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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야기 (25/48)

25. 이야기

줄리앙의 시선이 레아의 입술로 향했다. 입술보다 그의 손이 먼저 올라갔다. 레아의 작은 얼굴 옆으로 그의 커다란 손이 올라가고, 손끝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레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다시 한번 회장의 문이 열렸다. 레아와 줄리앙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들짝 놀라며 멀리 떨어졌다. 리버런 공과 그의 딸들이 몰려왔다.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등장했다.

무도회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모두가 오늘의 주인공인 리버런가의 넷째 딸의 미모와 그 아름다운 드레스를 칭송했다. 같은 말을 해도 꼭 기분 나쁘게 말하는 재주가 있는 혹자가 이사벨라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는 일도 있었다.

“당신이 왕국 최고의 미녀라고 하던데 이제 와서 보니 그건 당신보다 당신 동생, 레아 리버런에게 더 어울리는 말 같군요.”

“제 동생에 대한 안목 있는 칭찬, 감사합니다. 부디 동생이 칭찬한 사람의 인품을 생각하지 않고 내용만을 기분 좋게 받아들여 그 진심에 기뻐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이사벨라는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그렇게 넘겼다. 무도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욕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고 허허 웃으며 물러가는 사람도, 무례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앙투안은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던 날 지난밤에 앙투안이 리버런 섬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누군가의 증언이 있었다. 그래도 별채에서 함께하며 조금 친해진 참인데 왜 언질 하나 없이 그렇게 황급히 떠났는지 모르겠다며 로즈몬드 백작이 투덜거렸다.

그 말이 나왔을 때쯤, 레아와 줄리앙은 제법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있었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웃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로즈몬드 백작은 별 이상한 사람들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도회 내내 줄리앙의 시선은 레아만을 좇았다. 레아도 사정은 비슷한 모양이었던지 두 사람의 눈은 자주도 마주쳤다. 하지만 결국 무도회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까지 두 사람은 둘만의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입을 맞출 기회도 더는 얻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레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찬이 진행될 접객실 테라스로 갔다. 본관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어 다른 건물보다 지대가 높았고 4층의 접객실 테라스에서는 리버런 섬의 광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아름다운 리버런 섬의 모습을 조망하며 아침을 먹고 있는 내내, 레아는 풍경이나 음식보다는 줄리앙이 언제 오나만 신경 쓰고 있었지만 줄리앙은 끝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후 티타임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아는 슬슬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난다기보다 마음이 답답했다. 결국 제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을 참지 못한 레아는 벨라 언니를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벨라 언니는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내가 너무 빨리 간 걸까?”

벨라 언니는 대답 대신에 계속 실실 웃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세 살 어린 동생, 레아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언니 빨리 뭐라고 말 좀 해 봐. 줄리앙은 왜 오늘은 안 나타난 거지? 내가 너무 경솔하게 굴어서 내가 싫어졌을까?”

“구혼자들이 꼭 여기 와서 조찬이나 티타임에 참석하라는 법은 없잖니. 별채에서 혼자 먹고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니?”

“그야 그렇지만 줄리앙은 첫날 이후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여기 와서 나랑 같이 아침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랬단 말이야. 어떤 때는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아침을 먹고 같이 얘기를 하다가 또 바로 차를 마시러 가고는 했는걸.”

“레날 공작님께서 너에게 아주 푹 빠지시긴 한 모양이구나.”

“그게 바로 내 말이야.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내가 어제 자기한테 입도 맞췄는데 왜 갑자기 안 오냐고!”

레아는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지 로즈몬드도 불참하고 앙투안도 없는 이곳에서 레아의 말을 들을 사람은 하인들 정도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벨라 언니는 쉿! 하고 목소리를 줄이라는 시늉을 했다.

“우리 동생님께서 아주 애가 타는 모양이구나. 너도 줄리앙을 많이 좋아하는 거지?”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뽀뽀를 했겠어?”

뾰로통해져 있던 레아의 얼굴이 갑자기 발그레해졌다. 입을 맞췄던 순간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어디 한번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보지 그러니. 마침 저기 에드몽 백작이 와 있구나. 백작님!”

레아가 말릴 새도 없이 이사벨라는 발 빠르게 에드몽에게 다가가 줄리앙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레아는 제가 궁금해하는 것이 들킬까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다. 에드몽이 레아가 언니 품에 숨어서 몰래몰래 자신을 쳐다보며 줄리앙의 행방을 궁금해하더라고 말을 전할 눈치 없는 위인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에드몽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소식은 뜻밖이었다.

“아, 줄리앙 그 친구요. 감기가 심하게 걸렸지 뭡니까. 무도회 전날까지 비가 많이도 왔잖습니까? 그 친구, 무슨 생각인지 그렇게 비가 오는데도 굳이 라벤더 숲에 나가겠다고 하고 이틀 연속을 그곳에 다녀왔거든요. 저러다가 감기라도 걸리겠다 싶었지만 워낙 건강한 친구라 말리질 않았어요. 그랬더니 오늘은 열이 아주 심하게 올라서, 원.”

에드몽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레아는 접객실을 나섰다. 레아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 이사벨라가 레아의 이름을 불렀을 때쯤엔 레아는 이미 저만치 1층까지 내려가 있었다.

발끝까지 오는 드레스 자락을 양손에 쥐고 레아는 빠른 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별채로 향해 봤자 줄리앙이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차를 마실 것도 아닌데, 어차피 방에서 끙끙 앓고 있느라 나오지도 못할 텐데 왜 자신이 그곳으로 향하는지, 제 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레아의 두 발은 레아를 별채로 신속히 옮겨 놓았다.

종종거리던 걸음은 어느새 더 빨리, 더 빨리 바뀌고, 레아는 종국에는 거의 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다 멈추자, 그곳은 별채 앞도 지나 아주 줄리앙의 방문 바로 앞이었다. 레아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방문을 열었다.

레아 리버런, 한 공국의 공녀가 남자 손님의 방문을 불쑥 열고 나타나다니, 방 안에 있던 줄리앙의 하인은 황당할 노릇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줄리앙 역시 하인과 레아가 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가 깜짝 놀라 버렸다. 놀란 가운데서도 생각지도 못하게 레아의 얼굴을 다시 보니 기분이 좋기는 했다. 줄리앙의 입술 틈새를 비집고 작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미소가 채 제자리를 공고히 하기도 전에 입꼬리는 다시 바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레아 리버런, 얼굴에 난 그 상처는 뭡니까?”

그러고 보니 레아의 볼에는 살짝 긁힌 자국이 있었다. 크림색 장미꽃에 새벽에 내린 빗방울 두어 개가 떨어져 있는 것처럼 그 하얀 볼에는 물방울이 몇 개 송골송골 맺혀 있어 상처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너무 작아 줄리앙이 그걸 어떻게 단번에 발견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상처였지만, 막상 거기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조금 아프긴 했다.

“아, 이거요? 뭐지? 아까는 없었는데? 아! 아마 여기 달려오다가 나뭇가지에 긁혔나 봐요!”

줄리앙은 황당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당신이 지나가는 곳곳마다 사고군요. 한시도 눈을 뗄 틈을 안 주시는군요.”

“아프다는 소식 듣고 달려오느라 그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감기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줄리앙의 목소리는 다 쉬어서 평소보다도 더 낮게 깔려 있었다. 얼굴도 열이 심한 모양인지, 등불에서 새어 나오는 딸기색 빛이 비쳐서 그런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늘 레아를 쳐다보며 익살맞게 휘어지던 까만 눈동자도 그 총기를 반쯤 잃고 몽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어깨도 축 처져 있는 통에 평소에는 아주 커다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 오늘 보니 웬걸, 밥도 잘 못 얻어먹고 다니는 마른 십대 소년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감기도 아픈 거죠. 감기가 제일 아파요. 밥은 좀 먹었어요?”

“볼이나 좀 닦아 내고 상처나 좀 치료합시다.”

“지금 내가 문제예요?”

“그럼요. 그게 제일 문제죠.”

그렇게 말하고는 줄리앙은 여기 좀 앉아 보라면서 침대 맡을 툭툭 쳤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외간 남자의 침실에 막 앉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레아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자 줄리앙은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레이디 리버런. 기세 좋게 제 방에 쳐들어오셨으면서요.”

줄리앙의 말을 듣자 제가 생각해도 자기 모습이 우스웠는지 레아도 같이 웃고 말았다. 레아가 침대 맡에 조심스럽게 앉자 줄리앙은 몸을 일으키고 하인이 가져다준 부드러운 재질의 손수건으로 레아의 볼을 살금살금 닦아 주었다. 살짝 긁힌 상처에 피가 조금 맺혔을 뿐이지만, 물에 적신 손수건이 거기에 닿자 따끔따끔해 레아는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그러자 뭔가 아주 촉촉하고 뜨거운 것이 레아의 볼에 와 닿았다.

“어제 못 한 사과입니다.”

줄리앙의 입술이었다. 그 입술은 레아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쪽, 소리를 내며 살짝 빨아들이고는 이내 제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뭐예요, 이게.”

“사과받으러 온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줄리앙은 생글생글 웃었지만, 그 얼굴은 열이 달 뜬 모양이 지금 바로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눈도 해롱해롱한 게 아주 맛이 간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그만 말하고 다시 누워요, 줄리앙.”

“괜찮습니다.”

“밥은 먹었어요?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올려야겠어요.”

“하인한테 다 시켰으니 당신은 신경 쓰지 마세요. 난 지금 당신이 제일 신경 쓰입니다.”

“알았어요. 그럼 전 돌아갈게요. 푹 쉬고 다 나으면 봐요.”

레아가 몸을 일으켜, 방문 쪽으로 돌리자, 줄리앙이 레아의 팔목을 잡았다.

“가지 마요.”

“가지 말긴요. 당신 쉬는 데 방해되잖아요.”

“가다가 또 어디에 걸려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걸 생각하는 게 더 방해됩니다. 옆에 있어요.”

응? 하고 묻는 목소리는 쉬어서인지 비음처럼 울려서 왠지 아이 같기도 하고, 응석 부리는 소리 같기도 해서 레아는 그 손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열 때문인지 팔목을 잡은 손은 뜨거웠다. 그저 손 바로 아래의 가는 팔목을 쥐였을 뿐인데 레아는 왠지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옆에 앉아 있다가 갈게요.”

“내가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데려다줄 거예요.”

“알았어요. 얼른 자요. 눈부터 감아요.”

레아는 침대 옆 한편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놓고 다시 눌러앉았다.

“재밌는 얘기라도 해 줘요.”

“재밌는 얘기요? 재밌는 이야기가 뭐 있지? 줄행랑을 친 앙투안 구엘의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줄리앙은 힘없이 낮게 웃고는 그런 얘기 말고, 레아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레아는 어제 본 로맨스 소설의 이야기며, 레아가 지금 쓰고 있는 미스터리 소설의 이야기며, 줄리앙이 빌려준 책을 다 읽었는데 또 범인을 맞히는 데는 실패했다는 이야기(여기서 줄리앙은 다시 조금 크게 웃었다.)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내 이야기도 해 줄까요?”

“어디 한번 해 보십시오.”

이제 줄리앙은 눈을 감고 반은 꿈나라로 가 있는 듯 보였다. 핏기 없는 얼굴은 창백하긴 했지만, 꽤나 평온해 보였다.

“이렇게 내가 아팠던 때의 이야기인데요. 아주 어렸을 때였어요. 열 살 때였나, 열한 살 때였나 모르겠네요.”

“아주 귀여웠겠군요.”

“네? 뭐 애들은 다 귀엽잖아요. 우리 아버지, 리버런 공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고 우리들에게 큰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우릴 내버려 둔 건 또 아녔거든요. 엄마에게는 늘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대셨지만 가끔은 우리들에게 조그맣고 귀여운 드레스를 입혀서 안고 무도회에 데려가기도 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뭘 모르잖아요. 그래서 나도 아빠를 좋아했어요. 아빠는 늘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단 한 번도 내게 칭찬 한마디 해 준 적이 없었는데, 어렸을 땐 멋모르고 그게 대단해 보였었죠. 아빠가 내 말이나 행동에 웃어 주기라도 하면 그게 그렇게 큰 상 같았어요. 아주 가끔씩 나를 데리고 놀러 가는 것도 좋아했고요.”

줄리앙은 말이 없었다. 얼핏 자고 있는 듯도 보였지만, 레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신 목소리는 조금 더 사그라들고 나긋나긋해졌다.

“언젠가 내가 아주 많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 무슨 소리가 났어요. 아빠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 같더니 내 침대 머리맡에 앉는 거예요. 자고 있지 않았지만,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지요. 자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아빠가 아셨는지 아님 몰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내 이마를 이렇게 손으로 쓰다듬어 주시는 거예요. 한참을요. 어느 틈에 잠에 들었는데, 깨고 나니 아빠는 없었어요. 그 후로도 감기에 걸릴 때마다 아빠가 또 오셔서 그렇게 해 주시길 바라면서 잠에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다시는 생기지 않았어요. 사실 아빠가 그럴 분이 아니시거든요.”

“꿈을 꾼 건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걸요. 아직도 그때 그 일이 생각나요. 왜 그때 그렇게 다정하게 제 이마를 짚어 주셨을까요? 그래서 아직도 아빠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어요. 모든 기억이 다 나쁜 기억일 뿐인데도, 그 일 하나 때문에요. 우습죠?”

레아는 줄리앙의 이마에 제 손을 대어 가며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줄리앙은 대답이 없었다. 이제 아마 자는가보다 하고 손을 이마에서 떼려고 했을 때 갑자기 줄리앙이 말을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도 당신 아버지랑 비슷했는데, 아니 어쩌면 더 나쁜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은 모리샴 왕국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와 셋이 여행을 갔다가 그곳의 어느 백작저에 묵었던 일이 있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듯이 크게 싸우셨고,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어머니를 두고 바로 백작저에서 떠나 버리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너무 화가 나서 그만, 바로 레날의 영지로 돌아오셨죠. 두 분 다 저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죠. 보름이나 지나고 나서야 하인이 저를 찾으러 왔죠. 이야기를 들어 보니 두 분 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저를 두고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더군요. 저는 그 백작저에서 이번처럼 여름휴가를 지냈던 셈이죠……. 당신 아버지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하룻밤이라도 따뜻한 적이 있었군요. 그게 부럽기도 한데……. 또 나는 당신처럼 생각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그 하루의 추억으로 어떻게 모든 일을 다 용서합니까? 레아 당신이 그런 천사 같은 마음씨를 지녔으니 나를 용서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당신은 참 사랑을 많이 받고 큰 사람처럼 밝은데, 나는 그게 참 신기합니다. 리버런 공은 복을 받았어요.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게 아름답고 착한 딸을 낳았습니다.”

쉰 목소리 때문인지, 눈을 감고 있는 저 파리한 얼굴 때문인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줄리앙이 레아는 조금 안쓰러웠다. 어린 줄리앙이 타국의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엄마 아빠를 기다릴 광경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당신도 아마 찾아보면 하나쯤 그런 추억이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있을까요? 아마 없을 거 같은데. 근데 뭐 어떻습니까. 지금 당신이 이렇게 해 주는 것, 이걸 대신 평생의 추억으로 삼죠.”

줄리앙의 뜨거운 이마에 계속 손을 대고 있자니, 바깥을 달려오느라 차가워졌던 레아의 손도 곧 미지근하게 변했다. 레아가 웃으면서 다른 쪽 손으로 줄리앙의 이마를 짚어 주려 하자 줄리앙이 눈을 잠시 뜨고 레아를 바라보았다. 길고 깊은 눈매가 깜빡깜빡하더니 서늘할 정도로 검은 그 눈이 레아를 바라보는 그 장면을 레아 역시 평생의 추억으로 삼고 싶어졌다. 아니 평생 저 눈이 저렇게 감았다 뜨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아마 더 좋은 사람들이 왔을 겁니다.”

줄리앙이 갑자기 꺼낸 말은 뜬금없었다.

“네?”

“나 때문에 저런 당신이랑은 맞지도 않은 놈들을 보내신 겁니다. 여왕 폐하께서요.”

레아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바로 답했다.

“그래도 당신은 여왕 폐하께는 아주 사랑받고 있는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당신에게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나만 아니었더라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랬으면 당신은 좋았겠어요?”

레아가 샐쭉 웃더니 눈을 흘기는 척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줄리앙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절대요, 절대요.’라고 말이다. 레아는 그 말에 다시 한번 웃더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줄리앙, 다른 모든 남자들이 당신보다 잘생겼더라도―.”

줄리앙이 말을 잘랐다.

“그런 사람은 없을 텐데요.”

레아가 또 웃었다.

“그래요. 잘생기진 않아도 다른 사람이 당신보다 더 멋지더라도, 아마 난 당신이랑 제일―.”

레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에드몽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줄리앙은 마지막 말들을 듣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졸음 역시 참을 수 없었고 레아를 계속 옆에 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때마침 들어온 에드몽에게 레아의 에스코트를 부탁하고는 바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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