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결혼식
“뭐라고? 다음 주?”
우리 결혼식이 다음 주에 치러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크게 놀라지 않던 침착한 벨라 언니조차 크게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언니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야 했다.
“조용히 해, 언니! 이건 언니만 알아야 하는 거야.”
줄리앙과 나는 상의 끝에 다음 주 토요일에 우리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6월 27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줄리앙은 어디서 어떻게 듣고 안 것인지, 내 생일을 언급하며 그날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마침 ‘마법의 여름’에 있을 손님맞이를 위해 리버런 섬에 체재 중이던 벨라 언니도 그다음 주면 오를 공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기에 토요일은 딱 좋은 날이었다.
“그냥 오늘 하면요? 오늘이라고 해도 벨라 언니랑 유모는 충분히 올 거예요.”
결혼식을 위해 특별히 우리가 할 준비는 없었다. 난 벨라 언니와 어려서부터 날 키워 준 유모, 그리고 날 가장 따르는 막냇동생 마리안느, 단 세 명만을 부르기로 했다.
베스 언니는 잠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있었고, 제인은 격렬한 반항기에 들어가 결혼식보다 바쁜 일이 많으니 초대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벨라 언니, 유모, 마리안느, 이 셋은 우리가 결혼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일종의 증인이 될 것이었다.
줄리앙은 제가 가진 옷 중 가장 멋진 옷을 입기로 했다. 난 글쎄, 이제 와서 화려하고 비싼 웨딩드레스를 몇 벌이나 입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름다운 드레스야 언제든 지어 입을 수 있다. 로즈몬드와 함께 살 때는 늘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주문해 입었다. 몇백 벌의 옷과 보석으로 날 감싸고 사람들에게 날 내보였었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이젠 그런 욕심은 사라졌다. 그냥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도 좋다고 하자, 줄리앙은 다시 한번, 내게 청혼하던 그날 입었던 그 연푸른 드레스를 입고 와 달라고 했다.
“왜요? 왜 그렇게 그 옷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 옷을 입을 때 당신 모습이 제일 예쁘고 귀여우니까요.”
“지금은요? 지금은 안 예뻐요?”
줄리앙은 쿡쿡거리며 말했다.
“예전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왜 그렇게 묻나 싶었는데, 이젠 정확한 답을 알고 있지요. 레아, 그 옷도 예쁩니다. 당신은 무슨 옷을 입어도 예뻐요. 다만, 내가 그 옷을 입은 당신을 유독 더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예전이라니, 또 어떤 여자가 이런 식으로 질문했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말까지 하면 너무 질투하는 것 같아 보일까 나는 입을 닫았다.
“좋아요. 그럼 진짜로 지금 당장 해도 돼요. 바로 갈아입고 올 수도 있는걸요.”
“당신이 이렇게 결혼식을 서두른다는 것은 꽤 고무적이군요. 나도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지만 제 쪽에서도 누군가 증인이 될 사람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맞다. 그러네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요.”
“사과하실 건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럼 다음 주 토요일까지 도착할 수 있게 내가 서둘러 사람을 부르고, 그동안 이것저것 결혼식 준비를 하면 되겠군요.”
“그래요. 난 그럼 그동안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 결혼식을 안 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까를 좀 고민해 볼게요.”
“수도에서 여왕님께 결혼증명서의 인장을 받을 때에만 함께 동행해 주십사 하면 되지 않을까요?
줄리앙의 어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셨다. 줄리앙은 형제 하나 없었다. 직계가족만 초대하려고 든다면 줄리앙에겐 아무도 초대할 사람이 없다. 일족을 다 초대한다면, 왕족이 연관되어 있는 만큼, 왕국의 커다란 행사가 될 것이다. 이런 커다란 행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피하고 과정을 간소화하려 드는 귀족들 사이에는 최근 여왕님께 결혼증명서의 인장을 받는 월례 행사에 부모와 결혼 당사자만 함께 참석하여 여왕의 결혼 승인을 받고, 결혼식이라는 절차를 아예 생략하는 경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후작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런 간소한 절차가 오히려 명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 같은 허세 가득한 권위적인 사람이라면 딱 좋아할 행사이다.
“그래요. 그거면 아버지도 만족하시겠네요. 우린 또 우리만의 결혼식을 하면 되고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 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언제쯤 아버지를 찾아가면 좋을까를 고민해 봤다. 친아버지이긴 하지만, 내겐 리버런 공을 만나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줄리앙이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내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레아, 걱정하지 말아요. 리버런 공에게는 내가 말하면 됩니다.”
“고마워요. 사실 그 편이 낫긴 할 거예요. 아버지는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그럼 난 뭘 하면 되죠? 줄리앙 당신한테 다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당신이 다 할 때가 있으면 내가 다 하는 때도 있는 거죠. 결혼 생활이 그런 거예요. 지금은 일단 이걸 받고 읽어 주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줄리앙은 내게 계약서 한 장을 주었다. 그 안에는 내가 말한 모든 요구사항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장에는 줄리앙의 서명과 함께 레날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거기 당신 이름을 함께 적어 줘도 좋고.”
줄리앙은 말을 덧붙였다.
“좋아요. 그런데 줄리앙, 나 혼자만 너무 요구하는 게 많은 불공정거래 같지 않아요? 당신이 원하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잖아요. 내게 더 부탁할 건 없나요?”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 안에는 뭔가 할 말이 가득 있어 보이는데, 그 말들이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그는 한 걸음, 내게 다가오더니 훤칠한 몸을 숙여 내 볼에 저의 따뜻한 볼을 대고, 커다란 손으로 등을 감싸 주었다. 그러고는 토닥토닥, 천천히 내 등을 쓸듯이 만져 주는 것이다.
커다란 나무가 허리를 구부려 작은 갈대나, 들꽃 줄기를 안아 주듯이, 그렇게 요상스럽게 정다운 행동이었다.
“레아, 당신에게 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건강히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안아 주면, 귀찮아하지 말고 날 받아 주십시오.”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안아 주었던 것처럼요?”
“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안아 주었던 것처럼요.”
그에게 그렇게 이상한 모양으로 안겨 얘기하는 동안, 나도 천천히 그의 등에 손을 올려, 그를 토닥거려 주었다.
“매일 밤 산책도 하고요?”
“비가 오거나 춥지 않으면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몸을 떼서 나를 보고 다시 예의 그 근사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다. 매일 티타임과 그 후 산책 때마다 그와 함께하긴 했지만, 결혼을 앞둔 우리 두 사람 주변에는 끼어드는 리버런들이 너무 많았기에, 단둘이 있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 스킨십이라고 해 봤자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잠깐씩 손을 잡고 걷는 정도였다. 줄리앙과의 첫날 밤 이후, 그와 다시 잘 기회는 없었다.
이 몸으로는 첫 경험이란 사실을 깜빡한 까닭에 난 모든 걸 완전히 속이진 못했다. 유모는 시트를 수놓은 핏자국이, 이르게 시작한 달거리 때문이라는 내 변명을 믿어 주는 척했지만, 그 후로는 괜히 밤늦게까지 내 방에 머물며 레아 아가씨 결혼하시기 전에 더 함께해야 하는데, 하면서 괜히 눈시울로 앞치마를 적시고는 했다. 나이 든 유모의 입장에서는 아직 결혼식도 치르지 않은 내가 첫날밤을 먼저 치렀다는 것이 걱정되었음이 틀림없다. 유모는 그때부터 줄리앙을 볼 때면 괜히 눈초리가 이상해지곤 했으니까 말이다.
새벽에 몰래 들어오라고 줄리앙을 부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대로 결혼식 준비 탓에 바쁜 것 같았다. 올리브 나무가 우거진 화원에서 단둘이 만나 안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왜 그런지 결혼식 전엔 절대, 그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게 당부했다.
“뭘 꾸미고 있는 거예요, 줄리앙?”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거요.”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런 결혼식을 했으면 좋겠다 하는 거 말이오.”
“글쎄, 사실 예전엔 막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생각해 본 적도 있어요. 아침이나 점심이 아니라 저녁때쯤 했으면 좋겠다는 거랑, 라벤더 숲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거. 수국으로 만든 부케가 있으면 좋겠고, 수풀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걸으면요, 저기에는 꽃들을 엮어 만든 아치가 있는 거예요. 아, 예전엔 일기장에 그림으로 그려 놓기도 했는데, 그게 어딨는지 몰라요. 그 앞에 나랑 당신이 서고, 우리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옆에 있고…….”
“음악은요, 레아?”
“글쎄요. 시답잖은 시나, 유행가 말고 누군가 멋진 음유시인이라도 와서 벤조를 치거나 하프를 켜며 고대어로 된 노래를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달밤이랑 어울리잖아요? 근데 신경 쓰지 마요. 줄리앙.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겠어요?”
“그건 당신 말이 맞습니다. 기한이 일주일이라면 그런 사람은 데려오기 힘들지요. 어쨌든 당신은 결혼식 때 읊을 서약서를 하나 써 주십시오.”
“당신 것은 당신이 쓰고요?”
“물론이죠.”
“내가 좀 봐도 되나요?”
줄리앙은 실실 웃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그게 우리 둘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고, 그 후로는 계속해서 가족들과 함께, 언니들과 함께할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유모와 마리안느에게는 결혼식 전날 밤이 되어서야 통보했다. 두 사람 다 그렇게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었기에, 그 전에 말했다가는 어디로 소문이 퍼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마리안느는 무슨 옷을 입으면 좋으냐고 울상이었지만, 줄리앙은 마리안느가 그런 고민을 할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마리안느의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하나 선물했다. 귀여운 공주님 같은 크림색 공단 드레스에, 연분홍색 리본으로 허리를 묶은 마리안느는 완벽한 화동이었다.
결혼식 당일, 나는 예의 연푸른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올려 묶었다. 줄리앙은 동관에서 올리브 나무 화원으로 이어지는 출구로 나를 데리러 나왔다. 저녁 만찬이 끝난 야심한 시간이었다. 통로에는 밀랍 양초가 곳곳을 은은히 수놓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줄리앙은 무슨 내가 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난생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감명받은 표정이었기에 내가 다 뭉클했다.
그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커다란 사파이어가 그 중심에 장식되어 있고, 작은 블루다이아몬드들이 알알이 박혀 있는 티아라를 내 머리에 얹어 주었다. 유모가 해 준 올림머리에 완벽히 어울리는 왕관이었다.
“왕가의 보석이요. 오늘 막 도착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요.”
“당신 머리 위에 얹으니 진정 그렇습니다.”
줄리앙은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고, 내 손을 잡고 화원까지 에스코트했다. 마리안느가 앞장섰고, 유모와 벨라 언니가 뒤따라왔다. 드디어 출구 문을 열고 올리브 화원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내가 마리안느처럼 어렸던, 열두 살, 열세 살 소녀 시절부터 꿈꿔 오던 모든 것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