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 다시 처음으로
줄리앙 레날 공작은 여왕의 성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왕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부르는지 대강 알아서였다. 결혼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한 왕국의 수장이었지만, 줄리앙의 이모이기도 한 여왕은 요즘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줄리앙을 결혼시키는 것이 자신의 지상 최대 목표인 듯 굴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폐하의 여동생, 그러니까 제 모친께서는 그리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진 않았습니다.”
“그거야 자네 생각이지, 줄리앙. 부부 일은 부부 둘밖에 모르는 거라네.”
“그 결혼 생활을 십 년 정도 지켜본 자이며 그 부부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바로 저 아닙니까?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제가 가진 정확한 정보입니다.”
줄리앙의 아버지는 강한 무인이었고, 매정한 남자였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왕가의 후손이었고,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타입이었다. 둘의 조합은 악몽 그 자체였다.
줄리앙은 어린 시절 내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보고 자랐다. 한마디로 설명하면 매일 다정하게 안아 달라고 졸라 대는 여자와, 한결같이 그 여자를 무시하느라 바쁜 남자의 결혼 생활.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독하게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팽팽히 대립했다. 둘 모두 줄리앙에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걸 지켜보며 그가 내린 결론은 결혼을 하지 말자, 해도 자식을 낳아서 나처럼 키우진 말자, 꼭 해야 한다면 최대한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줄리앙 자네까지 그런 결혼 생활을 할 거라는 법은 없잖은가? 내 아직 자식이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네.”
“외람되오나, 폐하, 굉장히 오래 사실 것 같은데요.”
“군말 말고 이거나 보게.”
여왕이 내민 것은 그림이었다. 아주 솜씨 좋은 화가가 그린 귀족가의 한 영애의 초상화이다. 바람이 불면 아름답게 나부낄 탐스러운 금발을 위로 올리고, 에메랄드가 박힌 티아라를 하고는 황록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그 여자는 어느 명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제법 미인이군요.”
“제법 미인이라니, 사랑하는 조카여, 왕국 최고의 미녀에게 그런 평가는 너무 냉혹하군.”
이사벨라 리버런. 그림 밑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 여자가 아름답다고 해서 결혼에 대한 줄리앙의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어때? 마음이 좀 동하는가?”
“네, 조금은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폐하. 이미 어제 변방백에게 연락이 와 다음 주부터 남쪽 군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친애하는 조카여, 내가 그 정도 계획을 번복 못 시킬 권력자로 보이는가?”
“이번에는 꼭 가야 합니다. 3년입니다. 3년 후에 다시 불러 주십시오. 그때는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일단은 미뤄 두기로 했다. 3년 후에는 또 다른 핑계가 생길지도 모른다. 폐하가 그새 뒤늦게 잉태라도 하면 줄리앙에게 오는 부담은 더 적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줄리앙은 남쪽으로 떠났다. 3년은 쉽게 흘렀다. 다시 돌아온 줄리앙은 또 한 번 왕궁으로 불려갔다. 변방에서의 성과를 축하하며, 여왕은 리버런으로 가 네 번째 리버런을 만나 볼 것을 명했다.
“석 달 동안의 휴가를 줌세. 리버런 섬의 여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지. 그곳에서 놀고 먹고 마시며 쉬게. 여름이 끝날 무렵, 결혼 소식을 가지고 내게 오게나.”
“폐하,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제게 결혼을 권하시는 겁니까?”
“레날 공작, 권하는 게 아니라네. 명하는 것이야. 리버런 섬으로 가게.”
이번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사벨라 리버런은 이미 결혼한 터였고, 리버런 섬에는 다른 딸들이 줄줄이 넷이나 더 있었다. 언제든 가야 할 섬이었다. 여왕은 어떻게든 리버런가와 줄리앙의 혼인을 성사시킬 셈인 것이다.
줄리앙은 밭에 끌려가는 소처럼 의욕 없이 리버런 섬으로 향했다. 함께 리버런 섬으로 향하는 남자 둘은 어디서 저런 시답잖은 놈들을 데려왔나 싶게 한심했다. 여왕은 일부러 저런 놈들을 데려왔을 것이다. 리버런의 딸이 줄리앙을 선택하게 하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까지 셋, 그중에 제 짝을 골라야 하는 리버런의 넷째 딸의 사정도 퍽이나 딱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막 지어진 터였다. 줄리앙은 말을 타고 리버런 섬으로 들어갔다. 세 남자가 묶게 될 별채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창문을 열면, 라벤더 숲이 펼쳐져 있었고, 뒤쪽으로는 베롱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아름다운 벤치에서 책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방 안의 서늘한 공기와 어울리는 따뜻한 나무 바닥으로 지어져 있고, 고급 카펫이 깔려 있어 여름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았다.
별채 안에는 리버런 공의 장서를 모아 놓은 도서관도 있었는데, 수도에서는 찾기 힘든 고서들이 많았다. 이 도서관은 오로지 별채에 묵는 손님들과 리버런 공 자신에게만 개방되어 있다고 하니, 아깝기 이를 데 없었다.
저녁 무도회가 되어서야, 줄리앙 레날은 네 번째 리버런, 레아델피나 루이스 리버런을 만났다. 그 옆에는 3년 전, 줄리앙이 변방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결혼했을지도 모르는 왕국 최고의 미녀, 이사벨라 리버런이 서 있었다. 다른 쪽에는 레아 리버런의 동생인 듯 보이는 어린 소녀가 서 있다. 둘 모두 황금색이 섞인 녹색의 오묘한 눈동자였다. 그 둘 사이에 있는 레아 리버런 혼자만 어둠 속에서도 혼자 빛날 듯, 깊고 반짝이는 잿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둘 사이에서 레아 리버런의 장난기 가득한 눈은 확 튀었다.
‘언니와는 좀 다르게 생겼군.’
언니같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미인은 아니었지만, 제법 매력이 있었다. 눈동자 색은 빛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고, 커다란 눈과, 조그마하고 도톰한 입술이 짓는 표정들은 다채로웠다. 동그랗고 탐스러운 뺨은 앳된 빛으로 붉게 빛났는데, 가녀린 몸과는 달리, 살짝 포동포동한 게 한번 슬쩍 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줄리앙은 볼록 튀어나온 이마며, 예쁜 붉은색을 한 입술이며, 눈매며, 이 여자의 모든 곳에 자신만의 고집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로 만났으면 아주 좋았을 것이다. 줄리앙은 제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결혼 상대로서는 아니었다. 저런 애랑 결혼을 한다고? 줄리앙 레날은 코웃음을 쳤다.
무도회가 한창이었지만 줄리앙은 뒤로 빠져 있었다. 어차피 같이 온 두 놈이 리버런의 영애들과 실컷 춤을 춰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적적할까 싶어 함께 데려온 친구 에드몽이 줄리앙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어때? 결혼하러 온 소감은?”
에드몽이 물었다.
“글쎄. 언니 쪽이 훨씬 예쁘군. 저 회색 눈은 뭐야.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생겨서는 성격도 꽤 있을 거 같은데?”
“뭐, 이사벨라 리버런이야 왕국 최고의 미녀긴 하지. 그래도 레아 리버런도 꽤 미인 아닌가? 무엇보다 저 눈이 매력적이군그래. 크리스틴만 없었더라면 나도 반했겠다 싶은걸?”
크리스틴과 에드몽은 곧 결혼할 터였다. 크리스틴은 그리 예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지적이며 품위 있는 여자였다. 줄리앙은 일단 친구의 여자를 추켜세워 주었다.
“반하긴. 크리스틴 쪽이 훨씬 낫지. 저 여잔 너무 말랐어. 허리는 기형적으로 가늘고. 아마 저 예쁜 드레스를 입겠다고 며칠을 굶었겠지. 키만 껑충하게 컸지 아직 어린앤데 말야.”
줄리앙은 그녀가 좀 안쓰럽기도 했다. 본인이 그렇듯이, 레아 리버런 역시 좋아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 역시 아직 스물둘밖에 되지 않았지만, 레아는 더 어렸다. 열일곱이면 왕국에서는 결혼적령기라고 한다. 귀족 가문들은 빠르면 열넷, 열다섯부터도 결혼을 진행했다. 줄리앙은 왕국의 결혼적령기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는 이제 막 엄마 품에서 떠나온 소녀일 뿐이었다. 부모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나이였다.
“그래도 매력은 있지 않은가? 나이가 들수록 더 엄청난 미인이 될 거야.”
“누가 매력이 없다고 했어? 예쁘기야 지금도 예쁘지. 근데 내 타입은 아니라는 말이야.”
“자네 타입은 어떤 여잔데 그러나?”
에드몽이 물었다.
“글쎄. 사실 그런 거 정해 둔 적 없어. 지금으로선……. 음, 나처럼 적당히 손익계산이 되고, 아름답지만 매정하고 똑똑하면서 좀 멍청하기도 한 여자? 그래서 공작부인 자리에 만족하고 사교계에 드나들며,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좋겠지. 부부 생활에도 큰 미련이 없고 말이야.”
줄리앙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성정은 선대 레날 공작, 그러니까 아버지와 닮은 것 같았다. 그는 어머니처럼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불행한 여자를 하나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나, 부부나 이런 것에 큰 미련이 없고 계산적인 여자와, 언젠가 꽤 늦은 시기에 결혼해서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며 저택의 끝과 끝, 제일 먼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사는 관계, 그것이 줄리앙이 그리는 이상적인 결혼 생활이었다.
“왜. 저 여자는 그래 보이지는 않는가?”
“눈만 봐도 자기 고집이 있어 보이잖나? 자기 생각이 확고한 여자야. 저런 여자를 데려다 불행하게 만들긴 싫어.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꼴통 같은 리버런 공작의 영애와 결혼의 연을 맺기는 싫네. 아주 천박한 사람이야. 일곱 딸을 팔아먹으며 제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는 남자 아닌가.”
줄리앙의 말에 에드몽은 얼굴을 찡그리며 동의의 제스처를 했다. 그 순간, 누군가 줄리앙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뒤를 돌았더니 키만 껑충하고 지나치게 마른, 하얀 얼굴에 잿빛 눈을 한 여자가 등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레아 리버런이었다.
줄리앙은 당황한 빛을 얼른 감추었다. 얼굴색을 감추느라 바쁜 것은 줄리앙 혼자만이 아니었다. 레아 역시 씩씩거리는 숨결을 감추고, 단호해 보이는 입매를 살짝 위로 올려, 살짝 미소를 보인 채 고개를 끄덕여 작게 인사를 했다.
“레날 공작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듯하네요.”
“레이디 리버런, 좋은 밤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