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미스터리 소설과 로맨스 소설 사이에
다음 날 아침, 레아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하십니까?”
줄리앙이 물었다.
“아프긴요. 잠을 못 자서 그래요. 누가 가져다준 책 때문에.”
“벌써 다 읽으셨습니까?”
“‘제국의 암살자’만요. 와, 범인이 제독일 줄은 정말로 몰랐어요. 지금은 ‘수도원 살인사건’을 읽고 있어요.”
“재밌게 읽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수도원 살인사건’의 범인도 좀 예외긴 하죠.”
“악, 말하지 마요! 아직 읽는 중이란 말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레오나가 죽인 거 같은데 맞아요? 아니면 마틴 신부? 그것도 아니면 제이콥?”
줄리앙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아니 저 똑똑하고 말 잘하는 여자가 미스터리 소설 애독자라더니 어쩜 저렇게 범인이 아닌 순서대로 등장인물을 이름을 읊는 걸까 싶었다.
레아는 줄리앙의 웃음에 금세 뾰로통해져서는 내일까지 다 읽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줄리앙은 레아를 붙잡고, 자신에게도 소설을 한 권 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레아는 잠시만요, 하고 바로 응접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와당탕, 하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난 걸 보니 급하게 뛰어가다 어디 부딪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이제 자리를 떠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에야 레아는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요.”
레아가 내민 것은 무려 열 권이나 되는 소설이었다.
“이걸 다 직접 가지고 오신 겁니까?”
“그럼요.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고요. 이거는 주인공이 엄청 잘생겼는데요. 저는 잘생긴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 좋거든요.”
레아는 끊임없이 재잘대며 소설 이야기를 했다. 말할 때마다 뾰족하게 들린 입술이 요렇게 저렇게 동동 떠서 움직이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줄리앙은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 줄리앙의 상황을 알 턱이 없는 눈치 없는 레아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실 레아는 줄리앙이 오기 전에 앙투안과도 잠시 책 이야기를 했었다. 끊임없이 시를 읊어 주려 하길래 몇 권 읽어 본 시인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레아의 말을 뚝 자르고는 제 할아버지의 시가 엄청나게 유명하다는 둥 자기가 무슨 시인과도 밥을 먹었다는 둥, 순 제 얘기만 했다. 앙투안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와 나누는 대화가 재밌지는 않았다. 줄리앙의 경우는 좀 달랐다.
다음 날, 줄리앙은 레아가 빌려준 책 중에 무려 세 권을 다 읽고 왔다.
“특히 아슬란 제국의 공주 이야기가 재밌었습니다.”
“아, 그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정말입니까? 하긴, 공주 이름이 당신 언니 이사벨라와 같더군요.”
“성격도 좀 비슷한 거 같죠? 저는 특히 좋았던 장면이요―.”
“혹시 그 장면 아닙니까? 공주가 도망가는 범인한테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요.”
“어, 맞아요!”
두 사람은 그 장면을 두고 한 시간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이야기에서만큼은 둘은 싸울 일이 없었다.
“줄리앙, 당신은 얘기를 들어 주는 건 선수인 거 같아요.”
“레아, 당신은 얘기를 하는 데에는 선수고요.”
줄리앙이 맞받아치자, 레아가 눈을 흘겼다.
“농담이 아니라, 전 사실 말을 잘 안 하는 편이라서요. 당신이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습니다.”
줄리앙이 이렇게 덧붙였다.
“저랑 싸울 때는 말만 잘하던데요?”
“그건 좀 잊어 주면 안 됩니까?”
레아가 입을 삐죽거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럼 한 권 더 얘기해 드릴까요?”
레아의 끝없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자리를 파하기 직전에 줄리앙은 레아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많이 읽으면 한 권 써 보는 건 어떻습니까?”
범인 알아맞히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듯 보였지만, 술술 줄거리를 말하는 솜씨를 보니, 레아는 소설을 써도 꽤 잘 쓸 것 같았다.
“글쎄요. 저도 언젠가는 쓰고 싶어요.”
“쓰면 되잖습니까. 지금.”
“쓸 수야 있죠. 사실 습작해 놓은 작품도 몇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읽어 주지 않잖아요. 책으로 낼 수도 없고요.”
“책으로 내는 거야 잘 알아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줄리앙, 난 여자예요. 여자는 책을 낼 수가 없어요.”
“여왕님께서도 여자인데 말입니까? 누가 그럽니까?”
“글쎄요. 법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렸을 때, 나중에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가 여자는 책을 낼 수 없다고 하셨죠.”
“레이디 리버런,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내가 당신 아버지를 좀 욕해도 됩니까?”
레아는 쿡쿡 웃었다. 첫날 제 아버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줄리앙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로 여자가 책을 내는 건 힘들 거예요. 아무 데서도 내 주지 않을걸요. 일단 결혼하고 나면 더 힘들 거고요. 자신의 부인이 책을 써서 내겠다는 데에 찬성해 주는 남자는 없을 거예요.”
“나라면 대찬성인데.”
“모두가 공작님처럼 선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다들 저마다 자기가 정한 선을 지키고 살죠.”
레아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기에 줄리앙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레아, 그건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둘 다요.”
“참나. 아무튼, 그럼 이렇게 합시다. 당신이 소설을 쓰면 내가 내 이름으로 내 주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공작님 이름으로요?”
레아는 황당하단 듯이 그렇게 물었다.
“그럼 괜찮지 않습니까? 뭐 돈이 생기면 떼먹지 않고 당신에게 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나중에 당신이 진짜 작가라는 걸 밝혀도 되고.”
그렇게 말하고 줄리앙은 레아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당신 부인이 반대하실 텐데요, 줄리앙.”
“그거야 뭐 어떻습니까. 전 결혼할 생각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뒤늦게 결혼할 수도 있으니 빨리빨리 쓰면 되겠습니다.”
능청스럽게 레아를 재촉하는 줄리앙의 모습에 레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풉, 하고 레아가 웃음을 참다 말고 터뜨릴 때마다, 가뜩이나 동그란 볼이 새끼 복어처럼 더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이 쏙 빠지면서 귀여운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이는 모습에 줄리앙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웃음을 보고 싶어서 줄리앙은 자꾸 실없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아니면 우리 둘이 결혼하지요. 남편의 반대도 부인의 반대도 없을 것 아닙니까?”
“지금 저한테 청혼하시는 건가요? 인생 첫 구혼을 당신 같은 사람한테 받다니 정말 최악이네요.”
레아의 과장된 몸놀림에 두 사람은 다 같이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줄리앙이 다시 말을 꺼냈다.
“농담이 아니라, 레아 우리 둘이 결혼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은 당신 글을 쓰고, 난 내 일을 하고, 그럭저럭 괜찮지 않습니까?”
“됐어요. 당신은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사랑, 사랑, 왜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타령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요.”
“또 재수 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줄리앙, 당신한테는 사랑이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그건 내가 글을 쓰는 거나 당신이 뭔지 모를 당신 꿈을 이루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에요.”
“꼭 사랑을 해 본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레아.”
“책으로는 많이 봤으니까요. 안 되겠어요. 이번에는 궁정 로맨스 소설이나 실컷 빌려드려야겠네요. 당신보다는 내가 더 사랑을 해 볼 확률이 높겠죠. 줄리앙, 아무렇게나 청혼하지 말아요. 정말이지 당신은 완전 애예요.”
“내가 진짜로 당신에게 청혼한다면요?”
“꺼져요.”
퉤, 하고 레아는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줄리앙은 자지러지면서 웃었다. 둘은 농담을 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줄리앙은 레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정말로 로맨스 소설을 빌려 달라고 레아 방까지 따라왔다. 한참을 고르고 골라 빌려주었더니 다음 날에는 눈이 빨개져서는 와서 이런 걸 빌려주는 게 어딨느냐고 하소연을 했다. 밤새 읽고 운 모양이었다.
“어디 이제 좀 사랑이 중요한 거 같아요?”
레아는 샐쭉 웃으며 줄리앙에게 물었다. 줄리앙은 빨개진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내 생각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정말 난 사랑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지 제대로 슬픈 걸 골라 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