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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랑하게 될 것이다 (8/48)

8. 사랑하게 될 것이다

뭐라 대답할지 몰라서 당황한 채로 억만 겁의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줄리앙은 여전히 내 앞에 오른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줄리앙, 일단 일어서 봐요. 이렇게 계속 무릎 꿇고 계시면 제가 곤란해요. 우선 누가 볼 수도 있고―.”

줄리앙은 내 말에 바로 일어섰다.

“누가 보면 곤란하십니까?”

“그럼요. 리버런 공이 보기라도 한다면…… 아! 우리 아버지는 강제로라도 절 당신에게 시집보낼 분이신걸요.”

“그것이 제 청혼에 대한 당신의 답입니까?”

“줄리앙, 아, 줄리앙. 처음부터 당신이 제게 이렇게 청혼해 주었더라면 전 정말 바로 당신을 껴안아 버렸을 거예요.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세요. 잘생기고, 나무랄 데 없이 근사한 태도에, 높으신 지위에. 몇 마디 말만 해 봐도 바로 누구든 당신에게 호감을 가질 거예요. 저도 오늘 사실 당신에게 조금은 설렜어요. 하지만…….”

줄리앙은 씩 웃으며 내 말을 막았다.

“‘하지만’이라는 말 다음엔 보통 안 좋은 말이 나오죠.”

“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서 역접 연결사의 기능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것도 꽤 지적이긴 하겠지만요. 줄리앙.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압니다. 당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다고요.”

“네. 전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 상대가 설령 당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두 번의 생애 동안 생겼던 일 때문입니까?”

“네. 결혼해서 좋았던 적이 없어요.”

“그건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약조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싫어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하지 않겠다고요.”

“뭐라고 답해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 결혼 생활들에서 싫었던 게 뭐죠?”

잠깐 앙투안과의 첫 번째 삶을 떠올려 봤다. 머나먼 기억이지만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전부 다요……?”

“하나도 좋은 게 없었나요?”

“있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고통이 너무 커 좋은 일이 설령 있었다고 해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모든 걸 압도해 버렸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에게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며 설령 나쁜 일들이 있더라도 그 모든 걸 압도할 만큼 커다란 행복을 주겠습니다.”

“줄리앙, 그건 정말 로맨틱한 말인데, 그래도 난 결혼할 수 없어요. 난, 난 무서워요.”

줄리앙은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약간의 연민, 그리고 슬픔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레아,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무섭게 합니까?”

“제 선택은 늘 틀렸는걸요. 당신은 좋은 분 같지만, 제가 또 잘못된 선택을 해 버릴까 봐 두려워요.”

“레아, 당신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해 왔고 그중 하나가 틀렸었던 거지요.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원한다면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을 내게 말해도 됩니다. 당신이 안심할 수 있게,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당신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고 계약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에게서 이렇게 적극적인 청혼을 받을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의 말이 내겐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앙투안은 나쁜 놈이었다. 로즈몬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삶을 거치며 난 앙투안이나 로즈몬드보다 더 내 자신을 원망했다.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걸까, 어떻게 주어진 기회인데 또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세 번째 인생, 이제는 새롭게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사실 내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힘이 없었다. 내가 하는 선택마다 모두 엉터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내게 말한다. 살면서 많은 선택을 했고, 그중 하나가 틀렸을 뿐이라고,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말이다.

“줄리앙,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어차피 구혼의 날까지는 석 달이나 더 남아 있어요. 그리고 당신 같은 분이시라면 제가 아니라도 충분히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요.”

“당신보다 더 좋은 여잔 없습니다. 적어도 내겐. 당신을 한참 바라보다 느꼈어요. 이 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말입니다. 이렇게 당신과 대화하는 시간들도.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당신과 살고 싶습니다.”

“혹시,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대체 언제부터요?”

줄리앙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입술이 내 손에 닿았던 그때부터요.”

“완전…… 처음부터네요.”

“네. 완전 처음부터죠.”

“나와 결혼한다면 당신에게는 뭐가 좋은가요?”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좋지요.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지요. 진정 결혼하지 않고 혼자 행복해지길 원한다면 그리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당신 아버지 리버런 공은 엄격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의 네 번째 딸로 당신이 어떤 삶을 살지 나는 대개 상상이 갑니다.”

“리버런 섬에서 저는 언니들이랑 같이 살면서 책을 읽고, 또 글도 쓰고…….”

“내가 그렇게 해 주겠습니다. 당신 아버지 아래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말입니다.”

내가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줄리앙은 웃으며 물었다.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 이제 슬슬 내 말이 당신을 설득하고 있다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모르겠어요, 줄리앙. 이게 제가 가진 마지막 기회면 어쩌죠?”

“난 그랬으면 좋겠소. 나와 결혼했는데 마흔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몹시 슬플 테니까.”

“저와 함께 마흔이 된 걸 상상해 보셨어요?”

“수백 번도 더.”

“수백 번이나요?”

“레아, 내가 얼마나 상상했는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당신 마음입니다.”

“줄리앙,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그게 문제예요. 제 마음이요. 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래. 그게 문제였다. 내 마음. 지난번 생에도 지지난번 생에도 나는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쨌든 내게는 석 달의 시간과 세 명의 남자가 주어졌고, 어떻게든 그 안에서 남편감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중 내게 제일 잘해 준 이가 앙투안이었고, 그래서 그를 사랑한단 확신도 없이 결혼했다. 로즈몬드 때는 그보다 더했다. 내겐 앙투안이 아니면 로즈몬드라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난 왜 그때 줄리앙을 고르지 않았을까? 사실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은 그였는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다. 그냥 내게 잘해 주는 사람, 내게 좋은 집과 보석을 제공해 줄 만한 사람, 날 편하게 해 줄 사람만을 골랐다. 그 결과, 불행해졌고 말이다.

“무슨 말이오, 레아?”

내가 말을 않고 계속 가만히 있자, 줄리앙이 내게 물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난 늘 그들이 내게 해 주는 것들만 생각했어요. 나를 사랑해 주니 참 좋다,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니 좋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들이 내게 해 주는 것들이 사라지자, 괴로웠죠. 처음부터 내겐 그들에 대한 아무 감정도 없었으니까요. 난 한 번도 그들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그렇게 묻고 있는 그는 왠지 좀 기뻐 보였다.

“네. 한순간도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들이 내게 뭔가를 해 주니 그것들에 기뻤을 뿐이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진짜 문제였던 것 같아요. 내가 불행했던 건 결국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였어요. 내가 그들을 사랑했다면, 그들이 날 어떻게 취급했든지, 사랑으로 이겨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애초에 사랑도 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게 문제였어요.”

“사랑하게 될 겁니다.”

“네?”

줄리앙은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낮은 저음에 여름밤 공기가 어우러져 이상하게도 믿음을 주었다.

“레아, 그 점은 걱정 말아요. 당신은 날 사랑하게 될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마리안느가 나를 부른 것은.

“언니!”

줄리앙이 고개를 돌려 우릴 찾으러 온 사람이 내 어린 동생이란 걸 확인하고 바로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마리안느 리버런, 어찌하여 밤이 어두운데 여기까지 오셨나요?”

줄리앙이 무릎을 굽혀 키를 낮추고 마리안느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금세 진지함을 없애고 다정해져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있는 것이 제법 잘 어울린다.

“레이디요? 전 아직 레이디가 아닌데? 헤헤. 두 분이 늦는다고 안에서 한번 가 보라 하셨어요.”

마리안느가 대답했다. 똘망똘망한 눈을 보니 우리 얘길 들은 것 같진 않았다.

“안에서 가 보라고 하긴. 네가 나오고 싶었던 거지? 가자, 마리안느.”

“어떻게 알았어, 언니? 안은 너무 좀이 쑤셔. 정말.”

마리안느 말대로 시종일관 좀이 쑤시는 분위기였던 건지 메인홀은 슬슬 파하는 분위기였다. 줄리앙은 내게 눈인사를 하고는 여독에 피곤하니 먼저 올라가 보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앙투안도 함께 별채로 향하는 듯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는 끈덕지게 달라붙어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로즈몬드를 어떻게 물리치나 고민하고 있는데 마리안느가 내 옆에 찰싹 붙더니 말했다.

“백작님, 우리 언니 나랑 같이 갈 건데요.”

로즈몬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내일 보자는 말을 하고는 별채로 돌아갔다.

내일 보긴 누구 맘대로 내일 봐?

아버지도, 앙투안도 한둘씩 자리를 뜨고 나도 마리안느를 제 방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려 하는데 마리안느가 내게 물었다.

“그럼 언니 이제 레아 레날이 되는 거야?”

들었구나. 얘가 대체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아직 모르겠어.”

“모르긴. 레날 공작님이 저렇게 잘생겼는데? 아, 언니는 좋겠다. 가을 신부가 되겠네! 결혼식은 가을에 하면 좋지. 곰도 다람쥐도 부를 수 있고.”

막냇동생 마리안느는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되었다. 결혼이 장래희망인 애다. 얘한테 내 심정을 설명해 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래. 곰도 다람쥐도 부르자.”

마리안느의 수다를 한창 들어 주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유모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달려와서는 이미 앙투안이 동관 앞 수국정원에 서서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다 갔다고 말해 줬다.

마리안느와 오래 있다 온 게 다행이었다. 첫 번째 인생 때는 내가 얼마나 경솔했길래 그 한심한 시며 노래를 듣고도 그와 결혼할 결심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워진다.

하지만 지금의 ‘레아 리버런’은 과연 그때보다 얼마나 더 달라졌을까. 지금 줄리앙의 청혼에 설레고 흔들리는 이 마음은 나중에 돌이켜볼 때 또 얼마나 철없어 보일까. 과연 내가 또 결혼해도 되는 걸까.

내 마음속 한편에서는 ‘밑져야 본전 아닌가’, ‘또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크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는 거다.

‘줄리앙과 함께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허무맹랑한 얘기다. 두 번이나 그런 고생을 하고도 또다시 남자를 믿고 결혼을 믿고 나를 답답하게 했던 그 꽉 막힌 제도 속에 나 자신을 밀어 넣으려고 하다니. 나는 대체 얼마나 바보인 걸까. 어디까지 해야 정신을 차릴까. 앙투안도 처음에는 입 속의 혀처럼 굴었다. 로즈몬드는 또 내게 얼마나 잘해 주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줄리앙을 믿는다고?

그런데 이상했다. 자꾸 줄리앙은 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 밖으로 내뱉어 보면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질 것 같아 이번에는 한번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줄리앙 레날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운다고 하는데, 나는 우습게도 자꾸 이 말을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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