면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뭐가 그리 불안해서 그렇게까지 집착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심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그녀는 마치 누군가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멍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숙여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생각보다 간단히, 또 멋대로 대공의 본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이든.”
비비안은 그의 손이 움찔 떨리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리고 본인도 놀라 자신의 입가를 더듬었다.
주제도 모르고 대공의 본명을 멋대로 불러 놀라운 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어 다가왔다는 점에서 놀라고 말았다.
그가 살아 있는 하나의 개체로 느껴졌다. 소설 소재로 사용기에 적합한,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남자가 아닌 에이든.
그가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 존재했다.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대체 왜 새삼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 의아했기에 그녀의 표정은 영 떫었다.
“다시 말해 봐.”
에이든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엉덩이 걸음으로 슬슬 뒤로 물러나는 비비안의 손을 잡아 끌은 뒤 그녀의 무릎에 쪽 입술을 붙인 채로 계속해서 재촉했다.
그러자 왠지 그의 입술이 닿은 무릎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타고 올라 심장까지 전기가 오르듯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비비안의 표정이 어딘지 묘해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에이든.”
“다시.”
“……에이든.”
섹스를 잘하는, 속궁합이 잘 맞는, 심지어 흑의 대공인 에이든이 아니라 그냥 에이든.
에이든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가슴 한편에 새로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쾌감과는 다른 의미로 온몸이 저릿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심장 위를 더듬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