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사는 도서관에서-12화 (12/13)

Chapter 11. 신비한 사랑, 신비한 사람

에이든은 오랜만에 해가 저물기 전의 거리를 거닐었다. 그것도 가면과 후드를 벗고 버젓이 얼굴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평소 그의 대인기피증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례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야매 의사 킬릭스는 그의 뒤를 졸졸 쫓으며 말했다.

“주인.”

“밖에서는 대공 전하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나.”

“어느 쪽이나 악몽 취급받는 건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럼 레이라고 해.”

심드렁한 얼굴로 황족의 아명을 부르라는 자신의 주인 때문에, 오늘도 킬릭스의 표정은 썩은 감자 꼴이었다.

대공이든 주인이든 레이든 사실 호칭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어디에 들이대도 눈에 띄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이 시간대라면 복작거려야 할 저잣거리에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사람이 없는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불량해 보이는 건달들은 물론 흉악한 범죄자로 보이는 이들도 알아서 슬슬 피해 다닐 정도이니, 그의 악명이 얼마나 드높은지는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이었다.

“이래서야 굳이 정체를 숨길 의미가 있습니까.”

킬릭스는 인적이 드문 골목만 골라 다니는 에이든의 뒤를 쫓으며 투덜거렸다.

흑의 대공이 사실은 23구역,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져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것이다. 오히려 그가 아닌 누가 그 무법지대를 장악하겠느냐고 반문하기나 하겠지.

물론 정체가 밝혀지면 대공의 입장에서 귀찮아질 일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에이든은 그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진심으로 묻는 말은 아니겠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심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한 눈치였다.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느냐는 표정에 킬릭스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다스렸다.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온갖 악명을 뒤집어쓰고도 천하태평 한 에이든의 행동이 답답해서 그랬을 뿐이지. 그는 작게 혀를 차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하소연입니다. 제가 모시는 주인이 이런 세상 무심한 돌덩이 같은 남자라서요.”

“웃기는군. 그런 건 일기장에나 써.”

“농담도 다 하시고.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이 정도 건방지게 굴었으면 슬슬 정색할 때도 되었건만. 정말 기쁜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에이든은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린 뒤 꽃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선 누구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말없이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결연한 표정이 누가 보면 전장에 가지고 나갈 검이라도 고르고 있는 줄 알겠다.

“설마 직접 꽃을 고르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왜 아랫것들에게 시키지 않으시고…….”

하도 어이가 없어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일일이 귀찮게 굴었음에도 순순히 대답이 돌아왔고 킬릭스는 입을 떡 벌렸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신경에 거슬리던 것도 곧 치울 예정이니, 남은 건 그녀의 마음뿐이겠지.”

“…….”

그는 잠시 침묵한 뒤 대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지 마. 안 죽였으니까.”

“비슷한 건 하셨죠?”

“안 했다니까.”

이쯤 되면 목숨을 위협하는 말이 한마디쯤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대꾸가 상냥하다. 그렇다고 나불거리는 입을 다물 킬릭스도 아니었지만, 에이든의 상태가 지나치게 유했다.

갑자기 쓰러진 비비안 때문에 드물게 희게 질린 얼굴로 의원을 찾을 때부터, 눈치 빠른 킬릭스도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빠진 것 같다고.

하지만 예상을 하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마치 저를 위협하던 사자가 조련사에게 달려가 온몸을 비비며 애교를 떠는 것을 목격한 것 같았다.

‘꽃을 찾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아가씨께서 깨어나신 모양이지?’

킬릭스는 꽃가게 주인이 가게 밖으로 나와 보지도, 그렇다고 가게를 버리고 도망가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것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온갖 흉악한 뒷소문이 난무하는 흑의 대공이 가게에 무슨 깽판을 쳐 놓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의원은 한숨을 내쉬며 에이든에게 병문안에 주로 쓰이는 꽃의 종류를 알려 준 뒤, 가게 주인에게 금화 몇 개를 쥐여 주고 돌아왔다. 오늘 내놓은 꽃 전부를 팔아도 남을 정도의 금액에 가게 주인의 눈은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그는 말없이 경악하다가 돈을 꾹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귀찮게 굴 눈치는 아니라 킬릭스는 안심하고 주인의 곁에 돌아왔다.

에이든은 여전히 무슨 꽃을 살지 고민하고 있었다.

“…….”

최근 들어 변했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기는 했지만.

“절 왜 데려오셨나 했더니. 숙녀분께 드릴 선물이라도 고르시려는 모양인가 봅니다.”

“뭐, 그렇지. 잘 보이고 싶으니까. 그대는 이런 거 잘 알지 않나.”

그는 순순히 대꾸하며 비비안의 눈동자를 닮은 연보랏빛 꽃줄기를 들어 올렸다. 꽃다발로는 잘 쓰이지 않는 야생화 종류였는데 옹기종기 피어 있는 모양새가 마치 작은 백합 같았다.

킬릭스는 그것에 흘낏 시선을 주더니 꽃 이름은 비비추이며 꽃말은 신비한 사랑, 좋은 소식,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고 덧붙여 주었다.

“눈 색만 닮은 줄 알았더니 이름도 닮았군.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잘도 그런 걸 고르시네요. 제 팔뚝에 돋은 소름이 보이십니까?”

“알게 뭔가.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는데. 좋은 소식 기대하지.”

에이든은 피식 웃으며 비비추 꽃줄기에 사랑의 성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안개꽃을 섞어 들었다. 의원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연애할 시간도 없는 불쌍한 사람 앞에서 염장 지르며 정말 즐거워 보이는 주인을 보니 심사가 꼬이고 속이 뒤틀렸다.

그래서였을까. 킬릭스는 부러 그의 심기에 거슬릴 게 뻔한 말을 입에 담았다.

“아까 했던 질문의 연장입니다만 숙녀분한테까지 정체를 숨길 이유가 있었습니까?”

“…….”

“연인이잖아요?”

“아직 연인은 아니다.”

“그럼 뭔데요?”

“……시끄럽군.”

순간 행복으로 나른하게 풀려 있던 그의 눈가가 서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하지만 킬릭스는 제 몸을 옥죄는 살기에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요즘 들어 주인은 물렁물렁해져서 제 손으로는 피조차 묻히지 못할 정도로 어떤 여자에게 단단히 빠져 있었으니까.

“신뢰를 주지 못하니까 그렇게 차이는 겁니다.”

“차인 적 없어.”

“차인 적 없다는 분이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눈빛이 아주 똥 마려운 강아지 같으시네요.”

“가끔 보면 그대는 목숨이 아홉 개쯤은 되는 거 같아.”

“사실 제가 전생에 고양이었습니다.”

그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뒤 다시 쏘아붙였다.

“사람이 호감 없는 이에게 얼마나 가차 없는지 알고 계십니까.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그 숙녀분께서는 전하께 어느 정도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신뢰를 주지 못하니까 숙녀분께서 계속 밀어내시는 겁니다. 진심으로 마주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잖아요?”

알아도 그저 두려워서 끝의 끝까지 미룰 뿐이었다. 무슨 애도 아니고. 킬릭스는 뒷말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에이든이 비비안을 떠보기 위해 동화책 안에 지하실 열쇠까지 숨겨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의 배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했을 거다.

“내 정체를 알고도 그녀가 날 좋아해 줄 거라는 확신이 없어.”

아니 오히려……. 에이든은 드물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한숨을 삼켰다.

“날 피할 거라고 확신해. 그렇게 되면 내가 감히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끝까지 숨기시고 선물이라도 사다 바쳐서 완전히 전하께 빠져들게 하시려고요?”

“…….”

“장담컨대 그랬다간 상대는 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전하께선 비참하게 차이실 겁니다.”

“……알고 있다.”

정곡이었다. 그것도 본인조차 종잡을 수 없었던 마음을 아주 예리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완전히 빠져드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금보다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 뒤, 모든 경계를 풀어 버린 뒤에 그녀가 벗어날 수 없을 때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아주 조금씩, 빗물에 스며들 듯 천천히.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에이든은 그것조차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위의 이유로 비비안에게 사실을 숨기는 거라면, 책 속에 지하실 열쇠를 숨겨 놓을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귀중한 열쇠를 그녀가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 두었다는 건 언젠가 그녀가 발견하길 바랐다는 뜻 아닌가.

직접 말하기도 두렵고 그렇다고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비비안이 실망해서 떠나가는 것도 두려웠다. 그래서 열쇠를 숨겨 두었다. 이건 본인답지 않은, 굉장히 겁쟁이 같은 행동이었다.

‘결국에 나는 그녀에게 다 떠넘길 생각이었나 보군. 사과해야 할 일이 늘었어.’

멍청한 짓을 했다.

에이든은 내심 들떴던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저택에 돌아가면 일단 그 열쇠부터 도로 회수해서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놔야 할 것 같았다. 비비안이 아직 열쇠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어도 변명할 기회는 생겼으니.

“이런 선물을 바칠 게 아니라 그냥 하루라도 빨리 정체를 밝히는 게 나을 겁니다. 흑의 대공이라는 걸 알고도 다가온 아가씨잖아요? 매는 하루라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후딱 해치우고 오세요.”

“말은 참 쉽구나.”

“남 일이라 그렇습니다.”

“…….”

참다못한 에이든은 결국 킬릭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건방을 떠는 것도 정도가 있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제 딴에는 장난스럽게, 아주 가볍게 만진 것이었지만 의원은 순간 자신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줄 알았다. 당장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녀야 할 정도의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삼켰다.

에이든은 그런 의원을 내려다보며 일갈했다.

“언젠가 밝히게 되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오래 앓다가 깨어나 정신없을 테니.”

그때였다. 갑자기 타이밍 좋게 품속에 넣어 두었던 통신구가 요란하게 울어 댔다.

그는 꽃다발을 킬릭스에게 떠넘긴 뒤 품을 뒤적거려 손바닥 하나 크기의 조그만 수정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양손에 쥐고 들어 올리자 구슬 너머로 집사의 얼굴이 일렁였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께서……! 아, 아가씨!

집사에게서 갑자기 걸려온 통신은 거기서 뚝 끊겼다. 뭐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뒤통수를 문지르며 지켜보던 의원도 ‘어엉?’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순식간에 다급한 상황이라는 걸 파악하고 표정을 굳혔다.

아가씨께서 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마 어디가 잘못된 건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열은 다 내렸으며 깨어나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연락을 받은 뒤였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다고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그는 드물게 당황하며 끊어진 통신구를 마구 흔들었지만, 신호음만 울릴 뿐 집사는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는 극도로 예민한 편이긴 했지만, 그만큼 일 처리가 확실하고 빠릿빠릿하며 눈치도, 주제 파악도 빨랐다. 그런 그가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걸어온 통신을 감히 무시할 리가 없었으니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아무리 심각한 사건이 터진다고 해도 집사와의 통신이 도중에 끊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일이 터졌다는 뜻인 걸까. 왜, 갑자기.

그간 미뤄 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고, 브론 공작을 만나느라 평소보다 귀가가 조금 늦어지긴 했다. 하지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은 거의 끝마친 뒤였기 때문에 자잘한 일들은 다 수하들에게 맡겨 버린 뒤였다.

조금 늦은 것에 대한 사과로 꽃다발과 작은 선물을 그녀에게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새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줄이야.

“마차. 마차를 불러라. 지금 당장!”

에이든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간 온화한 모습 뒤에 꾹 눌러 왔던 난폭한 성정이 한꺼번에 폭발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킬릭스는 순간 숨이 막혀 굳어져 주춤거리다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고 마차를 부르러 달려갔다. 그는 마차가 도착한 것과 동시에 평소의 나른한 걸음과 느긋한 여유는 다 던져 버리고 올라타 어서 달릴 것을 종용했다.

바짝 긴장한 마부는 덜덜 떨면서 재빨리 마차를 몰아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저택에 도착했다. 괜히 의원이라는 이유로 옆 좌석에 강제로 착석하게 된 킬릭스는 팔자에도 없던 멀미를 직통으로 겪으며 헛구역질을 삼켜야만 했다. 부디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공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걸음을 빨리했고 그 뒤를 의원이 비척거리며 따라갔다.

에이든은 저택 근처에 들어서자마자 재빨리 그녀의 방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대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벌써 해가 지며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하늘은 석양이 지고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저택 창문의 불빛이 더욱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그는 다급하게 달려가던 것도 잊고 멍하니 굳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입을 틀어막고 있던 킬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멀미에 시달리던 것도 잊고 황망한 눈빛으로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는데,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굉장히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택 창문을 밝히는 불빛이 ‘♡’모양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불이 켜진 창문이 저 더러운 표식을 나타내고 있었다. 애초에 집사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듯 다급한 얼굴로 에이든에게 통신을 한 것도 이 순간을 노리고 다 짜고 친 게 분명했다.

악! 더러운 커플! 빌어먹을 커플!

의원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돋아난 닭살을 벅벅 긁어 댔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은 상상 이상으로 온몸이 뒤틀렸다. 이딴 소름 끼치는 이벤트를 제정신으로 벌이는 여자와 흑의 대공이라니. 참, 천생연분이다.

킬릭스는 제 품에 얌전히 들려 있던 꽃다발을 퍽 소리 나게 에이든의 품에 안겨 주었다.

겨우 삼켜 낸 헛구역질이 다시 올라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에이든은 언제 굳어졌느냐는 듯 다시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킬릭스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냥 등을 돌려 미친 듯이 달아나고 싶었는데 주인의 허락 없이 그런 짓을 벌일 순 없었다.

그리고 대문이 열리자, 바닥에 붉은 장미꽃이 레드 카펫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이 끔찍한 장소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제발. 그는 생전 찾은 적 없던 신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자신의 수하가 괴로워하든 말든, 에이든은 묵묵히 꽃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한 듯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갑작스러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얼이 빠져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이런 짓을 당한 적도, 하물며 해 본 적도 없었으니 얼떨떨할 만도 했다. 그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길이 나 있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가만히 놔두면 창문을 깨고 달아날 것 같았던 킬릭스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집사였다. 그는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지지 않아 죽상을 한 채 에이든 뒤를 쫓고 있었는데, 집사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의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사를 끌어안았다. 고백받는 장면까지 봤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 안구와 마음의 평화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역시 자신의 조언 같은 건 하나도 쓸모없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다니.

‘그냥 커플 다 죽었으면.’

킬릭스가 속으로 불경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사이 에이든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꽃잎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짙은 향기는 이질적이었고 로맨틱한 붉은 꽃잎은 마치 아스라이 떨어진 핏방울 같았다. 이상했다. 싸한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더욱 깊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사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창문 밖에 하트 모양을 그린다고 특정 장소만 촛불을 밝혔기 때문에 어느 곳은 밝고 어느 곳은 어두웠다.

비비안다운 이벤트는 그저 사랑스러웠다. 제 앞에 있다면 당장 끌어안고 오물거리는 입술에 입을 맞출 것 같은데 왠지 이상하게 다시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장미 길을 따라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가면서 그는 왠지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잠잠했던 심장은 어느 순간 터져 나갈 듯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설렘과 기대 때문만이 아니라, 불안해서. 왠지 비비안이 모든 것을 알아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를 위기에서 수없이 구해냈던 육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육감은 확신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걸음은 어느새 뚝 멎었다. 꽃잎은 정확히 서재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재, 라.’

순간 에이든은 이곳에 숨겨 둔 열쇠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문고리를 뜯어낼 듯이 움켜쥐었다.

진작, 진작 다른 곳에 숨겨 두었어야 했는데. 언젠가 그녀에게 사실을 밝히더라도 그것은 제 입을 통해서가 돼야 했던 건데. 뒤늦게 깨달아 봐야 소용없는 문제였다.

열쇠를 발견했든, 발견하지 않았든, 사실을 알았든, 아직 모르고 있든, 그는 비비안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고 빌어서라도 그녀를 기만한 죄를 갚아야만 했다.

낮게 한숨을 토해낸 그는 죄책감 어린 시선을 애써 지워 내고 문고리를 돌렸다. 스르르 열리는 문 너머로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비비안이 에이든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웃었느냐는 듯 근엄한 표정을 흉내 내며 입매를 굳혔다.

“큽.”

에이든은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기적이게도 그녀가 자신을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귀엽다. 뭘 믿고 저렇게 귀여운지.

에이든은 당장 달려가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인내했다. 미안한 마음과 사랑스러운 마음이 공존한다는 건 이렇게 곤란한 일이었던 건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건만 입꼬리가 가만히 있질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비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하는데 에이든만 보면 자꾸만 얼굴이 풀어지고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힘들었다.

역시 좋아하게 되면 사람이 바보 얼간이가 된다는 게 맞는 말인 모양이었다. 마음은 물론이고 얼굴 근육까지 물렁물렁해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저 에이든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요. 분명 있었는데, 화난 것도 있고 실망한 것도 있거든요? 지금 제가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토라질 것 같아요.”

원래는 앞뒤 재지 않고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기회를 줬으니 에이든이 하는 말에 따라 바닥의 뿌린 장미잎이 로맨틱한 의미가 될 수도, 그가 불안해하는 대로 피비린내 나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비비안이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또한 그 의미를 알아채고 또 그녀가 먼저 나서게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비안은 에이든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었다. 동화책에서 발견한 바로 그 지하실 열쇠였다.

그는 놀란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열어 보지 않았어요.”

“비비안 저는…….”

“사실 계속 떠보는 게 괘씸해서라도 열어 보자 했는데, 내 눈으로 봤다고 해도 편견에 사로잡혀 내 멋대로 판단을 내릴까 봐 그만뒀어요. 전 에이든에게 직접 설명을 들을 거예요.”

그녀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이런 상황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비비안이 열쇠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가정은 있었지만, 그러고도 그녀가 지하실을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는 가정은 없었다.

발견된 이상 절대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금기를 어기는 전래동화나 신화가 수도 없이 이어져 내려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인간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생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비비안은 호기심을 죽인 채 그를 믿고 기다려 주었다. 만약 동화책 속 푸른 수염의 이야기대로라면 상대방이 미치광이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일일 텐데도. 수상한 꼴을 자주 보였고, 정황상 수상한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정체는 사실 미치광이 살인자보다 더한 암흑가의 주인인데도.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고 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에이든은 믿어 주고 감싸 줘야 할 부류가 아닌, 목숨이 아깝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야 할 부류였다. 에이든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길이 없었다. 기회를 주겠다는 말간 얼굴이 사랑스러워 제 모든 것을 도려내 그녀에게 바치고 싶었다.

비비안과 엮인 뒤로 제정신이었던 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비비안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면 당장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건 비비안이, 지금껏 지켜오고 살아왔던 이유까지 송두리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할 정도라는 거였다.

“한때의 열병인 줄 알았더니, 비비안은 제 전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지금껏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더니.”

“무, 무슨……! 고백하라는 소리가 아니었거든요!”

비비안은 제 눈동자 색과 똑 닮은 비비추꽃을 품에 안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예고도 없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들어 버린 탓이었다.

화를 내려는 듯했지만, 전혀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붉은 얼굴로 그녀는 씩씩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고백을 에이든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다니.’

그토록 원해왔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지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그녀는 미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 에이든이 먼저 선수 쳐 말했다.

“기만하거나 시험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비비안. 제가 지독한 겁쟁이였기 때문이죠.”

“…….”

“항상 사과할 일만 저지르는군요.”

에이든은 그녀의 한쪽 손을 가져가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계속 기다려 왔는걸요.”

그녀는 툴툴거리면서도 솔직하게 답했고, 에이든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서재를 벗어나 지하실 쪽으로 안내했다. 어차피 열쇠까지 들통나 넘겨받은 마당에 더 이상 숨겨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비비안과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 위해선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밝혀야 할 때였다.

그녀는 자신을 지하실 안으로 스스럼없이 들여보내자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사람 사체는 이곳에 없다는 뜻일 테니까. 물론 당연히 없을 거라고 믿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든은 지하실 문에 열쇠를 집어넣어 문고리를 열었다. 달칵하고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를 울렸다. 비비안은 조금 겁을 먹은 기색이었지만, 머뭇거리지는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지하실 내부는 어둠과 침묵에 무겁게 잠겨 있었다.

비비안은 전에 지하실 문 앞에서 언뜻 들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떠올리고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때 너무 극도로 긴장해서 환청이라도 들었던 것인지, 오늘은 짐승의 냄새도,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이든은 벽에 걸려 있는 등불을 들고 능숙하게 내부로 들어섰다. 비비안은 밝은 빛이 지하실을 내부를 밝히기도 전, 굉장히 익숙한 낡은 책 특유의 냄새를 맡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색 바란 종이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책 냄새…….”

“정확히는 서류 냄새죠.”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제가 지금껏 처리했던 서류들을 정리해 둔 곳입니다. 저 외에는 그 누구도 허락되지 않은 극비서류입니다만, 비비안이라면 봐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비비안은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던 서류를 다시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은밀한 루트를 통해서 금서를 사들이는 스릴을 즐기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도 모를 극비서류를 대놓고 훔쳐볼 담은 없었다.

아무리 그 서류의 주인이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향기를 뽐내는 꽃을 품 안에 더욱 끌어안으며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현재 23구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무법지대라고도 불리죠.”

“…….”

그녀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암흑가의 주인이라고요?”

“그렇게도 불립니다.”

“세상에.”

생각보다 더 엄청났다. 비비안은 감탄사 하나만을 뱉은 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무법지대. 말 그대로 제국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구역.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는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곳이었다. 아니, 어쩌면 까마득하게 낮은 곳이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빛의 정점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면 어둠의 정점은 암흑가를 장악한 그곳의 주인이었다.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지만 뒷세계를 다스리며 황궁까지 쥐고 흔든다는 말이 있었다.

대공이 아무리 악몽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도 그게 암흑가의 주인인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름뿐인 대공이라 하더라도 황족은 황족이었다. 어떻게 신의 핏줄이자 빛을 상징하는 황족이 어둠을 자처한단 말인가.

제국 사람 중 그 누구도 흑의 대공을 암흑가와 연관 짓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였다. 차라리 소문의 미친 살인귀라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예요?”

“전대 주인을 죽…… 아니, 물러나게 한 건 1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입니다. 비슷한 일은 전부터 계속해 왔으니까 그냥 표면적인 지위를 얻었을 뿐이죠.”

죽, 죽였구나.

‘하긴 죽였으니 그 자리에 올랐겠지.’

암흑가의 주인이 세습제를 따를 리가 없었다. 거긴 약육강식인 짐승의 세계였다. 물지 않으면 물어뜯기는 세계. 그쪽 세계에 발을 들인 적도 연관된 사람도 지금껏 전혀 없었던 비비안도 그 정도는 알았다.

에이든이 무법지대의 주인이라니. 취미가 책 읽기인 사람이 무법지대의 주인이란 말이야?

비비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기름칠이 덜 된 것처럼 몸이 삐걱거렸다.

“하지만 그전에도 계속하던 일이 있었죠.”

“무, 무슨 일이요?”

명백하게 겁을 먹은 모습에 에이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건 채 성인이 되기도 전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죠.”

비비안은 즉위식 때 보았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망나니 황자 취급을 받으며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닌 탓에 적자 대접을 받은 건 그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이 없는 건 아니었죠. 어린 황제가 혼자만의 힘으로 제국을 올바르게 일구기는 힘든 일입니다, 비비안. 특히 폐하처럼 실패를 겪어 본 적 없는 분은 말이죠. 자존심이 단단한 분께서 충격으로 부서지지 않도록 뒤편에 서서 이것저것 도왔습니다.”

엇나간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고, 더욱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게 귀띔해주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을 알아서 처리하고…….

“최근 들어 너무 오냐오냐 키운 건 아닌가 고민이긴 하지만요.”

그는 장난스럽게 덧붙여 말했다.

“음, 잠깐만요. 제가 너무 엄청난 소리를 한꺼번에 들어서.”

비비안은 잠시 그의 말을 멈추게 한 뒤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방금 들은 말을 문장 그대로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양해를 구하자 에이든은 얌전히 진정될 때까지 곁에서 기다려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책만 읽고 집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줄 알았던 황금 백수가 알고 보니까 암흑가의 주인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모자라 황제의 까다로운 성정까지 보살펴 가며 세력이 무사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우면서.

말만 들어선 이쪽이 더 실세 아닌가.

“암흑가의 세력이 점점 커져 황궁을 휘어잡을 정도라는 게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아뇨. 헛소문 맞습니다. 휘어잡기는커녕 전면으로 돕고 있으니까.”

빛과 어둠이 서로 손을 잡았다니. 상극이지만 정점에 이른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당해 날 자가 어디에 있을까. 현재의 제국이 선대 황제 때보다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왜 황제가 그렇게 나사 빠진 것처럼 굴어도 멀쩡히 나라가 잘 굴러가고 있는지 깨닫고는 곧바로 수긍하고 말았다. 에이든이 뒤에서 다 도와주고 있었던 거구나!

“아니, 잠깐만요.”

그녀는 퍼뜩 떠오르는 위화감에 입을 열었다.

“폐하의 자존심 얘기를 꺼내시는 건 설마 폐하께서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까?”

“영원히 모르시겠죠.”

비비안은 그의 대답과 동시에 왜 에이든이 자신의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겼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사실은 암흑가의 주인이며 황제 몰래 황제를 돕고 있다는 얘기를 과연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황제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거늘.

‘그런 거였어?’

섭섭함을 느낄 리가 없었다. 비비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거운 비밀에 어딘가 얼빠진 얼굴로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에이든이 물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오히려 그 말을 꺼내는 본인이 두려운 눈치였다. 비비안이 그를 무서워하게 될까 봐. 그게 표정에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무슨 말을 꺼내야 에이든이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해야만 했다. 그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전혀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흑의 대공이나 암흑가 주인이나 제겐 그게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에이든은 그냥 에이든이라고요.”

그녀는 말을 꺼냈다가 잠시 생각을 고르듯이 침묵했다. 그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되니 마치 억지로 틀어막아 두었던 둑이 한꺼번에 터진 것처럼 다른 것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런 흉악무도한 소문들이 어린 시절부터 주홍글씨처럼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것인지. 보기만 해도 안쓰러워지는 등 뒤의 흉터는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 어린 시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이든의 관한 모든 게 알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 어떠한 비인도적이며 인륜에 어긋난 일을 저질렀다고 한들 그를 미워하게 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작 그걸 두려워할 거라면 애초에 접근하지도 않았겠지.

비비안은 착하고 정의로운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그녀는 아주 예전부터 인정했던 명제를 다시 꺼내 왔다.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에이든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게 느껴져요. 솔직히 그건 희생이잖아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형제를 돕고 있잖아요. 저는 당신이 두려운 것보다 그게 더 궁금해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당신이 진정 원했던 일인지.”

“그건…… 처음 듣는 질문이군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지 돌아오는 답은 그의 말투만큼이나 느릿했다.

“그저 제 운명입니다.”

“운명?”

“폐하께서 황제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처럼, 저 또한 이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겁니다. 짐승들이 번식하여 제 종족의 대를 이어가고, 귀족이 가문을 물려받는 것처럼, 저는 어둠을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검은 머리를 타고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거죠.”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비비안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네? 검은 머리가 무슨 상관이죠?”

“악의 상징 아닙니까. 반면 폐하께선 순도 높은 새하얀 은발이죠. 신의 축복처럼.”

“미신일 뿐이잖아요?!”

“그건 그렇죠. 아마 율리안, 아니 폐하께서 저와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미신으로 끝났을지도 몰랐을 테죠. 전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쌍둥이처럼 닮은 건 또 무슨 상관인데요?”

“쌍둥이는 불길하니까요.”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쌍둥이를 불길하다고 하는 그 무지함도 어이가 없었지만, 진짜 쌍둥이도 아니고 쌍둥이처럼 닮은 형제일 뿐인데도 그 불길함이 적용된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미신에 일관성을 바라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고귀하신 황족들께서 그렇게 미신을 믿는 줄은 몰랐는데요.”

“하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아니 무슨 그런 집단 광기가 다 있죠?! 검은 머리라고, 형제가 닮았다고 악으로 낙인찍고 평생 그림자처럼 살아가도록 종용하다니 황족들은 미쳤다고요!”

비비안은 붉어진 얼굴로 황족을 모욕하며 온갖 성은 다 냈지만, 에이든은 욕을 들어 먹으면서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실실 웃어 댈 뿐이었다. 그녀가 아주 대단히 웃긴 말을 한 것처럼.

“비비안, 확률적으로 일반 백성들보다 황족들이 미신을 더 잘 믿습니다. 보수적이고 가장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죠.”

“아니, 아까부터 남 얘기하듯 말씀하실래요?”

비비안은 이 부조리함에 웃기만 하는 그가 답답해서 씩씩거렸다. 이대로 놔두면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에이든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말만 뱉는 입술을 은밀한 손길로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비한 사랑이라더니.

“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그가 자신을 두고 ‘신비한 사랑’이라고 한 것을 분명 들었다.

그녀는 성을 내는 것도 멈추고 바짝 몸을 굳혔다. 그가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이걸 지금껏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푸른 눈동자는 노골적으로 애정을 가득 담고 일렁였다.

비비안은 때때로 에이든에게 저런 시선을 받고는 했다. 그 시선은 욕정, 혹은 분노와 굉장히 닮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자신의 몸에 소유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와 관계를 했다.

그가 자신의 몸을 원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왠지 그게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욕정이라기보단 뭔가 더 애절하게 바라는 듯한 간질간질한 시선이었다. 육체보다는 마음에 더 닿아 있는 그런 눈빛.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왜 이걸 지금까지 몰랐을까.

에이든은 그녀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갈증이 이는 것처럼 목울대를 울렸다. 그가 지금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이제는 완전히 알아차렸다.

비비안은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이제는 따가울 정도로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 바보네.’

저를 향하는 노골적인 감정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황제의 짝사랑을 도와준답시고 잘난 체를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비비안이 상황도 잊고 고백을 해야 할까 망설이던 사이, 에이든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껏 제국 황족 중 그 누구도 검은 머리를 가진 이는 없었습니다. 하물며 황후 마마께서도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셨죠. 저처럼 새까만 색은 아니었습니다. 외모는 황제의 피를 짙게 이어받고 태어났는데, 근본을 알 수 없는 검은 머리인 겁니다. 불길할 수밖에요.”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결론은 선택받은 건 율리안이라는 뜻입니다. 전 버림받은 쪽이고. 흔한 얘기죠.”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에이든은 듣는 쪽도 말하는 쪽도 유쾌하지 않은 자신의 과거사를 줄줄 자세하게 읊을 생각은 없었다. 알아들으면 그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듯 계속 단편적으로 힌트를 던졌지만,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한 비비안은 단박에 그 퍼즐 조각들을 이어 맞췄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동생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죄로, 동생은 신의 축복인 은발이었지만 그는 어둠의 상징인 흑발을 가졌다는 죄로, 황제와 황후를 이어받은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눈 밖에 났다는 뜻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후계자 다툼이 치열한 황족이나 귀족 사이에선 그다지 드문 얘기가 아니긴 했다. 비비안 본인도 남자주인공에게는 불행한 과거 하나쯤은 있어 줘야 한다고 하면서 비슷한 얘기를 소설 소재로 써먹지 않았는가.

그만큼 옛 고릿적부터 계속 사용된 닳고 닳은 클리셰였고, 현실은 원래 소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콩가루였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온갖 나쁜 소문은 다 몰고 다녔던 흑의 황자였던 이유. 귀찮은 걸 유독 싫어하는 그가 황제 자리를 물려받기 싫어서 개망나니인 척 구는 줄 알았는데, 그런 단순하고 시시한 이유가 아니었다. 에이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악’이라고 낙인찍힌 것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그림자로 길러졌다. 황위를 물려받을 양지의 동생을 위해, 음지에 머무르면서.

“설마 온몸에 흉터도 어린 시절에…….”

“뭐, 그런 거죠.”

“학대당하셨던 거예요? 어떻게 황자에게 그런 짓을……!”

“아뇨, 설마요. 학대는 아니고, 그냥 좀 살기 위해 혹독히 굴렸습니다.”

비비안은 어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표정으로 굳어져 있다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화상 자국도 있었잖아요. 차마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눈물을 아롱아롱 매달고 있는 자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동정 같은 게 아닌 분노였다. 정작 본인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이쪽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걸 바로 학대라고 하는 거예요.”

그의 저택에 처음 방문하던 날, 그와 마차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릴 때도 책 좋아하셨어요?’

‘동화를 자주 읽었죠.’

‘의외네요. 레이는 어릴 때도 전문 서적 같은 거 읽었을 것 같은데.’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으니까요.’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해 아무 생각 없이 넘겼는데, 이제야 무슨 사정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든은 어린 시절 동화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도피처라고 얘기했었다. 어린 에이든이 온몸에 상처를 매달고 동화를 읽는 모습이 떠올라 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다.

누군 심장 떨려서 손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데! 감히 우리 대공 전하를! 누구에게도 보상받지 못할 그의 어린 시절은 정말…….

“정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요.”

“다 지난 얘기입니다.”

부당함에 화를 내던 시절은 이미 한참 지나간 것인지 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율리안이 태어난 이래로 에이든은 완전히 ‘악’으로 낙인찍혔지만, 그는 자신의 형제를 딱히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물론 어린 시절에는 그가 영 못마땅하던 때도 있었지만, 눈을 반짝이며 형님, 형님하고 병아리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피붙이를 내칠 정도로 모질진 못했다. 오히려 에이든은 그의 형제를 매우 아꼈다.

언제 어디서 피바람이 불어올 줄 모르는 황궁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지나치게 순수했고, 에이든은 자신과 다른 그 아이를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다. 눈뜨고도 코 베어 가는 이 빌어먹을 곳에 저런 사람다운 사람 한 명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나 싶었던 것이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때는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에이든은 자신이 살기를 내비칠 때마다 파랗게 질려 사시나무 떨듯 움츠러들던 율리안을 떠올리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시작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황제가 된 그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선대 황제의 부고 이후 세상 물정 모르던 소년은 황제가 되었고, 그것만으로 위태로워 보였다. 신의 축복이라는 그의 탄생처럼, 평생 실패와 좌절을 모르도록 그냥 축복받은 인생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어둠이 있기에 밝은 빛을 내는 것처럼, 자신의 동생이 앞에서 더욱 화려하게 반짝일 수 있도록 그는 어둠을 자처했다. 그리고 암흑가의 주인이 되고 나자 비로소 자신의 낙인이 저주가 아닌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황제 자리는 관심도 없었고 줘도 가질 생각이 없었다. 귀찮고 성가셨으니까.

“결론적으로는 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쪽이 더 적성이거든요.”

악으로 키워 준 덕분에 암흑가의 주인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것인지, 정말 악당 체질인 건지. 그걸 따지고 드는 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는 태어난 이래 사회에서 모럴이라고 칭하는 모든 것을 내던져 왔으니까.

살기 위해 모든 짓이든 했다.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법부터 배웠으며, 독의 내성을 기르기 위해 치사량에 미치지 않을 정도의 독을 삼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사냥대회에 참가했다가 독 묻은 화살에 맞기도 했고, 외부에서 암살자와 사투를 벌이다가 불길에 갇힌 적도 있었다.

죽여버리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야생에 내던져졌다. 죽지 않기 위해 죽였고 그런 것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깨어 있는 순간순간 날카롭게 갈린 이빨을 숨기며 언제든지 숨통을 끊어 놓을 준비를 해야만 했다. 상대가 방심할 틈만 노리면서.

황족들과 선대 황제파 귀족들은 다 치가 떨리도록 싫었지만, 덕분에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니 고마워해야겠지. 그냥 악당 조기교육 받았거니 셈 치고 있었다. 이게 다 지난 일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뭐 덕분에 받은 대로 돌려주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선황제가 급작스러운 병환으로 죽게 된 건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모럴 없이 키운 아들에게 모럴 없는 방식으로 당했을 뿐인 그런 시시한 이야기.

“에이든이 지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라고요!”

“…….”

에이든은 침묵을 택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두둔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만약 킬릭스가 에이든의 숨겨진 과거의 비밀을 듣게 된다면 ‘역시 미친 사람의 과거는 범상치 않았군요.’라든가,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동정이라도 바라십니까? 바랄 걸 바라셔야죠.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십시오.’ 하고 말했을 게 뻔했다.

어린 시절이 현재의 모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결국 암흑가의 주인이 된 건 에이든의 선택이었다. 무법지대를 다스리는 주인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고, 아마 앞으로도 수많은 피를 뿌리고 다닐 거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다.

“원, 다정하기도 하지.”

에이든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뒤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비비안을 달래듯이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볼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씩씩거리던 것도 멈추고 이상한 얼굴을 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발악 같았다. 그 솔직한 반응이 귀여워 에이든이 작게 웃었다. 상황이 계속 자신이 바라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마치 꿈 같았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있긴 하지만.

“이상하네요, 정말.”

“뭐, 뭐가요?”

“제가 예상했던 건 이런 반응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할까.”

입술을 끌어당겨 웃은 그는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깨달았다. 자신이 비비안에게 미움받지 않고 동정을 살 만한 말만 골라서 했다는 걸 말이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는 나름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제 입으로 지금까지 누구와 누구를 죽였고 고문했고 묻었고 이용했고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누구라도 새하얗게 질려서 도망갈 거다. 그나마 변명할 만한 건 일반인은 건드리지 않았다 정도일까.

에이든은 자신에게 사기꾼 기질이 다분했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입을 열었다.

“비비안. 암흑가의 주인인 저는 제 불행한 과거보다 더한 악행을 저질러 왔습니다.”

변명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과연 그게 ‘악행’으로 함축될 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말하는 당사자는 뻔뻔했다. 하지만 말해 놓고 불안했는지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비비안은 그 말에 움찔 떨더니 이내 입술을 꾹 깨물면서 그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마치 책망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에이든은 수십이나 되는 암살자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더 긴장한 기색이었다.

“에이든은 예전부터 그랬어요. 겁주는 말을 하면서도 저를 그런 표정으로 보잖아요.”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글쎄요. 거울이 있으면 보여 드렸을 텐데.”

에이든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비비안은 여유로운 미소 속에 감춰진 그의 불안을 읽어 내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이 운명이고, 그림자로 길러졌고, 암흑가의 주인이 적성이라 말을 하고 있었지만, 에이든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곁에서 어둠까지 품어 줄 사람이 있었을까. 몰래 뒤에서 도와줄 정도로 아끼고 있는 동생인 황제에게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비비안의 예상대로 에이든이 그녀와 같은 온도로 그녀를 좋아하는 거라면, 여기서 그를 밀어내는 발언을 하는 건 그에게 꽤 쓰라린 상처가 될 것이다. 비비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반응 하나하나 살피며 초조한 듯 눈가를 좁히고 있었다.

사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자면 지금 상황은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면서 처음부터 언급해 주지 않고 지금껏 숨겨 왔느냐고 따지면서 화내거나, 겁을 먹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해야 할 텐데. 전혀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런 말을 하는 건 도망가라는 경고인가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거짓말. 사실 에이든이 바라는 건 하나뿐이잖아요.”

그녀는 당신의 그런 태도 때문에 참 먼 길을 돌아왔다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섹스 파트너를 운운했던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참, 서로 바보 같았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걸.”

비비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품 안에 안긴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안개꽃들을 엮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비안이 진지한 대화 중에 갑자기 다른 짓을 하자 에이든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자신과 비교하면 한참 작은 손이 뭔가를 척척 만들고 있었다. 의외로 손재주가 좋았다. 글도 잘 쓰고, 책들도 꼼꼼하게 분류하고 척척 정리를 잘하더니, 만드는 것도 잘하는 건가.

에이든은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며 그녀가 하는 것을 구경했다. 예쁘게 엮인 꽃들이 둥글게 말리더니 아주 조그마한 화관 같은 게 완성되었다. 손가락에나 겨우 들어갈 만큼 작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때쯤 비비안은 새하얀 꽃반지를 에이든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사실 이것보다 더 유치한 고백 계획 같은 걸 세웠었는데 민망해서 관둘래요.”

“…….”

정말 반지였던 모양이다.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 건지.’

에이든은 저택 내부에 들어섰을 때 붉은 꽃길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건 또 색다른 경험이군요.”

하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새하얀 꽃반지를 신기한 듯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비밀을 알고도 제가 곁에 남아 주길 바랐던 거죠?”

“…….”

“저는 떠나지 않아요, 에이든. 무슨 짓을 해도. 이제 떠나는 건 포기했어요.”

그는 반지에 시선을 떼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신분 높은 ‘악당 1’인 줄 알았던 사람이 10년 가까이 ‘악당 보스’를 해 왔다는데 악행은 뭐 제가 상상도 못 할 일이겠죠. 무섭긴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제가 신기할 지경이라고요.”

“아무렇지 않다고요?”

“아무렇지 않은 건 물론이고 에이든이 더 걱정되는 제가 이상한 거겠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미 제 마음이 제 것이 아니거든요.”

이런 절절한 고백은 처음인지라, 비비안은 민망하고 떨려서 죽을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니 전에도 고백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로맨틱의 ‘로’ 자도 없었던 막무가내 요구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계속 대화를 나눴지.

비비안은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그리고 에이든은 자신의 정체를 안 비비안이 떠날까 봐 서로 계속 삽질만 했다.

“비비안 그 말…….”

“에이든이니까. 제가 사랑해 버린 에이든이니까요.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고요.”

늘 단단한 듯 보였던 푸른 눈동자는 쉴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후회할 거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기적이게도 그는 침묵으로 답했다.

대신 빠져 죽기 직전에 물 위로 건져진 사람처럼 절박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겹쳐졌고, 에이든은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갑작스럽게 마주 닿은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고 평소보다 까슬까슬했다. 피곤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비비안이 말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생각했다.

음란하고 질척거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필사적이고 절박한 키스였다. 그녀가 없으면 그대로 숨이 막혀 죽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결을 훔치고 애절하게 탐했다.

몇 번이나 부딪혔던 입술이고 섞었던 혀인데 이렇게까지 감흥 없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노골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던 키스와도 달랐다.

이번만큼은 몸이 달아오르는 게 아니라 가슴이 저릿했다. 온몸의 감각이 무뎌지고 쿵쿵 울려 대는 심장 소리만이 혼자 요란했다. 귀가 먹먹했다. 그냥 온몸 전체가 심장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갈증을 채워달라 끊임없이 요구했고, 비비안은 순순히 그의 요구에 응했다.

아까 어영부영 넘겼던 그의 고백이 떠올랐다. 오늘이야말로 이 비밀이 많은 양파 같은 남자를 까보고 말겠다고 투지에 불타느라 대충 넘겨 버리고 말았는데, 생각해 보니 제 전부라는 둥,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는 둥 하는 소리를 똑똑하게 들었다.

여태까지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간단하게 뱉어진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 고백의 무게는 보통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니.

에이든이 아닌 다른 누가 뱉었으면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면서 ‘너도 나처럼 연애를 소설로 배웠구나!’ 하고 측은한 시선을 던질 정도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낯간지럽긴커녕 조금 멋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무래도 감기몸살로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진 듯했다.

에이든 때문에 자신의 평범하고 순탄한 인생이 엉망진창이 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와 자신의 마음이 같다는 것부터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으니까.

비비안 자신이 선택한 거였다. 에이든이 암흑가의 주인이 되기로 한 것처럼, 그녀는 그런 그의 곁을 떠나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이 뒤의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낮은 숨을 토해 냈다. 맞닿은 코끝이 간지러웠다.

“사랑합니다, 비비안.”

에이든은 잠시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노골적인 고백을 듣고, 키스하고, 심지어 고백하고 나서도 불안한지 양 볼을 붙잡은 손길이 필사적이었다.

그는 한참 그러고 서 있다가 이내 안심한 듯 흐드러진 꽃같이 웃었다. 어딘가 비틀린 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말간 웃음에 비비안은 하려던 말도 잊고 입만 벌린 채 굳어지고 말았다.

“비밀을 끝까지 숨기려 해서, 멋대로 떠보려고 해서, 지금도 숨기는 게 많아 죄송합니다.”

비비안은 그에게 사과를 받아 내기도 전에 이미 그를 용서했음을 인정했다. 굳이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고 말없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에이든은 그녀의 감정을 읽기라도 한 듯 그저 웃었다.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 순간은 어느 사람보다 예뻐 보였다. 그의 미소를 만지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그의 눈가를 더듬었다.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보상받지 못할 어린 시절과 결핍까지 자신으로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기까지 했다.

‘이거 완전히 여자주인공 같은 생각인데.’

한심한 클리셰인 줄 알았더니,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보가 되는 게 맞다. 자신을 속인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다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지. 만약 에이든이 그녀를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고자 한다면 처음엔 반항하겠지만 결국 순순히 그에게 모든 걸 바칠 걸 알았다.

아주 사람 홀리는 악마가 따로 없었다. 비비안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에이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등을 잡아채 도장을 찍듯 느릿하게 입을 맞췄다.

손등의 입맞춤. 존경과 헌신을 나타내는 신사적인 표현인데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으며 천천히 그녀의 귓가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아.”

그는 한숨 소리를 토해 내며 그녀의 등을 꼭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약에 취한 것 같습니다, 지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그는 계속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비비안은 그가 말할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고 귓가를 틀어막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정말 사랑에 취하기라도 한 듯 몽롱하게 풀어진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물속에 잠겨 듣는 듯했다.

“중독되는 게 이런 거군요. 전 이제 비비안이 없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그는 한참 의미를 알 수 없는 횡설수설을 하더니, 결국 책임지라는 말을 뱉었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만약 도망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암흑가의 주인다운 말을 꺼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맥빠진 소리에 그녀는 푸스스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예상했던 대로 처음부터 봐 왔던 그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일었다.

암흑가의 주인이 적성이라고?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고양이처럼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황금 백수가 그의 적성이었다.

세상만사 귀찮아서 늘어져 있다가, 낯선 이가 접근해오면 털을 세우고 물어뜯기도 하는 고양이 말이다.

“그럼 죽지 않도록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비비안은 숨이 막히도록 자신을 끌어안은 에이든의 등을 톡톡 치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늘 서로만 보면 소설이라는 핑계로 결핍된 무언가를 충족시키기 위해 몸만 탐해 왔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한 포만감에 온몸이 녹진녹진 풀어진다. 퀴퀴한 지하실 냄새와 더불어 공기에 텁텁하게 느껴질 정도로 둥둥 떠다니는 먼지들은 불쾌하게 느껴질 법했지만, 아무렴 어때. 이보다 더 달콤한 순간이 있을까 싶었다.

이제야 겨우 텅 빈 곳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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