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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랑에 빠진 이유 (12/48)

12. 사랑에 빠진 이유

줄리앙 레날. 왕국의 시작부터 함께했던 레날 가문의 19대 공작. 그는 그 무공으로 왕국에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가 15세가 되던 해, 아버지 레날 공작이 제1차 제국전쟁 중 사망했다. 이미 아버지와 함께 참전 중이던 그는 바로 군 지휘권을 이어받아 선대 레날 공작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다.

1차 대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그로부터 5년 후, 다시금 침략해 온 남국의 차이운 일족이 벌인 침략전 역시 그가 없으면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활약상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 리버런 섬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것은 다 집어치우고 나로서는 그가 왜 외모로는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지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미모에 대한 평판이 전해지기에는 리버런 섬이 너무 왕국의 최북단 끄트머리에 위치하는 것인지, 갑자기 내 고향의 위치가 개탄스러워질 정도였다. 그는 정말이지, 입이 아플 정도로 말해도 또 말하고 싶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게다가 그는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교란시켜, 어떻게든 청혼에 대한 승낙을 얻어 내는 지혜도 겸비하였으며, 이로 추측해 보건대 궁중정치나 전쟁 중 계략에도 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뿐인가, 그는 복숭아 과실의 껍질을 까는 데에는 왕국 최고의 기교를 자랑했다! 누가 그렇게 멀끔하고 깔끔하게 복숭아를 까서 내 입에 집어넣어 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몸은 어찌나 좋고, 여자의 몸을 다루는 실력은 얼마나 출중한지, 심지어 키스도 잘한다. 겁날 정도로 잘한다. 그와 하룻밤을 지내 본 자의 권리로 감히 말해 보건대 그의 그것은 여러모로 왕국 최고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거기까지는 나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동력이 뛰어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

“레아, 언제 일어날 거야. 다들 기다리는데.”

해가 중천까지 떠올랐을 때, 나는 벨라 언니의 재촉을 받고서야 잠에서 깼다.

“……벨라 언니?”

“그래. 레아, 빨리 일어나 봐. 이게 무슨 일이야. 하루아침에!”

“벨라, 너도 왔구나. 레아. 곧 결혼할 텐데 이 시간까지 자고 있으면 되겠니?”

“……엄마?”

“레아 루이스 리버런. 아니 이제 레아 레날이라고 해야 하나? 너, 너, 결혼 안 한다더니 이러기야?”

리버런 섬 근처에 위치한 자작가에 시집가서 벌써 얼굴 본 지가 이 년이 된 베스 언니까지!

“다들 대체 어떻게 알고 아침부터 찾아온 거야?”

“어떻게 알긴. 대체 언제 우리한테 말하려고 한 거야.”

“언제라니?”

“그래, 결혼식 준비는 언제부터 할 거야?”

“어? 무슨 말이야…….”

정신없이 밀려드는 언니들과 엄마, 유모와 침모, 시종장, 하녀장, 집사, 아버지, 이종, 고종사촌 언니들까지 모두 상대하면서 내가 알아낸 것이 있다면 이미 나와 줄리앙 레날의 결혼 소식은 리버런 전체에 퍼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해 준 소식에 의하면 도착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본래 목적이던 구혼의 의미가 상실된 로즈몬드와 앙투안은 구혼자의 지위를 잃고 손님의 자격만을 유지한 채 그 그 거처마저 별채에서 다리 건너 성벽 바로 옆의 바깥 성채로 옮겨졌다고 한다.

연이어 도착한 정보들에 의하면 이 결혼에 대한 리버런 공의 승인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이미 떨어졌으며,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한 기병이 도착하는 대로 곧 여왕의 허락이 떨어질 것이라 한다.

언니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줄리앙은 결혼식 비용 일체는 레날 가문에서 댈 것이며, 결혼식 규모와 일정에 대해서는 철저히 신부, 그러니까 나의 의사에 맡길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내가 잠든 새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많은 일들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한 줄리앙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내 머리 위로 동동, 그의 점잖은 척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정신없이 언니들과 엄마, 그리고 동생들에게까지 시달리다가 겨우 오후 티타임을 위해 몸단장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신이 나서 유모가 떠드는 소리들을 듣고 있다 보니 진이 빠진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어 버렸다. 벌써 세 번짼데, 그래도 이런 떠들썩함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유모가 한껏 신경 써 가져온 드레스를 입었다. 연한 피치색의 가든파티용 드레스다. 가슴께가 브이라인으로 조금 깊이 파인 데다, 전체적으로 튈 소재의 몸이 비치는 천을 써서 드레스 아래로 살결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드레스 전체를 감싸고 있는 입체적인 꽃 자수와 비즈, 체인이 아슬아슬하게 가슴과 다리를 가려 주고 있다.

몸 전체를 가리는 보수적인 디자인이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꽃과 보석으로만 몸을 감싸고 있는 듯 야한 옷이기도 하다. 그만큼 내 진줏빛 살결을 돋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어젯밤 그가 낸 붉은 자국들이 허벅지에만 주로 포진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목이나 가슴이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울긋불긋해져 있었다면, 온 세상이 나와 줄리앙의 어젯밤의 일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런 옷을 골라 오다니. 유모가 얼마나 들떴는지 알겠다. 아주 오늘 바로 날 시집보내 신혼방으로 밀어 넣을 심산이구나 싶다.

내가 접객실로 이어지는 온실에 들어가자 줄리앙이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로 관목처럼 우뚝 서 있다. 그는 그대로 멈춰 서서 고장 난 것처럼 한참 나를 바라본다.

“이제야 만났네요, 줄리앙. 왜 그렇게 서 있어요?”

“옷.”

“옷이 왜요? 좀 이상하죠?”

줄리앙은 뚜벅뚜벅 내게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동화책 속 공주님에게 왕자님이 하듯이 신사적인 키스를 한다. 자세만 신사적이라는 얘기다. 그의 혀는 절대로 신사적이지 않다.

뜨거운 혀가 내 혀와 만나 노니는 걸 한참 느끼고 있는 동안 그는 부지런히 내 등을 타고 내려가 엉덩이를 움켜쥐고, 손을 허벅지까지 내린다. 이러다가는 다시 한번 할 기세다.

“줄리앙, 여기서요?”

“누가 그렇게 입고 오라고 했습니까?”

“왜요? 이상해요?”

“아니, 아름답습니다. 하고 싶어지니 문제지.”

“힘들어요.”

툴툴거리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요.”

“어째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섹스도 좋지만 손잡는 것도 좋잖아요.”

“매번 당신이 먼저 뭔가 하자고 하시니, 다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 내서 내가 먼저 하자고 해야겠군요.”

“그냥 매번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생각해 내고 당신이 그대로 들어주는 건 어때요?”

그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것도 좋겠다고 말했다. 잠깐 거닐어도 괜찮겠냐고 그가 물었고, 산책 정도야 나도 허용해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이어진 라벤더 숲으로 나갔다. 여름 햇볕은 제법 따갑지만, 공기는 선선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기분 좋은 초여름 날씨다.

“줄리앙,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우리 레아 아가씨, 또 뭐가 궁금하십니까.”

“꼭 우리 유모처럼 말씀하시네요. 대체 밤사이에 안 자고 뭘 하셨길래, 리버런 전체가 우리의 결혼 소식을 아는 거예요?”

“좋은 것은 널리 알릴수록 좋지요. 당신이 해결하기 귀찮은 일이 많다고 하길래, 대신 처리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고맙긴 하네요. 그런데 줄리앙,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레아?”

나를 배려해서 천천히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매번 다정하게 바라봐 주는 걸까. 그냥 원래 다정한 눈인 건 아닐까. 아니다. 지난번 생에도, 지지난번 생에도 그렇지 않았다. 나를 아주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왜 나와 사랑에 빠졌나요?”

그는 싱긋 웃으며 두 입술을 떼었는데, 열린 입에서는 정작 말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는 말문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예뻐서? 웃겨서? 무슨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르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다음 질문을 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 제가 예뻐서 당신이 저랑 사랑에 빠지신 줄 알았어요.”

“예쁩니다. 레아. 그리고 예뻐서 사랑에 빠진 것도 맞고요.”

“그렇담 이상한 게, 전 지난 생에도 지지난번 생에도 내내 예뻤는데 왜 그땐 저와 사랑에 빠지지 않으신 거죠?”

그렇다. 나는 이게 궁금했다. 그는 알쏭달쏭, 알 듯 모를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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