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기억의 수정
다음 날 저녁만찬 때가 되어서야 줄리앙은 레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좀 괜찮아졌어요?”
레아의 말에 줄리앙은 능청스럽게도 뭐가요? 하고 물었다. 열에 들떠 조금 약해져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금은 능글맞고 짓궂기도 한 표정이 다시 등장했다.
길어진 여름 해는 저녁 만찬이 끝나고 나서도 질 줄을 몰랐다. 석양이 지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연노란색이 주홍색으로, 다시 다홍색에서 붉은빛으로 차츰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곧 땅거미가 지며 푸른 먹색으로 하늘이 제빛을 바꿀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되기 전에 서둘러 밤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분위기가 이미 이쪽으로 가 버렸다는 걸 눈치챈 로즈몬드 백작은 따라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라벤더 숲 건너편의 옥수수 밭에서는 밤바람에 사르르, 사르르, 옥수수 껍질들이 부스럭거리며 소리를 내고 흔들렸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줄리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레아, 어제 하려던 말은 뭐였습니까?”
“뭐가요?”
“다른 멋진 사람들이 와도 당신이 나를 제일 어쩌고 하다가 에드몽 그놈이 등장하는 바람에 더 말 못 하지 않았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레아의 별거 아니란 말에 줄리앙은 답지 않게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줄리앙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레아는 스스럼없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을 흔들흔들하는 레아를 멈춰 세우고 줄리앙이 그 손을 위로 들어 깍지 낀 손으로 고쳐 잡았다.
“이게 뭐예요.”
“친한 사람들끼리는 이렇게 잡는 겁니다.”
레아도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옥수수 밭도 어느새 끝나 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라벤더 숲이 저 너머로 보였다. 레아는 라벤더 숲을 뒤로하고 줄리앙을 마주 보고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줄리앙, 있잖아요. 기억은 만들어져요. 알아요?”
“네?”
“기억은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는 거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줄리앙은 레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인생 최초의 기억이 뭐예요, 당신은?”
“글쎄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다섯 살 때쯤이었나.”
“나는요. 네 살인가 세 살 때쯤이에요. 내가 눈을 맞고 있었어요. 가족 모두가 함께 바닷가에 갔었던 것 같아요. 하이얀 눈이 겨울 별자리에서 땅으로 내리면서 세상이 하얘지던 모습이 기억나요.”
“리버런 섬에도 눈이 많이 옵니까?”
“네. 추운 땅이잖아요. 원래 리버런 섬은 눈이 무척 많이 온답니다. 재작년 겨울에는 제 허리까지 쌓이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죠? 제가 태어나고 나서 열 살이 될 때까지 십 년간은 눈이 통 오질 않았었대요. 무슨 하늘의 변화인지. 열 살 때 처음 리버런 섬에 눈이 왔을 때는 자매들이 다 놀랐었죠. 난생처음 보는 눈이라고요.”
“네? 그럼 어디 다른 데에 간 기억입니까?”
“전 한 번도 리버런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걸요. 아마 눈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내가 만들어 낸 기억 같아요. 어렸을 때 어디 그림책 속에서 본 걸 내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죠. 아무튼 내겐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답니다.”
줄리앙은 불현듯 리버런 공이 자신의 이마를 짚어 주었다는 레아의 기억도 그런 종류의 가짜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은 채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줄리앙이 잠자코 있는 사이에 레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당신 어머니랑 아버지가 싸우다가 당신을 두고 갔던 이야기 있잖아요. 그거 이제 잊어요. 알았죠?”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그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레아는 눈치는 없는 편이었지만 사람의 눈빛은 잘도 읽었다. 검은 눈이 이상한 빛을 내는 걸 보고 레아는 알았다. 아직도 그에게는 그것이 상처로 기억된다는 것을 말이다.
“누가 물어봐도 대답하지 말아요. 그 기억은 그냥 없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외롭고 쓸쓸한 아이였다는 사실은 내가 기억할게요. 나 혼자만 기억하고 애처로워하고 가끔씩 슬퍼할게요. 대신 당신은 나한테 넘겨주고 잊어요.”
“그럼 뭐가 좋습니까?”
줄리앙이 작은 미소를 띠며 그렇게 물었다. 열심히 이야기하는 레아의 모습은 몹시도 귀여웠다. 벌써 스무 살이 넘은 지 오랜데, 열 살 남짓 했을 때 벌어졌던 그런 일이야 잊어버리든 말든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얘기에 마음 아파해 주고 그를 위로해 주려고 하는 저 조물조물 움직이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앞으로는 이런 거예요. 당신 아버지는 바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밤에는 꼭 시간을 내서 어머니랑 같이 밤 산책을 하곤 했던 거예요. 지금 우리처럼요.”
레아가 다시 깍지 낀 손을 공중으로 들며 말했다. 줄리앙은 그 작고,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녀린 손을 조금 더 힘을 주고 꽉 쥐었다. 레아는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가 ‘안아 줘요.’ 하면 아버지는 ‘그래요, 부인.’ 하고 이렇게 큰 키를…… 아, 아버지가 키가 크셨나요?”
“네.”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도 키가 크니까요. 자, 빨리 해 봐요. 나는 이렇게 꼿꼿이 서 있는데 당신이 그 길쭉한 몸을 구부려서 내 등을 끌어안는 거예요.”
줄리앙은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레아 쪽으로 굽혔다.
“이렇게요?”
“그래요. 잘하네요. 그렇게요.”
레아가 먼저 제 볼을 줄리앙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줄리앙의 볼은 덜 내린 열 탓인지 아직 따뜻했고, 그래서 레아의 볼이 자신의 볼에 와 닿는 순간, 뭔가 아주 시원하고 청량한 것이 닿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볼이었다.
레아는 팔을 뻗어 줄리앙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그의 긴 팔을 붙잡아 자신의 등에다 가져다 놓았다.
“자요. 얼른 안아 봐요.”
그는 엉겁결에 레아를 끌어안았다. 내밀한 접촉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따뜻한 움직임이었다. 연인들 사이의 에로틱한 포옹이라기보단 아주 막역한 사이, 많이 사랑하는 사이, 다정한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 같은 느낌이었다. 레아는 줄리앙의 등을 천천히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봐요. 이렇게 해 주신 거예요. 당신 아버지가요. 앞으로는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요. 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었다고요. 언제나 당신 등을 토닥여 주었다고요. 내가 당신 기억을 만들어 준 거예요. 알았죠?”
“……알았습니다.”
줄리앙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콱 막혀 오는 것 같은 느낌에 침을 꿀떡 삼키고는 그렇게 대답했다.
“당신도 사랑받고 큰 아이예요, 줄리앙. 그러니까 괜찮아요. 당신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어요.”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 몸에 엉켜 있는 줄리앙의 팔을 풀고 바로 섰다. 그러고는 줄리앙의 얼굴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뭐해요? 가요.”
레아가 다시 출발하자고 재촉할 때까지 줄리앙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더니 황급히 별채로 달려갔다. 레아는 뒤에서 줄리앙을 불러 보았지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여기서 바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소리치며 줄리앙은 빨리도 뛰어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헉헉대며 달려왔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그의 이마에는 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래서는 다시 열이 오르는 게 아닌가 걱정되어 레아는 아마포로 만든 손수건을 들어 그의 이마를 훔쳐 주었다. 줄리앙은 그 손을 잡더니 손등을 제 입으로 가져가 레아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레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푸른 밤에 높게 뜬 하얀 낮달같이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른 무릎을 위로 하고 꿇어앉은 그가 내민 것은 반지였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는 이 밤에도 그 반지에 박힌 보석은 선명한 빛을 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왕가의 보석이었다.
“가지고 다녔어야 했는데 깜빡했지 뭡니까.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둘만 있을지, 언제 또 내가 당신께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몰라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레아 리버런.”
“잠깐만요, 줄리앙―.”
“나와 결혼해 주겠습니까? 당신은 나보다 백배는 더 똑똑한 여잡니다.”
“천배로 해 줄래요?”
숨을 몰아쉬면서 말하는 동안에도 진지한 눈빛을 뽐내던 줄리앙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바로 레아의 주문대로 고쳐 말했다.
“그래요. 나보다 천배, 만배는 더 똑똑한 여자. 당신 같은 여자는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만 하다가 열병을 얻었습니다. 당신이 한시라도 내 눈앞에 안 보이면 걱정이 되어서 죽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종알종알 내 눈앞에서 떠드는 걸 매일 보고 싶고,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 당신이 옆에서 나를 꾸짖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니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여자고,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하지만, 난 이젠 누구에게도 당신을 양보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부디 한 사람 살리는 셈 치고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없으면 죽는다고요?”
레아는 계속 웃고 있었다.
“괴로워 죽으려고 하는 게 지금 안 보입니까?”
줄리앙 역시 웃으며 그렇게 맞받아쳤다.
“알았어요. 당신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래도 죽는 건 좀 아쉽게 잘생겼으니.”
레아는 줄리앙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어 나갔다.
“결혼, 해 주지요, 뭐.”
줄리앙은 반지를 레아의 손가락에 끼워 넣는 것조차 까먹은 듯 레아를 와락 껴안고 쾌재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았고 그 바람에 반지를 그만 땅에 떨어뜨려 두 사람은 옥수수 밭을 기어 다니며 블루 다이아몬드의 파랗고 투명한 형체를 한참이나 찾아야 했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두 사람이 동시에 발견했고 무릎을 땅에 대고 한참을 기어 다니던 두 사람은 반지를 사이에 두고 그대로 진한 입맞춤을 했다.
이번에는 살짝 입술이 닿았다 떼어진 정도의 ‘사과’가 아니었다. 줄리앙의 입술이 레아의 입술과 마주 포개졌고, 그가 가진 온기가 그대로 레아에게 전달되었다. 레아의 부드러운 입술 사이를 줄리앙의 열정적인 혀가 슬며시, 느릿느릿 침범했다. 혀는 문을 열어 달라는 듯이 톡톡, 레아의 가지런한 이를 건드리고, 그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그 속으로 돌진해 레아의 혀와 어우러져 서로 한참을 어루만졌다.
자신의 혀를 감고 한참을 입 안을 굴러가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 입술을 씹듯이 핥듯이 애무하고는 다시 한번 들어와서 그녀의 치열이며, 입 속 부드러운 곳들이며 열심히 돌아다니는 그의 부지런한 혀는 숨 쉴 틈도 없이 열심히 레아의 입 안을 탐험하다, 참다 참다 이제 한계에 이른 레아 리버런이 잠깐만요, 라고 소리치며 떼어 냈을 때야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숨, 숨을 못 쉬겠잖아요.”
“숨은 코로 쉬면 되죠, 레아.”
“아, 맞다.”
하고 레아는 다시 한번 용감히 줄리앙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이번 키스는 더 길었다. 이렇게 그들의 첫 번째 생에서의 첫 키스가 끝났다. 그리고 레아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충동과 열정을 모두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근데요, 줄리앙, 나 결혼 전에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게 뭡니까, 레아?”
“들어줄 거예요?”
“뭐든 들어줄게요. 말해 보십시오.”
“나 결혼 전에 먼저, 당신이랑 자 보고 싶어요.”