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안 하셨으니까요 (4/48)

4. 안 하셨으니까요

“구혼자들에게 오지 말라고 전하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레아.”

어머니가 물었다.

“시간 들여 왕국 최북단까지 와 봤자 헛수고예요. 어차피 내가 그중 하나와 결혼할 일은 없을 거예요.”

“따로 마음에 둔 청년이라도 있는 거니, 설마?”

“아뇨. 그런 사람 없어요.”

“엄마한테만 얘기해 보렴. 그 사람 신분은 당연히 귀족이겠지?”

“아무도 없다고요. 엄마, 난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평생 혼자 살 거예요.”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 많고 기복 심한 나의 성격을 아는 엄마는 혀를 좀 차시더니, ‘저러다 말겠지’ 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의 아버지, 위대하고 현명한 리버런 공. 일곱 자식에게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제 뜻을 거역하는 건 또 죽을 만큼 못 견디시는 리버런 공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셨다.

“다시는 저런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게!”

아랫사람이 아니라 엄마에게 하신 말씀이다. 언제나처럼 명령 어조다. 어떻게 키웠길래, 라고 중얼거리며 리버런 공은 자리를 박차고 걸어 나갔다.

“레아, 너 때문에 또 아버지가 역정을 내시잖니.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렴.”

“내가 엄마 혼자 낳은 자식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둘의 딸이잖아요. ‘어떻게 키웠길래.’라니. 그게 자기 부인에게 할 소리예요? 왜 엄마한테 성화예요? 난 정말 아버지를 이해 못 하겠어.”

“큰소리 내지 말렴, 레아 리버런! 리버런 공께서 들으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계속해서 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는 엄마의 모습은 조금 가련했다. 내 첫 번째 생, 혹은 두 번째 생 때의 모습처럼 말이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의 슬픈 눈동자. 어머니의 눈동자가 딱 그렇다. 하긴 아버지에게는 한 소리 못 하고 엄마에게만 큰소리를 내는 나 자신의 모습도 처량하긴 매한가지다.

아냐, 아버지가 아무리 무섭더라도 이번에는 내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든 전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언니들 중 몇몇은 ‘레아 네 맘대로 하렴.’ 하고 말했다. 대충 엄마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동생 몇은 걱정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화가 자신들에게 괜히 튈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이사벨라 언니는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며 지지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가 어쩔 순 없을 것이다. 벨라 언니는 이제 이사벨라 리버런이 아니라 이사벨라 오를 공작부인이니까.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아빠의 관점에서 벨라 언니는 이미 아버지의 것이 아니다. 벨라 언니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우스운 일이다.

성안을 조금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내 굳은 선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버런 섬의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6월 첫째 주, 예정대로 세 남자가 우리 섬에 도착했다.

앙투안, 로즈몬드 백작. 나의 전남편 둘.

그리고 두 번의 삶 동안 내내 날 무시해 온 줄리앙 레날 공작.

세 번째 삶 역시 똑같이 흐를 것임을 알려 주는 표식과 같은 세 사람. 세 사람은 다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앙투안 그 찌질한 놈은 또 내 방 창문 아래에서 온갖 시를 읊기 시작했고, 필 로즈몬드 그 집착남은 또 멀쩡한 이름 내버려 두고 나를 ‘나의 보석’이라고 불러 댔다. 줄리앙 레날 역시 똑같다. 언제나처럼 넋이 나가게 잘생겼다. 이번에도 또 내겐 관심이 없겠지.

첫째 주에 그는 언제나처럼 또 내게 자신의 영토에서 가져온 커다랗게 영근 탐스러운 복숭아 하나를 주었다.

“리버런 섬에도 복숭아밭이 있습니까?”

“아뇨. 근데 레날의 복숭아는 먹어 보긴 했어요.”

내가 대답했다. 줄리앙 레날 공작은 놀랍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먹어 보셨다고요?”

“네. 아주 달고 맛있더군요. 입에서 살살 녹았어요.”

“레날의 복숭아는 레날의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는데, 혹시 제 영토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공작님이 직접 갖다주셨잖아요.”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에서 말이에요.

“네?”

줄리앙 레날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세 번 정도 살아 보니 이젠 모든 게 다 귀찮았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분수처럼 막 내뱉고 싶었다. 이대로 가다간 저 공작이 날 완전히 미친 여자로 볼 게 분명하다. 그럼 뭐 어떤가.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다.

“농담이에요. 처음 먹어 봐요. 레날의 복숭아는 부드러워서 칼로는 손질할 수 없다던데, 껍질은 직접 까 주실 거죠?”

줄리앙 레날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나를 잠시 응시하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큼 걸어 나갔다. 여느 때처럼 또 정원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문을 여는 손짓,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 모든 게 다 우아하고 멋지다.

커다란 손을 공들여 꼼꼼히 씻는 모습 또한 혼자 보기 아깝게 에로틱하다. 정원 개수대 근처의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개를 숙여 두 손을 씻는 그의 뒷모습, 얇은 셔츠 한 장 아래의 저 곧은 허리뼈와 단단한 근육들이 비쳐 보인다. 그림 같은 남자다.

그럼 뭐해. 알고 보면 저놈도 똑같을 거다. 결혼하면 최악이겠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줄리앙 레날은 다시 안으로 들어와 깨끗해진 손으로 복숭아 껍질을 깐다. 과즙이 손에 묻어 끈적해진다.

“손이 더러워져요.”

내가 말했다.

“까 달라고 하셨잖아요.”

줄리앙 레날은 볼멘소리하듯 말하지만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있다. 열심히도 껍질을 까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참 다정한 사람일 거 같다는 착각이 든다. 곧 내게 차갑게 굴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즙이 뚝뚝 흘러 손목뼈를 타고 흐르자 그는 불편하다는 듯이 팔을 든다.

“줘 보세요.”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얼른 소매가 젖지 않게 두어 번 옷을 접어 올려 준다. 줄리앙은 너무 놀라 경직된 건지 움직이지를 않는다. 어디 고장 난 인형처럼 말이다. 귀족가의 영애가 나서서 먼저 남자 몸을 만진다는 데에 놀란 것 같다. 뭘 또 이런 걸 가지고. 어디 더 놀라게 해 볼까.

나는 그의 손목뼈를 타고 흐르는 복숭아 과즙을 살짝, 혀로 핥아 올린다.

“달아요.”

“레아, 뭐 하는 겁니까?”

“맛있네요. 복숭아.”

얼굴이 빨개져서 나를 쳐다본다. 미소를 지을 듯 말 듯 어정쩡한 얼굴로 그는 내 이름을 부른다.

“레아.”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네, 그러셨지요. 레아라고 부른 것 미안합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스스럼없이 사과하는 모습은 또 귀엽다. 내 편견과는 좀 다른 사람 같다.

사람이 원래 너무 잘생기면 좀 차가운 느낌이 난다. 게다가 줄리앙 레날은 두 번의 삶 동안 내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그가 말이 없고, 차갑고, 솔직하지 못하고, 무뚝뚝할 거라는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잠깐만 얘기를 나눠 봐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는 예의 바르고 태도가 단정한 사람이다. 잘 놀라고, 수줍음도 타지만 자신에게 걸어오는 장난에 부끄럽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즐겁게 받아들이고 선뜻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내가 괜히 날카롭게 쏘아붙여도 같이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사과했다. 그건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갖추기 힘든 미덕이다.

“미안할 것까진 없어요.”

나는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늦었지만 묻겠습니다. 제가 레아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그게 좋으시면 그러세요. 나의 보석이니, 뭐니 하는 말보다 낫죠.”

그는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감추려는 듯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웃음기 어린 찡그림이다. 그런 표정이 그의 얼굴을 더 멋지게 만들었다.

“잘생겼어요. 참.”

“네?”

“잘생기셨다고요. 레날 공작님.”

“당신도 아름답습니다. 레아. 그런데…….”

“공작님, ‘아름답다’ 다음에 ‘그런데’를 붙이시면 안 되죠.”

그는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세 번의 생을 거쳐 몇 마디도 내게 말을 붙이지 않던 남자를 웃겼다는 자부심에 나는 좀 뿌듯해졌다.

“제가 웃기세요?”

“웃기다기보다―.”

말을 하다 말고 내 얼굴을 쳐다보는 그 깊은 눈빛엔 뭔지 모를 애정이라든가 애달픔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웃기다기보다 귀엽죠?”

내가 그렇게 받아치자 줄리앙 레날은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맞혔어요?”

“뭘요?”

“절 귀엽다고 생각하셨죠?”

“굉장히 솔직한 분이시군요, 당신은.”

“솔직한 게 싫으세요?”

“싫긴요. 다만 들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숨을 골랐다. 내뱉는 숨결마저 향기롭지 않을까 싶게 아름다운 자태로 말이다. 그 미모에 홀려 넋을 놓고 있는 동안 그가 입을 열었다.

“결혼하지 않으시겠다고요.”

“그게 공작님의 귀까지 들어갔나요?”

내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줄리앙 레날이 지금처럼 묘한 표정으로 나와 사상 최대의 시간을 들여 이야기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그런 내 궁금증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그가 말한다.

“성안이 떠들썩했죠. 어쨌든 나도 당신의 구혼자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혹시 청혼할 의지를 꺾으려 그러는 것인가 싶어서 ‘다만’이라 덧붙였을 뿐입니다.”

어차피 구혼도 안 할 거면서 구혼자는 무슨 구혼자야, 하고 내가 구시렁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줄리앙 레날은 내게 다시 묻는다.

“뭐라고요?”

“아니에요.”

“생각나는 대로 다 말씀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속으로 삼키는 말도 있으시군요.”

“네. 귀여운 줄로만 알았더니 사려 깊기까지 하죠?”

줄리앙 레날은 다시 한번 살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정중하게 물었다.

“결혼은 안 하겠다는 결심은 왜 하신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레날 공작님.”

“줄리앙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줄리앙, 당신이 나랑 결혼하려는 생각을 못 하게 하려고 이렇게 막말하는 건 아니에요.”

“막말한다는 자각은 있었습니까?’

이번엔 내가 웃었다.

“그럼요. 공작님도 많이 만나 보셨겠지만 보통 귀족가 영애들이 이렇게 말하진 않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여동생 보듯 나를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말씀하시든 아마 누구도 당신에게 청혼할 기회를 놓치려 들지는 않을 겁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시고 그런 소릴 하시네요. 어차피 공작님은 제게 청혼하려는 맘도 없으시잖아요.”

내 말을 듣고 줄리앙은 의아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장담할 수 있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딱 잘라 대답하는 것이 싫을 수도 있으련만, 그는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깊은 눈동자를 빛내며 다시 웃었다. 꼭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너그러운 미소를 하고는 그는 내게 말을 걸었다.

“레아, 당신은 아름답고 또―.”

“귀엽고요.”

웃음기를 머금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 몹시 귀엽고…… 또 재치 있고 명쾌합니다. 그런 당신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곧 사랑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런데 왜 내가 청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겁니까?”

“안 하셨으니까요.”

“네?”

“여태까지 한 번도 안 하셨잖아요, 청혼.”

“제가 뭘 안 했다고요?”

“제가 그런 걸로 공작님께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공작님은 사실 저랑 사랑에 빠질 만한 교류를 나눈 적도 없어요. 복숭아를 까 준 오늘 이후로 제가 공작님과 더 담소를 나눌 일은 없을 거예요. 저를 피하실 테니까요.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아, 당신은 좀 특별한 사람이군요. 꼭 미래와 과거가 뒤죽박죽된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줄리앙은 더는 찌푸리고 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꼭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제 내가 그의 기대에 부응할 차례였다.

“줄리앙, 제가 재밌는 얘기 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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